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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등불
오 육십 년 대였다. 밤낮 어두운 시절이었다. 지금 60대 이상으로 시골에 살았던 이들은 다 알 수 있는 일이다. 낮에는 입에 풀칠하는 일이 암울하게 느껴졌다. 식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이었으니. 추수 후 이듬해 봄 3 ~ 4월이 되면 거의 모든 농가에서 쌀이 바닥이 났다. 벼농사를 많이 지어 연중 쌀이 풍족한 집은 한 마을 수 십호 중 불과 한 두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산과 들에서 채취한 나물을 넣어 끓인 갱시기죽을 먹거나, 보리죽이나 밀수제비를 해 먹기도 했다. 송기(松肌)를 꺾어 껍질을 벗겨 먹기도 했다.
겨울이면 쌀을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쌀에다 무를 넣은 무밥이나 좁쌀을 넣은 차조밥을 먹기도 했다. 삼시 세끼의 부실한 식사 외에 간식이나 주전부리로 감자나 고구마를 삶아 입을 즐겼다. 삶은 고구마는 고급간식으로 일반 가정에서 맛보기 힘들었다. 가끔 콩이나 보리를 뽁아 먹을 적도 있었다. 시골에서 손바닥만한 땅뙈기를 갈며 살았던 이들은 제대로 먹지를 못해 누리끼리한 얼굴에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았다.
우수한 머리를 가진 학생이라도 가정형편이 여의치 못하여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청소년들이 많았다. 진학을 못하면 도회지의 공장에 가 일을 하거나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먹는 입을 던다며 친지의 상점에 점원으로 송아지 팔려가듯 보내지기도 했다.
반백년 가까이 지난 요즘, 동창회를 할 적이면 -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곤한다. 재주 있었던 ○○○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아무개집은 백석지기 부잣집으로 쌀밥을 먹었느니, 우리집은 하루 두끼 죽을 먹었느니, 너네 집은 일찍 전기가 들어왔느니 하면서.
호롱불을 켰을 땐 호롱에 석유를 붓다 석유가 쏟아 넘쳐 기름 냄새가 온방에 풍겼다. 석유의 질이 떨어지거나 심지가 많이 올라오거나 석유를 많이 흡수하면 타던 심지에 그을음이 나 콧구멍이 새까맣게 그을리기도 했다. 매캐한 그을음 냄새가 온 방안에 진동을 하기도 했다. 그을음으로 벽과 천정이 거무스럼하게 변하기도 했다.
낮엔 먹는 문제로 힘들었고, 밤에는 등잔불이나 호롱불 아래서 어둠을 이기며 공부를 했던 시절, 전등불 아래서 공부했던 급우들을 부러워했다. 어두운 밤을 맞이해야 하는 시골을 뛰쳐나고 싶은 마음이 들 적도 있었다. 그래도 힘든 부모님과 진학을 못한 동무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추스렸다. 시내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 비하면 불리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저녁을 먹고 난 후라야 침침한 호롱불 아래서 감기는 눈을 부비며 겨우 숙제를 할 수 있었다.
농사나 노동일에 종사했던 이들은 못 배운 한으로 응어리가 져 있었다. 자식들 중 공부에 재주가 있는 자식은 똥 묻은 중의(中衣)라도 팔아 고등이나 대학 공부를 시키려했다. 한을 풀기 위함도 있었지만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부모님의 그런 뜻을 아는 자녀들은 이를 악물고 공부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곤궁한 시골가정에서 태어난 젊은이들도, 흐릿한 호롱불 아래서 끈질기게 책과 씨름하여 고시(高試)에 합격했던 이들이 종종 있었다.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龍)이 나던 시절'이었다. 등잔불이나 호롱불보다 더 밝고 사용이 용이한 촛불이나 남폿불(호야불)은 형편이 나은 집에서 사용했다. 형편이 여의치 못한 집에서 그런 불은 사치였다. 양초는 비쌌고 남포불은 석유를 많이 먹었기 때문이었다.
등잔불이나 호롱불 아래서 공부한 학생으로 고시에 합격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리곤 했다. 그런 기사를 읽은 가난한 집 자녀들도 노력하면 이뤄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면소재지나 군청소재지 앞에 ‘○○국민학교 ○○회 ○○○ 사법(행정)고시 합격’ 이라는 현수막이 나부끼면 군내가 떠들썩했다. 군수와 면장이 합격자의 집에 찾아와 부모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드렸다. 어떤 부모는 고시에 패스한 아들을 ‘영감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추석이나 설 등 명절을 맞아 시내에 있는 친척집에 가, 백열전구가 환하게 켜져 있는 밤을 맞으면 마치 딴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시골에는 언제쯤 전기가 들어올까 몹시 기다려지기도 했다. 살던 집에 전기가 들어 온 해는 고교 2년이었던 1970년이었다. 전기가 들어왔던 첫날 밤, 사치로 여겨졌던 촛불이나 남폿불은 백열전등과 그 밝기가 비교되지 않았다. 밤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지니 천지개벽을 맞은 기분이었다. 기르던 멍멍이도 밝은 불빛에 놀랐는지 제 집에서 뛰쳐나와 꼬리를 흔들며 마당을 오갔다.
전깃불의 등장으로 호롱불이 사라지니 석유를 사올 필요도 없었고 냄새와 그을음도 사라졌다. 벽도 천정도 깨끗하였다. 밝은 불 아래 밤늦게 독서를 해도 피곤함을 몰랐다. 침침했던 눈도 말똥말똥 뜨였다. 몇 해 안 있어 백열전구를 형광등으로 바꾸자 백열전구의 밝기도 신통찮게 느껴졌다.
호롱불 밑에 지내다 눈이 부시도록 밝은 형광등 아래 마음껏 읽고 쓰기를 할 수 있었던 시절 - 한 천재의 노력으로 이렇게 밝은 세상을 맞이하게 되다니! - 에디슨이야 말로 어두운 밤을 밝힌 전기를 발명하여 전 세상의 등불이 되었다. 그는 정규교육을 불과 몇 개월 밖에 받지 못했다. 1%의 영감 탓이었는지 남들이 전혀 할수 없었던 엉뚱한 상상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던가! 수많은 실험과 수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급기야 어두운 밤을 밝히고 말았던 천재 발명왕. 아들의 모든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 맞는 교육을 하였던 어머니 - 연약한 여인이었으나 훌륭한 어머니였으며, 위대한 교사였다. 두 분 다 어두운 밤을 밝힌 위대한 등불이었다.
지금은 대낮처럼 밝은 등불밑에 공부한들 재력이 있는 조부모나 부모를 만나지 못하면 재주 있는 젊은이들이라도 개천에서 용이 되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밝은 불을 비춰준 천상(天上)의 에디슨이 이토록 달라진 세상을 내려다보며 얼마나 안쓰러워할까? 어두웠던 시절이었지만 그립다. - 어두컴컴했던 호롱불 아래서 뚫어지게 책을 파고들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었던 그 시절이.
2014. 11. 30
첫댓글 어렵게 살았던 떠올리게하는 글입니다. 어린시절 당시 시골 모습은 어디서나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옛 추억을되돌아보는 개기가 되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우리는 78년도에 전깃불 들어왔는데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