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스럽지 않은 쑥
기미년 만세 함성이 퍼진 지 105년째 되는 날이다. 현직 시절은 역사와 책에서 찾아낸 선열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새겼다. 교단에서 은퇴 후는 우리 고장 곳곳에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더듬어 봤다. 장유 용두산에는 그날에 희생된 분을 기린 빗돌이 있었다. 삼진 의거로 통하는 진동 일대 여덟 의사의 거룩한 희생도 잊을 수 없다. 함안 군북에서도 일본 경찰 총에 다수 사상자가 나왔다.
자연인이 되니 공적 얽매임이 없어서인지 삼일절이나 광복절을 맞아도 무덤덤하다. 아파트에 살다 보니 태극기 다는 일도 여의하지 않다. 건령이 오래되어 베란다 창틀 깃대를 꽂는 자리가 망가져 태극기를 달지 못한 지 오래다. 이후 태극기는 어디로 치웠는지 보이질 않고 연전 아파트 리모델링에서는 창틀이 교체되면서 깃대를 꽂을 자리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일을 마무리 지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밀리다시피 장강은 뒷물결에 맡겨야 하는 세대다. 현실에 참여해 시대를 바꾸는 일은 다음 세대가 할 일이고 이제 관찰자가 되어 지켜보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그러함에도 못다 한 친일 청산에 예각을 세운 반일 프레임으로 죽창가만 부르고 있을 수는 없다. 무엇이 진정한 극일로 나아가는 바람직한 길인지 삼일절과 광복절 이틀만이라도 생각해 봐야 한다.
삼일절날이면 우리 지역 독립운동을 펼쳤던 현장을 찾아보는 일도 의미 있지만 나는 지난날 여러 차례 들러 묵념을 올린 바 있어 발걸음은 줄여도 선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덜했다. 아침 식후 이른 시각에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 평소와 같은 일상의 산책 걸음을 나섰다. 집 앞에서 마산역 앞을 지나는 버스를 타고 역 광장으로 올라가 구산면 옥계로 가는 농어촌버스를 탔다.
시내를 벗어난 버스는 현동 교차로에서 신도시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유산삼거리를 지나니 덕동 앞바다가 드러났다. 수정 매립지에서 백령고개 너머 내포를 둘러 다시 옥계 입구와 되돌아왔다. 내포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예전에는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왔겠으나 간석지는 농지로 바뀌어 마을에서는 바다가 보이질 않고 욱곡 앞으로 가야 석양이 아름다운 갯가가 나오는 데였다.
산모롱이를 돌아가니 마창대교가 걸쳐진 합포만 바깥 바다와 진해 연안이 바라보였다. 옥계까지 기점에서 종점까지 타고 간 승객은 내가 유일했다. 아침 기온이 제법 내려가 쌀쌀한 느낌이었다. 아까 마산역 광장에서 바라보인 무학산 정상부와 차창에 비켜 보인 불모산 언저리는 간밤에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채 허옇게 드러났다. 서북산으로 갔으면 숫눈 길을 걸을 수도 있을 듯했다.
옥계 포구에는 조업을 나서지 않은 고깃배들이 여러 척 묶여 있었다. 겨울이면 대구가 잡히고 여름에는 통발을 놓아 장어를 잡아 올렸다. 마을 앞을 지난 외딴 횟집에서 임도를 따라 걸어 봉화산이 흘러내린 갯가로 내려서니 갯바위가 나왔다. 검푸른 바다는 홍합과 미더덕을 양식하는 부표가 줄을 지었다. 윤슬이 반짝거리는 바다 바깥은 거제섬으로 거가대교 연륙교 구간이 아스라했다.
어촌계원도 낚시꾼도 찾지 않는 한적한 갯가 검불에서 파릇한 쑥을 찾아 캐 모았다. 볕 바른 남향에서 해풍을 맞고 해조음을 들으며 자란 쑥을 한 가닥씩 캐도 살이 통통하게 쪄 봉지를 쉽게 채울 수 있었다. 쑥은 청정 지역에서 얼마만큼 짧은 시간에 많이 캘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나는 근교 식생을 훤히 알아 쑥을 쉽게 캘 수 있는 여러 포인트 가운데 한 곳이 난포 연안이었다.
갯가에서 캔 쑥을 갯바위에 앉아 검불을 가려 작은 조선소가 있는 난포마을 앞을 지났다. 안골을 지나 소골로 가니 심리로 닿는 5호선 국도가 나왔고 교차로 언덕에 파릇한 쑥이 자라 더 캐 모았다. 한 젊은 사내도 쑥을 캐고 있었는데 외지에서 왔는지 근처에 세워둔 차가 보였다. 로봇랜드 근처 양평에서 브랜드가 같은 체인점인 해장국으로 점심을 먹고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24.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