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 돈의문과 숭례문의 현판은 둘 다 ‘敦義門’, ‘崇禮門’이라고만 썼는데 흥인문의 현판만 유독 ‘興仁之門’이라고 썼으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
서명형 : ‘之’자를 근거도 없이 더 써넣었겠습니까마는 신은 그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영조 : 한림은 알고 있는가?
황경원 : 신도 잘 모릅니다.
영조 : 주서는 아는가?
이기언 : (일어났다 다시 엎드려) 신 또한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듣기로 도성 동쪽에 있는 수구(水口)의 지세가 매우 취약하였기 때문에 별도의 곡성(曲城)을 쌓고 현판에도 ‘之’ 자를 더 써넣었다고 합니다. 한 글자를 더 넣는다고 해서 수구의 취약함을 보강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예전 사람들은 그렇게들 말했습니다.
영조 : 주서가 알고 있는 것이 맞을 듯하다. 이 말이 참으로 설득력이 있다.
上曰, 敦義·崇禮兩門門額, 皆只書敦義門·崇禮門, 而興仁門門額, 則獨書以興仁之門, 其義何也? 命珩曰, 之字偶爾加書乎? 臣未詳其義矣。上曰, 翰林知之乎? 景源曰, 臣亦未能詳知矣。上曰, 注書知之乎? 臣箕彦起伏曰, 臣亦未能詳知, 而曾聞國都東方水口甚虛, 故別築曲城, 門額亦加書之字云。一字增減, 似若無關於水口之虛疎, 而先輩之言如此矣。上曰, 注書所知是矣, 此說誠然矣。
《승정원일기 영조 17년(1741) 4월 11일》
동대문 하면 떠오르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국내 최대의 의류시장인 동대문시장과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동대문야구장, 그리고 야구장 자리에 초현대식 건물로 들어선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가 그것이다. 동대문에는 과거의 추억과 더불어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느낌이다. 지하철을 이용하려면 동대문역이나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내려야 한다. 이렇게 동대문이란 단어는 건물을 통해, 역이름을 통해 우리의 입에 익숙해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흥인지문사거리, 흥인지문공원 같은 낯선 이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동대문’이라 하면 옛 서울도성의 동쪽에 있는 큰 성문이라는 의미가 그대로 드러나 어린아이들도 어디에 있는 성문인지 구분할 수 있는데 ‘흥인지문’은 한문으로 먹고사는 필자조차도 쓰기 거북하다. 게다가 성문의 이름이 통상적으로 세 자로 이뤄지는데 흥인지문만 네 자로 되어 있어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은 껄끄러운 느낌이 든다.
서울도성은 1396년(태조5)에 완성되었다. 1396년 9월 24일조 《태조실록》에 의하면 성곽의 정북쪽에 있는 문은 숙청문(肅淸門)이라 하고, 정동쪽에 있는 문은 흥인문(興仁門)으로 속칭 동대문이라 하고, 정남쪽에 있는 문은 숭례문(崇禮門)으로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정서쪽에 있는 문은 돈의문(敦義門)이라 하여 각 성문의 공식적인 이름과 함께 동대문과 남대문 같이 일반 대중들이 일상 속에서 부르기 쉬운 이름까지 제시하고 있다.
동쪽은 인간이 갖추어야 하는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 가운데 인(仁)에 해당한다. 동대문은 인(仁)의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는 의미로 흥인문이라 이름지었다. 그런데 흥인지문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이 등장한 것이다. 이런 혼동을 불러온 것은 동대문에 붙은 현판 때문이다. 고종대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대표적 저술인 《임하필기》에 의하면 이 현판의 글씨는 퇴계 이황이 쓴 것이라 한다. 하지만 영조대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동대문을 흥인지문으로 부르지 않았다. 1741년 4월 11일 영조는 경연 석상에서 신하들과 《춘추(春秋)》 공부를 마치고 이번에 새로 수리한 창의문(彰義門)에 걸 현판 제작의 일을 의논하면서 동대문의 현판에만 왜 ‘之’자가 더 있는지 경연에 참여한 이들에게 물었다. 경연관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서명형과 한림(翰林)으로 불리는 사관(史官)인 황경원은 이에 대해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승정원의 주서(注書)인 이기언만이 과거에 자신이 전해들은 말이라며 영조에게 대답을 하였을 뿐이다.
궁궐을 둘러싼 서울의 성곽은 동, 서, 남, 북의 대문(大門)과 그 사이의 소문(小門) 네 개를 연결고리로 하여 서로 이어져 있다. 그런데 도성 안에서 성밖으로 흘러가는 개천 위에는 성곽을 쌓지 못하여 수문(水門)을 설치하고 거기에 창살 형태의 차단막을 설치함으로써 외부의 적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해놓았다. 이는 일반 성곽에 비해 외적의 방비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 대표적인 곳이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청계천의 수구(水口)이다. 여기에 설치된 다섯 칸의 수문, 즉 오간수문(五間水門)의 취약한 형세를 보강하기 위해 바로 옆에 있는 동대문에 곡성(曲城), 즉,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다. 동대문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군데 성문에는 설치되어 있지 않은 방어시설이다. 같은 이유로 흥인문의 현판에도 ‘之’ 자를 추가해 넣었다는 것이다. 곡성(曲城)을 만든 것이 적의 방어에 합리적으로 대처한 것이라면, 현판 글자의 배치로 적을 방어하려고 한 것은 재난을 피하려는 마음을 주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이는 마치 어느 사찰에서 화재를 많이 당한 건물의 벽에 ‘水’ 자를 곳곳에 붙여 놓음으로써 화재를 막으려고 하는 것과 유사하다.
한편 《조선왕조실록》 전체를 대상으로 이 문의 이름이 사용된 빈도를 살펴보면 흥인문이 190건, 흥인지문이 5건, 동대문이 174건 나타난다. 흥인문과 동대문은 조선시대 전 시기 동안 고르게 나타난 반면, 흥인지문은 1455년(세조1년)에 동일 기사에서 흥인문과 함께 다소 애매하게 한 차례 사용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4건은 모두 1800년대 이후의 기사에 나온다. 또 다른 관찬사료인 《승정원일기》에서는 흥인문이 일기가 시작되는 인조대부터 순종대까지 637건이 고르게 나타난 반면, 흥인지문은 영조3년(1727)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총 443건이 보인다. 물론 동대문도 218건이 나타난다. 이 두 문헌에 근거하여 판단하면 동대문의 공식적인 이름은 흥인문이고, 흥인지문이 동대문의 이름으로 함께 불린 것은 18세기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2006년에 간행한 《서울지도》에 수록된 전통시대 지도 9건에 가운데 흥인지문으로 표기된 것이 3건 있는데, 이 3건 모두 1760년 이후에 제작된 지도에 나타난다.
한문에서 불가피하게 글자수를 더하거나 빼야 할 때 자주 쓰는 방법으로 허사(虛辭), 즉 구체적인 뜻이 없이 어감을 살리기 위해 사용하는 글자를 가지고 가감을 한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본래의 의미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글자가 ‘之’이다. 흥인지문의 ‘之'도 이에 해당한다. 1781년에 정조가 규장각의 별칭인 이문원(摛文院)의 현판을 ‘이문지원(摛文之院)’ 4자로 써서 내린 것도 같은 예이다. - 《정조실록》 5년 3월 10일
그렇게 본다면 성문을 처음 만들 때 지은 흥인문과 동대문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굳이 흥인문의 변형된 이름인 흥인지문까지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글쓴이 최채기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