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12. 05;30
새벽에 비가 내렸다.
몇 시간 전만해도 미세먼지 지수가 100을 넘나들었는데,
살짝 내린 '는개'는 미세먼지를 말끔히 걷어갔다.
'개양귀비' 핀 개울을 건너 숲에 들어서자 마스크를 내리고 길게 심호흡을 한다.
< 개양귀비 >
아카시향이 콧속으로 스멀스멀 들어오고 산새들 지저귀는 소리 청량하다.
4월에 각종 봄꽃이 눈을 호강시켰다면,
5월은 아카시향으로 콧속이 황홀하고, 새들 지저귀는 소리로 귓속이 호강하는
달이다.
오늘은 어느 산새가 짝짓기에 성공하려나,
아카시 꽃 만발한 숲 하늘가에 하현달(下弦月)이 서쪽을 향해 나아간다.
평소보다 30여분 일찍 도착한 내 사유(思惟)의 전용공간인 숲은 고요하다.
산비둘기 푸드득 대는 곳에 '둥굴레'가 흰 자태를 뽐내며 금세라도 종소리를
보낼 것만 같다.
지난주 당구를 치던 중 친구가 알바를 뛰겠느냐고 의향을 묻는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나도 백수 12년차가 되었구나.
문득 10년 전 경제교육 강사를 지원하여 KB카드에서 5만원을 벌은 게 생각난다.
< 둥굴레 >
나는 일찍 자는 게 습관이 되었기에 꿈을 많이 꾸는 편이다.
제일 많이 꾸는 꿈이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꿈이라면, 자주 꾸는 꿈은 군대생활을
다시 하는 꿈이다.
요즘 사는 게 진부(陳腐)하던 차에,
무슨 일을 하는 알바인지 모르겠지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 수레국화 >
첫날 친구와 동행하여 간 알바장소는 수익형 호텔을 분양하는 곳인데,
나의 역할은 바람잡이다.
내용은 잘 몰라도 손님인척 그냥 능청을 떨며 분양현장의 분위기를 살리는 건데,
오랜만에 현장에서 느끼는 감정은 당혹(當惑)스럽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 개양귀비 >
지점장시절 입주자 대출 섭외를 하기 위해 분주하게 드나든 곳이 분양사무실이라,
분위기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괜히 어색하고 주눅이 든다.
갑(甲)의 신분에서 을(乙)의 처지로 바뀌어서일까.
문득 천호동 노변(路邊)에서 가방을 팔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호객꾼은 소리 높여 손님을 부르고, 중년여인들은 가방을 만지작거리다 물건을
사서 떠나고 궁금하게 생각한 사람들은 점점 몰려든다.
한참 후 그 장소를 지나치며 묘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몇 시간 전 가방을 샀던 여인들이 오전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데, 그들이 바로
바람잡이였고 오늘의 내 역할이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거다.
< 유채꽃 >
다음날 알바 2일차 장소는 양주 옥정지구 오피스텔 모델 하우스이다.
휴일 이른 아침 굵은 빗줄기는 차창을 사정없이 때리고, 내가 탄 차는 텅빈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거세게 몰아치는 비바람을 맞은 이팝나무의 꽃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광역버스는 코로나 덕분인지, 비가 오는 덕분인지 평소 두 시간 걸린다던 현장을
단 50분 만에 도착한다.
둘째 날은 어제와 달리 조금 익숙해졌기에 어리바리하지 않다.
< 이팝나무 >
연봉 1억 6~7천만원을 받으며 갑(甲)으로만 생활을 했는데,
이틀간 일당 5만 원짜리 알바를 하며 세상에 대해 더 알게되었다.
캐주얼 정장으로 말끔한 복장을 한 거도 시비대상이었고,
분양에 대해 아는 척을 했다가 핀잔을 받기도 하였으며,
오전 오후 복장이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받았다.
민주당을 지지해야 또 불러준다는 여인도,
십수년 바람잡이를 한 여인들은 나에게 묘한 교훈을 준다.
그들은 실수요자를 미혹(迷惑)하는 행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으며,
5만 원짜리 알바는 5만원 수준에 걸 맞는 복장과 행동을 하면 된다는 거다.
<샤스타테이지>
2일차 알바를 마치고 귀가하니 아내가 장식장을 보라고 한다.
알바비 5만원을 아직 받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번 돈이라 미리 주었더니
차마 쓰지 못하겠다며 장식장에 기념으로 장식을 한 거다.
장식장의 돈을 보며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묘한 생각이 든다.
2020. 5. 12.
석천 흥만 졸필
첫댓글 감사하게 생각하게나.
늙은 석천선생을 불러줬다는것에~~~~.돈에 가치는 옛날의 꿈속이고,현재는 별 의미가없는거라네.
주당 최봉길선생 막걸리나 한잔 사드리게~~~알바비로? 부족하면 내가보태리다~~~.
석천선생! 돈이 중요한게 아니라 일을 한다는게 중요하지요. 그리고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는게 행복입니다.
ㅋㅋㅡ고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