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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5일(부부 주일)
고린도전서 7:1-16
바울, 결혼을 말하다!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남편이 운전할 때, 가는 길이 틀린 것 같아서 아내가 “여보, 저기 저 남자한테 물어보고 가면 안 될까?” 하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이 길이 분명히 맞아!”하며 남편은 화를 냅니다. 찾는 곳이 나오지 않아서 아내가 “여보, 저쪽에서 좌회전했어야 하는 것 아니었어?”하면 남편이 “그렇게 길을 잘 알면 당신이 운전해!”라고 합니다.
남자들은 다른 남자에게 길을 물어본다는 것을 “우리 남편이 무능해서 그러는데요. 길 좀 가르쳐 주실래요?” 이렇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운전하고 가다가 좀처럼 길을 물어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유모가 있습니다. “왜 모세가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했을까?” 아내 말을 듣지 않아서 랍니다.
-출처: 유기성,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로 사는 가정」(서울: 넥서스CROSS, 2012), 52-53.
여러분은 혹시 ‘부부의 날’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둘이 하나 되는 날’을 기념해서, 매년 5월 21일이 ‘부부의 날’입니다. 오늘은 부부주일입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2005년부터 매년 5월 셋째 주일을 부부주일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믿음의 가문?
얼마 전에 제 아내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내가 일하는 직장에서 한 그리스도인 선생님이 믿는 형제와 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아내가 기뻐하면서 “와, 믿음의 가문을 이루게 되셨군요!”라고 축하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함께 있던 교회에 다니지 않던 다른 선생님이 의아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선생님, 이상해요!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의사 가문’, ‘변호사 가문’이라는 말은 들어보았어도 ‘믿음의 가문’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네요. 정말 믿음의 가문도 가문에 속하나요?” 너무나 진지하게 묻는 그 선생님의 질문에, 제 아내가 순간 당황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의사 가문, 변호사 가문이라는 용어에 익숙한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믿음의 가문에 익숙하신가요? 여러분은 세상 적으로 인정받은 그 어떤 가문보다 믿음의 가문이 더욱 귀하다는 점을 믿고 인정하고 있나요?
바울, 결혼을 말하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은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궁금해 하던 몇 가지 질문들에 대해서 답변 형식으로 글을 써서 보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주제는 ‘결혼과 이혼’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설교 제목을 평소와 달리 좀 특별하게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바울, 결혼을 말하다!”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결혼은 꼭 해야 하나요?”
우리 성도들 중에 꼭 결혼을 해야 하는지 의아해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특히 결혼을 앞둔 젊은 세대의 경우 이 질문에 더 많은 관심이 있을 것입니다.
국가통계포털(kosis.kr)에 의하면, 우리사회는 혼인율의 감소가 두드러진 사회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혼인건수가 2000년에는 33만 명대였는데, 2010년에는 32만 명대로 줄었고, 2020년에는 21만 명대로 더욱 급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또 인구 천 명당 혼인건수도 2000년에는 7%였는데, 2010년에는 6.5%, 2020년에는 5.3%로 줄어들었습니다. 이 통계자료에 의하면, 우리사회의 혼인율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혼인율의 감소와 함께 결혼시기도 점차 늦어지고 있습니다. 평균 결혼연령이 2000년에는 남성 29.3세/여성 24.8세였는데, 2010년에는 남성 31.8세/여성28.9세로 늦어졌고, 2020년에는 남성 33.2세/여성 30.8세로 더욱 늦어졌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가구당 가족 수’가 몇 명인지 아십니까? 전통적으로는 ‘가구당 가족 수’는 부모와 자녀를 포함해서 3인 이상, 혹은 2인 이상을 생각하기 쉽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가구당 가족 수는 1명이라고 합니다. 즉 ‘1인 가구’ 비율이 가장 높은 것입니다.
또 ‘1인 가구’ 외에도, ‘한 부모 가정’이 증가했는데, 2019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한 부모 가정’은 153만 가구에 달하고 있습니다.
-출처: 최현종, “결혼 통계로 본 가정 구조의 변화”, 「활천」, 통권 810호, 2021년 5월호, 40-43.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교회 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 30대 개신교인 7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중에 현재 결혼상태를 묻는 조항에 “결혼하지 않았다”는 응답이 무려 67.6%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결혼할 의사가 아예 없다”는 응답도 11.4%(80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성경적 결혼’에 관해 물었을 때, 성경이 ‘꼭 결혼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는 응답이 37.6%였고, 그렇지 않다고 응답한 청년은 57.7%였습니다. 이미 기독 청년들조차도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처: 강병호, “결혼의 기독교적 의미”, 「활천」, 통권 810호, 2021년 5월호, 45.
과연 성경은 결혼에 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결혼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명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창 1:27-28).
또한 하나님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명령하셨습니다(창 2:24). 또한 예수님께서도 이 명령을 인용하신 후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9:6).
이상과 같은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결혼제도를 정하셨고, 남자와 여자에게 결혼을 통해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약속해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뜻이고, 축복된 약속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그러나 제가 서두(序頭)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결혼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서 모든 사람이 결혼할 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특별한 경우”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 “특별한 경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여기에서 바울은 “독신”을 “은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은사”는 “부르심”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바울은 “독신”을 “부르심”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26절에서 바울은 독신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또한 바울은 32절에서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생각하기를 만일 사람이 장가를 가면 주를 기쁘시게 할까 염려하기 보다는 생활의 염려, 세상의 염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바울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가정이 있고, 자녀들이 있다 보면 혼자 지낼 때보다 더 많은 생활의 염려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사람이 독신으로 지낼 수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가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권면했습니다(2절).
만일 어떤 사람이 결혼하지 않고 음행의 죄에 빠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결혼을 해서 음행을 피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음행을 피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대비책은 결혼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결혼이 단지 참을 수 없는 성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3절과 4절에서, 바울은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주장하며, 남편도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주장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결혼한 부부의 몸을 자신이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인 상대방이 주관한다는 의미는 부부의 성(性)을 어느 한 사람이 독점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배우자를 자신의 성적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부 간의 성은 이기적인 욕망에 묶여서는 안 되고, 오히려 상대방을 위해 배려하고, 봉사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부관계를 통해서도 남편과 아내로서의 의무를 성실하게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13장 4절에서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부부 간의 사랑을 확인하고,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에게 헌신하는 출발점은 부부관계인 것입니다.
다만 바울은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 상 얼마 동안은 부부가 떨어져서 지낼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영적인 유익을 위한 결정이어야 하고, 부부 간의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며, 얼마 동안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합의했던 시간이 지나면 부부는 다시 합하여 함께 기거해야 합니다.
이제 첫 번째 질문을 마무리하고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이혼하는 것도 죄가 되나요?
지금까지 바울의 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독신으로 지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성적인 욕망을 참을 수 없다면,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결혼하라. 그리고 결혼 했다면 이혼하지 말라. 그러나 만약 믿지 않는 배우자가 이혼을 요구했다면 이혼을 할 수는 있지만, 배우자의 구원을 위해 가급적 이혼은 피해라.”
바울은 교회 내에 있는 다양한 그룹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권면(혹은 명령)하였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홀아비들과 과부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일반적인 원칙을 적용했습니다. 즉, 그들은 바울처럼 그냥 지내는 것이 좋지만, 만일 성욕을 절제할 수 없다면 결혼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그룹은 이미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권면이 아니라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것도 바울이 명령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즉 이혼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순종해야 될 명령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세 번째 그룹은 믿지 않는 배우자와 살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만일 어떤 믿는 형제에게 믿지 않는 아내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만일 믿지 않는 아내가 믿는 남편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남편은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또 반대로 어떤 믿는 여자에게 믿지 않는 남편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믿지 않는 남편이 믿는 아내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그 아내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남편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믿는 배우자로 인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는 배우자로 인해 그 자녀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의 명령이 아니라, 바울의 권면입니다.
평소 저와 교제를 나누고 있는 한 남자 분은 믿지 않던 분이었는데, 믿는 아내와 기도 많이 하는 장모님을 만나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 남자분이 한 교회의 존경받는 장로로 섬기고 계십니다. 이 또한 하나님 앞에서는 귀한 일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만일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믿는 배우자에게 헤어지자고 요구한다면 그 요구를 받아들여 헤어져도 됩니다. 또 믿지 않는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에게 극심한 신체적 고통이나 정서적인 고통, 경제적인 고통을 지속적으로 안겨준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급적 참고 인내하며 부부관계를 지켜 나가는 것이 좋겠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헤어져도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형제나 자매가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형제나 자매가 먼저 주도적으로 믿지 않는 배우자에게 이혼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평화롭게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혹 믿는 형제나 자매가 믿지 않는 배우자를 구원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달 「생명의 삶」에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최 집사의 남편은 허리가 아픈 아내와 초등학생 두 아이만을 남기고 어디론가 잠적해 버렸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남편은 최 집사의 명의까지 도용해 억대의 빚을 졌고, 최 집사는 하루아침에 신용 불량자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혼 소송 밖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하고 분노하고 억울해하던 최 집사에게 교회 목사님은 예배 가운데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여 보자고 권면했습니다. 최 집사는 공동체에서 자신의 상황을 나누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원수는 자신을 속인 남편이 아니라, 죽어도 남편에게 돈과 시간, 정성을 쏟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악한 마음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돈만 갖다 주기를 원했던 자신의 욕심을 회개하자, 이제는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며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기도가 나왔다고 합니다. 결국 최 집사는 이혼 소송을 취하했고, 빚을 갚기 위해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고 공동체와 함께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최 집사가 힘들어도 가정을 지키기로 결단했더니, 동서가 복음을 받아들였고 시댁에서 남편의 빚을 갚아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최 집사는 9개월 만에 간호사로 복직했고, 자신이 겪은 고난을 이야기하며 이웃들과 친구들을 전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최 집사가 가정을 지키기로 결단했더니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배우자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용서할 수 없는 그를 용서할 때, 하나님은 차고 넘치게 응답해 주십니다.
가정은 지킬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배우자의 구원을 위해 흘렸던 눈물을 하나님은 반드시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출처: 김양재, 「결혼을 지켜야 하는 11가지 이유」(서울: 두란노, 2009); 「생명의 삶」(서울: 두란노, 2020년 5월호), 87에서 재인용.
저는 이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혼제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시기 위해 직접 만들어 주신 제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결혼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결혼이 하나님의 뜻이자 명령이지만, 바울과 같이 주의 복음을 위해 독신으로 부름 받은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독신으로 부르셨다면,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결혼하지 않고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불같이 타오르는 정욕을 피할 수 없다면 결혼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결혼제도 안에서 남편과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며, 서로에게 헌신하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결혼했다면 배우자와 갈라서지 마십시오. 만약 여러분의 믿지 않는 배우자가 여러분에게 이혼을 요구했다면 부득불 이혼을 할 수는 있겠지만, 배우자의 구원을 위해 가급적 이혼을 피하십시오.
우리의 가정은 지킬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부부주일을 맞아서, 저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배우자가 주님의 말씀 안에서 순종하고 서로 사랑함으로, 행복하고 거룩한 가정으로 세워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