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현전(1420)
1. 과거의 역사를 살펴보면 나라를 잘 다스린 지혜로운 군주들은
문헌(文獻)의 보고인 도서관을 설치하고 이를 통치의 지혜를 짜내는 도구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도서관이 그들 성제명왕(聖帝明王)의 제반 정책을 산출해내는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세종조(世宗朝)에 있어 지혜의 원천이었던 집현전은 당시의 문헌 센타 즉 도서관적 기능을 가진 기관이었다.
2.집현전
2.1.집현전의 뿌리
집현전이라는 이름을 처음 쓰게 된 것은 중국 당나라 현종 때였다.
그리고 집현전이란 이름을 가진 관서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생긴 것은 고려조의 인종 때인 1136년 (인종14)이다.
인종은 문덕전을 수문전으로, 연영전을 집현전으로 고쳤다.
그후 집현전은 진현관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집현전으로 되기도 하였다.
집현전은 세조가 1456년(세조2)에 폐지할 때까지 임금에 대한 고문 역할,학문의 연구,각종 서적의 편찬,
도서의 수집.정리.자료제공을 담당한 기구로서
조선 초기의 정치와 문화 전반에 걸쳐서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2.2.집현전의 조직
1420년(세종2) 3월에 집현전의 직제를 정하면서 집현전 관원을 임명하였다.
영전사, 대제학, 직제학, 직전, 응교, 교리, 부교리, 수찬, 부수찬, 박사, 저작, 정자를 1품에서 9품으로 나누고
그 외는 녹관으로 하여 경연관을 겸임한다.
처음에 16명의 관리가 임명되었다가 업무량이 늘어남에 따라 정원도 늘어나게 되었다.
집현전관으로 임명되면 다른 관청으로 옮기지 못 하고 장기간 근무하였으며
집현전 안에서만 승진이 가능하였다.
2.3.집현전의 기능
홍문관은 경국대전등의 법전에 그의 기능이 명확하게 규제되어 있는 데 비하여,
집현전은 그 기능에 관하여 법적으로 규제된 것이 없다.
그러나 「조선 왕조 실록」이나 「 홍문관지」의 "옛 집현전은 지금의 홍문관이다 "라는
기록으로 보아 홍문관의 기능을 집현전의 기능으로 보아 무방 할 것이다.
(1)장경적 기능
조선왕조실록등의 문헌에 나타난 집현전의 기능을 보면,
'치문한(治文翰)'과 '비고문(備顧問)'의 기능은 홍문관의 기능과 같다고 되어있지만
'장경적(掌經籍)'의 기능에 대해서는 표현되어 있지않다.
그러나 정종실록에 "집현전이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청컨데 서적을 많이 장치하시고 … 하니 임금이 이를 허가하시다."라는 말이 있어
집현전이 서적을 수장하는 곳으로 계획된 기관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집현전의 도서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사부분류법에 의하여 조직되었으며,
목록이 마련되어 검색의 용이함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도 쉬웠다
또한 집현전의 장서는 왕과 왕족 그리고 집현전 관원뿐만 아니라 타사(他司)관원에게도 공개되었다.
바꾸어 말하여 왕을 비롯한 정부관원을 그 이용대상자로 삼은 것이다.
(2)문한(文翰)담당 기능
"집현전"이란 말은 언뜻 보기에 쉬운 말인 것 같이 느껴지면서도
막상 정확히 해석하려면 막연하고 다의성(多義性)이 있는 어귀이다.
이 어귀가 다음과 같이 가지각색으로 번역되어 있는 것이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가). 문한(文翰)을 다스리다. (治)
(나). 문한(문한)을 처리하다.
(다). 문서를 처리하다.
‘치문한(治文翰)’은 학문에 전사한다는 뜻으로 구체적으로는 서적을 읽고
새로운 정보를 생성해내는 일에 종사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3) 정보 봉사의 기능
집현전의 궁극적인 목적은 ‘비고문(備顧問)’에 있다.
고문(顧問)이란 원래 임금이 신하를 좌우로 돌아보며 그의 의견을 묻는 데서 나온 말이다.
질문 내지 상담을 뜻하는 말인 것이다.
그리고 비고문(備顧問)은 "고문(顧問)에 대비한다" 즉 "고문에 대응(對應)한다"의 뜻이다.
집현전은 왕과 조정에서의 물음에 대해 문헌에 근거하여 응대(應對)해 주는 곳이다.
바꾸어 말하여 정보봉사(情報奉仕)를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4) 고제(古制)의 조사.연구
왕은 집현전으로하여금 문헌을 조사하고 탐구하게끔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에 나타나있다.
集賢殿으로 하여금 古制를 상고케 했다.
集賢殿으로 하여금 古制를 상고하여 보고케 했다.
그러나 집현전으로 하여금 상고케한 대상에는 고제(古制)뿐만이 아니라 '고전','고적','경전','서적'등도 상당수 있다.
(5) 편찬 사업
세조의 학문 장려와 집현전의 연구 실적은 각종 서적의 편찬으로 나타나 있다.
a.역사및 정치-<태종실록>,<자치통감훈의>,<국어보정>,<명황계감>,<사륜전집 > <치평요람>,<고려사>,<고려사절요>,<정관정요주>등
b.유교 의례 -<효행록>,<삼강행실>,<오례의주>,<세종조상정의주>등
c.훈민정음.음운.언해 -<운해언역>,<용비어천가>,<훈민정음해례>,<동국정운>,<사서언역>등
d.지리 -<팔도지리지>,<지도>,<세종실록지리지>등
E.의약 -<향약집성방>,<의방류취>등
f.역서(曆書)-<칠정산내외편>,<역상집>등
g.병서 -<장감박의소재제장사실>,<역대병요>
h.법의학서 -<무원록주해>
2.4.집현전 학사들
집현전학사의 일반적인 자격은 문신 중에서 재행(才行)이 있고 젊은 사람이었다.
재행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실정으로는 과거(科擧)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분도 크게 작용하였다. 세종은 집현전학사들을 일일이 파악하여 각자의 재능에 맞추어 일을 시켰다.
1456년 집현전이 폐지되자 집현전학사들은 양분되었다.
일부는 정치에 참여하여 훈구파(勳舊派)를 이루었고
나머지는 사육신 사건으로 제거되거나 생육신으로 내의 명분을 지키려하였다.
2.5.집현전의 폐지
세조는 1456년(세조2) 6월에 집현전을 파하고 경연을 정지하며
거기에 소장하였던 서책을 모두 예문관에서 관장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어서 집현전 부제학 이하 녹관을 혁파하고 직제학 2명과 직전 2명을 관각의 예에 의하여
다른 관직으로써 겸임하고 서연의 녹관 6명도 겸관 4명으로 인원수를 정하라고 하였다.
집현전은 1456년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폐지되었다.
3. 홍문관은 집현전의 후신이었다. 집현전이 혁파(革罷)되었다가 다시 부활될 때
그의 명칭만 홍문관이라고 전것의 뜻과 비슷하게 바꿔놓았던 것이다.
집현전의 '賢'자는 '賢 者' 의 뜻으로 '獻'자에 통하며 '文'자와 상통하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집현전의 '賢'은 홍문관의 '文'과 상통하는 글자로서 기실 의미상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두기관 다같이 문자 그대로 문헌센타를 뜻하는 당시의 명칭이었던 것이다.
집현전은 도서의 수장(收藏)과 정리(整理)와 출납(出納)을 담당하던 장경적(掌經籍)기능,
학문 활동의 치문한(治文翰)기능, 정보봉사 기능, 고제(古制)의 조사.연구 기능, 편찬 사업의 기능을 하는 기관이었다.
집현전의 관직(官職)은 국가정책 수립에 참고가 되는 지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직(職)인데다
왕과 왕세자와 강론.논사(論思)하는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을 겸대(兼帶)하고있었으며,
어느 의미에서 정치성을 띨 수 있는 직(職)이었다.
조선 전기의 문화는 세종대왕 때를 절정으로 훈민정음의 창제를 비롯하여 모든 분야에 걸쳐서 찬란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세종대왕의 학문적인 능력과 집현전학사들의 노력의 결과라하겠다.
참고문헌)
1.집현전고(集賢殿考)/이재철/서울 한국 도서관 협회 /1978
2.세종 대왕과 집현전 /손보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