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신문>과 <대한크리스도인회보>의 1898년 12월 기독교인들의 시위에 대한 서로 다른 보도
예나 지금이나 같은 사건을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가 있다.
저자나 기자의 시각이나 수준에 따라 얼마든지 왜곡된 기사와 다른 해석의 글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유언비어가 떠돌고 거짓 뉴스가 난무할 때 우리는 인기 있고 대중적인 매체를 더 신뢰하기 마련이다. 소위 전문가, 소식통의 말에 방점을 두고 따르게 된다.
⌜상동청년 전덕기⌟를 읽는 중에 한 사건을 아주 다르게 해석한 <독립신문>과 <대한그리스도인회보>의 글을 읽었다. 당시 <독립신문>은 진보, 개혁 지식인들의 신문으로 선풍적인 영향력이 있었다. 그러나 1898년 12월 길영수 등 3인을 경무청에 고발한 기독교인들이 시위 모임의 종료에 관한 그들의 보도는 사실과 달랐다.
1898년 10월 28일 종로에서 개최된 만민공동회와 관민공동회가 토론한 정치개혁안 ‘헌의 6개조’를 고종황제에게 ‘상소문’ 형태로 제출하였다. 그들은 정부 내 개혁을 반대하는 수구파 대신의 퇴진까지 요구하였다. 이에 분노한 고종은 11월 4일 독립협회 부회장 이상재를 비롯하여 남궁억, 정교, 윤하영 등 독립협회 회원 14명을 체포하고 독립협회 해산을 명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독립협회 회원들과 배재학당 학생들을 이끌고 경무청과 평리원에 가서 협회 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였고 고종황제가 머물고 있는 경운궁 정문인 인화문 앞에서 구금자 석방과 ‘헌의 6개조’ 수용을 요구하는 농성과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황국협회에서도 길영수와 박유진, 홍정우 등이 이끄는 보부상들을 동원해 ‘맞불’ 시위를 벌여 양측이 무력으로 충돌하였다. 특히 11월 21일에는 2천여 명의 보수상들이 독립협회 회원들을 습격하여 연설하던 이승만이 길영수가 휘두른 뭉치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승만은 애국청년으로 유명해졌다.
또한 12월 1일에 보부상에게 구타를 당해 목숨을 잃은 김덕구 장례식이 독립협회장으로 남대문 밖 연못가(서울역 부근)에서 거행된 노제에 이화학당 여학생들과 교회 여성들도 참석해서 식 중에 찬송을 불렀다.
이에 대하여 <독립신문>은 ‘이화학당에서 가르치는 부인들이 찬미가를 부르는데 목석이라도 충의 두 글자에 감동치 아니치 못한다’고 하였다.
그 동안 배재학당, 정동교회, 상동교회 남성 교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시위와 저항의 ‘애국운동’에 드디어 여성들이 참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이화학당과 정동교회가 보부상들의 타깃이 되었다. 장례식 직후 12월 6일자로 보부상 도반수 길영수와 상무 박유진, 의관 홍종우 등 3인 명의로 된 서한이 정동교회에 배달이 되었다. 편지 내용은 ‘남녀 교인들이 도를 버리고 나오지 않으면 회당을 헐고 교인들을 도륙하겠다’는 협박 편지였다.
보부상들이 편지를 정동교회로 보낸 것은 그 동안 독립협회 모임에 참석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학생들 대부분이 정동교회 출석교인이었고 만민공동회를 통해서 명강사로 이름을 날린 이승만도 정동교회 교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동교회 교인들은 편지 내용을 선교사에게 알렸고 선교사들은 미국 공사관을 통해 이 문제를 대한제국 정부에 항의하도록 조처를 취하였다. 그리고 12월 8일 독립협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교회 대표자들이 모여서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들은 ‘보부상들이 무단히 교회를 욕을 할 뿐 아니라 기독교를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로 모함하며 구세주를 모독하므로 편지를 보낸 세 사람을 잡아서 경무사에 넘겨 재판을 받게 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정동교회 전도사 송기용이 서울 시내 각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냈다.
“음력 10월 23일(양력 12월 6일)에 소위 도반수 길영수와 상무장 박유진과 홍종 등이 정동교회에 부쳐 보낸 글을 본즉 해악한 언사는 가히 다 듣지 못하되 교우를 지목하야 독립협회 역당(반역당)의 청귀가 되었다 하며 또 갈아대 부상들이 장차 교당을 헐어 부시고 교도들을 도륙하겠다 하였으니 부상(보부상)의 행위를 궁구하건대 전매한 완습이 통분한지라. 엎드려 바라건대 여러 교우는 음력 10월 26일(양력 12월 9일) 하오 2점종에 일제히 상동 달성회당 앞으로 모여 상의조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정한 대로 12월 9일 오후에 상동교회 앞 남대문 거리에서 서울 시내 기독교인들의 ‘시국집회’가 열렸다. 그 광경을 <독립신문>은 아래와 같이 보도하였다.
“어저께 각처 교인들이 경무청 앞에 모였는데 십자가가 넷이요 교인들이 여러 백 명이라. 경무사가 그 교인들이 모인 곳에 나와서 묻기를 ‘무슨 일로 모였느냐?’하니 교민들이 대답하기를 홍종우, 길영수, 박유진이가 교우들을 도륙한다 하니 무슨 까닭으로 도륙하려는지 불가불 재판하여야 하겠으니 즉 곧 잡아 재판소로 넘겨 달라 한 대 경무사 말이 곡 잡아 넘겨주마고 담당하는 고로 교민들이 오늘 하오 두시에 다시 모이기로 하였다더라.”
<독립신문>이 당시 모인 사람들을 교인이 아닌 교민으로 표기한 것은 상동교회 앞 집회에 일반인들이 많이 참여하였기 때문이었다.
교회 대표들이 경무사에서 나온 이건호에게 보부상 대표 3인에 대한 고발을 하였다.
다음 날 12월 10일(토요일) 오후에 ‘십자가’를 앞세우고 홍문서골 경무청에 집결하여 시위를 벌이며 ‘총대위원’ 3인을 선정, 경무청에 공식으로 길영수 등 3인을 즉시 체포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경무청은 기독교인들의 요구에 대하여 상위기관인 ‘법부’를 핑계대면서 체포를 지연하였다. 이후 항의 집회와 시위는 며칠 간 더 계속되었으나 경무청의 소극적인 대응으로 뚜렷한 결론을 얻지 못하고 12월 15일을 끝으로 모임이 끝났다.
이에 대하여 <독립신문>은 “그저께(12월 14일) 예수교인들이 홍문서골로 모여 경무청으로 가서 전일사(전날의 일)를 다시 말하려다가 날이 저물어서 의론을 결정치 못하고 헤어졌더니 어제(12월 15일) 또 모여 상의하다가 서로 시비와 반대가 있어서 또 의론을 결정치 못하고 매우 울불한 모양으로 헤어졌다니 하회(다음 모임)가 어찌 될는지”라고 보도하였다. <독립신문>운 마치 내부 갈등이 생겨 보부상 3인 고발사건이 좌절된 것처럼 기술하였다.
그러나 감리교 기관지 <대한크리스도인회보>의 기록은 전혀 달랐다.
“교인의 행위는 특별히 다른 사람과 다른지라. 길영수 등이 무단히 교회를 해코자 한즉 우리가 한 마디 말씀이 없을 수 없는 고로 잇흘(며칠)을 모였거니와 지금은 저 무리를 잡아 중치하고 아니 하기는 법관의 직임이라. 우리가 너무 번거히 하는 것이 없고 또 저의 무리가 흉서를 보낸 일이 없노라고 발명한 글을 내었으니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교회의 당연히 행할 바라. 가 각기 돌아가서 하나님 나라 일을 힘써 하는 것이 옳다하고 즉시 흩어지니라.”
<독립신문>의 보도와 달리 교인들이 내부 갈등으로 흩어진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의 운동은 일반인들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으로 길영수 등 3인이 그런 편지를 낸 적이 없다고 변명하는 글을 정동교회에 보낸 것을 감안하여 그들을 용서하기로 한 것이다. 교인들은 용서를 모르는
유교 주자학이 지배하는 사회의 흐름과는 달리 ‘용서하는 종교’로서 기독교의 관용을 보여주며 과격한 항의와 시위운동을 중단하였다.
진보와 보수의 당리당략과 각종 집단들의 갈등과 대립으로 말미암아 왜곡과 유언비어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종교와 교육마저도 아노미와 카오스에 빠져 있다. 참으로 팩트와 진실을 알기 어려운 시대다. 구원과 도를 알 수 없는 세상이다. 교회가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을 넘어 선 복음의 담지자로서 십자가의 길을 가며 진리의 깃발을 높이 들길 소망한다.
2023.4.6.축시
우담초라하니
참고 도서
이덕주 저 ⌜상동청년 전덕기⌟, 공옥,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