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 5박6일 만에 완주
멀가이~포트 윌리엄 걸으며 숲과 호수, 초원 등 경이로운 대자연 만끽
스코틀랜드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언제부터 그런 막연한 로망을 가지게 되었을까?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일까? 아니면 영화 ‘007 스카이 폴’일까?
그것도 아니면 브리티시 오픈 링크스 코스의 비바람일까.
시인이자 비평가인 폴 발레리는 “바람이 부니 살아야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바람이 분다, 걸어야겠다”로 바꾸고 싶다.
비와 바람의 나라 스코틀랜드 하일랜드, 그 거친 땅으로 일주일간 트레킹을 다녀왔다.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West Highland Way·WHW는 영국 스코틀랜드 하일랜드를 남에서 북으로 가로지르는 길이다.
일반적으로 글래스고 북쪽 교외에 있는 멀가이Milngavie에서 포트 윌리엄Fort William까지 154km를 7박8일 동안 나누어 걷지만 우리는 일정상 5박6일 동안 주파할 계획이었다.
숲과 호수의 끝없는 향연
7월 23일, 첫째날은 멀가이에서 드리멘Drymen까지 19km 여정이다.
멀가이의 중앙광장에 있는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의 들머리에는 길의 시작을 알리는 오벨리스크가 서있고 입구 벤치 위에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다.
광장을 벗어나면 길은 보도 터널 밑을 지나 바로 알렌더공원Allander Park으로 이어진다.
평탄하던 길은 머독 숲Mugdock Wood을 지나 크레이갈리안호수Craigallian Loch에 다다른다.
호숫가에는 스코틀랜드의 국화인 엉겅퀴 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정표 상단에 있는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의 상징마크는 이 엉겅퀴 꽃을 도식화한 것이라고 한다.
잠시 도로와 맞닿았던 길은 이내 목장 안으로 이어진다.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는 여러 목장을 통과해서 지난다. 탁 트인 전망의 초원길을 지난다.
이 길은 최근에 만들어진 ‘존 뮤어 웨이John Muir Way·JMW’와 겹치는 구간이다.
존 뮤어는 미국 국립공원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로 미국 서부 시에라산맥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존 뮤어 트레일’이 조성되어 있다.
11세 때 미국으로 이민 온 ‘존 뮤어’의 고향이 바로 이곳 스코틀랜드이다.
그가 태어난 스코틀랜드 동쪽의 던바어Dunbar에서 서쪽 끝의 헬렌스버그Helensburgh까지 해안에서 해안으로 내륙을 가로지르며 조성된 길이 ‘존 뮤어 웨이’이다.
둘째 날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드리멘마을을 벗어나서 다시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 본 루트에 합류한다.
하산 길은 울창한 낙엽송 숲길이다.
호수를 따라 길이 길게 이어진다.
셋째 날은 로워데난~인버스네이드Inversnaid~인버라난Inverarnan~크리안라리크Crianlarich 31km 구간을 걸었다.
낙엽송인지 삼나무인지 쭉쭉 뻗어 오른 큰 나무 숲 사이로 길이 이어진다.
점심을 먹고도 한참 더 호수를 따라 걸은 끝에 드디어 호수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아침에 숙소를 나선 지 12시간이 지나고서야 크리안라리크로 빠지는 삼거리에 도착했다.
첫날 드리멘에서처럼 메인 루트를 벗어나 마을로 들어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길을 이어가야 한다.
숙소에 들어서니 저녁 8시가 다 되었다.
넷째 날, 크리안라리크~틴드럼Tyndrum~인버로란Inveroran까지 26km를 걷는다.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가랑비는 운치 있어서 좋다. 울창한 숲을 빠져나오자 기찻길이 나타난다.
크리안라리크마을을 지나온 기차선로이다.
선로는 오래된 아치 형태의 돌다리가 고가처럼 받치고 있다.
필란강River Fillan을 건너자 너른 목초지가 나타나고 목초지를 지나자 길은 다시 강을 따른다.
다리 하나를 건너 반대쪽으로 이어지던 길은 얼마 안 가 틴드럼마을에 도달한다.
앞으로 이틀 정도는 황무지가 계속 이어져 마을이나 마트가 없으므로 필요한 물품들을 샀다.
기찻길을 따라 이어지던 길은 이제 알트 킹글래스 강River Allt Kinglass과 나란히 달린다.
길가 돌다리 난간 위에 젊은 아가씨 둘이 앉아서 쉬고 있다.
독일에서 온 학생들이다. 처지지 않기 위해 그냥 따라붙을 테니 괜찮다면 허락해 달라고 하니 흔쾌히 ‘예스’라고 했다.
그렇게 독일 아가씨들의 기를 받아가며 한 시간 반 정도를 정신없이 걸어서 그녀들의 목적지인 오카이 다리Bridge of Orchy에 함께 도착했다.
이곳에서 숙소인 인버로란호텔까지 남은 거리는 3마일(4.8km).
표고차 200m 정도의 고갯마루를 하나 넘어가야 한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풍경이 확 바뀐다.
멋지다!
멀리 물안개 피어오르는 진경산수화가 펼쳐지고 발아래 툴라호수Loch Tulla가 내려다보인다.
풀잎은 바람에 날리고 나는 이 멋진 길을 걷는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촬영지 글렌코계곡
다섯째 날이 밝았다.
오늘은 인버로란에서부터 킹스하우스Kingshouse를 거쳐 킨로크레븐Kinlochleven까지 장장 30km를 걸어야 한다.
이 일대가 그 유명한 란노크 무어Rannoch Moor지대이다. 무어Moor란 잡초로 뒤덮인 황야지대, 황무지를 이르는 말이다. 스코틀랜드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걷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무어지대를 가로지르며 곧게 길이 나있다.
글렌코 마운틴 로지로 빠지는 갈림길을 지나자 차들이 쌩쌩 달리는 대로가 나온다.
조심스럽게 길을 횡단해서 점심을 먹을 장소인 킹스하우스 호텔Kingshouse Hotel에 도착했다.
한동안 도로와 나란히 병행하던 WHW는 이제 글렌코협곡을 뒤로하고 오른쪽으로 완전히 방향을 꺾는다.
바윗덩어리 산 엘티브 모Eltive Mor를 비롯해서 1,000m급의 산들이 즐비한 이곳 글렌코계곡은 근처에 글렌코 빌리지가 형성되어 있어 며칠간 머물며 등반하거나 겨울에는 스키를 즐길 수 있다.
멜 깁슨이 주연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제 길은 계속 오르막이다.
지도에 ‘악마의 계단The Devil’s Staircase’이라 표기되어 있어 바짝 긴장했다.
계속 지그재그로 오르며 고도를 높여야 하는 곳이지만 ‘귀여운 악마’나 ‘힘 빠진 악마’ 정도다.
한 명 한 명 정상에 오르며 정상 정복의 기쁨을 만끽한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주변 경치가 아주 장관이다.
능선 고개를 넘어서부터는 계속 내리막이다.
한참 내려오다가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자 오늘의 숙소가 있는 킨로크레븐Kinlochleven마을이 보이기 시작하고
자작나무 숲을 지나 산길을 빠져나오니 바로 블랙워터 호스텔Blackwater Hostel에 닿았다.
오늘은 트레킹 마지막 밤. 저녁을 먹고는 한 명씩 돌아가며 여행의 소감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들 5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며 감개무량이다.
우리는 왜 이 먼 곳까지 날아온 걸까?
잠시 생각에 잠기는데 소감을 발표하던 팀원들의 밝은 미소가 아른거린다.
7월 28일, 마지막 날이 밝았다.
오늘은 킨로크레븐에서 출발해 종착지인 포트 윌리엄까지 24km를 걷는다.
최대한 서둘러서 출발하려고 부득이하게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했다.
도로를 따라 조금 걷다가 킨로크레븐마을을 벗어났다.
산길에 접어들자 길이 급격하게 경사진다. 어제는 내려왔는데 이제 다시 올라간다.
마을이 U자 모양의 계곡 안에 위치하고 있는 탓이다.
30분 정도를 계속 오른 끝에 킨로크레븐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조망터에 올라섰다.
앞의 3일은 날이 화창하더니 뒤의 3일은 내리 우중 트레킹이다.
스코틀랜드 속담에 ‘나쁜 날씨란 없다. 잘못된 옷차림이 있을 뿐!’ 이란 말이 있다.
대비하지 못한 사람이 잘못이지 날씨 잘못이 아니란 말이다.
산허리를 따라 길게 뻗은 길을 걷는다.
길이 임도처럼 널찍하지만 거친 돌들이 널려 있어 발을 내딛기가 조심스럽다.
폐허가 된 돌집을 지난다.
옛날에 목동들이 궂은 날씨를 피하는 대피소로 사용했던 건물이라고 한다.
길을 걷다 보면 털이 복슬복슬한 양들을 자주 만난다.
새참을 먹은 이후부터는 서바이벌 트레킹을 하기로 한다.
이제부터는 자기 페이스대로 각자 걸으며 5박6일 동안의 트레킹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함께 걷다가 따로 걷기, 따로 걷다가 또 같이 걷기.
나름 괜찮은 단체 걷기여행 방법이다.
능선을 지나면 너른 임도가 나타나고 이후부터는 계속 내리막이다.
코너를 돌자 저 멀리 오늘의 목적지 ‘포트 윌리엄’이 보이기 시작한다. 좀더 걸어서 마침내 ‘The Original End of The West highland Way’라고 쓰인 간판에 도착했다.
그러나 여기가 진정한 WHW의 끝이 아니다.
트레커들이 인정하는 진짜 끝 지점은 좀더 가야 한다.
광장 하나와 성당을 지나 시가지를 200여 m 더 걸어 들어간 끝에 비로소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의 종착점, 고든광장에 도착했다.
우리는 무려 154km의 먼 길을 6일간 꼬박 걸어서 완주했다.
서로 얼싸안고 완주의 기쁨을 나눴다.
스코틀랜드의 길 위에서 쌓은 추억
이렇게 스코틀랜드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 걷기여행을 모두 마쳤다.
일 년에 한 번 휴가 기간에 떠나는 해외 트레킹.
한 해 한 해 추억이 쌓여가니 그것이 어느덧 역사가 되어간다.
추억을 공유한다는 것은 얼마나 값진 일인가! 인생의 절반은 추억을 만드는 행위로, 나머지 절반은 그 추억을 곱씹는 행위로 채워진다.
추억이 많은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또한 추억을 공유한 친구가 많은 사람은 더 행복한 사람이다.
20대에 읽는 <데미안>과 40대에 읽는 <데미안>이 같을 수 없다.
자기 내면의 변화만큼 감동의 방향과 깊이가 달라진다.
길을 걸으며 새롭게 발견하는 진리와 기쁨들, 그것이 걷기여행의 참 즐거움이고 매년 트레킹을 떠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