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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王의 <獨山斬倭>의 비밀: “합비(合肥)-금성(金城),<關防路>,<大運河>
태왕비문(太王碑文)에 등장하는 왜(倭)가 열도(列島)와는 무관하며, 그 정체는 고일본(古日本)으로써 그 중심세력은
삼도(三島) 즉 수마트라(smatra)-자바(Java)-보르네오(Borneo)라는 말씀을 이미 드린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태왕비문(太王碑文)에 이런 왜(倭)와 고구리(高句麗)가 격돌하는 가장 큰 이유가 당시대 아시아(Asia)에
‘관방로(關防路)지지세력’과 ‘대운하(大運河)세력’의 격돌이라는 가설(假設)을 좌계는 ‘(*) 맥제(百濟)의 <國西大島>
는 해남도(海南島) -[1]’에서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좌계의 가설(假設)에 대해서 ‘댓글’로써 천룡(天龍)님께서 통찰력있는 비판을 해주었습니다.
천룡(天龍)님의 통찰어린 지적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 첫째는 대운하(大運河)는 중국대륙 내부(內部)의 물자유통가 그 주목적으로 보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다.
② 대운하(大運河)는 양자강 입구와 그 ‘위’에 -이는 양자강을 뜻함 -자리잡은 세력이 ‘도자기 로드’를 통해서 직접적
으로 고구리(高句麗)가 관할하는 ‘발해지역’으로 직접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시공했을 개연성이 더욱 크다.
③ 그렇기는 하나, 대운하(大運河)의 시공자체를 ‘동남아 해양세력’은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것은 확실하다.
이런 천룡(天龍)님의 지적은 매우 통찰력있고 핵심된 사항을 파악한 비판이기에 좌계가 <거시적인 가설(假設)>을
편하게 개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고마운 비판이었습니다.
위 ③과 관련해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할 것이 바로 강서성(江西省)의 공강(贛江)입니다.
(공강(灨江)과 혼용해서 씀)
강서성(江西省)은 문자 그대로, 양자강이 하류(下流)쪽에서 뒤집힌 컵(∩)처럼 올라갔다가 내려가는데, 이 올라가는
부분에 위치하기 때문에, “양자강의 서쪽”이란 뜻에서 강서성(江西省)으로 붙어졌음을 익히 아실것입니다.
그런데, 이 강서성(江西省)은 우측에 무이산맥(武夷山脉)으로 좌측에 나소산맥(羅宵山脉)으로 되어있으면서 그
가운데에 공강(贛江)이란 강(江)이 길게 북류(北流)하는데 파양호(鄱陽湖)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공강(贛江)의 <공(贛)>이란 글자는 “주다.” “하사(下賜)하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글자 자체가 왼쪽에 ‘음악의
마디’를 뜻하는 장(章)의 변(邊)에 우측에 “각각(各各)의 조공(朝貢)”이 있어서 결국 <각각의 조공(朝貢)들이 음악
처럼 조화를 이루는 것>이란 뜻을 함축하고 있는데, 요약하자면, 공(贛)이란 <조공(朝貢)의 흐름이 조화되어 무역로
(貿易路)>란 의미를 띤다하겠습니다.
따라서 이런 명칭자체가 이 공강(贛江)이 고대사에서 핵심이 되던 ‘국제적인 물류 운송로’가 된다고 할수 있겠읍니다.
이런 역사적인 이유에서 강서성을 <외>자로 나타날때에 공(贛)혹은 공(灨)이라고 적을 정도로 강서성(江西省)의
핵심인 것이지요.
그런데, 무이산맥(武夷山脉)이 고대의 신라(新羅)와 맥제(百濟)의 천험(天險)의 경계선이라면, 공강(灨江)은 맥제
(百濟)의 주 ‘국제적인 물류 운송로’로써 매우 중요하였던 것이지요.
광동성(廣東省)에 맥제 최대의 해운(海運)기지가 있었음을 고려하면, 광동성의 북강(北江)으로 올라와서 잠시 토착
(土著)을 - 육운(陸運)으로 전환하는 것을 뜻함 - 하여 공강(贛江) - 파양호(鄱陽湖)까지 연결되면, 이는 씰크(silk)
로드와 도자기(china)로드를 연결하는 관방로(關防路) 즉 양자강 최대지류인 한수(漢水)에서 진령산맥을 넘어서
저 감숙회랑까지 연결되는 곳과 직결됨을 알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광동성의 <북강(北江)-공강(贛江)-파양호(鄱陽湖)>를 남관방로(南關防路)라고 지칭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우 중요한 교역로(交易路)인 것입니다.
특히 신라가 오늘날 절강성(浙江省) 안휘성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자강’입구가 차단이 될경우, 맥제(百濟)로
써는 사천(四川)-맥제와 광동성(廣東省)-맥제를 통해서 해외(海外) 즉 ‘도자기 로드’를 연결하는 핵심도는 ‘국제적
물류 교역로’가 차단되는 것을 풀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이런 ‘지리경제학적’ 관점에서 남관방로(南關防路)가 북관방로(北關防路)와 연결되는 것이 “맥제(百濟)와 고일본
세력에게 얼마나 지정학(地政學)적으로 중요한 것인가?”을 중국대륙 전체지리를 통해서 일별(一瞥)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 “남관방로(南關防路):<북강(北江)-공강(贛江)-파양호(鄱陽湖)>”의 지정학적 의미를 거시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지도
http://www.coo2.net/files/lim030203-6chi.gif
아무튼 남북(南北)의 관방로(關防路)를 장악함으로써 가장 크게 이득을 얻을수 있는 것은 바로 고일본(古日本)세력
이고, 또 이 고일본(古日本)세력이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면, 가장 중요한 협조자가 맥제(百濟)가 됨은 천룡(天龍)의
통찰어린 직관(直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방로(關防路) 지지세력’의 충돌과 ‘대운하(大運河) 지지세력’의 충돌은 기이하게도 대운하(大運河)의
시공 자체나 관방로(關防路)의 시공 자체를 두 지지세력이 방해한 흔적은 역사상에 전혀 안 나타난다는 매우 묘한
점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관방로(關防路)는 고주몽-동명성왕 때 이미 보수(補修)하고, 삼한(三韓)사람의 공유 도로(道路)로써
‘이미 있어온’ 도로(道路)인데, 이를 맥제의 진사왕(辰斯王)때 관방로(關防路)의 개척은 삼국사기 맥제본기 진사왕
2년 조(條)에 - “ 2년(386) 봄에 나라 안의 사람으로 나이가 15세 이상된 자를 징발하여 관방(關防)을 설치하였는데,
청목령(靑木嶺)으로 부터 북(北)쪽으로는 팔곤성(八坤城)에 도달하고, 서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다.(二年 春 發國內
人年十五歲已上 設關防 自靑木嶺 北距八坤城 西至於海)”로써 대대적으로 확장한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운하(大運河)의 시공 흔적은 진사왕(辰斯王)의 관방로(關防路) 확장 이전의 기록으로써 이미 나오고 있
다는 것입니다.
‘고구리 사초’ 第十六世<故國原帝>紀 제16세<고국원제>기 31년{단기2694년/AD361}신유 5월 조(條)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5월, <해몽>이 죽어, <산>을 우보로 삼았다. 「5부」를 순시하며 농사・목축 및 수로{=運河? =農水路?} 매만지길
권장하였다.(五月, <觧蒙>薨, <杣>右輔. 巡五部, 勧農牧․治水路.)>
좀 때늦은 교필(校筆)이긴 하지만 <巡五部, 勧農牧․治水路.>의 해석(解釋)을 “「5부」를 순시하며 농사・목축 및 수로
{=運河? =農水路?} 매만지길 권장하였다.”는 좀 합당하지 않은 듯 합니다.
일단 이 문장은 전치(前置)된 순오부(巡五部) - 즉 “오부(五部)를 순시하며,”로 오부(五部)의 힘을 총동원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원된 힘’을 구체적인 행위로 이끈 것이 후치(後置)된 권농목(勸農牧) 치수로(治水路)
의 문장입니다.
그런데, 권농목(勸農牧)은 문자 그대로 “농사(農事)와 목축(牧畜)을 권장(勸獎) 만 하는 것”이고,, 치수로(治水路)는
실제로는 오부가 주력해야할 일은 “수로(水路)를 다스린다.”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교필(校筆)의견을 드리자면,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 더욱 좋을 듯 합니다.
(*) 교필의견(校筆意見)-대안해석(代案解釋)
“오부(五部)를 순시하면서 농업(農業)과 목축(牧畜)을 권장하기 위하여 수로(水路)를 다스리록 하였다.”
이런 교필의견(校筆意見)을 드리는 이유는 수로(水路)가 대운하(大運河)라고 좌계가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부(五部)의 영역을 오늘날 사학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설정이 되었음을 ‘고구리 사초’를 읽으
면서 느낀 점이기도 하는데, 한 예로 들자면, 남부(南部) 즉 관노부(灌奴部)가 자리잡은 위치는 오늘날 복건성
(福建省)의 금호(金湖)지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이 금호(金湖)지역에 관노부(灌奴部)에 속한 두눌원(杜訥原)이 있었고, 또 이 금호(金湖)에서 바로 ‘고구리 사초’
‘시조추모대제기(始祖<芻牟大帝>紀)’ 13년 10월 조(條)에 등장하는 잉어잡는 곳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시조추모대제기 13년 10월 조(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는 것이지요.
“10월, <두눌원>에서 사냥하고, 잉어를 기르는 집(양리지소겸조기고이사리택) 열을 두었다.(十月, 于<頭訥原>,
置鯉宅十 (養鯉之沼兼造器故以寫鯉宅)”
아무튼, ‘고구리 사초’를 읽으면서 <고구리(高句麗) 오부(五部)>에 대한 좌계의 느낌은 이 오부(五部)가 ‘고구리 왕
(王)’의 관할 영역을 오부(五部)로 나눈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경삼국(管境三國)이 아시아(Asia)를 세계경영하는
소도(蘇塗)-탁평(啄評) 가운데, ‘고구리’가 맡은 주요한 역할에 관련된 “<중추(中樞)-소도(蘇塗)와 탁평(啄評)>을
오부(五部)로 나누었다.”고 보는 관점으로 좌계는 바라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서부(西部)는 오늘날 씰크-로드(silk-load)로 통하는 감숙주랑 주변이고, 동부(東部)는 오늘날 ‘치치하얼’
에서 경박호(鏡泊湖)일대가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순오부(巡五部)라는 것은 실질상 의미가 오늘날 ‘중국대륙 전체’를 순시(巡視)한 것이 된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치수로(治水路)하셨으니, 당연히 이 수로(水路)가 대운하(大運河)가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대운하(大運河)를 시공(施工)하는 까닭이 바로 권농목(勸農牧)이라고 할수 있는데,
이는 오늘날 하남성,강소성,안휘성,강서성 등지의 쌀-생산지역과 중국대륙 위의 모든 목축지대의 목축업을 장려
하기 위함이라고 고국원왕(故國原王)은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대운하(大運河)를 시공한 목적이 ‘중국대륙의 쌀을 중심으로 한 농업’과 새외(塞外)의 유목업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라는 것이 위 ‘고국원제기 31년{단기2694년/AD361}신유 5월 조(條)’에 기록된 진의(眞意)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운하(大運河)가 놓인 지역은 분명히 해동삼국(海東三國)의 즉 고구리(高句麗)-맥제(百濟)-신라(新羅)의
왕가(王家)가 직영하는 지역을 관통하고 있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는 ‘운영자 칼럼’의 <(수나라 영제거/통제거) 수나라 대운하는 거짓, 망상, 거짓말!>이란 글 속에 드러난 사서
(史書)의 기록을 일일히 현장지도에 대비시킨 대운하(大運河)-지도(地圖)에 의해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지요.
(*) ‘운영자 칼럼’에 있는 “사서(史書)를 반영한 대운하(大運河)-지도(地圖)”
http://www.coo2.net/files/young061001-6.gif
이런 거대한 대운하(大運河)가 수양제때 단시간 안에 완성이 된다는 것은 허황됨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아주 고약
한 것은 “대운하(大運河)는 고구리(高句麗)른 정벌하기 위해서 군수물자를 운송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번연히 역사적 사실인양 언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① 대운하가 지역의 동쪽 즉 한반도로 고구리를 비롯한 삼국(三國)을 모두 옮겨버리면서 또 ② 대운하를 만든 것도
수(隋)나라인양 하는 2중의 역사왜곡 현상을 사학계는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운하(大運河)가 있었던 지역이 바로 해동삼국(海東三國)-이는 중국대륙의 동해안이란 뜻임 -인 관경
삼국(管境三國)이 오랜세월을 통해서 완성한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미 ‘고구리’의 고국원왕(故國原王) 시절에 대운하(大運河)의 시공이 한참 진행이 되고 있었다.”는 기록으로써
‘고구리 사초’ 고원원제기 31년{단기2694년/AD361}신유 5월 조(條)는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천룡(天龍)님이 지적하듯 이 대운하(大運河)가 열리면 가장 큰 혜택을 받는 것은 사실상 중국대륙의 천자국
(天子國)임은 분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부의 물류(物流) 유통이 관경삼국(管境三國)의 <해운 세력>과 상관없이 운영할수 있는 장점이 있으니깐
말입니다.
바로 이 점때문에, ‘고구리’는 주도적(主導的)으로 대운하(大運河)를 개척하고, 또 조공(朝貢)-공정-플로우(flow)를
통해서 역대 중국의 천자국으로 부터 투자도 받았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관경삼국으로써는 천자국(天子國)이 항상적인 해외(海外) 투자를 조공(朝貢)-공정-플로우(flow)로써
유도하기 위해서는 ‘중국대륙 내부의 경제적인 안정’이 있어야만 꾸준한 투자를 할 수 있는 조건(條件)이 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봅니다.
단순히 <관방로(關防路)와 대운하(大運河)>라는 두 교역로(交易路)만을 본다면, 대운하(大運河)는 중국대륙의
천자국(天子國)을 포함한 관경삼국(管境三國)의 <균형발달>을 의미하는 반면에, 관방로(關防路)는 오직 고일본
(古日本)과 맥제(百濟)에게만 파격적인 이익을 주고, 신라와 고구리는 이 교역로에서 열외(列外)가 되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그런 교역로(交易路)가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국(大漢國) 즉 대가야로 지칭되었던 지역 즉 <만주-한반도-일본열도>에 있었던 세력에 있어서는
대운하(大運河)가 관방로(關防路)보다도 더욱 매력적인 교역로(交易路)로 대두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대가야 지역에서는 그당시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확보하고 있는 무역품(貿易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래’기름 즉 경유(鯨油)와 ‘고래수염’이었던 것이지요.
(참고: ‘고래수염’은 콜셑트, 브래지어의 재료로써 그리스-로마 문명에서 값비싸게 수입하는 품목이었는데, ‘고래’에
대한 포경선(捕鯨船)을 운영한 최초의 국가가 바로 고구리(高句麗)로써 그 포경선(捕鯨船)선단을 운영하면서 발달한
국가가 동부여이며, 나중에 이를 고구리의 ‘고주리’가 이어받는다.)
즉 대가야 지역의 입장에서 보면 대운하(大運河)가 중국대륙의 동해안의 내륙에 일렬(一列)로 나있는 것이 중국대륙
내부나 씰크로드 지역이나 혹은 도자기 로드로 경유(鯨油)와 ‘고래 수염’등을 공급함에 있어서 훨씬 유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구리 사초’에 의하면, 광개토태왕과 인덕(仁德)은 거의 동맹자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
니다.
첫째 인덕이 딸을 보내서 통혼(通婚)하는 사이임은 물론이거니와 ‘고구리 사초’ 14년{단기2737년/AD404}갑진, 5월
조(條)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 十四年甲辰, -전략(前略)
五月, <龍城>反, 命<朋連>討之, <熙>死守, 不拔. 時, <倭>寇<帶方>. 命<朋連>移攻<倭>船斬獲無算. 此皆海賊之徒,
<仁德>之所不知者也. <仁德>遣使謝罪, 上命<胥狗>如<倭>探其真狀.
-후략(後略)
○ 14년{단기2737년/AD404}갑진, - 전략(前略)
5월, <룡성{=後燕}>이 반란하여 <붕련>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더니, <희>가 죽기로 버티어 빼앗지는 못하였다.
이때, <왜>가 <대방>에 쳐들어왔기에 <붕련>에게 군사를 움직여 <왜>선을 공격하게 하였더니, 목을 베고 사로잡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들은 해적 무리들이었으며, <인덕>이 알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인덕>은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고, 상은 <서구>를 <왜>의 땅으로 보내어 그 진상을 알아보게 하였다.
-후략(後略)
즉 광개토태왕께서는 왜(倭)에 대한 통치책임을 동맹관계에 있는 인덕(仁德)에게 맡기고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고,
따라서 이런 통치책임에 대해서 인덕(仁德)은 사죄(謝罪)하는 그런 관계로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 각설(却說)
지금 좌계는 “광개토태왕과 인덕(仁德)이 ‘대운하(大運河)와 관련해서’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동맹관계에 있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일본서기(日本書紀) 인덕천황(仁德天皇) 11년 하(夏)4월 및 동(冬) 10월 조(條)에 보면 토목공사(土木工事)
이야기와 12년 추(秋) 7월및 동(冬) 10월의 ‘고구리(高句麗)의 사신(使臣)’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내용이 대운하
(大運河)와 관련이 있다고 좌계는 생각합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옮기는 이유가 있습니다. 仁德천황이 토목공사를 한 지역이 아무리 살펴보아도 ‘오늘날 절강성
(浙江省)’의 신라지역인 듯한 느낌을 버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글 도중에 (*)주의(注意)(*)로써 좌계의 느낌을 전달하고 져 합니다.
-이하 일본서기 인덕천황 11년, 12년 조(條) 옮김 -
(참고: <完譯 日本書紀 田溶新 譯, 一志社, 1990.3.20. p189~p191>을 옮긴 것입니다.)
<토목공사(土木工事)>
11년 夏 4월 戊寅朔 甲午(17일), 군신에 詔하여, “지금 朕이 이 나라를 보니, 들도 못도 넓은데, 전지는 넓다.
또 냇물이 옆으로 흐르고, 강물 끝은 빠르지 않다. 조금만 장마가 져도, 바닷물이 거꾸로 흘러, 거리에 r가 뜨고, 도로
또한 진흙이 된다. 도로 또한 진흙이 된다. 고로 군신은 이것을 시찰하고, 옆으로 흐르는 원천을 끊어 바다에 통하게
하고, 거꾸로 흐르는 것을 막아 전지와 택지를 안전하게 하라”고 하였다.
(*)주의(注意)말씀-(1) (*)
이는 강물이 역류(逆流)하기로 유명한 전당강(錢塘江) 주변에는 아주 합당한 말이 됩니다.
위 본문의 “바닷물이 거꾸로 흘러, 거리에 배가 뜨고,”하는 지역이 과연 “현 일본열도에 있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류(逆流)하는 강으로는 단연코 전당강(錢塘江)이라 할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 싸이트(site)에
<(*) 항주(杭州) 경주(慶州)에 대한 사료(史料) - 삼국유사 천룡사(天龍寺>라는 글이 있습니다.
(*) 주의(注意)말씀-(1) 끝(*)
동(冬) 10월, 궁전 북쪽의 들을 파서, 남쪽 물을 끌어들여 서쪽 바다에 넣었다. 그 물을 굴강(掘江)이라 하였다.
또 북쪽 내의 큰 물을 막으려고 자전제(茨田提)를 쌓았다. 이때 사쌓으면 무너져 막기가 어려운 곳이 두 군데 있었다.
천황(天皇)이 꿈을 꾸니, 신이 가르쳐 “무장인(武藏人) 강경(强頸)과 하내인(河內人) 자전연삼자(茨田連衫子) (삼자
(衫子) 이를 ‘고로모노고’라한다.) 두 사람으로써 수신에 제사지내면 반드시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수신에게 제사지냈다. 이때 강경(强頸)은 슬피 울며 물에 빠져 죽었다.
그 제방이 완성이 되었다. 다만 삼자(衫子)만은 온전한 박 두 개를 가지고, 막기 어려운 내에 갔다. 그리고 두 개의
박을 가지고, 수신에 던져 청하여, “수신이 탓을 하여, 나를 신제물로 하였다. 때문에 지금 내가 왔다. 기어코 나를
가지려거든, 이 박을 가라앉혀 뜨지 않게 하여라. 그러면 나는 참말 신으로 알고, 스스로 물속에 들어가겠다.
만일 박을 가라앉힐수가 없다면, 스스로 거짓의 신이라고 알 것이다. 어찌 헛되이 내몸을 망칠 것인가?!”라고 말하
였다. 때에 표풍이 갑자기 일어나서 박을 끌어다 물속에 넣었다. 박은 물위에 떼굴떼굴 굴러 가라앉지 않았다.
빠른 물결에 떠서 멀리 흘러갔다. 이 때문에 삼자(衫子)는 죽지않고서 제방을 막을 수가 있었다. 삼자(衫子)의 재능에
의하여, 그 몸을 망치지 않은 것이다.
그 때 사람들이 이 두곳을 가리켜, 강경(强頸)의 단간(斷間), 삼자(衫子)의 단간(斷間)이라 불렀다.
이해, 신라인(新羅人)이 조공하였다. 그래서 공사에 종사시켰다.
(시세(是歲) 신라인조공(新羅人朝貢) 즉노어시역(則勞於是役))
(*) 주의(注意)말씀-2(*)
결국 이는 인덕(仁德) 천황이 신라 지역 안(內)에 대운하(大運河)의 개척을 위해서 투자를 했고, 실제 노역(勞役)은
신라 사람들이 자신의 경내(境內)에 한 것으로 볼수 있는 기록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최근에 좌계는 향고도 님께서 주신 ‘동정호(洞庭湖) 동쪽의 지도’에 의해서 인덕(仁德)천황이 투자를 한 지역
이 어디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위 기록의 지형적 특성은 “궁전(宮殿)의 북쪽의 들을 파서, ①남쪽 물을 끌어들여 서쪽 바다에 넣었다. 그 물을 굴강
(掘江)이라 하였다. ②또 북쪽 내의 큰 물을 막으려고 자전제(茨田提)를 쌓았다. 이때 쌓으면 무너져 막기가 어려운
곳이 두 군데 있었다.”
그런데, 아래의 (*)향고도님의 ‘대청광여도’ 중에 태호(太湖)주변의 지도를 보면, 오늘날의 주산군도(舟山群島)에서
들어오는 항주만(杭州灣)이 ‘창해(滄海)’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곳에서 북(北)쪽으로 태호(太湖)에 들어가는 지역에
운하(運河)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태호(太湖)는 좌측으로 길게 가는 강을 따라서 단양호(丹陽湖)로 들어가서 이것이 드디어 무호(蕪瑚)를 통해
양자강과 연결되는데, 이 양자강과 연결된 곳에 ‘천문중단초강개(天門中斷楚江開)’라고 적혀 있습니다.
천문중단초강개(天門中斷楚江開)란 말의 천문(天門)이란 말은 이 무호(蕪瑚) 위에 있는 산(山)의 이름이 천문산
(天門山)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이런 지형이 “궁전(宮殿)의 북쪽의 들을 파서, ①남쪽 물을 끌어들여 서쪽 바다에 넣었다. 그 물을 굴강(掘江)
이라 하였다.”에 정확히 대응되는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태호(太湖)의 북쪽으로 부터 양자강이 불(乀)자 방향으로 흘러들어오면서 ‘운하(運河)800리’라고 적혀
있는데, 곤(丨)자 방향으로 초산(焦山)으로 부터 또하나의 강이 흘러들어와서 합류하는 곳에 금단(金壇)이라고 적혀
있는 곳이 있습니다.
단(壇)은 ‘흙을 쌓아올린 당(堂)이나 제방(堤防)’을 뜻하는 말입니다. 생각컨데 이것이 일본서기에 있는 자전제
(茨田提)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즉 이곳이 “②또 북쪽 내의 큰 물을 막으려고 자전제(茨田提)를 쌓았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쌓으면 무너지기 쉬운 단간(斷間)이 두 군데 있었다.”하는 것도 우리는 짐작할수 있다고 봅니다.
단간(斷間)은 ‘사이를 인위적으로 땅을 짤라서 물길 즉 수로(水路)를 낸 것’을 뜻합니다.
물은 수압(水壓)의 관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수로(水路)를 낼 때, 수압의 관리가 힘든 곳에는 대부분이 보조(補助)
-수로(水路)를 내고, 본 수로(水路)와 보조 수로에 모두 갑문(閘門)을 설치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서쪽과 연결되는 단양호(丹陽湖) 밑에는 오호(五湖)로 써있는 호수와 이것이 서쪽의 별도의
강입구를 또한 지니고 있음을 보고 됩니다. 따라서 이런 보조 수로(水路)를 낸 것을 미루어 천문중단초강개(天門中
斷楚江開)라고 적힌 곳에서 무호(蕪瑚)로 들어오는 입구가 하나의 단간(斷間)이 된다고 봅니다.
또하나는 이미 보았듯이 금단(金壇)을 쌓은 운하팔백리(運河八白里)가 적힌 곳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자꾸만 무너졌기 때문에, 할수 없이 초산(焦山)에서 곤(丨)자로 흘러들어오는 복잡한 보조(補助)
-수로(水路)를 만들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좌계 개인적인 생각에는 <운하팔백리(運河八白里)가 적힌 곳>은 수많은 보조(補助)-수로가 있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이곳이 두개의 박을 띄웠다는 “삼자(衫子)의 단간(斷間)”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문중단초강개(天門中斷楚江開)라고 적힌 곳이 단간(斷間)이 강경(强頸)의 단간(斷間)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 향고도님의 ‘대청광여도’중 태호(太湖) 주변의 지도(地圖)
http://cfs13.blog.daum.net/original/24/blog/2008/07/16/00/13/487cbe9bb6fcd&filename=54.jpg
물론 일본 사람들 자신은 인덕(仁德)천황이 만든 자전제(茨田提)를 “오사까”지방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좌계는 신뢰하지 않고 있습니다.
(*) 일본인 스스로 자전제(茨田提)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곳의 기사(記事)를 볼 수 있는 곳
http://www.kirameki-story.tv/back16.html
아무튼 신기한 것은 일본서기에 운하(運河)및 수로(水路)에 관련된 이야기가 등장하는 곳은 인덕천황의 기록밖에
없는데, 이런 기록들 사이에 ‘고구리(高句麗) 사신’ 기록이 있다는 점입니다.
참고적으로 말씀드리면, 일본서기(日本書紀)는 기록의 반(半) 정도가 관경삼국(管境三國)과 관련된 것인데, 신기
하게도 고구리(高句麗)쪽 기록은 일부러 피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적은데, 이때에는 고구리(高句麗) 사신(使臣)
기록이 등장하고 있는데, 묘(妙)한 것은 “왜 고구리(高句麗) 사신(使臣)이 왔는지?”는 또 전혀 기록이 되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 주의(注意)말씀-2 마침(*)
-(참고: 각설(却說) 계속 일본서기의 기록을 이어서 옮깁니다.)-
<고구리(高句麗)의 사신(使臣)>
12월 추(秋) 7월 신미(辛未)삭(朔) 계유(癸酉)(3일) 고구리(高句麗)가 철로 만든 방패, 철 과녁을 바쳤다.
8월 경자(更子) 삭(朔) 기유(己酉) (10일) , 고구리의 사신에게 조정에서 향응을 베풀었다.
이날 군신및 백료를 모아, 고구리(高句麗)가 바친 철 방패, 철 과녁을 쏘게 하였다. 많은 사람이 과녁을 관통하지
못하였다. 다만 적신(的臣)의 선조 순인숙니(盾人宿禰)만이 철과녁을 관통하였다. 그 때 고구리(高句麗)의 사신
들이 그 활쏘는 솜씨가 훌륭한 것을 보고 두려워하고, 같이 일어나 배려하였다.
다음날 순인숙니(盾人宿禰)를 칭찬하고 이름을 주어 적호전숙니(的戶田宿禰)라고 하였다. 같은 날 소박뢰조(小泊
瀨造)의 선조 숙니신(宿禰臣)에 이름을 내려 현유신(賢遺臣) (현유(賢遺) 이를 ‘사가노고리’라 한다.)이라 하였다.
동(冬) 10월 산배(山背)의 율외현(栗隈縣)에 큰 도랑을 파서 논에 물을 대었다. 때문에, 그 지방의 백성은 매년
풍년이었다.
굴대구어산배율외현이윤전(掘大溝於山背栗隈縣以潤田) 시이(是以) 기백성매년풍지(其百姓每年豊之)
(*) 주의(注意)말씀-(3) (*)
그런데 위 기록에서 굴대구(掘大溝) _ “큰 도랑을 굴착했다”는 것은 “운하(運河)를 팠다.”는 기록이라고 좌계는 생각
합니다.
그 위치도 대운하(大運河) 가운데서 짐작해볼수 있다고 봅니다. 위 기록에서 산배(山背)라는 말이 있는데 좌계가
볼때에는 이것이 오늘날 <태산(泰山) 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운영자 칼럼중에 “사서(史書)를 반영한 대운하(大運河)-지도(地圖)”를 보면 매우 신기하게도, 고대의
대야택(大野澤) 즉 오늘날의 사대호로 대운하가 연결되지 않고, 이 대야택(大野澤)에서 태산(泰山)쪽으로 약간 떨어
져서 대운하(大運河)가 지나간 것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대야택(大野澤) 자체가 ‘배달화백을 하는 성호(聖湖)’로 여겼기 때문에, 대운하(大運河)는 좀 굴착하기
힘이드는 한이 있어도, 그 ‘뒤’쪽으로 따로 운하(運河)를 팠다고 보여집니다.
(*) 운영자 칼럼 중의 “사서(史書)를 반영한 대운하(大運河)-지도(地圖)”
http://www.coo2.net/files/young061001-6.gif
아무튼, 좌계가 생각할때에는 인덕(仁德) 천황은 이 대야택 뒤의 지역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였다고 생각됩니다.
결국 그는 신라(新羅)와 맥제(百濟)의 수도 근처에 집중적으로 투자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덕(仁德)은 ‘대운하(大運河) 계획’을 적극적으로 민 광개토태왕의 동맹(同盟)자로써 그 위치를
확고히 신라와 맥제 사람들에게 인식시킬수 있었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즉 인덕천황(仁德天皇)은 그동안 고일본(古日本)에 예속된 왜(倭)가 ‘관방로(關防路) 지지세력’에 묶여있었음에
비해서 적극적으로 대운하(大運河) 지지세력으로 돌아섰기에 ‘고구리 사초’에 보다시피 광개토태왕에게는 딸을
통해 통혼(通婚)하는 ‘국제적 위치’를 확보할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좌계는 “인덕(仁德)천황은 출자(出自) 자체가 한반도(韓半島) 사람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웬지 자꾸
들어옵니다.
(*) 주의(注意)말씀-(3) 마침(*)
-이하 일본서기 인덕천황 11년, 12년 조(條) 옮김 마침. -
이제 광개토태왕 시절에 ‘관방로(關防路) 지지세력’과 ‘대운하(大運河) 지지세력’의 국제적인 역학관계가 어찌되는
지를 크게 정리되었다고 봅니다.
즉 오늘날 수마트라(Smatra)-쟈바(Java)-보르네오(Borneo)에 있었던 고일본(古日本)에 대해서 맥제(百濟)의 가리
(佳利) 왕후(王后)측은 단단히 결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리(佳利) 왕후(王后)는 남편인 진사왕(辰斯王)때 관방로(關防路)를 설치했음은 물론, 전남편 침류왕과의
아들인 아신왕(阿莘王)을 내세워 또다시 광개토태왕에게 항거한 주역(主役)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맥제(百濟)의 진사왕(辰斯王)과 왕후(王后) 가리(佳利)는 관미성(關彌城)의 천험(天險)의 요새(要塞)임을
믿고는 현 한반도 김포지역으로 추정되는 구원행궁(狗原行宮)에 사냥 겸 ‘국제적인 조정’을 위해서 왔다가 관미성
(關彌城)이 광개토태왕에게 함락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기절(氣絶)해서 죽어버리는 사태가 있었음을
‘고구리 사초’ 영락대제기 2년{단기2725년/AD392}임진 10월 조(條)에는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 二年壬辰, -전략(前略)
十月, 又引水陸軍, 分七道, 攻<関彌城>晝夜不休二十日, 而拔之. 其城, 四面峭絶, 海・水圍繞. 故<辰斯>以為不落,
而與其妻<佳利>{獵}于<狗原>經旬而待我退. 至是, 聞陷而驚倒, 仍不起而死. <佳利>, 乃以<枕流>子<莘>, 代之.
◎ 二年壬辰, - 전략(前略)
七月, 上, 引兵四万親征<辰斯>, 斬<嘉謨>於<石峴>, 分作四道, 拔其城柵十二.
九月, 移攻<契丹>, 虜其男女三千五百口, 及流民沒入者萬余, 而還. 民皆頭揷茱萸而賀之. 是為「九日之俗」.
十月, 又引水陸軍, 分七道, 攻<関彌城>晝夜不休二十日, 而拔之. 其城, 四面峭絶, 海・水圍繞. 故<辰斯>以為不落,
而與其妻<佳利>{獵}于<狗原>經旬而待我退. 至是, 聞陷而驚倒, 仍不起而死. <佳利>, 乃以<枕流>子<莘>, 代之.
○ 2년{단기2725년/AD392}임진, -전략(前略)
7월, 상이 4만병을 이끌고 친히 <진사>를 정벌하여, <석현>에서 <가모>를 참하고, 네 길로 나누어서 그들의 성과
성채 12개를 빼앗았다.
9월 군대를 옮겨서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3천 5백을 사로잡았고, 유민과 잡혀갔던 이들 만여 명도 데리고 돌아
왔다. 백성들 모두가 머리에 수유가지를 꽂고 축하하였다. 이것이 「<9월 9일>」의 풍속으로 되었다.
10월엔 또다시 수군과 육군을 이끌고 일곱 길로 나누어서 <관미성>을 주야 20일을 쉼 없이 공격하여 빼앗았다.
그 성은 사면이 가파르고 험하며 해・수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하여 <진사>는 {이 성은} 함락되지 않으리라 여겨, 그의 처 <가리>와 함께 <구원>에서 사냥하면서 열흘 여를
우리가 물러나길 기다렸다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놀라자빠져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가리>가 <침류>의 아들 <신>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진사왕(辰斯王)의 말년에 결국 태왕께서는 하남(河南) 위례성(尉禮城)을 공략할수 있는 2개의 결정적인 ‘전략적
교두보(橋頭堡)’인 한수북제부락(漢水北諸部落)과 관미성(關彌城)을 영락(永樂) 2년에 확보하였음을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남(河南) 위례성(尉禮城) 뿐만이 아니라, 고일본(古日本)에 종속된 왜(倭)들이 대륙(大陸)으로 진출
하는 오늘날 광동성 중산시(中山市)까지도 공격할수 있는 또 하나의 교두보(橋頭堡)인 독산성(獨山城)을 확보
하였음을 ‘고구리 사초’는 그 다음해인 영락(永樂) 3년 8월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3년 8월 조(條)의 기록은 ‘하남 위례성’을 포위 공격한 태왕비문(太王碑文) 6년 조(條)뿐만 아니라, 고일본
(古日本)을 해체시킨 태왕비문(太王碑文)의 영락(永樂) 10년 (400년) 조(條)에도 영향을 주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기
때문에, 깊게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 三年癸巳, -전략(前略)-
八月, <莘>聞我征<契丹>, 以為虗而使<真武>侵<石峴>, 又侵<関彌>, 不克而去. 自夏, <倭>寇<羅>累次, 圍<金城>
五日而退, 追擊於<獨山>夾鏖之. 是謂「獨山斬倭」. <耽羅>主<月孫>来降献土物.
○ 3년{단기2726년/AD393}계사, -전략(前略)
8월, <{아}신>이 우리가 <거란>을 정벌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우리의 나라 안이} 비었을 것으로 여기고, <진무>로
하여금 <석현>과 <관미>성을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여름부터 <왜>가 <신라>를 누차 침략하였다.
<금성>을 닷새 동안 포위하였다가 물러나니, 추격하여 <독산{獨山}>에서 협공하여 모조리 죽였다.
이를 「독산참왜」라 한다. <탐라>주 <월손>이 찾아와서 항복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 각설(却說)
이 기록은 아신왕(阿莘王)이 태왕께서 거란(契丹)을 토벌하는 틈새를 활용, 잃었던 두 요충지인 한수북제부락(漢水
北諸部落)의 석현(石峴)과 칠중하(七重河)의 관미성(關彌城)을 진무(眞武)로 하여금 공격하게 할 뿐만이 아니라,
숫제 신라의 수도인 금성(金城)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포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공격에 대해서 두 요충지(要衝地)를 잘 지켰을 뿐만이 아니라, 금성(金城)을 포위한 적을 추격하여
후세(後世)에 독산참왜(獨山斬倭)라고 일컬을 정도로 대전과를 이룬 또하나의 ‘전략적 요충지’인 독산성(獨山城)을
확보하였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구리 사초’ 영락(永樂) 3년 8월 조(條)의 기록이 중요한 것은 “흔히 신라(新羅)의 수도(首都)로 거론(擧論)
되는 금성(金城)을 포위한 왜(倭)를 추격한 곳이 바로 독산성(獨山城)이다.”라는 귀절때문에 그 중요성이 있는 것입
니다.
왜냐?
<왜(倭)의 교두보 - 독산성(獨山城) - 금성(金城)의 위치>로 되어 있어야만 금성(金城)에서 왜(倭)의 교두보 쪽으로
후퇴하다가 그 중간에 독산성(獨山城)이 있음은 자명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런데, ‘운영자 칼럼’ ①<(삼국사기 신라본기) "황하, 태산" 일대가 백제땅이었다는 증언 아닌가 ? (태산지명변경)>에
보면 이 독산성(獨山城)이, 또 ② <(오재성) 김유신의 선조 소호금천씨는 헌원의 아들>이란 글에서도 독산성(獨山城)
이 그려진 그림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①, ② 모두 양자강이 뒤집힌 컵(∩)모양으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지점에서 막 별(丿)자 모양으로 올라가는 곳에
독산성(獨山城)이 있는데, ①에는 아래, 위로 독산성(獨山城)이 나란히 그려져 있는 모습으로 약간의 차이는 있습
니다.
① : http://www.coo2.net/files/dae1.gif
② : http://www.coo2.net/files/gara2.gif
“오늘날 안휘성(安徽省)의 망강(望江) 쯤이 아니겠는가?”하는 추정이 됩니다. (어디까지나 추정)
참고 안휘성(安徽省)지도 : http://parkchina.com.ne.kr/map/anhui.JPG
그런데, ‘향고도 님’의 한성(漢城)맥제(百濟)의 동쪽 지도를 보면, 이 망강(望江)이 태호(太湖)라는 호수(湖水)에서
흘러나오고 있는데, 이 망강(望江)의 좌측(左側) 즉 삼각주(三角洲)로 되어 있는 한성(漢城)-맥제(百濟)쪽으로
장강(長江)의 입구에 영은(灵隱)이라는 이름의 산(山)이 ‘하나’있습니다.
위치는 파양호(鄱陽湖) 맞은 편의 장강(長江) 좌측입니다.
이 영(灵)이란 글자는 영(靈)의 속자(俗字)이기 때문에, 결국 영은(灵隱)은 산 자체가 ‘신령(神靈)스러움을 숨기고
있는 산(山)’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독산(獨山)은 풍수학에서 산(山)이 주변의 산(山)과 맥(脈)을 형성하지 않고, 혼자서 우뚝 솟아난
말하자면 ‘중뿔난 산(山)’을 뜻합니다.
‘향고도 님’의 <한성(漢城)-맥제(百濟) 동쪽 지도>를 보면 이 영은산(灵隱山)은 그야말로 ‘주변의 다른 산과 관련이
없이 중뿔나게 혼자 우뚝솟은 산(山) - 다시 말하면 독산(獨山)으로 서있음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 ‘향고도 님’의 <한성(漢城)-맥제(百濟) 동쪽 지도>
http://cfs13.blog.daum.net/original/24/blog/2008/07/16/00/13/487cbe9bb6fcd&filename=54.jpg
양자강 강가에서 별(丿)자 방향으로 막 올라가기 시작한 곳에 만약 풍수학적으로 ‘중뿔난 산’인 독산(獨山)이 있다면,
이는 자연히 위에 소개한 오늘날 안휘성(安徽省) 지도에서 무창호(武昌湖)와 박호(泊湖) - 그리고 대청광여도(大淸
廣輿圖)의 태호(太湖)에서 부터 흘러나오는 망강(望江) 오른편은 영은산(灵隱山)이 바로 독산(獨山)이라고 추정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향고도 님’의 <한성(漢城)-맥제(百濟) 동쪽 지도>에 명확히 드러나지만, 이 독산성(獨山城)이 양자강
(장강(長江))과 공강(灨江)을 연결하고 있는 파양호(鄱陽湖) 바로 맞은 편에서 “대칭적으로 흐르는” 강(江)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관방로(南關防路)의 입구를 틀어막을수 있는 핵심적인 요충지(要衝地)가 바로 망강(望江)의 좌측에
있는 독산성(獨山城) 즉 -영은(灵隱) 산성(山城)이고, 또 망강(望江)의 위에 있는 태호(太湖)에는 ‘고구리(高句麗)
수군’을 두어서 광동성의 북강(北江)-공강(灨江)-파양호(鄱陽湖)로 이어지는 남관방로(南關防路)의 입구를 틀어
막을수 있는 지점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왜(倭)들이 후퇴하면서 독산참왜(獨山斬倭)를 당한 것으로 보아서 이들이 남관방로(南關防路) 즉 파양호를
통해서 공강(灨江)그리고 광동성의 북강(北江)을 통해서 도주(逃走)하려는 그 입구가 광개토태왕에 의해서 포위
섬멸당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이 당시 오늘날 무한(武漢)지방에 삼각주(三角洲)의 ‘한성(漢城)-맥제’라는 든든한 보루(堡壘)가 있기
때문에, 이 남관방로로 도주하는 것이 양자강을 타고 전통적인 신라의 요충지가 그득한 절강성 앞을 통해서 도주
하기보다는 훨씬 위험도가 낮기 때문에 도주로(逃走路)를 이쪽 남관방로(南關防路)로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
니다.
독산참왜(獨山斬倭)에서 <참(斬)>이란 언어 자체가 승패(勝敗)니 하는 군사적용어라기 보다는 오히려 ‘법률적
언어’에 가깝고, 이는 “도주(逃走)의 기회 조차 없는” - 다시 말해서 포위섬멸되었다는 뉴앙스를 주는 말입니다.
양자강 강가에서 별(丿)자 방향으로 막 올라가기 시작한 곳에 만약 풍수학적으로 ‘중뿔난 산’인 독산(獨山)이 있다면,
이는 자연히 위에 소개한 안휘성(安徽省) 지도에서 무창호(武昌湖)와 박호(泊湖) 그리고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의
태호(太湖)에서 흘러나오는 망강(望江) 우측에 한성(漢城)-맥제(百濟) 쪽으로 장강(長江) 바로 앞에 그야말로 ‘신령
(神靈)스러움을 감추고’ 홀로 ‘중뿔나게 서있는 산’인 영은산(灵隱山) 이외에 고대에 독산(獨山)으로 칭할 산(山)을
찾는다는 것은 무리(無理)라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역은고구리의 남평양이 한성(漢城)-맥제로 변하는 즉시 맥제(百濟)와 고일본(古日本)의 핵심적인
영향권 안(內)에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광개토태왕께서 관미성(關彌城)과 석현성(石峴城)을 점령할 때에도 여전히
고구리(高句麗) 군대는 얼씬 거리지 못할 지역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고일본(古日本)의 총괄지휘를 받는 왜(倭)-연합군’의 공격목표는 어디까지나 신라의 수도인 금성(金城)이
었고, 따라서 이를 ‘포위-공격’하였던 것입니다.
신라의 수도의 별칭이 되다시피 한 이 금성(金城)에 대해서 좌계는 독특한 시각을 지니고 있었읍니다.
그것은 금성(金城)이란 말이 - 물 위에 떠있는 ‘속이 빈 피라미드(pyramid)’로써 말하자면 움직일 수 있는 <물 위에
떠있는 성(城)>이란 견해였습니다. 배달화백을 할 때, 다루칸(darukhan)들이 위기때 들어가는 북두칠성의 일곱개
의 영성문(靈星門)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수중(水中)-구조물이라는 견해였습니다.
따라서 이 금성(金城)은 그 어원(語源)이 된 금성탕지(金城湯池)에서 보다시피 호수(湖水) 위에 떠있으면서,
기본적으로 이동 가능한 ‘수중(水中)-성(城)’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수중성(水中城)을 인도신화에서 각각의 북두칠성의 주인(主人)인 성선(聖仙)인 리쉬(Rishi)와 끄리티까(Krittica)
의 개념을 적용하면, 금성(金城)은 ‘리쉬(Rishi)와 끄리띠까(Krittica)의 성(城)이라고 할수 있겠읍니다.
(참고: 이 금성(金城)의 구조에 대한 것은 이 싸이트(site)에 ‘[계속] ‘물 위에 떠있는’ 목우사자(木偶獅子)와 금성
(金城)-수정(修正)‘이란 글이 있고, 리쉬(Rishi)와 끄리띠까(Krittica)에 대한 것은 ’[좌계선생님] 북두칠성여신이
상징하는 것에 대한질문입니다.‘는 박정길 님의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변에 부족하나마 그 내용이 있습니다. )
이러한 좌계의 견해는 금성(金城)은 수중성(水中城)이기 때문에 강(江)을 타고, 배달화백이 열리는 호수(湖水)로
이동가능하기 때문에, 신라(新羅)의 수도(首都)가 이동하더라도 금성(金城) 역시 따라서 이동한다는 것을 그 바탕
으로 하고 있습니다.
금성(金城)이 ‘이동가능한 성(城)’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 금성(金城)이 머무는 일종의 역(驛)이 결국 호수(湖水)
가 될 것이 뻔한데, “신라 수도가 옮긴다는 것은 결국 금성(金城)이라는 수중성(水中城)의 출발역(出發驛)인 호수
(湖水)가 어디인가?”라는 문제와 직결된다고 볼수 있습니다.
좌계는 신라의 수도(首都)는 <고정형(固定形) 수도(首都)>와 <이동형(移動形) 수도(首都) >를 지니고 있었다는 견해
를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정형 수도의 명칭이 경주(慶州)이고, 그 위치는 오늘날 절강성 항주(杭州)이고,
<이동형(移動形) 수도(首都)>의 명칭이 금성(金城)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런 금성(金城)의 출발역(出發驛)인 호수(湖水)역시 신라의 수도가 변할 때마다 이동해서 변했겠지만,
“그래도 ‘가장 오래 출발역’ 역할을 하면서도 또 동시에 광개토태왕 시절의 금성(金城)의 출발역(出發驛)인 호수(湖水)
는 어디인가?”하는 것을 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심제(心濟) 선생님께서 이 싸이트(site)에 ‘660년 나-당의 백제 침투공격로 比定.’이라는 글을 쓰시면서,
신라의 수도 금성(金城)이 있었던 위치를 오늘날 안휘성(安徽省)의 합비(合肥)로 비정하셨는데,
이는 탁견(卓見)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제(心濟)선생님은 위 글에서 “신라의 경주가 어디냐 하는 것인데 본인의 몇 년에 걸친 판단의 결과는 안휘성 合肥
로서 경주가 갖추고 있는 지형과 지물들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팔공산,반월성, 신라왕자 김교각의 구화산이 동남쪽에 존재하고...그 동쪽엔 절강성 장보고의 청해진과 바로 남쪽엔
장강 이남에 존재했으리라 판단되는 倭 등... ”으로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에 “합비(合肥)-금성(金城)”을 표시하시면서, ‘660년 나-당의 백제 침투공격로
比定.’하는 지도(地圖)를 올리셨습니다.
(*)심제(心濟)님이 “합비(合肥)-금성(金城)”을 표시한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
http://www.coo2.net/bbs/data/new_con_4/shilla_tang_assault_route.jpg
(참고: 심제(心濟) 선생님은 ‘신라 경주’로 표시한 아래의 호수(湖水)인 소호(巢湖)의 아래에 ‘홍택호’라고 표기하셨
으나, 이는 실수(失手)로 보임. 홍택호는 지도의 오른쪽의 오늘날 강소성(江蘇省)의 큰 호수이고, 소호(巢湖)는
지금도 소호(巢湖)로 표시되어 있읍니다.)
그런데, 좌계가 이 심제(心濟)님이 ‘신라-경주’로 표시한 곳에 “소(巢) 방걸고소백국(放桀古巢伯國)”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왜냐면, 고대 중국에서는 삼황오제 다음에 하(夏),은(殷),주(周)의 3대(代)가 있었다고 믿어왔는데, 하(夏)의 마지막
임금이 걸왕(桀王)인데, 이 걸왕(桀王)은 유시씨(有施氏)를 정벌하다가, 화해조건으로 말희(妺喜)라는 요녀(妖女)를
얻어서 옥(玉)으로 된 호화궁궐을 짓기 위해 가렴주구(苛斂誅求)하다가, 결국 은(殷)을 세우는 탕왕(湯王)에게 역성
혁명을 만나게 되어서 남소(南巢)로 말희(妺喜)와 함께 도망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남소(南巢)라는 지역이 곧 소백국(巢伯國)인데, “걸왕(桀王)이 죽지않고, 계속 남소(南巢)에 살아남았다.”
는 설(說)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설(說)에는 “걸왕(桀王)이 다시 남소(南巢)에서 와우산(臥牛山)에 들어가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는 것입니다.
(*)참고: 걸왕(桀王)이아기가 잘 요약되어 있는 곳
: http://blog.naver.com/bonny21?Redirect=Log&logNo=80008100719
그런데,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에는 “소(巢) 방걸고소백국(放桀古巢伯國)”이라고 했는데, 이때의 소(巢)는 소국
(巢國)을 뜻합니다. 따라서 “소국(巢國)! 걸왕(桀王)을 추방(追放)한 옛날의 소백국(巢伯國)”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셈입니다.
문제는 지도에는 “추방했다.”라고 적혀있지만, 실제 사서(史書)에서는 걸왕(桀王)이 자진해서 도망왔고, 그 후에
탕왕(湯王)이 와서 체포해서 처형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소국(巢國)이라는 지역이 “왕권(王權)이 함부로 들어갈수
없는 성지(聖地) - 다시 말하여 소도(蘇塗)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소(巢)의 음가(音價)는 소도(蘇塗)의 소(蘇)의 음가와 똑같이 ‘소’로써 같습니다.
그런데, 이 소백국(巢伯國)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소개된 내용 가운데 약간의 해설이 필요한 곳은 (*)주의(注意)말씀(*)을 끼어놓도록 하겠습니다.
周武王東征,巢國臣服,周武王畏巢國地大勢強,遂強行分割為二,東部仍舊叫巢國,稱『巢伯國』,仍舊建都於
今巢城。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동정(東征)할때, 소국(巢國)은 신복(臣服)했다. 주무왕(周武王)은 이 소국(巢國)이 땅이
크고, 세력이 강성함을 두려워해서 마침내 억지로 둘로 분할하기에 이르른다. 동부(東部)는 옛날 규소국(叫巢國)
이라고 한것을 까닭으로 소백국(巢伯國)이라고 칭하고 옛날에 건도(建都: 도읍을 정함)는 오늘날의 소성(巢城)이다.
(*)주의(注意) 말씀-(1) (*)
그런데 <심제(心濟)선생님이 올리신 “합비(合肥)-금성(金城)”을 표시한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에 보면, 소국(巢國)
으로 표시한 곳 아래의 소호(巢湖)의 우측(右側)에서 비수(肥水)가 흘러서 북행(北行)해서 좌측으로 부터 흘러서
동류(東流)하는 회수(淮水)와 합류하는 그림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비수(肥水)의 흐름에서 동(東)쪽에 팔공산(八公山)이 있고, 그 서(西)쪽에 수주(壽洲)라고 적혀있습니다.
이 수주(壽洲) 우측에는 수춘고소국래초건도(壽春古巢國來楚建都) -“수춘(壽春)은 옛 소국(巢國)때부터 초(楚)나라
때까지 도읍을 한 곳이다.”는 글귀가 적혀있는데, 이는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의 수주(壽洲)가 곧 소성(巢城)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 이 수주(壽洲)에서 다시 비수(肥水)를 넘어서 오른쪽에 보면 도산(塗山)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오른쪽에는
고도산씨국(古塗山氏國) 즉 “옛 도산씨(塗山氏)의 나라이다.”라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도산씨(塗山氏)는 바로 하(夏)나라에서 홍수(洪水)를 다스렸다는 우(禹)임금의 부인인 여교(女嬌)의
나라를 뜻합니다.
이런 관계를 소국(巢國)의 동부(東部)에 대한 설명(說明)을 실제 지도(地圖)를 보면서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심제(心濟)님이 “합비(合肥)-금성(金城)”을 표시한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
http://www.coo2.net/bbs/data/new_con_4/shilla_tang_assault_route.jpg
(*)주의(注意) 말씀-(1) 마침(*)
西部地區創立新國,叫『廬國』,即今合肥市域,建都於今合肥城,故合肥稱廬城,又叫廬陽城,廬國諸侯封爵為『子』,
故稱『廬子國』。
(소국(巢國)의) 서부(西部)지구에 새로운 나라를 창립하면서 부르짓기를 “려국(廬國)!”이라고 했는데, 즉 오늘날의
합비시 지역이다. 도읍지를 오늘날 합비성(合肥城)에 세웠기에 ‘합비’를 려성(廬城)이라고 하거나 또는 규려양성
(叫廬陽城)이라고 부른다. 려국(廬國)은 제후에 봉작(封爵)을 줄때에 자(子)를 주었기 때문에, 따라서 여자국(廬子國)
이라고 부른다.
- 각설(却說)
그런데 려(廬)는 ‘오두막집’,‘여인숙’,‘임시거처’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주무왕(周武王)이 이곳에 와서 “려국(廬國)!”이라고 소리친 것은 “여행할때 임시거처로 쓰기 좋은 나라!”라는
의미였고, 이것이 서부(西部)에 있으면서 오늘날 합비(合肥)라고 칭한 것을 보아서 아마도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
에는 수주(壽洲) 좌측에 비수(肥水)와 회수(淮水)의 중간쯤의 지역인 한자사전 만나는 곽구(霍丘?)쯤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심제(心濟) 선생님이 올리신 “합비(合肥)-금성(金城)”을 표시한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가 중요한 것은
이곳이 소호(巢湖)와 소국(巢國)의 <소(巢)>와 또 비수(肥水)가 회수(淮水)쪽으로 북행(北行)하는 오른쪽에 도산
(塗山)의 <도(塗)>가 함께 있어서 소(巢)와 소(蘇)가 회통이 된다면, 이 소호(巢湖)가 그대로 ‘중국대륙’에서 소도
(蘇塗)의 가장 오래된 역사성을 지닌 곳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位於省境中部巢湖東岸平原,西臨巢湖,北、東、南三面為低山環繞,西北至合肥約60公里。周時為巢(伯)國地。
唐武德七年(624)置巢縣。
위치는 안휘성(安徽省)의 중부(中部)에 있으면서, 소호(巢湖)의 동안(東岸: 동쪽 언덕)은 평원(平原)이어서 서쪽으로
소호(巢湖)를 내려다볼 수 있으며(=임(臨)), 북(北)쪽 동(東)쪽 남(南)쪽의 삼면(三面)이 모두 낮은 산(山)으로 두르고
있고, 서북(西北)으로 합비(合肥)에 이르는데 약 60키로가 된다. 주(周)나라때에는 소국(巢國)혹은 소백국(巢伯國)
으로 칭했던 땅이며, 당(唐) 무덕(武德)7년(624)에 소현(巢縣)을 둔 곳이다.
- 각설(却說)
이러한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심제(心濟) 선생님이 “합비(合肥)-금성(金城)”을 표시한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를 보아도 소호(巢湖) 속
에는 분명히 고산(孤山)이라는 하나의 섬(島)이 있고, 그 주위에는 작은 산(山)들이 둘러쳐저 있어서 만약에 이곳에
수중성(水中城)인 금성(金城)을 두더라도 호수(湖水) 내부에는 막강한 육부군(六部軍)의 전함(戰艦)들이 지키고
있는 것 이외 주변의 작은 산(山)들을 이어주는 곳에서 또한번 육군(陸軍)들이 진(陣)을 지키고 철통(鐵桶)같이
지킬수 있는 천험(天險)의 요새가 되니깐 말입니다.
그런데, 이곳 지형은 소호(巢湖)의 서북(西北)쪽으로 트인 공간이 있는 지형이고, 이는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에서
소호(巢湖)에 흘러들어오는 세가닥의 물이 원천이 있는 분수치산(分水鵄山?)은 곳 외에는 전부 산이 둘러쳐져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이 소호(巢湖)가 중요한 것은 남쪽으로 유한하(裕漢河)가-이는 한강(漢江)을 여유(餘裕)롭게
하는 하수(河水)라는 뜻임 - 책강(柵江)을 통해서 양자강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또 놀랍게도 이 소호(巢湖)는 비수(肥水)가 북상(北上)하면서 우측에 첫번째 팔공산(八公山)과 두번째 팔공산(八公山),
그리고 도산(塗山)을 끼고 흐르면서 이윽고 동류(東流)하는 회수(淮水)를 만나게 되는데, 이 회수(淮水)를 계속 타고
나가면 결국 강소성(江蘇省)의 거대한 호수인 홍택호(洪澤湖)와 고우호(高郵湖)로 해서 다시 양자강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무왕(周武王)이 이곳에 와서 부르짖기를 “려국(廬國)!” 즉 “여행하기 위해 임시거처하는 나라”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지역인 것이지요.
아무튼 좌계가 심제(心濟) 선생님이 올리신 “합비(合肥)-금성(金城)”을 표시한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를 보고 몹시
놀란것은 이곳이 소도(蘇塗)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명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런 역사성(歷史性)을 품고 있고,
놀랍게도 중국의 4대강이라는 회수(淮水)와 장강(長江)에 모두 물(水)을 쌍방향으로 공급할수 있는 풍부한 수원
(水源)을 주변에 두른 산(山) - 특히 세가닥으로 흘러들어오는 분수치산(分水鵄山)으로 부터 공급받고 있다는 것인
것이지요.
따라서 배달화백을 할때 ‘위기시 때’ 들어가는 영성문(靈星門)인 금성(金城)을 이곳에 얼마든지 두면서 회수(淮水)쪽
이나 장강(長江)쪽으로 빠져서 이와 연결되는 모든 호수(湖水) - 예를 들면 회수(淮水)의 끝에 있는 홍택호(洪澤湖),
고우호(高郵湖)나 장강(長江)에 있는 동정호(洞庭湖)나 파양호(鄱陽湖)에 리쉬(Rishi)의 성(城)인 금성(金城)의
출발역(出發驛)으로써 안성맞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심제(心濟)선생님이 올리신 “합비(合肥)-금성(金城)”을 표시한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를 통해서 이곳이
신라의 수중성(水中城)인 금성(金城)이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양쪽으로 모두 출발할수 있는 천험(天險)의 역(驛)
인 호수임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 “합비(合肥)-금성(金城)” 즉 소호(巢湖)에서 금성(金城)이 회수(淮水)와 장강(長江)으로 모두 출발할수 있음을
확인할수 있는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
http://www.coo2.net/bbs/data/new_con_4/shilla_tang_assault_route.jpg
좌계가 소호(巢湖)를 중심으로 해서 심제(心濟)선생님이 주장한 “합비(合肥)-금성(金城)”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거론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지리적(地理的)인 이해가 가야만이 ‘고구리 사초’ 영락(永樂) 3년{단기2726년/AD393}계사 8월
조(條)의 기록이 의미하는 <전략적 가치>가 확연히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三年癸巳, - 전략(前略) -
八月, <莘>聞我征<契丹>, 以為虗而使<真武>侵<石峴>, 又侵<関彌>, 不克而去. 自夏, <倭>寇<羅>累次, 圍<金城>五日
而退, 追擊於<獨山>夾鏖之. 是謂「獨山斬倭」. <耽羅>主<月孫>来降献土物.
3년{단기2726년/AD393}계사 - 전략(前略) -
8월, <{아}신>이 우리가 <거란>을 정벌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우리의 나라 안이} 비었을 것으로 여기고, <진무>로
하여금 <석현>과 <관미>성을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여름부터 <왜>가 <신라>를 누차 침략하였다.
<금성>을 닷새 동안 포위하였다가 물러나니, 추격하여 <독산{獨山}>에서 협공하여 모조리 죽였다.
이를 「독산참왜」라 한다. <탐라>주 <월손>이 찾아와서 항복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각설(却說)
즉 맥제(百濟)의 아신왕(阿莘王)은 태왕(太王)께서 거란(契丹)을 정벌한다는 것을 알고 그 빈틈을 타서 장군 진무
(眞武)로 하여금 1년 전(前)에 일어버린 하남(河南) 위례성의 두 요충지(要衝地)인 한수북제부락(漢水北諸部落)의
석현(石峴)과 칠중하(七重河)의 관미성(關彌城)을 맥제(百濟)의 군사력을 총동원해서 재탈환을 목표로 공격을 하는
동시에, 뿐만아니라, 고일본(古日本)을 주축으로 한 왜(倭) 역시 모든 군사력을 총동원해서 누차(累次)에 걸쳐
“합비(合肥)-금성(金城)”를 총력 공격하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결전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고일본(古日本)이 중심으로 한 왜(倭)의 “합비(合肥)-금성(金城)”에 대한 공격이 ‘圍<金城>五日’
- “<금성>을 닷새 동안 포위하였다.”는 말이 도대체 어떤 작전이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수중성(水中城)인 금성(金城)이 있는 소호(巢湖) 자체는 막강하기 짝이 없는 육부군(六部軍)-전함(戰艦)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공격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관경삼국(管境三國)은 ‘전시(戰時)에 왕(王)이 전투지휘권’을 잃어버리는 호수(湖水)의 성(城)과 그 인근
(隣近)에 왕(王)이 전투지휘권이 있는 성(城)으로 양분됨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생각컨데, 신라의 금성(金城)은 원래는 협의(俠義)로 <소호(巢湖) 속에 떠있는 수중성(水中城)인 금성(金城)과 이를
지키는 사자대(獅子隊)>만을 의미하였으나, 점차 광의(廣義)로 그 인근에 있는 반월성(半月城)이라는 왕궁(王宮)
까지도 거시적으로 포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전시(戰時)에 적군이 몰려든다.”라고 하면, 육지(陸地)의 왕궁(王宮)인 반월성(半月城)이 있는곳 - 오늘날
‘합비’의 신라 백성즉 천독(天毒)들은 모두 소호(巢湖)로 달려가 ‘자신의 선박(船舶)’을 타고 협의(俠義)의 금성(金城)
들과 사자대(獅子隊)들이 수상(水上) 진형(陣形)을 짠 속으로 도피하고, 그 외부에서는 육부군(六部軍)-전함(戰艦)이
다시 이를 에워싸는 식으로 철저히 보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 왕을 지키는 친위군(親衛軍)들은 반월성(半月城)에 집결해서 적군(敵軍)과 대치하게 될것입니다.
따라서 고일본(古日本)을 주축으로 한 왜(倭)가 “금성(金城)을 포위한다”는 것은오늘날 항공모함 같은 종류의 배인
주가(舟舸)형 선박으로써 상륙할수 있는 군인(軍人)을 잔뜩 싣고 와서 소호(巢湖)의 두 입구(入口)인 ①유한하
(裕漢河)와 책강(柵江)에서 상륙(上陸)하고, 또 ②회수(淮水)에서 도산(塗山) 좌측에서 소호(巢湖)로 들어가는 강인
비수(肥水)의 하구(河口) 쪽에서 역시 왜병(倭兵)들을 하선(下船)시켜 상륙시켜 광범위하게 오늘날 합비(合肥)
지역 전체를 에워쌈을 의미합니다.
이 포위(包圍)가 얼마나 큰 광역(廣域)인가를 이해하려면, 심제(心濟) 선생님이 올리신 “합비(合肥)-금성(金城)”의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를 보면서 이해하는 것이 제일 이해가 빠를 듯합니다.
즉 아래의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에서 회수(淮水)와 만나는 비수(肥水) 왼편에 수주(壽洲)라고 표기된 곳의 왼편에
별(丿)자로 흘러들어오는 회수(淮水)의 오른편에 구공산(九公山)이라는 산을 끼고 마치 사람 인(人)자 처럼 흘러
들어오는 사하(史河)라는 강이 있습니다.
또 소호(巢湖)에서 흘러나오는 유한하(裕漢河)는 마치 와이(Y)자처럼 이 소호(巢湖)와는 별다른 물줄기를 소호
(巢湖)바로 밑의 녹기산(鹿起山) 아래로 부터 불(乀)자 방향으로 흘러나오는 물과 합류해서 책강(柵江)을 통해서
결국 장강(長江)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녹기산(鹿起山)아래로 불(乀)자 방향으로 흘러들어오는 유한하(裕漢河) 상류(上流)는 우측에 향음산(鄕音山)과
좌측에 기암괴석(奇巖怪石)의 산(山)으로 표시된 잠악(潛岳) 사이를 뚫고 나가서 육안주(六安州) 바로 밑의 용맥산
(龍脈山)를 그 원류(源流)로 하고 있습니다.
즉 유한하(裕漢河)의 원천인 용맥산(龍脈山)과 사하(史河)의 우측 지류는 모두 육안주(六安州) 부근에서 발원하는데,
이 두 강(江)을 연결시키면 마치 꺽쇠(<)처럼 만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꺽쇠(<) 모양의 거대한 포위망(包圍網)을 형성하지 않으면, 결국 금성(金城)을 포위할수 없음이 지리(地理)를
통해서 분명해 보이는 것입니다.
이 포위망을 요약하자면 <유한하(裕漢河)-사하(史河)>포위망이라고 할수 있는데 “도대체 얼마큼의 왜병(倭兵)이
동원되어야 <유한하(裕漢河)-사하(史河)>포위망을 형성할 수 있겠는가 하는 차원에서 다시 심제(心濟) 선생님의
지도를 일별(一瞥)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 “합비(合肥)-금성(金城)”의 포위(包圍)인 <유한하(裕漢河)-사하(史河)>포위망이 매우 큰 광역(廣域)임을 보여
주는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
http://www.coo2.net/bbs/data/new_con_4/shilla_tang_assault_route.jpg
좌계가 아무리 작게 잡아도 5만명은 들어가며, 반월성(半月城)에 들어간 신라의 왕 - 내물왕의 항복을 받아내려면,
적어도 20만명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 고일본(古日本)을 주축으로 한 왜(倭)가 신라의 금성(金城)을 닷세 동안 포위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태왕
께서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해서 함락한 것 이상으로 고일본(古日本)이 총력을 기울인 전투로 볼 수 있는 거대 포위
작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일본이 최소 5만, 대략 20만 대군(大軍)을 형성해서 <유한하(裕漢河)-사하(史河)>포위망을 설치하
면서 까지 금성(金城)을 함락시키고져 한 까닭이 무엇일까를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합비(合肥)-금성(金城)”을 고일본(古日本)이 점령하면, 관방로(關防路)를 신라(新羅)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는
‘새로운 길’을 또하나 얻게되는 이점이 있게됩니다.
좌계는 “회하(淮河)의 수계(水系)가 어찌 흘러들어가는지?”를 막막하게 생각하였는데, 다행히 솟대님께서 ‘회하
유역도淮河流域圖 - 안휘성,하남성일대 수계 포함 (추가)’란 글을 통해서 회하(淮河)의 수계(水系)에 대한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 ‘솟대 님’의 회하유역도淮河流域圖 :
http://www.coo2.net/bbs/data/new_con_4/2007720133722925.jpg
이 회하유역도(淮河流域圖)를 보게 되면, 회하(淮河)는 수많은 지류(支流)를 모아서 홍택호(洪澤湖)에 모였다가
그 정동(正東) 다시 말하면, 오늘날 강소성(江蘇省) 빈회(濱淮)를 통해 황해(黃海)로 나가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위 회하유역도(淮河流域圖)의 남쪽에 합비(合肥)와 소호(巢湖)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고일본(古日本)이 “합비(合肥)
-금성(金城)”을 함락하면, 결국 오늘날 절강성에 자리잡으면서 양자강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신라(新羅)의 통제를
벗어나서 황해(黃海)를 통해 직접 <강소성의 빈회(濱淮)-홍택호(洪澤湖)-회하(淮河)-비수(肥水)-“합비(合肥)-금성
(金城)”-유한하(裕漢河)-장강(長江)-한성(漢城)맥제(百濟)>의 길이 열리기 때문에,
또하나의 관방로(關防路)가 생긴다고 할수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고일본(古日本)은 신라(新羅)가 아무리 절강성 항주(杭州)에 고정적(固定的)인 수도를 지니고 있고, 또 주산
군도에 막강한 수군(水軍)을 지니면서 통제한다고 할지라도, 이를 우회(迂廻)할수 있는 완벽한 수로(水路)를 획득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일본(古日本)은 광동성의 <북강(北江)-공강(灨江)-한성(漢城)맥제>로 연결되는 좌(左)-남관방로
(南關防路)를 지님과 동시에 새로 형성된 우(右)-남관방로(南關防路)를 획득하게 되는 매우 중차대한 전략이 되는
것입니다.
태왕(太王)께서는 이런 고일본(古日本)의 총력을 다한 <유한하(裕漢河)-사하(史河)>포위망을 철기(鐵騎)로써
깨트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을 암시하는 것이 독산참왜(獨山斬倭)을 표현하기 앞 문장인 ‘추격어독산협오지(追擊於<獨山>夾鏖之)’
- 즉 “추격하여 <독산{獨山}>에서 협공하여 모조리 죽였다.”
여기에 매우 이상한 글자 오(鏖)라는 글자가 등장하는데, 원래 이 글자는 ‘사슴을 통채로 삶는 깊숙한 구리 솥’을
뜻했는데, 여기서 의미가 확장되어서 “오살(鏖殺)하다.”는 뜻을 지니게 되는데, 이는 사천(史穿) 선생께서 해석하신
대로 “모조리 죽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원문(原文)에는 독산(獨山)까지 추격(追擊)해서 협(夾) 다시 말해 ‘사이에 끼는’ - 이른바 협공을 하는 것
인데, 뒤에 “오살(鏖殺)하다.”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이는 ‘포위(包圍)섬멸(殲滅)함’을 뜻합니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한명의 도망병도 허용함이 없이 모조리 죽이는 것’을 오살(鏖殺)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장지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아니 최소 5만명, 아마도 20여만명에 이르는 고일본(古日本)의
왜병이 사하(史河)-유한하(裕漢河)로써 광역(廣域)으로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한명의 탈출함 어떻게
역포위(逆包圍)해서 섬멸할 수 있단 말인가?”하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역시 우리는 심제(心濟)선생님이 올리신 사하(史河)-유한하(裕漢河) 포위망(包圍網)이 있는 대청광여도
(大淸廣輿圖)를 살펴보면, 역포위(逆包圍)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향고도 님’의 한성(漢城)-맥제(百濟) 동부 지도>를 보면, 유한하(裕漢河) 맞은 편에는 좌계가 볼 때, 인덕천황
(仁德天皇)이 신라(新羅)에 투자해서 만든 <장경(長頸)의 단간(斷間)>이 있는 곳 - 즉 천문중단초강개(天門中斷楚
江開)라고 적힌 곳에서 무호(蕪瑚)-단양호(丹陽湖)-태호(太湖)로 해서 다시 삼자(衫子)의 단간(斷間) 즉 태호(太湖)
에서 동(東)쪽으로 흘러나가는 입구에 있는 천평산(天平山) 아래의 입택(笠澤)을 통해 남북(南北)으로 난 긴 운하
(運河)를 통해서 창해(蒼海)라고 적혀진 오늘날 항주만(杭州灣)으로 나가는 운하(運河)길이 있는 것입니다.
이 길을 편의상 <쌍(雙)-단간(斷間)-수로(水路)>라고 이름짓기로 합시다.
직접 지도로써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향고도 님’의 한성(漢城)-맥제(百濟) 동부 지도>
http://cfs13.blog.daum.net/original/24/blog/2008/07/16/00/13/487cbe9bb6fcd&filename=54.jpg
그런데, 고일본(古日本)을 주축으로 한 왜(倭)는 <유한하(裕漢河)-사하(史河)>포위망을 형성하기 위해서 신라(新羅)
의 수군(水軍)이나, 고구리(高句麗)의 수군이 자신들이 소호(巢湖)로 들어가는 두 입구 즉 유한하(裕漢河)입구나,
회하(淮河)의 입구인 빈회(濱淮)의 앞바다에 강력한 수군(水軍)을 두어서 만약의 퇴로(退路)를 차단하는 것을 극력
(極力) 방어하고 있었음은 불을 보듯 뻔한 것입니다.
이때 태왕께서는 고구리(高句麗)의 수군을 <쌍(雙)-단간(斷間)-수로(水路)>를 통해서 밀어넣으면서, 또 일방으로는
장강(長江)의 하류(下流)로 부터 신라수군이 유한하(裕漢河)쪽으로 올라오도록 작전(作戰)을 펴신듯 합니다.
따라서 고일본(古日本)의 유한하(裕漢河)입구를 지키던 왜(倭)의 수군은 자연히 유인되어서 장강(長江)하류로 대적
(對敵)하기 위해서 빠져나간 틈에, <쌍(雙)-단간(斷間)-수로(水路)>를 통해서 대규모의 주가(舟舸)형 고구리 군선
(軍船)들이 장강(長江)에서 좌회전해서 1차적으로 철기(鐵騎)부대를 대용산(大龍山) 앞에서 상륙시켰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주가(舟舸)형 군선(軍船)자체는 계속 장강(長江)의 상류쪽으로 가서 망강(望江)을 타고 들어가는 도중에
2차로 철기(鐵騎)들을 독산(獨山) - 그러니깐 영은산(灵隱山)쪽으로 풀어놓고, 군선(軍船) 자체는 태호(太湖)로
들어가 은익(隱匿)시켰다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철기(鐵騎)부대가 두 부대로 나누어지게 되고, 이것이 나중에 협공을 뜻하는 <협(夾)>의 의미가
된다고 봅니다.
1차로 대용산(大龍山) 아래에 상륙한 철기(鐵騎)부대들은 유한하(裕漢河) 우하(右下)쪽에 있는 부도산(浮度山)
-잠악(潛岳)의 우하(右下)로 계속 나아갔다고 봅니다.
이런 1차 철기(鐵騎)부대들의 행진은 고일본(古日本)의 왜군(倭軍)들이 유한하(裕漢河)의 상류를 타고, 녹기산
(鹿起山), 향음산(鄕音山)을 타고서 “유한하(裕漢河)-사하(史河)” 포위망을 형성하는 길(load)에서 유한하(裕漢河)
라는 강(江)과 또 부도산(浮度山)-잠악(潛岳)이라는 옆은 산맥(山脈)을 건너뛴 곳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역포위(逆包圍)한다는 사실 까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일련의 철기(鐵騎)부대의 역포위 작전을 <‘향고도 님’의 한성(漢城)-맥제(百濟) 동부 지도>로써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향고도 님’의 한성(漢城)-맥제(百濟) 동부 지도>
http://cfs13.blog.daum.net/original/24/blog/2008/07/16/00/13/487cbe9bb6fcd&filename=54.jpg
그리고, 다시 ‘심제(心濟)님의 “합비(合肥)-금성(金城)”의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로 넘어가서 “태왕(太王)의 1차
상륙 철기부대들이 어떻게 역포위(逆包圍) 작전을 형성하였는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잠악(潛岳) 뒤로 용맥산(龍脈山) 뒤로 해서 육안주(六安州) 우하(右下)에 있는 곽산(霍山) - 일명(一名) 형산(衡山)
이란 곳에 ‘1차 상륙 철기(鐵騎)’부대의 약 1/3병력을 매복(埋伏)시키고, 나머지 2/3의 철기(鐵騎)는 계속 사하
(史河)의 본류(本流) 우상(右上)에 그 수원(水源)이 되는 계산(鷄山)을 끼고 우회전해서 나머지 철기는 좌측에
회수(淮水)를 낀채 곽구(霍丘)로 나아가 이윽고 사하(史河)하류와 회하(淮河)가 만난 곳을 도하(渡河)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나서 이 2/3의 ‘1차 상륙 철기(鐵騎)’들은 사하(史河) 우측에 포진(布陳)되어서 사하(史河)-유한하(裕漢河)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고일본(古日本)의 왜병(倭兵)들을 기습(奇襲)공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지요.
이런 전체적인 흐름은 일단 ‘심제(心濟)님의 “합비(合肥)-금성(金城)” 포위망 지도’로써 확인할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 심제(心濟)님의 “합비(合肥)-금성(金城)” 포위망 지도
http://www.coo2.net/bbs/data/new_con_4/shilla_tang_assault_route.jpg
고일본(古日本)의 왜병들은 태왕의 갑자기 나타난 태왕(太王)의 철기에 쫗겨서 육로(陸路)로써 터진 곳은 곽산(霍山)
즉 일명(一名) 형산(衡山) 밖에 없는데, 이곳에서 태왕의 철기(鐵騎) 매복을 만나기 때문에 할수 없이 계속 유한하
(裕漢河)의 우상(右上)지역을 통해서 밀려날수 밖에 없었고, 소호(巢湖)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던 일부 고일본(古日本)
군선(軍船)이 소호(巢湖)에 있는 막강한 육부군(六部軍) 군선(軍船)의 ‘투석기’에 의해 격침(擊沈)되면서 겨우 유한하
(裕漢河)를 도하(渡河)시켜서 부도산(浮度山) 쪽으로 후퇴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구리(高句麗) 철기(鐵騎)는 마신갑(馬身甲) 사이에 부구(浮具) 장치가 되어 있어서 도강(渡江)할 때,
노(櫓)를 저어서 도강하기 때문에, 일제히 강을 건너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참고 : 이런 내용이 이 싸이트(site)에 ‘토착화(土著化)된 개마무사(鎧馬武士)의 비밀 -칠지도(七支刀)관련-(1)’로
자세히 소개시킨 글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일본(古日本)의 사하(史河)-유한하(裕漢河)의 대포위망을 형성하였던 왜병(倭兵)들은 선박(船舶)의
도움이 없이 도강(渡江)하는 것은 자살(自殺)행위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한편, 망강(望江)을 타고 태호(太湖)에 숨어서 있던 고구리(高句麗)의 주가(舟舸)형 군선(軍船)들은 이때 망강(望江)
을 나와서 역시 둘로 나뉘어져서 한쪽 군선(軍船)은 한성(漢城)-맥제(百濟)의 군선(軍船)이 장강(長江)으로 내려
오는 것을 방어하고, 또 한쪽의 군선(軍船)은 계속 장강을 타고 나가서 소호(巢湖) 입구와 쌍(雙)-단간(斷間)-수로
(水路)가 마주보는 곳을 막았음이 분명합니다.
물론 이때 유한하(裕漢河)입구에 있었던 고일본(古日本)의 주가(舟舸)형 군선을 유인했던 신라수군은 다시 장강
(長江)으로 올라와서 역시 협격(挾擊)을 당해서 전멸(全滅) 했으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문에, 사하(史河)-유한하(裕漢河)의 포위망을 형성하였던 고일본의 왜병(倭兵)들은 자신들이 늘 애용
하였던 남관방로(南關防路) 즉 파양호(鄱陽湖)-공강(灨江)-북강(北江)으로 나아갈 수 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장강(長江)이라는 거대한 강에 온통 고구리(高句麗)와 신라의 군선(軍船)들이 진(陣)을 치고 있었으니깐 말입니다.
이런 고구리(高句麗)수군과 신라 수군의 협격을 통한 유한하(裕漢河)입구를 지키던 고일본 수군(水軍)의 전멸현상과,
또 유한하(裕漢河)를 겨우 선박의 도움을 받아서 도강(渡江)한 왜병(倭兵)들이 영은산(灵隱山) 즉 독산(獨山)에서
전멸당한 것을 지도(地圖)로써 이해하려면,
(하하) 이번에는 또 <‘향고도 님’의 한성(漢城)-맥제(百濟) 동부 지도>를 보아야 이해가 빠릅니다.
<‘향고도 님’의 한성(漢城)-맥제(百濟) 동부 지도>
http://cfs13.blog.daum.net/original/24/blog/2008/07/16/00/13/487cbe9bb6fcd&filename=54.jpg
사하(史河)-유한하(裕漢河)의 대포위망을 형성한 고일본(古日本)의 왜병들은 설혹 간신히 유한하(裕漢河)를 넘어도
또다른 2개의 강을 건너야 하는 것으로 지도(地圖)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요.
즉 마치 영어의 와이(Y)자처럼 우측의 환수(皖水)와 좌측의 잠수(潛水)가 합류해서 흐르는 양계장하(楊溪長河)를
일단 건너야하고, 또 망강(望江)을 건너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도강(渡江)과정에서 고구리 철기(鐵騎)병들의 공격을 받았으니 사실상 독산(獨山) 즉 영은산(灵隱山)
까지 생존(生存)해서 오는 것 까지도 힘든 것이지요.
그런데, 이윽고 영은산(灵隱山) 즉 독산(獨山)에 까지 와서 “조금만 더 가면 한성(漢城)-맥제(百濟)가 있다! 다들
희망을 가지고 탈출해 나가도록 하자!”는 그 순간에 이 독산(獨山)에 숨어있던 ‘제2차 상륙 철기부대’들이 대거 나타
나면서 포위 공격해서 문자 그대로 오살(鏖殺) - 즉 죄다 죽여버린 것으로써 ‘고구리사초’ 영락(永樂) 3년 8월
조(條)에 실린 독산참왜(獨山斬倭)의 진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독산참왜(獨山斬倭)는 사하(史河)-유한하(裕漢河) 포위망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5만명 - 일반적으로
20만명이 소요된다고 할때, 이들이 오살(鏖殺)된 것이고, 또 이런 과정을 한성(漢城)-맥제(百濟)에서 뻔히 소식
(消息)을 듣고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그 전과(戰果)는 공포스러울만큼 컸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고구리 사초’에서는 독산참왜(獨山斬倭)라는 문장 다음에 ‘<耽羅>主<月孫>来降献土物.’
- 즉 “<탐라>주 <월손>이 찾아와서 항복하고 토산물을 바쳤다.”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여기서 탐라(耽羅)의 위치는 여기서 탐라(耽羅)는 오늘날 제주도(濟州道)로써, 이는 맥제(百濟)와 고일본(古日本)의
영향권에 있는 대표적인 나라였던 것입니다.
탐라(耽羅)는 주호(州胡)라고도 사서(史書)에 언급되는데, 태왕(太王)시절에 대해양세력인 왜(倭)와 고일본(古日本)
이 그 세력을 일본열도까지 미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해야하는 교두보(橋頭堡)였기에 서로 그 영향력을 확보
하려는 경쟁의 지역이었던 것입니다.
즉 독산참왜(獨山斬倭)로써 태왕(太王)은 조용히 고일본(古日本)이 장악하고 있는 대해양국가 내부(內部)에
균열(龜裂)이 생기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독산참왜(獨山斬倭)로 획득한 새로운 전략적 요충지인 독산성(獨山城)이 이미 확보한 두 요충지인
석현성(石峴城)과 관미성(關彌城)과 합쳐서 세-요충지를 확보하고도 태왕(太王)께서는 맥잔(百殘) - 맥제(百濟)
아잔(阿殘: 친척)이 되돌아오기를 무려 3년이나 기다려서 하남(河南) 위례성(尉禮城)을 토벌하였던 것입니다.
이 독산참왜(獨山斬倭)의 성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태왕비문(太王碑文) 영락(永樂) 10년 조(條)의 토벌(討伐)을
전혀 추측조차 못하기 때문에 긴 설명을 드렸습니다.
영락 10년 조의 토벌(討伐)기사는 결국 고일본(古日本) 연방(聯邦)이 해체(解體)되었음이 ‘고구리 사초’와 태왕비문
(太王碑文)에서 드러납니다.
두 경주(慶州)를 <潮汐水>를 타고 왕래하는 수로(水路)
최근 좌계는 ‘고구리 사초’와 광개토태왕의 비문(碑文)을 관련시켜 역사해석을 다시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중에서 태왕비문(太王碑文) 영락(永樂) 10년 조(條)에 대한 해석(解釋)을 시도하려다 보니, 매우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읍니다.
이 영락(永樂) 10년 조(條) 기록은 비문(碑文)에서 ‘일본의 참모본부’에 의해서 고의적(故意的)으로 파괴가 심한 부분이고, -이를 보완(補完) 해주는 기록은 단지 ‘계연수’장군의 비문징실(碑文徵實)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남아있는 비문(碑文)에 ‘임나가야(任那伽倻)’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좌계가 봉착한 문제점은 엉뚱한데 있습니다.
그것은 ‘고구리 사초’와 현재 남아있는 비문(碑文)의 내용과 ‘계연수 장군’의 비문징실(碑文徵實)을 비교해서 ‘원래의 비문내용’을 회복한 “실제(實際) 내용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이 ‘고구리 사초’에 비교해 볼 때, “왜 고구리 사초가 가장 정확한 기록인가?”를 밝히는 것그 자체 보다도 이런 내용이 나오기 이전(以前)에 대한 ‘역사’적 전제(前提)가 워낙 많이 깔려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신라의 두 경주(慶州)즉 오늘날 <항주(杭州)-경주(慶州)>와 <합비(合肥)-경주(慶州)> 사이에 수로(水路)가 개설되어서 조석수(潮汐水)물을 타고 왕래(往來)하는 수리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고일본(古日本)은 ‘고구리’가 중심이 되어서 건설되는 대운하(大運河)에 대해서 부정적이었고, 대신 관방로(關防路)를 설치하는 것에 대규모 투자를 하였었는데, 대운하(大運河)에 부수적(附隨的)으로 ‘개척(開拓)된 두 경주(慶州)를 있는 수로(水路)’의 특성 때문에, 독산참왜(獨山斬倭)의 충격적인 패전(敗戰)을 겪게 된다는 것이 그 내용중에 “하나”입니다.
좌계가 영락 10년 조(條)의 내용을 규명하는 내용 앞에는 이처럼 ‘우리의 기존의 역사인식’ 자체를 송두리채 흔드는 내용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두 경주(慶州)를 있는 수로(水路)”가 그 사례의 “하나”로써 거론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사례는 오늘날의 투르판(토로번(吐魯番))이 <신라(新羅)의 사벌(沙伐)지역>이고, 인도 동북부에 있는 아쎔 지방이 <신라(新羅)의 감문국(甘文國)>이며, 여기에 이 둘을 ‘이어주는’ 도로(道路)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감문국(甘文國)의 <감(甘)>과 사벌국(沙伐國)의 <사(沙)>를 연결시켜 감사로(甘沙路)라고 이름 부를 도로의 개척을 위해서 ‘신라사초’에 의하면, 벌휴(伐休)이사금과 내해니사금(奈解尼師今) 2대에 총력을 기울었다는 사실을 또 예로 들을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사실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가락국(駕洛國)이 직영하는 가장 중요한 <직할(直轄)-군현(郡縣)>으로써 이는 오늘날 광동성(廣東省) 중산시(中山市)로 부터 동남 아시아(Asia)의 슬라웨시(Sulawesi)에 있는 해로(海路)주변의 항만(港灣)도시였다는 사실 등입니다.
이러한 내용하나 하나를 먼저 차분히 그 근거(根據)를 말씀드린 후에, 영락 10년 조(條)를 거론할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좌계가 몰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연구 작업 자체가 만만치 않게 된 것이지요.
또 이런 영락(永樂) 10년 조(條)의 기록에 들어가기 전의 내용을 하나씩 설명하다보니, 막상 ‘계연수 장군’의 비문징실(碑文徵實),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태왕비문(太王碑文)의 영락(永樂) 10년 조를 연결시켜 ‘원래의 비문내용’을 복구하는 것, 또 이를 기초로 ‘고구리 사초’의 내용과 대비해서 음미해보는 글을 쓰기 전(前)에 실로 6~10 편(編)을 씨리즈(series) 글을 써야하는 엉뚱한 문제에 봉착하고 만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이 꽤나 광범위하게 걸치는 이 ‘작업’의 첫 출발은 ‘향고도 님’이 주신 지도(地圖)때문에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연구(硏究)에도 운(運)이 따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향고도 님’께서는 좌계가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 속의 삼각주(三角洲)로된 ‘고구리의 남평양(南平壤)’ 지도 - 또 <한남(漢南)-맥제(百濟)>의 삼각주(三角洲)를 ‘짤라서 올려달라는 부탁의 말씀’에 놀랍게도 ‘상상을 초월하는 덤’을 주셨던 것이지요.
이는 이 삼각주(三角洲)에서 장강(長江)의 지도가 동해(東海: 황해(黃海))로 나가는 지역까지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볼 수 있는 지도를 올리신 것입니다.
이 지도(地圖)를 세심히 독도(讀圖)하여 보고는 좌계는 경악(驚愕)스런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신라의 두 경주(慶州) - 즉 <합비(合肥)-경주(慶州)>와 <항주(杭州)-경주(慶州)>를 있는 수로(水路)가 건설되어 있었고, 놀랍게도 이 수로(水路)는 조석수(潮汐水)를 타고 한 숨에 항주(杭州) 경주(慶州)에서 합비(合肥) 경주(慶州)로 ‘흐르는 물’에 배(船)를 타고 다니는 시설임이 명쾌(明快)하게 드러나는 지도(地圖)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인 것이지요. ‘향고도 님’께서 좌계가 부탁한 것을 넘어서서 ‘덤’으로 주신 지도(地圖)가 아시아(Asia)고대사를 전혀 새롭게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즉 좌계는 향고도님의 덤 때문에, 연구자로써 횡재(橫財)를 한 셈인 것입니다.
큰 횡재(橫財)를 하고도 감사의 말씀을 안드리는 것은 예의(禮儀)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삼가 머리숙여 ‘향고도 님’의 깊은 배려(配慮)에 머리를 숙입니다.
*** 이상 ‘들어가는 글’ 마침 ******
사천(史穿) 김성겸 님.
오늘 부터 올리는 글은 - 광개토태왕의 비문(碑文) 영락(永樂) 10년 조(條)에 대한 해설(解說)에 대한 준비(準備)하늘 글 자체가 기존의 고대사(古代史)의 패러다임(paradigm)을 송두리 채 바꾸는 것입니다.
또한 이 씨리즈(series)형 글에서 한참 후에 말씀드리는 태왕비문(太王碑文)의 영락 10년 조(條)의 기록과 ‘관련된 사서(史書)’의 내용 자체도 또한 고대사(古代史)의 패러다임(paradigm)에 충격을 주는 내용입니다.
워낙 엉뚱하고도 충격적인 사실이 계속 중첩되는 글을 써야하는 부담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담담하게 이 영락(永樂) 10년 조(條)의 토벌(討伐) 내용에 대해서 미리 밝혀도 되리라 생각됩니다.
이 영락(永樂) 10년의 토벌(討伐)에 의해서 좌계가 삼도왜(三島倭) 혹은 고일본(古日本)이라고 표현했던 오늘날의 수마트라(Smatra)-쟈바(Java)-보르네오(Borneo)가 해체(解體) 즉 멸망하고, 그곳에 고구리(高句麗)가 군현(郡縣)을 설치하였다는 내용이고, 태왕(太王)에 의해 설치된 이 ‘고구리 군현(郡縣)’은 이름 붙이자면 <태양(太陽)-고구리(高句麗)>라고 할수 있는데, 놀랍게도 이 태양(太陽)-고구리(高句麗)는 고구리(高句麗)가 멸망 한 후(後)에도 계속 존속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신라(新羅)가 망한 후에도 계속 존속하여서 “고구리(高句麗)의 역년(歷年)이 신라(新羅)보다 더 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태양(太陽)-고구리(高句麗)와 기맥(氣脈)을 통하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고리국(高麗國) 태조(太祖) 왕건(王建)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워낙 기존의 패러다임(paradigm)을 바꾸는 이야기를 ‘근거(根據)를 제시하면서’ 길게 이야기 해야 하는 부담이 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길고 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전회(前回)에 올린 ‘(*) 太王의 <獨山斬倭>의 비밀: “合肥-金城",<關防路>,<大運河>-[3]’은 전체의 맥락(脈絡)을 잡게하는 일종의 예비(豫備)글에 불과할런 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이 길고 긴 글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파악해야할 내용이 바로 다음의 세 가지 내용이라고 생각됩니다.
① 첫째는 “오늘날 절강성의 <항주(杭州)-경주(慶州)>와 오늘날 안휘성의 <소호(巢湖)-금성(金城)>은 수로(水路)로써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좌계는 이를 [3]에서 쌍-단간-수로(雙-斷間-水路)”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이미 거론(擧論)하기는 하였읍니다 만, 좀더 명확하게 “도대체 어떤 수리(水理)작용이 벌어지는 수로(水路)인가를 명확히 밝혀야한다고 한다고 봅니다.
오늘 올리는 글의 내용이 이 두 개의 경주(慶州)를 연결시키는 수로(水路)에 대해서 수리(水理)작용까지를 언급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이런 ‘두 경주(慶州)를 연결하는 수로(水路)와 그 작용’에 대해서 명확한 이해가 있어야만, 다음 사실을 설명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②둘째로 고일본(古日本)이 중심된 “왜(倭)의 금성(金城) 포위”가 의미하는 것은 이미 말씀드린바와 같이 “유한하(裕漢河)-사하(史河)”포위망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거대한 포위망’에 “도대체 고일본 세력은 병력(兵力)을 얼마나 동원되었을까?”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①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되어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③셋째는 광개토태왕께서 이런 “왜(倭)의 금성(金城) 포위”를 풀고, 독산참왜(獨山斬倭)하는 전략이 구체적으로 어찌 전개되었으며, ②에서 동원된 군사력(軍事力)이 몰살(沒殺) - 즉 오살(鏖殺)되었다면 “도대체 어느정도의 전과(戰果)인가?” 하는 독산참왜(獨山斬倭)에 대한 전과측정(戰果測定)을 할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①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는 ②와 ③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 한 것이지요.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 올리는 글인 ①의 내용 - ‘(*) 두 경주(慶州)를 있는 수로(水路) - [4]’을 충분히 설명하였다고 하더라도, 역시 ② 고일본이 합비(合肥)-경주(慶州)를 포위할 때의 실제 병력수와 전략, 그리고 ③에서 “오살(鏖殺)당한 고일본(古日本)의 숫자는 얼마인가?”는 전과측정(戰果測定) 또 “왜 태왕(太王)께서는 하필이면 이 거대한 병력을 왜 몰살(沒殺) 시킬수 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을 오늘 올리는 글 다음에 연속(連續)해서 실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락국(駕洛國)과 관련된 숨기어진 역사적 사실(事實)을 어느정도 해명되어야만, 비로서 독산참왜(獨山斬倭)가 일어나기 까지의 ‘그 시대의 상황’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두 경주(慶州)를 연결하는 수로도(水路圖)
‘향고도 님’이 주신 지도(地圖)를 좌계가 이름 붙이지만, ‘두 경주(慶州) 사이의 수로도(水路圖)’라고 칭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지도(地圖)는 <항주(杭州)-경주(慶州)>와 <합비(合肥)-경주(慶州)>를 연결하는 수로(水路)에 관한 모든 것을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볼수 있는 지도입니다.
그런데, 좌계는 그 동안 합비(合肥)에는 소호(巢湖)라는 아주 유서(由緖)깊은 소도(蘇塗)가 있고, 여기에 ‘배달화백(倍達和白)을 할 때, 입곱가지의 ‘사회적 위기’에 들어가는 수중(水中) 구조물(構造物)인 금성(金城)이 있었음을 거론(擧論)하였읍니다.
따라서 은연중에 “<합비(合肥)=금성(金城)>, <항주(杭州)=경주(慶州)>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라는 견해를 품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향고도 님이 주신 지도(地圖)를 보고, “좀 옹졸한 견해일런지 모른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경주(慶州)란 말을 영어(英語)로 바꾸면 아마 ‘The city of joy’ - 즉 “기쁨의 도시(都市)” 정도가 될 것입니다.
문제는 화백회의때 일반 시민이 호수(湖水)에 타고 나가면서 연등(燃燈)으로 된 ‘말발’을 받는 태(兌)을 주역에서는 ‘기쁨’으로 그 의미를 해석합니다. 이런 태(兌)들이 잔뜩 있는 호수(湖水)가 ‘배달화백’을 항주(杭州)근처의 태호(太湖)에서 하든, 혹은 합비(合肥)의 소호(巢湖)에서 하든 간에 ‘기쁨의 도시’ - 즉 경주(慶州)로 칭할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심제(心濟) 선생님이 거론(擧論)하신 <합비(合肥)-경주(慶州)>가 더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항주(杭州)와 태호(太湖)는 약간의 거리가 ‘떨어져 있으나’ 소호(巢湖)와 합비(合肥)는 거의 붙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중국전도’를 펴놓고 보면 아주 잘 드러납니다.
(*) 참고 : 중국전도 : http://www.coo2.net/files/lim030203-6chi.gif
가. 신라의 두개의 굴강(掘江)에서 조수(潮水)가 올라오는 입구의 ‘삼자(杉子)의 단간수로(斷間水路)’
<‘향고도 님’의 ‘두 경주(慶州)를 있는 수로도(水路圖)>를 일본서기(日本書紀) 인덕기(仁德紀)의 기록 대로 말하자면, ‘파서 만든 강’인 굴강(掘江)이라 할수 있겠고, 좀 더 길게 이야기하자면, 양쪽에서 ‘물을 갈라놓은 땅’을 파것(=단(斷))-이르모 단간(斷間)이라고 하였는데, 이 단간(斷間)이 이미 있는 강(江)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단간수로(斷間水路)라고 칭할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굳이 긴 말로 설명하자면, 이 ‘두 경주(慶州)를 연결하는 수로(水路)’를 인덕기(仁德紀) 표현대로 하자면, 쌍(雙)-단간수로(斷間水路)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봅니다.
(*) 향고도님의 ‘두 경주(慶州)를 있는 수로도(水路圖)’
http://cfs13.blog.daum.net/original/24/blog/2008/07/16/00/13/487cbe9bb6fcd&filename=54.jpg
위의 ‘향고도 님의 지도’를 보면, 양자강 입구에는 대강구(大江口)로 표기되어 있고, 그 아래에 주산군도(舟山群島)에서 오늘날 항주만(杭州灣)으로 들어오는 곳에 창해(蒼海)라고 적힌 부분이 있습니다.
그 위에는 흥미롭게도 계룡산(鷄龍山)이 해안(海岸)에 있는데, 그 우측에서 부터 북행(北行)하는 운하(運河)가 있습니다.
이 운하(運河)는 좌측에 태호(太湖)를 감싸는 여러 산(山)들 우측으로 불(乀)자 방향으로 완만하게 꺽이면서 올라가는데, 장강(長江)과 만나는 곳에 <운하팔백리(運河八百里)>라고 적혀있습니다.
이는 창해(滄海)에서 장강(長江)까지의 길이가 800 리가 됨을 뜻합니다.
(참고: 이는 운영자 칼럼 ‘(수나라 영제거/통제거) 수나라 대운하는 거짓, 망상, 거짓말!’에서 거론하듯이 대운하(大運河)는 1,764키로 임에 비하여, 800리는 4키로를 10리(里)로 계산하면 (10리/4키로=2.5배)가 되기 때문에, 800리를 2.5로 나누면 (800/2.5=320키로)가 됨을 알수가 있습니다.
(이는 ‘님의 침묵’님께서 답(答)글로 좌계의 계산이 틀렸음을 알려주신 점을 반영해서 고친 것입니다.)
따라서 320키로는가 되어서 원래의 대운하 길이의 ‘작은 부분’임을 잘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향고도 님의 수로도(水路圖)’에 보면, 창해(滄海)에서 계룡산(鷄龍山) 우측으로 운하(運河)가 불(乀)자 방향으로 올라가는 우측에 해염(海鹽)이란 도시가 있고, 그 옆에 방해당(防海塘)이란 지명이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지명 자체가 오늘날 항주만(杭州灣)이 ‘깔대기 구조’로 되어 있고, 이는 ‘밀려드는 바닷물’이 수압(水壓)을 받아서 ‘거슬러 올라가기 좋은 조건’을 형성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방해당(防海塘)이란 ‘바닷물’을 막아서(=방(防) 이를 햇볕에 말리는 못(=당(塘))으로 만들었음을 뜻합니다. 즉 방해당(防海塘)은 오늘날로 말하면, ‘계단식(階段式)으로 되어 있는 염전(鹽田) 시설’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체가, 이 항주만(杭州灣)이 조수(潮水)물이 에스칼레이션(escalation)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밀려드는 바닷물’을 계룡산(鷄龍山)이 마치 바닷속으로 산(山)자체를 내밀어서 들어들이는 입구(入口) 역할을 하고 있음을 눈여겨 보아야하겠습니다.
또한 이 계룡산(鷄龍山) 때문에 ‘바닷물’이 마치 기역(ㄱ)로 껵여서 올라왔다가 곤(丨)자로 운하(運河)라고 적힌 장강(長江)에까지 올라가는 중간에 유포(浟浦)라는 포구(浦口)가 있음을 발견할수가 있습니다. 이 유포(浟浦)의 <유(浟)>는 매우 특이한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利)를 바라는 모양’, 혹은 “욕심(慾心)이 많이 내는 모양”이란 괴상한 뜻인 것이지요.
“왜 포구(浦口) 이름에 이처럼 괴상한 이름이 붙는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포구(浦口) 앞으로 몰려든 해수(海水)가 합비(合肥)의 소호(巢湖)에 까지 밀려들어가는 - 정말 ‘욕심이 많은 모양새’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이상한 포구(浦口)이름이 붙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 유포(浟浦) 앞으로 온 ‘바닷물’은 곤(丨)자 방향으로 장강(長江)을 향하여 올라가기도 하지만, 그대로 좌상(左上)쪽으로 올라가게 되는 또 하나의 통로(通路)가 있는데 그곳에 바로 임평호(臨平湖)라는 지명이 있는 것 역시 유의(有意)해서 살펴야할 지명입니다.
임(臨)이란 ‘위에서 아래로’라는 의미가 있는데, 임평(臨平)이란 뜻 자체가 “위에서 아래로 수평(水平)을 만들어주다”라는 의미가 내포(內包)되어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즉 항주만(杭州灣)의 물이 유포(浟浦)로 해서 단숨에 장강(長江)까지 직진(直進)해서 에스칼레이션(escalation)되어서 올라갈때, 그 조수(潮水)물은 임평(臨平)으로 흘러들어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이 올라간 물이 자연스러운 물의 흐름에 따라 빠질려고 할때, ‘높아진 임평호(臨平湖)’의 물이 ‘낮아지면서’ 이 유포(浟浦)의 물이 흐르는 것을 흘러내려오면서 막아주어서 ‘갑자기 물이 빠지는 것’을 막는 장치를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해염(海鹽)이란 도시 좌측에서 장강(長江)까지에는 원래(原來) 자연스럽게 있었던 강(江)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 강(江)의 이름은 ‘향고도 님의 두 경주(慶州)를 잇는 수로도(水路圖)’에 운하팔백리(運河八百里)라고 적혀있는 곳부터 대체적으로 북(北)에서 아래로 흘러내려가는 물이기 때문에, 이를 북하(北河) 혹은 북천(北川)이라고 칭했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좌계가 볼 때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경주(慶州)부근에 있었던 북하(北河), 북천(北天)이라고 칭해졌던 강(江)중에 ‘하나’는 바로 이 강(江)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북천(北川)강은 이 곳이 오(吳)나라 사람들이 함께 거주하던 지역이었으므로, 오강(吳江)으로도 불리워졌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북천(北川)과 오강(吳江)은 같은 강(江)으로써 모두 항주(杭州)로 가는 ‘지름길’이 되는 강(江)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북천(北川)은 불(乀)자로 동남류(東南流)하면서 그 좌하(左下)에 거대한 태호(太湖)를 두고 흐르는데, 태호(太湖)와 연결되는 수문(水門)이 2 개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① 태호(太湖)의 북 쪽 수문(水門)에는 우측(右側)에는 ‘대초(大椒)’라고 적혀 있는 곳에서 이 북천(北川)의 강물이 들어올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② 태호(太湖)의 동 쪽에 이 태호(太湖)물이 나오는 곳에 ‘위(=북(北)’에 천평산(天平山)이 있고, ‘아래(=남(南))’에 영암산(灵岩山)이 있는데 그 사이의 호수(湖水) 안(內)의 이름이 입택(笠澤)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태호(太湖)의 입택(笠澤)으로 부터 흘러내려온 물은 원래부터 흐르는 강물인 북천(北川)에 합류되어서 흐름이 명확한데, 지도(地圖)에는 이곳의 명칭이 송릉강(松陵江)이라고 별도로 작은 글씨로 쓰여져 있음을 유의(有意)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 송릉강(松陵江)을 줄여서 송강(松江)으로 짧게 표현하고 있는 그 강인 것입니다.
아무튼, 이 북천(北川)은 태호(太湖)의 물이 흘러나온 곳에서 송릉강(松陵江)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하는데, 이 송릉강(松陵江)에서 마치 “들 입(入)”자(字) 처럼 강은 크게 나뉘어지게 됩니다. 하나는 남행(南行)해서 해염(海鹽)쪽으로 가는 원래의 북천(北川)의 흐름이고, 송릉강(松陵江)에서 동(東) 쪽으로 가는 강(江)의 이름이 동강(東江)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결국 태호(太湖)는 크게 보면 불(乀)자 방향으로 흐르는 장강(長江)의 지류(支流)인 북천(北川)에 대해서 북(北)쪽과 동(東)쪽에 2개의 자연적인 수문(水門)을 가지면서 연결되어 있는데, 이 동문(東門)에서 부터는 “태호(太湖) 물이 흘러나왔다.”는 특별한 의미를 두어서 송릉강(松陵江)이라 불리워졌는데, 이 송릉강(松陵江)에서 부터 들 입(入)자 모양으로 2개의 지류(支流) ① 원래의 북천(北川) ② 동강(東江)으로 갈라짐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있는 것은 이 동강(東江)이 흘러나가다가 북동류(北東流)하는 강이 있는데, 갈라지는 지점에 <오강(吳江)>이라는 도시 이름이 있고, 그 강물 이름이 루강(婁江)이라고 적혀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흥미롭게도 이 루강(婁江)을 건너는 곳에 오작교(烏鵲橋)라는 ‘다리’가 있음을 역시 < ‘향고도 님’의 두 경주(慶州)를 잇는 수로도(水路圖)>에 적혀 있다는 것입니다.
좌계가 볼 때에는 이 루강(婁江)까지는 원래부터 있었던 강(江) - 즉 ‘자연적인 수로(水路)’로 봅니다.
아무튼, 이런 포괄적인 태호(太湖) 주변의 강(江)의 구조에서 일단 우리들이 유의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향고도 님의 지도’를 보면 “이런 자연적인 강(江)에다가 인위적(人爲的)인 공사를 해서 만든 강(江)이 엿보인다.”는 점입니다.
일단은 장강(長江)과 북천(北川)이 만나는 입구에 운하팔백리(運河八百里)라고 적혀있는 곳에 보면, 그 오른편에 북부(北府)라고 적혀있다는 점입니다.
이 운하(運河) 물길이 자연적인 강수(江水)로써 신라시대 때부터 있었음을 고려하면, 이 북부(北府)는 ‘북천(北川)을 다스리는 부서(府署)’인듯한 느낌을 주는 명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북부(北府)라고 적혀 있는 곳 우하(右下) 지역에는 북천(北川)과 동강(東江)만이 들 입(入)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강(江)들이 얽히어 있는 모양인데, 마치 그 모양새가 태호(太湖)와 장강(長江) 그리고 바닷물의 조수(潮水)의 삼자(三者)를 ‘교묘하게 수압(水壓)을 조절하듯이 놓여진 특성’을 하고 있음을 눈여겨 보아야할 듯 합니다.
이런 수압조절용(水壓調節用) 강물 가운데, 가장 눈(眼)길을 끄는 것은 북천(北川)의 입구 - 이는 운하팔백리(運河八百里)라고 적혀있는 곳을 뜻함 -에서 장강(長江)의 하류(下流)쪽으로 야간 내려와서 곤(丨)자 방향으로 즉 남류(南流)하는 강이 있습니다.
이는는 초산(焦山)이란 장강(長江)의 작은 섬(島)에서 맹성(孟城)이란 이름의 좌측을 통해서 남행(南行)해서 금단(金壇)이라는 이름의 제방(堤防)까지 이어진 수로(水路)입니다.
그런데 이는 단간(斷間) 즉 원래 자연적으로 나 있는 강(江) ‘사이에(=간(間)’ 인위적(人爲的)으로 땅을 파서 (=단(斷)) 만든 인위적(人爲的)인 수로(水路)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맹성(孟城)의 맹(孟)의 뜻이 ‘첫, 맏이’라는 뜻과 동시에 ‘힘쓰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인위적(人爲的)으로 판 흙을 모아서 만든 산(山)과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운하(運河)가 된 북천(北川)뿐만 아니라, 원래의 자연스런 강물은 왼쪽으로 젖혀진 사람 ‘들 입(入)’자 모양으로 상해(上海)로 흘러들어가는 동강(東江)과 또 여기서 숭명도(崇明島)쪽을 향하여 흐르는 루강(婁江)이 있었다고 보는데, 이런 자연적인 수로(水路)에 인위적(人爲的)인 수많은 수로(水路)를 내기 위해서 그 기준(基準)이 되는 수로(水路)가 바로 <초산(焦山)에서 금단(金壇)까지의 수로(水路)>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향고도 님’의 지도에 보면, 이 <초산(焦山)에서 금단(金壇)까지의 수로(水路)>의 중간에서 원래의 루강(婁江) ‘사이’에 신강(新江)이라는 강(江)이 나있고, 이는 마치 수로(水路) 블록(block)의 중심로(中心路)인 듯한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런데, 좌계가 볼 때에는 이 <초산(焦山)-맹산(孟山)>에서 금단(金壇)까지의 수로(水路)가 바로 인덕기(仁德紀)에 나오는 <삼자(杉子)의 단간(斷間)-수로(水路)>로 보이는 것입니다.
즉 ‘삼자(杉子)의 단간수로(斷間水路)’가 모든 인위적(人爲的)으로 놓인 수로(水路)의 근간(根幹)으로 볼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숭명도(崇明島)입구에 루강(婁江)이 적혀 있는 곳에 <혼산(昆山)> 혹은 <곤산(昆山)>이라는 지명(地名)이 있는데, 그 옆에 루강(婁江) 속에 주기(注記)가 루강일명신강(婁江一名新江) 우명하강(又名下江)이라고 적혀있는 곳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명(水名)은 강물이 합수(合水)될 때에, 그 명칭이 바뀌는데, 원래 루강(婁江)이던 곳에 ‘새로 뚫은 강(江)’을 의미하는 강(江)인 신강(新江)이 합수되었기에 신강(新江)이라고 붙여졌을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향고도 님의 <두 경주(慶州)를 잇는 수로도(水路圖)>’에서 초산(焦山)에서 금단(金壇)까지 곤(丨)자 방향으로 내려오던 곳의 중간 지점에서 <산정(山亭)-동산(仝山)> 사이에서 <혼산(昆山)>사이에 흐르는 강이 인위적(人爲的)으로 ‘새로 만든 강(江)’인 신강(新江)으로 보는 것입니다.
(참고: <昆>은 ‘맏이’의 뜻으로는 ‘곤’이라고, 읽으나, ‘섞인다.’라는 의미로는 ‘혼’으로 읽습니다. 좌계는 이를 ‘혼산’으로 읽는 것이 더 좋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물(水)이 ‘섞이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 신강(新江)과 원래의 루강(婁江)이 합수(合水)하여 흐른 명칭은 문자 그대로 ‘배수(排水)하는 강(江)’인 하수(下水)로 보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신강(新江) 가운데, 태호(太湖)의 북문(北門)인 곳과 연결되는 곳에는 좌측(左側)에 필일산(疋日山)이 있고, 그 우측(右側)에 혜산(惠山) ‘사이’로 수로(水路)가 나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로(水路)는 장강(長江) 하구(河口) - 말하자면 지도(地圖)의 대강구(大江口)에 연결되는 정강(靖江)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강(靖江)의 정(靖)은 ‘다스리다, 편안하게 하다, 고요하게 하다.’라는 뜻이 있어서 물(水)로인한 난(亂)을 다스리는 인위적(人爲的)인 강임을 강하게 시사(示唆)하는 강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이 정강(靖江)의 물은 신강(新江)을 통해서 양쪽의 필일산(疋日山)과 혜산(惠山) 사이로 해서 태호(太湖)의 북문(北門)에 직접 들어오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필일산(疋日山) 이란 명칭 자체가 그 옆에 있는 ‘천(千) 개의’ <필일(疋日) 묘(廟)>에서 왔다는 것인데, “도대체 이 필일(疋日)의 뜻이 무엇일까? ”는 것이 궁금해서 인터넷(Internet)에서 찾아보았더니, 복혜쌍수적유마경(福慧雙修的維摩經)에서 “필일(疋日) 필일(疋日) 필무위(疋無爲)”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을 보아서, 범어(梵語)로 “무위(無爲)” 즉 ‘억지로 어뗜 일을 하지 않고, 자연(自然)스럽게 하다.’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어떤 개념과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대승불교(大乘佛敎)와 재가(在家)불교의 상징인 유마힐(維摩詰)의 도(道)를 실천하는 것과 ‘두 경주(慶州)를 잇는 수로(水路) 건설’ 사이에 어떤 연관관계가 있고, 이 수로(水路) 건설에 수많은 장인(匠人)들이 참여했고, 이런 ‘장인(匠人)들을 모시는 묘(廟)’도 있었음이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에 나타난다고 하겠읍니다.
이런 수로(水路)를 뚫는 장인(匠人)들의 묘(廟)와 산(山)이 왼쪽에 있고, 그 공덕(功德)의 은혜(恩惠)스러움이 오른쪽에 있는 것으로 ‘향고도 님의 지도’에 나타나있고, 이 사이로 강(江)과 조수(潮水)의 범람을 막는 정강(靖江)이 태호(太湖)의 북문(北門)에 직결되어 있는 것으로 ‘향고도 님의 두 경주(慶州)를 잇는 수로도(水路圖)’는 정확히 표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단 태호(太湖) 주변의 이러한 지리적 관계를 지도(地圖)로써 일별(一瞥)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 ‘향고도 님의 두 경주(慶州)를 잇는 수로도(水路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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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설(却說)
다시 말하면, <초산(焦山)-맹산(孟山)>에서 <금단(金壇)>에 새로 뚫은 ‘삼자(杉子)의 단간수로(斷間水路)’가 근간(根幹)이 되어야만 원래(原來) 루강(婁江)이 있는 곳까지, <산정(山亭)-동산(仝山)>에서 <혼산(昆山)>까지 신강(新江)을 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참고: 동산(仝山)의 동(仝)이란 글자는 동(同)과 뜻이 같은데, “왜 이런 벽자(僻字)를 쓰는가?!”하는 질문도 할수가 있다고 봅니다. 이는 수위(水位)조절을 ‘같게 (=동(同)’하는 것이긴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산(山)에 사람의 힘으로 인공(人工)적’으로 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동(仝)=산(山)모양의 사람 인(人) + 공(工)’이란 글자를 골라서 썼다고 보여집니다.)
이처럼 신강(新江)이 놓여진 후에도, ‘향고도 님의 지도’를 보면, 삼자(杉子)의 단간수로(斷間水路)를 기준(基準)으로 원래 북천(北川)-동강(東江)의 본류(本流)에서 숭명도(崇明島)로 북동류(北東流)로 하는 원래의 지류(支流) 루강(婁江) 사이에 무려 4재구 수로(水路)로 둘러쌓인 블록(block)이 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 블록 안(內)에는 각기 도시(都市) 이름이 있음도 알게 되는데, 창해(滄海)에서 바다의 조수(潮水)물이 올라오는 쪽에서부터 거론하면, 이 도시 이름은 다음과 같음을 역시 ‘향고도 님의 지도’에서 발견할수가 있습니다.
① 오강(吳江) ② 소주(蘇州) ③ 무석(無錫) ④ 의흥(宜興)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인위적(人爲的)으로 생긴 신강(新江)과 장강(長江) ‘사이’에도 ① ‘삼자(杉子)의 단간수로(斷間水路)’에서 정강(靖江)까지 강음(江陰)이란 도시와 ② 정강(靖江)우측에 혼산(昆山) 혹은 곤산(昆山)이란 도시가 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결국 태호(太湖) 주변에는 인위적인 삼자(杉子)의 단간수로(斷間水路)를 종(縱)으로 뚫고, 여기에 횡(橫)으로 신강(新江)을 내고 무려 수로(水路)로 만들어진 블록(block)이 총 7개나 있음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좌계가 이를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인덕기(仁德紀)에서 나오는 “삼자(衫子)의 단간(斷間)”을 보면서, “아!! 이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남아있는 신라(新羅)의 수로(水路)이야기이다.!!”라고 직감(直感)하게 된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개의 박을 띄워서 일종의 물의 흐름에 대한 실험을 했다.”는 말과 함께 삼(衫)이란 말 때문이었습니다. 삼(衫)은 ‘적삼’으로써 내의(內衣)를 뜻하는데, 기본적으로 겹겹히 입는 옷을 뜻합니다. (이것이 삼(衫)이란 글자에서 옷을 뜻하는 의(衣) 변에 ‘터럭’을 뜻하는 삼(彡)이 붙어서 겹겹을 상형한 것으로도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삼자(衫子)라는 분은 신라에 동원된 탁월한 치수(治水) 즉 운하(運河)시설의 장인(匠人)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향고도 님의 지도’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듯이 겹겹히 에워싼 수로(水路) 블록(block)이 7개나 되는 것이지요.
아무튼, 일본서기 인덕기(仁德紀)에서는 이 조수(潮水)물이 역류(逆流)하고, 홍수(洪水)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인덕왕(仁德王)이 ‘삼자(杉子)의 단간수로(斷間水路)’를 통해 치수(治水)하였는데, 그 명칭을 자전제(茨田堤)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茨)란 글자는 ‘가시나무’, ‘지붕을 잇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자전제(茨田堤)의 뜻은 “ ‘엮기 좋은 가시나무 종류’의 나무로 밭 전(田)자로 엮어 만든 제방(制防)”이라는 뜻을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향고도 님의 지도’를 보면, 태호(太湖)의 동쪽 수로(水路) 부근의 명칭이 입택(笠澤)이라고 적혀있는데, 여기서 입(笠)은 ‘대나무’ 또는 ‘미나리 과’의 ‘구리때’라고 하는 백지(白芷)와 같은 엮기 좋은 나무를 뜻합니다.
따라서 태호(太湖)의 동쪽 수로(水路) 문(門)을 입택(笠澤)이라고 특별히 칭한 것은 이곳에 ‘대나무 혹은 구리때’로써 성긴 ‘울타리’를 한 어떤 시설물(施設物)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즉 자전제(茨田堤)와 입택(笠澤)은 그 본질상 뜻이 같음을 의미합니다.
“왜 태호(太湖)의 동문(東門) 즉 송릉강(松陵江)의 입구(入口)에 이런 자전제(茨田堤) 혹은 입택(笠澤)이라는 시설물이 필요했을까?” - 이는 생각컨데, 이 태호(太湖)가 “배달화백을 하는 성(聖)스런 호수(湖水)”로 존중했기 때문에, 상어 같은 사람을 잡는 ‘큰 물고기’가 못 들어오도록 하는 장치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장치가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에는 입택(笠澤)으로 일본서기 인덕기(仁德紀)에서는 자전제(茨田堤)라고 각기 달리 칭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나. ‘두 경주(慶州)를 잇는 수로(水路)’의 포괄적인 수리(水理) 작용에 대한 해석(解釋)
두 경주(慶州) 말하자면 “항주(杭州)-경주(慶州)와 합비(合肥)-경주(慶州)를 잇는 수로(水路)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쉽게 말씀드리면, 하루에 두번씩 있는 조석수(潮汐水)의 물결을 타고, 신라(新羅) 사람들은 항주(杭州)-경주(慶州)에서 합비(合肥)-경주(慶州)로 선박(船舶)을 탄채로 오늘날 사람들이 에스칼레이터(escalator)를 타고 쉽게 이동하듯이 이동하였음을 뜻합니다.
기이하게도 이런 시설은 산동(山東) 맥제(百濟)에서 칠중하(七重河)-웅진강(熊津江)-대야택(大野澤)-백강(白江)으로 씨(C)-턴(tern)하는 시설이 되어 있는 것과 똑같이 신라(新羅)에도 설치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런 작용이 어찌 가능한가?”하는 것을 일단 ‘향고도 님의 지도’를 보면서 우리는 파악해야할 듯 합니다.
먼저 ‘두 경주(慶州)를 잇는 수로(水路)’부터 간단히 살펴본 후에, 왜 이런 작용이 일어나게 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향고도 님의 지도’를 보면, 태호(太湖)는 서(西)쪽으로 장흥(長興)이란 도시 위에 호릉산(湖陵山)이 있는 곳에서 저 서(西)쪽에서 흘러들어오는 강물이 흥미롭게도 ‘베풀어진 시냇물’이란 뜻의 시계(施溪)가 나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참고: 이는 호릉(湖陵) 위에 암갈색(暗褐色) 바탕 ‘위’에 검은 글씨로 쓰여있음)
그런데, 이 시계(施溪)는 광덕(廣德)이란 도시의 횡산(橫山)까지는 직서(直西) 방향으로 가다가 우상(右上)쪽에 계룡산(鷄龍山)을 두면서 서북(西北)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물이 빙글 빙글 돈다’는 의미의 표수(漂水)라는 이름에서 단양호(丹陽湖)를 만납니다.
그런데 이 단양호(丹陽湖)에서 서(西)쪽에는 무호(蕪瑚)라는 호수(湖水)가 있는데, 이것이 장강(長江)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이 <무호(蕪瑚)와 장강(長江)> 사이가 원래는 동양산(東梁山)의 산기슭이 막히고 있었던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즉 일본서기 인덕기(仁德紀)에 나오는 ‘강경(强頸)의 단간수로(斷間水路)’로 인위적으로 뚫은 지역이 바로 이 동양산(東梁山)의 산기슭으로 무호(蕪瑚)와 장강(長江) 사이인 것이지요.
‘향고도 님의 지도’에서는 이 ‘새로 뚫은 지역’을 기념(紀念)하는 듯한 글귀가 천문중단초강개(天門中斷楚江開)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는 “천문산(天門山) 가운데(=중(中))를 잘라서(=단(斷) 초(楚)나라 강(江)-이는 장강(長江)을 뜻함 -이 열였도다!”라는 뜻입니다.
아무튼 이런 글귀 좌측에 서양산(西梁山)이 있고, 우측에 천문산(天門山)이 있는데, 이 천문산(天門山)에는 일명동양산(一名東梁山)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따라서 동양산(東梁山) 산기슭을 뚫어서 수로(水路)를 낸 것을 일본서기 인덕기(仁德紀)에는 ‘강경(强頸) - 이는 “뻣뻣한 목아지”라는 뜻임 - 단간(斷間)’이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강경(强頸)의 단간수로(斷間水路)’ 맞은 편에 보면, 합비(合肥) 경주(慶州)의 성호(聖湖)인 소호(巢湖)로 들어가는 책강(柵江)이 있는데, 이 책강(柵江) 입구에 도시 이릉에 특이하게도 무위(無爲)로 기록되어 있음을 유의하게 살펴보아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호(太湖)에는 두 개의 수문(水門)이 있는데, 동문(東門) 즉 입택(笠澤)으로는 해염(海鹽)의 북천(北川), 상해(上海)의 동강(東江), 숭명도(崇明島)의 루강(婁江)이 모두 동해(東海)의 조석수(潮汐水)물을 에스칼레이션(escalation)해서 동문(東門)에 그 물결을 밀어넣고, 또 북문(北門)은 장강(長江) 하구인 대강구(大江口)역시 ‘깔대기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조석수(潮汐水)물이 에스칼레이션(escaltion)되어서 정강(靖江) 통해 신강(新江)까지 와서 이 신강을 건너뛰어 필일산(疋日山)과 혜산(惠山) 사이로 해서 또다시 북천(北川)을 건너뛰어 대초산(大椒山)을 통해서 태호(太湖)의 북문(北門)을 통해서 조석수(潮汐水)의 물이 밀려들어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물은 순식간에 태호(太湖)의 서문(西門)쪽으로 흘러들어오는 시계(施溪)를 타고 역류(逆流)해서 단양호(丹陽湖) - 무호(蕪瑚)로 해서 장강(長江)을 건너뛰어 소호(巢湖)의 입구인 책강(柵江)을 통해서 소호(巢湖)에 까지 갈수 있기 있는 것이 ‘하나도 억지 부림없이’ 문자 그대로 무위자연(無爲自然)스럽기에 이 부근의 도시 이름이 무위(無爲)인 것입니다.
또 워낙 이런 현상이 심한지라, 이 무위(無爲) 서북(西北)쪽에 있는 산(山)의 이름이 ‘물에 둥둥떠서 직선(直線)으로 건너다’는 의미의 부도(浮度)가 붙은 부도산(浮度山)이란 지명이 붙을 지경이었던 것이지요.
아무튼 태호(太湖)에로 세 방향에서 밀려든 물이 합비(合肥)-경주(慶州)의 소호(巢湖)에 까지 왔음을 명확히 증명해주는 것이 ‘향고도 님의 지도’에서 표기(表記)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책강(柵江) 중간 쯤에 표기된 ‘유수구(濡須口)’라는 지명(地名)입니다.
유(濡)는 ‘적시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수(須)는 ‘마땅히’ 혹은 ‘대기(待期)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유수구(濡須口)라는 말 자체가 “물(水)이 흘러들어와 적시어주기 위해 기다리는 입구(入口)”라는 뜻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향고도 님의 지도’를 보면, 소호(巢湖) 오른쪽 즉 동(東)쪽에 산(山)이 하나있는데, 그 산(山)이름이 유수산(濡須山)이라고 기재(記載)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얼핏보면, 유수산(濡須山)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니깐 유수하(濡須河)로 칭할수 있는 이런 강(江)으로 들어가는 입구(入口)라는 명칭으로 유수구(濡須口)라고 칭하고, “이를 지도(地圖)에 기재(記載)하였다.”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향고도 님의 지도’에는 신기하게도 이 유수산(濡須山)에서 흘러나오는 강(江)의 이름이 책강(柵江)이라고, 분명히 유수구(濡須口)보다 더 유수산(濡須山)에 가까운 곳에 책강(柵江)이라고 적혀있는 것입니다.
유수산(濡須山)의 명칭은 저 태호(太湖)에 저장된 조석수(潮汐水)의 물이 시계(施溪)를 타고, 단양호(丹陽湖)-무호(蕪瑚)로 해서 장강(長江)을 건너서 ‘소호(巢湖) 주변을 <더욱더 넓게 적시기 위해서 대기(待期)하고 있는 모습>을 관망(觀望)하기 좋은 산(山)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태호(太湖)에 밀려든 세 가닥의 조석수(潮汐水)물이 분명히 소호(巢湖)에 들어가 ‘넓은 지역을 적시기 위해 대기(待期)하고 있는 유수구(濡須口)’가 있었고, 또 이 대기(待期)하는 물이 몰려들어 소호(巢湖)를 더 넓게 호수(湖水)물이 불어나면서 적시는 모습을 볼수 있는 유수산(濡須山)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결국에는 두 경주(慶州) - 항주(杭州) 경주와 합비(合肥) 경주 사이에 수로(水路)를 통해 조석수(潮汐水)물이 역류(逆流)해 흘러들어옴을 잘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수산(濡須山)의 존재와 관련해서, ‘향고도 님의 지도’를 우리를 또 놀랍게 하는 것은 이 유수산(濡須山)에 대한 주기(注記) - 즉 설명문(說明文)입니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습니다.
“유수산(濡須山) 조조손권상거처(曹操孫權相拒處)” - 이는 이 유수산(濡須山)이 경계가 되어서 조조(曹操)와 손권(孫權)이 서로 대치(對峙)해 방어하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주기(注記)가 중요한 것은 ‘소설(小說)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曹操)와 손권(孫權)이 모두 ‘신라의 소도(蘇塗)’인 소호(巢湖)를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성호(聖湖)‘로 인정하고, 그 동(東)편에 있는 산(山)인 유수산(濡須山)에 국경(國境) 비슷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주기(注記)라고 생각됩니다.
(*) ‘향고도 님의 지도’에서 소호(巢湖) 동쪽의 유수산(濡須山), 유수구(濡須口)를 볼수 있는 곳 : http://cfs13.blog.daum.net/original/24/blog/2008/07/16/00/13/487cbe9bb6fcd&filename=54.jpg
따라서 우리는 이런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의 지명(地名)을 보아도, ‘두 경주(慶州)를 조석수(潮汐水)를 타고 왕래(往來)할 수 있는 수로(水路)’가 있었음이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향고도 님’의 지도를 보면 천문중단초강개(天門中斷楚江開)라고 ‘뚫어진 동양산(東梁山)’ - 즉 강경(强頸)의 단간수로(斷間水路)는 없었던 것이었읍니다. 단지 원래의 수로는 단양호(丹陽湖)에서 남(南)쪽으로 고순(高淳)이란 도시를 통해서 오호(五湖)로 들어가서 이는 경정산(敬亭山) 밑으로 해서 남릉(南陵)이라는 곳에서 북류(北流)하는 청과강(靑戈江)이 좌측(左側)에서 봉황산(鳳凰山)을 끼고 오는 장강(長江)과 합류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청과강(靑戈江)이 남릉(南陵)이란 도시 우측(右側)으로 해서 북상(北上)하는 강(江)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런데 동양의 무기 가운데, 기병(騎兵)들이 쓰는 ‘ㅏ’자 모양의 창(槍)이 있습니다. 흔히들 ‘기역(ㄱ)자 창(槍)’이라는 이 창(槍)의 명칭이 과(戈)입니다.
이런 ‘ㅏ’자 모양을 우측(右側)으로 눕히면 ‘ㅜ’자가 되겠지요.
따라서 장강(長江)에서 봉황산(鳳凰山)을 끼고 우회전하면서 청과강(靑戈江)과 합류한 것이 경정산(敬亭山) 밑으로 해서 오호(五湖)를 통해 고순(高淳)이라는 도시를 지나 단양호(丹陽湖)에 들어가는 강물 전체가 ‘ㅜ’자 모양이 되기 때문에, 이 전체가 청과강(靑戈江)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태호(太湖)-단양호(丹陽湖)-무호(蕪瑚)-장강(長江)>으로 조석수(潮汐水) 물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시계(施溪)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동양산(東梁山)이 뚫히는 이른바 ‘강경(强頸)의 단간수로(斷間水路)’로 놓인 후의 강물의 명칭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단간수로(斷間水路)가 뚫히기 전에는 청과강(靑戈江)이 장강(長江)에서 봉황산(鳳凰山)을 끼고 우회전해서 청과강(靑戈江) 본류(本流)와 합쳐져서 경정산(敬亭山) 밑으로 해서 오호(五湖)로 들어갔다가 고순(高淳)이라는 도시를 끼고 단양호(丹陽湖)로 들어가는 ‘전체의 강(江)물’ 자체가 청과강(靑戈江)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단양호(丹陽湖) 우측의 도시 이름이 표수(漂水)로 칭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양호(丹陽湖)의 동쪽에서 조석수(潮汐水)의 물을 세 방향에서 끌어당긴 태호(太湖)의 높은 물이 단양호(丹陽湖)로 서입(西入)해 들어오고 (←), 또 장강(長江)의 지류(支流)와 청과강(靑戈江)이 오호(五湖)를 통해 북류(北流)해 들어오니깐(↑)이 단양호(丹陽湖)는 호숫물이 늘 빙글 빙글 도는 이른바 표수(漂水)현상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현상은 ‘강경(强頸)의 단간수로(斷間水路)’가 뚫힌 후에도 조석수(潮汐水)물이 태호(太湖)로 부터 시계(施溪)를 타고 단양호(丹陽湖)로 들어오는 동안에는 계속 표수(漂水)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매한가지였던 것입니다.
가 있고, 또 이 단양호(丹陽湖)는 조석수(潮汐水)의 물들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단양호(丹陽湖)는 ‘양쪽에서 물(水)이 들어오는 관계로’ 호수(湖水)물 자체가 조석수(潮汐水)가 들어올때에는 ‘전체적으로 빙글 빙글 돌기 때문에’ 이 인근의 도시 이름자체가 ‘물이 표류(漂流)한다’는 뜻으로 표수(漂水)로 지어졌음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 경주(慶州)를 왕래(往來)하게 하는 수로(水路)의 의미를 확실히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태호(太湖) 동쪽에 삼자(杉子)의 단간수로(斷間水路)를 뚫고, 여기에 신강(新江)과 정강(靖江)이라는 ‘새로운 물길’을 냄으로써 조석수(潮汐水)가 오늘날 항주만(杭州灣)과 장강 입구인 대강구(大江口)라는 2개의 ‘깔대기 구조’로 밀려들어와서 태호(太湖)에 조석수(潮汐水) 물을 최대한 수용하게 하는 공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공사에 의해 태호(太湖)는 조석수(潮汐水)를 최대한 받아들이는 ‘거대한 조석수(潮汐水)의 댐(dam)’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단양호(丹陽湖)-무호(蕪瑚)까지 연결되었지만, 동양산(東梁山)에 의해 막혀있던 것을 뚫은 이른바 인덕기(仁德紀)의 ‘강경(强頸)의 단간수로(斷間水路)’는 이것이 뚫히기 전(前)의 상태와 비교하면 “왜 이 공사(工事)가 필요했는지?!”를 직감(直感)할수 있습니다.
태호(太湖)에 밀려들어 저장된 조석수(潮汐水)물이 - 삼자(杉子)의 단간수로(斷間水路) 공사가 없을 때에는 그 양(量)이 훨씬 적었음을 감안하여야합니다. - 단양호(丹陽湖)로 들어갈때에는 묘하게도 단양호(丹陽湖) 아래에 있는 도시 고순(高淳)의 좌측에서 시계(施溪)가 불(乀)자 방향으로 올라가고(↖)또 이 단양호(丹陽湖)에서는 고순(高淳)의 우측(右側)을 타고 별(丿)자 방향으로 내려가서(↙), 오호(五湖)로 들어가는데, 그 모습이 마치 그리스 문자의 옴(Ω)자 처럼 생긴 흐름인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강물이 옴(Ω)자 처럼 흐르게 되면, 저항(抵抗)을 많이 받아서 그 유속(流速)이 급격히 떨어짐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더구나 이 옴(Ω)자 모양의 정점(頂点)에 있는 단양호(丹陽湖)는 서쪽으로 뻗어나간 끌에 무호(蕪瑚)라는 호수(湖水)가 있기 때문에, 흘러들어온 물을 분산(分散)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아무리 조석수(潮汐水)물이 단양호(丹陽湖)까지 흘러들어왔다고 할지라도, 이 강물이 청과강(靑戈江)을 타고서 나갈수 없는 그런 자연적인 구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태호(太湖) 동편에서 ‘초산(焦山)-맹산(孟山)’ - 금단(金壇)을 있는 ‘삼자(杉子)의 단간수로(斷間水路)’를 내고, 여기에 신강(新江)을 뚫어 다시 정강(靖江)이라는 대강구(大江口)에서부터 조석수(潮汐水)를 낼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공사를 하게 되어서 태호(太湖)에 흘러드는 조석수(潮汐水)의 유입량을 엄청 강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옴((Ω)자 처럼흐르는 청과강(靑戈江)이 아니라, 단양호(丹陽湖)까지 흘러들어간 시계(施溪)가 단양호와 무호(蕪瑚)에 막히지 않고, 장강(長江)을 뚫고 서행(西行)하는 직선(直線)수로(水路)를 만든 것이 바로 ‘강경(强頸)의 단간수로(斷間水路)’라는 것이지요.
그결고 이 태호(太湖)에 저장된 조석수(潮汐水)물은 계속 ‘연장된 시계(施溪)’를 통해 장강(長江)을 건너뛰어서 소호(巢湖) 앞에 유수구(濡須口)까지 몰려들어갔던 것이지요.
이처럼 ‘삼자(杉子)의 단간수로(斷間水路)’와 ‘강경(强頸)의 단간수로’ 그리고 유수구(濡須口)를 하나의 계통(系統)으로써 ‘향고도 님의 지도’를 통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향고도 님의 두 경주(慶州)를 잇는 수로도(水路圖)’
http://cfs13.blog.daum.net/original/24/blog/2008/07/16/00/13/487cbe9bb6fcd&filename=54.jpg
그런데, “도대체 두 경주(慶州)를 조석수(潮汐水)를 타고 한 숨에 치달려가는 것이 어찌 가능한가?” 하는 수리(水理)작용을 우리는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향고도 님’의 지도를 보면, 장강(長江)의 입구는 대강구(大江口)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곳에 바로 태호(太湖)의 북문(北門)과 직결되어 있는 강(江)인 정강(靖江)이 나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대강구(大江口) 입구에 강면팔십리(江面八十里)이라고 적혀 있는 글자가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오늘말로 강폭(江幅)이 이 대강구(大江口)에서 무려 80리 즉 20키로나 됨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 광릉도(廣陵濤)라고 적혀있습니다. 이 광릉도(廣陵濤)는 ‘넓은(=광(廣))산언덕 갈은(=능(陵)) 파도(波濤)’가 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장강(長江)의 하구(河口) 자체가 ‘깔대기 구조’로써 조석수(潮汐水)의 밀물을 광릉도(廣陵濤) - 거대하게 모아서 증폭시키는 작용을 함을 뜻합니다.
그런데, 정강(靖江)은 이러한 광릉도(廣陵濤)가 태호(太湖)의 북문(北門)에 직접들어오기 좋도록 거의 직선(直線)으로 인위적(人爲的)으로 놓여져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좌계가 삼자(杉子)의 단간수로(斷間水路)라고 말하는 <초산(焦山)-금단(金壇)>의 수직(垂直)된 수로(水路)에서 초산(焦山)은 처음부터 섬(島) - 다시 말하면 초산도(焦山島)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향고도 님의 지도’를 보면 놀랍게도 이 초산도(焦山島)가 마치 조석수(潮汐水)물이 에스칼레이션(escalation)되어서 들어오는 입구를 태호(太湖)을 북문(北門)쪽으로 보내기 위해서 가로막는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음을 눈여겨 보아야합니다.
‘얄밉게도’ - 이 초산도(焦山島) 앞에는 ‘바다의 문(門)이 되는 돌(石)’을 뜻하는 해문석(海門石)까지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문(門)’이란 뜻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초산도(焦山島)가 조석수(潮汐水)물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삼자(杉子)의 단간수로(斷間水路)’로 뚫는 처음의 기준(基準)이 되는 증좌(證左)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이 초산도(焦山島)가 있는 장강(長江)에서 홍택호(洪澤湖) 고우호(高郵湖)의 강(江)이 흘러 들어오고 있는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 강(江)의 이름이 한강(韓江)으로 표기(表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 자체가 워낙 이 강(江)을 삼한(三韓)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강(江)이기 때문에 그렇게 정해졌겠지요.
그런데, 광릉도(廣陵濤)로 밀려들어오는 조석수(潮汐水)에 대해서 북(北)쪽에서는 한강(韓江)이 흘러들어오게 되고, 서(西)쪽에서 장강(長江)이 흘러들어오게 되면, 자연히 수압(水壓)은 강폭(江幅)이 좁은 쪽으로 치달릴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수압(水壓)은 단면적(斷面績)에 비례하고, 이 수압은 ‘짧은 단면적’에 긴 길이를 통해서 속력(速力)을 내면서 집중하게 된다.”는 파스칼(Paskal)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수압(水壓)은 전부 삼자(杉子)의 단간수로(斷間水路)로 통해서 결국에는 태호(太湖)의 북문(北門)을 통해서 들어가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삼자(杉子)의 단간수로(斷間水路)의 입구인 초산도(焦山島)가 대강구(大江口)로 몰려드는 광릉도(廣陵濤) - 즉 넓게 언덕같은 조석수(潮汐水)를 잡아들이는 야구의 글러브(globe)처럼 생긴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정강(靖江)에서 신강(新江)의 필일산(疋日山)과 혜산(惠山) 사이로 들어와 태호(太湖)의 북문(北門)으로 직접들어오는 수로(水路)도 있음을 유의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삼자(杉子)의 단간수로(斷間水路)>와 <정강(靖江)을 통해 북문(北門)으로 직접>들어 오는 곳에 수로(水路)로 둘러쌓인 일종의 섬(島) 가운데 있는 도시 이름이 바로 의흥(宜興)임을 유심히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의흥(宜興)은 수로(水路)로 둘러쌓인 섬(島)이기 때문에, <의흥(宜興)-수로도(水路島)>라고 이름 붙일수 있다고 봅니다.
의흥(宜興)의 한자(漢字)의 뜻은 ‘마땅히 흥(興)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조석수(潮汐水) 유입량(流入量)이 가장 많은 ‘삼자(杉子)의 단간수로(斷間水路)’ 즉 <초산도(焦山島)-맹산(孟山) ~ 금단(金壇)>과 또 가장 대강구(大江口)에서 태호(太湖)의 북문(北門)에 직류(直流)하는 정강(靖江)의 사이에 이 ‘의흥(宜興)-수로도(水路島)’는 일종의 로타리(Rotary) 역할을 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삼자(杉子)의 단간수로’를 통해서 물이 들어오거나, 혹은 정강(靖江)을 통해서 들어오거나 간에 상관이 없이 조석수(潮汐水)물은 상호의 합력(合力)-압력으로 이 의흥(宜興)-로타리(Rotary)를 통해서 모두 태호(太湖)의 북문(北門)으로 주입(注入)되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강구(大江口)의 강폭이 ‘향고도 님의 지도’에서 80리(里)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향고도 님의 지도’에서 ‘강경(强頸)의 단간수로(斷間水路)’를 뚫은 곳 즉 동양산(東梁山) 혹은 천문산(天門山)과 서양산(西梁山) ‘사이’에 천문중단초강개(天門中斷楚江開)라고 적힌 곳에서 위쪽(장강(長江) 북쪽)에 보면 박망산(博望山)이라는 산(山)이 있습니다.
이 산(山)의 이름 자체가 ‘넓게 관망(觀望)하는 산(山)’이란 뜻이 있는데, 그 이유는 분명히 맞은 편의 산(山)들 천문산(天門山)-일명(一名) 동양산(東梁山), 채석산(采石山), 우저기(牛渚磯),삼산(三山)등의 ‘아름다운 산(山)’들이 즐비하게 늘어섰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박망산(博望山) 앞의 장강(長江) 속에 “도강(渡江) 사십리(四十里) 혹이십리(或二十里)”라고 적혀있는 주기(注記)를 볼수가 있습니다.
이는 “강(江)을 건너는데, 강폭(江幅)이 40리 혹은 20리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20리는 조석수(潮汐水)가 밀려들지 않았을 때에는 강폭(江幅)이 20이지만, 조석수(潮汐水)가 밀려들때에는 40리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물론, 장강(長江)에 홍수(洪水)가 나서 불어난 수치일수도 있으나, ‘큰 홍수(洪水)가 나는 이변(異變)’을 지도(地圖)에 주기(注記)를 달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대강구(大江口)의 평상시 강폭(江幅)이 80리인데, 이것이 박망산(博望山) 아래에 오면 조석수(潮汐水)가 없을 때에는 강폭이 그 1/4인 20리에 불과하나, 조석수(潮汐水) 물이 밀려들어올때에는 강폭(江幅)이 그 2배인 40리나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박망산(博望山)의 위치가 장강(長江)이 별(丿)자 방향으로 북동류(北東流)하는 곳인데도 신기하게도 동양산(東梁山)및 서양산(西梁山)은 (丨丨) 처럼 박망산(博望山)으로 평행해서 북행(北行)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결국 대강구(大江口)로 밀려든 조석수(潮汐水)물이 태호(太湖), 단양호(丹陽湖) 뿐만 아니라, 무호(蕪瑚)에 까지 ‘올라와서 강폭(江幅) 20리를 40리로 늘리는 정도’로 그 위력(威力)이 세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지도(地圖)라고 할수 있습니다.
왜냐면, ‘향고도 님의 지도’에서 박망산(博望山)과 무호(蕪瑚)는 수직선(垂直線) 상에서 관찰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크게 보아서 두 종류의 단간수로(斷間水路)’를 뚫게 한 것은 태호(太湖)-단양호(丹陽湖)-무호(蕪瑚) 라는 3개의 호수(湖水)에 조석수(潮汐水)를 저장할수 있음을 뜻한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향고도 님의 지도’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태호(太湖)에서 서행(西行)하는 시계(施溪)가 단양호(丹陽湖), 무호(蕪瑚)를 지나서 ‘강경(强頸)의 단간수로’를 통해 “장강(長江)을 건너는 부분의 폭(幅)이 유난히 넓다.”는 사실입니다.
이 역시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 동서(東西)의 두 양산(梁山) 입구(入口)에 이르는 부분에서 폭(幅)이 넓어야만 흘러들어오는 시계(施溪)의 흐름이 장강(長江)을 건널때 서행(徐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 부분에서의 강폭(江幅)이 좁고 따라서 시계(施溪)의 강물이 강폭(江幅)을 건널때, 급행(急行)하게 되면, 그냥 장강(長江)을 따라서 대강구(大江口)로 배(船)를 몰고가려는 사람은 전부 책강(柵江)쪽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향고도 님의 지도’를 보면서
① 박망산(博望山) 앞의 주기(注記) ‘도강(渡江) 사십리(四十里) 혹이십리(或二十里)’와
② 이 박망산(博望山)과 무호(蕪瑚)가 수직선(垂直線)상에 있음
③ 대강구(大江口)에 강면팔십리(江面八十里)의 주기(注記)
④ 동서(東西)의 두 양산(梁山) 부근 책강(柵江)근처에서 강폭(江幅)이 큰 것을
음미해보면서 두 경주(慶州)를 조석수(潮汐水)와 일반적인 강의 흐름 두 가지를 활용해서 왕래(往來)하는 수로(水路)가 있었음을 음미해보도록 합시다.
(*) 향고도 님의 지도
http://cfs13.blog.daum.net/original/24/blog/2008/07/16/00/13/487cbe9bb6fcd&filename=54.jpg
이런 점을 보아도, 이곳은 두 경주(慶州) - 즉 항주(杭州)경주와 합비(合肥) 경주를 왕래(往來)하는 수로(水路)를 내되, 기존(旣存)의 장강(長江)을 타고 내려가는 수운(水運)에 방해를 하지 않는 ‘치밀한 계산’ 아래 만들어졌음을 알게 합니다.
그런데, 박망산(博望山) 앞에 까지 강폭(江幅)이 20리에서 40리로 늘릴 정도로 조석수(潮汐水)물이 에스칼레이션(escalation)되어서 올라왔음을 염두에 두면, 우리는 저 태호(太湖) 동쪽에 인위적으로 초산도(焦山島)에서 금단(金壇)까지 수직수로(垂直水路)를 만들고, 또 여기에 신강(新江)을 빼고, 태호(太湖)의 북문(北門)에 까지 직류(直流)하는 강(江)을 만들고, 이 사이에 무려 7개의 수로도(水路島)의 블록(block)을 만든 것을 새로운 시선(視線)으로 살피게 합니다.
그것은 신강(新江)을 통해서 두 겹으로 나누어지고, 합쳐서 7개나 되는 수로도(水路島)-블록(block)의 의미가 거센 조석수(潮汐水)물을 분산(分散)하면서도, 모든 물이 순조롭게 태호(太湖)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장치였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7개의 수로도(水路島) 자체가 거센 조석수(潮汐水)의 압력을 분산(分散)시키면서도 그 ‘위’에 선박(船舶)이 다닐수 있게 하는 안배(按配)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태호(太湖)의 북문(北門)과 동문(東門)를 끼고 흐르는 북천(北川)이 사실은 박망산(博望山)까지 올라가는 수압(水壓)을 모두 북문(北門)과 동문(同門)에 연결하는 장치임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7개의 수로도(水路島)로 나뉘어진 조석수(潮汐水) 압력을 낮추는 시설(施設)’에 대해서 일본서기(日本書紀) 인덕기(仁德紀) 11년 동(冬) 10월 조(條)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이 나옵니다.
(*) 이하 일본서기 인덕기(仁德紀) 11년 동 10월 조(條) 인용 (*)
원문(原文)
동십월(冬十月) 굴궁북지교원(掘宮北之郊原) 인남수이입서해(引南水以入西海) 인이호기수왈굴강(因以號其水曰掘江) 우장방북하지로(又將防北河之澇) 이축자전제(以築茨田提)
겨울 10월에 궁궐(宮闕) 북쪽의 교외(郊外)의 언덕을 파는 공사를 했다. 남(南)쪽의 물을 이끌어서 서해(西海)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로 인하여 이 강물의 이름을 굴강(掘江)이라고 하옇고, 또 장차 북하(北河)의 홍수(洪水)에 대비하게 하기 위해서 자전제(茨田堤)를 쌓게하였다.
(*) 주의(注意) 말씀 -(1) (*)
위 인덕기(仁德紀)의 궁궐(宮闕)이라 함은 바로 항주(杭州)-경주(慶州)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남수(南水)가 바로 항주만(杭州灣)에서 올라오는 조석수(潮汐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해(西海)라는 것은 합비(合肥)-경주(慶州)의 소호(巢湖)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굴강(掘江)이라는 것은 동양산(東梁山)을 뚫어서 시계(施溪)가 흘러가게한 ‘강경(强頸)의 단간수로(斷間水路)’를 뜻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북하(北河)는 바로 ‘향고도 님의 지도’에서 운하팔백리(運河八百里)라고 적힌 부분에서 항주만(杭州灣)까지의 북천(北川)을 뜻하는 것입니다.
(*) 주의(注意) 말씀 -(1) 마침 (*)
시시(是時), 유양처지축이내괴지난색(有兩處之築而乃壞之難塞) 시천황몽(時天皇夢) 유신회지왈(有神誨之曰) 무장인강경(武藏人强頸) 하내인자전연삼자(河內人茨田連衫子) [삼자(杉子) 차운(此云) 거려모능고(莒呂母能古: 일본어로 ‘고로모노고’)]
이때에 두 곳이 축대(築臺)가 붕괴되어서 막기가 어려웠다, 이때 천황(天皇)이 꿈을 꾸었는데, 신(神)이 있어 가르침을 주기를 무장(武藏)사람 강경(强頸)과 하내(河內) 사람 자전연삼자(茨田連衫子)를 찾으라고 하였다.
삼자(杉子) - 이는 ‘고로모노고’로 읽어야한다.
(*) 이하 일본서기 인덕기(仁德紀) 11년 동 10월 조(條) 인용 마침 (*)
- 각설(却說)
결국 인덕왕(仁德王)에게 신(神)이 나타나 이 공사(工事)를 맡을 두 사람이 - 그 뒤의 기록에는 제물(祭物)로 바칠 사람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음 - 거론되고 있는데, 굴강(掘江)이는 동양산(東梁山)을 뚫는 공사를 뜻하는데, 이는 강경(强頸)이 맡고, 또 태호(太湖) 동쪽의 초산도(焦山島)~금단(金壇)에 이르는 수로(水路)를 기축으로 수많은 수로를 내는 것을 자전연삼자(茨田連衫子)가 맡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자전연삼자(茨田連衫子)가 일본열도(日本列島)의 하내(河內)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좌계가 볼때에는 오늘날 월남의 ‘하노이’ 역시 한자(漢字)로는 하내(河內)라고 쓰기 때문에, ‘하노이’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월남 ‘하노이’는 홍하(洪河)라는 물이 지나가기 때문에, 치수(治水) 경험이 일본열도의 하내(河內)보다도 더 많았기 때문인 것이지요.
또 무장(武藏)이란 지역도 이 씨리즈(series)의 뒷편에 설명하겠지만, 이는 오늘날 칼리만탄(Kalimanta=Borneo)의 사마린다(Samarinda)로 보고 있습니다.
이곳 역시 마하캄(Mahakam : 우리말로 ‘위대한 영혼’이란 뜻) 강이 흘러서 삼각주(三角洲)를 형성하는 곳이기 때문에, 굴착(掘鑿) 공사가 요구되는 지형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하내(河內) 사람의 이름입니다. 자전연삼자(茨田連衫子)의 자전(茨田)의 뜻이야 이미 말씀드린대로 태호(太湖)에 상어 같은 흉어(凶漁)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 입택(笠澤)의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연(連)과 삼자(衫子)의 뜻은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
삼(衫)이란 글자는 ‘적삼’ 즉 내의(內衣)를 뜻하는데, 이는 ‘겹겹히’ 입는 옷인데, 그 앞에 연(連)을 붙였으니깐 ‘줄지어 겹겹히 입는 내의(內衣)’라는 참으로 묘한 이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삼자(衫子)에 대한 설명이 ‘고로모노고’라는 것이지요.
좌계는 일본어(日本語)에 대해서 완전한 백치(白痴)인데 이 ‘莒呂母能古(고로모노고)’를 보는 순간 “아! 이것은 고(古)-한국어(韓國語)이다. 열도(列島) 사투리를 고려해서 한반도 형으로 옮기면 ‘고루 모 놓고’이구만!!”하는 직감(直感)이 들어왔습니다.
즉 ‘향고도 님의 지도’에 보다시피, 무려 7개의 수로도(水路島)로 된 ‘모’ - 네모를 뜻함-를 ‘고루’ 즉 균등(均等)하게 배치(配置)한 것을 ‘놓고’를 이어놓은 말이라고 해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처럼 크게 보면 이열(二列)로 되어 있는 수로도(水路島)를 배치했는가?” 인덕기(仁德紀)의 표현대로 한다면, “왜 ‘고로 모 놓고’를 했는가?!”는 것이지요. 이는 무려 2개의 조석수(潮汐水)물을 에스칼레이션 하는 항주만(杭州灣)과 장강(長江) 하구(河口)의 거센 물결이 박망산(博望山)까지 올라가는 것이 대번에 ‘몰아치게 해서는’ 그 어떠한 제방(堤防)도 무너질 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선박(船舶)도 다닐수 없기 때문에, 일종의 수압(水壓)을 분산시키면서 동시에 그 모든 조석수(潮汐水)물이 태호(太湖)-단양호(丹陽湖)- 무호(蕪瑚)로 흘러들어오게 하는 안배(按配)였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 두개의 단간수로(斷間水路) 공사 때문에, 동해(東海)의 조석수(潮汐水)물은 태호(太湖)에서 시계(施溪)를 타고, 단양호(丹陽湖) 그리고 무호(蕪瑚)를 지나 장강(長江)을 건너서 유수구(濡須口)로 해서 합비(合肥)경주의 소도(蘇塗)인 소호(巢湖) - 즉 인덕기(仁德紀)에 적혀있는 서해(西海)로 들어가게 됩니다.
2. 합비(合肥) 경주(慶州)를 통해 서행(西行)하는 조석수(潮汐水)물은 홍택호(洪澤湖)에 까지 흘러 들어간다.
놀라운 것은 항주(杭州)-경주(慶州)에서 합비(合肥)-경주(慶州)로 흘러들어가는 물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놀랍게도 홍택호(洪澤湖)까지 흘러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를 살펴보려면, 심제(心濟)-선생님의 ‘합비(合肥)-경주(慶州)’의 지도(地圖)를 보아야합니다. 이 역시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의 일부분인 것이지요.
심제(心濟) 선생님은 “오늘날 합비(合肥)가 바로 경주(慶州)이다.”라는 탁견(卓見)의 글을 이 싸이트(site)에 ‘660년 나-당의 백제 침투공격로 比定.’이란 제목으로 쓰셨는데, 그곳에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의 지도를 인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심제(心濟) 님의 지도’는 매우 흥미롭게도 합비(合肥)경주 - 다시말하면 “소호(巢湖)에서 부터 수로(水路)가 어찌 나 있는가?”를 소상히 살필수가 있는 지도입니다.
일단 이 소호(巢湖)는 물(水)이 출입하는 문(門)이 4개입니다.
먼저 남쪽에 2개의 문(門)이 있기 때문에, 이를 각기 남좌문(南左門)과 남우문(南右門)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1) 남우문(南右門)은 소호(巢湖)의 동(東) 편에 있는 산(山) 유수산(濡須山) 쪽에서 저 동해(東海)의 물이 태호(太湖)-시계(施溪)-단양호(丹陽湖)-무호(蕪瑚)-장강(長江)-유수구(濡須口)로써 책강(柵江)에 까지 올라온 물이 주로 들어가는 문(門)인 것입니다.
2) 남좌문(南左門)은 유수구(濡須口)의 물이 들어가기도 하고, 또 소호(巢湖)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 남좌문(南左門)의 수로(水路)의 좌측에 녹기산(鹿起山)이 있는데, 녹기산(鹿起山)의 서북(西北)쪽의 두 산 - 위쪽의 향음산(鄕音山)과 아래쪽의 잠악(潛岳) 사이로 하나의 강(江)이 흘러나와서 소호(巢湖)의 남좌문(南左門) 수로(水路)와 합쳐져서 “한강(漢江)을 여유(餘裕)롭게 한다.”는 참으로 멋진 이름을 지닌 유한하(裕漢河)가 되어서 불(乀) 방향으로 책강(柵江)에 합류 합니다.
3) 서문(西門) - 그런데 소호(巢湖)의 서쪽에는 분수치산(分水鵄山)이라는 매우 수원(水源)이 풍부한 ‘수리-부엉이(=치(鵄))’ 산이 있는데, 이곳에서 세 갈래의 강물이 합쳐져서 소호(巢湖)의 서문(西門)쪽으로 들어옵니다.
‘심제(心濟)님의 지도’에는 이 강물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는데, 생각컨데 분수치산(分水鵄山)에서 나오기 때문에 치수(鵄水)라고 이름해도 될 듯 싶습니다.
4) 북문(北門) - 심제(心濟)님의 지도에는 소호(巢湖) 바로 북쪽에 팔공산(八公山)이 있고, 그 북쪽에 도산(塗山)남쪽에 또 하나의 팔공산(八公山)이 그려져 있어서 결국 2개의 팔공산(八公山)이 있는 것으로 그려져있습니다. (참고 : 오늘날 안휘성(安徽省)지도의 팔공산은 도산(塗山)과 연(連)이은 팔공산(八公山)을 합쳐서 팔공산(八公山)으로 표기한듯 합니다.)
그런데, 소호(巢湖)바로 위의 팔공산(八公山)위로 북문(北門)이 나있는데 신기하게도 이 수로(水路)는 둥근 원호(圓弧)를 그리면서 좌측의 분수치산(分水鵄山)의 동편과 흘러들어오는 강물이 이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읍니다. 문제는 이 분수치산(分水鵄山)에서 원호(圓弧)를 그리면서 소호(巢湖)에 바싹붙은 팔공산(八公山) 쪽으로 오는 강물이 이 원호(圓弧)가 꺽이자 마자 두 갈래로 갈라져서 흐른다는 것이지요. 즉 하나는 소호(巢湖)로 들어오고, 또 하나는 수직(垂直)으로 북상해서 팔공산(八公山)-도산(塗山)을 우측에 끼고 흐르면서 이윽고 동류(東流)하는 회수(淮水)에 합류하게 됩니다. 이 회수(淮水)는 물론 계속 동류(東流)해서 홍택호(洪澤湖)로 들어가게 되겠지요.
그렇기는 하지만 분수치산(分水鵄山)에서 흘러나온 이 강물의 이름이 비수(肥水)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ㅏ’처럼 흐르는 강을 한문(漢文)에서는 과강(戈江)이라고 붙이는 경향이 있는데, 비수(肥水)는 전형적인 과강(戈江)인 셈인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분수치산(分水鵄山)에서 나와서 북류(北流)해서 회수(淮水)와 만나는 강을 비수북하(肥水北河)로 또 남류(南流)해서 소호(巢湖)로 들어오는 것을 비수남하(肥水南河)로 이름지어 구분해 줄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이제 심제(心濟)님의 지도를 통해서 ①남우문(南右門)과 유수구(濡須口) ②남좌문(南左門)가 유한하(裕漢河) ③ 서문(西門)과 분수치산(分水鵄山)및 치수(鵄水) ④ 북문(北門)과 비수북하(肥水北河)및 비수남하(肥水南河)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 심제(心濟)님의 지도(地圖)
http://www.coo2.net/bbs/data/new_con_4/shilla_tang_assault_route.jpg
이런 ‘심제(心濟)님의 지도’와 ‘향고도 님의 지도’를 연결해서 생각하면, 조석수(潮汐水)의 물이 결국 태호(太湖)로 들어와서 시계(施溪)를 통해 단양호(丹陽湖)-무호(蕪瑚)-장강(長江)-유수구(濡須口)-소호(巢湖)의 남우문(南右門), 남좌문(南左門)으로 해서 - 북문(北門) - 비수남하(肥水南河)-비수북하(肥水北河)-회수(淮水)-홍택호(洪澤湖)로 들어감을 알수 있읍니다.
이 <홍택호(洪澤湖)는 또다시 고우호(高郵湖) - 한강(韓江) - 장강(長江) -동해(東海)>로 빠지는 거시적 씨-턴(C-tern)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안휘성(安徽省) 지도를 보면, 그 대체적인 윤곽이 명확히 들어나는 것입니다.
(*) 거시적 씨-턴(C-tern)을 살필수 있는 안휘성(安徽省) 지도
http://parkchina.com.ne.kr/map/anhui.JPG
여기서 우리는 대운하(大運河) 건설이 단순히 대운하(大運河)만이 아니라, 이처럼 ‘두 경주(慶州)를 있는 수로(水路)를 통해서, 조석수(潮汐水)의 물을 타고, 거시적 씨-턴(C-tern)하는 수로(水路)와 이어짐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이 복잡한 수리작용(水理作用)을 한 눈(眼)에 꿰고 일이관지(一以貫之)하게 공사를 설계및 설계변경할수가 있었단 말인가?!”하고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그런데 ‘고구리 사초’에 의하면, 이 ‘일을 해내는 배달화백(倍達和白)을 통한 시험(試驗)’을 거쳐서 등장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태왕(太王)의 어머니이신 천강후(天罡后)인 것이지요.
(좌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