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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란.(2022).‘조각주체’라는 이름의 플랫폼 호모 이코노미쿠스 : 조각투자, 리셀 또는 조각난 정동.커뮤니케이션 이론,18(3),54-97.
김예란의 논문은 “조각투자 현상 에서 응용된 개념”(58쪽)으로서 조각주체에 관해 논하기 위해 리셀과 조각투자를 ‘동시대적 현상’으로 제시한다. 이때 리셀은 “외형적으로 구매와 판매이지만, 특정 대상에 대한 기대 수익을 위한 구매와 판매행위이기에 이 글에서 다루는 조각투자의 주제에 포함될수있다”(62쪽)고 논한다.
길고 긴 논문이지만 김예란의 글을 거칠게 요약해보면, 과거 자산을 통한 부의 축적에 참여했던 것이 일부 자본가 그룹이었다면, 이제 대상을 ‘조각 낸’ 투자상품의 출현과 일상적 상품의 자산화(신발)로 인해 보편화되었다는 것이 요지다. 조각투자현상을 통해 살피고 싶은 조각주체란 모든 것의 자산화 시절에 등장한 주체성과 다름이 아니다. 때문에 저자는 리셀이 ‘기대수익을 상정한 구매/판매행위’이기에 조각투자에 해당한다고 논하는 다소 무리로 보이는 -아마도 그가 ‘왜 리셀이 투자가 아니고 ‘조각’투자인가?’라는 질문에 내놓을 답은 접근성의 확대와 낮은 울타리일 게다- 전제를 밀고간다.
그가 평하는 조각주체란 암울하고 우울한 모습을 하고 있다.
"플랫폼 자본주의와 금융 자본주의의 결합 체제는 경제적이고 기술적인 구조 변동일 뿐 아니라 주체화에 개입하는 권력구조다. 그 환경에서 조각주체는 파편화된 조각들로 구성되고 그가 바라보는 세계 역시 미세한 조각들로 재편성된다. 이 가볍고 납작한 주체(김예란, 2014)는 한편으로는 열정과 흥분에 쉽게 들 뜨며 정교한 이익 계산에 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공에 대한 환상, 유행상품에 대한 욕망, 지체와 실패에 대한 좌절과 공포에 떨고 있다. 그 틈새에서 조각주체는 더욱 작은 조각들로 축소, 분산된다. 결국 조각주체 화는 삶의 생존을 위한 통합적 주체화이기보다는 삶의 파열과 소멸을 향하는 파쇄적 주체화다.”(90쪽)
"요컨대 조각주체는 기술적 플랫폼화와 자산화가 주도하는 금융자본 주의의 조건에서 탄생한 플랫폼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한 유형이다. 플랫 폼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기술적 혁신에 대한 민감한 반응, 성공과 수익에 대한 집요한 열정, 소비유행에대한 욕망에 바탕을 두어 경제적으로 정향화된 존재다.”(79쪽)
한편 조각주체는 동시대 권력구조에 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플랫폼 자본주의와 금융 자본주의의 결합 체제는 경제적이고 기술적인 구조 변동일 뿐 아니라 주체화에 개입하는 권력구조다. 그 환경에서 조각주체는 파편화된 조각들로 구성되고 그가 바라보는 세계 역시 미세한 조각들로 재편성된다. 이 가볍고 납작한 주체(김예란, 2014)는 한편으로는 열정과 흥분에 쉽게 들 뜨며 정교한 이익 계산에 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공에 대한 환상, 유행상품에 대한 욕망, 지체와 실패에 대한 좌절과 공포에 떨고 있다. 그 틈새에서 조각주체는 더욱 작은 조각들로 축소, 분산된다. 결국 조각주체 화는 삶의 생존을 위한 통합적 주체화이기보다는 삶의 파열과 소멸을 향하는 파쇄적 주체화다.”(90쪽)
솔직히, 글을 읽으며, 조각투자라는 현상의 접두어인 ‘조각’으로부터 획득한 아이디어로 거칠게 개념화한 것은 아닌지- 때문에 다소간 소재주의적 혐의를 지니지는 않는지-에 관한 의문이 계속해서 들었다. 예컨대 조각투자가 어떻게 주체의 조각남-일상과 삶, 세계에 대한 ‘통합적’이해의 불가능성 등-에 관한 효과를 유발하는지, 아니, 조각투자란 동시대 주체성에 관해 볼 수 있는 창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인지-만약 이런 장르로 글을 읽는다면 김예란의 글은 멋진 비평문일 게다-, 좀 글이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어려웠다.
또한 이 글에서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리셀의 대상, 상품-그리고 이제 마냥 상품이 아닌-은 특정 브랜드의 농구화 시리즈로 보이는데, 해당 물질과 관련한 문화적 실천의 궤적에서 리셀을 파악하려는 시도의 부재에 관해서도 논하고 싶다(그는 문화연구자이기 때문이다). 소비사회학자 이안이 논문에서 논하듯, 아니면 카와무라의 스니커즈와 관련한 텍스트에 서 논하듯, 이 문화적 실천은 미국의 하위문화였던 ‘힙합’이 80년대 이후 스타일화되고 형식화되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 한국의 신발문화 역시 이 문화의 일종의 식민지로 볼 수 있는데, 한국의 스니커즈 문화는 강북의 복고와의 대조 속에서 강남의 오랜지족이 신은 고무신-에어포스-로 평가되었으며, 그들 나름의 생태계를 여러 종류의 플랫폼을 거쳐가며(오프라인,천리안나우누리,옥션,크림) 형성해왔기도 하다. 이건 내 연구 관심사이기도 하다.
리셀이 ‘모든 신발’이 아닌 특정한 신발들에 의해 발생하듯, 이 실천은 어떤 문화적 의례들, 아니 하위문화가 ‘대중문화’로 자리잡는 일련의 과정과 매칭되며 진행되었다. 때문에 조각투자와 ‘리셀’은 구분된다(리셀과 관련해서는 여타 하위문화 장이 대중문화 또는 자본주의에 전용될 때 그렇듯 진정성의 문제가 주요한 것으로 부각된다). 주체들은 진정성 대 속물, 실착러-신는자-와 리셀러-파는자-라는 정체성을 진동하고, 플랫폼과 신발 또는 하위문화담론의 자산화는 주체들이 한 자리에 안정적으로 머물며 안정적인 정체성을 획득하는 데에 걸림돌로 작용한다(시시각각 ‘주식’처럼 가격변동을 보여주는 플랫폼 앞에서 우린 모두 겸손해지는 소시민이라고;;). 좀 거창하게 말하면, 이건 한국사회에서 중산층이 되지 ‘못’하는 이들이 겪는 집단적 진자운동의 일면을 알려주기도 한다…
…급발진. 그러나 많이 공부하며 즐겁게 읽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