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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8편 10절-59편 1절.
58편 10절-11절: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59편.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
1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58편 10절: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의인은 누가 보복 당하는 것을 본다고 하느냐? 악인이다. 의인은 악인이 보복 당함을 눈으로 본다고 한다. 그러면 누가 의인을 위해 보복을 한 것이냐? 하나님이다. 의인이 스스로 보복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보복을 하시게 되어있는 거다.
그런데 악인은 악인들끼리 보복을 한다. 이 때 믿는 사람은 악인들끼리 싸우는 것을 말리지 말아라. 믿는 사람이 악인들끼리 싸우는 중간에 서서 막다가 죽는다면 순교가 되겠느냐? 안 된다. 말릴 싸움이 있고, 안 말릴 싸움이 있는 거다. 그러면 안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이 싸울 때는 믿는 내가 그걸 본다면 그 싸움을 말려야 하느냐, 안 말려야 하느냐? 말리되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느냐? 믿는 사람 편을 들어야 한다.
안 믿는 사람들끼리 흉보고 할 때는 예수 믿는 자기가 거기에 끼어서 같이 놀아야 하느냐?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면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흉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 때 믿는 사람이 잘못했다면 내가 믿는 사람 편을 드는 것보다도 믿는 마음을 가지고 안 믿는 사람을 향해서 ‘사람은 다 실수가 있는 게 아니냐? 잘 하려다가 그런 것일 텐데 뭘 그러느냐?’ 라고 하면서 떼어놓아야 한다. 무조건 믿는 사람의 편을 드는 게 아니라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거다. 그러면 믿는 사람끼리 싸우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말려야 하느냐, 피터지게 싸우라고 내버려 둬야 하느냐? 말려야 한다. 이게 이치다.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의인을 위한 보복은 하나님께서 해 주신다. 문제는 믿는 내가 악인이 보복 당하는 것을 볼 때 ‘아, 고소하다’ 라고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시 심사해야 한다. ‘사람이 옳은 말을 해도 깨닫지 못하니 저렇게 되는구나.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지 말아야지’ 라고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의인을 위해 악인을 보복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알아서 적절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이 악인들에게 핍박받는 것을 결코 가만히 보고 계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의인의 억울함을 다 풀어주신다.
진리의 성도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며 살다보면 남이 안 당하는 일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내가 예수를 잘 믿는데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생기느냐?’ 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그 정신이 육적으로 돌아간 거다. 이런 사람은 신앙 믿음이 자랄 수 없다.
자기가 예수를 잘 믿는데도 환난이나 핍박을 당할 때는 ‘내가 예수를 잘 믿는데 왜 이런 핍박을 당하느냐?’ 라고 하며 원망 불평을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의 이룰구원을 위해 하시는 것으로 믿고 옳은 것을 붙잡고 나가면 된다. 바로 믿는데도 환난 핍박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기뻐할 일이다. 믿는 우리는 안 믿는 사람들과는 사고방식이 전혀 다른 거다.
세상 속화된 교인들을 보면 예수를 믿으면 어려운 일도 안 당하고, 생활도 펴지고, 아픈 몸도 낫고,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육적인 쪽으로 소원성을 품고 예수를 믿는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이와 같은 중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정신으로 산다면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안 믿는 사람과 똑같다고 보시겠느냐, 다르다고 보시겠느냐? 똑같다고 보신다.
예수님을 믿다보면 가난에서 부요로 될 수도 있는 거고, 부요에서 가난으로 내려갈 수도 있는 거다. 세상은 항상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파도가 있는 곳이다. 이 모든 것을 크게 보면 다 하나님의 섭리 하에 되어지는 것이지만 인간 편에서 보면 누가 이렇게 하는 거냐? 돈이 가만히 있다가 쑥 올라가고 가만히 있다가 쑥 내려가고 하는 거냐, 사람이 그러는 거냐? 사람 자기가 그래놓고서 자기가 야단을 하고 있다. 세상만사가 그렇다. 자기가 야단법석을 떨다가 넘어져 놓고서는 ‘내가 넘어졌는데 네가 왜 안 일으켜 주느냐?’ 라고 하며 자기를 일으켜 주지 않은 사람에게 원망을 돌린다. 죄다 이런 식이다.
라디오의 좌담 프로그램을 들으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은, 특히 여성들은 결혼을 안 하려고 한다던데, 그 이유가 일자리가 없어서 돈도 없고,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게 되면 자기가 많은 희생을 해야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니, 자식을 낳고 키우는 게 자기가 하지 않아야 할 희생을 하는 거냐? 희생이라는 것은 부모의 노고를 알게 하기 위해서 자식들에게 하는 말이지 본인 자신이 자식을 낳고 키우는 것을 희생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말이 되는 거다.
결혼을 하는 게 희생이냐? 이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스트레스다. 결혼을 하거나 자식을 낳는 것을 희생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사람은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사고발상들은 어떻게 보면 말을 못하는 짐승만도 못한 거다. 그걸 어떻게 희생이라고 생각을 하느냐? 악한 사고방식이다.
그러면 믿는 우리는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하느냐? 우리에게는 결혼을 하는 거나, 자식을 낳고 키우는 게 다 자타의 이룰구원의 재료감들이다. 이룰구원을 이뤄가는 것이 사람도 많고,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이 많아야 재미가 있겠느냐, 가는 곳곳마다 먹을 것이 있고, 가는 곳곳마다 공짜고, 아무 일을 안 해도 평생 살 수 있고 하는 게 재미가 있겠느냐? 바다에서 수영을 할 때는 파도가 잔잔할 때보다 파도가 칠 때가 더 재미있고 스릴이 있다. 놀이터에 가도 흔히 보는 미끄럼틀보다 뱀처럼 구불구불한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면 더 스릴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을 보면 생각을 하는 게 성경에 땀이 흘러야 먹으리라고 한 말씀과는 거리가 먼 생각들을 하고 있다. 사람들의 이런 마음이 문제다.
갈릴리 바다의 사건을 생각해 봐라. 주님이 제자들이 탄 배에 일단 같이 탔으면 그 배는 아무리 풍랑이 일어도 뒤집히거나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은 전제가 되는 거다. 제자들이 이 사실을 확실히 믿는다면 풍랑 파도로 인해 그 배가 아무리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도 안심이다. 성도가 옳은 진리만 붙들고 있으면 세상에 그 어떤 환난 풍파가 일어도 그 마음이 사건 환경에 휘말리지 않게 된다.
진리성도에게 환난 풍파가 오는 것은 자기를 연단시켜서 1학년에서 2학년, 3학년으로 올려주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훈련 연단을 시켜서 영원히 존귀 영광자가 되게 하려는 거다. 그러니 세상이 오르락내리락 할지라도 겁을 먹지 말아라.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의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는다고 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 시편을 보면 깨닫기가 어렵다. 한 마디로 악인은 하나님의 보복의 심판에 죽는다는 거다. 성도의 의의 걸음걸이는 악인들이 주는 환난과 시험과 유혹과 미혹에도 죄에 물들지 않는다. 마지막 그날까지 이기고 승리한 의인이 악한 자들이 하나님께 보복을 당하는 것까지 본다면 그야말로 속이 시원하고 후련한 거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심판을 해 버렸으니 의인의 발걸음이 시원한 거다. 그러니까 의인의 발이 악인의 피에 씻겼다고 하는 것은 의인이 악인을 밟았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그래서 시원하다는 거다. 의인이 승리했다는 거다. 승리의 발걸음이라는 말이다.
11절: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에게 갚음이 있음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심을 안다는 거다. 일반적으로 봐도 악한 자와 그 후손은 끝이 좋지 못하다. 의인을 위한 하나님의 악인들을 향한 보복의 심판을 보고 사람들이 증언을 한다는 거다. 의인에게는 큰 용기와 믿음을 주는 말씀이다.
의인을 향해서 악한 마음을 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제동을 걸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것을 지나간 역사가 증언을 한다. 또 회개한 사람들이 증언을 한다. 또한 의인의 걸음걸이가 증언을 한다. 하늘에서도 증언을 한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따라 의를 지키며 정직하게 진리진실로만 살면 된다. 진리진실로 살지 않고 비진리와 세상을 붙잡고 세상을 따라 살다가 땅에서 악한 자라고 판단을 받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는다면 이런 꼴이 어디 있겠느냐?
59편.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
‘믹담’이란 ‘격언’이라는 뜻이고, 또한 ‘황금의 시’ 라는 뜻이기도 하다. 즉 변질성이 없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고, 우리의 구원의 도리가 들어있다는 의미에서 ‘황금 같은 시’ 라고 하는 거다. ‘알다스헷’이란 ‘멸망시키지 마소서’ 라는 뜻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오니 여자들과 백성들이 찬양을 하는데,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 찬양을 하니까 사울 왕이 이 찬양을 듣고 슬슬 시기와 질투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 생각이 확대가 되어서 살인성까지 이어졌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구원했으니까 칭찬을 해야 할 텐데 사울은 도리어 시기 질투를 하니 사단 마귀의 이용물이 되어서 마귀 짓을 하게 된 거다.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을 절대로 시기 질투하지 말아라. 악령이 들어간다.
사울이 자신의 딸 미갈을 다윗에게 주어서 다윗과 결혼을 시켰는데, 다윗이 미갈과 함께 있다는 보고가 사울에게 들어가니 사울이 군사들에게 그 문 앞을 지키고 있다가 다윗을 잡아 죽이라고 명령을 했다. 이것을 알게 된 다윗이 창문을 통해 달아나 버렸다. 사울 왕의 딸인 미갈의 입장에서 아버지 사울 왕과, 남편 다윗 중에 누구 편을 들어야 하겠느냐? 다윗이다. 아무리 부자지간이라도 진리진실로 사는 사람에게 붙어야 한다. 안 믿는 사람들은 진리와 관계가 없이 살기 때문에 인정성으로 말을 하고 인정성으로 선택을 하지만 믿는 사람은 진리진실 쪽을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은 진리 쪽으로 되어있는 사람을 붙드신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이를테면 다른 형제는 다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났고 몸이 아픈 어머니와 자기 둘만 남았을 때 병든 어머니를 모시다보니 시집이나 장가를 안 가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물론 깨닫는 방편이 여러 가지이겠지만 이럴 때 어머니는 그 자식을 결혼을 시켜야 한다. 안 시키면 하나님 앞에 죄다. 결혼을 한 후에 모시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결혼을 해야 한다. 그래야 옳은 일이 되는 거다. 이런 면에 박력 있게 나가야 한다. 인정선에 놀지 않아야 한다.
다윗이 죄 없이 수난을 당했는데, 예수님께서도 죄 없이 수난을 당하셨고, 진리신앙의 노선을 따르며 좁은 길 생명 길을 가는 성도들도 죄 없이 수난을 당할 수 있는 거다. 이 때 진리의 성도에게 환난과 핍박을 주고 박해를 주는 자들은 이방 불신자들만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 환난과 핍박을 준다. 예수를 믿되 확실히 믿는 사람은 그러지 않는데 어중간하게 믿는 자들이 이런 짓을 한다.
얘기는 조금 다르지만 예수를 처음 믿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 예수를 믿겠습니다’ 라고 하면 세례를 줘라. 이렇게 해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아직은 그 정신과 사고방식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과 별로 다른 게 없다. 이런 사람에게 왜 세례를 주는 거냐?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첫째는 ‘너도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룰구원을 잘 이뤄라’ 해서 하나님의 축복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열어놓는 거고, 또 하나는 ‘네가 세례를 받았지? 이제부터 네가 진리말씀대로 살지 않을 때는 너에게 극심한 시련이 있을 거다’ 라는 의미에서 세례를 주는 거다. 그러니까 육은 망하더라도 영을 건지려는 의미가 있는 거다. 그러면 세례를 받으라고 할 때 안 받는다고 한다면 이건 뭐냐? ‘내 멋대로 살겠다’ 이 말이 되는 거다.
예수를 믿을지라도 하나님의 축복권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저주가 되는 거다. 예수 믿는 것을 우습게 여기지 말아라. 세상을 사는 데는 정신을 바싹 차리고 살면서 예수를 믿는 데는 흐리멍텅하냐? 큰일 날 일이다. 진리를 붙잡고 모든 상황을 이기고 나가는 성도는 그 정신이 살아있다. 남 보기에는 성도가 이렇게 사는 것이 고난 같으나 인생이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 살아있는 동안에 주님을 굳게 잡고 고난을 통과하면 결국은 승리를 하는 거다. 반드시 승리를 하게 되어있다.
진리를 붙잡은 성도는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그 안에는 승리가 들어있다. 문제는 자기 할 탓이다. 물이 배 안에 들어오면 배가 가라앉기 전까지는 물을 퍼내면서 있어야지 물이 배에 들어온다고 해서 곧바로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 거냐? 사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진리성도에게 환난과 핍박을 주고 박해는 주는 자들이 이방인들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다. 지금도 그렇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는 것임을 전제를 하고 살아라.
진리성도 다윗은 핍박을 받을 때 동족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를 했다. 자신의 위한 기도이면서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를 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아멘’이 될 수밖에 없는 기도를 한 거다. 또한 성도 누가 듣더라도 ‘아멘’이 되는 기도다.
59편 1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원수에게서 건짐을 받고 높이 들림을 받으려면 원수의 신앙차원을 알아야 하고, 자기의 신앙차원을 알아야 한다. 남이 자기를 깎아내리고 헐뜯고 미워할 때 자기의 신앙차원을 하나님 앞에서 빨리 알아라. 나를 깎아내리는 상대방의 수준과, 나의 신앙의 수준이 같으면 어떻게 되느냐? 같으면 같이 물고 늘어지고 같이 싸우게 된다. 믿음의 사람은 이 수준에서 빨리 올라와야 한다. 자기의 신앙의 차원이 원수의 신앙차원보다 올라와야 한다. 이게 구원이다.
자기부터 저질적인 신앙의 차원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를 높여 달라. 나를 건져달라’ 라고 하는 것은 육의 생각일 수 있다. 이러면 이룰구원이 안 된다. 자기가 못 올라간다는 말이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어서 낮은 곳에 있으면 낮은 차원에서 사는 것들이 달려든다. 그러나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낮은 곳에 사는 것들이 달라붙지 않는다. 그런 것처럼 신앙의 수준이 높으면 신앙이 낮은 자들이 달려들지 못한다. 달려들더라도 다 이길 수 있다. 이게 구원이다.
믿는 자기를 헐뜯는 자가 있느냐? 그러면 자기의 수준을 올려라. 모든 사고방식의 수준, 이해타산 평가성의 수준을 올려라. 올리지 못하면 수준이 낮은 자들을 붙잡고 싸우게 된다. 이러면 자기의 수준이 낮은 거다. 술 먹은 사람이 지나갈 때 개가 이 사람을 행해 짖으니까 술 먹은 사람이 개를 잡고 싸운다면 이 사람의 수준이 어떻게 된 거냐? 개와 같은 수준이 된 거다.
성도는 원수를 보는 개념이 이방인들이 원수를 보는 개념으로 보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이룰구원 성화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방해를 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원수요 성도의 원수로 보신다. 따라서 믿는 우리가 원수를 볼 때는 안 믿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성도를 영원히 존귀 영광자가 되지 못하게 하는 수단 방법이나 그런 교훈을 하는 거짓 종들을 성도의 원수로 알아야 한다. 믿는 사람이 이런 교훈을 받으면 이룰구원을 못 이룬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맨날 ‘복 복, 물질 축복 축복’ 하는 사람들의 수준을 봐라. 속에 든 것은 일반사람들과 똑같은 수준이다. 모든 사고방식이 그러니 어떻게 구원이 되겠느냐? 고작 해봐야 ‘예수 믿어 천국’밖에 모른다.
비가 많이 오면 물이 어디서부터 차 올라오느냐? 아래로부터 위로 차 올라온다. 그러면 이걸 피하려면 더 아래로 내려가야 하느냐, 올라가야 하느냐? 올라가야 한다. 더러운 것이 올라오면 자기는 자꾸 올라가야 한다. 여기에서 정신적인 수준을 생각해 봐라. 모든 일반이치, 자연이치, 자연법칙은 믿는 우리들에게 구원에 대한 도리, 신앙의 이치와 수준을 법칙적으로 보여주는 거다. 여기에서 지혜를 얻어서 자기의 신앙의 질을 알고 높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원수, 또는 자기의 원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현재 나의 성화구원 이룰구원을 손해 보게 하는 것이 나의 원수다. 그러면 원수라고 해서 죽여 버려야 하느냐? 그 사람도 분명히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자일 텐데도 나의 이룰구원에 이용물로 사니 이것을 불쌍히 여기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
우리의 원수에 대해 다시 말을 하면, 첫째는 나의 이룰구원을 손해 보게 하는 것이 나의 원수다. 이 원수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도 ‘내 원수다’ 라고 말씀을 하신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가 내 원수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원수가 있는 거냐? 마귀가 하나님의 원수냐? 마귀는 성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심부름꾼일 뿐이다. 하나님에게는 능력적으로 원수가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성도의 이룰구원을 망하게 한다는 면에서 이 자는 하나님께 원수요 또한 나의 원수가 되는 거다.
두 번째는 나의 영원 궁극적 구원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나의 원수다. 세 번째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대적하는 것이 나의 원수다. 다윗도 이런 골리앗을 자기의 원수로 삼고 처치해 버렸다.
이런 원수는 우리가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건데, 현재의 우리에게 제일 시급한 것은 자기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과 원수 된 요소를 찾아야 하는 거다. 자기 집의 물건을 그 집 자식이 훔쳐 가는데 이것을 모른 채 밖에서 도둑을 찾으려고 하면 자기 집의 물건을 훔친 도둑을 절대로 찾을 수 없게 된다.
성도의 원수는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아무리 무력이 강해도, 아무리 꾀가 많아도 그 인격의 수준은 옛사람 부패성적인 차원이다. 그러니 우리가 겁낼 게 없는 거다.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사람을 구원해 내는 이룰구원의 이치를 모른다면 이 사람은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수준이다.
성도가 이런 원수로부터 피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차원을 알아야 하고, 이렇게 되면 원수의 차원은 저절로 알아지게 되는 것이니 원수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거다. 그 꾀에 빠지지 않는 거다. 그러나 자기가 낮은 수준에 머물면 자기는 고통 중에 살게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