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희 '모서리의 사랑'-불면의 크로노스
불면과 우울로 헝클어진 내 마음을 붙들어다오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음울한 일상속에서
처절하리만치 솔직한 시선으로
제 아픈 마음을 응시… 生의 시간을 견딘다
불면과 멜랑콜리의 선후관계를 또렷이 가리기는 어렵다. 수면장애는 우울증의 한 신호이기도 하지만, 만성적 수면장애를 겪으며 사람이 밝을 수만은 없다. 어느 쪽이 먼저든, 불면과 멜랑콜리는 서로 꼬리를 문 채 영육(靈肉)의 둥그런 어둠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조윤희(50)의 첫 시집 ‘모서리의 사랑’(1999년)은 그런 둥그런 어둠 속에서 검푸른 실루엣으로 엎드려 있다.
이 시집의 화자들은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한다. 곧이곧대로 ‘불면’이라는 표제를 단 시의 화자는 “도둑맞은 밤/ 너는 잘나지도 못한 몰골을 하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구나/ 유일한 목격자이며/ 공범자인 너// 애꿎은 밑바닥만 긁어대며/ 이빨에 예리한 날을 세우는 품이/ 아직도 내게서/ 훔쳐야 할 것 남아 있나 보다”라고 푸념하고 있거니와, 다른 화자나 등장인물도 “불면증에 걸려 울”(‘내 그림 속으로 들어온 풍경’)거나 “불면의 밤을 지나온/ 지친 육신을 눕힌다”(‘집시의 시간’). 또 다른 화자에게, “모든 나의 밤은 불면인 상태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토탈 이클립스’)다.
이렇듯 잠을 잃은 화자들이, 딱히 병까지는 아니더라도, 음울한 일상 속에서 굼뜨게 흐느적거리는 것은 놀랍지 않다. 중심의 사랑이 되지 못한 ‘모서리의 사랑’은 화자들의 마음과 몸을 갉아내는 고립감과 무력감으로 어둡다.
그들은 “규격품이 아니어서/ 입구에도 걸리고/ 출구에도 걸리고/ 공정관리법에도 걸린다”(‘규격품이 아니어서’). ‘슬픈 모서리’라는 큰 제목 아래 묶인 들머리의 ‘타락천사’ 연작은 자기모멸의 전시장이라 할 만하고, ‘넥타이 맨 나의 사랑은’의 화자에게 보이는 것은 “생래적 절름발이의 슬픈 생(生)”이다.
그들에게 슬픔은 너무 친근해, 그들은 “나의 내출혈을 너를(슬픔을--인용자) 통해 본다”(‘그 여자의 그랑부르 4’). 방금 인용한 시행을 포함하는 연작의 제목에서도 드러나지만, ‘모서리의 사랑’의 빛깔은 ‘블루’다. 그것은 “칠부의 어둠”(‘달리의 시계 속에서는--블루, 블루’)이다.
그리고 이 “칠부의 어둠”은 시집의 한 화자가 갇혀 있는 ‘봉인된 시간’의 조도(照度)이기도 하다. 그 화자는 “잊혀진 시간의 형벌을 감수하”(‘봉인된 시간’)고 있다. 제 몸이 잡동사니로 채워진 채 봉인된 그는 “봉인된 시간 속에서/ 죽어갈” 운명이다. 그는 (멜랑콜리로 어두워진) 시간을 견디고 있다. 아니, 그의 생이 시간이다. 대책 없는 시간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직선적이고 동질적인 시간을 크로노스(Khronos)라 불렀다. 그리고 창세 신화의 맨 윗자리에 그들이 배치한 시간의 신에게 이 이름을 붙여주었다.
가이아와 상관해 낳은 자식들 가운데 막내다.
그는 아버지를 몰아내고 우주를 지배하며 인류의 황금시대를 열었지만, 저 역시 아버지의 운명을 따를까 두려워 자식들을 낳는 족족 삼켜버리곤 했다. 그러나 그의 셋째 아들 제우스는 어머니 레아의 분별 덕분에 아버지의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운명을 피했고, 아버지에게 구토제를 먹여 제 형제들을 고스란히 토해내게 만들었다.
조윤희의 화자들이 견디는 ‘봉인된 시간’에서 시간의 신 x-크로노스를 끌어내는 것, 그리스인들의 예를 좇아 그 시간의 신 위에 황금시대의 신 k-크로노스를 포개는 것, 그리고 어머니와의 사이에 낳은 자식들을 삼켰다 뱉은 k-크로노스의 에피소드들에 “자기가 자기 내장 속으로/ 다시 기어들어가/ 다시 토악질하는 바다”(‘타락천사 4’)라거나 “내 속에서 살해되었던 세상/ 나를 삼키며/ 다시 내 아들로 태어나기를 갈망하며/ 나를 자양분 삼아/ 살아갈 꿈을 꾸는/ 살모사 새끼/ 내 남자이자/ 내 아들인 세상/ 그들이 몽땅/ 나를 삼켜버렸어(‘이미지 도둑 2’) 같은 시행들을 겹쳐보는 것은 견강부회이기 쉬울 것이다.
시인은 이 케케묵은 서양 신화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실상 ‘모서리의 사랑’에는 가족에 대한 화자의 순정하고 애틋한 사랑을 실은 시행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그리스신화에서 x-크로노스와 고스란히 포개진 k-크로노스가 로마신화에선 농경(農耕)의 신 사 투르누스로 재현된다는 사실에 이르면, 그리고 그 이후 유럽인들의 상상 속에서 사투르누스가 환락과 멜랑콜리의 상징적 거처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우리의 어설픈 신화적 정신분석적 상상력을 이어나가고픈 충동을 억누를 수 없다.
조윤희의 화자들이 우울과 싸우기 위해 “볼륨을 최대한으로 올린 채” 극도의 흥분을 꾀할 때, 불면의 밤을 쫓아내기 위해 “바리움을 삼킬”때, “너는 질병이다/ 내가 나를 감당할 수 없을 때/ 나는 네 속으로 들어간다”(이상 ‘사물함 속의 날들’)고 처연히 털어놓을 때, 멜랑콜리의 일상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려는 이 일탈의 안간힘은 고대 로마인들을 자극적 놀이의 기쁨으로 그득 채운 사투르누스 축제(사투르날리아)와 그럴듯하게 포개진다.
그리스인들이 크로노스로, 로마인들이 사투르누스로 불렀던 태양계의 제6행성(토성)을 유럽인들이 우울질(憂鬱質)과 연결시킨 것도 야릇하다. 토성이 고대인들에게 알려진 가장 먼 행성인 데다 그 움직임이 느려 보였던 탓이겠지만, 중세의 점성술사들은 이 별의 기운 아래 태어난 아이가 침울한 성격을 지니게 된다고 믿었다.
영어사전 편찬자들도 Saturn(토성) 조금 아래에 saturnine(음울한)이라는 표제어를 올려놓고 있다. ‘모서리의 사랑’은 크로노스의 시집이자 사투르누스의 시집, 곧 토성의 시집인 것이다.
‘모서리의 사랑’을 여성주의의 맥락에 배치하는 것은 유혹적인 읽기다. ‘지워지는 여자’라는 부제를 단 ‘그 여자의 그랑부르 1’만 해도 그렇다.
“느릿느릿 끌리는 슬리퍼 소리가/ 좁은 공간에 무거운 줄을 긋는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가스레인지의/ 점화장치에 불이 들어온다”에서 시작해, “그 여자가 지워진다/ 완강한 침묵의 코드를 뽑아버린다/ 머리카락들이 해초로 흐느적거린다/ 허우적거리는 지느러미/ 그 여자의 빈 공간 위로 수포가 기어오른다”로 끝나는 이 시는,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미국 시인 실비어 플래스의 자살 순간을 그린 듯하다.
서른한 살의 나이에 스스로 선택한 충격적 죽음을 통해 플래스는 폭압적 남성성에 질식한 순교자의 이미지를 얻었고, 이내 그의 이름은 여성주의 문학의 가장 강력한 아이콘이 되었다.
‘그 여자의 그랑부르 1’은 그런 여성주의의 맥락에서 선배 여성시인에 대한 정서적 연대를, 그러므로 부분적으로는 (여성으로서의) 시인 자신에 대한 연민을 내비치고 있다고 해석할 만하다.
“나를 붙들어매어 줄 시선 하나 있었으면”(‘내 그림 속으로 들어온 풍경’) 하는 하소연을 비롯해, 시집 여기저기 점점이 박힌 신음들, 그 아픔의 언어들도 (화자들이 그 일원인) 여성의 사회적 처지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모서리의 사랑’이 차려 놓은 언어의 성찬을 꼭 여성주의라는 네모 도시락에 눌러 담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 여성주의의 틀을 고집하는 독자는 ‘모서리의 사랑’의 적잖은 시들을 ‘여성적 수동성’의 현현으로 보아 결국 배제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시집을 그저 정서적 주변인의, 모서리 인간의 처절한 자기해부로 읽고 싶다. 화자들의 여성성은 그 주변성의 일부일 것이다.
‘모서리의 사랑’을 읽는 것은 그러므로 마음 아픈 시인의 자기분석을 엿보는 것이고, 마음의 지옥을 함께 헤매는 것이다. 그 헤맴은 외롭지 않다. 박상륭과 보르헤스와 무라카미 류가, 왕가위와 뤽 베송과 임권택과 에미르 쿠스트리차가 제 풍성한 텍스트들의 자락을 들이밀며 그 헤맴에 동참하고 있다.
위태롭게 아름다운 솔직함으로, 조윤희는 그 헤맴의 기록을, 그 ‘병상 일기’를 버젓한 예술로 만들었다. 시인은 그 처절하고 아슬아슬한 자기분석을 통해, 제 치욕의 응시를 통해, 그 치욕을 설욕한다. 그렇게 그는 봉인된 시간을 슬며시 개봉한다. 아니, 개봉하려 한다. 어쩌면 시간의 문은 끝내 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 하랴. 도로(徒勞)도 인간의 몫인 것을.
▲ 잉여인간
내 꿈들이 매달려 있는
내 몸은 무겁다
언제부턴가
내가 내 몸을 끌고 다닌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내 몸의 뼈가 더 이상 만져지지 않았을 때
내 몸에 살이 붙고
불어난 나의 탄력 없는 살이
비곗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 앞에서
새삼스럽게 서글퍼지는 것은
그것이 대책 없이 흔들린다는 것이었다
그 미끈거리는 삶의 손아귀에서
자꾸만 빠져나가려 하는
현실감 없는 내 육체가
아직도 땅을 밟고 서 있어야 한다는
직립해야 한다는
그 치욕
그 치욕의 무게는 의외로 근이 많이 나간다는
글: 고종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