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 31,7-9; 히브 5,1-6; 마르 10,46ㄴ-52
+ 오소서 성령님
지난 주에 즐거우셨죠? 전날과 다음 날엔 비가 왔는데 딱 주일만 맑은 날씨에 무사히 순례를 마치고 오게 되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솔뫼성지에서 만난 장승포 본당 교우들은 새벽 5시에 출발하셔서 5시간 반 만에 도착하셨다고 하고, 서울 미아동 본당 교우들은 두 시간 반이 걸리셨다고 하는데요, 우리는 그에 비하면 가까운 거리에 교구 성지가 있다는 사실 또한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열심히 준비하고 진행하느라 수고해주신 상임위원님들, 구역장님과 반장님들, 주일 학교 선생님들, 사진 찍느라 수고해주신 홍보분과 위원님들과 배홍식 사도 요한, 진영복 요한 보스코 님 감사합니다. 같이 가지는 못하셨지만, 마음으로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리코에서 눈먼 거지를 치유해주십니다. 제1독서의 말씀은 복음과 연관되는 예레미야서의 말씀인데요, 예레미야는 유배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위로를 전합니다.
“내가 이제 그들을 북녘땅에서 데려오고 땅끝에서 모아들이리라. 그들 가운데에는 눈먼 이와 다리 저는 이, 아이를 밴 여인과 아이를 낳는 여인도 함께 있으리라.”
이들의 공통점은 ‘빨리 갈 수 없는 이들’, ‘넘어지기 쉬운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남들과 같은 속도로 갈 수 없기에, 무리에서 떨어져 길을 잃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울면서 오는 이들을 당신께서 ‘위로하여 이끌어 주겠다’, ‘넘어지지 않도록 곧은 길을 걷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눈먼 사람이 눈을 뜬다는 것은, 이러한 주님의 약속이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메시아 시대가 왔다는 표징이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리코에 들어가셨다가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십니다. 다음 행선지는 예수님의 지상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인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길가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앉아 있었습니다. ‘바르’는 ‘아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바르티매오’는 ‘티매오의 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왜 당연한 말을 반복해 가면서 거지를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치기 시작합니다. ‘다윗의 자손’은, 직역하면 ‘다윗의 아들’입니다. 이는 메시아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은 그분을 ‘나자렛 예수’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 칭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며 명패에 새겨질 이름입니다. 이에 비해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 즉 ‘메시아’라고 부릅니다. 군중과 바르티매오, 둘 중 어느 쪽이 눈이 먼 것일까요?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아들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의 외침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십니다. 왜 눈먼 사람에게 직접 가시지 않고 ‘그를 불러오라’고 하실까요? 이 복음이 부르심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부르며” 말합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용기를 가로막았던 것은 당신들이 아니었던가요? 사람들은 얼마나 변덕스러운가요? 아까는 잠자코 있으라 하더니, 이제는 용기를 내어 일어나라고 합니다.
바르티매오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갑니다. 옛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오늘 복음의 앞 단락에 나왔던 질문과 같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후,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자기들이 청하는 대로 해 달라고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으시자 그들은 “당신 영광의 때에 저희를 당신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마치 자기 생각이 들키기라도 한 양 불쾌해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수난을 예고하신 직후에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는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
이제 왜 복음서가 그를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고 소개했는지 알 듯합니다. 두 이야기는 제베대오의 아들들과 티매오의 아들, 그리고 다윗의 아들이신 예수님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이제 이 대단원의 드라마가 예루살렘에서의 절정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물으실 때 우리는 ‘제베대오의 아들들’처럼 대답할 것인지, ‘티매오의 아들’처럼 대답할 것인지 질문받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는 대답에 예수님께서는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곧 다시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떠나가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수난의 길을 회피하려는 제자들과 달리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길에 동행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 중에, 어쩌면 바르티매오만 유일하게 눈 뜬 사람은 아니었을까요? 적어도 그는 자신이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첫머리와 마지막에 ‘길’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바르티매오가 길가에 앉아 있는 것으로 복음은 시작하여,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서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 길은 예수님께서 걸으시는 길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걸어야 할 길입니다.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을 시작하시던 마르코 복음 8장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벳사이다에서 눈먼 사람을 치유해주셨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직전에도 눈먼 이를 치유해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여정은 우리의 눈멀음이 치유되는 여정입니다.
영국 런던은 안개가 많기로 유명한데요, 어느 해에 안개가 너무 심하게 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날이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한 부부가 길을 잃고, 자기 집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었습니다. 길에서 마주친 어느 신사에게 도움을 청하자, 그 신사는 주소를 물어보더니, 지팡이로 길을 두드리며 그들을 집 앞까지 안내해 주었다고 합니다. 부부는 신사에게 ‘어떻게 이 안개 속에서도 그렇게 길을 잘 찾으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앞을 못 보는 장님입니다. 그래서 안개가 있건 없건 제게는 상관이 없지요.”
우리 삶의 길에서,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잘 이해되지 않고, 주님께서 보여 주셨다고 생각했던 길이 갑자기 캄캄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려움이 너무나 크게 다가와,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 내가 잘 볼 수 없음을 인정하고, 어둠 속에서도 나를 인도해 줄 수 있는 지팡이, 곧 신앙에 의지하여 이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보게 해 주십시오.”라는 바르티매오의 말에서, 그가 원래 볼 수 있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어쩌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이면서도 어려움이라는 안개, 유혹이라는 안개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놓치고 헤매고 있는 우리 자신은 아닐까요? 그러한 우리를 예수님께서는 다시 부르시고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이제 우리는 제베대오의 아들도 아니고 티매오의 아들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나에게 물으신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드릴까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사진: 최민식
첫댓글 신부님 감사합니다. 저도 눈먼 이로 살고 있네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