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바람
사는 일이 답답하고 무기력해질 때면 폐쇄 회로를 탈출하듯 길을 나선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자갈치역에 내려 육지와 바다가 맞닿은 곳에 전을 펼친 자갈치시장 길을 택한다. 생선 비늘이 은빛처럼 번뜩이는 자갈치시장은 우아하게 밥 먹고 살아갈 수 없다는 곡절 많은, 사람들의 장이다. 투박한 삶이 펼쳐진 곳이어서일까, 온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삶의 소리가 질펀하다.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거친 듯 꾸밈없고, 투박하지만 인정스러운 부산 사투리가 활기에 넘친다.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강한 아지매 들의 뜨거운 열기에 바닷바람도 일순, 주춤한다. 길 양쪽 좌판대 위에 누워 은비늘로 유혹하는 굵직굵직한 생선들은 생기 왕성한 자갈치 아지매들을 닮아 더욱 생생하다. 마트의 어패류 코너에서 가지런히 진열된 상품만 보아 왔던 주부들이라면 두 눈이 휘둥그레질 판이다. 시장 상인들의 걷어붙인 팔소매 아래로 퍼렇게 드러난 정맥 속엔 희망도 살아 숨 쉬는 듯하다.
이어지는 구이 골목은 어떤가. 노릇노릇 익혀내는 고소한 생선구이 냄새가 잃었던 입맛을 되살려 준다. 풋고추와 양파에 고추장 양념과 자갈치 아지매의 인심까지 듬뿍 버무린 ‘곰장어’구이 맛이 화끈하다. 갖가지 생선들을 거뜬히 구워내는 연탄불은 잊었던 추억인 양 정겹다. 눈맛, 입맛, 사람 맛까지 어우러진 시장길을 걷다 보면 그 옛날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세상 구경을, 하던 유년의 장날이 떠 오른다. 시끌시끌 부산하게 이어지는 자갈치시장 길은 잠자던 세포들을 깨워 성실한 심장 박동을 다시 일으켜 주는 바람이다.
춤의 바람
슬픔 하나 갖다 버릴 곳 없어 가슴이 죄어 올 땐, 마음을 실은 춤의 바다에 빠져 본다. 소리와 춤, 몸과 마음이 혼연일체로 어우러진 춤꾼의 춤사위를 보았으리. 사람의 몸짓은 말과 글을 앞선다. 녹진녹진 내딛는 버선발이 날렵하게 휘몰아 돌고 멈추는 몸놀림엔 기쁨도 춤이 되고, 슬픔도 춤이 된다. 혼신으로 풀어내는 춤꾼의 춤을 ‘맑은 물줄기가 흐르는 상류가 아니라 하나의 장강(長江)이며 수심(水深) 깊은 바다’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정중동(静中動), 동중정(靜中動)의 미가 짙게 느껴지는 환상의 춤사위다. 도도한 진양조장단과 엇모리장단이며 살풀이가 몸에 붙어 신들림이듯 춤의 바다에 몸을 던지는 한 소절의 자유로움이다. 즉흥이라고 할지 창조적 여백이라 할지.
삶의 테두리 속에서 얻어내는 한가락 춤이 그럴진대 파도라는 춤은 어떠할까. 춤꾼은 못 되더라도 우리 춤이 좋아 틈틈이 배워 왔던 고전 춤이 요즈음 자주 위안이 된다. 함께 배우는 사람들과 어울린 한마당의 춤은 나의 바다가 되고 파도가 되기도 한다. 속을 옥죄던 고리 하나가 너울춤을 추며 어느 순간 조절 기능을 하는 것이다. 바람은 가슴속에서도 일고, 마음의 바람을 지피는 몸에서도 인다.
글의 바람
엉킨 실타래처럼 생각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날엔 한 권의 책을 뽑아 든다. 나름대로의 개성 있는 얼굴로 눈길을 끌려는 책장의 책들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수필집 하나를 택한다. 어쩐지 늘 수줍음을 타는 책이 손에 걸려든 게다. 감성이 깊은 한 편의 글을 만나 그 행간에서 여유를 얻고자 하는 무의식 때문이리라. 허구를 말하기보다 사유에 바탕을 둔 수필에는 한 가닥 샘물 같은 글쓴이의 심전도가 나타난다는 노 작가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글을 만나면 내게도 작가 마음의 진동이 그대로 내게 전해진다.
글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단숨에 주욱 읽혀 내려가는 글이 캔에 든 청량음료처럼 상큼하고 순간적이라면, 읽다가 잠시 사색에 잠기게 하는 글은 잘 끊인, 차 맛처럼 향이 오래 맴돈다. 그 느낌을 읊조리며 글 줄기를 따라간다. 상큼 담백한 글맛에선 청량한 바람, 한줄기가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며, 연녹색을 토해내는 찻잎 같은 글 향엔 가슴속에 비단결 바람이 일렁인다. 아릿한 감동이 글과 사람 사이에도 바람으로 분다.
사유의 바람
바람을 생각한다. 삶에서 곧잘 맞닥뜨리는 사람과 자연, 사회와 개인, 사람과 사람, 마음과 몸, 머리와 가슴 사이로 부는 바람, 삶이란 그렇게 한바탕 불고 가는 바람이라 하던가. 꽃바람 비바람 눈보라 폭풍우가 다 지나간 뒤에 빈 들판과 적요한 바다에 깔릴 외로운 바람도 생각한다. 사는 게 허무와 닿아 있다 하여도, 생명력은 허무를 바탕으로 타오를 때 가장 절실한 법이라고 했으니 바람을 탓하지는 않을 터이다. 감미로운 멜로디처럼 상긋한 바람이든 진흙탕에 널브러진 서러운 바람이든, 눈물처럼 진실한 삶을 탓할 수야 없지 않는가. 절대 고독의 쓸쓸한 바람 앞에서 마음 놓고 가벼워지는 법이라도 한번 터득해 볼까 싶다. 오늘도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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