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
비가 내리는 어수선한 고물 야적장. 심드렁한 컨테이너 안 풍경.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는 호규를 이사장이 근엄히 불렀다.
"호고야 이리 와서 내말좀 들어봐라"
"날자도 그렇더니 오후도 그렇고 이젠 호고라니 철학관 차려서 작명소나 하시는게 어때요?"
"그..그러까? 오후로 변명해서 잘나가긴 했잖아!"
"끝에가서 폭망해서 탈이었지"
한켠에서 티브이를 보던 박상이 끼어들었다.
"이름은 모름지기 부르기 쉬워야 한다. 그런 사례를 들자면 너무 많아 내이름만 봐도 그래. 힘든 여병보다 어벙이가 훨 좋아 그리 불려도 난 기분나쁘지 않아 팍상만 하더라도 그리 부르는 사연도 있다만 박씨보다는 훨 낫잖냐"
"낫긴 개코가!"
"크게 화내지 않는 것만 봐도 일리는 있겠네요. 그런데 사연이라니?"
"지금은 교육중이니 나중에 본인에게 직접 들어라. 난 남말 뒷담화 못한다는 것 알잖냐"
"딸 뒷담화하는 게 몇달간 큰 재미거리면서 어처구니가"
"나..날자얘긴 말랬잖아"
"이생 입만 주댕이여? 날자의 날짜도 안꺼냈건만. 이젠 딸뿐 아니라 아들 마누라란 단어도 쓰지 말라고 하것네?"
"이러다 정말 다투시겠어요. 그만요"
14. 입단
"그래 수업이 먼저지. 내 생각이 모자랐다 아니 지금 다툼얘기가 아니고 저번의 울내. 울내는 너의 데부곡이어야 한다고 우겼지만 아니여..네 은퇴곡이 되어야혀. 너나 우리나 아직 헤매기도 하지만 울내에 너무 안달하지 말고 익을 때까지 제일 나중에 결산곡이 되어야 한단 말여"
"예. 무슨 얘긴지 충분히 알아들었어요. 백프로 공감합니다. 선생님. 솔직 지난 한달간 울내에게만 매달려 다른 것을 돌아보지도 못했거든요"
"넌 정말 신통한 학생여..갈치는 그대로 흡수라니..
팍상 뭐혀? 나 말하기 힘들어"
"폼잡는 건 독점이고 구찮은 건 떠넘기고 하여간..호규야 옛다 받어라"
종이 여러장을 내준다
"이, 이게 뭔데요?"
"네 노래. 네 자작곡"
"...연변아리랑..원곡동부르스..이태원샹송 저 이런 노래란 처음.."
이사장이 끼어들었다.
"저번에 네가 그랬잖아. 중부를 대표하고 조선족 월남 미국 일본도 아우를 노래가 나와얀다고. 그러니 네가 만든 노래지.."
호규의 입이 딱벌어졌다.
"울내를 벗어던지면 너도 놀래. 여기 와서 매일 장기나 두며 두논네에게 바가지만 긁을래?"
박상이 묵직하게 말했다.
"수원과 안양 영등포 몇군데 잡아놨다. 수준이나 캐라는 아카시아보다 훨 못하겠지만 돈 생각말고 네 노래 광고한다치고 불러봐"
"박선생님..저. 정말 감사합니다"
"완벽하진 않으니 가사나 가락 점차 다듬어 가야 될기여..솔직 뜰 가능성은 없지만.."
"뭔 재수읎는 소리! 내가 읽는 촉으로는 뜰 가능성이 50파센트 이상이여.."
"최선을 다한다면 안뜬들 무슨 상관일까요"
"축하헌다 호고야, 저번엔 긴가민가했다만 드디어 입단에 성공했구나"
"저 파리에 취해서 실수해도 이해하세요"
수원 이판사판이란 스탠드바에서 노래하는 호규.
-- 난 몰라 아무것도 몰라 이태원역사 따위 알게 뭐야.
하지만 사랑만은 알고 싶어 오솔레미오--
시큰둥한 청중들은 신경도 안쓰고 있다. 하지만 이어진 히트곡엔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부는 갈대숲을 지나 --
비오는 고속도로 쉼터로 꺾어드는 경차. 운전석엔 피곤에 지친 호규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짐작은 했지만...무명가수란 게...이리 힘들 줄은..'
'하지만 나하나만 바라보는 두 선생님을 생각한다면..'
기어를 넣고 출발하는 호규의 결연한 표정
'그리고 동해안의 선생..누나님을 위해서!'
심야 안산의 주점거리. 지하 무대는 악단도 올갠과 드럼 뿐이고 거의 노래방 수준의 장소였다. 남녀 여러쌍이 주변에서 춤추는데 열창하는 심호규.
-- 그대 떠난 원곡동에 짜장맛 황사비만 내린다 --
역시 별 반응없는 청중들이었다. 곡이 신나게 바뀌었다.
--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은 아무나 하나 --
돌연 달아오르는 장내 분위기였는데 씁쓸한 호규의 열창이었다. 그러다 흠칫...
구석진 곳에 홀로 앉아있는 여인이 눈에 확 들어왔다!
날자가 맥주잔을 천천히 기울이는데 호규가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묵묵했다.
"우리 신랑 노래 제법 늘었던데?"
"그만 돌아올 때도 되었잖아요. 벌써 8개월째야"
"글쎄..."
"사장..선생님도 많이 후회하고 계셔! 꿈꾸며 헛소리까지 하신대"
"진작 잘할 것이지 버스 떠난 후에 손들어보니.."
"...."
"왜 말이 없어?"
"난..누나 서운함..상처..백분지 일도 모르지만..가족이란 게 뭐야..아아~"
"넌 아직 멀었어..넌 내가 서운해서 집나와 아밸 버렸다고 생각하는 거니?"
"?"
"울아배..대단하진 않았지만 기본 이상은 되는 사람이야. 그런데 몇번 좌절했다고 이내 포기하더니 삽시간에 늙어버리더라. 한창 때인데 그렇게 조로하다니 인생에 대한 직무유기라고 봤기에...그 원인에 나도 한몫했다고 생각했기에 떠난 거였어"
"!!"
"아버지 독립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젊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무슨 말인지 알아?"
"...아...아..알겠어..그럼 그렇지..그렇다면 목적은 벌써 달성되었어. 그러니.."
"아니 아직 한참 멀었어"
"...누나.."
"날 그렇게 겪어보고도 몰라? 넌 나에 대해서 아는게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니?"
"모..몰라. 열에 하나도. 하지만 마음씀이 깊고..날 사랑해준다는 것은 확실히 알아!"
"그럼 됐어. 더 이상 뭐가 필요해. 언제 다시 볼지 몰라도...그래서 말인데 너니까 천기를 누설할게. 아카폴코는 내 설계였어"
"!!!"
"진회장과 잘 아는 처지기에 부탁했지. 싹수있는 가수가 있는데 어떠냐고. 그뿐이야 내돈은 천원도 안들였어"
"...."
"잘해..네뒤엔 내가 늘 있다는 것만 알면 돼"
훌쩍 일어나는 날자.
"하룻밤도 같이 못하고 찢어지는 것은 나도 무지 슬프지만"
하늘하늘 걸어나가버리는 날자를 붙잡지도 못하고 망연자실한 호규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