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말씀의 향기♣ No2540
10월6일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eGNJBIZ5to8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주님의 크신 은총으로 인해, 이 큰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갑니다!>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유다교 열성 신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신 바오로 사도께서 겪으셨던 고초가 얼마나 컸었던가 하는 것은, 그가 집필한 여러 서한들을 통해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유다교 입장에서 보면 바오로 사도는 배교자요 배신자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저 그런 신자 중 한 사람이었다면 그리 큰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바오로는 앞길이 창창하던 유다교 청년 지도자였습니다. 원로들과 지도층 인사들은 율법에 대한 사랑과 유다교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쳐진 인재 바오로를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오로가 하루아침에 그리스도교로 돌아선 것은 유다교 입장에서 큰 충격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오로가 유다교에 끼친 손실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개종 이후 깊은 광야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발길 닿는 곳마다 다니면서 끊임없이 외쳤습니다. 수많은 유다인들이 줄줄이 바오로 사도를 따라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으니, 유다 지도층 입장에서 바오로 사도는 눈엣가시 같은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바오로 사도가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에서 큰 환영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찾아내고 체포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다니던 바오로였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가 하루 아침에 개종을 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 근처를 기웃거리니, 신자들 입장에서는 불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러다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는 의구심도 떨칠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배신자라는 낙인과 의심으로 가득찬 눈초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의 강렬한 주님 체험 이후 바오로 사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알아주던 말던, 누가 험담을 하던 뒷담화를 하던 상관하지 않고 묵묵하고 충실하게 복음 선포를 향한 여행길을 계속 걸어갔습니다.
놀라운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기회 닿을 때 마다 회개 이전의 부끄러웠던 모습을 공개석상에서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세기 교회를 이끈 쌍두마차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 중의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그 정도 되었으면, 충분히 회개의 과정도 거쳤겠다,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에 대해서 굳이 스스로 들춰내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게도 바오로 사도는 틈만 나면 지난 시절 자신이 저절렀던 과오와 어두웠던 시절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갈라티아서 1장 13절)
부끄러운 지난날을 고백할 때마다 바오로 사도는 늘 이런 식으로 말씀을 마무리 짓습니다.
“이토록 부당하고 부족한 저를 당신의 사도로 선택해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사도로 불릴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크신 은총으로 인해, 이 큰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갑니다.”
###############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2)아름다운 무지개 하나>
한 수도원에서 릴레이 성체조배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기도생활에 아주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한 수사가 자신의 차례가 되어 힘차게 솟아오르는 기도에 대한 열정을 겨우 억누르며 경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경당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기분이 갑자기 확 상했습니다. 자기보다 앞 당번인 수사가 평소에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성체조배에 전념하기는커녕 의자에 앉은 채로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 수사는 자고 있는 동료 수사가 들으라고 일부러 큰 소리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감히 주님 면전에서 곯아떨어져 있는 이 형제, 운동시간에는 절대로 졸지 않지만 묵상시간마다 조는 이 형제, 당신과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있지 못하는 이 형제를 용서하소서.”
그러자 감실로부터 이런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조용! 네가 나까지 깨우는구나. 나도 피곤해서 저 형제와 함께 곤히 자고 있었는데.”
저도 기도시간에 졸고 있는 형제들보면 가만있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갑자기 적개심이 불타오르면서 도대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하면서 분개를 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요즘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다는 것.
신체적 조건도 다르다는 것,
영성의 단계도 각자 다르다는 것.
어떤 사람은 체질상 몸으로 때우는 일이 적격입니다. 적극적인 투신과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봉사활동이 더 어울립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 할지라도 상관없습니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여기 저기 다니면서 몸을 움직여야 하루가 행복합니다. 전형적인 마르타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깊이 있는 관상생활이 어울립니다. 하느님과의 통교가 너무 감미로워 묵상시간이 끝나면 일상적인 활동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싫을 정도로 영성생활에 심취합니다. 성체 앞에 앉아있으면 그저 만사 오케이입니다. 기도하고 있으면 그게 가장 큰 기쁨이요 보람입니다. 전형적인 마리아 스타일입니다.
교회를 위해,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복음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 둘은 항상 같이 다녀야 합니다. 서로 적대관계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 상승작용을 해야 합니다.
한 신앙인 안에서도 관상과 이웃 사랑의 실천은 마치 두 개의 톱니바퀴같이 어울려야 하여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해와 비가 하늘에서 서로 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둘 다 같은 시간에 하늘을 독차지하고 싶었습니다. 서로 끝까지 양보하지 않았기에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동시에 햇볕 또한 쨍쨍 내리쬐었습니다.
그 덕분에 하늘 이편에서 저편까지 아름다운 무지개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때로는 불화나 대립이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기도 한답니다.(앤드루 마리아, 지혜의 발자취, 성 바오로 참조)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필요한 한 가지는 자기관리뿐>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WLfyhyIyzD4
---------------------
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마르타는 보통 예수님을 위해 봉사와 활동을 위주로 하는 이들을 대표하고, 마리아는 기도와 관상을 위주로 사는 사람을 대표합니다.
마르타는 활동을 통한 성과로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사람이고, 마리아는 그저 예수님 곁에서 더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보고 불평하는 마르타에게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마르타를 따르면 예수님께 식모가 되고, 마리아를 따르면 신부가 됩니다. 예수님은 식모와 같은 여인을 원하시지 않고 순결한 신부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집에서 밥도 청소도 하지 않는 아내를 원하시는 것이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사랑하는 순결한 신부가 신랑이 원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순결한 신부가 식모보다 더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식모는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지쳐 쓰러지지만, 신부는 신랑을 위해 목숨을 다할 때까지 충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더 사랑하는 것이지, 더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식모가 될 것인지 신부가 될 것인지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순결한 신부가 되려고 하다 보면 끝까지 좋은 결과를 내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좋은 결과를 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일에 집중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첫째로 자기관리에 집중합니다.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운동이 유일한 취미라는 유재석 씨도 자기관리에 충실한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그가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끊어가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는 일을 통해 자기를 증명하려 하지 않고 자기관리가 잘 된 모습이 일을 통해 입증되도록 합니다.
정준하 씨는 말합니다.
“재석아, 너 너무 재미없게 산다. 몸이 재미가 없잖아.”
정형돈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 그렇게 재미없게 사는 거 주위 사람들이 스트레스야.”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점점 재석이 형이 무섭다고 느껴진다. 그러니까 너무 좋은데, 슈퍼맨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운동도 진짜 열심히 하고 담배도 끊고 점점 이형,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이랄까!”
무한도전이 끝나고 다른 멤버들은 활동이 약해져도 유재석 씨는 언제나 건재합니다. 유재석 씨가 집중하는 것이 일이 아닌 자기관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의 결과는 자기관리에서 나옵니다. 이것을 소홀히 하면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유재석 씨도 놀란 자기관리 장인이 있는데 바로 박진영 씨입니다. 박진영 씨의 자기관리 방법을 들으며 유재석 씨도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박진영 씨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배고파!”, “죽겠다!”입니다. 조금만 먹으면 바로 살이 찌는 박진영 씨는 일주일의 반 이상 하루 20시간 공복을 유지합니다. 1일 1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엔 운동하며 힘들어 죽겠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자기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성공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런 사람이 배 두드리며 먹고 놀아도 되는데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자기관리를 하는 것일까요? 그는 매년 한 곡씩 노래를 발표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올해도 ‘When We Disco’라는 곡으로 복귀를 했습니다. 그의 음원 수입이 국내 1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이렇듯 꾸준한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타는 일로써 자신을 증명하려는 사람의 전형이고, 마리아는 먼저 자기관리부터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봉사와 기도 중 하나만 끊으라고 하면 어떤 것을 끊으시겠습니까? 활동을 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활동을 끝까지 이어갈 수 있습니다. 자기관리를 하는 사람은 그것을 이용하여 분명 무언가 이루어내고 싶은 열망으로 들끓습니다. 그래서 일에 지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 중심인 사람은 그 일이 잘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지치고 그래서 쉽게 포기하게 됩니다. 일보다 자기관리가 우선입니다.
박찬호 선수도 첫 메이저리그 성공신화를 이루어내고 후배들에게 미국에서 성공하기 위한 적합한 조언을 달라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치지 않는 것입니다.”
잘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관리를 우선시하라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은 하나뿐입니다. 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해지면 주위 사람들도 거룩해집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려다가는 자신도 거룩함을 잃습니다.
제가 살을 조금 빼니까 저절로 주위 사람들도 다이어트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로 나를 증명하려 하지 말고, 내가 일을 통해 증명되도록 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관리가 필요한데, 신앙인 처지에서는 그것이 기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기도로 여기고 기도시간을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마련할 줄 알 때 다른 하는 모든 일도 잘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0,38-42 : 마르타와 마리아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마르타는 깊은 애정으로 지극히 거룩하신 분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고 있다. 그래서 몹시 분주하였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39절) 이것은 무엇을 하였다는 것인가?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 5,6) 주님의 발치에서 시장한 마리아는 바로 이 샘에서 정의의 곳간에서 먹고 마시고 있다.
즉 자기가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그분의 진리를 먹고 있었다. 주님은 “나는 진리다.”(요한 14,6)라고 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생명의 빵인 당신을 마리아에게 먹이고 계셨다. 그분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요한 6,41)라고 하셨다. 그 빵은 사람을 먹여 기르되 결코 줄어들지 않는 빵이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에서 보듯이 덕은 한 가지의 모습이 아니다. 한 쪽에는 분주한 섬김이 있고, 다른 쪽에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이 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분주하게 일하는 것보다 우선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라고 하신다. 그러니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지 못하는 것을 얻도록 노력하자.
시중드는 일로 바빠서 거룩한 말씀에 관한 지식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마르타가 열심히 시중을 들어 책망을 들은 것이 아니다. 다만 더 좋은 몫을 택한 마리아가 인정을 받은 것이다. 복음에서 보면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뜨겁게 사랑했다. 주님께서 도착하시기 전부터 시중들 준비를 했고, 라자로를 살리시려고 주님께서 오셨을 때도 먼저 달려 나가 그분을 맞이하였다.
언제나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에 따르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되어야 하고, 갈림 없는 마음으로 쫒는 길이어야 한다. 다른 것은 아무리 중요해 보이더라도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야 한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이런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성경의 아름다운 예라고 할 수 있다.
마르타는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시중드는 매우 거룩한 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영적 가르침에 모든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다고 마르타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비판하지도 않으셨다. 다만 마리아가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 하심으로써 마르타의 몫은 남에게 빼앗길 수 있는 것이라고 하신다.
육신을 시중드는 일은 섬김을 받는 사람이 그곳에 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마리아의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는 모습은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
《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식은 서로 달랐습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그들의 위치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보다 ‘위’에 있습니다. 이는 ‘다가갔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말 ‘에피스테미’를 번역한 것인데, 본디 그 뜻이 ‘위에 서다.’입니다. 곧 이 말은 예수님께서 바닥에 앉아 계실 때 마르타는 그 옆에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르타가 예수님을 자신보다 위에 계신 분이 아니라, 아래에 계신 분으로 여긴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다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보다 ‘아래’에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발치에 앉았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위치에서 알 수 있는 그들의 사랑법은 무엇일까요? 마르타는 자신이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 예수님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시선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 결과 염려와 걱정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다그치기에 이릅니다.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행동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마르타와 달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도록 모든 일을 내버려 두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인간에게 가장 큰 영광은 그가 무엇을 하였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해 주셨느냐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발치에서 그분 마음을 헤아리며 그분께서 일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 그분 사랑에 맞갖은 사랑법입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하시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신 분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8-51)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시는 목자’이신 분입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28)
양들이 목자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들을 먹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잘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12-13)
<루카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라고 물으시고, 제자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 그것을 잡수셨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루카 24,41-42), 그 이야기는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신 이야기이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들의 배고픔을 걱정하셨고(마태 15,32),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마태 15,37)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잘 받아먹는 것이 예수님을 잘 따르는 것이고, 그것이 예수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38-42)
지금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마르타가 바라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 음식 대접을 잘 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코헬렛’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코헬 3,1)
지금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식사는 그 다음에 하면 됩니다. ‘빵의 기적’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먼저 ‘가르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주심으로써 사람들을 영적으로 배불리 먹이시는 일을 먼저 하셨고, ‘기적의 빵’을 주셔서 육적으로 배불리 먹이시는 일은 그 다음에 하셨습니다. (항상 꼭 그런 순서로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에는 그것을 잘 들어야 하고, ‘빵’을 주실 때에는 그것을 잘 받아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르타의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마르타와 마리아의 갈등이 이야기의 핵심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이 핵심입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라는 말씀에서 ‘많은 일’은 ‘다른 사람의 일’을 뜻할 수도 있고, ‘너무 많은 음식’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지금 마르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라는 말씀은, “너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마라.”(“왜 그 일을 하는지 잊지 마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가 하고 있는 일을 막지는 않으셨지만, ‘많은 일’ 때문에 ‘필요한 것 한 가지’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타이르셨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잘 대접하기 위해서 애를 썼고, 그 마음은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일’을 신경 쓰다가 예수님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면서도, ‘일’만 신경 쓰다가 누구를 위한 일인지 잊어버리고, 왜 하는지도 잊어버리고, ‘일’만 생각합니다. 신앙인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예수님을 잊으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라는 말씀에는 “너는 나쁜 몫을 선택하였다.”라는 뜻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마리아는 자신에게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라는 뜻인데, 그 ‘좋은 몫’은 사실은 마르타에게도 ‘좋은 몫’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시니까, 마르타는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그 다음에 해야 합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음식을 먼저 준비하더라도 필요한 양만 준비하고 바로 와서 말씀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너도 여기 와서 앉아라.”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마르타가 하는 일도 ‘좋은 일’이지만, ‘말씀을 듣는 일’이 ‘더 좋은 일’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양들이 목자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들을 먹인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마리아가 선택한 몫을 빼앗지 마라.”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
[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는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한 직장에서 정년퇴임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요즘은 정년퇴임까지 5번 정도 직장을 옮긴다고 합니다. 직책은 19번 정도 바뀐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회가 다양해지고, 직업을 구할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학교에서 배운 것으로는 새로운 직업을 구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소홀해서는 안 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민 사회도 다양한 직업을 갖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에서는 증권회사에 다녔는데 이민 와서는 한의사가 되신 분도 있습니다. 언어의 소통 문제로 직업을 바꾸기도 하고, 회사의 구조조정 때문에 직업을 바꾸기도 합니다. 학교 선생님을 하다가 신문사 직원이 되신 분도 있습니다. 여행을 다니다가 여행사를 운영하는 분도 있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다가 여행사를 다니는 분도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필요에 따라서 직업을 바꾸는 것이 당연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율법학자였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율법학자로서의 신념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신비한 체험을 했던 바오로 사도는 율법학자라는 직업을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는 이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자였던 바오로 사도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찾아가는 선교를 하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선교여행을 통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율법학자로 대접을 받으며 편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바오로 사도는 박해와 시련이 눈앞에 보이는 사도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방법은 2000년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전해졌습니다. 선교사들은 중국과 일본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와 남미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박해가 심했던 한국으로도 왔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박해도, 시련도, 죽음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30년째 사제로 지내면서 다양한 직책을 경험했습니다. 본당 사제로 16년 지냈습니다. 보좌신부 8년, 본당 신부 8년을 지냈습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는 본당 사제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사제가 하는 일은 본당 사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구의 인사이동을 통해서 다양한 사목을 체험하였습니다. 사목국에서는 3년 동안 교육 담당 업무를 하였습니다. 소공동체를 위한 교육을 하였고, 구역장과 반장을 위한 월례교육을 준비하였습니다. 해외연수와 중견사제 연수를 통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연수의 기회를 주신 교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청소년국에서는 6개월 동안 청소년 수련원에서 지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생들과 함께한 유익한 경험이었습니다. 성소국에서는 5년 동안 사제양성을 위한 업무를 하였습니다. 교황방한 준비위원회 업무를 한 것도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작년부터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서 신문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주님께서는 제게 참 다양한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많은 결실을 맺지는 못했지만 큰 허물없이 지낼 수 있었음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마리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마르타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활동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도 좋은 몫입니다. 영성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도 좋은 몫입니다. 중요한 것은 활동과 영성의 목적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모두가 좋은 몫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이 있습니다. 직업에 따른 다양한 직책이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그 일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좋은 몫을 선택한 것입니다. 비록 그 일 때문에 시련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좋은 몫을 선택한 것입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 눈길 당신께>
루카 10,38-42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내 눈길 당신께>
당신을 바라보다
당신 곁의 누군가
내 눈길에 들어온다면
당신이 아닌
당신 곁의 그에게
내 눈길 빼앗기기 전에
내 눈길
오롯이 당신께만
건네야 해요
내 눈길 좁아서
두 사람 함께
담을 수 없으니까요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여야 할 때>
+ 찬미예수님
얼마 전 명동에 책을 구입하러 갔다가 평소에 알고 지내던 수녀님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저에게 평소 습작하신 그림을 보여주시며 당신의 일상을 전해주셨습니다. 사실 저 역시 신학생 시절 그림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전시회를 할 정도로 한때는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녀님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며 저도 모르게 “아, 나도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러자 수녀님께서 “신부님, 어떻게든 시간을 내면 그림 그릴 시간을 충분히 되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보라는 좋은 취지의 말씀이었는데,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못내 섭섭했습니다. 여러 가지 강의와 청탁 원고들과 본당의 일 등등으로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고 있는데, 그러한 말을 들으니 저도 모르게 섭섭한 감정이 들었던 것입니다.
물론 수녀님께는 그런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돌아서서 서점을 나오는데, 제 마음이 참으로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 수녀님이 다 알 수도 없고 그걸 굳이 알리고 싶은 것도 아닌데 순간적으로 섭섭했던 제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사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하느님을 위한 일인데, 그 자리를 저의 욕심이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금 반성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사실 이러한 경험을 모두가 한 번쯤은 해보셨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상황과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각자 살고 있는데 그것을 알아주지 못하는 누군가의 사소한 말에 짜증이 나거나 섭섭했던 경험. 우리가 흔히 겪게되는 경험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와 마르타는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르타는 보다 적극적이고 행동을 통해 예수님께 자신의 신실함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성격입니다.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경청하고 이를 곰곰히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르타의 내면에 갈등이 발생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을 방문하셨으므로 행동으로 자신의 열성을 드러내지만 마리아는 일을 돕지 않고 예수님께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타의 입장에서는 제법 마음이 혼란스럽고 마리아가 미워보일 법 합니다. 하지만 마르타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 모두가 일상생활 안에서 쉽게 간과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중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를 모두 사랑하고 아끼신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눈에 각자가 맡은 책무에 최선을 다 하고 있다면 모두가 한결 같이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마리아에 비해 자신이 더욱 빛나 보이기를 바라고 있으니 예수님의 마음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또한 마르타가 간과하고 있는 두 번째는, 가장 먼저 행해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의중을 이해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을 행하든 예수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듣고자 노력하는 일은 더 없이 중요합니다. 그 마음을 알려고 노력하기에 앞서 먼저 스스로를 내 보이고자 한다면 그 마음에 더 이상 예수님이 계실 자리는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의 목소리에 먼저 귀기울일 것을 권고하십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의 자세가 드러납니다. 우리의 성격은 저마다 다르고 행동과 실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뜻을 먼저 파악하며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경청하고 고민하는 일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지혜롭고 전능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일상생활 안에서 서로 다른 환경에 따라 제각각의 성격대로 예수님께 믿음을 드러내고 봉사합니다.
이 안에서 누군가는 분주하게 일을 하게 되기도 하고 누군가는 묵묵히 기도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도 합니다. 이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는 각자의 어려움과 태도, 마음가짐을 모두 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의 핵심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먼저 귀를 기울이고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께 겸손히 의탁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진정한 사랑을 베풀고자 한다면, 상대방의 사정과 마음을 이해 할 필요가 있고, 그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우리는 항상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하며 비록 가끔은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자신에게 베풀고 계실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믿으며 그것을 실천하고자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하느님 앞에서 나 자신의 모습은 어떠한지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사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 성당 안에서 누군가가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섭섭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성의와 열성이 주님의 뜻에 따라 잘 실천되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나아가 주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 자신의 욕심만이 고집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다시금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 환호송은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여라”. 아멘.
=====================
[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바오로 사도는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자신을 선택하신 하느님의 섭리를 간파하고 있습니다. 불철주야 소아시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한 사도의 활동은 하느님께서 주신 부활의 은총에서 그 원동력을 얻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대접하느라 분주하였습니다. 그녀는 손이 모자라자 동생 마리아의 도움을 예수님께 요청하였습니다. 의외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가지고 있는 좋은 몫을 존중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르타에게 너무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지 않도록 당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봉사한다는 명목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를 주십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활동에 정신을 쏟다 보면 외면적인 업적에 매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의 분주한 일과 걱정에 마음을 빼앗겨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의 말씀을 모시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우리의 마음은 메말라 가고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알아듣지 못하게 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참되게 하느님을 섬기는 길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마르타는 자신의 봉사를 자랑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잘 모시고 섬기는 길을 알려 주는 모범이 됩니다. 그녀는 사랑의 봉사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참된 힘을 발휘하는 길을 보여 주는 표징이 되고 있습니다.
마르타가 하는 봉사와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는 행위는 모두 귀중한 것이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두 가지 방식입니다.
=====================
[안동교구 배인호 베드로 신부님]
<좋은 몫>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생각, 다양한 사건이 조화를 이루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과거 아날로그 방식의 시계를 보면 크고 작은 톱니바퀴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갑니다. 서로가 어긋남이 없이 서로를 돌려주기 때문에 그 힘으로 시간을 맞춰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움직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나거나 모자람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위해 살아갈 때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삶의 방식이나 직업에도 귀천이 있고, 가능하면 잘난 직업, 힘 있는 직업, 권력과 가까운 삶을 찾는 데 온 노력을 기울입니다.
남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고 싶고, 더 좋은 옷과 집과 차를 갖고 싶어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보다는 폼 나고 대접받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좋은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학과와 상관없이 고시나 공무원, 의과대학원 시험에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몇 가지 직업과 삶만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잘나고 싶어서겠지요. 잘난 사람만 사는 세상은 행복할까요? 아니요. 오히려 끔찍합니다. 모두가 저 잘났다고 떠들고 싸울 테니까요. 그 잘난 사람들은 청소하고 쓰레기 치우고 농사짓고 집 짓는 힘든 일은 하지 못할 테니까요.
사람 사이에는 직업의 귀천도 높고 낮음도 없어야 합니다.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이고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니까요.
하느님은 돈 많고 권력을 가졌다고 더 우대해 주고, 돈 없고 힘없다 하여 무시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심이 있는 분입니다. ‘무엇이?’가 아니라 ‘어떻게?’가 하느님께는 중요하고 ‘어떻게’로 사람을 평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한 마르타나 당신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마리아나 둘 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께는 누구나 소중한 당신의 자매들인데, 마르타가 자기 일이 힘드니 마리아도 함께 돕게 해 달라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작 중요한 것은 마르타의 일도 마리아의 일도 아니라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임을 마르타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그 일이 가장 중요하며 그렇기에 더 충실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해나갈 때, 더 좋은 것 더 높은 곳을 탐하지 않을 때 세상은 바람직한 모습으로 발전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텔레비전에서 냉면한철(冷面寒鐵)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넌센스 문제로 생각했는지 한 방송인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냉면집 장사가 여름 한 철이다.” 물론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있던 방송인들이 이 대답이 맞을 것으로 예측하는 것입니다. 한글만 보면 당연히 그렇게 예측할 수도 있는 ‘냉면한철’입니다. 그러나 이는 ‘낯빛이 싸늘하기가 차가운 쇠붙이 같다’라는 뜻으로, ‘사사롭고 편벽됨이 없어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이르는 말입니다. 한자를 보지 않고서는 전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삶도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를 잘 알면서도 우리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따라서 그 안에 담긴 뜻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뜻은 그냥 눈으로만 쉽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마르타는 너그러운 손님 접대의 덕을 보여 줍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분과 그분의 성도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한 것은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 마르타의 동생인 마리아의 모습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그녀는 마르타처럼 손님 접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 발치에 앉아서 정의와 진리를 즐겼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시중을 드느라 분주한 자신과 달리 주님 발치에 편하게 앉아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에 관한 판단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청을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칭찬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은 마르타가 잘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느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은 영원에 속하는 일이지만 육신을 섬기는 일은 지나가 버리는 일일 뿐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결국, 겉으로는 보이는 모습을 보고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그 안에 담긴 뜻을 볼 수 있어야 함을 마르타에게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어떤 모습도 주님께서는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주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는 것을 부족한 인간의 눈으로 부정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
<취미와 특기>
어느 단체에 가입하기 위해 가입 신청서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항목 중에 취미와 특기가 있는 것입니다. 학창시절에는 이 항목에 쓸 것이 참 많았습니다. 우표 수집, 기타 연주, 독서, 탁구…. 너무 많아서 글씨를 쓸 칸이 부족한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 취미와 특기가 뭐지?’라고 자신에게 반문할 정도로 특별한 취미도 또 나름의 특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는 너무 각박하게 살아왔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그래서 어제는 오랜만에 기타를 꺼내서 옛날 가요를 힘차게 불러봤습니다. 더군다나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미사 때 성가도 부를 수 없지 않습니까? 힘이 불끈 솟는 것만 같습니다. 옛날 취미가 지금에도 힘을 제게 전해주는 취미였습니다. 취미 생활을 하지 않다 보면 삶의 기쁨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취미와 특기를 다시금 찾아보십시오. 사는데 바빠서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지만, 지금을 잘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환대; 관상적 삶>
-말씀, 경청, 회개, 겸손, 사랑, 환대-
올해의 요즘은 유난히 행복합니다. 죽었다 살아난 너무나 생생한 파스카 감사의 체험 때문일 것입니다. 제 머리 왼쪽 상처 부위의 흰 반창고는 '회개의 표지'이자 '감사의 표지'처럼 생각됩니다. 올해 제 영명축일 때는 사랑도, 선물도, 축하도 제 생애 중 가장 많이 받았던 해인 듯 싶습니다. 나이가 들면 아이처럼 되는 가 봅니다. 요즘은 가끔 보고 싶은 분들도 있어 솔직하게 사진 좀 보내 달라 합니다. 요즘보다 사람 얼굴이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인 적은 없습니다. 어찌 보면 이 또한 순수한 사랑의 환대의 표현이겠습니다. 오랜만에 어느 자매와 주고 받은 카톡 메시지입니다.
-“안녕하세요. 신부님 카톡에 올리신 프로필 사진을 보고 뭔가에 이끌리듯 수도원에 갔습니다. 두 팔 벌려 ‘언제든 와라. 다 괜찮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아무 연락도 안드리고 무작정 갔다 왔습니다.”
“오랜만에 반갑습니다. 잘 지내고 계시죠? 예수님 축복 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감사해요. 신부님, 낮에 신부님 사진 떠올라 발길 머물렀던 ‘예수님 부활상’ 자리 바로 그 장소네요.”
“마리아죠? 보고 싶으니 셀프카 사진 찍어 보내 주세요.”
“지금 방금 찍은 따땃한 사진이예요.”
“편안하고 안정되 보여요! 주님 안에서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배밭에서 좋은 정기를 받고 와서 안정되어 보이나봐요. 실제로 마음도 안정되었고요. 신부님 뵙고 왔으면 더 환하고 예뻤을 텐데요. 일간 찾아 뵐께요. 신부님”-
아, 그러고 보니 수도원 십자로의 두 팔 벌리고 가슴 활짝 열린 파스카 예수님 상은 그대로 환대하는 예수님 모습입니다.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환대하는 불암산과 더불어 말입니다. 새삼 환대의 사랑, 환대의 수도원은 요셉 수도원의 정체성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분도 성인도 그의 규칙에서 다음처럼 아름답게 환대를 명문화하고 있습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할 것이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시는 읽을 때 마다 감동이요 환대의 진가를 절감합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생애가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도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환대’라 명명해도 참 좋은 절창의 시입니다. 일생의 역사가 담긴 주님의 현존인 각자 고유의 ‘살아있는 역사책’이, ‘살아있는 성경책’이 방문하는 것이니 사랑의 환대는 너무 당연하고 어마어마한 축복의 사건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베타니아 집을 자주 찾았던 예수님 같습니다. 누구나 피곤하고 삶에 지칠 때 눈감으면 떠오르는 찾고 싶은 곳을 헤아리기도 할 것입니다. 아마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삼남매들은 예수님을 온 마음, 온 사랑으로 환대했던 베타니아 ‘환대의 집’에 ‘환대의 사람들’같습니다. 그러나 참된 환대도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눈먼 사랑의 환대도 있을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환대에도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특히 주님의 환대는 그러합니다. 내 좋을 대로의 환대가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상대방 좋을 대로의 환대가 참된 환대요 이점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심중을 꿰뚫어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은 음식을 잡수러 온 것이 아니라 우선 쉬면서 당신 말씀을 하고 싶어 방문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마리아, 바로 주님의 환대는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흡사 미사전례시 말씀의 전례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같습니다. 말씀을 듣고 식사하는 것이 올바른 주님 환대의 순서이며, 하여 미사전례도 말씀전례에 이어 성찬전례가 뒤를 잇습니다. 식사 준비에 분망하던 마르타 언니의 불편했을 심중이 그대로 예수님께 표출되었고 마르타를 향한 예수님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활동주의에 중독된 이들에 대한 금과옥조의 경계가 되는 말씀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우선 택할 것이 말씀이신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경청을 통한 예수님 환대가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눈먼 환대가 아닌 눈밝은 환대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마르타는 넘치는 사랑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심중을 헤아리지 않는 제 좋을 대로의 일방적 눈먼 사랑의 환대임을 봅니다.
말씀의 경청을 통한 주님 환대는 모든 사람 환대의 근본이 됩니다. 참으로 말씀에 깊이 맛들여 갈수록 주님 환대와 이웃 환대의 사랑도 깊어갈 것입니다. 새삼 환대에도 순서가 있음을 봅니다. 참된 환대는 그대로 참된 관상적 삶의 기초가 됨을 봅니다.
우선 주님의 환대는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말씀을 경청할 때 저절로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회개와 겸손이 뒤따르고 순수한 사랑, 아가페 사랑의 회복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으로 주님을 환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참된 환대는 ‘말씀-경청-회개-겸손-사랑-환대’의 순서로 이뤄짐을 봅니다.
바로 이런 주님 환대의 자세로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에 참석해야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주님 환대와 더불어 날로 주님을 닮게 되고 이웃 사람에 대한 참된 환대의 사랑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참된 영성의 잣대는 참된 환대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참된 신자는 참된 환대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성인들이 예수님을 닮아 환대의 성인들이었고 특히 이의 모범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오로가 사도로 부름 받은 경위가 상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환대 은총을 통해 바오로 사도가 철저한 회개와 정화 과정을 겪는 과정의 묘사처럼 보입니다. 환대의 사도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주님의 환대를 통한 철저한 회개와 겸손의 정화 과정이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중 당신 말씀과 성체의 사랑으로 우리를 환대해 주시고 우리 모두 당신 ‘환대의 사도’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아멘.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비교에서 악이 나온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기의 몫을 행하고 또 그 몫에 기쁨과 감사함을 지닙니다. 자기 몫이 무엇인지 알고 확신이 서 있다면 그 몫을 행하는 것에 배 아플 것도 없고, 기쁨이 클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몫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어떤 마을에 들렀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그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정작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고,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르타가 마음이 상했는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 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루가10,40).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가10,41-42).
마르타의 몫도, 마리아의 몫도 다 필요하고 좋은 몫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꾸중하지 않습니다. 또한 마리아에게도 그녀가 필요한 것을 선택했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마리아가 선택한 것은 좋은 몫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마리아의 몫입니다. 왜냐하면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로마10,17)'. 말씀을 기초로 삼지 않은 행동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 깨닫게 되면,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 해야 할 일을 하게 됩니다. 내 뜻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찾게 됩니다. 진정 하느님 앞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마르타는 다소 불평어린 어조로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는데, 그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역할을 다 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지 생색은 왜 냅니까? 왜 동생과 비교합니까? 열심히 일해 놓고 마음에는 화를 잔뜩 담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이 내 몫이었으면 그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스스로 주님을 위해 시중을 들었으면, 그 자체를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마르타는 활동적인 여인인 듯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에만 집착하면, 그 활동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다시 말하면 활동은 기도 안에서, 말씀 안에서 나온 활동이라야 참된 활동이 됩니다. 또한 기도를 하면 할수록 활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 없는 활동은 무의미합니다. 활동이 없는 기도는 또한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 안에서 좋은 몫을 택할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몫이 주어졌든, 최선을 다했으면 그 자체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가12,31)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뒤로 미루고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을 사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친구를 따라 강남을 가지 말고, 자기 몫에 충실해야 합니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남을 따라가다 보면 불평불만이 생기게 되고, 결국, 악에 지고 맙니다. 지금 하는 일이 좋은 몫이라면 마음껏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개인 소명의 고유성을 이야기하십니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루카 10,39)
이 유명한 복음 내용을 '활동'에 대한 '관상'의 우위성 차원에서만 바라보면 마르타 성녀가 평가절하되어 버리는 당혹스런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당신이 각별히 사랑하는 두 사람을 차별하거나 경쟁 구도로 세우실 분이 아니지요. 누군가를 들어높여 다른 이를 낮추실 리도 없습니다. 이 일화를 통해 들려주고 싶으신 예수님 마음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였다."(루카 10,38)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셔 들인 여인입니다. 베타니아의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세 남매와 예수님 사이의 애틋한 우정이 바로 마르타의 환대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마르타는 적극적이고 부지런하며 헌신적이고 용기 있는 멋진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 39)
손님 대접에 분주한 마르타에 비해 마리아는 고요히 예수님 앞에서 그분을 응시합니다. 말씀하시는 분 앞에서 듣는 것. 이 또한 최대의 접대 행위입니다. 이는 주인이 해야 할 일 중에 하나지요. 객들을 자기들끼리 있게 두고 주인은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는 것만큼 무례한 일도 없으니까요.
세상 모든 좋은 일이 다 그렇듯이, 마르타의 입장이나 마리아의 입장이나 함정은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 마르타가 삐끗한 지점에 머무릅니다. 사실 손님을 접대하다보면 좀 더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커집니다. 손님에 대한 최대의 존경과 예의를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좋은 지향이 내면의 건강하지 못한 욕구, 이를테면 사랑받고 인정받으려는 욕구와 엉켜버리면 적정선을 넘기기 쉽습니다. 만족을 모르게 되어 버리지요. 그러면 시간이 더 필요하고 일손이 더 필요하며 물질도 더 필요합니다. 내 안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더, 더 원하게 됩니다. 더 잘 하려고 그러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저 깊은 곳에서 더 사랑받고 더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활활 불타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과도하고 방만한 열정에는 얼마간 자신의 책임이 따릅니다.
마르타는 "당연히" 마리아의 노동력을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접대를 위해서는 마리아의 손이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그건 마르타의 만족을 위한 것이지 예수님의 바람은 아니었지요.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예수님의 이 말씀에 마르타가 서운해졌을 수는 있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그렇지 않으셨을 겁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 마리아의 경청을 콕 짚어서 하시는 말씀이라기보다, 누구나 자기의 고유한 소명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한 가지씩 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러니 마르타도 본인에게 필요한 것 한 가지에 본인이 몰두하면 되는 것이지요.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는 말씀 역시, "너도 그렇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예수님께는 마리아의 소명이 귀한 것처럼 마르타의 소명도 귀합니다. 훗날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기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한 라자로의 소명 또한 귀하고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마리아가 자기 소명을 빼앗기지 않는 것처럼, 마르타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각자에게 가장 잘 맞는 모습으로 창조된 만큼, 우리는 자기 존재의 본질, 정수를 빼앗길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마르타가 자기 자신의 욕구에 집중하기보다 예수님께 필요한 것을 바라본다면 과도한 열기가 제 온도를 찾아 마르타 다움이 질서를 잡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소명에 대해 솔직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6)
사도는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이, 본래 창조 때부터 "새로운 길"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소명이 제 궤도를 찾기까지 그는 사도들을 찾아가거나 해서 성급히 인정받으려 하지 않고, 여러 해 동안 침묵과 고독 중에 숙고와 성찰의 시간을 보냅니다. 바오로에게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했을 뿐, 당장 제자단에 합류하여 제도권의 확인을 받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그들은 나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갈라 1,24)
바오로의 과거를 아는 이들이 바오로의 회심 소문을 듣고 그를 조롱하거나 소외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섭리를 미리 준비하신 하느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사도로써 이만한 열매가 또 있을까 싶도록 보람찬 결실이지요.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난 체험 이후, 이해할 수 없이 펼쳐지는 길 위에 자신을 온전히 내던졌습니다. 인간적인 계획이나 수를 내려놓고, 인내하며 머물렀지요.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의 소명에 빛과 색과 온도를 입혀 쓰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만의 고유한 소명이 이렇게 완성되어 가게 되지요.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교회의 보편 소명을 받아 살아갑니다. 거기에 더하여 우리 각자에게 주님께서 창조 때부터 심어 주신 고유한 개인 소명을 꽃피우고 완성해가는 중입니다. 마르타에게는 마르타만의 아름다움이, 마리아에게는 마리아만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벗님 여러분 각자에게도 마찬가지지요.
사랑하는 벗님! 각자 주님께서 주신 고유한 소명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주시고, 우리가 선택한 좋은 몫을 주님께 올라가는 동앗줄이라 여기면, 단단히 부여잡고 절대 빼앗기지 않겠지요. 우리 모두는 주님과 하나 되는 데 "필요한 한 가지"를 저마다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좋은 몫을 택하셨으니, 벗님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
[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주님도 잠시 멈추셨습니다.
-‘창조적 공백’은 ‘도약의 기간’이다-
주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기까지 걸린 3일은 낭비하는 시간이 아닌 ‘창조적 공백’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새로운 욕구가 생기기까지 심리적인 공백이 생기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아주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백을 메우려고 무리한 방법들은 동원하는데, 영성심리에서는 이것을 ‘창조적 공백’이라 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도약의 기간으로 여깁니다.
♣밥을 먹고 쉬는 것도 소화를 시키는 시간을 가진 후 일을 해야 능률이 오르기 때문입니다. 이 공백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기가 아니라, 그간 살아온 것들을 정리하는 중요한 재충전의 시간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대체로 이 원칙을 잘 지키는 삶을 삽니다. 주님 역시 무덤에서 사흘간의 공백기를 가진 후 공생활을 추스르시고,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
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십시오.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39)
지금, 마르타는 예수님의 몸을 섬기고 있다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섬기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르타가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면, 마리아는 ‘말씀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섬김이 진정한 ‘주님 섬기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까?
그것은 주님을 섬기겠다고 나서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자신을 섬기시도록 승복하는 일입니다. 실상 주님을, 혹은 남을 섬긴다고 하면서, 막상은 자기 자기를 섬길 수가 있습니다. 마치 마르타처럼 말입니다.
사실, 베풀기보다 받아들이기가 더 어렵습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진정으로 주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막상 주님 앞에 앉아서도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듣고 있거나 타인의 말을 듣고 있을 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그 어떤 섬김보다도 더 큰 섬김이 됩니다. 마치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주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섬기도록 허용해 드리고 있는 셈입니다. 곧 자신을 향한 주님의 섬김을 수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님 되시게 해드리는 일에 해당합니다. 곧 ‘나는 섬김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신 말씀대로 해드리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그분과 한 자리에 있게 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그분의 일, 곧 섬기는 일을 하게 됩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에서 쓴 편지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하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중요하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이다.”
그렇습니다. 상대방이 있는 자리에 같은 처지로 함께 있기! 바로 그것이야말로 진정 상대를 섬기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고 우리를 섬기십니다. 마리아는 지금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주님께 위로가 되어 주겠다며 분주한 마르타가 예수님께 위로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께 귀 기울이고 있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위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당신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허용하는 일,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승복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당신을 섬기는 일입니다. 곧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꼭 한 가지, 그것은 자신을 그분께 내어드리고, 주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일, 주님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수락하는 일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정작,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無爲而無不爲의 단계, 곧 무위(無爲)의 도(道)일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사실은 전부를 하는 신령스런 도(道)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2)
주님!
이 한 가지로 하여, 가난을 기쁨으로 살겠습니다.
당신께 속한 자만이 진정 가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한 가지로 하여, 낮추어 섬기겠습니다.
속한 자만인 진정 낮아질 수 있고 ,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전부를 하는 이 신령스런 일이
바로 당신의 소유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실상 필요한 한 가지,
주님이신 당신을 주님 되게 하는 일, 바로 그 일만 하게 하소서!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루카10,42)
'왜,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일까?'
오늘 복음은 마르타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신 말씀인 루카복음 10장 38절에서 42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신 마르타가 혼자만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자,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마리아에게 불편한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1-42)
그렇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치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뿐입니다.
왜, 그럴까?
오늘 독서가 그 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박해자였던 사울이 복음선포자로 변신한 사도 바오로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데, 자신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자기 마음 안에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내 마음 안에 '하느님'이 계셔야 합니다. 내 마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러 넘치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웃 사랑'이고, 마르타가 하고 있었던 '활동'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10,20)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필요한 한 가지에 최선을 다하고, 좋은 몫을 선택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이웃 사랑이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
[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Ty3ab1izE8&feature=youtu.be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 42)
삶의 중심은
한 가지뿐이다.
삶의 중심이
되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염려와 걱정을
맡겨드린다.
하느님께
멀어질 때
염려와 걱정은
더욱 커진다.
걱정하고
염려하는
시간은 많아도
하느님께
머무르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다.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믿음의 몫이다.
믿음은
함께하는
기쁨이다.
믿음의 방향은
일이 아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선택은 마음을
표현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일보다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우리의
마음을 기꺼이
하느님께
나누는 마음이다.
마음 안에
일이 있고
마음 안에
기쁨이 있다.
필요한 것은
삶의 첫자리에
계시는 하느님께
먼저 우리 마음을
드리는 것이다.
마음을
드리는 것이
말씀을 듣는
머무름의
첫시작이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두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