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하고 강하신 주님 (눅 11:17-22)
장사를 하거나 서비스업에 종사 하시는 분들 얘기를 들어 보면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희한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비상식적이고 비인격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난단다. 인터넷 기사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있을까 싶지만, 세상은 넓고 희한한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가 보다. 희한한 것도 여러 유형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좋은 일을 도무지 좋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 좋은 일을 하면 다들 좋아할 것 같지만,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좋은 일을 해도 이런 저런 구실을 갖다 붙여서 비난하는 희한한 사람이 의외로 상당히 많다. 지금 이 시간에 구체적인 사례를 일일이 언급할 순 없지만, 아마 여러분들도 한번쯤은 겪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좋은 일을 해도 일단 비난부터 하고 보는 희한한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귀신에 들려서 벙어리가 된 사람을 치유해 주셨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감사하고 기뻐했다.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귀신을 내쫓는 걸 보니 귀신과 한통속이 분명하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
(눅 11:14-15)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여기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라는 말은 ‘사탄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낸 건 어디까지나 사탄과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두 가지 반론을 펼치셨다.
① 내부 분열은 나라를 붕괴 시킨다고 반박하셨다.
(눅 11:17-1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만약 그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이 사탄의 힘으로 귀신을 공격하고 내쫓았다면 그게 어떻게 사탄의 나라를 더 강하게 만드는 일이 될 수 있겠는가? 이건 사탄의 앞잡이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탄의 힘으로 귀신을 내쫓았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억지에 불과하다.
② 이중 잣대를 들이 밀면 안 된다고 반박하셨다.
이중 잣대가 뭐냐면 똑같은 사안에 대해서 각각 다른 기준(주로 자기에게 유리한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다. 흔히 쓰는 말로는 내로남불(내가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한다.
예수님과 제자들 외에도 귀신을 내쫓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예수님을 향해서 “사탄의 힘으로 귀신을 내쫓는다”고 모함한 사람들의 자녀들도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역으로 되물으셨다.
(눅 11:19)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들의 주장처럼 만약 예수님이 사탄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내쫓은 거라면, 그들의 자녀들은 도대체 무슨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았다고 해야 할까? 그들도 예수님처럼 사탄의 앞잡이라는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자기 아들들이 귀신을 내 쫓은 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면서, 왜 예수님이 내 쫓은 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고 하는가? 이거야 말로 전형적인 이중 잣대 아닌가? 둘 다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둘 다 사탄의 앞잡이라고 하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해야 되지 않겠는가?
어떤 일에 대해서 판단하고 평가할 때는 자신과 타인에게 동일한 기준을 가지고 해야 한다. 그래야 타당성이 있다. 자기에게만 유리한 기준을 갖다 대고 다른 사람에게는 불리한 기준을 갖다 댄다면 빈축을 살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도 이 문제를 지적하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이번 사건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해 주셨다. 크게 세 가지이다.
①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행하신 일이었다. 바꿔 말하면 예수님은 사탄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이미 임했다”고 표현하셨다.
(눅 11:20)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②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귀신 보다 더 강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군인’간의 전투에 빗대어 표현하셨다.
(눅 11:21-22)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완전 무장한 두 군인이 맞대결을 펼치면 누가 이기겠는가? 당연히 더 강한 자가 이긴다. 귀신이 예수님을 물리친게 아니라,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게 말해서 예수님이 더 강하시기 때문이다.
③ 귀신이 쫓겨난 건 그저 시작일 뿐이다. 한걸음 더 나가야 한다.
귀신에 들려서 벙어리가 된 사람이 귀신으로부터 해방되고, 다시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은 분명 크고 놀라운 일이다. 일생일대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그저 시작일 뿐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눅 11:14, 28)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만약 이 사람이 귀신이 쫓겨나서 병이 나은 걸로 만족할 뿐, 정작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처음 귀신 들렸을 때 보다 상태가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귀신-악한 영들이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눅11:24-27)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예수님은 분명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 주셨다. 하지만 그를 구원해 주신 것은 아니었다. 이건 뭐하고 같냐면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이 수술을 통해 병이 나았다고 해서, 그게 곧 건강하게 된 건 아닌 것과 같다. 그저 병이 나았을 뿐이다. 마찬가지다. 귀신으로부터 해방된 것과 예수를 믿고 구원 받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러므로 귀신들렸던 사람은 귀신이 쫓겨난 것으로 만족하면서 그 상태에 머물지 말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진짜 구원 받은 것이고, 진정한 복을 누리는 것이다.
이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 살펴보면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다. 앞에서 다 설명했기 때문에 최대한 간략하게 말씀 드리도록 하겠다.
1. 강한 자가 이기는 법이다. 예수님은 강한 분이시다.
귀신, 사탄은 강한 존재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귀신조차도 말씀 한마디로 물리치실 만큼 강한 분이시다. 예수님은 연약한 분이 아니다. 가엾은 분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님은 위대하고 강한 분이시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기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강한 손으로 친히 우리를 돌보시고 지켜 주실 것이다.
2.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 받는 건 아니다.
무슨 일을 하든 비난하는 사람은 반드시 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고도 사탄의 앞잡이라는 모함을 받으셨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우리의 의도나 예상과는 다르게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비난 받았다고 좋은 일을 멈추지 말라. 하던 일을 계속해 나가라. 그게 좋은 일을 더 좋게 만드는 비결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다.
3. 가만히 있으면 현상을 유지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퇴보한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신 후에 그 상태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흔히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고 하는데, 이건 괜히 쓸데없이 나서서 화를 자초하지 말라는 취지에서 하는 말이지, 정말로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해도 중간 정도는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신앙생활이든 뭐든 다 마찬가지다. 지금 상태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그러면 현상을 유지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퇴보하게 된다. 현재 상태에 만족하면서 머물러 있지 말고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다.
말씀을 맺겠다. 귀신들려 벙어리가 된 사람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아 주시고, 그를 고쳐 주셨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귀신보다 강한 분이이었기 때문이다. 귀신들은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지만 예수님은 그런 귀신들을 벌벌 떨게 만드셨다. 이것만 봐도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강한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몇몇 사람들에게 사탄의 앞잡이라는 근거 없는 모함을 당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난에 굴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차근차근 설명해 주시고, 당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도 가르침을 전하셨다.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더 현재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도록-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되도록 이끄셨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좋은 일을 행하신 후에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셨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위대하고 강하신 예수님을 의지하기 바란다. 근거 없는 비난에 굴복하지 말고 좋은 일, 선한 일을 계속해 나가기 바란다. 무엇보다도 지금보다 믿음과 인격과 실력이 더욱더 자라가 복된 자들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좋은 일을 더 좋게 만드는 여러분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출처: https://ssub2.tistory.com/1853 [썹목사 함께 자라는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