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향기는 사람을 따라가지 않는다
- 동적 평형(Dynamic Peace)
제1장 파문
결혼기념일 아침이었다.
이도헌은 창가에 오래 앉아 있었다.
유리창에는 밤새 머물던 습기가
아직 다 마르지 않아,
바깥 풍경은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조금 흔들려 보였다.
뜰 가장자리의 나무들이 바람에 잎을
뒤척일 때마다,
여린 햇빛도 함께 떨렸다.
식탁 위에는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나에서는 아직 김이 오르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천천히 식어 가고 있었다.
한서정은 이미 준비를 마친 얼굴로
마주 앉아 있었다.
오래 함께 살아온 사람들만이
지닐 수 있는 고요가
그녀의 어깨 위에 가볍게 내려앉아
있었다.
“오늘, 그 전시 보러 갈까요?”
그녀가 묻자 도헌은 잠시 창밖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요.”
짧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 짧음 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세월이 들어 있었다.
젊은 날의 대답은 더디고 길었는데,
세월은 사람의 말끝을 닳게 만들고,
닳은 자리에 침묵을 놓아두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 오래 알아 왔고,
그 오래 앎이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오해로 굳어 있었다.
미술관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공기는 생각보다
서늘했고,
풀잎 끝마다 이슬이 남아 있었다.
건물은 낮고 희었으며,
문 앞의 자갈길은 햇빛을 잘게
부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밝은 마루와
흰 벽 사이로
고요한 빛이 길게 흘렀다.
먼저 걸어 들어간 것은 서정이었다.
그녀의 발걸음 아래로 얇은 빛이 번지며
잔물결처럼 흩어졌다.
도헌은 몇 걸음 뒤에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늘 곁에 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낯설 만큼 멀고도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다.
그는 그 순간이 어쩐지 오래 미뤄 둔
계절처럼 느껴졌다.
전시장 바닥은 유리와 물빛을 닮아
있었다.
사람이 지나가면 아래쪽으로 작은
파문이 생겨났다.
잠시 멈추면 파문도 멈추었다.
다시 걸으면 또다시 번졌다.
도헌은 자기 발끝 아래 퍼져 나가는
원들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물은 잠잠한 척하지만,
그 잠잠함은 빈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향해 한 걸음 내딛는
순간에만 비로소 보이는 흔적들.
가까이 가려는 움직임이 있어야만
생겨나는 미세한 떨림들.
그는 문득 생각했다.
오래된 관계도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커다란 사건이 아니라,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작은 파문으로.
누군가 먼저 움직였다는
사실만이 남기는 잔잔한 증거로.
그날 미술관의 첫 방에서
그는 그림보다 먼저,
자기 안에 오랫동안 멎어 있던
물의 표면을 보았다.
제2장 향기
두 번째 방은 비어 있는 듯 보였다.
넓은 흰 벽과 희미한 조명,
그리고 중앙 가까이에 놓인
낮은 받침 하나.
그 위에 백합 한 송이가 있었다.
화려한 장식도 설명문도 없이,
그저 한 송이 꽃이 돌 틈에서 스스로
피어난 것처럼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지나쳤다가
몇 걸음 뒤에서 다시 돌아왔다.
서정도 그랬다.
꽃 앞에 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오래 머물렀다.
마치 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꽃 곁의 공기를 듣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도헌도 그녀 옆에 섰다.
꽃은 거의 완벽할 만큼 조용했다.
흰 꽃잎의 곡선은 날카롭지 않았고,
중심부의 엷은 노란 기색은
겨우 숨을 쉬는 온기 같았다.
향기는 멀리 퍼지지 않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선 사람에게는
분명히 남았다.
스쳐 가는 것만으로는
놓쳐 버릴 수 있는,
아주 작은 체온 같은 향기였다.
도헌은 문득 기억을 더듬었다.
서정이 좋아하던 냄새가 있었는지.
젊은 날 그녀의 머리칼에
배어 있던 비누 향,
겨울 코트에 스미던 찬 공기 냄새,
비 오는 날 우산 안쪽에 남던
축축한 섬유의 냄새 같은 것들.
한때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
한 사람을 이루는 중요한 비밀처럼
느껴졌는데,
오랜 세월을 지나오며
그는 너무 많은 것을 당연하게
여겨 버렸는지도 몰랐다.
함께 살아온 시간은 길었지만,
그 긴 시간 속에서 무엇이
남았는지를 묻는 일은 별로 없었다.
기념일은 있었고,
가족사진도 있었고,
함께 건넌 계절도 많았다.
그러나 정작 기억 속에 오래 남는 것은
늘 그런 커다란 날이 아니었다.
어느 겨울 새벽,
서정이 말없이 그의 목도리를
고쳐 매 주던 손길.
몸살이 심하던 밤 물수건을
갈아 주던 손등의 서늘함.
마당의 장미가 처음 피었다며
그를 부르던 목소리.
사람은 사건보다 기척으로
더 오래 기억되는지도 모른다.
세 번째 전시실로 들어서자 천장
가까이에 작은 빛들이 떠 있었다.
빛은 서로 닿지 않은 채 희미한
선으로 연결되었다가,
누군가 가까이 가면 조금 밝아지고,
멀어지면 조용히 옅어졌다.
그것은 관계의 지도 같기도 했고,
한때 누군가의 마음속에 켜졌다가
사라진 기억들의 잔광 같기도 했다.
“사람은 서로 안으로 들어가 사는 게
아니죠.”
서정이 낮게 말했다.
도헌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냥… 조금 남는 거예요.
빛이든 향기든.”
그 말은 짧았지만,
그날 전시장 안에서 가장 오래 머문
문장이 되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의 삶에 집을 짓는 일보다,
오래 사라지지 않을 기척 하나를
남기는 일이 더 어려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향기는 붙들 수 없다.
그래서 더 오래 남는지도 모른다.
제3장 균형
전시장 한가운데에는 두 개의
큰 돌이 매달려 있었다.
처음 보면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래 바라보면 둘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듯하다가도
끝내 부딪히지 않았고,
멀어지는 듯하다가도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았다.
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었지만,
바로 그 보이지 않음 때문에
오히려 더 긴장감이 있었다.
서정이 먼저 웃었다.
“꼭 우리 같네요.”
도헌도 따라 웃었다.
그 웃음은 오래 비워 두었던
서랍이 열릴 때 나는 소리처럼
조금 어색하고 조금 반가웠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돌을
바라보았다.
세월 동안 그들은 서로를 바꾸려
했던 적도 있었고,
포기했던 적도 있었다.
닮아지기를 바랐던 시절이 지나자
이제는 다름을 견디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로 모든 마음이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는 없다는 것,
사랑은 완전한 일치가 아니라
다른 리듬을 오래 잃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늦게야 알아 가는 중이었다.
미술관을 나와 두 사람은
버스를 타지 않고 걸었다.
언덕 아래로 이어진 들길에는
이름 모를 흰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들은 한쪽으로
몸을 기울였지만,
어느 것도 바람을 따라
뿌리를 옮기지는 않았다.
도헌은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흔들리되 떠나지 않는 것.
같이 움직이되 자기 자리를
잃지 않는 것.
어쩌면 부부라는 시간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너무 가까워
서로를 삼켜서도 안 되고,
너무 멀어 그림자만
남아서도 안 되는 거리.
그 애매하고 어려운 간격을
평생에 걸쳐 배워 가는 일.
길 가장자리에서
그는 작은 흰 꽃 한 송이를 꺾었다.
젊은 날에는 아무렇지 않게 하던
행동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사소한 몸짓도
낯설어졌다.
꽃대가 손가락 사이에서
가늘게 휘었다.
그는 그것을 들고 한참 걷다가
별다른 설명 없이 서정에게 내밀었다.
서정은 받지 않고
먼저 그 꽃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 짧은 사이에 바람이 한 번 지나갔다.
도헌은 이상하게도 그 잠깐의
머뭇거림이 좋았다.
오랜 관계는 즉시 알아듣는 반응보다,
한 박자 늦은 이해 속에서
더 다정해질 때가 있다.
상대가 무엇을 건네는지
충분히 바라본 뒤에야
받아 드는 마음.
그 느린 동작 속에
시간의 무게가 있었다.
둘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발밑의 흙은 부드러웠고,
하늘은 생각보다 높았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침묵의 결이 아침과는 달라져 있었다.
같은 침묵인데도,
어떤 것은 멀게 하고
어떤 것은 곁에 머물게 한다.
그날 들길의 침묵은 후자에 가까웠다.
제4장 식탁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 빛이 이미 방 안으로 길게
기울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아침에 두고 나간
자리들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찻잔 둘, 접힌 냅킨 하나,
신문 위에 벗어 둔 안경.
하루 동안 집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고요는 텅 빈 것이
아니라 기다림에 가까워 보였다.
서정은 뒤뜰로 나가 화단을 살폈다.
흙을 뒤적이는 그녀의 손길은
늘 일정했다.
물을 너무 많이 주지도,
너무 적게 주지도 않는 사람의 손.
가지 하나를 자를 때도
망설임이 적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 내야 하는지
오래 지켜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였다.
도헌은 창가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문득 신혼여행 때 묵었던
산장의 새벽이 떠올랐다.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고,
창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순식간에 이불 속까지 들어왔었다.
그때 서정은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산등성이를 가리켰다.
구름 사이로 봉우리들이
하나씩 드러나던 그 아침에,
두 사람은 앞으로의 삶을
너무 쉽게 상상했는지도 몰랐다.
사랑은 저절로 자라는 나무 같고,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오래
푸를 것이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무도 그대로 두면 엉킨다.
물길도 손보지 않으면 막힌다.
가까운 사이는 오히려
돌보지 않기 쉬워서,
어느새 익숙함이라는 이름의
먼지가 얇게 내려앉는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생각,
굳이 묻지 않아도 된다는 편의,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받고 싶다는 기대.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은 한 사람의 얼굴을
흐리게 만든다.
도헌은 식탁의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도
의자는 유난히 비어 보였다.
그는 그 빈자리의 형태를
눈으로 더듬다가,
사랑이란 어쩌면
누군가가 앉아 있을 때보다
비어 있을 때 더 선명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자리에 누가 있어야 하는지를
몸이 먼저 기억하기 때문이다.
부엌 쪽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
서정이 들어와 주전자를 올려둔
모양이었다.
금속이 달아오르며 내는 작은 울림,
찻잎을 덜어 내는 숟가락 소리,
찻잔 가장자리에 물이 닿는 소리.
그 익숙한 소리들이
저녁의 정적을 조금씩 채워 넣었다.
삶은 결국 이런 소리들 사이에서
늙어 간다.
거창한 선언 없이,
아주 일상적인 반복 속에서.
그리고 사랑이 정말 오래
살아남는다면,
아마 이런 사소한 소리들의
배열 속일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물을 끓이고,
식지 않게 잔을 데우고,
먼저 앉지 않은 채 기다리는 식의
느린 배려 속에서.
그날 저녁의 식탁은 비어 있으면서도
비어 있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있었고,
그래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이
머물러 있었다.
제5장 손
밤이 오자 집 안의 사물들은
모두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책장의 모서리도,
커튼의 주름도,
벽에 걸린 액자도 낮보다 덜 분명했다.
빛이 사라지면 사물은 윤곽 대신
기척으로 남는다.
사람도 비슷했다.
낮 동안 단단하던 마음이 밤에는
조금 느슨해져서,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이
어둠 속으로 천천히 떠오르곤 했다.
서정은 거실 소파 끝에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은 켜져 있었지만
둘 다 보고 있지 않았다.
화면의 빛이 간헐적으로 벽을 스쳤고,
그 빛이 지나갈 때마다
서정의 옆얼굴도 잠깐씩
드러났다 사라졌다.
도헌은 물컵을 내려놓고
그녀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고는 잠시 멈추었다.
손을 내미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아주 오래전에는 아무 뜻 없이도
쉽게 하던 일이,
세월이 흐른 뒤에는 마음보다
먼저 용기를 필요로 하게 된다.
혹시 어색할까,
혹시 늦었을까,
혹시 상대가 이미 그런 몸짓을
지나쳐 왔을까.
수많은 망설임이 짧은 순간에 몰려왔다.
그의 손은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
서정도 바로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그녀는 도헌의 손을 한번 보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사이에는 설명할 수 없는 여백이
생겼다.
그러나 그 여백은 차갑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다시 가기 위해 필요한 거리처럼
느껴졌다.
도헌은 그제야 깨달았다.
가까움은 거리의 부재가 아니라,
거리를 건너려는
마음에서 생긴다는 것을.
부부라고 해서 언제나
이미 닿아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날에는 다시 처음처럼
다가가야 하고,
어떤 날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상대의 침묵 옆에 앉아 있어야 한다.
마침내 서정이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손이 맞닿았을 때,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음악도 없었고,
극적인 말도 없었다.
다만 손등의 온기가 천천히
전해졌고,
그 온기가 생각보다 또렷하다는
사실이 둘을 잠시 놀라게 했다.
젊은 날의 손은 뜨거웠다면,
지금의 손은 오래 데운 찻잔처럼
잔잔했다.
그러나 잔잔한 온기야말로
오래 손에 남는 법이다.
서정이 먼저 손가락 끝을 조금
움직였다.
도헌은 아무 말 없이
그 미세한 움직임을 따라잡았다.
밤은 깊어 갔다.
창밖의 나무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잎 스치는 소리만은 들렸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오히려
분명해지는 시간.
그 속에서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손을 잡고 앉아 있었다.
말이 없어도 되는 순간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보다 온기가 앞설 때 찾아온다.
제6장 벤치
이튿날 아침,
도헌은 마당 한가운데
벤치 하나를 놓았다.
오래전부터 집 창고에 들어 있던
작은 나무 벤치였다.
페인트는 군데군데 벗겨졌고,
등받이 한쪽은 햇빛에 바래 있었다.
그는 마른 걸레로 먼지를 닦고,
흔들리는 다리를 다시 고정한 뒤,
감나무 그늘이 가장 먼저 내려앉는
자리에 그것을 옮겨 두었다.
벤치는 비어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빈자리는 쓸쓸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내쫓은 자리가 아니라,
언제든 쉬어 가라고
남겨 둔 자리처럼 보였다.
사람은 때때로 말보다
자리를 통해 마음을 전한다.
여기 앉아도 된다고,
여기 잠시 머물러도 된다고,
나는 당신이 올 수 있는 공간을
남겨 두었다고.
해 질 무렵 도헌은 전날 들길에서
꺾어 온 흰 꽃 한 송이를 벤치 위에
올려두었다.
꽃은 이미 조금 시들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조용하고
진실해 보였다.
가장 아름다울 때의 꽃은
선명하지만,
조금 쇠한 꽃에는 하루를 지나온
시간이 배어 있다.
도헌은 그 시간마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서정이 마당으로 나왔다.
그녀는 벤치 위의 꽃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누가 두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순간이 있다.
오래 함께 산다는 것은 마침내
서로의 필체 없는 편지를
알아보게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서정은 꽃을 집어 들지 않았다.
대신 그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노을빛이 꽃잎 위에 천천히
내려앉았고,
벤치의 나무결 사이로
하루의 그림자가 길게 스며들었다.
공기는 맑았고,
바람은 거의 없었다.
그 고요 속에서 향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데도 분명히 거기 있었다.
향기는 사람을 따라가지 않는다.
다만 머문다.
떠난 뒤에도 조금 남아 있다.
그래서 사람은 문득 그 자리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사랑도 꼭 그런 것이 아닐까.
붙잡으려 할수록 손아귀에서
먼저 식어 버리고,
조용히 남겨 둘수록 어느 날 스스로
마음 가까이 와 앉는 것.
창가에 선 도헌은 마당을 바라보았다.
서정의 어깨 위로 늦은 햇빛이
얇게 흘렀다.
그는 그 장면을 오래 기억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꽃을 두었다는 사실보다,
그 꽃 앞에 멈춰 선 한 사람의 뒷모습을
더 오래 기억하게 되리라는 것을.
잠시 뒤 그는 부엌으로 가서
찻잔 두 개를 꺼냈다.
주전자를 올리고,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아주 사소한 준비였지만,
그 사소함 속에 내일도
반복할 수 있는 마음이 들어 있었다.
사랑은 거대한 맹세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랑은 한 사람을 위해
작은 자리를 비워 두는 일,
그리고 그 자리에
오늘도 조용히 꽃 한 송이를
놓아 두는 일인지도 모른다.
노을은 서서히 저물어 갔다.
그러나 벤치 위에 남겨진 향기는,
날이 어두워진 뒤에도
오래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