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골문 - 금문 - 전서 (대전) - 예서(고예) - 초서 (고초) - 해서 - 행서
(소전) (팔분) (장초)
(금예) (금초)
(광초)
의 순으로 봐야하지 않을까요?
예서는 고예와 분예(分隸)가 중심이다.
고예, 즉 진예(秦隸)는 전서를 빠르게 쓴 것으로 진대에 시작되어 전한 때 통용되었는데 파책(波磔 : 삐침)이 없는 소박한 서체가 특징이며 한대의 관지자체(款識字體)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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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예, 즉 한예(漢隸)는 고예가 변한 것으로 고예의 글자체와 거의 같으나 파책이 발달된 것이 특징이다.
예서(隸書) 이분(二分)과 전서(篆書) 팔분(八分)을 섞어서 장식적인 효과를 낸 글씨체로, 중국 한(漢)나라 채옹이 만들었다고 한다
(*한사람에 의해 창조되었다기 보다 이전 부터 전해져 상용되던 문자를 체계적으로 정리, 실용화하는데 기여했을것으로 추정)
후한시대에 완전한 형태가 이루어져 널리 통용되었고, 특히 비각(碑刻)에 많이 사용되었다. 위진(魏晉)시대 이후에는 차츰 파책이 약해지고, 여기에 점(點)·탁(啄)·도(挑)·적(趯)을 더하여 더욱 유연하고 매끄러운 서체로 변형되었는데 이것을 해서라고 한다
여기서 해서는 금예(今隸)를 말하며 팔분과구분하기위한 명칭입이다
초서체는
문자를 빠르게 서사(書寫)한 것으로 전서의 경우는 전초(篆草), 예서의 경우는 예초(隸草)라 하며
중국 창사[長沙]의 묘에서 출토된 죽간(竹簡)과 서북지방 출토의 목간(木簡) 등에서 대전(大篆) 및 한례(漢隷)의 초서가 보인다.
이러한 초체가 계속 변화·발전하여 일종의 고정된 서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은 좁은 의미의 초서로 장초(章草)·금초(今草)·광초(狂草) 등이 있다. 아직 형식이 정비되지 않은 한대(BC 206~AD 220) 초기의 것은 고초(古草)라 하며,
전한(前漢) 후반기에는 파책(波)을 수반하며 후한대에 글자체가 완성되는데 이것을 장초라 한다.
장초는 예초·급취(急就)라고도 하는데, 예서 필획의 글자가 모두 독립되고 결체가 모나고 납작하며 파책이 남아 있고, 필획이 서로 이어지지 않으며 점획을 생략했다.
장초의 초기 형태는 한대의 목간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장초의 법첩인 사유(史游)의 〈급취장 急就章〉과 〈순화각첩 淳化閣帖〉에 있는 장지(張芝)·황상(皇象)·삭정(索靖) 등의 장초가 대표적이다.
후한말 새로 나타난 서체인 금초는 오늘날 흔히 사용되는 초서로 후한의 장지가 장초에서 파책을 제거하고 글자 상하의 혈맥을 이어 창안했다고 하며,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가 완성했다.
금초에는 한 글자씩 쓰는 독초체(獨草體)와 붙여서 쓰는 연면체(連綿體)가 있다. 금초는 〈순화각첩〉에 실린 왕희지·왕헌지 부자와 장지의 글씨, 왕희지의 〈십칠첩 十七帖〉·〈상란첩 喪亂帖〉, 왕헌지의 〈지황탕첩 地黃湯帖〉 등에서 볼 수 있다.
광초는 당나라 장욱(張旭)이 시작한 것으로 전통적인 초서 필법에서 벗어난 것이며 술과 자연현상 등으로부터 얻은 정취나 영감에 의해 극도로 자유분방하게 쓴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장욱의 〈자언첩 自言帖〉, 회소의 〈자서첩 自敍帖〉 등이 있다. 초서는 쓰는 사람의 개성을 발휘하기가 용이하며, 문자가 실용적 성격에서 유희적 성격을 띤 예술영역에 도달하는 데 교량역할을 한 것으로 서예사적 의의가 크다.-------이상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자료.
예서는 전서의 속필을 위해 생겨났으며,
초서는 예서의 속필을 위해.
예서체를 속필하기에 파책의표현이 불편하게되어 생략되고, 점획을 생략하거나 간략하게 하여
실용적인 문자로 발전하였으며,그에 따른 새로운 글자체의 형태미가 자연히 생겨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魏나라 사람인 종요(151~230)가 예서에서 파책을 생략한 초기 해서를, 예서의 방필을 모태로한 북위체의 해서가 성행하고 있다가
이후 東晉의 왕희지(307~365)가 독창적인 해서체를 창립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져 상용되고 있습니다.
해서는 초서체를 알아보기 힘들어서 정자체 정립의 필요에 의해 생겼으며
해서의 속필을 위해 행서로 발전되었다고 보나 최근 다량 출토된 목간과 죽간을 보면 초서와 해서, 행서는 비슷한 시기에 함께 병용되고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