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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4장 주석
세례 요한의 죽음 (마태복음 14:1-12)
여기에는 요한의 순교에 대한 기사가 있다.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Ⅰ.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이 헤롯에게 전해진 기사.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은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 그리스도의 고향 사람들이 그의 비천함과 낮은 신분 때문에 그를 경시하고 있을 그 때에 그는 왕궁에서 유명하게 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를 인하여 멸시함을 받는 자들을 존귀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복음은 바다와 같이 어느 장소에서 잃어버린 것은 다른 장소에서 얻는다. 그리스도는 지금 2년 이상이나 전파하시고, 이적을 행하여 오셨다. 그러나 헤롯은 아마 지금까지 그에 대하여 듣지 못하였으며, 겨우 이제서야 그의 소문을 들은 것 같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이 세상에서 위대한 자가 가장 좋은 일, 즉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 하는 것"(고전 2:8)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의 불행이라는 사실이다(고전 1:26).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지금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그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는 것을 위해 각처로 파송되었으며, 또한 이러한 일은 그의 소문을 그 어느 때보다 더 퍼뜨리게 하였다. 즉 다시 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그들의 방법을 사용하여 복음을 퍼뜨리게 하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2. 이에 대해 그가 내린 해석(2절). 그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하고 하였다. 헤롯의 누룩(leaven)은 사두개주의(Sadducism)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말하기"(행 23:8) 때문이다. 혹은 헤롯의 범죄한 양심(대개 무신론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이 이때에 그의 의견을 주장하였으며 따라서 그는 결론짓기를, 일반적인 부활이 있든지 아니면 "세례 요한이 분명히 살아났으며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한다"고 생각하였다. 요한은 그의 생전에 "이적을 행하지 아니하였다"(요 10:41). 그러나 헤롯은 결론짓기를,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므로 그가 생전에 가지고 있었던 것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고 있다(옷 입혀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헤롯은 그가 생각한 바 세례 요한이 행하는 이적을 "그의 권능"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도다"라고 매우 잘 부르고 있다. 여기에서 헤롯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헤롯은 요한을 목벰으로써 이루려 했던 일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다. 헤롯은 자기가 만일 그 골치 아픈 친구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또한 억제됨이 없이 자유스럽게 자기의 죄를 계속 저지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이 성취되기도 전에 그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요한이 전파하였던 것과 똑 같은 순수한 교훈을 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더구나 제자들까지도 그들의 선생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함으로써 그것을 확증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역자들은 잠잠하게 될 수 있고 투옥도 되며, 추방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가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사실이다. 선지자들은 "영원히 살지 못하지만 말씀은 그 열조들에게 임하는 것이다"(슥 1:5, 6). 디모데 후서 2장 9절을 보라. 종종 하나님께서는 많은 신실한 사역자들을 잿더미에서부터 일으키신다. 하나님의 "나무는 비록 찍힐지라도 소망이 있다"(욥 14:7-9).
(2) 헤롯은 단지 그 자신의 양심의 범죄로부터 얼마나 까닭 없는 근심에 잠겨 있었는가? 이와 같이 "피"는 그것이 흘려진 "땅"에서부터 "부르짖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흘린 자의 마음에서부터 부르짖는 법이다. 또한 이것은 그로 하여금 "둘레에 있는 공포"(Magor missabib, 역주:늘 공포를 느끼는 것), 즉 그 자신에 대해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범죄한 양심은 매사를 두려운 것으로 생각하게 하며, 마치 소용돌이와 같이 그 곁에 오는 것을 한데 끌어 모아 버린다. 이와 같이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해버리며"(잠 28:1), "두렵지 않은 곳에서도 크게 두려워한다"(시 14:5). 헤롯은 약간의 탐문을 통하여 쉽사리 이 예수가 세례 요한이 죽기 훨씬 이전부터 살고 있었으며 따라서 "다시 살아난 요한"(Johannes redivivus)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속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스럽게도 그를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히도록 내버려두셨다.
(3)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헤롯은 그의 사악함에 있어서 얼마나 강팍하였는가" 헤롯은 요한이 선지자이며 또한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은 사람임을 확신하였지만 그를 죽게한 죄에 대하여 하등의 죄책이나 애통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귀신들은 믿고 떨기는 하지만, 결코 믿음을 가지거나 회개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구원하는 회심의 진리가 없는 곳에는 강한 확신의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이다.
Ⅱ. 요한의 투옥과 순교에 대한 이야기. 복음의 첫 설교자였던 그가 이러한 극심한 고난을 받은 것은 그것을 고백하는 자들에게 속박과 구속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첫 번째 구약의 성도(역주:아마 아벨)와 같이 첫째 신약의 사역자는 순교자였다.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이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면 그의 추종자들은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1. 헤롯을 책망하는 데 있어서 세례 요한의 신실함(3, 4절). 헤롯은 요한의 청중들 가운데 하나였으며(막 6:20), 따라서 세례 요한은 그에게 대해 담대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직무상 책망하는 자인 사역자들은 그들의 책임하에 있는 자들을 책망해야 하며 또한 "그들에게 죄를 더하게 해서는" 안 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들을 취급하는 가장 절호의 기회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에게 가장 호의적인 승낙을 기대할 수도 있다.
세례 요한이 헤롯을 책망했던 특별한 죄는 그가 자기의 동생 빌립의 아내, 다시 말하면 빌립의 과부(역주:빌립이 죽었으므로 과부가 된 경우. 이러한 과부와의 결혼은 그렇게 큰 죄가 아니었다)가 아닌 그의 아내와 결혼했다는 것이다. 빌립은 지금 살아 있었으며, 헤롯은 그에게서 그의 아내를 유혹해내어 자기의 것으로 삼아 버렸다. 헤롯은 이 여자에게서 아이(역주:살로메)를 가지고 있었던 빌립에게 악행을 행한 것 이외에도 사악과 간음과 근친상간을 자행하였다. 빌립이 그의 형제(이복 형제, 아버지는 같고 어머니는 다름)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악행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더욱 나쁜 악행이다). 시편 50편 20절을 보라. 이 죄 때문에 요한은 그를 책망하였다. 넌지시 말하거나 암암리에 말하지 아니하고, 분명한 어조로 "그 여자를 취함이 옮지 않다."고 말하였다. 그는 그것을 죄로 간주하여 책망하였다. 그것은 영예롭지 못한 일이라거나 그것은 안전하지 못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것은 옮지 않다"라고 말하였다. 죄의 "죄악성"은 "범법"과 마찬가지로 죄악 가운데서 가장 나쁜 것이다. 이것은 헤롯 자신의 불법이었고 그의 끊을 수 없는 죄였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이 특별한 죄에 대하여 그에게 말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하나님의 법에 비추어 볼 때 다른 사람들에게 부당한 것은 왕이나 위인들에게 있어서도 동일하게 부당하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들은 그들 자신이 한낮 사람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께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의 아내를 유혹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직역:네가 가진 그 어떤 야비한 주제보다도) 더욱 합당치 못한 일이다." 가장 위대하고 전제적인 왕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릴 권리는 없다.
(2) 만일 왕들이나 높은 자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린다면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 적당한 사람에 의해, 적절한 방법으로 깨우침을 받는 것이 합당한 일이다(역주:누구든지 그 범죄에 대해 언급해야만 한다. 다윗과 나단의 경우처럼). 그들이 하나님 말씀의 규율들 위에 있지 않은 것처럼 그의 사역자들의 비난을 초월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왕에게 당신은 벨리알이다(욥 34:18)라고 말하는 것"이나 더욱이 형제를 "라가"나 "바보"라고 부르는 것은 실로 "합당치 못한 일"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권위의 한계를 지키는 동안은 그들을 규탄하는 것이 합당치 못하다. 그러나 맡은 직무에 따라서 부당한 것을 말하고 또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19절) 하나님(그의 대리자와 전권 대사는 신실한 사역자들이다)은 "왕들의 외모를 취하시거나 가난한 자보다 부한 자를 더 유의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2. 요한이 그의 신실함을 인하여 투옥됨(3절). 헤롯은 세례 요한이 전파하고 세례를 주고 있을 때 그를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어" 버림으로써 그의 일을 끝장나게 하였다. 이는 그 보복을 감행하여 자신을 만족케 할뿐만 아니라 둘 중에서 무엇보다도 그에 대하여 몹시 성을 내게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헤로디아(헤로디아는 누구보다도 격분하였다)를 기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이러한 일을 한 것은 "헤로디아를 위함"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신실한 책망이 유익이 되지 못한다면 대개 성을 내게 한다. 만일 그것들이 좋은 일을 하지 못한다면 모욕인 것처럼 분개하게 만든다. 또한 그 책망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 자는 아합이 미가야(왕상 22:8)를 미워한 것처럼 책망자의 면전에서 떠나 그를 미워할 것이다. 잠언 9장 8절, 15장 10, 12절을 보라. Veritas odium parit─즉 진리는 미움을 낳는다.
(2)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잘 행하였음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신실하고 부지런하게 자신의 의무를 행하는 자에게는 대개 어려움이 있게 마련이다(행 20:20, 23). 그러한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역대하 16장 10절, 24장 둘째, 21절을 보라. 아마도 요한의 친구들 중 어떤 사람은 그에게 헤롯을 경솔하게 책망한다고 비난했을지 모른다. 또한 그에게 말하기를, 그가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헤롯을 성나게 하여 자신의 자유를 빼앗기는 것보다는 잠잠하게 있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으로 하여금 통치자나 사역자, 기독교 친구로서의 의무를 행하는 것을 방해하게 만드는 조심성이란 떨쳐 버려야 한다. 내가 믿기로는 요한의 마음이 이것 때문에 자신을 책망한 것은 아니며, 또한 헤롯에 대한 자신의 양심의 증거, 곧 그는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에 고난을 받았으며 "남의 일에 간섭하여"(벧전 4:15) 고난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쇠사슬을 가볍게(그의 멍에를 쉽게) 하였다고 믿는다.
3. 요한에 대한 분노가 더 폭발되는 것을 헤롯이 억제시킴(5절).
(1) 헤롯은 그를 죽이려고 했다. 아마도 맨 처음 그가 요한을 투옥했을 때는 그를 죽이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점차로 그에 대한 복수심이 끓어올라 그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 같이 보인다. 죄, 특히 박해의 죄의 길은 내리막길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한 번 그리스도의 사역자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또한 어떤 경우에 깨어질 때에, 마침내 사람은 그 자신이 범죄 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개라고 생각하게 된다(왕하 8:13, 역주:불의한 하사엘은 엘리사의 충고를 받고 자신의 범죄를 길로 들어서면 헤롯과 같이 내리막길을 달리게 되며 마침내 개처럼 다른 사람을 헤치게 되는 것이다).
(2)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는 계획을 방해한 것은 "민중에 대한 그의 두려움"이었다. 왜냐하면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헤롯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만일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면 요한을 투옥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요한을 두려워했기(그는 이전에 그를 존경하기는 했지만, 그의 정욕이 그것을 압도하고 말았다)때문이 아니라 민중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자신과 자신의 안전 그리고 그의 통치의 안전을 두려워하였으며, 또한 민중을 탄압함으로써 오랫동안 가열되어 온 원한이 선지자를 죽게 함으로써 자극이 되어 쉽사리 불꽃으로 번지게 될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를 두려워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폭군은 그들 나름대로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영사들의 공포꺼리"가 되는 사람이나 그러한 자인 양 행세하는 사람은 종종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에 대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백상들에게서 경외함을 받기를 열망할 때 그들은 그 백성들을 몹시 두려워하는 법이다.
[2] 사악한 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생각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세속적 관심 때문에 가장 악한 행동을 억제한다. 그들의 안일과 신용, 부귀, 안전, 그들의 통치에 대한 이해 관계가 그들을 많은 의무에서 면제시켜 주며, 그와 마찬가지로 또한 많은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한다. 만일 그와 같은 것이 없다면 그들은 이러한 범죄를 억제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죄인들이 지나치게 악행을 하지 못하게 되는 하나의 수단이다(전 7:17). 감각이나 또는 환상에 나타나는 죄의 위험은 신앙에 나타나는 것보다 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친다. 헤롯은 요한을 죽게 한 것이 사람들 가운데서 폭동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자신의 양심에 폭동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서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폭동은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던 것이다(2절). 사람들은 정죄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교수형에 처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역주:정죄받는 것이 두렵지 않다면 그 마땅한 결과인 교수형에 처해지는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4. 요한을 죽이려는 간계. 요한은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국민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재판에 부쳐지거나 보석을 신청하게 되지도 아니하였다(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우리나라는 이 자유가 법으로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아마도 일년 반쯤이나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추측이 되는데, 이 기간은 그가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여 옥에 갇힐 때까지의 기간과 거의 맞먹는다. 여기에는 죄수들이 함께 쉬게 하는 죽음(모든 선인들의 고난의 기간)의 방법에 의해 그가 해방된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압제자의 소리를 듣지 않는다"(욥 3:18).
헤로디아는 음모를 꾸몄다. 그녀의 마음 속 깊이 맺힌 복수심은 요한의 피를 애타게 찾았으며,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그녀를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그것들은 육적인 욕구를 가로질러 급기야는 가장 야만적인 정욕으로 변하고 말았다. "성도들의 피에 취한 자"(계 17:5, 6)는 여자, 즉 창녀이며 창기의 어머니였다. 헤로디아는 어떻게 하면 헤롯의 환심을 살뿐만 아니라 민중들을 진정시킬 수 있도록 아무도 모르게 깜쪽같이 요한을 해치울 것인가를 여러 모로 궁리하였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헤롯이 음모를 도모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놀라움과 슬픔을 가장함으로써 자신의 책략을 남에게 나타내지 않으려고 했으며, 또한 물어 보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맹세하는 체한 것이나 손님들에게 대해 존경하는 것 같이 꾸민 것은 한낱 속임수요 짐짓 꾸민 표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그가 알기전에 (부지중에) 그 유혹에 말려들었다면 그는 그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거나 하지 않도록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 모든 음모를 당연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봇을 죽게 한 것은 이세벨이었지만, 아합이 그 재산을 취하였으므로 "그가 죽인"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헤로디아가 요한을 목베이려는 계략을 세우기는 했지만 헤롯이 이에 동의하고 기뻐하였으므로 그는 공모자일 뿐만 아니라 주범(主犯)인 것이다. 그러면 휘장 뒤에 있는 장면(음모)이 무대 위에서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전개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헤롯은 생일날 소녀의 춤을 보고 즐거워함. 아마도 헤롯은 생일은 성대하게 지켜졌던 것 같다. 그 날을 경축하기 위하여 늘 하는 것처럼 궁중 무도회가 필요하였다. 그 의식을 더욱 화려하게 하기 위해 헤로디아의 딸이 그들 앞에서 춤을 추었다. 그녀는 황녀의 딸이었으므로 평상시보다 더욱 생식을 내면서 짐짓 친절하게 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육적인 즐거움과 환락의 때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악한 계획을 실천하기에 적절한 때라는 사실이다. 왕이 "술의 뜨거움으로 인하여 병이 날 때에 왕이 오만한 자들로 더불어 악수하는데"(호 7:15). 왜냐하면 "미련한 자"는 악을 행하는 것을 "낙으로 삼기"(잠 10:23) 때문이다. 불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이 즐거웠을 때 희롱하기 위해 삼손을 불러내었다. 파리의 대학살도 결혼식 날에 있었다. 이 어린 소녀의 춤은 헤롯을 기쁘게 하였다. 우리는 누가 그녀와 함께 춤을 추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누구도 그 소녀와 같이 헤롯을 즐겁게 할 수 없었다. 유의할 것은 무익하고 야비한 마음은 자칫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매우 사랑하게 되기 쉬우며, 또한 그렇게 될 때에 점점 시험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탄은 그렇게 함으로써 사로잡고 붙들기 때문이다. 잠언 23장 31-33절을 보라. 헤롯은 지금 환락적인 기분에 젖어 있으며, 그의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것 이외에는 그를 기쁘게 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2) 헤롯이 이 방자한 소녀에게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한 성급하고 어리석은 약속. 이 약속은 맹세로 확약되었다(7절). 헤롯이 여기에서 맺은 약속은 지나친 책임(의무)이며,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잠 6:2)라는 말씀을 두려워하는 분별 있는 자에게는 합당지 않은 방법이며, 더욱이 맹세를 두려워하는 선한 사람(전 9:2)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방법이다. 그녀에게 이러한 지나친 특전을 주어 그녀의 마음대로 헤롯에게 요구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이 소녀의 보잘 것 없는 춤에 대해서는 너무도 지나친 보상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헤롯이 소녀와 같이 헤로디아의 지시를 받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렇게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약속의 맹세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 일이 되며 또한 성급하게 맺어질 때 내적인 타락의 생산물(products)과 많은 시험의 기회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네가 "실수였다"(전 5:6)고 말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결코 맹세하지 말라.
(3) 어린 소녀가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달라는 끔직한 요구를 함(8절). 그녀는 앞서 자기의 어머니의 지시를 받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이러한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가 아하시야처럼 "악을 행하게 하므로"(대하 22:3) 매우 불행하다는 사실이다. 그 부모는 그들에게 범죄하도록 가르치고 격려하며, 또한 나쁜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한 성품은 좋은 가르침에 의해 억제되고 극복되기보다는 나쁜 가르침에 의해 더 빨리 촉진되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주님"을 거스리는 "부모들에게 순종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그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범죄할 것을 명한다면, 레위가 그 "부모"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들은 "그들(부모들)을 알지 못했다"고 말해야만 한다.
헤롯은 그녀에게 위임하였고 헤로디아도 그녀에게 지시하였으므로 그녀(살로메)는 세례 요한의 목을 소반에 담아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아마도 헤로디아는 헤롯이 그녀에 대해 싫증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으며(정욕이란 싫증이 나기도 하고 넌더리가 날 때도 있는 법이다) 또한 세례 요한의 비난을 구실로 삼아 그녀를 내쫓을까 두려워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사전에 막기 위하여 그녀는 요한을 죽이게 함으로써 헤롯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려고 계획하였던 것이다. 요한은 그때에 목베임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죽음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은 복음의 시작 이후 최초의 죽음이기 때문이며, 비록 순교자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죽었지만 이와 같이 침착하고 영예스럽지는 못하였으며, 이 죽음은 그 밖의 모든 죽음에 대치된다. 즉 요한 계시록 20장 4절을 보면 "예수의 증거를 위하여 목베임을 당한 영혼들"이란 말씀이 있다(역주:세례 요한의 목베임은 다른 모든 죽음과 맞먹을 정도로 고귀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만족되지 않았으며, 그 목베인 사실이 역시 즐기는 것이 되어야만 하였다. 다시 말하면 복수한 것뿐만 아니라 그 기분도 충족되어야만 하였다. 요한의 머리는 잔치 때 고기 접시나 다른 접시들에게 나누어주는 양념처럼 피묻은 채로 "소반에 담겨 그녀에게 주어져야만" 하였다. 이것은 진귀한 것을 가지고 올라오는 세 번째 과정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그는 재판이나 공청회를 거치지 않았으며, 사형시에 엄숙히 부가되는 법률이나 공의의 적용을 받지 못하였으며, 단숨에 재판에 회부되고 정죄를 받아 사형에 처해진 것이다. 그는 세상에 대하여는 이미 죽었던 자였으므로 그 죽음이 비록 갑작스러운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를 놀라게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주어졌으며,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춤에 대한 보상으로 여겼을 것이며 더 이상은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4) 헤롯이 이 요구를 들어 줌(9절). "헤롯이 근심하나," 적어도 그에게 근심이 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맹세한 것을 인하여 그녀에게 주라고 명하였다."
[1] 요한에 대한 거짓된 관심. "왕은 마음에 근심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해 참된 뉘우침이 없는 많은 사람들은 후회하면서 죄를 짓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죄에 대해 근심하기는 하지만, 그 죄에 대해 경건한 슬픔(역주:참된 애통)을 가지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전혀 그러한 것을 가지지 않는다). 즉 죄를 미워하기는 하지만 계속적으로 죄를 짓는다. 하몬드(Hammond) 박사는 제안하기를, 헤롯이 근심한 이유 중 하나는 그 날이 바로 헤롯의 생일날이었으며 또한 다른 기쁜 날과 같이 즐겁게 놀아야 할 그날에 피를 흘리는 것이 나쁜 징조(흉조)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Natalem colmus, tacete lites─즉, 우리는 생일을 즐기고 있다. 다툼이 없도록 하자.
[2] 헤롯은 명예와 정직을 그럴 듯하게 내세우면서 자신의 양심을 위장하고 있다. 그는 맹세 때문에 어떤 일을 해야만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악한 맹세가 사악한 행동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라는 사실이다. 헤롯은 그녀를 위해 정당하고 정직한 것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것이다. 그녀가 그 밖의 다른 것을 요구하였을 때 헤롯은 그 맹세가 효력이 없고 무익한 것이며, 그 이행의 의무는 끝났다고 말해야 하며, 또한 그것을 영예스럽게 처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죄에 대한 의무를 행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강력하게 죄를 대항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3] 여기에는 사악한 동료들에게 순응하는 참 비열함이 있다. 헤롯은 맹세 때문에 굴복 되었다기 보다는 그것이 공공연한 것이었으며, "그와 함께 연회석에 앉은 무리들"에게 아첨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그들 앞에서 자신의 약속을 깨뜨리지 않음을 보여 주기 위하여 요구를 들어주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양심의 문제보다도 명예 문제가 더욱 중요시된다는 사실이다. 헤롯과 함께 잔치에 동석한 무리들은 헤롯과 같이 아마 그 소녀의 춤을 즐거워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든지 그 어린아이의 요구가 이루어져서 그녀가 요한의 목베인 것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은근히 바랐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야김의 신하들이 했던 것처럼(렘 36:25) 그렇게 하는 것을 마땅히 만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만일 이곳에 상식 있는 사람들이 몇이라도 있었다면 그들은 사무엘상 14장 45절에 있는 것 같이 이 요나단을 구출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4] 이러한 허락의 근저에는 요한에 대한 노골적인 악의가 서려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자신의 약속을 벗어나기에 충분한 핑계를 둘러 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악한 마음은 변명을 원하지는 않지만 사실은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을 받는 것이다"(약 1:14). 아마도 헤롯은 이 약속을 인하여 그가 세례 요한보다도 더 좋아하였던 엄청난 돈을 그녀가 요구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고 그 자신의 터무니없는 약속에 대해 내심으로 걱정하고 있던 중 그녀가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함으로써 이를 쉽사리 벗어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뻐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즉시 세례 요한의 목을 베라는 명령을 발하였으니, 그것은 서신으로가 아니라 한 마디의 말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 귀중한 목숨은 이와 같이 하찮은 일로 말미암아 잃게 되었다. "헤롯은 그에게 주라고 명하였다."
(5) 헤롯의 승낙에 따라 요한이 처형됨(10절). "그가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베니라." 아마 이 감옥은 매우 가까운 궁전문곁에 있었던 것 같다. 위인의 목을 베도록 이곳으로 집행관이 보내어졌다. 그는 그 일이 행해지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헤로디아를 위하여 서둘러 목베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 일은 밤에 행하여졌다. 왜냐하면 그때는 저녁 식사 때였고, 그 식사 이후라면 밤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일은 민중들의 소유를 두려워하여 평상시에 집행하던 처형 장소가 아닌, 감옥에서 행하여졌다. 순교자의 무죄한 많은 피가 이와 같이 구석에 스며들었으니, 하나님께서 그 피를 신원하러 오실 때에 땅은 그 피를 드러내고 더 이상 가리지 아니할 것이다(사 26:21; 시 9:12).
이리하여 그 목소리는 잠잠해졌으며, 타서 빛나는 빛은 꺼지고 말았다. 신약의 엘리야인 그 선지자는 패역하고 음란한 여자의 간악한 흉계로 말미암이 제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이 보시기에 위대하였던 요한은 "어리석은 자처럼 죽었으며, 그의 손은 결박당하였으며, 그의 발은 착고에 채워졌다." 또한 "사람이 악인의 앞에서 넘어지는 것처럼" 어느 모로 보나(사실상) 참된 순교자인 그는 넘어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 어쨌든 그의 일은 곧 끝나기는 했지만, "그의 일은 수행되었고 그의 증거는 끝났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하나님의 증인들 중 그 누구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니께서는 이로부터 그 일을 좋게 하셨는데, 즉 이로 말미암아 요한의 제자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 비록 감옥이기는 하지만 그와 밀접하게 하셨고, 그가 죽고 난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참으로 밀접하게 하신 것이다.
5. 이 축복 받은 성도요 순교자인 세례 요한의 초라한 유해에 대한 처분. 그 머리와 몸둥이는 분리되었는데,
(1) 그 소녀는 요한의 머리를 그녀의 사악함과 복수의 승리의 트로피(trophy)인양 자기의 어머니에게 의기양양하게 가져다주었다(11절). 루핀의 제롬(Jerome ad Rufin)은 헤로디아가 세례 요한의 머리를 받은 후에, 풀비아(Fulvia)가 툴리(Tully)에게 했던 것처럼 바늘로 혀를 마구 찔러대는 야만스러운 행동을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피흘리기를 좋아하는 마음들은 온유한 영혼들이 움추리며 떠는 그러한 처참한 광경들을 보고 즐거워한다는 사실이다. 종종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박해자들의 끝없는 분노는 성도들의 죽은 시체 위에 엄습하였으며(fall upon), 그것들을 즐거워하였다(시 79:2). 증거자(증인)가 죽임을 당할 때 "당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다"(계 11:10; 시 14:4, 5).
(2) 제자들은 "그 시체를 장사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 소식을 주 예수님께 전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이 감옥에 있을 때, 즉 "그들의 신랑이 빼앗겼을"때 종종 금식하였으며 또한 교회가 베드로의 구출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행 12:5) 그의 구출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위로가 되었던 그를 감옥에서 자유롭게 대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할 수 있도록 자유스럽게 그를 만날 수가 있게 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모든 희망은 삽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세상이 기뻐하고 있을 때 제자들은 슬피 울며 애통하였다.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그들은 시체를 장사지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종들에게는 그들이 살아있을 동안만 아니라 죽었을 때도 그들의 몸과 유물에 대해 존경을 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신약의 처음 두 순교자에 관해 특별히 주시해야 될 것은, 그들 두 순교자는 정중하게 장사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스데반은 경건한 사람들(행 8:2)에 의해 장사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뼈나 유골, 즉 오랜 후에 원수가 가라지를 뿌릴 때에 일어날 미신의 조각(역주:천주교에서는 이러한 유물들을─실은 가짜이지만─소중히 여긴다)은 안치하지 않았다. 성도들의 시체들에 대하여 지나치게 하는 것(overr doing)은 파괴시키는 일이다. 그들은 천대를 받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신성시되지도 않는다.
[2] "그들은 가서 예수에게 고하였다." 예수님은 그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피신하신 것이 아니라(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그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었을 것이다. 그 소문은 각처에 퍼져 있었다), 오히려 그 제자들이 그에게서 위로를 받고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함께 있게 되도록 하기 위해 그에게 갔던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어떤 일이 어느 때 우리에게 괴로움을 준다면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알리는 것이 우리의 의무요 특권이다. 우리가 자유롭게 되기 위하여 친구에게 흉금을 털어놓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가볍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당한 모슨 슬픔과 어려움을 예수님께 가서 고하면,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아시지만 우리를 통하여 "역경 가운데 있는 우리의 영혼"의 고민을 알게 되실 것이다.
둘째, 우리는 우리의 종교와 신앙고백이 우리의 사역자들이 죽음과 동시에 소멸되지 않도록 유의해야만 한다. 요한이 죽었을 때 그 제자들은 각자가 제 갈길로 가려고 하지 않고 여전히 그 곁에 머물러 있기로 결심하였다. 목자가 죽임을 당했을 때 양들은 여전히 동일하신 위대한 목자(히 13:8, 10)를 가지고 있으므로 흩어질 필요가 없다. 사역자들의 떠남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더 가까이, 그와의 보다 더 즉각적인 교제를 가지도록 해야만 한다.
셋째, 최고의 가치 있는 위로는 때로 우리에게서 취해질 때가 있다. 왜냐하면 그 위로는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와서 그에게만 합당한 사랑과 존경심을 쉽사리 가져가 버리기 때문이다(역주:가장 큰 위로는 사랑과 존경심을 빼앗겼을 때에 있게 되는 법이다. 요한의 제자들의 경우는 이와 같다). 요한은 오래 전부터 그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에게 가도록 지시했으며, 또한 그들을 그에게 넘겨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이 살아있는 동안 그들의 옛 주인(요한)을 차마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요한이 없어진 것은 그들로 하여금 종종 요한으로 인하여 경쟁자와도 같았던 그리스도에게로 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전혀 그에게로 오지 않는 것보다는 부족과 손실 때문에 그에게로 이끌려 오는 편이 낫다. 만일 우리의 주인(masters)이 우리에게서 취해감을 당한다 하더라도(역주:우리에게서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위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리이신 주인(Master)이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의역).
요세푸스는 세려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Antiquit, 18권, 7장), 첨가하기를 헤롯의 군대가 페트레아(Petrea)의 아레타 왕(그의 딸은 헤롯의 아내였는데, 헤로디아 때문에 쫓겨난다)과의 싸움에서 참패를 당한 것은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에 의해 세례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한 당연한 심판으로 간주되었다고 하였다. 헤롯은 헤로디아의 부추김을 받아 황제를 노하게 하였으므로 그의 통치권을 박탈당하고 결국 불란서의 리용 지방으로 둘 다 추방되었다. 요세푸스는 이것이 그녀의 간청을 들은 헤롯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할 형벌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마지막으로 이 딸에 대해 이야기되고 있는데, 그녀는 겨울에 얼음 위를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얼음이 깨지면서 미끄러져 날카로운 얼음 조각에 목이 베어졌다고 한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의 목 대신에 그녀의 목을 요구하셨다(휘트비 박사의 말).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놀라우신 섭리가 아닐 수 없다.
오천여 명을 먹이신 이적 (마태복음 14:13-21)
그리스도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오천여 명"을 먹이신 이야기는 네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기록되고 있는데, 이렇게 네 복음서 기자가 그리스도의 이적에 대하여 동일한 것을 함께 기록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이것은 그 이적에 특별히 유의할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Ⅰ. 예수께서 "빈들로" 물러가셨을 때 많은 무리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옴(13절). 그가 은밀히 물러가신 것은 요한의 죽음을 들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헤롯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에게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하여 물러가신 것이다. 그는 헤롯의 관할 구역을 벗어나기 위하여 멀리 떠나가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위험할 때 하나님께서 도망 할 문을 열어 주신다면 자신을 드러내라는 특별한 부르심이 없는 한 우리 자신의 안전을 위해 피신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고난 속에 밀어 넣으려고 하시지 않았다. 그는 신적인 능력에 의해 자신을 안전하게 하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그의 생활이 모범이 되기를 의도하셨기 때문에 그는 인간적인 판단으로 그 일을 하셨다. "그는 배를 타고 떠나셨다." 그러나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숨기우지 못한다." "무리가 이 소식을 듣고" 각처에서부터 "걸어서 그를 뒤따랐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무리들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가 물러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오히려 더욱 큰 열심을 가지고 그를 뒤쫓았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종종 그러했듯이 "백성들의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리라"는 "성경 말씀이 성취되었다." 아마도 세례 요한이 순교를 당한 후 많은 사람들이 그 이전보다 더욱 많이 그리스도에게로 모여들었을 것이다. 때로 "성도의 고난은" 복음의 진보가 되기도 하며(빌 1:12), 또한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가 된다." 이제 요한의 증거는 끝났으며, 그것은 회상되고 이전보다 더욱 발전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이 우리들에게서 물러갈 때 우리가 그 어떠한 세속적인 유익보다도 우리의 영혼을 위한 기회를 우선적으로 하여(아무리 혈과 육이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따라가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언악궤가 움직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쫓으라"(수 3:3).
2. "말씀의 신실한 젖을 사모하는 자들"은 그것을 청종하는데서 만나게 될 어려움 때문에 꼼짝 못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의 임재(presence)는 빈들을 아름답고 좋은 곳으로 만들며, 또한 광야를 에덴으로 만드는 것이다(사 51:3; 41:19, 20).
Ⅱ. 우리 주 예수님께서 그를 따라온 무리들을 긍휼히 여기심(14절).
1. 그는 나가셔서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는 자신의 안전과 휴식을 위하여 물러가셨지만, 백성들이 그를 청종하기를 원하는 것을 보셨을 때 그들을 위하여 기꺼이 수고하고 몸을 드러내시기 위해 그의 은신처에서 나오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 자신까지도 즐겁게 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2. "그는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큰 무리의 광경은 당연히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큰 무리를 보고, 그 귀중하고 불멸의 영혼들이 여기에 얼마나 많이 있으며, 그들 중 대부분(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이 무시되고, 멸망될 것을 생각하면 마음에 측은함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와 같이 영혼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의 긍휼하신 마음은 부족함이 없다."
3. 그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도우셨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병든 자"였으며, "그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고쳐 주셨다." 왜냐하면 그는 위대하신 의사로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잠시 후에 그들은 모두 굶주렸다. "그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배부르게 먹이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나타내실 때 그는 "긍휼에 의해 움직여지신다"(사 63:9)는 사실이다.
Ⅲ. 제자들은 무리들을 내보내려 했고 그리스도는 이를 제지하심.
1. "저녁"이 가까이 다가오므로 제자들은 그리스도에게 무리들을 내어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한날의 사역은 다 끝났으며, 이제는 해산해야 될 때라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종종 그들의 열심을 나타내기보다는 그들의 판단(discretion)을 나타내는 데 더 유의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하나님의 일에 많은 애정을 쏟기보다는 그들의 사려분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굶주린 채로 보내거나 식사를 하지 않은 채 그들을 오래 붙잡아 두거나 그들 스스로가 음식을 사먹도록 하시지 않으시고, 그의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준비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리스도는 그 동안 내내(all along) 백성들을 향하여 그의 제자들보다 더 온유함을 나타내셨다. 가장 자비스러운 사람의 긍휼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온유하신 자비"와 어찌 비교가 되겠는가? 그리스도는 그에게로 나아오려고 한 자와 헤어지는 것을 얼마나 싫어 하셨는지 살펴 보라! "그들은 떠날 필요가 없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를 가진 자는 모든 것을 충분히 가진 자이며, 행복이나 생계를 찾아 떠날 필요가 없다. "한 가지 일이 꼭 필요하다"고 확신한 사람은 "많이 봉사하려고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역주:마르다와 마리아).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 불필요한 비용을 부담시키지 않으실 것이며, 그들의 청종을 매우 수월하게 만드실 것이다.
만일 그들이 굶주린다면 그들을 떠나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굶주림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되는 필요불가결의 것이며, 따라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주님은 몸을 위하시며," 또한 그것은 "그의 손의 사역'이며 그의 구입(사들임, purchase)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육신을 입으신 것은, 우리의 육적인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그를 의지하도록 우리를 격려시키려 하심이다. 그러나 그는 보다 직접적으로 영혼을 봉사하기 위해 채용될 때는 몸에 대하여 특별한 배려를 하신다. 만일 우리가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역주:마 6:33), 그것을 우리의 주요 관심사로 삼는다면 우리는 그가 합당하게 여기시는 한 "그 밖의 다른 것을 더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가 있으며, 그것들에 대한 염려를 "모두 그에게 맡길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어려움이 없이 현재의 열심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따랐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 대하여 이와 같은 배려를 하셨다. 그는 그를 철저히 따르는 자들을 위해 더욱 더 준비하실 것이다.
Ⅳ. 이 큰 무리를 위해 준비되었던 보잘 것 없는 양식. 우리는 여기에서 초청된 수많은 무리와 음식의 메뉴(bill of fare)를 비교해야만 한다.
1. 손님들의 수는 "여자와 어린아이들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다. 아마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의 수효도 아무리 적게 계산하더라도 남자들만큼은 되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셨던 엄청난 청중이었으며, 그들은 열심 있는 청중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마도 그들 중 대부분은 모두 열심 있고 진지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공연히 왔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한 번 가버리면 더 이상 그를 따르려고 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씀이 마음에 드는 것은 그 청중들의 무리에 의해서 보다는 그 회심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무리가 모이는 것은 보기에도 좋고 앞으로의 좋은 전조가 되기는 한다.
2. 그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에 불과한 메뉴는 손님들의 숫자에 비해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 제자들이 이 음식은 가족(그들 제자들)이 먹를 것으로 가져다 놓았으며, 그리고는 "물러가 버렸다." 그리스도는 이적으로써 그들을 먹일 수가 있으셨다. 그러나 그는 우리 자신의 가장(家長)으로서 음식을 준비하시는 모본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일상적인 방법으로 그들 자신의 거처(camp)에 먹을 것을 공급하려고 하셨다(역주:그는 무리들을 일정하게 앉게 하여 떡을 나눠주셨다). 여기에 있는 음식은 충분하거나 다양하거나 맛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 접시의 물고기는 어부였던 그들에게는 그리 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열 두 제자들에게 편리한(손쉬운) 음식이었다. 두 마리의 물고기는 그들의 저녁 식사에는 알맞은 것이었고 아마 빵도 하루나 이틀 양식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포도주나 많이 마실 것이 없었다. 광야에 있는 강에서 떠온 맑은 물이 그들의 식사와 곁들어 마실 수 있는 최고의 음료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러한 것으로부터 많은 무리들을 먹이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람들이 비록 작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꼭 필요하게 될 때는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구조해야만 하며 또한 그것이 그것을 더욱 많이 만들게 되는 방법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준비할 수 있느냐?" 그렇다. 그가 원하시면 풍성한 식탁을 준비하실 수 있다.
Ⅴ. 이 양식을 무리들에게 자유스럽게(마음대로) 나누어 줌(18, 19절).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참으로 피조물이 주는 위로(creature-comforts)를 받으려면 그것을 그리스도에게로 가져가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매사는 그의 말씀과 그에게 대한 기도에 의해 성화(시인, sanctify)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것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사용하시도록 그의 손에 맡기면 우리들은 그것을 그의 손에서 도로 찾을 수 있고 그때는 그것이 몇 갑절로 더 좋은 것이 되어 우리를 번성하고 잘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함으로(남에게) 바친 것을 그에게 먼저 가져다 드리면 그는 우리에게서 그것을 친절하게 받으시고 그것이 주어지는 자들에게 호의적으로 축복하실 것이다. 이것이 "곧 주님에게 하는 일"이다.
그러면 이 이적적인 식사에 대해 몇 가지로 살펴보기로 하자.
1. 무리를 앉히심(19절). "그는 무리를 명하여 자리에 앉히셨다." 이것은 그가 설교하실 때에 무리들은 존경과 준비하는 자세로 서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어떻게 그들을 위하여 모두 의자를 준비할 수 있겠는가? 그들을 "잔디에 앉게 하자." 아하수에로 왕이 "그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려고 할" 때 그의 "모든 방백과 신부들"은 "백색, 녹색, 청색" 휘장을 가는 베줄로 대리석기둥 은고리에 매고, 금과 은으로 만든 걸상을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을 깐" 의자와 침대에 앉았다(에 1:6). 우리 주 예수님은 지금 성스러운 잔치에서 아하수레로왕의 그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나라의 부함과 더 탈월한 위엄, 더욱이 자연 그 자체를 지배하시는 존귀함을 나타내 보이셨다. 여기에는 융단이 깔리거나 또는 접시나 내프킨, 칼, 수저 등이 놓여있지 않았으며 더욱이 앉을 의자도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그가 참으로 세상을 순수하고 단순하게 만드심으로써 낙원에 있었던 아담같이 순진하고 행복하게 만드시려고 계획하셨던 것처럼, "그들을 잔디 위에 앉도록 명하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허세를 부리거나 휘황찬란하게 일을 하시지 않으심으로써 "그의 나라가 이 땅에 속하지 않으며" 또한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 주셨다.
2. 축복 기도(축사).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을 자기의 사제로 임명하지 않으셨다. 그는 친히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 그는 하나님께 그들이 가진 양식을 인하여 감사드렸으며, 그것을 축복해 주시도록 기도하셨다. 그가 축복을 기원하신 것은 축복을 명하시는 것이었다. 그는 "권세 있는 자와 같이" 전파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이 기도하셨다. 이 기도와 감사에서 우리는 그가 이 음식을 많게 해달라는 특별한 언급을 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우리가 식사할 때 축복을 기원하고 감사드릴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하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아야만" 한다(딤전 4:4). 사무엘은 "제물을 축복하였다"(삼상 9:13; 행 2:46, 47; 27:34, 35).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고 마시는"(고전 10:31)것이요. "하나님께 감사하는"(롬 14:6) 것이요, 모세와 그의 장인같이 "하나님 앞에서 먹는"(출 18:12, 15)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축사"하실 때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신 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라고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그때에 우리는 피조물이 가지는 위로(creature-comforts)를 하나님의 손에서 취하며 축복을 위해 그를 신뢰하는 것같이 (그와 같은 모양으로), 그 쪽을 바라보면서 그것들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3. 먹을 것을 떼어 주심. 잔치의 주인 되신 주님은 그 자신이 우두머리 주방장(head-carver)이셨다. 왜냐하면 "그는 떡을 때어 제자들에게 주셨고, 또한 제자들은 그것을 무리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이 그의 제자들을 존귀하게 하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와 함께 일하는 동역자"로 존경을 받게 되도록 하셨다. 또한 그가 그렇게 하신 것은 어떤 방법으로라도 말씀의 영적인 양식이 세상에 분배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원래의 창시자이신 그에게서부터 그의 사역자들을 통하여 세상에 분배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들을 위하여 의도하신 바"를 그의 종 요한에게 나타내셨다"(계 1:1, 4). "그들은 그것을 모두 나누어주었으며," 그것만을 "그들이 주님에게서 받았던 것이다"(고전 11:23). 사역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들의 손에 채우지 않으신다면 사람들의 마음을 채울 수 없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을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때를 따라 집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종들"이기 때문이다(마 24:45).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무리들이 그렇게 많았지만 모든 것이 풍족하고 각자에게도 흡족하게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4. 먹을 것이 증가함(불어남). 이 이적은 그 원인과 방법에 유의할 것이 아니라 그 결과에만 유의하여야 한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써 음식을 불어나게 하셨다는 언급이 없다. 그가 생각하시거나 원하시는 것은 비록 말씀을 하시지 않는다 알지라도 결과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먹을 음식들이 맨 처음부터 쌓여진 더미에서 증가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분배함으로써 불어났다는 사실이다. 사렙다 과부의 기름이 그것을 퍼낼수록 증가한 것처럼 여기에 있는 떡도 쪼갤수록 증가되었다. 이와 같이 은혜는 행동에 의해 증가되며, 또한 다른 것들이 못쓰게 되는 동안 영적인 은사들은 쓸 수 있도록 증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씨뿌리는 자에게 씨를 공급하시며, 또한 한꺼번에 축적이 된 씨를 증가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흩어 뿌려진 씨"(고후 9:10)를 증가시킨다. 이와 같이 "흩어 뿌려지지만 증가가 되는 것이다." 즉 흩어진 만큼 증가가 되는 것이다.
Ⅵ. 모든 손님들이 이 음식으로 만족하게 배를 채움. 손님들에 비하여 음식은 매우 적었지만, 풍족(배불리 먹게 함)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1. 배부름(풍족함)이 있었다. "다 배불리 먹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는 그가 먹이는 자들을 배부르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도 "그들이 풍족하게 될 것이다"(시 37:19)는 약 속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이 모두 먹을" 만큼 풍족하였고, 그들이 "배부르게 될"만큼 각자가 흡족하였다. 비록 작은 것이었지만 풍족하게 되었고, 그것은 잔치처럼 성대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축복은 작은 것을 크게 만드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진 것을 못쓰게 만드신다면, 우리는 "많이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할 것이다."(학 1:6).
2. 먹고도 남았다. "그들은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는데," 한 사도가 각각 하나의 바구니를 채웠다. 이와 같이 그들이 주었던 것을 그들은 다시 가졌다. 그전보다 더욱 많이 가지게 되었다. 그것들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이 부스러기 음식을 다른 때 쓸 수도 있으며, 또한 감사할 수도 있다. 이것은 이 이적을 나타내고 두드러지게 하기 위함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사람들을 위해 마련하신 양식은 빈약하고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부요하고 풍성한 것임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양식은 먹고도 남는다"(눅 15:17). 즉 넘치도록 풍성하다. 엘리사가 떡을 많게 한 것은 다소 이 이적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도저히 못미친다. 그 때에는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고 언급되었다(왕하 4:43).
일상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매 년마다 "땅에 뿌려진 씨"를 증가시키고 "땅으로 하여금 소출이 있게"하는 것은 동일한 신적 능력이다. 그러므로 한줌 가져온 것은 단으로 가져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자연의 일은 만들어졌고, "그의 능력의 말씀에 의해" 그것들은 유지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바다 위로 걸으심 (마태복음 14:22-33)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친구들과 추종자들의 구제(relief)를 위해 행하신 또 다른 이적. 즉 "그가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이적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앞의 이적(오병이어)에서 그는 자연계의 주님으로써 부족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시기 위해 그 능력(자연계의 능력)을 이용하셨지만, 여기에서는 자연계의 주님으로서 위험과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그 능력을 조정하시고 제어하셨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Ⅰ. 그리스도께서는 이적적으로 그들을 먹이신 후 그의 제자들과 "무리"를 내어보내셨다. 그는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다"(22절). 요한은 예수님께서 서둘러 이 무리들을 내어보내려 하신 특별한 이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리들이 떡의 이적을 보고 큰 감화를 받아 "그를 억지로 잡아 자기들의 임금을 삼으려 하였기"(요 6:15)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 그는 즉시 무리를 보내시고 제자들을 재촉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제자들과 합세하지 못하게 하였고 그 자신은 산으로 떠나가셨다(요 6:15).
그들이 "먹고 마시기 위해 앉았을 때," "그들은 춤추기 위하여 일어나지" 않았으며(역주:마 11:17 참조), 각자가 자기의 일에 분주하였다.
1. 그리스도는 무리들을 내어보내셨다. 이것은 그들을 보내실 때에 엄숙하게 하셨음을 의미한다(역주 :헬라어 원문을 참조하라). 그는 그들을 내어보내시면서 축복하셨고, 그들이 마음에 새겨둘 수 있는 경고와 조언과 위로의 말씀을 짤막하게 하셨다.
2. 그는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를 타고 먼저 가도록"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버리기 전에는 무리들이 해산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가기를 싫어하였으며, 만일 그가 "재촉하지" 않으셨다면 가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출 33:15). 그 제자들은 기다릴 배도 없이, 또한 수종자도 없이 그리스도만을 남겨두는 것을 싫어하였지만, 오직 순종함으로써 그렇게 떠나갔다.
Ⅱ.그리스도께서는 이곳을 떠나가셨다(23절). "그는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셨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1. 그는 혼자 계셨다. "그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시고, 거기 혼자 계셨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일을 행하셨지만 종종 모본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혼자 있기를 택하였다." 혼자 있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다. 그들이 대화할 사람이 없거나 즐길 것이 없이 고독할 때는 하나님과 그 자신의 마음 이외에는 즐거워할 것이 없다.
2. 그는 따로 기도하셨다. 이렇게 한적한 곳에서 그가 하신 일은 기도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님이셨으며, 기도를 들으셨다. 그러나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종(즉 거지)의 현상"을 가지셨으며, 기도하셨다. 그리스도는 그가 명하신 규율대로(마 6:6) 여기에서 은밀한 기도와 그 기도를 은밀하게 수행하시는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계시다. 아마도 이 산에는 이러한 때를 위하여 마련된 어떤 은밀한 기도처나 설비가 있었던 것 같다.
유대인들은 흔히 이러한 기도처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제자들이 바다로 갔을 때 그들의 선생은 기도하러 가셨다는 사실이다. 베드로가 "밀 까부르듯"할 때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3. 그는 오랫동안 혼자 계셨다. 그는 "저물 때까지 거기 계셨으며,"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밤 사경," 즉 새벽녘까지 거기 계셨던 것 같다. "밤"이 되었으며, 또한 푹풍이 불고 비바람이 몰아쳤지만 그는 "계속적으로 기도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오랫동안 계속적으로 은밀한 기도를 하거나 "우리의 마음을 주님 앞에 완전히 쏟아 넣으려 하는" 것은 특별한 때에나 우리의 마음이 산만하게 되었을 때 종종 좋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기도하기를 그쳐서는"(욥 15:4)안 된다.
Ⅲ. 이 때에 불쌍한 제자들이 처해 있었던 상태, "그들의 배가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24절). 우리가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들은 폭풍이 일어날때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우리는 항해의 시초에 청명한 날씨를 가졌지만, 우리가 목표하는 항구에 도착하기 전에 폭풍우를 만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오랜 정적 후에는 어떤 폭풍이나 그 밖의 것이 온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2.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셨던 곳에 있었는데도 이러한 폭풍우를 만났다. 그들이 폭풍우에 휩싸였던 요나와 같이 그들의 선생과 그들의 임무를 버리고 떠났다면, 그것은 실로 무서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때에 그들의 선생으로부터 바다로 가라는 특별한 명령을 받았으며, 또한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들의 의무를 행할 때 폭풍우를 만나게 되는 것이나 또는 그들의 선생이 폭풍우를 예견하고 있을 그때에 바다로 보냄을 받게 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들을 지독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가 하시는 일, 즉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 자신이 더욱 놀라운 은혜로서 그들에게 나타내시려 하신다는 사실을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게 될 것이다."
3. 그들의 폭풍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이전과 같이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던 것은 그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그때에 그가 주무시거나 했더라도 깨울 수가 있었을 것인데(마 8:24), 그러나 지금 그는 그들과 전혀 함께 계시지 않았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먼저 그의 제자들을 덜 곤란을 받게 하셨다가, 점점 크게 어려움을 당하게 하심으로써 점차로 그들이 "감정이 아닌, 신앙에 의해 살 수 있도록" 연단을 시키시는 것이다.
4. "바람이 거슬렸고," 또한 그들은 물결에 부딪치기는 했지만 주님께서 "건너편으로 갈 것"을 명하셨으므로 그들은 방침을 바꾸거나 다시 되돌아오지 않고 앞을 향하여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비록 고통과 어려움이 우리의 의무를 행할 때 엄습한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못하도록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비록 고통과 어려움이 한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는 앞으로 전진해야만 한다.
Ⅳ.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처지에 있는 그들에게 접근하셨다(25절). 우리는 여기에서,
1. 그의 선하심의 모본을 볼 수 있는데, 즉 그는 그들의 처지를 아시는 자와 같이 그들에게 가셨으며, 자녀를 돌보는 아버지와 같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들이 극도의 곤경을 당하는 그 때야말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방문하고 그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밤 사경이 되기까지"는 그들에게 찾아오시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홍해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은 "새벽 시간"(출 14:24)이었으며, 바로 같은 시간쯤이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을 때는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밤중에 다니신다." 그리고 매우 일찍이 도우신다.
2. 그의 능력의 모본을 볼 수 있는데, 즉 그는 "바다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가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들을 주권적으로 통치하고 계심을 보여 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그것들(피조물들)은 모두 그의 발아래 있으며, 그의 명령을 받고 있다. 그것들은 자신들의 본질들을 잊고 있으며, 우리가 필수적이라고 부르는 특성들을 변화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 일이 물의 표면을 압축시킴으로써(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큰물이 바다 가운데 엉긴다," 출 15:8) 행해졌는지 또는 그의 몸의 중력을 일시 중지시킴으로써 행해졌는지 탐구할 필요가 없으며, 어쨌든 그것은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모양을 바꾸었다. 그것은 그의 신적인 능력을 입증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바다 물결을 밟으시는 것"(욥 9:8)은 "바람 날개 위에 타시는 것"같이 하나님의 특권이다. "바다의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신 이"(사 51:10)가 여기에서는 그것들(바다의 물들)로 하여금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계신"(계 10:2) 만물의 주이신 구원자를 걸어가게 하셨다. 도끼를 떠오르게 하신 동일한 능력이 이 일을 행하였다(왕하 6:6).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찜인고"(시 114:5). "그것은 주의 면전에 있었나이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다"(시 77:19).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가 기뻐하시는 방법을 취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Ⅴ.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가셨을 때 제자들과의 의사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이 있다.
1. 그리스도와 제자들. 여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1) 어떻게 그들의 놀라움이 고조되었는가(26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여기에서 "유령" (fa,ntasma e;sti)이란 말은 "허깨비"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아마도 영의 존재나 현현은 사두개인들(그리스도는 그들의 교리에 대해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였다)이외에는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에 의해 믿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대부분의 인위적(추측적)인 유령들은 단지 사람들 자신의 두려움이나 환상의 소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이 때에 마땅히 "주님"이라고 말해야만 했다.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구원하기 위하여 출현하거나 접근하는 것이 때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근심과 당황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들은 종종 아무런 손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놀랄 때가 있다. 그때야말로 그들이 마리아와 같이 큰 은혜를 입게 되는 기회인 것이다(눅 1:29; 출 3:6, 7). "양자의 영'의 위로는 "종의 영"의 두려움에 의해 이끌어들여진다(롬 8:15).
[2] 영의 출현이나 그 환상은 우리에게 놀라움과 두려움을 안겨 준다. 왜냐하면 영들의 세계는 우리들과는 먼 곳에 있으며, 선한 영들은 우리와 함께(역주:함께 있으면서 우리를 돕는다) 잇지만 악한 영들은 우리를 대적하기 때문이다. 욥기 4장 14, 15절을 보라. 우리가 하나님, 즉 영들의 아버지와 친숙해지면 해질수록 또한 그의 사랑안에서 우리 자신을 더욱 유의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러한 두려움을 더욱 물리칠 수가 있는 것이다.
[3] 선한 사람들을 혼동시키고 불안케 하는 두려움은 그리스도와 그의 인격, 직무, 약속에 대해 오해하거나 잘못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우리가 그의 이름을 더욱 분명하고 완전하게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 확신을 가지고 그를 믿을 수 있게 될 것이다(시 9:10).
[4] 사소한 일이 우리를 폭풍 가운데서 놀라게 한다. "밖에서" 싸움을 할 때 "안에서" 두려움이 생긴다고 놀라워할 것은 없다. 아마도 제자들은 폭풍 속에서 일어난 것이 악령이었다고 상상하였던 것 같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외적인 괴로움에서 오는 대부분위험은 내적으로 근심하였을 때 생긴다는 사실이다.
(2) 어떻게 이 두려움은 사라지게 되었는가(27절). 주님은 그들의 오해를 보여 주심으로써 그들을 곧 구출하셨다. 그들이 "물결"과 더불어 싸우고 있을 때 주님은 잠시 동안 그의 구원을 늦추셨다. 오히려 그는 더욱 위험스러운 그들의 두려움에 대해 서둘러 구원하셨다(역주 :그들은 먼저 두려움에서 구원받아야만 했다). 그는 즉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그들을 안심시켰다.
[1] 그는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한 것처럼 자신을 "내니"(It is I)라고 알리심으로써 그들의 오해를 풀어 주셨다. 그는 바울에게 "나는 예수라"고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제자들에게는 "내니"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였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처럼(요 20:16), "그의 양들처럼 그의 음성을 알았다"(요 10:4). 그들은 구태여, "주여, 당신은 누구시오니까? 당신은 우리를 해할자입니까? 도울 자입니까?"라고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배우자처럼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구나"(아 2:8; 5:2)라고 말할 수 있었다. 참된 신자는 좋은 표정에 의하여 그것을 안다. 그들은 주님을 보았을 때 그가 누구인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올바른 지식은 참된 위로, 특별히 그리스도의 지식에로 문을 연다는 사실이다.
[2] 그는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였다. "내니"라고 그러므로
첫째, "안심하라." (qarsei/te)─즉 "용기를 내어라. 너희 생각을 버리고 담대하여라." 만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폭풍 가운데서 안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며, 그 때문에 주님은 그들로 하여금 안심하도록 말씀하셨던 것이다.
둘째, "두려워 말라."
1. "너희는 그것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나에 대하여 두려워 말라. 너희는 내가 너희를 해롭게 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 정녕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는 그가 자신을 나타내시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주님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될 때, 그 두려움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2. "폭풍우와 물결이 요란하고 무서울지라도 그것에 대해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에게 가까이 있는 동안 결코 그것들을 두려워 말라. 나는 너희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너희가 죽게 다니 것을 멀리서 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를 가까이 모시고 있고 그가 그들의 주님이신 것을 아는 자는, 비록 그것이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2. 주님과 베드로(28-31절). 여기에서 우리가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베드로의 용기와 그리스도의 후원,
[1]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서" 그리스도에게로 가려고 했던 것은 대단한 용기였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28절). 베드로가 가진 큰 은사는 용기였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였지만, 베드로의 용기는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보다 더 그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도록 하였다.
첫째, 베드로가 주님에게 가기를 열망하였던 것은 주님께 대한 그의 사랑의 본보기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폭풍 가운데서도 여러번 주님을 뵙기 원하였을 것이다)를 보았을 때,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적 때문에 하는 것처럼 "나를 명하여 물 위로 걸을 수 있게 하소서"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도 때문에 하는 것처럼 "당신에게 오라 하소서"라고 말하였다. "나로 하여금 어떻게 하든지 당신에게 가게 하소서."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에게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참된 사랑은 불이나 물을 뚫는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구원하고 구조하기 위하여 그들에게로 오고 있으셨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명하사 당신에게 오라 하소서"라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길로 걸어서 우리를 향하여 오실 때 우리는 의무의 길로 걸어서 그를 마중 나가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여기에서 우리는 그를 만나기 위해 자발적이고도 용기 있는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구세주이신 누님에게서 은혜를 얻으려고 하는 자는 이와 같이 신앙으로써 그에게 와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잠시 동안 그들을 떠나 계셨다. 이상에서 볼 때 그가 왜 떠나 계셨는지를 알 수 있다. 즉 그 이유는 그가 떠나 계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제자들이 그의 귀환을 더욱 사모하게 되고 따라서 그가 돌아오시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적절하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잠시 동안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을 버렸을 때 그의 귀환은 환영되고 열렬히 사모(포옹)된다는 사실이다.
"은혜스러운 사람(영혼)들은 오랫동안 찾은 끝에 마침내 그들의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을 때, 그들은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아 3:4).
둘째, 베드로가 허락 없이는 가려고 하지 않은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뜻을 유의하고 준수하려는 하나의 본보기이다. 그는 "만일 주님이시라면 내가 가겠나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가장 담대한 사람은 위험스러운 모험에로의 부르심을 기다려야만 하지만, 우리는 성급하고 무례하게 그것들을 향해 돌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에 유의하지 않고 또한 그의 부르심과 명령에 의해 통제를 받지 않는다면 그를 봉사하고 고난을 당하려는 마음은 자발적(willingness)이 아니라 고집적(wilfulness)이라고 판단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이 베드로에게 명하셨던 이러한 특별한 허락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지혜는 가르치기에 유익하다"는 섭리적인 암시(providential hints)에 힘입어(도움을 받아) 특별한 경우에 적용시킴에 있어서 말씀의 일반적인 규칙을 사용하여야만 한다(역주:말씀의 일반적인 규칙을 특별한 경우에 적용시켜야만 한다).
셋째, 베드로가 주님께서 명하실 때 감히 물위로 걸어간 것은 그의 신앙과 결심의 본보기이다. 안전한 배를 떠나서 자신을 죽음의 어귀로 내어 던진 사실, 후에 두려워하기는 했지만 무서운 물결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말씀에 대한 강한 신뢰를 입증하였다. 이러한 신앙과 열심 앞에 어려움이나 위험이 있을 수 있겠는가?
[2]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기꺼이 오라고 하신 것은 그의 친절함과 겸손함의 발로였다(29절). 그는 그 제안을 어리석고 성급한 것으로 책망하실 수도 있다. 아니, 건방지고 무례한 것이라고 일축해 버릴 수도 있으셨다. "베드로는 그의 선생이 하신 것처럼 흉내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러한 행동이 자신에게 대한 진실하고도 열렬한 사랑에서부터 온 것임을 아셨으며, 또한 그것을 기꺼이 받으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는 비록 많은 약점이 있기는 할지라도 그의 백성들이 사랑을 고백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시며 또한 그것을 만족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이다.
첫째, 주님은 베드로에게 "오라"고 명하셨다.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요구할 때 그들은 그것을 인하여 그를 논박하고 비난하려고 하였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그리스도를 시험하려고 계획했기 때문이다. 복음적인 부르심은, "오라, 그리스도에게로 오라. 그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며, 너희 영혼을 지켜 주시도록 일임하여라. 폭풍우 이는 바다, 괴로운 세상을 지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오라"이다.
둘째, 주님은 그가 왔을 때 그를 도와 주셨다. "베드로는 물 위로 걸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참된 신자는 "그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앉히심을 받았다"(엡 2:5, 6). 또한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갈 2:20). 아마 이 말씀에서 생각컨데, "베드로와 예수님은 함께 물 위로 걸으셨던" 것 같이 추측된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를 세상을 견디며, 그것을 짓밟으며, 거기에 빠져들거나 삼킴을 당하는 것을 면하게 되며, 그리스도의 승리하는 믿음(요 16:33)에 의해 그것을 이기며(요일 5:4), 또한 그와 함께 그것에 대해 "십자가에 못박게 되는"(갈 6:14) 것이다. 축복된 바울은 예수님과 함께 물 위로 걸었으며, 그를 통하여 더 큰 정복자"가 되었으며, 무서운 물결들을 짓밟았으니, 이러한 것들이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게 할 수는 없었다"(롬 8:35 등). 이와 같이 세상 바다는 유리 바다와 같이 단단하게 응고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승리를 얻은 자들은 그 위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계 15:2, 3).
베드로가 물 위로 걸은 것은 기분 전환이나 허세를 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로 가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할 때 그는 이와 같이 놀랍게도 그 위를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마음들(영혼들)이 이렇게 주님을 따라갈" 때 그의 "오른손이 우리를 붙드신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다윗이 체험한 일이었다(시 63:8). 영적으로 추구할 때에만 특별한 후원을 약속 받거나 기대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에 업혀 "그에게로 인도하셨다"(출 19:4). 우리가 그리스도의 능력에 업히지 않았다면 그에게로 올 수는 도저히 없었을 것이다. 그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그와 더불어 씨름할 수 있고, 그를 따라갈 수 있으며, "표적을 향해 갈 때' 하나님의 능력(물 위로 걸어갔던 베드로처럼 우리는 그 능력에 의존해야만 된다)에 의해 보호하심을 받을 수 있다. "영원하신 팔에 안겨져 있는" 동안, 가라앉을 위험은 없다.
(2) 여기에는 베드로의 소심함(겁이 많음)과 그리스도께서 그를 책망하시고 구출해 주신 사실에 대해 기록이 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오라고 명하신 목적은, 그가 물 위로 걸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능력을 알게 되며, 또한 그가 물 속에 빠짐으로써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려고 하심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베드로의 신앙을 격려하신 것과 마찬가지고 그의 확신을 점검하고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그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베드로의 큰 두려움(30절). "그는 무서워하였다." 강한 신앙과 위대한 용기는 공포를 동반하고 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주여, 나의 불신앙을 도우소서"라고 말해야만 한다. "완전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두려움을 완전히 내어쫓을 수" 없다. 선한 사람들은 종종 이러한 은혜에 실패할 때가 있는데, 그들은 이 은혜에 대해 가장 탁월한 자이며 그것을 실행해야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아직 그것을 보여 줄 만한 정도에 이르지 못하였다. 베드로는 맨 처음에 매우 담대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의 마음은 풀이 죽어 있었다. 시련의 기간이 길어지면 믿음의 연약성이 발견된다.
첫째, 이 두려움의 원인. "그는 바람을 보았다." 베드로가 그의 눈을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 그리고 그의 능력에 고정시켰을 때 그는 충분히 "물 위로 걸어갈 수"있었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가 처해있는 상황과 "물결이 크게 출렁거리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몹시 두려워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신앙의 눈으로 계명들과 약속을 바라보는 것보다 감정의 눈으로 어려움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지나친 두려움의 주요 원인이 된다. 아브라함은 "그 자신의 몸을 생각하지 않았으므로"(롬 4:19) 그 신앙이 강하였다. 그는 있을 법하지 않은 약속에 결코 실망하지 않았으며,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았다. 그와 같이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롬 4:18). 베드로는 바람을 보았을 때, 그 이전에 보았던 것 즉 바람과 바다도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였던(마 8:27) 사실을 기억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날마다 계속적으로 두려워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지은 자이신 여호와를 잊어버렸기"(사 51:12, 13) 때문이다.
둘째, 이 두려움의 결과. 그는 "빠져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신앙을 가졌을 동안에는 바다 위로 걸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앙이 약해졌을 때 그는 "빠져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영들이 빠져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연약함에 기인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후원을 받고 있다(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믿음을 통하여서이다. 벧전 1:5).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낙심되고 불안하게 될 때"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바라는 일"(시 43:5)이다. 아마 베드로는 어부였으므로 헤엄을 잘 칠 수 있었을 것이다(요 21:7). 또한 그는 바다 속에 빠졌을 때 그러한 실력을 의지하였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가 걸을 수(물 위로) 없었다면 헤엄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가 빠져 들어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신 것은, 그를 구출한 것이 베드로 자신의 기술이 아니라 "그의 오른손과 거룩하신 팔"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베드로의 신앙이 연약해질 때에 그리스도의 위대하신 자비는 그가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즉 그가 "돌처럼 깊음에 내려가는 것"(출 15:5)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그에게 "주여, 구원하소서"라고 부를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그리스도는 참된 신자에 대하여 이와 같이 보살피신다. 비록 연약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잠기지는 않는 것이다! 사람은 그가 지옥에 있지 않는 한 결코 잠기거나 방치되지 않는다. 베드로는 그가 "믿고 있을" 동안에는 "걸어갔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너의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규칙이 유효하였다.
셋째, 그가 이 고통 중에서 사용하였던 치료제는 숙련되고 시험되고, 시인된 치료제 즉 기도였다. 그는 "주여, 구원하소서"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1. 그의 기도의 자세. 그것은 열렬하고 끈덕지게 조르는 자세(태도)였다. 즉 "그는 소리를 질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신앙이 약해질 때 기도는 강해야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가 두려울 때에 "간구(강한 외침)를 드릴 것을" 우리에 가르치셨다(히 5:7). 위험의 느낌은 우리를 부르짖게 만들지만,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신뢰의 느낌은 우리로 하여금 부르짖기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2. 그의 기도의 주제는 요령 있고 적절한 것이었다. "그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소리 질렀다. 그리스도는 위대하신 구세주이시며, 구원하러 오셨다.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자는 그에게 "와야 할"뿐만 아니라 구원을 위하여 그에게 "소리를 질러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물에 빠지기 전에 이러한 행동을 결코 하지 않는다. 필요성은 우리를 그에게로 내몰 것이다. 이 위급한 때 베드로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위대하신 사랑. 비록 베드로의 신앙에는 처음 모험시에 오만함이 있었다 할지라도 또한 나중때에 그의 신앙에 불신앙이 섞여 있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그를 내어버리시지 아니하셨다. 그 이유는,
첫째, 주님은 그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는 그 오른 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셨다"(시 20:6). 왜냐하면 즉시로 "그는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빠져 들어갈 때(시 18:4-7)라는 사실이다. 그는 죽은 자를 도와 일으키신다. 그리스도의 손은 지금도 모든 믿는 자들을 빠진 곳에서 건지기 위하여 손을 내밀고 계시다. 그가 한 번 그의 소유로 인정하고 "불 가운데서 꺼낸 불이 붙은 나무(brands)"같이 잡아 챈 자들을 그는 물 가운데서도 역시 잡아당기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붙잡으신 것을 버리시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그렇게 하시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이요, 또 저희를 주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을 것이기(요 10:28)" 때문이다.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 그는 그 자신에 속한 자들을 붙드실 것이다. 아무리 큰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하여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두려움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의 능력과 은혜에 속해있기 때문이다(시 34:4).
둘째, 주님은 그를 책망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하고 소중히 하는 것만큼 책망하고 나무라신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신앙은 참되지만 약할 수 있다. 즉 맨 처음의 겨자씨와 같다. 베드로는 그를 물로 걸어갈 수 있게 한 충분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걸어가도록 할 수 있는 신앙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 우리가 의심과 두려움으로 낙심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연약성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의심"하는 것은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폭풍이는 날에 감정의 의심을 버리는 것이 신앙의 할 일(본분)이다. 그때에는 우리의 목이라도 물 위에 계속적으로 내밀 수가 있다. 우리가 더욱(more) 믿으려 한다면 의심을 덜(less) 해야만 한다.
3. 우리의 믿음의 연약함과 우리의 의심의 우세함(강함)은 우리 주 예수님을 몹시 불쾌하게 한다. 그가 약한 신자들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약한 믿음 아니 그에게 가까이 있지 않은 자들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왜 의심하였느냐?"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의심과 두려움은 그것들을 묻는 엄격한 질문 앞에서 곧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비록 폭풍우가 일지 않는 날이라 할지라도 의심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될 충분한 이유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 그들을 도우시려고" 준비하시기 때문이다.
Ⅵ. "폭풍우가 그침"(32절). 그리스도께서 배에 오르셨을 때 그들은 즉시 해안에 이를 수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배에 오시기까지 "물 위로 걸어오셨으며," 그가 쉽게 해안으로 걸어가실 수 있으실 때 배로 들어오셨다. 일상적인 방법이 있을 때(역주:해안으로 걸어가실 수 있을 때) 이적은 기대될 수 없다.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을 행하기 위하여 사용할 도구(instruments)가 필요치 않으시지만, 그것들을 사용하기를 기뻐하신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그리스도께서 배에 들어오셨을 때 베드로도 그와 함께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인내함으로 그리스도와 동반자가 된 자는 그의 왕국에서 동반자가 될 것이다(계 1:9). 그와 함께 걷는 자는 그와 함께 왕노릇 할 것이다. 그와 함께 드러나 고난을 받는 자는 그와 함께 승리할 것이다.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왜냐하면 바람은 그 시련 하는 임무를 다 마쳤기 때문이다. "손에 바람을 잡으시고 옷으로 물을 붙으신" 분은 "오르고 내리셨던" 동일한 분이시다. "그의 말씀은 사나운 바람까지도 성취된다"(시 148:8). 그리스도께서 영혼(마음)에 들어오실 때 그는 바람과 폭풍우를 그치게 하시고 평안을 명령하신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라. 그리하면 "노도 광풍의 소리는 곧 사라지고"말 것이다. 잠잠케 하는 길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과 "우리의 주님"이심을 깨닫는 일이다.
Ⅶ. 이 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 드려진 경배(33절).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제자들은 이러한 고통과 구원을 통해 두 가지 유익한 점을 얻게 되었다.
1.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더욱 확신케 되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그와 함께 거하심을" 충분히 확신케 되었다. 왜냐하면 세상을 만드신 자가 아니면 떡을 불어나게 할 수 없으며, 세상을 통치하는 자가 아니면 바닷물을 짓밟으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증거를 얻게 되었고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즉 "진실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그들은 이전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더욱 알게 되었다. 불신앙과 더불어 투쟁한 후에 신앙은 때로 더울 활동적이 되며, 또한 실행됨으로써 더욱 큰 능력을 얻게 된다. 지금 그들은 "그것이 진리임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더욱더 아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사실이다(눅 1:4). 신앙은 완전한 확신에 이르게 될 때, 그것이 분명하게 보이고 또한 "진실로"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신앙은 자라나는 것이다.
2. 그들은 이 경우를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기회로 삼았다. 그들은 위대한 진리를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진리에 의해 적절하게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경배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때 우리는 그 영광을 마땅히 그에게 돌려야만 한다(시 50:15)는 사실이다.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경배와 경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신조(신앙 고백)의 주제는 우리의 찬송의 주제가 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신앙은 예배의 적절한 원리이며, 예배는 신앙의 순수한 소산물이다. "하나님에게 나아오는 자는 그를 믿어야만 한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에게 "나아올"것이다(히 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