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핀다 적고 꽃 진다 노래하는 역설의 풍경과 봄날의 진실 죽음의 빛으로 생의 이면을 비추는 박해람 시인이 9년 만에 선보이는 두 번째 시집 “이미지의 돌연한 결합과 통사의 생산적 혼란이 속출하고, 인간과 자연이 기이하게 한 몸이 되는 이종교배의 현장” -이영광(시인 정교한 관찰력과 견고한 묘사력으로 정평 난 시인 박해람의 두 번째 시집 『백 리를 기다리는 말』이 민음의 시로 출간되었다. 첫 시집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 가는 사내』가 삶의 다양한 오브제로 죽음에 대한 상상과 성찰을 표현했다면 『백 리를 기다리는 말』은 봄날의 풍경에 집중해 죽음이라는 주제를 드러낸다. ‘백 리를 기다리는 말’, ‘독설’, ‘피크닉 트레일러’ 등 3부로 구성, 모두 60편의 시를 담은 이번 시집은 만개한 꽃이 낙화하는 봄날의 풍경을 극도로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거짓 같은 언어로 표현했다. 만물이 탄생하는 생명으로서의 봄이 아닌 절정을 지난 것들이 소멸하는 죽음으로서의 봄에 주목, 아름다운 봄날에 숨겨진 진실한 풍경을 특유의 묘사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풍경화와 추상화의 매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박해람 시의 절정을 맛볼 수 있는 시집이다. ■봄, 죽음의 계절 박해람 시에서 봄은 독자적이다. 겨울 다음에 오는 것도 아니고 여름 앞에 오는 것도 아니다. 『백 리를 기다리는 말』에서 봄은 오직 꽃이 진다는 점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눈물 같은 개화가 절정에 이른 때이기 때문에 봄인 계절, 살아 있는 것들이 자기의 생명을 끌어올릴 대로 끌어올려 그 정점에 이를 때 터져 버리기 때문에 봄인 계절, 결코 말릴 수 없는 개화들을 속절없이 지켜보아야 하기 때문에 봄인 계절. 생명의 이미지에서 죽음을 부르고 미(美)의 이미지에서 추(醜)를 발설하는 박해람의 시는, 눈에 보이는 ‘시작’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끝’을 보는 견자의 언어이자 피안의 문학이다.
모든 눈물은 소용돌이를 거쳐 나온다. 너무 추운 철에 핀 슬픔 다 마르면 뚝, 하고 떨어지는 가장 먼저 흘리는 꽃이라는 봄날의 눈물 -「봄날, 꽃이라는 눈물」에서 ■암흑을 묘사하는 시 삶의 뒷면에는 죽음이 있다. 뒷면일 뿐이므로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다. 둘은 동시에 존재하고, 그러므로 우리는 두 세계를 모두 살아야 한다. 한 발짝 살고 한 발짝 죽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시인이 이쪽을 보며 저쪽을 노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벚꽃 나무의 고향은 이쪽의 봄이 아니라 저쪽의 겨울’ (「벚꽃 나무 주소」)이 되고, 박해람 시를 읽는 우리 또한 소생의 계절에서 일생의 끝을 보게 되는 시인의 눈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검정, 암흑에 대해 묘사하면서도 그것을 하나의 색깔로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은 삶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긍정의 시선에 다름 아니다. 암흑의 핵심에는 절정의 빛이 있다는 것을 60편의 시가 말해 준다.
벚꽃 나무의 고향은 저쪽 겨울이다. 겉과 속의 모양이 서로 보이지 않는 것들 모두 두 개의 세상을 동시에 살고 있는 것들이다 봄에 휘날리는 저 벚꽃 눈발도 겨울 내내 얼려 두었던 벚꽃 나무의 수취불명의 주소들이다 -「벚꽃 나무 주소」에서 ■작품 해설에서 『백 리를 기다리는 말』은 꽃이 만개하여 지는 계절을 담은 시집이다. 꽃이 무르익었기에 만춘(滿春)이되 꽃이 이미 다 졌기에 만춘(晩春)인, 어쩔 수 없이 피어나 허공에서 흔들리고 결국에는 분분히 떨어지는 이 지상의 모든 존재들, 죽음의 장 위에서만 찬란하게 빛나는 이 환한 날들이 충만하게 담겨 흔들린다. — 박슬기(문학평론가 ■ 추천의 말 꽃과 나무와 벌 나비의 공방에 “바람”의 공장(工匠)이 산다. 누구도 돌보지 않는 낡은 자연과 더불어 그는 백 리 밖으로, 혹은 제 마음의 백 리 깊이로 물러나 있다. 몸피에 어울리지 않게 섬섬옥수를 쥔 이 ‘쟁이’는, 문명의 뒤켠에서 주워 모은 조수충어(鳥獸蟲魚)들을 지극정성으로 매만진다. 그래서 속절 무성한 현실의 백 리 허를, ‘늑대의 꼬리가 몸을 저어 가듯’ 오가며 무수히 바람의 붓질로 물들여 놓는다. 그가 낯익은 유추를 거부하므로 우리는 오래된 관념들이 더 오래된 사물들과 자리를 바꾸고, 인간과 자연이 기이하게 한 몸이 되는 이종교배의 현장을 보게 되는 것. 이 현란한 상상력의 비거리들 안에는 이미지의 돌연한 결합과 통사의 생산적 혼란이 속출한다. “몇 개의 단장이 지나간 흔적” 둘레에 가시 울을 치고, 위리안치 속에서 바깥의 모진 “악필의 문장”들을 견뎌야 하는 박해람 공방의 전언은 그러나, 심중하되 비근한 마음의 안부이다. ‘오십 리를 기다리다 오십 리를 마중 나가는’ 발걸음이 그러하고, 이편에선 ‘가는 길을 지우고’ 저편에선 ‘오는 길을 지워야’ 하는 쓰라린 단념 역시 그러하다. 이것은 우리가 줄곧 다른 말로, 그리움이라 불러 오던 것이다.—이영광(시인)
짐짓 풍경과 거리를 두고 있는 척하지만 진득하게 한 몸이 되어 시인만의 난전(亂廛)을 펼쳤다. 누군가에겐 독설로 들리고, 누군가에겐 연서로 읽힐 것이다. 다만 이 척서(尺書)는 쉽게 해독되지 않는 기질이 있다. 자연과 인간, 시절과 지점을 문어와 구어가 어우러진 절조로 엮어, 오십 리를 착목하다 보면 다시 오십 리를 탐독하게 되는, 그렇게 백 리를 기다려야 시인의 심중을 얻을 수 있다. 은연중 허무의 화색을 내비치는 시편들인 것이다. 시인이 “저 왁자한 며칠은 죽은 이로부터 빌려 오는 기간이 아닐까”라고 말했을 때, 봄날 “꽃가루의 효능은 허튼 꿈”이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얼마만큼 부정할 수 있을까. 묘약도 없이 시인의 미열을 짚으며 “병서”를 읽는다. —윤의섭(시인) 기사입력 : 2015-04-02 ㅡㅡㅡ목차ㅡㅡㅡㅡㅡㅡ 1부 백 리를 기다리는 말 흑점 적란운-가와바타 야스나리풍으로 단장(斷腸) 백 리를 기다리는 말 자살하는 악기 묘(猫)의 방식으로 집필 사탕처럼 천천히 녹는 여름 살(煞)-하루에 세 번 살이 있다. 길을 가리킬 때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몽둥이는 왼손으로 옮겨 잡고 오른손으로 길을 가리켜라
견족(犬足), 꽃 화무삼일홍(花無三日紅) 앙상한 서명-혜미에게 봄날, 꽃이라는 눈물 이름이 붙은 거리(坡州)-나혜석전(傳) 오르골 몽몽(夢夢) 울음 테이블 여행목(旅行木)
2부 독설 독설-지나간 다정함이란 곁의 어린 쓸쓸함만도 못하다 나는 내 독설에 기대어 견디는 중이다
척독삽입춘서(尺牘揷入春書) 살구나무 달력 병서(病書) 악필(惡筆) 배꽃을 불러 달을 본다 식목일 선풍기(禪風機) 침사 변 씨 물집 화풍여울 저울 괴로운 어둠 소름 발효의 귀 척독(尺牘) 흘리다 봄 구름 치어 창문을 눕히려 눈을 감는다
3부 피크닉 트레일러 입춘(立春) 메리 여왕이 보낸 장지(葬地) 예전 애인 왼쪽의 습관 피크닉 트레일러-벌판에 피크닉 트레일러 한 대가 나무에 묶여 있다. 나무는 벌판에 묶여 있은 지 오래, 저것들은 언제 사라진 피크닉들일까? 지난여름에 두고 온 일 육손이 꽃밭 나뭇잎이 떨어져서 폐광경(廢鑛景) 붉은 감자밭 나무 여자 화장(化粧) 누가 내 한기를 위해 다독을 덮어 줄 것인지 벚꽃 나무 주소 월하정인(月下情人) 망가진 구름 독설-눈과 귀는 한길을 왕래한다고 한다. 입은 지름길이고 먼저 건너간 말〔言〕 의 등에는 삽날이 찍혀 있다고 한다.
작품 해설
화농(化膿)의 계절에서 온 편지 _박슬기(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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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리를 기다리는 말 ㅡ박해람
로사리오묵주를 넘기는 손 안의 말들이 다섯 마디로 역은 환環 고리가 없는 말들이 묵주를 따라 돈다. 화관花冠을 쓰고 있는 시간, 귀머거리 암송暗誦이 늙은 교회력들이 마당을 쓸고 있는 공소空巢는 지금 피정에 들어있다
장미콩이 여물어가는 당나귀의 잔등 비스듬히 누워있는 미사시간이, 포도주가 시큼하게 상해가는 코르크마개의 안쪽 신부가 없는 계절을 빌려 바람은 타인他人 그늘은 정인情人 이라는 푯말을 걸고 묵언 중인데 당신은 백리 밖에서 말을 하고 당신의 백리 밖에서 나는 오독이 묻어있는 말을 듣는다.
저자著者가 여럿인 암송을 묵언으로 읊조리고 있다 생각이 달려 있는 기도는 오래된 종교이겠지 계절이 있는 질책을 들었다면 너, 어느 벽돌기둥의 모서리에 가려지지 않았겠지 어둑한 말의 모양을 두 손에 받아들고 백리를 기다리는 말이나 돌보고 있다고 말 잔등을 보내겠다고 측은한 피정 중이라고, 측은한 가명을 한동안 쓰고 싶었다. 여름의 타인보다 겨울의 정인이 더 그립다.
오 십리를 기다리다 오 십리를 마중 나간다. 외면하는 첫마디를 베고 쉬겠다.
생일에 정한 성인聖人의 거푸집, 양쪽의 눈을 닮은 밀떡이 입안에서 녹아간다. 듣는 말로 세례를 받고 기생妓生의 이름으로 냉담중이다.
웹진 『발견』 2012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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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점 ㅡ박해람
풀밭에서 너와 뒹굴 때 거기 연보라 꽃이라도 있어 몇 날 며칠 물이 들어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꽃의 온 얼굴이 터져
훗날 아무리 빨아도 빠지지 않는 얼룩처럼 버리지도 못하고 그러나 그 기억이 좋아 매일 입고 싶은
연보라 흑점같이 그 어디쯤 그 언제쯤 영원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독과 같은 이빨자국
보이지 않는 곳의 상처들은 다 독과 같은 이빨에 물린 것들이어서 그때 한번쯤 죽은 것들이어서
연보랏빛 문신같이 몸에 남아 있는 것들
안 보이는 곳의 흉터는 안 보이는 것이 와서 문 것.
시집 ㆍ백 리를 기다리는 말ㆍ2015. 민음사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묘(猫)의 방식으로 집필
박해람
고양이의 집필은 비스듬하게 모로 누운 방식, 꼬리에 봄볕을 찍어 쓰면 거만한 자음들이 아지랑이처럼 곤두서던 봄. 꽃들의 획수를 편집하거나 고양이 꼬리의 오타를 수정하는 일에 고용됐었지. 철자법 없이도 나뭇잎들이 돋아나고 혼자 놀고 있는 묘(猫)의 꼬리는 몸통을 자주 속였지. 아마도 서로가 외연(外延)이라고 여겼던 것 같아. 비스듬히 누워서 번역체 햇볕을 데리고 놀던 꼬리 파지마다 글자들이 웅크려 있고 엄지와 검지를 벌려 책의 분량을 정했지.
볼펜을 열면 스프링대신 고양이 꼬리가 감겨 있었지. 가끔 잉크가 나오지 않는 꼬리도 있었거든.
털 있는 것들은 다 붓 같다. 뒹구는 곳마다 가려운 흔적이 떨어져 있는 파지 눈을 가로로 혹은 세로로 뜨는 족적(足跡)을 새기고 담장 밑 봄은 천천히 굳어갔지.
심심한 수염, 혼자 놀고 있는 꼬리의 집필.
비릿한 줄 간격을 쓰고 까끌까끌한 필체까지 묘(猫)의 방식으로 집필한 수염의 자서전. 햇볕은 난간을 지나가고 검은색에 흰 털이 듬성듬성 박힌 봄, 또래가 없이 꼬리를 끌고 다니는 스프링의 몸통. 거만한 간격의 줄거리가 낱장으로 울어대던 봄 밤.
채마밭이 딸린 마당이 백이십페이지 분량으로 묶이고 떨어진 꽃들을 주워 마침표로 사용했지.
채마밭은 훼손되었고 배추흰나비들이 읽다만 페이지처럼 접혀 있었지. 묘(猫)의 방식으로 집필한 책은 난간이라는 제목.
시집 『백 리를 기다리는 말』2015. 민음사
식목일 ㅡ박해람 비닐에 싸여 한구석에 보관된 어린 묘목 그림자를 가져 보지 못한 아이는 맨몸으로 마당을 서성이고
방 안에서는 의논이 분분하고 새벽 우물물 마시러 마당에 나왔다가 한참을 잡혀 묘목의 이야기를 듣는 내 그림자 발음도 없이 움트는 말들이 내 그림자에 흰 소름을 툭툭 틔어 내던 난데없음이 몸에 나이를 주고 가던 시절 배꽃이 새로 배운 봄밤 하나를 툭 피워 내던, 앞뒤 잘린 나뭇가지가 잎을 톡톡 피워 내던.
배꽃은 제 그림자가 없는 꽃이고 배꽃이 피는 시절은 잎이 없다 바람에 지지 않는 꽃 제 환함에 놀라 떨어지는 꽃 배꽃.
다음 날 우리 식구들은 그 어디에도 나무를 심지 못했다. 다만 물오른 나무에 동생을 태워 보냈을 뿐이다.
밝은 것들일수록 그림자가 깊다 세상 어디에도 심겨진 적이 없는 나무의 그림자. 날짜를 따라 옮겨 다니던 어린 그림자. 마당을 떠나지 못하고 밤마다 칭얼거렸다
들뜨는 일요일 들뜨는 저 땅속의 것들 연두도 아닌 단지 흰 꽃의 시절에 멀리 간 동생이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훈자, 강릉 ㅡ박해람
동쪽에서 도망치고 청춘이 되었다.
청춘에서 헤어진 사람들은 모두 유족 같다.
삼거리마다 혐의가 날뛰고 골짜기의 검문을 받았다. 너무 외로워 여학생들의 하교 길에 서 있었던 그때처럼 살구꽃그늘에나 깔리는 모포처럼
바람 불면 살구나무들마다 화르르 꽃으로 꼬리를 치는
훈자, 무슬림 소녀 같은 봄.
대자보들은 동쪽 해안의 캠퍼스에서 뜯겨졌다. 중부中部에 서서 이쪽으로 혹은 저쪽으로 기울어지고 싶었다. 그 덕에 시인이 되고 훈자에 도착해서 한 마리 여우가 돌아다니는 시를 쓰고 있다.
여우는 을씨년스러운 환유換喩 코끝으로 타협하고 꼬리로 우아하게 꽁무니를 뺀다.
웃음은 모두 초면인데 좁은 창문 한 귀퉁이로 내다보는 부끄러운 유족들. 늙은 살구나무에게 물어보면 첫사랑을 빼앗는 왕처럼 5월이 곧 올 것이라고 귀띔한다.
반군들이 흘리고 간 좌표도 없는 허공으로, 4월의 살구꽃으로 도망치는 훈자, 혹은 강릉.
계간 『시와 표현』 2015년 2월호 발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장미과 (薔美科) ㅡ박해람
담장 안 과실나무엔 넘겨보는 꽃들이 피고 목책(木柵)안 과실나무엔 흔들리는 녹슨 철조망의 색깔이 피어나지 우리는 장미과 계절에 있었던 아접(芽接)의 사이였지
해충 약을 뿌리는 담장 안 살구나무 숲이라는 병을 앓고 있었지 시큼한 침을 발라 놓고 하루 종일 누군가 풋과일을 훔쳐갈 순간을 기다렸지 다만 똑, 하고 딸 줄은 알았지만 그냥 흔들고 갈 줄 몰랐지
언젠가 행림(杏林)에서 버려진 흰 붕대를 주워 들고 살구꽃 떨어져 날아가던 방향을 취한 것이 잘못이었다.
목관(木棺)을 소재로 과실나무를 돌보는 기대 연약한 가지들로 짜 맞춘 관엔 오르지 않고 누울 수 있지 익기 전에 사라진 열매는 후일 목관의 열쇠가 될 것들이었지
시큼한 자물통들만 득실거리는 담장 안 여름의 맛으로 낙과들이 배회하는 중
모든 과실은 뒷모습의 맛으로 떨어진다. 질투로 사람을 잃었고 질투로 다년생 봄을 얻었지 징후로 머물다 간 제꽃가루받이 시기
오래 괴고 있던 설골(骨)과 여섯 개의 귓속뼈를 인가(人家)의 담장 안에 심는다. ㅡㅡㅡㅡㅡㅡㅡ
술독
박해람
얼굴에 술독을 묻어두고 몇 년을 살았다. 가장 먼저 취하는 부위에 표정을 박아놓고 허튼소리를 느슨 한 뚜껑으로 밀봉해 놓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열 두 걸음 딱 그쯤에 묻어놓은 술독이 있다.
머리카락 속에서 빼낸 손으로 얼굴을 문지를 때 혹은, 추워서 몸의 가장 먼 곳의 뼈들조차 덜덜거릴 때 술병의 윗부분부터 취하는 방법을 알아냈을 때 부모의 지도(指導) 없이 배운 것들은 다 헝클어진 위안이 되는 것을 알아챘을 때 가장 아름다운 치맛단이 지나가는 곳에 묻어놓은 휩쓸린 얼굴이 있다.
먼 곳의 친구는 새로 배운 외국어로 욕을 했다 양귀비꽃에다 술을 부어놓으면 술독은 스스로 뚜껑을 열고 닫을 줄 알아서 꽃의 향기는 수시로 술독을 비우고 그때 따라 마신 술은 스스로 발효되며 취하는 얼굴이 된다. 도수(度數)는 온도(溫度)여서 얼굴이 덥다.
가끔 묻어두고 찾지 못하는 술독이 있다 우리는 몇 마디 말에다 술을 부어놓았었다. 보폭으로 묻어 놓은 취기가 시큼해졌을까 표식으로 꽂아두었던 더운 날씨는 저 밑까지 침전. 아름다웠던 치마의 무늬들은 휘발성으로 날아가고 없다.
술은 자꾸 말을 휘젓는다. 휩쓸린 관계와 휩쓸릴 줄 아는 관계를 칭송했었다. 술이 깨는 방향으로 맹숭맹숭 돌때가 더 어지럽다. ㅡㅡㅡㅡㅡㅡㅡ
이정도 물살이면 물고 물리는 일이 벌어진다. 지루한 물살, 이곳은 송어들의 식민지 초장은 한여름 맛이고 스프링을 달고 삐걱거리는 물살은 질기다
강들은 죄다 내리막이고 물소리들은 오르막이다
천만에, 한마디 궤적 속으로 숨는 새 새는 아무리 세게 발음해도 새 나무들이 풀쩍 뛰어올라 새들을 물고 첫 번째 가지로 돌아가는 미끼들이 날아다니는 물가 흐르는 물살에 물린 무릎 안간힘을 쓰는 물살은 무릎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휘청거리는 무릎, 송어들은 춤추는 것들을 잡아먹는다.
매듭진 곤충들 새의 깃털로 만든 날벌레로 진짜 송어를 잡는다. 물살은 부서지다 여울에서 산란한다.
웹진 『시인광장』 2015년 1월호 발표 ㅡㅡㅡㅡㅡㅡㅡㅡㅡ
왼쪽의 습관 ㅡ박해람
습관이 있던 곳은 분주했던 부위라는 뜻 비스듬히 앉아 옆자리를 누이던 무릎의 달이 있는 곳 하지만 왼쪽은 손을 놓치기 쉬운 곳 밤이면 왼쪽의 풍치들은 다 날아가고 울음이 썩어 참을성이 되는 곳 왼쪽부터 천천히 굳어가는 파악들
헛구역질을 흘리는 흰 나무들의 들썩임. 한쪽의 습관을 천천히 풀어 버리듯 봄은, 흘리는 것들의 제철이다 불편에 기대었던 갸우뚱, 꽃송이들을 흘리는 나무들에게 물었다 고작 이 점파點播의 편애를 위해 기울어졌냐고
오른쪽 손가락을 떠난 셈이 왼쪽 손을 돌아오는 철 가성假聲으로 부르는 모든 노래에는 왼쪽의 후렴이 없다
한쪽의 고민으로 둥둥 떠오르는 그늘들 바뀌는 계절에는 바뀌는 의미가 적당하고 고개를 돌려 한쪽으로 꽃을 흘리고 있는 왼쪽의 습관 밑에는 너무 먼 곳까지 다녀온 상상이 쌓여 있다 흔들린 불빛으로 수놓은 무늬의 달 밤새운 불안이 모여 있는 왼쪽의 습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10년 5-6월호
싱싱한 삐걱거림 ㅡ박해람
모든 존재의 마지막 소리는 삐꺽거림이다. 작은 소리들을 갉아 길을 내었을 낡을 대로 낡아 틈이 벌어진 저 규격품들 그러나 어찌 보면 저것들의 생에 있어 지금처럼 큰 소리를 낸 적이 있었던가. 견고하게 맞추어져 어떤 불평이나 신음도 내지 못했던 얇은 세상의 신음 소리 같았던 날들 이제 세상의 틈과 틈이 생겨 거기 소음의 꽃이 피어나는 중이다.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던 것들에게서 소리가 난다는 것은 그 속에 한 세상이 생겼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쉬지 않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저 老人에게도 이제 곧 길고도 긴 한 세상이 온다. 그러니까 모든 것들의 끝에서 나는 소리들은 싱싱하다.
물 속의 주소 / 박해람
바람이 불지 않는 마을이 있다 그곳의 주소는 이미 퉁퉁 불어 터진지 오래 어쩌다 생각나서 들어올리며 꽤 많은 양의 옛 일들이 물처럼 줄줄 흘러내린다. 사람에서 어족魚族으로 변신한 이들이 아직 살고 있는 곳 마치 새로운 종족처럼
그곳을 떠나온 지 꽤 많은 시간들이 흘렀지만 여전히 나의 바탕 무늬는 그곳이다. 지독한 물안개로도 피워 올리지 못하는 이 도시의 내력 같은 것들도 전망 좋은 저 창문의 바탕색으로 흘러간다. 금세 채워지는 수면 아가미가 이미 생겨나는 사람들도 있다 물음표 같은 아가미로 강둑 여기저기로 부딪히는 소음을 조용히 듣는다. 탁한 흙탕물이 서서히 맑아지는 도시의 새벽 이 진공의 도시는 금방 폭발해 버릴 것 같이 무덥다. 곧 해일이 밀려올지도 모른다.
도시의 모든 번지들이 물에 씻겨나가면 사람들은 새로운 이주를 시작할 것이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 이제는 낚시터가 되어 버려 도시로 승격하지 못한 옛 마을을 들여다본다 저 사람들이 낚이길 기다리는 것은 그들의 새로운 주소일 것이다
벚꽃 나무 주소 / 박해람
벚꽃 나무의 고향은 저 쪽 겨울이다. 겉과 속의 모양이 서로 보이지 않는 것들 모두 두 개의 세상을 동시에 살고 있는 것들이다 봄에 휘날리는 저 벚꽃 눈발도 겨울 내내 얼려두었던 벚꽃나무의 수취불명의 주소들이다 겨울동안 이승에서 조용히 눈감는 벚꽃 나무 모든 주소를 꽁꽁 닫아두고 흰빛으로 쌓였던 그동안의 주소들을 지금 저렇게 찢어 날리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죽은 이의 앞으로 도착한 여러 통의 우편물을 들고 내가 이 봄날에 남아 하는 일이란 그저 펄펄 날리는 환 한 날들에 취해 떨어져 내리는 저 봄날의 차편을 놓치는 것이다
벚꽃 나무와 그 꽃이 다른 객지를 떠돌 듯 몸과 마음도 사실 그 주소가 다르다 그러나 가끔 이 존재도 없이 설레는 마음이 나를 잠깐 환하게 하는 때 벚꽃이 피는 이 주소는 지금 봄날이다.
실종 / 박해람
세상에, 세상에 이렇게 많은 틈이 있다니! 오로지 사라지는 곳은, 사라질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 뿐 이라고 믿어 왔는데 세상의 모든 틈에게 경배하는 날이 있을 줄이야 도대체 어느 쪽으로 발길의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 수없이 많은 곳을 기웃거리는 저, 마음들을 어떻게 불러모아야 하는지 어느새, 어느새 에 숨어 있는지 바람에 날리는 전단지 전봇대에 붙어 자기 자신을 찾고 있는 내용들이라니 모든 흔적들에게 애원하는 날들이라니 목적지가 없는 실종이라니
실종이란 말속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또 얼마나 존재하는 것인지 그 어떤 교통편으로도 방문할 수 없는 地名이 있다니 마음에 눈 붙여 놓고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지명이라니 목숨 붙어 있는 이 끔찍한 죽음이라니.
계간(시와세계) 2005. 봄호
그늘 / 박해람
오전, 한 낮에 땅속에서부터 넓은 그늘이 배어 나오고 있다. 나무가 평생 키우는 것은 그늘이다.
맨몸으로 서있던 나무 그들의 생각은 늘 나선형이었다 몸 속의 나이테를 빙빙 돌고 돌아도 몸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들 더러는 더 오를 곳 없는 허공에다 참았던 현기증을 터트려 놓기도 하지만 용수철 같이 말아 올리다 결국 끝을 잃어버린다. 잃어버린 모든 것들은 그늘이 된다. 잠깐의 반짝임도 없었던 세월이나 어쩌다 튀어나온 불가항력의 결정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팔목같은 것들 눈물 찍어내던 손등도 훌륭한 그늘이 된다.
평생 따가운 햇볕이었던 아버지
허공의 무게 / 박해람
허공의 천직은 무게를 가늠해 주는 일이다. 그 허공에 제 피붙이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무들 흔들리는 것들에게는 그래서 사족이 있는지 작은 놀이터에서 딸아이와 시소를 타다가 서로의 무게가 맞지 않는 시소를 타다가 내 무게를 점점 빼앗아가고 있는 저 쪽의 싱싱한 무게.
넘치는 지금의 무게를 아무리 덜어주어도 좀처럼 가라앉지 못하는 시절이다 붕붕 날아오르려고만 하는 아이의 무게 나무 울타리 넘어 한 생을 보여주려고 아이의 무게를 빼앗는 일보다 덜어주는 일이 더 힘들다는 것을. 아이는 자꾸 오르기 위해 낮은 쪽으로 내려가길 원하고 아비는 저 높은 곳이 허방인지 분간도 못하는 이 속고싶어지는 놀이 속아 주려고 해도 잘 속아지지 않는 놀이터 풍경
허공의 천직에 수고만 더 얹혀줄 뿐인 이 놀이.
2005. 11월호. (현대시학)
환풍기를 켜두고 잠들었다 / 박해람
내가 잠든 사이 몸 속에서는 환풍기가 돈다 낡은 배선을 따라 잠들지 못한 꿈들은 누전되고 환풍기는 깊은 음각으로 박혀있는 시절들을 밤 새워 소리 없이 뽑아낸다 일그러지는 화면의 무성영화처럼, 자막도 없이. 나는 잠 속에서 난수표같은 번호표를 손에 들고 접선해 오는 그 환등기 불빛 같은 시절을 뿌리치지 못한다 감탄사가 찍혀 있는 문장이나, 환호성의 장면에 무단으로 맡겨 놓았던 기억들 너무도 많은 밤들이 예약되어 있다 ……환풍기는 계속 돈다.
꿈은 너무도 흔한 표절이다 내가 지나온 태반과 닮았고 미래와도 같다 그러나 끊임없이 벽 밖에서 끌어당기는 압력에 툭, 하고 터지는 몸 몸 밖에 나와 만나는 꿈들은 너무 희석되어 있다 ……환풍기는 계속 돈다.
잔뜩 흐린 밤이면 더욱 나는 대기권 밖에서 잠들고 싶다
미확인 비행물체 / 박해람
李氏 喪家 마당에 아침부터 미확인비행물체가 조립중이다 이 마을 오랜 전통으로 세상과 세상을 오가는 비행물체 소금을 말에 싣고 설산과 협곡을 돌아 장사를 나가는 티벳의 마방들처럼 아주 슬픈 엔진소리를 내며 서서히 공중부양을 한다 하늘과 땅을 동시에 지나야만 갈 수 있는 그곳을 향해 다 풀고 가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승객의 조립된 이승이 저 안에서 서서히 풀리고 있을까
잠시 고였다 떨어지는 눈물 같은 승객의 일생, 그 염기가 남겨진 이들의 일상에 얼마 동안이나 간을 보탤지 슬픔도 그저 소음일 뿐인 승객에게 배웅 객들이 꽂아준 몇 장 지폐의 효력이 끝나는 곳에 그곳이 있다
가끔 나타났다 사라지는 비행물체 한 번도 승객은 걸어서 타고 걸어서 내린 적이 없다 사람의 뒤로만 왔다가 꼭 사람의 앞으로만 사라지는 승객들 왔다간 일이 소문으로만 남아 있을 지구의 지층이 되는 일만 남은
마을에서는 한 사람이 사라질 적마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미확인 비행물체 잠시 내려앉았다 간 포도밭 한 귀퉁이에 새로 생긴 저승이 동그랗게 솟아 있다
잎이라는 말 / 박해람
바람과 가장 절친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잎이라는 말일 것이다. 이 엽록(葉綠)의 프로펠러들이 없었다면 바람은 날아오르는 종족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듯, 서로가 서로를 닮아가듯, 서로의 무거운 그늘이 햇빛을 털어주는, 아니, 서로가 할퀴는 절친한 것들의 흔들림
나라는 잎 바람에 속아서 너무 빨리 팔랑거렸다 그러고 보니 바람과 가장 불편한 말이 있다면 그것 또한 잎이라는 말이다.
버들잎 경전 (經典) ㅡ박해람
물가에 버드나무 한 그루 제 마음에 붓을 드리우고 있는지 휘어 늘어진 제 몸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휙휙 낙서를 써 갈기고 있다 어찌 보면 온통 머리를 풀어헤치고 헹굼필법의 머리카락 붓 같다 발 담그고 머리 감는 갠지스 강의 순례객 같기도 하고.
낙서로도 몇 마리의 물고기를 허탕치게 하는 재주도 부럽고 낙서하기 위해 몇 십 년을 허공으로 오른 다음에야 그 줄기를 늘어뜨릴 줄 아는 것도 사실 부럽다
쓰자마자 지워지는 저만 아는 낙서 경전(經典) 지우고 또 지우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지며 흐를 뿐이지만 물 묻은 제 마음이 물 묻은 제 문장을 읽는 제가 저를 속이는 독경(獨經)
지구의 모든 문장이 저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참 대책 없다
시집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 2006년 랜덤하우스중앙
벤치 나무/ 박해람
잎들이 무성했던 저 벤치 나무는 이제 뿌리의 계절로 주소를 옮길 철이다 너도나도 한번쯤은 다들 앉았다 간 이파리 위에 감당했던 무게가 반질반질하다 뿌리를 불러올렸던 저 돌기둥이 뿌리의 세상보다는 잎의 시절에 집착하는 동안 저 벤치 나무는 아무도 몰래 진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중이다 스스로 그늘을 키우고 싶어하는, 늘 그늘에 얹혀 살아야 하는 저 벤치 나무에게는 평생의 바램이었을 것이다 아무도 몰래 한밤 볼트를 풀고 식물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일 언젠가는 우리 서로 만날 일이 있겠구나
땅 밑의 공사가 한창인 시간인가 삐걱거리는 소리의 잎을 피워내는 벤치 나무 소리의 철이 지나 생겨나는 잎들은 낯설다 저 밑에 따듯한 시간들이 아직 있는지 군데군데 푸르다 무거운 이름 몇 개를 내려놓고 잠깐 앉았다 일어난 그 자리가 새삼 따뜻하다 좋은 이웃 하나를 미리 알아두었다
시집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 2006년 랜덤하우스중앙
천공의 성(城)라퓨타 / 박해람
동사무소 이층 복지회관 러닝머신 위를 몇 명의 여자들이 걷고 또 걷는다 넓은 통유리가 마치 일생의 한 화면 같다. 아침까지 갔다가 다시 통유리의 넓은 저녁으로 돌아오는 유영 38, 29, 50, 17, 다양한 나이와 문수의 걸음들이 걷고 또 걷는다 아무 목적지도 없는 걸음 다만 몇 킬로의 또는 몇 그램의 일생을 줄이며.
라퓨타. 가끔 구름 속을 나와 유영하는 성(城) 어디에도 없는 내 몸에 꼭 맞는 내 몸을 찾는 사람들 둥둥 떠서 아니, 둥둥 걸어서 끊임없이 걷고 또 걷는 그러다 남편의 귀가 시간이라는 역에, 끼니때라는 지상의 역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걷고 또 걷는. 앞도 뒤도 없이 그저 흘러갈 뿐인 풍경 지상에서 망가진 것들의 구름 같은 오후를 가는 일도 없고 되돌아오는 일도 없는 그저 유영하는 저 악착같은 걸음들, 둥둥 떠가는 동사무소 이층 천공의 성 타이머에 맞추어진 길의 시간을 걷고 또 걷는 단 한 번도 지상에는 내려서지 않겠다는 듯 러닝 벨트 위를 규격품처럼 걷고 또 걷는, 불쌍한 승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