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백성들이 대궐에 난입해 형조(刑曹)와 노비 관할부서인 장예원(掌隸院)을 불태우자 선조는 만주로 도주하려 했는데, 이것이 요동내부책(遼東內附策)이다.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자에 따르면 선조가 “내부(內附)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고 말하자 정승 유성룡이 “대가(大駕)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고 거듭 반대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선조는 사신 유몽정(柳夢鼎)을 보내면서 “먼저 내부(內附)할 의사를 말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또 선조 때 문신 신흠(申欽)이 ‘본국이 무함을 당한 시말(本國被誣始末志)’에서 “궁빈(宮嬪)을 이끌고 중국에 들어가 살고 싶다”고 했다는 기록처럼 선조는 이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명나라가 우리나라(선조를 의미함)를 관전보(寬奠堡:만주의 지명)의 빈 관아에 거처시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이 드디어 의주에 오래 머물 계획을 하였다”(『선조실록』 25년 6월 26일)는 기록처럼 명나라가 선조를 유폐시키려고 하자 비로소 이를 포기했다.
선조가 바라보는 중국의 이미지와 그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명나라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은 지원병을 요청하는 조선 사신에게 “왜 열흘 만에 도성이 갑자기 함락되었는가”라고 물었다.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명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했다는 뜻이다. 조선은 명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대우했지만 명에 조선은 일본과 같은 이이제이(以夷制夷)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이이제이는 청나라 때 주로 사용된 표현이고 『후한서(後漢書)』 ‘등훈(鄧訓)열전’에는 ‘이민족으로 이민족을 친다’는 이이벌이(以夷伐夷)로 나온다. 호강교위(護羌校尉) 등훈의 막료가 강족(羌族)이 소월씨(小月氏)를 멸망시켜도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등훈은 두 이민족이 서로 세력균형을 이루어야 한(漢)나라에 유리하다고 반대한다. 『후한서』 ‘남흉노(南匈奴)열전’에는 “이민족으로 이민족을 치는 것이 국가의 이익이다(以夷伐夷, 國家之利)”라고 보다 노골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 민족 내부의 분열과 증오는 중국의 이이제이 외교정책에 꽃놀이패다. 천안함 사태 때나 중국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는 와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초청한 현 상황도 마찬가지다. 북한을 전략적 관점에서 끌어안고 역시 분단국가인 중국의 실상과 허상을 냉철히 바라볼 때 우리 외교가 질적으로 상승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