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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새 브나야
삼하 23:18-23
18 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이니 그는 그 세 사람의 우두머리라 그가 그의 창을 들어 삼백 명을 죽이고 세 사람 중에 이름을 얻었으니
19 그는 세 사람 중에 가장 존귀한 자가 아니냐 그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그러나 첫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20 또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이니 그는 용맹스런 일을 행한 자라 일찍이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고 또 눈이 올 때에 구덩이에 내려가서 사자 한 마리를 쳐죽였으며
21 또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의 손에 창이 있어도 그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려가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그를 죽였더라
22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행하였으므로 세 용사 중에 이름을 얻고
23 삼십 명보다 존귀하나 그러나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다윗이 그를 세워 시위대 대장을 삼았더라
삼하 23:18-23 / 이제 그 세 장수의 이름과 업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세 장수 중에서 우두머리는 요압의 아우 아비새였다. 그는 창 한 자루만 가지고 300명의 적들을 모조리 쳐죽였다. 이로써 그가 세 장수들 중에서 가장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19) 30인 용사들보다 더 큰 존경을 받게 되었으며, 그들을 지휘하는 높은 위치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여호와와 함께 싸우는 거룩한 전쟁의 수행자는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의 명성이 처음의 삼용사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20) 세 장수 중에서 두번째는 갑스엘 사람 브나야였다. 그는 여호야다의 아들로서 여러번 큰 공을 세웠다 그는 `모압의 사자'라고 소문난 장수 두 사람을 혼자서 쳐죽였다. 눈이 내린 어느 날에는 사자 발자국을 따라가서 구덩이에 빠진 사자를 보고 내려가서 때려 잡았다. 21) 또한 그는 애굽의 거인을 한사람 죽인 일도 있다. 그는 막대기 하나만을 가지고 거인에게 달려들어 그가 쥐고 있는 창을 빼앗아 그것으로 그를 찔러 죽였다. 22) 브나야가 이렇게 큰 업적을 남김으로써 세 장수들 가운데서 가장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23) 30인 용사들보다도 더 큰 존경을 받게 되었으나 여호와와 함께 싸우는 거룩한 전쟁의 수행자는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의 명성도 처음의 삼용사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브나야는 다윗의 경호대장이었다.
다윗의 수하에는 제 일, 제 이, 제 삼진 식으로 충성스러운 용사들이 호위하고 있었는데, 아비새와 브나야는 제 이진에 속하지만 30인의 두목 중의 우두머리로서 용맹을 떨친 용사들입니다.
다윗의 용사 아비새(18-19) 스루야의 아들이며 요압의 아우 아비새는 첫 세 사람(요셉밧세벳, 엘르아살, 삼마)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다윗 왕의 곁에서 그를 호위하는 충성스러운 용사로서 2진의 3인(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 물을 떠온 용사들)중에서는 가장 존귀한 자로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창으로 삼백 명을 죽인 용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지위와 직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왕을 향한 충성스러운 아비새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 봅시다.
다윗의 용사 브나야(20-23)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다윗 치하에서 그렛과 블렛의 대장(근위 대장)이었으며(8:18; 20:23), 이스라엘은 열두 부대가 한달마다 돌아가며 왕을 섬기는데, 브나야는 셋째 달 이만 사천의 군대의 장관이었습니다(대상27:1-15). 그리고 아도니야의 반역 때 이를 막아냄으로 솔로몬 치하에서는 요압 대신 군대 장관이 되기도 하였습니다(왕상 2:28-35). 그의 용맹스러운 일은 첫째,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인 것입니다. 아리엘은 ‘신의 사자’, ‘사자같이 용맹스런 두 용사’란 뜻의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습니다. 둘째로, 눈 올 때에 함정에 내려가서 사자를 죽인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사자의 출현은 매우 흔했습니다. 이 사자들은 추운 날 눈이 많이 내려 먹이가 궁해지면 민가로 내려와 사람들을 먹이로 삼았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식인 사자를 잡기 위해 함정(큰 구덩이)을 만들었습니다(겔 19:4, 8). 그런데 ‘브나야’는 맨몸으로 함정으로 뛰어 들어가 사자를 때려잡은 것입니다(삿 14:6; 삼상 17:34-36). 셋째는, 막대기로 창을 가진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 사람은 ‘키가 다섯 규빗이요(1규빗이 대략 45.6cm) 그 손에 든 창이 베틀채 같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대상 11:23). 다윗 왕은 이러한 용맹스러운 브나야를 시위대 장관으로 삼았는데, 시위대는 왕의 근위대를 의미하며 이는 사형 집행 기관인 그렛 부대와 왕명을 급히 전달하는 블렛 부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적 용 : 아비새와 브나야의 용맹스러움은 다윗이 왕으로 직무를 감당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미국의 정치가인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신이 사는 필라델피아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고민하던 중 아름답고 커다란 등을 하나 준비하여 집 앞에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처음에 불필요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며 등불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거리에 장애물들을 피할 수도 있었고, 멀리서도 방향을 알 수도 있었습니다. 밝아진 길 덕분에 조금 더 안전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 둘씩 집밖에 등불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필라델피아는 길거리를 가로등으로 환하게 만든 미국의 첫 번째 도시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생각과 용기 있는 행동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호크마 주석
=====23:18,19
그 삼 인의 두목이라 - 여기서 '삼 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솰리쉬'(* )는 (1) '군장'(8절)과 (2) '삼 인' 모두로 번역될 수 있는 용어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정관사 '하'(* )가 붙어 있으므로, 다윗을 위해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 물을 떠온 '그 삼 인'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Pulpit Commentary).
그 삼인 중에 이름을 얻었으니 - 여기에서 '삼 인'은 혹자의 견해처럼 야소브암, 엘르아살, 삼마(8, 9, 11절)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Keil) 아비새, 브나야, 그리고 익명의 뛰어난 한 용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아비새'(Abishai)는 제 2 용사단(솰리쉬)의 두목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첫 삼 인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 첫삼 인은 8-12절에 기록된 야소브암, 엘르아살, 삼마를 가리킨다. 한편 '아비새'(Abishai, 삼상 26:6)는 제 이의 삼 인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용사였으나, 첫 삼인의 힘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23:20-23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 '갑스엘'(Kabzeel)은 유다 남쪽에 있는 한 지방이며(수 15:21;느 11:25), 오늘날의 '길벱 호라'(Khirbet Hora)로 추정된다. 그리고 여호야다는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이었다(대상 27:5;12:27). 이러한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Benaiah)는 다윗 치하에서 그렛과 블렛의 대장(근위 대장)이었으며(8:18;20:23), 또한 2만 4천 명으로 구성된 제 3월 군대의 장관이었다(대상 27:5). 그리고 브나야는 아도니야의 반역을 분쇄한 공으로 솔로몬 치하에서는 요압 대신 군대 장관이 되기도 하였다(왕상 2:28-35).
효용한 일(* -* , 라브 페알림) - 직역하면 '위대한 행위', '큰 일'이란 뜻이다. 구체적으로 그 '큰 일'은 여기서 세가지로 제시된다. 즉 (1)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인 행위, (2) 눈 올 때에 함정에 내려가서 사자를 죽인 행위, (3) 막대기로 창을 가진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인 행위 등이다.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고 - 여기서 '아리엘'은 누구를 의미하는가 ? 이에 대한 견해는 둘로 나뉜다. (1) 혹자는 '아리엘'(* )이 '신(神)의 사자(獅子)'란 의미로서, '아리엘의 아들 둘'은 '사자같이 용맹스런 두 용사'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Keil, Lange). 또한 이에 대한 증거로서 지금도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은 매우 뛰어난 용사를 가리켜 '아리엘'이라 부른다고 한다(Bochart). (2) 반면 혹자는 '아리엘'이 모압 왕의 이름일 것이라고 추측한다(Smith, Ewald, Thenius). 따라서 이 두 사람은 모압 왕 아리엘의 아들들(왕자들)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원문상으로, 본 구절에는 '아들'이란 단어가 들어있지 않다(한글 개역 성경에서 이 용어를 삽입한 것임). 따라서 이 견해를 따를 경우 '아리엘의 두 사람'이라는 애매한 말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2)의 견해 보다는 (1)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눈 올 때에...
한 사자를 죽였으며 - 팔레스틴의 사자는 페르시아 산(産) 사자에 속한다. 한편 구약 시대에 사자의 출현은 매우 흔했다. 따라서 성경은 사람이 사자에게 물려 죽은 사례들을 여려 군데에서 기록하였다(왕상 13:24;20:36;왕하 17:25). 이 사자들은 추운 날 눈이 많이 내려 먹이가 궁해지면 민가로 내려와 사람들을 먹이로 삼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러한 식인 사자를 잡기 위해 함정(큰 구덩이)을 만들곤 하였는데, 그때에 갈고리와 같은 도구를 사용하였다(겔 19:4, 8). 그런데 '브나야'는 맨몸으로 '함정'(* , 보르-'큰 구덩이')으로 뛰어들어가 사자를 때려잡은 것이다(삿 14:6;삼상 17:34-36).
장대한 애굽 사람 - 병행 구절인 대상 11:23에 보면, '그 사람의 키가 다섯 규빗이요 그 손에 든 창이 베틀채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대 성경의 도량법상 1규빗이 대략 45.6cm이므로, 그의 키는 무려 2m 30cm에 이른다. 이러한 자를 브나야가 막대기 하나로 대결하여 그 장대한 애굽 사람의 손에 든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찔러 죽임으로 이겼다고 하니, 우리는 여기서 브나야의 용맹과 괴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다윗이 저를 세워 시위대 장관을 삼았더라 - 시위대는 왕의 근위대를 의미하며, 이는 사형 집행 기관인 '그렛' 부대와 왕명을 급히 전달하는 '블렛' 부대로 구성되었다<8:18>.
< 설 교 >
실력을 겸비하라
삼하 23:18-23
사무엘하 23장 8-39절은 다윗의 용사 중에 가장 뛰어났던 용사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23:8-12절은 첫 삼대 용사인 요셉밧세벳과 엘르아살과 삼마를, 사무엘하 23:13-23절은 둘째 삼대 용사인 아비새와 브나냐를, 그리고 사무엘하 24-39절은 다윗의 삼십인 용사의 출신지와 더불어 소개합니다.
먼저, 아비새는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로 요압과 아사헬의 형제이었고, 훗날 다윗의 큰 용사 가운데 한 명이 되었습니다. 그는 매사에 용감하고 희생적이었고 특히,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부터 다윗에게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아비새는 동생 아사헬을 죽인 아브넬에게 복수하였고, 다윗을 반역한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암몬과 아람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고 또 다윗의 말년에 있었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그는 거인 이스비브놉을 죽여 다윗을 구출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브나야로 갑스엘 출신 제사장인 여호야다의 아들이었습니다. 다윗 시대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으로 구성된 부대를 지휘했고 또 모압의 두 장수를 죽이고, 함정에 빠져 있는 사자를 죽이며, 창을 가진 애굽 거인 둘을 창 하나로 죽일 만큼 대단한 용사였습니다. 압살롬 반란과 아도니야 반란 때도 끝까지 다윗에게 충성을 다했으며, 후에 요압과 시므이, 아도니야를 죽이고 솔로몬 왕위 계승에 결정적 공을 세워 솔로몬 시대에는 군사령관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들이 다윗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뿐만 아니라 다윗을 도울 수 있는 실제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마음만 앞선다고 되는 것도 아니라 누군가를 돕기 원한다면 실력도 있어야 합니다.
다윗을 도왔던 많은 용사는 다윗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다윗을 도울 수 있는 실제적인 실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다윗뿐만 아니라, 바울이 신약에서 큰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도, 바울의 주변에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의사로서 바울을 따라다니며, 바나바는 사역의 동역자로 바울의 사역을 도왔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든든한 후원자로 바울 곁에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어떤 실력을 쌓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어떤 은사를 사용하고 계십니까? 마음만 있다고 다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론 마음이 너무 앞서서 도리어 짐이 될 때도 있습니다.
다윗의 용사들처럼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섬기기 위한 실제적인 실력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가 있습니다. 그 은사를 잘 개발해서 실력을 겸비해야 합니다.
가장 존귀한 자
삼하 23:18-23 / 조성노목사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이니 그는 그 세 사람의 우두머리라 그가 그의 창을 들어 삼백 명을 죽이고 세 사람 중에서 이름을 얻었으니 그는 세 사람 중에 가장 존귀한 자가 아니냐...>(18-19절).
여기서 말하는 <그 세 사람>이란 다윗을 위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에서 물을 길러 온 <세 사람>, 즉 아비새, 브나야, 그리고 뛰어난 익명의 한 용사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셋 가운데서 가장 존귀한 자는 <아비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존귀한 자> 아비새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때로 고난이 예견되는 부르심이라 할지라도 솔선하여 선뜻 나서라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나만은 빠지겠다는 것과는 대조적인 삶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십자가가 끝이 아님을 잘 알기에, 도리어 그게 새로운 삶을 보장하는 생명의 길목임을 확신하기에 사랑을 위해서라면 손해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그런 희생적인 결단으로 누군가가 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크게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둘째, 남을 정죄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탕감 받은 자의 제3자에 대한 탕감 행위입니다. 오늘 우리로 말하면 예수의 피가 그 피를 믿는 자에 대한 정죄함을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정죄함이란 생명의 기운을 꺾고 대립과 반목을 부르며 결국은 모두를 파멸하게 하는 일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기에 모든 대립을 뛰어넘어 오직 남을 위하고 축복하는 일에 모든 시간과 정력을 다 쏟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길을 걷는 자는, 덤으로 받은 자신의 생명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귀하게 여긴다 함은 생의 목적을 이제까지와는 달리 세울 줄 알게 된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욕망과 본능을 충족시키는 인생이 아니라 자기에게 맡겨진 거룩한 사명을 깨닫게 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참다운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 가치의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아쉬운 일이었을까 하고 평가받는 인생이 되라는 것입니다.
<적용>
-본문 19절이 말씀하는 <첫 세 사람>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장대한 애굽 사람>(21절)이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다윗이 시위대 대장>(23절)으로 세운 사람은?
<기도>
주님,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가장 존귀한 자>란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존재 방식이 무엇인지를 깨우치는 기쁨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헛되이 살지 않도록 세상의 본이 되는 사람입니다. 또한 제대로 사는 길을 가며 자신의 유익보다는 남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저희야말로 주 안에서 그런 <존귀한 자>로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게 해주시옵소서.
교회됨을 세워간 다윗의 용사들
삼하 23: 18-39 / 조용호 목사
◈ 주 해
1. 하나님이 다윗을 통하여 하신 말과 다윗의 용사들로 사무엘하는 마무리 된다.
1) 다윗이 성령을 통하여 한 마지막 말은 크게 2가지다.
a) 다윗과 하나님과의 관계와 영원한 언약이다.
b) 다윗과 함께했던 지체들, 즉 믿음의 용사들이다.
2)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에서 이 2가지를 고백할 수 있다면 생명으로 산 것이다.
- 하나님과 나와의 언약관계, 생명의 관계를 회상해야 한다.
- 그리고 나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 생명의 공동체를 함께 세워간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3) 하나님의 생명으로 산 사람에게 남은 2가지는 하나님과 교회지체들이다.
2. 다윗왕국은 다윗 홀로 세운 왕국이 아니라 다윗과 함께 했던 다윗의 용사들과 함께 세운 왕국이다.
1) 특별히 그들은 왕궁에서 시작하지 않고 아둘람 굴에서 함께하기 시작했다.
- 가난하고 소외되고 빚지고 원통한 자들이 다윗 왕국을 세우는 주역들이 되었다.
2) 다윗은 블레셋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척하다가 아둘람 굴로 도망 왔고 그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들이 후에 다윗의 용사들이 된다.
삼상 22: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3. 보잘 것 없는 자들, 아웃사이더들 중에 보석처럼 빛날 가능성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
1) 그들은 다윗과 함께하면서 용사로 세워져 갔고 성경에 그 이름이 기록된다.
2) 우리도 세월이 지난 후, 다윗의 용사들처럼 영적인 수준이 완전히 달라지길 원한다.
3) 오늘 본문의 용사들은 전설로 남았지만 그들도 한때는 비참하고 보잘 것 없었다.
4. 성경은 다윗과 다윗의 용사들의 사랑의 관계성을 보여준다.
1) 3용사는 다윗을 위하여 그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목숨을 걸고 물을 길러온다.
2) 지상명령에 충성한자와 새계명에 충성한자에게 하늘의 상과 칭찬이 있다.
5. 다윗의 위대한 용사들의 출신과 배경 그리고 능력은 다양하다
1) 처음 언급된 10사람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지리적으로 인접한 지역의 출신이다(24-29절).
2) 이어서 북지파들의 지역출신이 열거된다(30-32절).
3) 다시 유다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번에 나오는 사람들은 유다에서도 오지출신들이다(33-35절).
4) 이어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외국인(이방인)이 4명 언급된다(36-37절).
5) 그리고 다시 유다 사람 2명이 언급되고 마지막으로 헷 사람 우리아가 나온다(38-39절).
6. 다윗의 공동체는 유다지파만으로 세워지지 않고, 북지파와 이방인들까지 함께했다.
1) 하나님의 나라, 다윗 왕국에 이방인들까지 동역하여 세웠다는 것은 중요하다.
2) 함께할 수 없는 이질적인 사람들이 다윗(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3) 이방인들과 전쟁을 하던 시대에 이방인들이 다윗의 용사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는 은혜가 있었음을 뜻한다.
7. 성경은 37명의 이름을 한 사람 한사람 적고 있다.
1) 우리는 대부분의 용사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어떻게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웠는지, 어떤 댓가를 지불했는지 모른다.
2)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하나님의 마음에 분명히 새겨져 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니...
8. 다윗의 왕국이 세워지는 과정은 교회가 어떻게 세워져 가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1) 교회의 터는 복음 즉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다.
-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복음을 전하여 교회의 터를 놓았다.
2) 그 복음의 터 위에서 각 성전이 서로 연결되어짐으로 하나님의 처소인 교회가 세워진다.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엡 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엡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3) 다윗의 용사들은 각각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었다.
- 그리고 이 용사들은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하나님의 성전인 다윗왕국이 되어갔다.
9. 우리는 다윗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이름 있고 빛나기를 원한다.
1) 그러나 하나님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교회의 벽돌이 되어준 성도들을 바라보고 있다.
2)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어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있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0. 하나님은 이렇게 세워진 교회(다윗 왕국)을 그리스도의 몸,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신다.
1) 다윗과 그 용사들은 각 지체가 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였다.
2) 어떤 이는 손으로 역사했고, 어떤 이는 발로 역사했고, 어떤 이는 눈의 역할을 하고, 어떤 이는 코의 역할을 하고, 어떤 이는 귀의 역할을 했다.
3) 세상은 나와 같이 되라고 한다. 나와 같아지라고 요구하며 끼리끼리로 모인다.
-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신 지체의 분량(은사)가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다.
- 서로의 다름을 기뻐하고, 그 다름으로 공동체가 아름답게 되는 곳이다.
11. 성경에는 다윗의 용사들은 우리야로 끝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 이들의 이름들이 계속 적힌다.
1) 세상은 몰라주고, 교회도 몰라주어도, 하나님은 그 이름을 아시고 그 심장에 새기신다.
2)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도 잘하였다 충성된 종이라고 하면서 그 날에 상을 주신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눅 19: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 나의 묵상
말씀 앞에 드러난 비참한 존재
베들레헴 동네에서 아버지와 형들에게 무시 받는 다윗을 불러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다윗 같은 사람들이 왕창 모인 아둘람 굴에서 하나님은 다윗왕국을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나를 부르실 때 너무나 약하고 너무나 부족하여 너무나 눈물 많아 부르셨다. 믿는 자들이 존경하는 높은 곳에 있는 자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함께 힘겨워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라고 하셨다. 23년 전에 약한 자를 하나님이 부르셨다. 그런데, 11년 전에 더 약하여졌다. 성도들에게 삶이 부끄러울 정도로 약하여졌다. 너무 약해지니까 자신이 없어졌었다. 그런데, 베들레헴과 아둘람의 사람들을 보니...하나님은 역시 나 같은 자를 기뻐하신다. 문제는 하나님만 자랑해야 하는데...아직도 나는 자기 의와 자기주장의지가 있다. 뭔가가 잘 되면 나를 자랑하고, 내가 잘해서 잘 되었다는 오만한 자리에 앉는다. 나는 나의 약함에 낙심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약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신다. 다만 죄와 교만을 떠나 하나님만 자랑하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2. 복음을 통하여 생명이 조명되다.
하나님은 나의 약함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타내고자 하는 일이 있다고 하신다. 이번 주는 계속 잠을 잤다. 이렇게 많이 잘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잠을 잤다. 무기력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한밤 때 하나님을 높였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기에 주님이 전부이길 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에 하나님만을 자랑했다. 목회를 이렇게 해야지 하면서도 계속 내려놓게 된다. 내 뜻대로 행할 힘이 없다. 내년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은 다가오고... 무언가를 해야 하지만 그것들을 해낼 힘과 방안이 떠오르질 않는다. 그저 하나님께 맡기고 한 걸음 한 걸음 갈 뿐이다. 과연 다윗왕국과 같은 교회는 세워질 수 있을까? 나로서는 않된다. 그러나 주님이 창세전부터 원하셨던 영광스러운 신부와의 결혼을 주님이 포기하실까? 그 사랑으로 인하여 주님은 일하실 것이다. 그리고 더 연약해진 나를 드린다. 나귀 턱뼈처럼 버려져야 하는 나를 드린다. 삼손의 손에 들린 나귀턱뼈처럼 주님의 손이라면 능히 일하실 것이다.
주님의 일을 주님이 하시도록 내 영혼을 드린다. 그리고 오늘 내가 할 일은 한 가지 소원, 주의 얼굴을 구하며 그의 아름다움을 보며, 그의 인자와 신실함을 보는 것이다. 이 죄인에게 베푸신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수없이 넘어지는 나를 일으키시는 신실하심이 크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는 그 사랑을 찬양한다. 주님의 인자와 신실함으로 복음을 통하여 주안에 거한다. 그리고 내 안에 두신 생명으로 인하여 감사를 드린다. 여전히 나의 목자, 나의 생명되신 주님을 찬양한다. 그 사랑이 나로 하여금 다시 꿈꾸게 하고, 다시 일어서게 한다.
◈ 묵상 기도
아둘람 공동체는 주의 영광을 위해 모인 곳이 아니라 그저 살기위해, 그저 어려운 사람끼리 위로받으려고 뭉쳤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위대한 믿음의 왕이 되었고, 비천한 자들은 하나님나라의 용사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위대하십니다. 주님, 아둘람 굴에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일 일이 보이지 않지만 주님을 찬양합니다. 믿음을 더하사 믿음으로 행하게 하옵소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다만, 주의 얼굴을 구하오니 주님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복음을 통하여 생명이 조명되어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내년 교회의 목양과 방향을 주님이 이끌어 주십시오. 저희 교회가 다윗의 공동체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국내외 선교지들이 다윗의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종교개혁주일입니다. 복음을 통하여 생명 얻게 하옵소서. 지옥 가는 영혼이 한 사람도 없는 교회되게 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친히 준비시켜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다윗의 충성스러운 용사들
삼하 23:8-23 / 채주광목사
[들어가는 말]
제가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아주 감명 깊게 본 영화가 있습니다. 그 제목은 <플래툰>입니다. 미국 발음이 ‘프툰’처럼 들려서 아버지가 자꾸 ‘프툰’이라고 우기시기에(?) 저도 그게 아니고 ‘플래툰’이라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은 월남전 배경의 영화인데, 전쟁에서 군인들이 무수히 죽어 나갑니다. 이쪽도 저쪽도 치열한 전투와 극한의 상황 속에서 사람의 심리를 잘 그렸습니다. 배신 장면도 나오고 굉장히 잔인한 장면이 많았는데, 아주 실제적인 전쟁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때 또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가 있었는데, 그것도 전쟁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람보>라고, 이건 그와 완전히 반대로 혼자서 천하무적입니다. 저쪽에서 몇백 명, 몇천 명이 몰려와도 혼자 다 죽입니다. 저쪽은 아무리 총을 쏴도 주인공은 한 번도 안 맞고, 이쪽은 대충 쏴도 저쪽은 다 맞습니다. 만화 같은 영화였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전쟁에서 그렇게 한 사람이 수백 명, 수천 명을 상대로 승리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실제로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폭탄을 터뜨려서 이기면 몰라도, 맞붙어 싸우는 백병전에서 한 사람이 그저 몇 명을 죽이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용사들이 있었다고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1. 첫 번째 ‘세 용사’ (8~12절)
사무엘하 23장은 다윗의 용사들에 대해 말하는데, 다윗을 위해 전쟁터에서 용맹스럽게 목숨 바쳐 싸운 군인들의 명단을 기록합니다. 23장의 뒷부분은 안 읽었지만 맨 뒤에 보면 총수가 37명이라고 나와 있습니다(39). 그런데 세어 보면 사실은 36명입니다. 이 사람들이 어디 족속인지와 함께 죽 명단이 나와 있습니다. 먼저 다윗의 용사 중 가장 용맹한 ‘세 명’에 대한 일화가 간단히 나온 다음에 ‘삼십 명’의 용사들의 이름이 특별한 사건 없이 죽 나옵니다.
역대상 11장에도 다윗의 용사들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무엘하 23장과 역대상 11장 명단 사이에 차이점이 있습니다. 먼저 기록된 용사들의 숫자가 역대상 11장에는 46명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실질적으로 36명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또한 그 두 명단에 모두 나오는 용사들 가운데 이름이 다르고 소속이 다르게 나오는 등 서로 일치하지 않는 예들이 있다는 겁니다.
두 명단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 명단이 나오는 문맥에 있습니다. 앞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다릅니다. 역대상 11장의 명단은 다윗이 왕이 되는 대관식이 나온 다음 명단이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왕으로 통치를 시작할 때가 그 명단을 작성한 배경입니다.
그뿐 아니라 역대상 11장에 기록된 다윗의 용사 46명은 훨씬 더 많은 용사들의 일부입니다. 명단에 굉장히 많은데 그중 일부만 적은 겁니다. 그리고 다음 장인 역대상 12장에서는 다윗을 도운 용사들의 이름을 추가적으로 죽 말해 줄 뿐 아니라, 용사들을 도운 병사들의 숫자도 지파별로 몇 명인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 오늘 본문인 사무엘하 23장에 기록된 명단은 다윗을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 다음에 나옵니다. 22장이 시편 18편과 거의 같은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 다음에 이 명단이 나온다는 것은, 사무엘하 이야기의 결론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유대인 주석가 아브라바넬이라는 사람은 역대상 11장에 나오는 용사의 명단과 사무엘하 23장에 나오는 명단이 왜 다른가 하는 이유를 이런 식으로 설명합니다. 역대상에 기록된 다윗의 용사들은 다윗이 왕이 되는 즉위식에 참석해서 충성을 선언한 인물들이라는 겁니다. 반면, 여기 사무엘하 23장에 나오는 용사들은 끝까지 다윗에게 변함없이 충성한 사람들, 즉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다윗을 떠나지 않고 다윗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던 진짜 충신들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역대상에 나오는 수가 더 많은 것은 당연합니다.
만약 이런 유대인 주석가의 설명이 맞는다면, 사무엘하 23장에 기록된 용사들은 단순히 용맹하고 싸움을 잘하는 장수들이 아니라 다윗에게 끝까지, 변함없이 충성했던 용사들이었고 충신들이었던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여기에 37명이었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적으로는 36명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안 나오고 빠진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은 놀랍게도 가장 다윗을 위해서 많은 일을 감당했던 사람이었던 동시에 또한 다윗에게 가장 골칫거리가 되었던 요압입니다. 요압은 이 명단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놀랍고도 큰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1) 요셉밧세벳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지휘관의 두목이라 그가 단번에 팔백 명을 쳐 죽였더라” (8절)
첫 번째로 소개된 용사는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인데,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합니다. 이 이름은 별명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역대상 11장 11절에 학몬 사람의 아들 야소브암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야소브암도 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밧세벳은 역대상 12장에 따르면 다윗이 블레셋에 망명해서 시글락에 머무를 때 다윗의 부하가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해마다 첫째 달에 2만 4천 명을 이끌고 나가서 전쟁을 했습니다(대상 27:2).
여기 보면 그는 군지휘관이었고 그중에도 ‘두목’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군지휘관의 두목’이라는 말은 가장 용맹한 ‘세 사람(용사)의 우두머리’였다는 겁니다. 세 사람 중에도 대장이었다는 말입니다.
여기 ‘세 용사’ 또는 ‘세 사람’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100%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죽 성경을 읽어보면 ‘세 사람’이라고 되어 있어도 사실은 세 명이 아닙니다. 앞에도 ‘세 사람’이라고 나오고 뒤에도 ‘세 사람’(또는 ‘세 용사’)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의 우두머리’로 나오는 사람이 두 명입니다. 요셉밧세벳이 그렇고, 뒤에 보면 요압의 아우 아비새도 세 사람의 우두머리라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두머리라는 말입니까? 세 명 중 우두머리가 두 명이면 나머지 한 명만 부하라는 말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닙니다.
첫 번째 세 용사가 있고 두 번째 세 용사가 있었다는 겁니다. 특A급인 최고의 용사 세 명이 있었고, 그다음 레벨 세 명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특A가 세 명, A가 세 명이었습니다. 그다음 세 명도 엄청난 용사들인데, 그들을 능가하는 세 명이 또 꼭대기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일 최고의 특A급 세 명의 우두머리가 바로 요셉밧세벳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다시피 이 사람은 여기서 우리가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별로 알려진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게 최고의 용사인데 전혀 나오지 않다가 여기 잠깐 나오고 역대상에 잠깐 나옵니다. 오히려 요압 같은 사람은 여기 끼지도 못하는데 계속 나왔습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인정해 주고 사람들 앞에 얼마나 잘 보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시각은 정확하게 우리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이스라엘에는 잘 알려졌는데 다른 민족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지 몰라도, 이런 요셉밧세벳 같은 사람은 최고 중의 최고였다는 것을 여기서 인정해 준다는 겁니다.
요셉밧세벳은 특수부대 30명 중에도 세 용사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그중에도 첫 번째 세 용사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무용담이 무슨 신화나 전설 같은 스케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엄청난 용사였는지, 단번에 800명을 쳐 죽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일종의 히브리어 과장법입니다. 이 말은 창을 들고 한 번 휘둘렀더니 800명이 다 넘어졌다는 말입니다. 실질적으로 그게 말이 됩니까? 800명을 한 번 휘둘러 다 닿을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800명을 죽였더라도 한 번 휘둘러서 다 죽인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엄청난 용사, 최고의 용사 중의 최고의 용사였던 사람이 바로 요셉밧세벳이라고 하는 ‘생소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하나님은 잘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2) 엘르아살
‘세 사람’의 두 번째 용사는 엘르아살입니다.
“9 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다윗과 함께 한 세 용사 중의 한 사람이라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거기에 모이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간지라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고 10 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 (9-10절)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웁니다. 여기 보면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상대방 군대를 향해 조롱하고 도발하는 역할을 말합니다.
다윗이 어렸을 때 군대에 있는 형들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주려고 갔는데 그때 블레셋에서 엄청난 거인 장수 골리앗이 나와서 싸움을 돋우고 있었습니다. 그를 ‘싸움을 돋우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가 나와서 막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그 군대를 저주하고 하나님을 저주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워낙 대단한 장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특A급 세 용사가 블레셋을 상대로 그것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여기서 ‘싸움을 돋우었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싸움을 돋우었다고 했을 때와 같은 말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전쟁 진을 갖추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러갑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후퇴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갔다는 것은, 싸움을 피해 평야에서 높은 데로 올라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백성들이 무서워서 후퇴했을 때 엘르아살이 일어나 나가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여기 특이한 표현이 나오는데 “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검을 든 손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될 때까지 싸워서 이겼다는 겁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그를 통해 큰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10).
그때 산으로 피했던 백성은 전투가 끝나자 내려왔고, 그들이 한 일은 그저 따라가며 전리품을 취하는 것뿐이었다고 설명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승리의 기쁨에 그들도 동참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엘르아살도 대단한 용사입니다. 혼자서 다 하니까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런 장군만 하나 있으면 다른 군인들은 든든했을 겁니다.
3) 삼마
특A급 ‘세 사람’의 셋째 용사는 삼마라는 사람입니다.
“11 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기가 올라 거기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되 12 그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들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11-12절)
삼마에 대한 설명 역시 블레셋과의 전투를 배경으로 합니다. 같은 전투에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여러 전투가 있었고 세 사람은 각각 공을 세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블레셋이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곳의 지명이 바로 레히라는 곳입니다. 레히와 연결되는 인물이 바로 삼손입니다. 사사기 15장에서 삼손이 블레셋을 당나귀 턱뼈로 다 쳐 죽인 곳이 바로 레히입니다. 그후 목이 말라서 하나님께 간구하니까 하나님이 물을 주신 바로 그곳입니다.
엘르아살의 전투가 세 용사의 도발로 시작된 것이었다면, 삼마의 전투는 블레셋이 약탈하기 위해 침략한 것을 막아내기 위한 전투였습니다. 레히에는 녹두나무가 가득한 밭이 있었는데 블레셋이 바로 그것을 약탈하기 위해 침략해온 겁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군인들)은 또다시 두려워서 도망했습니다. 하지만 삼마는 홀로 서서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그 밭을 지켜냈다는 겁니다. 혼자서 지켜냈으니 얼마나 놀라운 사람입니까?
아마도 그는 그 순간 블레셋과 싸우면서 오래전 바로 이 장소에서 자기 민족을 위해 이 블레셋과 싸웠던 삼손을 생각하며 싸웠을지 모릅니다. 성경은 그가 승리한 것을 가리켜서도 역시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12)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신 큰 구원이라고 설명합니다.
2. 세 용사의 충성심을 보여주는 베들레헴 우물 사건 (13~17절)
지금까지는 특A급 세 용사의 이름을 소개하고, 그들을 유명하게 만든 사건들을 짧게 설명했는데, 13절 이후에는 그들이 어떻게 다윗의 최고 엘리트 용사의 반열에 들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한 사건을 말해 줍니다.
앞선 이야기들이 세 용사의 신화적이고 전설 같은 전투 능력을 이야기했다면, 이 사건은 다윗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을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즉, 그들이 ‘세 사람’(최고의 용사)의 영예를 얻은 것은 남들보다 훨씬 강한, 다윗 왕을 향한 충성심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18절 이후에 보면 두 번째급 세 사람(용사)이 나오는데, 그것은 두 번째 세 용사가 아니라 첫 번째 세 용사였다고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첫 번째인지 두 번째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문맥을 보면 첫 번째 세 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세 용사도 용맹하고 엄청난 장수였지만 그들은 다윗을 곤란하게 만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세 용사 중 두 명만 이름이 나옵니다. 아비새와 브나야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이름이 안 나오는데 학자들은 아마도 요압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일부러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뺐다는 겁니다. 워낙 불충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 명은 다윗을 힘들게 할 때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13~17절에 나오는 세 용사는 그들이 아니라 첫 번째 세 용사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사무엘서에서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들 아비새와 요압은 언제나 다윗이 사울과 대적하는 문맥에 등장합니다. 물론 요압은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도 군대장관으로 나가 싸웠습니다. 그러나 블레셋과의 싸움에는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을 길어 오는 사건의 주인공 세 사람은 앞의 세 사람, 즉 요셉밧세바, 엘르아살, 삼마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서에서 주인공들의 이름을 정확히 드러내지 않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앞에서는 이름뿐 아니라 누구 아들이라고까지 다 나오는데 왜 여기서는 이름이 안 나옵니까? 그것은 유대인의 전통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할 때는 주인공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 유대인의 전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명예를 드높이려고 일부러 순교하며 죽을까 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런 전통이 생겼다는 겁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무엘서는 다윗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둘을 연결해서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후손 중에 메시아(그리스도, 구원자)가 오시는데, 다윗이 메시아에 대한 모형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13절)
‘삼십 두목 중 세 사람’ 즉 30명의 대장 중 세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세 사람’은 다윗의 30 용사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3장에서 전부 37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36명의 용사들의 이름을 기록하기 때문에, 30 용사가 있고 세 명의 용사가 따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평소에 다윗은 자신의 경호 부대의 병력을 30명으로 일정하게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이 37명(또는 36명)의 명단에 이미 죽어서 없는 아사헬(요압과 아비새의 동생)과 다윗이 죽게 만든 우리아와 같은 사람의 이름도 여기 들어가 있습니다. 전쟁에서 이렇게 죽는 용사가 나올 때마다 30명에 새로 충원해야 했습니다. 한 명이 죽으면 채워 넣고, 또 다른 사람이 죽으면 또 채워 넣다 보니까, 36명 또는 37명의 이름이 나오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세 사람’은 다윗의 ‘삼십 용사’ 안에서도 최고 엘리트 트리오였다는 것, 그 최고 엘리트 트리오가 둘이었다는 것, 그중에도 가장 최고가 처음 나온 세 사람이었다는 것, 그 외에도 엄청난 세 사람이 또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첫 번째 세 용사는 누구보다도 다윗을 향한 충성심이 대단히 깊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14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15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14-15절)
블레셋과의 전쟁 중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가 있는 곳에 베들레헴 성문 우물이 있었습니다. 이 배경이 언제인지도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아둘람 굴’(13)이 언급되기 때문에 다윗이 왕이 되기 전 아둘람 굴에 피해 있을 때 사울 군대가 블레셋 군대와 싸우고 있었고 다윗은 다른 데 있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반면 ‘르바임 골짜기’(13)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사무엘하 5장에 나오는 블레셋과의 전투를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전투가 어떤 전투였든지 간에 다윗이 블레셋과 대치하는 중 갑자기 블레셋 군대가 진치고 있는 베들레헴 우물물이 마시고 싶었습니다. 베들레헴이 어떤 곳입니까? 자기 고향입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약간 남쪽으로, 블레셋과 가까워 블레셋이 잦ㄹ 쳐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아마도 이 우물은 다윗이 어릴 때 양을 치면서 물을 마시게 하고 자기도 마시곤 했던 우물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기가 물을 마시던 그 우물이 갑자기 생각난 겁니다. 그래서 ‘저 베들레헴에 있는 우물물을 내가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깊은 생각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그냥 해본 말입니다.
물을 마시고 싶은데 ‘물 중에서도 내 고향 베들레헴에 있는 우물물을 마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때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멀리 떨어진 산성에 있었습니다(14). 그런데 놀랍게도 세 용사는 목숨을 걸고 그 먼 길을 달려가서 우물물을 떠서 가지고 옵니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16절)
‘나는 베들레헴 우물물 좀 마셨으면 좋겠다.’라고 할 때 만약 여러분이 다윗의 부하였다면 어떤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아무 물이나 마시지, 베들레헴이 어딘데 무슨? 게다가 블레셋 군대가 거기 있는데 무슨 베들레헴 우물? 그냥 이거나 드세요.’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 용사가 얼마나 충성스러운 사람들인가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게 뭐라고 왕이 원한다고 목숨을 걸고 가서 물을 떠오지 않습니까? 가는 길에 블레셋 군대를 뚫고 가야 합니다. 또 물을 떴어도 오늘 길에 다시 블세셋 군대를 뚫고 와야 합니다. 이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왕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엄청난 충성심입니다. 이 사람들이 괜히 최고의 엘리트 트리오 세 명 안에 들어간 게 아닙니다.
이 세 용사가 다윗이 목을 축이도록 목숨을 걸고 적진 안에 들어가 물을 길어 왔고, 그때 다윗은 그 용사들의 행위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땅에 쏟아부어 버립니다. 다윗이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은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다. 이 사람들이 멀리 베들레헴까지 가서 블레셋 군대를 뚫고 우물에 가서 물을 떠 오는 동안 다윗은 이미 물을 실컷 마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물을 떠 왔을 때 ‘주여, 제가 이 물을 어떻게 마시겠습니까?’라고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그냥 사이드 스토리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마시면 될 것을 하나님께 부어서 드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배를 드린 겁니다.
<삼국지>에서 조자룡이 유비의 부인들과 아들을 구하기 위해 홀로 적진에 들어가 온갖 위기를 벗어나서 아들을 구하여 왔을 때, 유비가 구해온 그 아들을 땅에 던져 버리고 조자룡에게 가서 크게 위로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또 6.25 한국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이 압록강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해서 군인들이 압록강의 물을 수통에 담아 온 적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17절)
다윗이 세 용사의 목숨값인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버렸다는 것은 그가 정말 자기 용사들을 아끼며 위하는 통치자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이 ‘곡식을 벨 때’(13)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약탈하기 위해 침공하기 좋은 때였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곡식을 벨 때이니까 그것을 빼앗으러 오는 게 아닙니까. 또한 ‘곡식을 벨 때’라는 것은 다윗의 갈증도 어느 정도 설명해 줍니다. 이때는 건기의 끝자락으로 물이 귀한 때였습니다.
이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세 명의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깨고 들어가 우물을 길어 왔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업적입니다. 다윗이 말한 것처럼 그들이 길어 온 물은 그들의 목숨값입니다. 그들의 피입니다. 그냥 물이 아닙니다. 같은 물이라도 콸콸 나오는 것과 한 방울이 아쉬울 때 마시는 것은 가치가 다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마시지 않고 땅에 부어버립니다.
다윗이 훌륭한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이 이끌어주셔서 된 것이고, 또한 그를 따르는 충성스러운 부하들의 도움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다윗이 혼자 잘나서 위대한 왕이 된 게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의 부하들은 왜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다윗을 위해 충성하며 싸웠습니까?
첫째, 다윗의 용맹함을 그의 부하들이 그대로 따랐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졸장부인데 부하들만 용맹한 게 아닙니다. 다윗은 어떤 용사보다도 용맹하고 뛰어난 용사였습니다.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는 리더였습니다. ‘얘들아, 나는 여기 있을 테니까 나가서 싸워라.’ 하는 리더가 아니라, ‘나가자! 나를 따르라!’ 하던 리더였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그때는 어렸지만 그 후의 전투에서도 어떤 사람보다 용맹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그런 다윗 왕의 모습을 보고 배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용사들이 어디서 갑자기 나온 게 아니라 보고 배워서 그와 같이 용맹한 용사들이 나온 것입니다.
보고 배우는 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자녀들이 듣고 배우는 게 아니라 보고 배운다는 것은 누누이 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이거 하지 마라.’라고 해도 잘 안 됩니다. 그런데 아빠 엄마가 모범을 보여줄 때, 하라고 안 해도 따라 합니다.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다윗은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그것을 배운 겁니다. 사울은 개인적인 질투와 야망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면서, 지금 나가서 블레셋과 싸워야 하는데 다윗을 잡아 죽이겠다고 쫓아다녔습니다. 군사력을 낭비했습니다. 개인의 질투 때문에 눈이 멀어서 군사력을 낭비하는 사람이었던 사울의 부하들은 그런 그의 명령을 따르긴 했지만 마음속 깊이 충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의 명령이 이스라엘과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정말로 하나님을 위하고 우리 이스라엘을 위한다. 백성을 위해 싸우는 분이시다.’라고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전심으로 다윗에게 충성했고 그의 말을 따랐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따랐지, 못 믿을 만한 사람이면 어떻게 따르겠습니까?
또한, 다윗은 왕이었음에도 자기가 잘못하고 죄를 지었을 때 바로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부하들은 그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다윗은 갈증 해소를 위해 부하들에게 베들레헴에서 우물물을 길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하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리한 요구였음을 깨닫고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부하들의 충성심을 일으키고 그를 더욱더 따르게 한 요소였던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때 용사들이 물을 떠 왔는데 목숨 걸고 떠 왔으니 얼마나 많이 떠 왔겠습니까? 근데 그때 다윗이 그것을 받아서 마시면서 ‘이야, 시원하다!’라고 한다면 다른 용사들의 사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이것은 이들의 목숨값입니다.”라고 하며 하나님 앞에서 부어버릴 때, 충성심이 활활 타오르며 ‘내가 저분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리라.’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다윗보다 훨씬 더 위대한 리더이십니다. 자신이 생명까지 주신 분입니다. 성도는 완전한 리더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스스로 생명을 내어주는 용기와 희생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명을 위해, 또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면 ‘나도 예수님을 위해 내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다.’ 하는 결단이 나오는 겁니다.
가끔 선교사님들이 선교지에서 고생하다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특히 이슬람 국가에서 처형당하거나 테러범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슬프고 낙심이 됩니다. 어떤 때는 의문도 듭니다. ‘왜 하나님은 저분들을 지켜주지 않으셨나? 이것은 헛된 죽음이 아닌가?’ 그러나 실제로 돌아가신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낭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충성심 때문에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3. 두 번째 ‘세 용사’ (18~23절)
1) 아비새
“18 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이니 그는 그 세 사람의 우두머리라 그가 그의 창을 들어 삼백 명을 죽이고 세 사람 중에 이름을 얻었으니 19 그는 세 사람 중에 가장 존귀한 자가 아니냐 그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그러나 첫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18-19절)
여기 “세 사람”이 나오는데 또 “첫 세 사람”이 나옵니다. 이것만 보아도 요셉밧세벳, 엘르아살, 삼마로 구성된 첫째 세 사람과 구별되는 둘째 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A급 세 사람 트리오가 있었고, 그다음인 A급 트리오가 있었는데, 그중의 우두머리가 아비새였다는 겁니다.
역대상 11장을 보면 ‘세 사람’의 반열에도 ‘첫째’와 ‘둘째’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는 둘째 세 용사의 우두머리였는데, 왜 그를 자꾸 ‘요압의 동생’이라고 강조하는가 하면 요압이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요압의 이름이 여기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요압이 너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굳이 그의 이름을 넣지 않아도 되어서 그렇다고 말하지만, 그것보다는 그가 지나치게 다윗의 일을 간섭하고 개입하면서 아브넬, 압살롬, 아마사 같은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그래서 다윗에게 불충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용사들은 단순히 잘 싸우는 군인이 아니라 다윗에게 충성하는 충신들이었습니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이야기는 첫 번째 용사인 요셉밧세벳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가 한 번 휘두르니까 300명이 죽었습니다. 그는 두 번째 세 사람에 들었는데, 첫 번째 세 용사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그의 충심이 미치지 못했다는 겁니다. 단순히 군사력이 모자랐다는 게 아니라, 다윗을 향한 마음이 첫 번째 세 사람보다 못했다는 말입니다.
2) 브나야
둘째 세 사람의 두 번째 용사는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입니다.
“20 또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이니 그는 용맹스런 일을 행한 자라 일찍이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고 또 눈이 올 때에 구덩이에 내려가서 사자 한 마리를 쳐 죽였으며 21 또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의 손에 창이 있어도 그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려가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그를 죽였더라” (20-21절)
그는 다윗 아래서 블렛 사람과 그렛 사람의 지휘관이 되었고(삼하 20:23), 후에 아도니야의 반란 때 솔로몬을 지지하고 아도니야를 처단하는 업적을 세운 사람입니다(왕상 2:25). 또 솔로몬 아래서 요압을 대신해 군대장관이 됩니다(왕상 2:35). 본문은 그런 브나야가 어떻게 자신의 용맹을 처음 알렸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는 유다의 최남단인 에돔 접경 지역의 도시(수 15:21) 갑스엘 출신의 용사인데,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그의 무용담이 세 가지나 나옵니다.
먼저, 그는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다고 나오는데(20), 원어에는 ‘아리엘 둘을 쳤다.’라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리엘이 두 명이라는 식으로 보일 수 있기에 개역개정은 ‘아리엘의 아들’로 고쳐 번역했습니다.
둘째로, 브나야는 눈 오는 날 구덩이 안에 내려가 사자를 죽였습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부족 가운데 용사로 인정받으려면 사자 사냥에 성공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삼손도 사자를 죽여 자신의 용맹을 인정받았음을 생각할 때, 사자와 싸워 이기는 것이 용사의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덩이에서 사자와 싸우는 것은 절대적 힘에서 밀리는 사람에게 불리합니다. 왜냐하면 움직일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눈 오는 추운 날은 사자에게 더 유리한 환경입니다. 그런데 브나야는 사자를 이겼을 뿐 아니라, 그것도 악조건에서 이겼을 정도로 엄청난 용사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는 막대기로 장대한 이집트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고 그 창으로 그를 죽였다고 되어 있습니다(21). 다윗도 그랬습니다. 골리앗을 죽일 때 그의 칼로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이 사람은 역대기에 의하면 키가 ‘다섯 규빗’의 ‘거인’입니다. 220~230 센티미터(7’4“)나 되는 엄청난 거인입니다. 지금 NBA 선수 중 최장신 정도 되는 키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묘사는 브나야가 다윗과 비슷하게 용맹한 장수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22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행하였으므로 세 용사 중에 이름을 얻고 23 삼십 명보다 존귀하나 그러나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다윗이 그를 세워 시위대 대장을 삼았더라” (22-23절)
시위대 대장을 삼을 정도로 용맹한 장수였지만 앞의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역시 충성심에서 그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세 사람과 둘째 세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전투 능력보다는 충성심이었습니다.
[나가는 말]
첫째 세 사람과 둘째 세 사람인 여섯 명 모두가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세 사람 중 세 번째 용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을 배신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게 바로 요압이었을 것이라는 데에 대부분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그래서 요압은 이 37명의 용사 명단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비새나 브나야는 용맹했고 공을 많이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사실은 무모하게 행동할 때도 많았습니다. 사자가 구덩이에 빠졌는데 왜 일부러 거기 들어가서 싸웁니까? 참 무모한 일입니다. 거인과 막대기로 싸운 것도 무모한 일입니다. 공은 세웠지만 무모했고 말을 잘 안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는데도 왜 오늘 본문에서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쭉 합니까? 이렇게 거칠고 제어가 안 되고 막 나갈 수 있고 조폭과 같이 될 수 있던 사람들이 다윗을 만났기 때문에 용맹한 장수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훌륭한 리더를 만남으로 변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계는 있지만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형편없는 사람들이었고 그냥 놓아두면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는 인생들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어 사도가 되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는 놀라운 사람들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이 성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누구를 만나느냐, 어떤 리더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최고의 리더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참된 리더, 최고의 리더이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가르침과 질책 속에서 성장하는 사람은 반드시 값지고 귀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요압처럼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자기가 마치 왕인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가면, 여기서 요압의 이름이 빠진 것처럼 주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어느 용사보다 요압이 제일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 제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명단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인정을 받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싶습니까? 물론 다 받으면 좋겠지만, 하나님의 인정은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인생을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어떻게 따르는지를 배워야 하고 연습해야 하고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신실한 제자로, 인정받는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윗의 또 다른 용사들
삼하 23:18-39 / 이국진목사
지난 시간에 우리는 다윗의 세 용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세 명의 용사들이 다윗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을 내어놓고 충성하는 그 모습이 참 너무나도 감동적인 모습이었음을 우리가 살펴볼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용사들 뿐만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는 그 외에 다른 다윗의 또 다른 용사들의 이름이 수없이 많이 열거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요.
그 가운데서도 오늘 두 사람의 이름이 특별하게 먼저 언급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18절 말씀에 보면 아비새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먼저 특별하게 언급해 주고 있는데요. 이 아비새라고 하는 사람은 300명을 한꺼번에 죽일 정도의 용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시간에 살펴본 세 용사의 두목 역할도 했었다고 할 수가 있겠고요. 하지만 그 능력으로 따지자고 한다면 그 세 용사에게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해 주고 있습니다.
세 용사들의 전과는 너무나도 대단한 것이기 때문에, 정말 뛰어난 용맹을 보여주었고, 전과를 보여주어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그 본문에 아주 특별하게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아디노라고 하던 사람은 800명이라고 하는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엘르아살이라고 하는 사람은 이 모든 이스라엘 민족들이 군사들이 다 물러갔을 때, 혼자 나가서 블레셋과 싸워서 전쟁을 해서 이길 정도의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졌고, 삼마라고 하는 사람도, 삼마라고 하는 사람도 모든 이스라엘 민족들이 다 도망갔으나, 혼자 나가서 싸울 수 있는, 그런 어마어마한 세 용사들이 있었는데, 그 용사들에 비해서는 조금 약간 공적이나 그 전과가 조금 낮은 사람들의 이름이 오늘 기록되어 있는데요.
물론 이 용사들도 세 용사들과 비교해 본다면, 조금 급이 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용사들도 아주 대단한 용맹을 보여준 사람들이고, 다윗을 위해서 아주 충성을 다한 그런 용사들이었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이름을 한 사람의 이름이 더 나오고 있는데요. 브나야라고 하는 사람의 이름이 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장대하게 키가 큰 애굽 사람을 죽였다고 21절에 기록하고 있는데, 아마도 골리앗처럼 그렇게 어마어마한 큰 장수를 쓰러뜨린, 그 엄청난 일을 이 브나야가 했을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23절의 말씀에 보면 이 브나야도 세 용사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두 용사의 이름을 먼저 기록한 다음에, 그 이후에 24절서부터는 30 용사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4절 말씀에 보면 요압의 아우 아사엘은 30명 중에 하나요 하면서, 30 용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그런데 24절부터 39절까지 숫자를 하나씩 하나씩 세보니까 총 30명이 아니라 31명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30 용사라”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서, 도대체 31명인데 왜 30명이라고 이야기를 하나 궁금증을 자아내는 그런 본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39절에 보면 도합 37명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렇게 세 보고 저렇게 세 보아도 37명이 나오지는 않아서 도대체 37명이 누구누구를 포함하는 것이 37명인지 구체적으로 확인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문제가 오늘 본문에 조금 있습니다.
아마도 설명을 하자고 한다면, 세 용사라고 하는 그 표현은 굳어진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용사가 30명이든 31명이든 32명이든, 30명의 용사 30 용사라고 하는 말이 하나의 그 숙어처럼 굳어진 표현처럼 되어 있어서, 다윗의 아주 뛰어난 아주 30명의 용사들이라고 하는 그 표현이 다윗의 아주 충신들이고 뛰어난 용사들을 가리키는 그런 명사처럼 사용되었기 때문에, 31명을 30명이라고 표현했을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표현할 때 뭐라고 표현하죠. 팔도강산이라고 하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런 말을 들어보셨나요? 예 들어봤을 겁니다. 우리나라를 팔도강산이라고 표현하는데, 팔도강산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8개의 도가 있기 때문에 팔도강산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도가 8개입니까? 더 많습니까? 남쪽만 해도 벌써 9개의 도가 되는 것이고, 특별시와 광역시 등등 이런 것들을 다 포함하게 된다고 하면, 이제는 더 이상 팔도강산이라고 하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전 사람들은 그 표현이 아주 익숙해져 버려서, 우리나라를 표현할 때, 도가 몇 개인가는 상관없이, 우리나라는 팔도강산 아름다운 팔도강산이라고 하는 말을 표현하는 것처럼, 하나의 익숙해져 버리고 굳어져버린 표현을 우리가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30 용사 30 용사라고 하는 것은 다윗과 함께 했던 아주 뛰어나고 아주 용맹스러운 용사들을 맨 처음 구성한 그 용사들을 의미하는 단어일 수 있겠는데, 그 30 용사 속에 또 다른 사도들이 포함되어 있는, 다른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는 그런 경우가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열두 제자 열두 제자라고 하는 말을 쓰는데, 가룟 유다가 빠져나가도 열두 제자 12이라고 하는 말이 하나의 숙어처럼 사용되는 것처럼, 이 30 용사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다윗이 데리고 있었던 아주 용맹스러운 그런 신하들을 가리키는 용어였을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37명이라고 39절 말씀에 기록해 놓고 있는데, 그 37명이 누구까지 포함해서 37명인가는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아마도 31명의 용사들과 그리고 아비새와 브나야와 다윗과 그리고 아마 요압까지 포함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아니면 다른 장수들을 더 포함하면 37명일까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다윗에게 어떤 용사들이 있었는가? 다윗에게는 한 사람의 용맹스러운 그 용사들 용사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 사무엘라 23장의 말씀을 쭉 살펴보면, 다윗의 에게는 세 용사가 있었고, 또 두 용사가 있었고, 30명 30 용사가 있었고, 세어보면 37명의 용사가 되는, 그런 어마어마한 다윗을 돕는 그 군사들이 다윗과 함께 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총이 어떻게 다윗에게 임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옛날 다윗을 선택하시고, 그리고 기름을 부어주시고, 그리고 고난과 역경의 시간을 많이 흐른 다음에,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세워주시기까지 인도해 주셨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어떤 방식으로 다윗에게 임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먼저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임했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니까, 다윗의 용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던 것이 다윗이 혼자 싸운 것이 아니라, 다윗의 용사들이 있어서, 때로는 세 용사가, 때로는 30명의 용사가, 도합 37명의 용사가, 수많은 용사들이 다윗을 돕고, 다윗과 함께 동고동락을 하면서, 다윗을 위해서 충성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통해서 다윗에게 흘러갔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어떻게 우리에게 오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초자연적인 것을 통해서만 우리들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종종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기적 하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냐면, 초자연적인 기적만을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있을 때,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만날을 내려주셨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내려주셨던 그런 기적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그런 은혜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엘리아가 숨어 다닐 때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통해서, 떡을 공급해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그에게 베풀어 주시기를 기대하고 고대하는 그런 마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얹으신즉, 병이 낫게 되는, 그런 엄청난 기적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기적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망하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기적들이 우리 역사상 있어 왔고,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고 한다면, 그런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우리 가운데 충분히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초자연적인 방법으로만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방법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임하신다고 하는 그 점을 우리가 분명하게 묵상해 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땀을 흘리고 수고하고 애쓴 만큼 먹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지금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농사를 지은 그 대가를 먹는 것은, 내가 직장을 다니면서 그래서 돈을 벌고, 직장을 다니고 또 장사를 해서 수고한 만큼 우리가 소득을 얻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그저 내가 수고한 것이고, 내가 땀을 흘려서 얻은 것이고, 나의 고생과 내 수고로 이 모든 것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만 합니다. 시편 127편의 말씀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리 사람이 깨어 경성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키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깨어 있음이 허사가 되는 것이고, 아무리 내가 수고하면서 집을 쌓아 올린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노력을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 128편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우리의 생각에는 수고하지 않아도 먹고,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축복을 베풀어주실 것만을 기대하고 있을 때가 많이 있는데, 시편 128편에서 복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소개하기를 뭐라고 소개하냐면, 수고한 만큼 먹는 것이 뭐라고요? “하나님의 복 받은 자다.”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요.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살았다고 하는 그 이야기는 다윗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많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양치기 목동에서 왕으로 세우셨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다윗에게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다윗은 손 놓고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천둥과 번개를 내리셔서 블레의 민족을 쫓아내셨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어떻게 삶을 살았는가? 치열한 삶을 살았어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치열한 삶을 살았는데, 그 치열한 삶을 사는 과정 가운데 누가 있었어요? 다윗의 용사들이 있었던 거예요. 함께 싸우고, 함께 피를 흘리고, 고생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었는데,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이 목말랐을 때 베들레헴 우물물을 떠다 바쳤던 그런 세 용사들이 있었고, 또 오늘 본문에서 쭉 열거하고 있는 것처럼, 수많은 용사들이 다윗과 함께 있으면서 싸워주었기에 다윗이 지금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는데,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안 도우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누구를 통해서 나타났는가? 다윗의 용사들의 돕는 손길을 통해서 나타났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3명의 용사들이 있었고, 30명의 용사들이 있었고, 37인의 용사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나타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종종 잘못된 잘못된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병에서부터 치료함을 받는다고 한다면, 정말 하나님만 믿기 원한다고 한다면, 약을 갖다 내버려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신다고 한다면, 병원에 가는 걸 중단해야 된다고 이야기하는 그런 가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는데 왜 우리가 밥을 먹습니까? 밥을 안 먹어도 살아야죠. 그러면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중단해도 된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때는 돕는 손길들과 또 여러 가지 방법들을 통해서 손길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하나님만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것을 버려야만 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그런 구절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오해하기가 쉬운데요. 예를 들자면 홍해 바다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모세는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봐라.”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라.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거니까,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라고 하는 그 메시지를 읽으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드냐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니까, 내가 수고할 필요 없지. 내가 애쓸 필요 없지. 내가 노력할 필요 없지. 내가 왜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을까? 그냥 손 놔야 되는 거 아닌가라고 하는 그런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아직도 너와 함께한 용사들의 숫자가 너무나도 많으니, 내가 미디안을 너의 손에 넘겨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용사들이 너무 많으면 하나님이 구원한 게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 착각할지 모르니까, 용사들의 수를 줄이고 줄이고, 또 줄여서 300명의 용사만 남겨 놓으라고 하신 그 말씀을 보면서, 성경 속에 있는 그런 예들 말씀들을 생각하면서, 그러니까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버려야만 하고, 돈을 버려야만 하고, 혹은 약을 버려야 되고, 우리가 하는 그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그냥 하나님만 온전히 바라고 기도만 하면 된다고 하는 그런 결론을 내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들을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요. 모세가 말하기를 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무것도, 그러니까 모든 경우에 있어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말씀은 지금 그렇게 두려워 떨고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지금 홍해 바다 앞에서 그리고 뒤에서 쫓아오는 군인들을 보면서, 두려워 떨면서 벌벌벌벌 떨고 큰일 났다고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을 때, 모세가 했던 말이 무엇이냐면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두려워하지 말라.” “겁 먹지 말라.” 겁쟁이처럼 그렇게 있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해라라고 하는 말씀이지,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되기 때문에, 일하는 것도 하지 말고, 그리고 어떤 손 쓰는 것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저 하나님이 알아서 저 사과나무에서 사가 떨어질 때까지 입만 벌리고 있어라. 그렇게 의미하는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사울 왕과 다윗의 차이를 찾아본다고 한다면, 사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지 못했고,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두 사람이 행한 모든 일들은 다 똑같습니다. 똑같이 군인들을 데리고 나갔고, 똑같이 싸웠고, 똑같이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러나 사울 왕은 그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에 그 전쟁의 승리가 내가 이룬 승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전쟁에서 나온 전리품들을 자신이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경우에는 정반대였습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래서 그 전쟁 가운데서 전리품을 얻게 되었지만, 그 전리품을 내가 싸워서 이겨서 얻은 전리품이니까, 우리가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우리가 싸워 이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 전쟁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전리품이니, 전쟁에 나가지 아니한 사람들과도 함께 나누어야 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전쟁에서 우리가 싸운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 전쟁 가운데서 이기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그런데 사울은 그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내가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 전리품을 내 마음대로 처분해야 되고, 내 뜻대로 처분해야 되겠다고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반면에,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해 놓고도, 이것은 우리가 승리한 것이 아니기에, 전리품을 우리가 독차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쭉 읽으면서,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들이 기록이 되고 있는데, 그 용사들의 이름을 보면서, 다윗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 다윗에게는 정말 수많은 용사들이 많이 있었구나. 인재들이 많이 있었구나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랑해 주셔서, 정말 다윗에게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붙여주셨구나. 그것을 보고 감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걸 봐야 되는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목해 봐야 될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참 많이 있는데요. 우리에게 물질이 있거나, 건강이 있거나 혹은 행복한 가정이 있거나 자녀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초자연적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통해서 상황과 그 여건과 친구와 동료와 신앙의 공동체와 우리 자녀들과 우리 가정을 통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 모두도 주님 앞에 감사하며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 용사들의 이름을 쭉 열거하는 가운데 여러분들이 용사의 이름들 가운데 아주 친숙하게, 잘 알려진 이름이 있습니까? 전부 생소한 이름들만 나왔습니다. 대부분의 이름들이 다 생소한 장군들의 이름이죠. 생소한 군인들의 이름입니다. 사무엘서에서 별로 등장하지 않았던 장수들의 이름이 여기에 다 기록돼 있는데요. 그런데 한 다른 사람들은 알 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아는 한 사람의 용사가 이 리스트에 있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맨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는 우리야입니다. 39절 말씀에 헷사람 우리야라. 이상 총수가 37명이었다.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을 쫙 열거하는데, 사무엘서를 누가 썼는지 모르겠지만, 이 이름들을 쭉 열거하는 가운데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 가운데 맨 마지막에 누구를 적어놨냐면, 우리야를 적어놨어요. 우리야를! 우리야가 누구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름, 다윗의 생애 가운데 다시 한번 들려주지 않았으면 생각하는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다윗의 수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에, 정말 충성스러운 용사였고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당시에는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아야 된다고 하는 그런 모종의 그런 게 있습니다. 그래서 휴가를 받았는데도 집에 못 가는 거예요.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위해서, 다윗에게 충성하기 위해서 집에 가지도 않고, 그 길거리에서 잠을 자면서 용사들과 잠을 자면서 충성했던 한 용사가 누구였느냐? 우리야라고 하는 용사가 있었던 거예요. 정말 충성스러운 용사였는데,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윗은 그 우리 아를 배신하고 우리 야의 아내를 취하는 그런 파렴치한 죄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자신의 충신을 전쟁터 최전방으로 보내어 교살시켜버리는 그런 파렴치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만일 그의 우리 아이 이름이 중간에 기록됐으면 그나마 얼마나 다행스럽겠어요. 이름을 쭉 나열하면서 중간에 들어가 있으면, 우리 학생들이 시험 보면서 답안지 제출하라고 하면 답안지 제출할 때 나가면서, 답안지를 어디다 넣습니까? 차례차례 위에다 놓고 가면 되는데, 꼭 어디다 넣어요? 중간에! 중간에 집어넣어요. 학생들이. 왜? 시험 못 본 것 같거든요. 자신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내 시험 답안지 제일 먼저 보이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중간에 집어넣고, 다윗의 마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을 열거할 때, 우리야의 이름은 좀 뺐으면 좋겠고, 아니면 그 중간에 어딘가 살짝 숨겨만 놨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되는데, 사무엘서는 아주 적나라하게 다윗이 파렴치범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게 하고, 그리고 이 사무엘하 이제 거의 마무리 짓는 이 시점에, 우리야의 이름을 기록함으로써, 이 다윗의 모습을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까발려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우리들에게 영웅이 될 수가 없어요.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다 모든 장점들이 있고, 이 사람에게는 이런 장점이 있고 저런 장점들이 있고 많은 장점들이 있는데, 우리가 들추어 보지 않아서 그렇지 썩어 문들어져 있는 모습들을 가지고 있는 그런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야의 이름을 적어 놓았으니까, 들켰으니까, 이 모양인데, 우리도 우리가 남들이 보이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가 어떻게 죄악을 저지르는가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는가를, 거룩함으로 우리 자신을 숨기고, 괜찮은 것처럼 번지르한 말로 행동으로 우리를 숨겨 놓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냥 살아가는 것이지, 근데 우리가 만일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고 한다면, 벌거벗은 것처럼, 창피해서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100점짜리 답안지가 없기에, 빵점짜리 답안지만 가지고 있기에,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우리가 지은 그 모든 죄를 다 말갛게 씻기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셨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늘 감사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겸손하게 엎드려야 할 것이고,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다시 한번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보며 살아가고, 하나님의 은총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다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날마다 날마다 나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날마다 기억하면서, 주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주님께 감사하는 가운데 다시 한번 일어서고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과 함께 한 용사들
삼하 23:18-39 / agaape
묵상하기
1, 아비새와 브나야가 어떻게 존귀한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까?
2. 37인 용사의 이름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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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새와 브나야의 공적(18-23)
세 사람의 우두머리 아비새는 창을 들어 삼백명을 죽였습니다. 브나야는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고, 사자 한 마리를 쳐 죽였으며, 막대기를 들고 나가 장대한 사람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죽였습니다. 다윗이 그를 세워 시위대장을 삼았습니다.
2. 용사들의 명단
다양한 지파에 속한 많은 용사들이 다윗과 함께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뤄갑니다. 용사들의 명단에는 요압이 빠져있고, 헷사람 우리아의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용사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사헬, 엘하난, 삼훗, 엘 리가, 헬레스, 이라, 아베에셀, 므븐내, 살몬, 마하래, 헬렙,,잇대,힛대,아스마웻,엘리아바, 요나단, 삼마, 아히암, 엘리벨렛, 엘리암, 헤스래, 바아래, 이갈, 바니, 셀렉, 나하래, 가렙,우리아, 총수가 삼십칠명이었습니다.
적용
주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물으시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으로 세워지는 것입니까?
먼저,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재능으로 얼마나 충성했는가를 물으십니다.
다윗 곁에는 가장 출중한 삼인 외에도 첫 삼인에는 들지 않지만 삼십인보다 더 존귀하다고 평가 받는이들이 있습니다. 8절에 요셉 밧세벳이 단번에 팔백인을 죽인데 반해, 18절에 아비새가 창으로 삼백인을 죽였다는 것은 첫 삼인의 기량이 훨씬 우월했음을 암시합니다. 아비새와 브나야는 첫 삼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자기 기량과 역량에 따라 최선을 다합니다. 주님은 우리 재능이 얼마나 탁월한지보다 그 재능으로 얼마나 충성했는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미약해도 은혜로 불러주셨으니, 비교할 것도, 자랑할 것도, 교만할 것도 없고 오직 감사와 감격만 있을 뿐입니다. 20-23절에 브나야는 일찍이 이방 용병을 지휘한 장수(삼하 8:18)요, ‘훗날’ 다윗이 어린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 아도니야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합니다(왕상 2:25). 특히 그가 ‘사자와 장대한 자를 죽이고 막대기를 들고 싸워 창을 빼앗아 적을 죽인’일은 오래전 다윗의 용맹(삼상17:34,36)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는 충성과 헌신에서 처음과 끝이 한결같은 다윗을 닮은 용장입니다.
다음, 하나님의 나라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집니다.
24-39절을 보면 유다지파만 아니라 다양한 지파와 지역에서 용사들이 나왔고, 이방 출신 용병들도 있습니다. 출신과 인종과 배경은 다르지만 같은 목적아래 하나를 이루는 개방적인 공동체입니다. 특히 이 명단에는 마땅히 들어가야할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이 빠져있습니다. 그는 기록할 필요도 없이 위대한 용사이거나 기록되어서는 안될 그 나라를 위협하는 ‘위험한 인물’ 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명단의 마지막에는 다윗의 희생양인 헷 사람 우리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다윗의 나라가 그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혜로 세워졌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왕이신 예수님께 충성하는 이들의 헌신과 용기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만든 가치와 기준을 버리고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참여하라고 부르십니다. 조건과 형편에만 연연하다가 부르심을 외면하거나, 이해득실을 따지다가 거룩한 대열에서 낙오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봅시다.
기도 : 주님!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는 것을 바라보며 주님이 주신 재능으로 예수님께 충성하고 믿음과 순종으로 헌신하게 하옵소서!
가장 존귀한 자
조종건목사 / 삼하 23:18-23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이니 그는 그 세 사람의 우두머리라 그가 그의 창을 들어 삼백 명을 죽이고 세 사람 중에서 이름을 얻었으니 그는 세 사람 중에 가장 존귀한 자가 아니냐...>(18-19절).
여기서 말하는 <그 세 사람>이란 다윗을 위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에서 물을 길러 온 <세 사람>, 즉 아비새, 브나야, 그리고 뛰어난 익명의 한 용사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셋 가운데서 가장 존귀한 자는 <아비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존귀한 자> 아비새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때로 고난이 예견되는 부르심이라 할지라도 솔선하여 선뜻 나서라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나만은 빠지겠다는 것과는 대조적인 삶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십자가가 끝이 아님을 잘 알기에, 도리어 그게 새로운 삶을 보장하는 생명의 길목임을 확신하기에 사랑을 위해서라면 손해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그런 희생적인 결단으로 누군가가 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크게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둘째, 남을 정죄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탕감 받은 자의 제3자에 대한 탕감 행위입니다. 오늘 우리로 말하면 예수의 피가 그 피를 믿는 자에 대한 정죄함을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정죄함이란 생명의 기운을 꺾고 대립과 반목을 부르며 결국은 모두를 파멸하게 하는 일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기에 모든 대립을 뛰어넘어 오직 남을 위하고 축복하는 일에 모든 시간과 정력을 다 쏟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길을 걷는 자는, 덤으로 받은 자신의 생명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귀하게 여긴다 함은 생의 목적을 이제까지와는 달리 세울 줄 알게 된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욕망과 본능을 충족시키는 인생이 아니라 자기에게 맡겨진 거룩한 사명을 깨닫게 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참다운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 가치의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아쉬운 일이었을까 하고 평가받는 인생이 되라는 것입니다.
-본문 19절이 말씀하는 <첫 세 사람>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장대한 애굽 사람>(21절)이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다윗이 시위대 대장>(23절)으로 세운 사람은?
주님,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가장 존귀한 자>란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존재 방식이 무엇인지를 깨우치는 기쁨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헛되이 살지 않도록 세상의 본이 되는 사람입니다. 또한 제대로 사는 길을 가며 자신의 유익보다는 남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저희야말로 주 안에서 그런 <존귀한 자>로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게 해주시옵소서.
강한 공동체의 조건
삼하 23:18~39 / 길가에교회
다윗이 부국강병을 이룬 것은 그에게 충성되고 용맹스러운 용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세 장수인 아디노, 엘르아살, 삼마에 이어 두 번째 세 장수가 있었습니다. 목숨 걸고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왔던 자들인데, 오늘의 본문은 그 중에 아비새와 브나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비새는 이스라엘의 군총사령관인 요압의 아우로 성경에 간간이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브나야는 아주 용맹스러운 장수로 모압의 힘센 용사 두 명을 죽였고 사자 한 마리를 쳐죽였고 무시무시한 창을 가진 애굽의 장대한 장수를 막대기 하나 들고 가서 쓰러뜨린 사람입니다. 그의 용맹 역시 그가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30인의 용사인데, 몇 사람 외에 그들 대부분의 이름이 생소합니다. 성경에 그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그 당시의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 알았을 것이고, 그 무엇보다 하늘나라에 그들의 행적은 낱낱이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총수가 37명이라 한 것은, 이미 죽은 이들과 새롭게 임명된 자들의 이름을 다 올렸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들을 보면, 이스라엘 족속이 아닌 아랍, 모압, 헷 족속 등 이방인 출신들도 있습니다. 이스라엘로 귀화했거나 용병일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깃발 아래 하나로 뭉쳤습니다. 각자가 아무리 용맹스럽고 뛰어난다 하여도 제각기 움직였다면 그 군대는 와해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각자 세워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되 서로 협력하여 하모니를 이루었기 때문에 다윗의 군대는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궁극적인 용맹과 지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할 때 옵니다.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려 합니다. 그 구체적인 행위가 진심으로, 전심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가정이나 교회 공동체에서 서로의 다름을 용납하고 하모니를 이루는 일에 최선을 다 할 때, 하나님께서 내 가정과 교회를 더욱 더 강하고 든든하게 세워가실 것을 확신합니다.
충성하게 하소서
삼하 23:18-39 / 박일우목사
우리의 이 땅에서의 일생이 끝나고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삶에 대한 평가를 받게 됩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서의 가슴 섬뜩한 심판과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서의 칭찬과 기쁨이 충만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참된 믿음을 소유하게 된 것이라면, 순종의 삶, 착한 삶, 충성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믿음이 있으면서도 악하고 게으른 삶을 사는 것은, 그 믿음이 제대로 된 믿음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제대로 된 믿음이 없다면, 아예 믿음이 없는 사람과 그 영원한 운명은 같아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가면만 쓰고 있지 불법을 행하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무엘기하 23장 본문은 다윗 휘하의 충성스러운 용사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윗 장군, 다윗 왕에게 충성한 것이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다윗을 통하여 세우려고 하신 다윗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의 충성스러운 용사들인 셈입니다. 오늘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실진대, 어떤 삶의 모습이 충성스러운 용사, 충성된 종의 모습일까를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충성의 첫째 모습은 자신이 맡은 일을 묵묵히 신실하게 해내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에게는 이런 충성스러운 용사들이 많았습니다. 성경은 다윗을 측근에서 호위하며, 다윗을 도왔던 대표적인 용사들을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선 무예와 전공이 탁월한 세 용사, 즉 요셉 밧세벳, 엘르아살, 삼마가 그들입니다(삼하 23:8-12). 이들은 다윗의 속마음을 알아 베들레헴 우물물을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길어오는 눈물겨운 헌신과 희생의 정신을 보입니다. 이들뿐만 아니라, 다윗에게는 일일이 그 이름을 거명할 정도의 삼십인 특별부대에 속한 무려 서른일곱 명의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저들은 저들이 맡은 바 사명을 묵묵히 수행해 낸 다윗의 나라, 하나님 나라의 충성스러운 용사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건, 직장에서건, 이웃과의 관계에서건, 말하자면 자기가 속한 크고 작은 다양한 공동체에서 어떤 책임, 어떤 역할, 어떤 지위, 어떤 사명을 맡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자기의 몫을 감당해 낼 때, 어떤 자세로 어떤 열의로 그 일을 수행해 나가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몸은 이 땅에 있지만, 하늘나라 백성입니다. 천국 시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그 어디서나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의 삶의 자세,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누가 보든 안 보든, 감시자가 있든 없든,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의식하면서, 주님께 하듯 정성스레 자기의 몫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섬김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엡 6:1-9). 자기 몫을 감당하려면, 옥합을 깨뜨리는 자기 헌신이 필요하기도 하고(마 26:7-13),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기 부인이 필요하기도 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기도 하고, 값비싼 고초를 치르게 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을 내놓게 되기도 합니다(요 15:13).
자신의 몫을 감당하는 것이 충성의 첫째 모습이라면, 충성의 둘째 모습은, 비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충성된 삶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환경이 다르고, 재능이 다르고,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도 앞에 서 말한 세 용사 외에도 삼십인 특별부대의 우두머리인 아비새, 즉 요압의 아우인 아비새가 훌륭하게 다윗을 보좌하는 용사였습니다. 창을 휘둘러 삼백 명이나 되는 적군을 쳐죽인 용사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세 용사와 견줄 정도는 아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브나야라는 용사도 소개합니다. 사자처럼 대단한 적군 둘을 쳐 죽였고, 또 구덩이에 빠진 사자를 때려죽이기도 합니다. 막대기 하나로 적군의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그를 죽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경호대장으로 세워집니다. 그러나 그 또한 세 용사와 견줄 정도는 아니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용사의 재능이나 무용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아비새와 브나야 두 사람 다 충분히 충성스러운 사역을 감당해 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달란트 비유를 들어,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각자가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스러운 삶임을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마 25:14-30). 달란트를 많이 받았다고 방심해서도 안 되고, 적게 받았다고 낙심해서도 안 되고, 오직 자기의 분수대로, 자기의 재능대로, 자기의 은사대로, 자기 능력대로 최선을 다하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종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가 받은 몫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모두,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 일에 집중함으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기쁨과 칭찬이 충만한 음성을 듣게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 소망으로 충성의 삶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몫을 감당하는 것이 충성의 첫째 모습, 남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 충성의 둘째 모습이라면, 충성의 셋째 모습은 협력입니다. 충성스러운 삶을 위해서는 함께 협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함께 힘을 합하여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일구어 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독불장군이 되면 안 됩니다. 나 혼자서 잘 해보자고 고집을 부리면 안 됩니다. 헌신하는 모든 사람이 눈에 뜨일 것입니다. 그들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손흥민 선수가 유명해진 것은, 그의 놀라운 실력도 있지만, 그를 지원하고 그도 함께 기여하는 아름다운 팀워크가 있기 때문입니다. 골인도 중요하지만, 누군가 골인할 수 있도록 서로 패스해 주는 어시스트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의 휘하 용사들을 보면 다양한 지파와 다양한 지역에서 나온 용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유다지파 베들레헴 출신도 있고요(삼하 23:24-29), 북쪽 지파 출신들도 있습니다(삼하 23:30-39).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유다 출신이 아닌, 이방 출신의 귀화자들도 있습니다(삼하 23:36-39). 암몬 사람도 있고, 헷 사람 우리야도 명단에 들어 있습니다. 심지어 용병들조차 이스라엘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종을 초월하여, 국경을 뛰어넘어, 성별도 불문하고, 심지어 정치적인 입장조차 관계없이 이 모든 차이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이 더불어 세워가는 나라입니다. 내 나라 내 민족에 묶이면 안 됩니다. 내 교회 내 교파만을 앞세우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 숫자가 220만 명을 넘어서고 있는 요즈음, 다인종 다문화 사회로 들어서고 있는 세태를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더욱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곳에 신실하게 세워가기 위해서는 이런 모든 차이를 초월하여 서로 협력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충성스러운 일꾼이십니까? 각자의 가정에서, 각자의 학교, 일터에서, 각자의 삶의 곳곳의 현장에서 내가 맡은 몫을 잘 감당하고 계십니까?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고 계십니까? 학생 시절에는, 주의 영광을 위해, 주의 나라를 위해, 주님이 주신 꿈을 향해 나아가면서, 열심히 공부하면 그게 충성입니다. 한 가정의 아내요 어머니요 할머니라면, 평범하지만 맡겨진 소소한 일상의 일들을 기쁨으로 잘 감당해 가면, 그게 충성입니다. 직장인은 직장에서, 생활인은 삶의 일상적인 현장에서, 맡은 바 일들을 감당하며, 주님의 성품을 드러내며, 하루하루 감사하며 만족하며 살아가면 그게 충성입니다.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사람은 몰라줘도 우리 주님은 다 아십니다.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여러분의 삶을 다 아십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주님의 나라를 위해 움직이고 기도한 모든 흔적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가슴에 기억됩니다. 또 기록됩니다. 주님의 책에 다 기록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의 삼십특별부대 용사들의 명단에 그 용맹스러운 대장군 요압의 이름이 빠져 있습니다. 다윗 왕국에 늘 위협적인 존재이던 그의 이름이 빠져 있는 것은, 결코 기록자의 실수가 아닐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다윗 왕에 의해 어처구니없이 전사하게 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 장군의 이름은 당당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탐욕에 희생된 그의 억울함을 이렇게라도 그의 명예를 회복시킴으로 위로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일 것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할 때에, 여러분의 이름이 아름답게 불려지게 되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리 오르라. 나와 함께 영원을 누리자, 이 영광을 누리자”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