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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中道)는 항상 도(道)에 머물 수 있는 질서에서 무질서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피정 넷째 날 :「계시(啓示)자의 완전함과 계시(啓示)를
보(받)는 자의 결핍①」
삼위일체 하느님이신 무위법(無爲法)의 예수님을 떠나서는 어떠한 神들도 피조물이면서 결핍된 존재이듯이 아무리 크게 깨달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해도 우상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는 견성(見性)과 계시(啓示)일 뿐이듯이....
아무리 큰 계시(啓示)를 보(받)더라도 계시(啓示)자의 완전함과 계시(啓示)를 보(받)는 자의 결핍이 항상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한번 묵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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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불교와 계시종교의 차이점「예수 그리스도는 계시
의 완성」
불교는 자연과 신비가 공존한 종교입니다
자연과 신비가 공존한 불완전한 종교입니다
그러나 계시종교는 계시의 완성인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계시로 교육을 받고 종교가 생겼는데
완성된 계시가 아니라고 말 할 수가 있겠습니까?
계시자의 완전함과 계시를 보(받)는 자의 결핍으로
완성된 계시라도 가르침을 점진적으로 깨달아야지....
하느님의 창조론이 꾸민 거짓말일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전능한 신이다” 하셨는데 이것이 거짓말이라면
하느님을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가톨릭의 계시종교는 전능하시고 창조고 진리입니다
누가 어떠한 논리로도 이것을 정당하게 부정하는 논리는
만들어 내지 못했고 앞으로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입니다
불교는 자연과 空사상이 공존한 대단한 종교이지만
결핍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가톨릭은 창조설이 아니라 계시로 창조인 진리입니다
창조진리 계시진리 계명진리 이스라엘 모든 역사진리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이 증명하신 계시진리인 것입니다
길, 진리, 생명이신 삼위일체 하느님 성자께서 증명하신
로마시대에 빌라도 총독 치하에서 역사적으로 증명하신
이 모든 것을 부정한다면 불교가 옳은 종교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금도 메시지로 전능을 창조를 말씀하시는데
이 계시된 것을 부정하고 空사상을 윤회를 믿으라고요?
이런 것에 아직까지 속고 또 속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계․정․혜), (사성제), (팔정도) 이런 교리가 있다는 게
자연종교로써 얼마나 훌륭하고 대단한지 모르겠습니다
空사상의 즉 불완전한 제도의 종교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는 전능한 신이다” “나는 야훼다” 이름을 계시하신
즉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인정해야지
부분적인 깨달음으로 완전한 계시를 말할 수가 없듯이
空사상의 즉 불완전한 철학의 종교라는 것을 인정하고
완전한 계시종교 보다는 자연 진리를 탐구한 종교로써
죄를 지으면 번뇌의 상태에서 마음이 갈등하는 것이지
(탐․진․치)를 끊지 못하면 악습이 되풀이 되는 것이고
(탐․진․치)를 끊는 것이 바로 완덕을 이루는 것이지만
마음을 닦아서 깨달음을 얻으면 윤회를 벗어나는 것이지
사람의 영혼이 동물의 영혼이 되는 그런 윤회는 아니다
사람의 영혼은 어머니의 태중에 잉태될 때 창조되는데....
불교는 윤회를 믿다보니 교리를 그렇게 적용한 것이다
사실 철학은 자꾸 뒤집히지 완전히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요한 14장 6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말씀하신
선하신 분도, 스승도,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도 오직
한 분뿐이신(마태 11장 29절, 19장 17절, 23장 8-10절 참조)
진리의 실체라야 완전한 참된 종교를 세울 수 있는 것이지
진리를 깨달은 것으로는 완전한 제도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을
불교의 부분적인 계시진리로는 하늘나라를 알 수가 없듯이
불교는 계시의 완성진리를 어느 정도 모를 수 있다는 것을
즉 주님을 깨닫지 못하고 하늘나라를 어떻게 깨닫겠습니까?
마태 22장 29절 ‘부활 논쟁’ 편에서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즉 자연종교가 계시종교를 인정 할 수 없다면 어떻겠는가?
즉 계시종교의 창조진리를 인정 할 수 없다면 어떻겠는가?
즉 윤회설이나 “나는 누구인가?”하는 불확실한 화두보다는
즉 부처님과 나는 둘이 아니지만 또한 둘이라는 사실을
즉 창조주와 나는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는 사실을
즉 사람의 영혼이 天使의 영혼이 되는 그런 윤회는 아니다
즉 윤회는 설이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예수님의 진리입니다
즉 윤회는 설이지만 창조는 믿어야할 예수님의 진리입니다
즉 사람의 육신은 윤회한다지만 영혼은 매번의 창조입니다
그러니까 天使의 심판은 끝났고 인간의 심판은 남았으니까
그러니까 아담과 이브의 창조 때와 다름없는 재창조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당신의 숨결을 담은 매번의 재창조입니다
※ 2024. 7. 14. 수도회 전체모임 연수 때 윤학 미카엘 변호사님의 초청 특강【나는 무엇이냐? / 어떻게 살 것인가? / 인생에는 답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여기에 인생의 답이 있습니다. / 삶이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가치가 있습니다.】을 들으면서 나는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여러 번 읽었지만.... 인생에 답이 있다는 말이 너무나도 듣기 좋고 생소하고 자꾸 눈물이 나고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윤학 미카엘 변호사님은 인생의 목적과 가치와 답을 발견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면서 답을 발견하지 못하면 항상 해맬 수밖에 없듯이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목적과 가치와 답을 발견하고 실천하여 성인, 성녀들이 되시기를 희망하며 무한한 감사와 찬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인생은 미완성(이 진관)을 부른 가수는 지금도 “인생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답을 하지 못한다고 하던데 이제는 답을 할 수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상해천주교요리(詳解天主敎要理)’ 상권
1 (문)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낫느뇨?
(답)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낫느니라.
여기서 “구한다”는 말은, 물에 빠지거나 불에 타는 것을 ‘구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영혼을 구한다”는 말은 사람이 죽은 다음 그 영혼이 지옥의 영벌(永罰)을 면하고 하늘 나라의 영복(永福)에 들어감을 뜻한다.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낫느뇨?”란 인생의 최후 목적을 묻는 말이다.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할 때는 언제든지 그 목적이 있다. 길에 걸어가는 사람, 밭에서 일하는 사람, 집에서 쉬는 사람, 모두 제각기 목적이 있다. 목적 때문에 행동하는 것은 사람의 본질이다. 이런 본질을 가진 인생 자체의 목적이 없을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즉 무슨 목적으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가?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나고 싶어서 난 것도 아니요,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도 아닌 만큼, 자기가 자기의 목적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인생을 창조하신 천주(하느님)께로 올라가 무엇 때문에 사람을 창조하셨는지 알아보는 수밖에 없다. 하느님께서 목적 없이 행동하실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는 당신을 공경하며 당신의 계명을 따라 착하게 살고, 죽은 후에는 그 영혼이 당신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 당신 복락(福樂)을 함께 누리게 하시려는 뜻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목적’이다.
인생의 목적이 여기 있음은 다음의 이치로 보아도 알 수 있다.
1. 인생의 가치를 보아서……, 2. 인간의 갈망을 보아서……, 3.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를 보아서……, 4. 성서는 이를 명확히 지적한다.……
3 (문) 천주교는 무엇이뇨?
(답) 천주교는 천주 친히 세우신 참종교니라.
하느님께서는 우리 현세 생활에 절대 필요한 것뿐 아이라, 여러 과일과 기화 요초(琪花瑤草) 등 유익하고 재미있는 것까지 풍부하게 창조하셨다. 그러하신 만큼 더욱 막중한 관계를 좌우하는 인생 목적 달성 문제에 무관심하지 않으시고 이를 위하여 종교를 창립하여 주셨으니, 이것이 바로 천주교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양심이나 잘 지키고 자기가 생각해낸 방식으로 집에서 하느님을 공경하여도 될 것이지, 뭐 천주교라는 것을 반드시 신봉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한다. 하느님께서 만일 종교를 창립하지 않으셨다면 이런 이론이 성립될 수 있지만, 일단 창립하신 사실 이후에는 이런 이론이 용인될 수 없다. 너희가 이를 신봉하든지 말든지 너희 마음대로 하여도 좋다는 모호하고 애매한 태도로 창립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를 창립하심과 동시에 이를 통해서만 당신을 공경하고 각자 영혼을 구하라는 명령을 또한 내리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람은 모든 일에 전문가의 지도를 받도록 되어있다. 음악, 미술, 과학 등 모든 분야가 다 그렇다. 더구나 하느님과 영혼에 관한 초감각적 사항에 있어서 사람이 혼자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일 뿐 아니라 또한 즉시 미신에 떨어질 것임은 자명하다.
어떤 사람은 동양에도 종교가 많은데 하필 서양에서 건너온 천주교를 믿느냐고 한다. 이것은 종교가 무엇인지 모르는 말이다. 종교라는 것이 정신 수양이나 하는 것이라면 이것을 믿든지 저것을 믿든지 아무것도 안 믿든지 마음대로 하여도 좋을 것이지만 종교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하느님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게 하는 것인 만큼 여기에 양(洋)의 동서가 있을 수 없다.…
9 (문) 계시는 무엇이뇨?
(답) 계시는 천주 친히 진리를 사람에게 가르치사 영적(靈
蹟)으로 그 진실됨을 증명하여 주신 것이니라.
【“계시” : 열어 보인다는 뜻. 마치 가리웠던 막을 열어 제쳐, 아직까지 볼 수 없었던 그 내부를 보여준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존재와 영혼의 존재 같은 것은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자기 지능으로 알아낼 수 있지만, 그보다 더 깊은 문제는 사람의 지능으로는 알 수 없다. 이렇게 우리 지능으로는 알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인 종교적 진리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을 “계시”라 한다.
예전의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다른 사람들을 사이에 두지 않고 하느님이나 천사들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으므로 이를 ‘직접 계시’라 하고,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만 알게 되었으므로 이를 ‘간접 계시’라 한다.
직접 계시는 외적으로도 될 수 있고 내적으로도 될 수 있다. 다니엘 예언자가 벽에 나타난 글자를 읽고(다니 5장 참조), 예레미야 예언자가 끊는 가마솥을 보고(예레 1장 참조), 요한 사도가 일곱 등경을 본 것(묵시 1장 참조)은 외적인 기호나 형상을 통한 것이었고 솔로몬이나 사도들에게 내린 계시는 내적 정신 속에 박히는 확실한 지식으로 되었다. 외적으로 되든지 내적으로 되든지 하느님께서는 항상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그것이 당신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확실하게 인식시킨다.】
계시의 목적이 몇몇 개인이나 작은 단체를 위한 것이면 사적 계시요 인류 전체나 대부분의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면 공적 계시이다.
“영적(靈蹟)으로” : 기적, 이적(異蹟)으로라는 말이다. 기적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 두 가지로 알아들을 수 있다. 넓은 의미로는 좀 이상한 사실을 사람들은 기적이라 한다. 예를 들면 버스가 뒤집혀 모든 승객이 다쳤는데, 그중 한 사람이 무사하였으면 이를 기적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좁은 의미, 즉 신학적인 본래 의미의 기적은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서 예외적으로 이루어진 감각할 만한 사실”이다.
감각할 만한 사실 : 사람은 영혼과 육신으로 된만큼 그 사실이 감각될 만한 것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어떤 영혼 안에만 일으키시는 변화(예를 들면 常存 은총, 성체 성사)는 본래 의미의 기적은 아니다.
26 (문) 천지를 조성하신 자라 함은 무슨 뜻이뇨?
(답) 이는 천주 당신 전능으로 없는 가운데로조차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섭리하심으로 보존하시며 다스리시
는 자라는 뜻이니라.
“없는 가운데로조차(ex nihilo)” : 우리가 무엇을 만들려면 재료가 있어야 하고, 연장을 써야 하고, 수고를 들여야 하고, 또 시간을 소비하여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은 아무 재료나 도구나 노력이나 시간도 들이지 않고 즉시에 만물을 창조하셨다. (창조된 우주가 발전하기 위하여 시간을 요구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재료 없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말은, 원인 없이 만물이 생겼다는 ‘◯→만물’이 아니라 ‘전능→만물’이다.
우주의 재료라면 기껏해야 물질이다. 그런데 이 물질은 지극히 불완전한 것이므로 만들어지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다른 것에서 존재를 받지 않고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능동의 능동(Activum=Actus purus)이다.【물질은 타성적 관성적이요 소모되고 변이되는 수동적인 것, 불완전한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보쉬에(Bossuet)의 말은 철학적으로 매우 당연하다. 자기를 움직이지 못하면, 그 움직임의 기본인 존재를 자기가 가질 수는 더구나 없다.】
그리고 불가견의 세계, 즉【천사들을 창조하시는 데 ‘그 재료’란 있을 수 없는 망상이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새로 나는 사람들의 영혼을 창조하신다.】영혼이 재료가 있다면 벌써 영혼이 아니다.
예술계에서는 전에 다른 이가 하지 못한 것, 즉 전에는 없던 것을 만들어 놓으면 창작이라 한다(비록 순수한 의미의 창작은 아니지만). 그리고 예술가의 예능이 클수록 많은 창작품을, 훌륭한 창작품을 내놓는다.
【하느님의 전능은 전에 온전히 없던 것을 ‘창조(Creatio)’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전능이요, 전능이니까 그러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창세 1장 3절)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전능을 잘 나타낸 힘있는 표현이다. “주의 말씀이 계시자 이루어졌고, 주의 명이 계시자 존재했나니”(시편 32장 9절).
“나 야훼가 만물을 창조하였다. 나는 혼자서 하늘을 펼치고 땅을 밟아 늘였다”(이사 44장 29절). “예야, 내 부탁을 들어 다오. 하늘과 땅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라. 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2마카 7장 28절).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신령적 물질적 두 가지 조물을 없는 가운데에서 창조하셨다”(바티칸 공의회).…………】
“그 섭리하심으로” : 만물을 ‘보존’하며 ‘다스리심’을 뜻한다.
보존(Conservatio) : 그 존재를 지켜 유지되도록 돌본다는 뜻이다. 보존은 ‘창조의 계속(Creatio continuata)’이라는 것은 제16문답 천주 무량(無量)에서 이미 말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에 대하여 “조물주의 능력은 모든 피조물이 존속하는 원인이다. 만일 그 능력이 피조물을 다스리기를 그친다면 피조물들의 종류도 동시에 그치면서, 자연 자체가 허무로 돌아갈 것이다”(lib. Ⅳ De Genesi ad litter., C. Ⅻ)라고 하였다. 캄캄한 하늘이 밝기 위하여는 태양이 첫 순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필요하다. 태양이 비치길 그만두는 동시에 하늘은 암흑으로 돌아갈 것이다.
예수의 “내 아버지께서 언재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장 17절)라는 말씀에서의 일한다(operor)는 것에 만물의 보존도 들어가는 것이다.
“다스리는 자” : 무엇에 목적을 정해 주고 그 목적 달성에 합당한 방법을 늘어놓는 것을 안배(按排 Providentia)라고 한다. 그러므로 안배는 지능 안에 세워진 설계이다. 이 설계대로 추진하여 실현시킴(Executio)을 ‘다스림(Gubernatio)’이라 한다. 여기서는 편의상 이 ‘다스림’까지를 포함하여 ‘안배’라 하겠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다음 당신이 제정한 자연 법칙에 맡겨 버리고 돌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보살피시며 안배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목적을 세우시고 만물을 창조하셨으므로 그대로 손을 떼시고 목적 달성 여부는 관심없이 그대로 내버려 두신다는 것은 그 지혜에 어긋나는 일로, 하느님께 있을 수 없다.
작가는 자기 작품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장에 큰 기계를 시설한 기사는 그 운행 실태를 보살피고 부모는 자식을 매사에 보살핀다. 심지어 동물 세계에서도 이러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전선하신만큼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내버려 두지 않고 당신 안배로 다스리신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성서 여러 곳에서 이것을 증언한다. 1) 모든 것을 안배하신다.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펼치시며, 모든 것을 훌륭하게 다스린다”(지혜 8장 1절). “모든 사람을 보살피는 하느님은 주님 외에는 따로 없다”(지혜 12장 13절). 2) 아주 작은 것까지도 “참새 두 마리가 단돈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럼 참새 한 마리도 너희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태 10장 29절). 하느님은 무한히 완전하시고 전능하심으로 적은 수를 보살피신다고 힘이 덜 들고 많은 것을 보살피신다고 힘이 더 드는 차이가 있을 수 없다. 3) 우연인 것 같아도 “주사위는 사람이, 결정은 야훼께서”(잠언 16장 33절).…………
34 (문) 영혼은 무엇이뇨?
(답) 영혼은 신령하여 불사 불멸하는 체(體)니 육신과 합
하여 그 생명이 되느니라.
“신령하여” :【비물질적이란 말이다. 영혼의 고유 능력에서 나오는 생각(관념, 판단, 추리)은 물질과 공통되는 점이 하나도 없다. 그 생각이 비물질적임을 우리 자신이 잘 인식하고 있다. 왜냐하면 물질에서 비물질적 작용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체(體)” : 실체(Substantia)란 말이다. 어떤 물건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자존(自存)하는 그 기본을 그 물건의 실체라 한다. 나무는 나무의 실체로 해서 나무다. 그 나무의 빛깔, 모양 등은 그 실체에 의존해서 있다. 나무의 작용은 그 나무의 실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실체에 의존하여 있는 것을 ‘속성(屬性 Accidens)’이라 한다.
사람의 정신력은 위대하다. 라디오, 전송(電送) 사진, 무선 전신, 전파 탐지기, 텔레비전, 자동 전화 등 문명의 이기(利器)가 줄기차게 발전되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사람의 정신력의 산물이다. 이런 무서운 정신력의 발원(發源)이 한 실체일 것은 명백하다.
“불사 불멸하는” : 영혼은 신령한 실체이므로 물질적 파괴나 화학적 변화를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본질상 불멸이다. 육신을 떠나서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마태 10장 28절),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이… 부르짖었습니다”(묵시 6장 9-10절).
“그 생명이 되느니라” : 육신이 살아 있는 것은 영혼의 생명력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떠나면 육신은 죽고 분해된다. 사람은 한 영혼으로 생존하고 감각하고 사고한다. 이 세 가지 능력이 한 영혼에 있다.【사람이 어머니의 태중에 잉태될 때 그 영혼은 하느님께로부터 직접 창조】된다.
그러므로 전부터 있던 영혼이 어떤 육체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부모의 육신이나 영혼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물질인 육신에서 영혼이 나올 수 없고, 신령하여 순일(純一)한 영혼에서 다른 영혼이 나오지는 못한다. 그리고 전생(前生)을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께로부터 직접 창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티끌로 된 몸은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돌아가고, 숨(靈魂)은 하느님께 받은 것이니 하느님께로 돌아가리라.”(전도 12장 7절)」참조.
※ 인터넷 다음 카페글【「간추린 가톨릭 교회 교리서(6) -
8.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완성」:
1)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의 완성이신가?
하느님의 계시는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모세와 예언자들에게 주신 말씀들은 구약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장 18절)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장 1-2절)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완전하고 결정적인 유일한 ‘말씀’이시다.
성부께서는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말씀하셨고, 그 말씀 외에 다른 말씀은 없다.(가톨릭교회교리서 65항)
2) 예수님께서 계시해 주신 내용은 무엇인가?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오랜 세월의 신앙 여정을 통해서 “참된 하느님은 야훼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율법 준수)”,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행실에 따라 공정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지만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의 계시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보다 깊은 하느님의 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장) 등의 말씀으로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병자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해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결정적으로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 사랑의 한없는 깊이를 증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더 덧붙일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통해 계시가 완성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리들의 사랑 의무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장 12절)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장 11-12절)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내면의 엄청난 비밀까지 계시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장 30절)라는 선언과 더불어 삼위일체의 신비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내면에 계신 제2위격이신 성자의 신분이 아니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신비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 계시 내용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증명이 되었습니다.★
3) 계속 이해되어야 하는 예수님의 계시
계시가 완결되었다고는 해도 그 내용이 완전히 명백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앙은 시대를 살아가며 계시의 내용 전체를 점진적으로 파악해 가야 할 것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66항)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모두 다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그 사랑의 깊이를 단 한 번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교회 전체가, 그리고 신자 개개인이 예수님께서 계시하신 내용을 점진적으로 이해해 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고,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참조.
※ 팔정도(八正道)「8가지의 법륜(진리의 바퀴)」: 중생이 고통의 원인인【탐(貪)․진(嗔)․치(痴)】를 없애고 즉【칠죄종(七罪宗)】을 없애고 해탈(解脫)하여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실천수행해야 하는 8가지 길 또는 그 방법.(영성시집 ‘183. 가톨릭교회의 구원관과 불교의 구원관’ 편 190페이지 참조)
※ ‘상해천주교요리(詳解天主敎要理)’ 중권
178 (문) 모든 죄의 근원은 무엇이뇨?
(답) 모든 죄의 근원은 칠죄종(七罪宗)이니, 교오(驕傲),
간린(慳吝), 미색(迷色), 분노(忿怒), 탐도(貪饕), 질
투(姪妬), 해태(懈怠)니라.
‘죄의 종(宗)’이라고 한 것은 그 죄에서 다른 죄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칠죄종’은 이런 종이 일곱 가지란 뜻이다. 예를 들면, 교오에서 이기주의, 불순명 고집 같은 것들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본다면 ‘죄’이기보다는 ‘악습’, ‘모병(毛病)’이다. 그렇지만 다른 죄들의 근원이라고 해서 바로 대죄는 아니다. 대죄와 죄들의 근원은 서로 다른 것이다. 어떤 것이 대죄인지는 제자리에서 나올 것이다. ★의지가 윤리에서 탈선함은, 선익을 무질서하게 탐하거나, 선익을 그에 따르는 불편 때문에 무질서하게 도피하기 때문이다.★
★교오, 간린, 미색, 탐도는 선익을 무질서하게 탐하는 것이요, 질투, 분노, 해태는 피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그에 따르는 불편 때문에 무질서하게 피하는 것이다.★ 이제 순서대로 살펴보자.
1. 교오(驕傲) : 교오(Superbia)는 자기의 높음을 무질서하게 탐함이다.…… / 2. 간린(慳吝) : 간린(Avaritia)은 세상 사물에서의 무질서한 애착이다.…… / 3. 미색(迷色) : 미색(Luxuria)은 성적 쾌락의 무질서한 탐욕이다.…… / 4. 분노(忿怒) : 분노(Ira)는 복수하려 하는 무질서한 욕망이다.…… / 5. 탐도(貪饕) : 탐도(Gula)는 음식을 무질서하게 탐하는 것을 말한다.…… / 6. 질투(姪妬) : 질투(Invidia)는 남이 잘되는 것을 마치 자기 탁월성의 손실인양 싫어하고 근심하는 것이다.…… / 7. 해태(懈怠) : 해태(Acedia)는 일을 하기 싫어하는 게으름을 뜻한다.……(326-337페이지 참조)
※ 중도(中道) :〔요약〕팔정도의 실천을 통해 고와 낙의 양면을 떠나 심신의 조화를 얻는 길을 의미하는 불교교리. 즉 그러니까 팔정도(八正道)와 7덕이 없으면 중도(中道)가 아니고 즉 칠죄종(七罪宗)의 설명에서 선익을 무질서하게 탐하거나 무질서하게 피하는 것을 여러 번 이야기 하였듯이【탐(貪)․진(嗔)․치(痴)】를 없애고 즉【칠죄종(七罪宗)】을 없애고 즉 그러니까 팔정도(八正道)의 올바른 질서에서 벗어난 길이나 완덕인 7덕(신덕, 망덕, 애덕, 지덕, 의덕, 용덕, 절덕)의 올바른 질서에서 벗어난 길이 바로 무질서한 탐욕이고 중도(中道)가 아닌 것이듯이 즉 중도(中道)는 항상 도(道)에 머물 수 있는 질서에서 무질서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듯이 즉 예수님을 믿는 덕도 예수님을 올바로 믿어야 하는 것이듯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도 선익을 무질서하게 탐하거나 무질서하게 피하는 것은 올바로 믿는 믿음도 아닌 것이듯이 즉 악습이 덕의 습관의 경지에 이르는 이것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 곱비신부님 메시지 405번 ‘표범같이 생긴 짐승’ 편【20. -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사는 삶의 열매인 향주삼덕과 사추덕에 대해서 프리메이슨은 습관적으로 죄의 상태에서 사는 삶의 열매인 칠죄종(七罪宗)의 확산으로 대립한다. (즉) 믿음에 대해서는 교만으로, 바람에 대해서는 음욕(迷色)으로, 사랑에 대해서는 인색으로, 현명에 대해서는 분노로, 용기에 대해서는 나태(懈怠)로, 정의에 대해서는 질투로, 절제에 대해서는 탐욕으로 대립하는 것이다.】참조.
※ 묵시 12장 1-18절 ‘여자와 용’ 편「3절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큰 붉은 용이 나타났는데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고 머리마다 왕관이 씌워져 있었습니다.」과 묵시 17장 1-18절 ‘엄청난 탕녀에게 내릴 심판’ 편「3절 그리고 그 천사는 성령으로 나를 감동시켜 광야로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에서 나는 진홍색 짐승을 탄 여자 하나를 보았습니다. 그 짐승의 몸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히 적혀 있었고 머리 일곱에 뿔이 열 개나 달려 있었습니다.」은 칠죄종(七罪宗)을 말하는 것이고 뿔이 열 개는 10계명에 대립하는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 인터넷 다음 바라밀 - 나무위키 : 대승 불교에서 열반의 경지로 다가가기 위한 수행 방법이다. 바라밀이란 바라밀다, 파라미타라고도 하는데, 1. 피안에 이른다(도피안) 그리고 2. ‘완성’, ‘성취’, ‘신성한 완전무결’의 두 가지 뜻이 있다.
※ 팔정도(八正道)「8가지의 법륜(진리의 바퀴)」: 중생이 고통의 원인인【탐(貪)․진(嗔)․치(痴)】를 없애고 즉【칠죄종(七罪宗)】을 없애고 해탈(解脫)하여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실천수행해야 하는 8가지 길 또는 그 방법.
※ 영성시집 ‘183. 가톨릭교회의 구원관과 불교의 구원관’ 편 189-195페이지, ‘199. 참된 행복 선언 기념 성당을 순례하고’ 편 262-265페이지 참조.【(영성시집 ‘206. 불교와 계시종교의 차이점「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완성」’ 편 398-314페이지 참조)】
……………………………(58p / 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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