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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교회는 굳건히 세워지고,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사도행전의 말씀 9,31-42>
그 무렵
31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32 베드로는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다가 리따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가게 되었다.
33 거기에서 베드로는 애네아스라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중풍에 걸려 팔 년 전부터 침상에 누워 있었다.
34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그러자 곧 애네아스가 일어났다.
35 리따와 사론의 모든 주민이 그를 보고 주님께 돌아섰다.
36 야포에 타비타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이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카스라고 한다.
그는 선행과 자선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37 그 무렵에 병이 들어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어 옥상 방에 눕혀 놓았다.
38 리따는 야포에서 가까운 곳이므로, 제자들은 베드로가 리따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사람 둘을 보내어, “지체하지 말고 저희에게 건너와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9 그래서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갔다.
베드로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그를 옥상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그러자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에게 다가가 울면서, 도르카스가 자기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 주었다.
40 베드로는 그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다음 시신 쪽으로 돌아서서, “타비타,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가 눈을 떴다.
그리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
41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운 다음,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다시 살아난 도르카스를 보여 주었다.
42 이 일이 온 야포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 복음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6,60ㄴ-69>
그때에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60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육적인 인간인지, 영적인 인간인지 알아보는 법>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에 관한 긴 말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성체에 관한 지금까지 하신 말씀을 이해하면 그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고,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가면 육적인 사람입니다.
물론 가리옷 유다처럼 남아있다고 해서 다 영적인 것도 아니고, 지금 믿지 못한다고 해서 완전히 육적인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말씀은 영적이며 생명에 관한 것인데, 육적인 사람은 이 말씀을 육적으로만 받아들이려 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투덜거리고 다 떠나가지만,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주님 곁에 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수준 때문에 말씀이 곧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당시에 그곳에 있었다면 제자들처럼 예수님 곁에 남았을지, 아니면 떠나갔을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내가 영적 인간인지, 육적 인간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전에 한 여자와 남자의 나체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나체 그림이고 매우 야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충격을 받은 것은 그 그림을 어린이들은 돌고래들로 본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메슬로우는 망치를 손에 쥔 사람은 모든 것을 못으로 본다고 말했습니다.
나의 시각과 이해력은 나의 욕구에 의해 좌우됩니다.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을 먼저 찾습니다.
따라서 길을 지나가는 여자를 볼 때, 남자들은 나체의 모습을 상상하고 여자는 여자의 모자와 옷, 핸드백이 얼마짜리인지를 스캔합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아무리 영적인 말씀을 하셔도 육체적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 가리옷 유다를 뽑았습니다.
그는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기에 도둑이라고 말하고 더 심하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뽑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다.”
(요한 6,70)
사람이 악마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심을 믿지 못해서라기보다 그 사람이 육체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체적 인간에서 영적인 인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나’의 정체성을 바꿔야 합니다.
나를 육체로 본다면 그 사람은 육체적 행복만을 추구할 것이고, 나를 영혼으로 본다면 그 사람은 영적인 기쁨을 추구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 앞에 소개하실 때, “나는 나다!”라고 하십니다.
우리 안의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의 행복만을 추구하게 될 것이고 육적인 인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외줄타기를 하는 한 서커스 단원이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다 강철 줄을 걸어 놓고 그 위에서 줄타기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손에 땀을 쥐면서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열심히 이리 건너오고 저리 건너가고 하면서 시종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은 사람들 앞으로 와서 말했습니다.
“누가 내 어깨 위에 올라타겠습니까?
내가 한 사람을 어깨에 메고 건너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볼 뿐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꼬마 소년이 “저요!”하고 손을 들면서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 소년을 어깨에 태우고 이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더 많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 겁나지 않든?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지?”
그 소년이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분이 제 아버지거든요!”
어떤 사람의 말을 믿으려거든 나와 그 사람과의 관계가 먼저 정립되어야 합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을 믿을 수 없고,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은 더욱 믿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먼저 믿지 말을 먼저 믿지 않습니다.
관계가 먼저이고 말이 그 다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분과의 관계를 정립해야 합니다.
오늘 남은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믿을만한 분임은 믿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할까요?
그분이 나의 주인이시고 나 자신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육체적인 행복은 추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육적 욕망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되고 더욱 영적인 인간이 되면 말씀을 더 믿게 되고 더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 믿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육적인 인간이기 때문임을 명심합시다.
육적인 인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육체, 즉 자아가 아니라 내가 주인이라 여기는 것에 의해 규정됨을 명심합시다.
우리 안에는 성체로 들어오시는 “너는 나다!”라는 분이 계심을 명심합시다.
이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을 수 있으면 이미 영적인 인간으로 들어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영원 생명을 갈망하라>
어떤 사람이 전혀 새로운 사실을 얘기하면 호기심을 가지고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되지도 않는 소리라고 외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기대를 지니고 귀를 기울이는데 전혀 다른 소리를 하면 속이 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대놓고 뭐라 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불만을 지니게 됩니다.
누구든 자기가 기대하고 바라는 쪽으로 얘기하면 신이 나고 기분 좋아하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못마땅해 담을 쌓게 됩니다.
그러나 큰 사람은 자기의 기대를 뛰어넘는 소리에 귀 기울일 줄도 알고 거기서 깨우침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신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듣기에 거북해 하였습니다.
모르면 스승의 가르침을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인데 그렇지 못하고 속으로 투덜대고 있었습니다.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하는 사람에게 무엇인들 비위를 맞출 수 있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런 사람은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져도 내 마음이 인간적인 욕망으로 채워져 있다면 '그림의 떡'이 되고 맙니다.
어른 신부님들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본당의 책임을 맡으면 적극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3분의 1이라도 되면 성공이라네.
3분의 1은 관망하는 사람이고 또 3분의 1은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그러니 누구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용기를 가지고 추진하게.”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되돌아가고, 더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나약함을 지니고 사는 신부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여전히 믿을 가능성을 두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자유를 허락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물론 믿음은 하느님께서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림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믿음이 부족하여 이 사랑을 망각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요?
결국, ‘떠날 테면 떠나라. 잡지 않겠다.’라는 가슴 아픈 말씀입니다.
그런데 남아있던 제자 중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어야 하겠습니다.
누군가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것을 버리고 그분의 것으로 채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다는 것은 바로 내 생각과 다른 예수님을 닮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입니다.
‘너도 떠나겠느냐?’
‘아닙니다. 당신에 대해 아직 잘 모르지만,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따르다 보면 당신을 알게 되리라 확신하며 그저 따르겠습니다.
훗날 당신을 등질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은 당신이 나의 전부입니다.
당신만을 따르겠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당신을 따르고 당신을 느끼기까지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당신을 저의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고백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꼭 끌어안고 살아가면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적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당신의 살과 피를 내주시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칩니다.
당신의 몸을 생명으로 주시지만 합당하게 모시기에도 벅찹니다.
그러나 지금 포기하면 당신을 영원히 차지할 수 없기에 당신께 매달립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 6,68)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위로건 격려건>
"교회는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사도행전 9,31)
오늘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는 한동안 평안을 이루고 신자들의 수가 늘어났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성령의 격려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뜻으로 얘기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격려를 받는 것에 대해서 묵상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격려를 받으면 좋을 텐데 받지 않는다면 왜 받지 않는지 그것에 대해서도 보았습니다.
실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으로 받는 것이 참 많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받기도 하고 싫어하는 것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은총을 받고, 사랑을 받고, 이해를 받고, 칭찬과 상을 받고, 위로와 격려를 받는가 하면, 미움을 받고, 오해를 받고, 비판과 비난을 받고, 벌이나 피가 철철 나는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거나 받지 않는 것에는 받는 나도 있지만 주는 누군가가 있어서, 주니까 받거나, 주어도 받지 않거나, 주는 대로 받거나, 선택해서 받거나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니까 받지 안 주는 데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줘도 안 받으면 그만이고 그래서 주는 대로 받는 편인 사람도 있지만, 줏대가 센 사람은 주는 대로 받지 않고 선택해서 받는데, 다만 그 선택의 기준이 좋고 싫음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좋고 나쁨인 사람 곧 선택의 기준이 선악인 사람도 있지요.
그러므로 누가 성령의 격려를 받지 않는다면 성령의 격려보다는 인간의 격려를 원하는 사람이거나 나는 누구의 격려도 필요치 않다고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또는 성령의 격려보다는 인간적인 격려를 원하기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인 격려는 우리에게 달콤한 경우가 많지만 성령의 격려는 십자가나 수난을 감수하라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지요.
그런가 하면 비슷한 맥락에서 격려보다는 위로를 원하기에, 다시 말해서 사람의 격려건 성령의 격려건 격려보다는 위로를 더 원하기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격려'를 개신교 성경은 '성령의 위로'로 번역하고 영어도 'consolation of the Holy Spirit'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원래 이 말이 격려, 위로, 도움, 후원의 뜻을 다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위로가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이나 슬픔을 토닥여주는 것이라면, 격려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라고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힘을 보태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격려보다 위로를 더 좋아할 수 있고, 특히 십자가와 수난을 감수하라는 성령의 격려보다 인간의 달콤하거나 따듯한 위로를 더 바랄 수가 있겠지요.
어쨌거나 우리는 위로건 격려건 그것을 성령으로부터 잘 받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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