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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인구 조사
삼하 24:1-9
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2 이에 왕이 그 곁에 있는 군사령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이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백성의 수를 내게 보고하라 하니
3 요압이 왕께 아뢰되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4 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 사령관들을 재촉한지라 요압과 사령관들이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려고 왕 앞에서 물러나
5 요단을 건너 갓 골짜기 가운데 성읍 아로엘 오른쪽 곧 야셀 맞은쪽에 이르러 장막을 치고
6 길르앗에 이르고 닷딤홋시 땅에 이르고 또 다냐안에 이르러서는 시돈으로 돌아
7 두로 견고한 성에 이르고 히위 사람과 가나안 사람의 모든 성읍에 이르고 유다 남쪽으로 나와 브엘세바에 이르니라
8 그들 무리가 국내를 두루 돌아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9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삼하 24:1-9 / [갑작스런 인구조사] 여호와께서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노를 터뜨리셨는데, 그 이유는 밝히지 않으셨다. 어쨌든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할 마음을 품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서운 재앙이 될 일을 저지르게 하셨다. 2) 그래서 왕은 마침 곁에 수행하고 서 있던 군대 총사령관 요압에게 인구조사를 지시하였다. `그대는 즉각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이 나라의 인구를 조사하고, 전쟁에 나갈 만한 장병들의 숫자를 나에게 보고하시오!' 3) 그러자 요압이 항의하고 나섰다. `임금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백성을 번창하게 도와주셔서, 이 백성이 지금보다 백 배나 더 많아지기 원합니다. 임금님의 살아 생전에 그런 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나의 주 임금님이시여, 지금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시렵니까? 전쟁이 언제 우리 군대의 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서 결정되었습니까?' 4) 그러나 왕은 조금도 의견을 굽히지 않고 요압을 비롯하여 모든 군사령관들에게 무조건 명령대로 시행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왕의 명령대로 인구조사를 하게 되었다. 5) 요압은 군사령관들을 거느리고 요단강을 건너 갓 지파의 성읍 아로엘에서부터 인구조사를 시작하였다. 이 성읍은 아르논 시내 골짜기의 중앙에 있는 성읍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은 야셀 성읍으로 가서 인구를 조사하고 6) 길르앗 지역을 두루 다니며 조사한 다음, 가데스 지역에 있는 헷 족속의 땅에까지 이르렀다. 거기서 그들은 단 지파의 다냐안을 지나서 시돈에까지 올라갔다. 7) 시돈에서 비로소 그들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요새 성읍 두로로 내려왔다. 그 다음에 그들은 히위 족속과 가나안 원주민의 모든 성읍을 조사하고 마침내 유다 최남단의 브엘세바에 이르렀다. 8) 이렇게 그들은 온 나라를 두루 다니고 9개월 20일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9) 요압이 왕에게 모든 장병의 수를 보고하였는데 이스라엘의 장병은 80만 명이고, 유다의 장병은 50만 명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교만을 책망하시기 위하여 다윗의 마음을 격동시켜 인구조사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다윗의 본심(1-2) 다윗의 인구 조사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며, 다윗으로 하여금 그릇된 행위를 하도록 부추기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번 다윗이 행한 인구조사는 군사적인 목적, 또는 왕권의 강화를 위해 시행되었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배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하나님께로부터 얻으려 하지 않고, 강화된 자신의 군사력과 왕권에서 얻으려 했기 때문입니다(삼상 17:47).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일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스스로 자초하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시 94:2; 잠 21:4; 눅 1:51).
요압의 충언(3-4) 인구조사를 명령 받았던 요압은 다윗이 잘못 판단하고 있음을 막기 위하여 단호하게 반대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정 국가의 복된 미래를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신 33:9). 그러나 그 약속에는 어디까지나 왕과 그 백성들이 하나님만을 절대 신뢰하여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러한 전제에서 벗어나 교만한 마음으로 자기 힘을 의지하려 하자, 이에 요압이 다윗의 잘못됨을 인식하고 충언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계속해서 요압과 군대장관들에게 재촉합니다.
인구 조사(5-9) 요압은 본격적으로 인구조사하기 앞서 이를 위해 많은 무리들이 동원될 것을 예상하고, 먼저 이들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장막을 아로엘과 야셀 사이의 초원 지대에 건설하여 인구 조사의 본부로 이용합니다. 그리고 갓 골짜기 가운데 성읍 ‘아로엘’에서부터 인구조사를 실시합니다. 왜냐하면 ‘아로엘’은 요단 동편에 있던 한 성읍으로서(신 2:36;수 12:2), 이곳은 국경 지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길르앗, 닷딤홋시, 다냐안, 시돈, 두로, 히위 사람과 가나안 사람의 성읍, 유다 남쪽 끝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9개월 20일 동안 인구조사를 마치고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장정의 수는 이스라엘에서 80만 명, 유대에서 50만 명이라는 것을 왕께 보고합니다.
적 용 :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구 조사라는 카드를 꺼내셨습니다. 그러나 신하의 충언으로 멈출 수도 있는데 끝까지 고집을 부린 다윗 왕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어떤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한 초보 아나운서가 스포츠 뉴스를 처음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그만 멘트를 잘못 읽고 말았다. “오늘 내리기로 한 소나기는 프로야구 관계로 취소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실수합니다. 중요한 것은 실수를 인정하고 실수를 통해 배워야 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24:1
다시(* , 요세프) - 이는 다윗 치세 당시 이스라엘의 국가적 재앙이 지난번 3년 연속 기근(21:1)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임을 밝혀 주는 구절이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 본장에 나타나는 바(2-9절) 다윗의 인구 조사가 범죄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적 의도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여호와께서는 우선적으로 범죄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고자 다윗으로 하여금 그릇된 행위를 하도록 부추기셨던 것이다(엄밀히 말하면, 다윗이 사단의 유혹에 빠지는 것을 방임하셨던 것이다-대상 21:1).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케한 이스라엘의 범죄는 무엇인가 ? (1) 혹자는 그것을 본서에 기록되지 아니한 '숨은 죄'라고 본다(Kimchi). (2) 또 다른 혹자는 다윗의 인구 조사에 동참한 죄라고 본다(Lange).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기 마련이다. 또한 본 구절에서는 명확히 하나님의 진노가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위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킨 이스라엘의 범죄는 (3) 지난번 압살롬의 난(15:7-12)과 세바의 난(20:1, 2)에 보여 주었던 저들의 반역적인 행동이라고 보아야 한다(Keil). 즉 그때에 이스라엘의 다수는 유감스럽게도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다윗 왕을 반역하고, 그를 대적하여 압살롬과 세바를 좇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저들의 반역죄였던 것이다.
다윗을 감동시키사...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 본서 저자는 다윗의 범죄 행위(인구 조사)를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 의지(自由意志)를 말살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모든 인간 역사를 당신의 뜻대로 섭리하여 가신다. 따라서 다윗의 인구 조사는 다윗의 자유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코자 다윗의 의식 속에 있던 악한 의도를 허용하셨을 뿐이다. 한편, 대상 21:1에서는 '사단이 다윗을 격동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두 기록은 상호 모순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넓은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단을 이용하시기 때문이다(욥 1:12;삼상 26:19).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다윗의 인구 조사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징계코자 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허용 하에서 사단의 격동으로 일시 교만한 마음을 품은 다윗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본장의 인구 조사는 다윗 통치의 말기에 이루어졌음이 분명하다(Hengstenberg). 그 근거로서 우리는 인구 조사가 약 10개월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은 군대 장관 요압이 수도를 오랫동안 떠나 있었음을 의미하며, 이는 곧 당시의 태평 성대를 보여 준다. 따라서 이 때는 대내외적으로 모든 정벌과 반란이 완료되고 진압됨으로써 태평 성대를 구가하고 있던 다윗 통치의 말기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4:2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 단(Dan)은 이스라엘 북쪽 경계 성읍이며, 브엘세바(Beersheba)는 유다 남쪽 경계 성읍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이스라엘 온 땅을 통칭하는 표현이다(삿 20:1;삼상 3:20;대상 21:2;대하 30:5).
인구를 조사하여...내게 알게 하라 - 다윗의 인구 조사는 이스라엘의 재앙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인구 조사 그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정하에 여러번 인구를 계수한 바 있기 때문이다(출 30:12;38:26;민 1:44-46;26:51). 문제는 다윗의 인구 조사가 군사적인 목적, 또는 왕권의 강화를 위해 시행되었다는 점이다. 우선 합법적인 인구 조사는 제사장들이 그 일을 감당하였다(민 1:3;26:1, 2). 이에 반해 여기서 다윗은 요압을 인구 조사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또한 합법적인 인구 조사는 조사받은 각 사람에게 생명의 속전(贖錢)을 내게 하였다(출 30:2). 그리고 이 생명의 속전은 성소에 봉헌됨으로써 여호와께 속하게 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감사함과 동시에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했음을 고백하는 의식이었다(출 30:13). 그러나 다윗은 본 인구 조사에서 이를 시행치 않았다. 이로 보아, 다윗은 단순한 인구 조사를 명령한 것이 아니라 군사적인 목적과 왕권의 강화를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한 것이었다(Lange, Smith, Keil, The Interpreter's Bible, Hengstenberg, Schmid). 그런데 이와 같은 다윗의 행위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다윗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하나님께로부터 얻으려 하지 않고, 강화된 군사력과 왕권에서 얻으려 했기 때문이다(삼상 17:47). 그러므로 이는, 후일 바벧론 왕의 사신들의 방문을 받은 히스기야 왕이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보물 창고와 무기고를 보여 줌으로써 재력과 군사력을 자랑한 교만죄와 같은 성질의 죄인 것이다. 이처럼 다윗은 인구 조사를 통해 자기의 세력과 영광스러운 번영을 확인하고 자랑하려 했다. 특히 군사력에 대한 실세를 파악(9절)함으로써 강대국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고자 했다. 이러한 의도는 (1) 번영의 근거가 바로 자신에게 있다고 믿으며, (2) 하나님 보다는 군사력을 더욱 신뢰하려 했던 다윗의 교만을 반영한 것이다. 이렇듯 인간들은 흔히 자신에게 찾아온 행복과 번영을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제목으로 삼지 않고 자신의 힘을 괴시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이러한 인간의 과시욕과 명예욕은 그러한 번영과 힘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일로서, 결국 그분의 진노를 자초하고야 만다(시 94:2;잠 21:4;눅 1:51).
=====24:3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 이는 요압이 다윗의 인구 조사 명령을 반대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요압의 반대는 다윗의 범죄를 방지해보려 했던 충언이었다. 하나님은 신정(神政) 국가의 복된 미래를 약속하신 바 있다(신 33:9). 그러나 그 약속에는 어디까지나 왕과 그 백성들이 하나님만을 절대 신뢰하여야 한다는 전제가 붙어있는 것이었다. 다윗이 이러한 전제에서 벗어나 교만한 마음으로 자기 힘을 의지하려 하자, 이에 요압이 다윗의 잘못됨을 인식하고 충언을 하였던 것이다(Smith, Fay). 한편, 정세(政勢)에 대단히 민감했던(19:5-7) 요압은 백성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다윗의 명령에 반대하였을 가능성도 있다(The Interpreter's Bible). 즉, 주변 이방 나라들의 경우 인구 조사는 주로 과세와 징병의 목적으로 실시되었기 때문에, 자칫 이번의 인구 조사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오해와 원성을 살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24:4
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 장관들을 재촉한지라 - 이때에 요압과 더불어 요압 휘하의 각 부대 장관들도 함께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다윗의 인구 조사 명령은 공식 석상에서 하달된 것으로 보인다(Pulpit Commentary). 한편 원문상으로 볼 때 이들이 요압의 견해에 동조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사실은 다윗이 요압과 군대 장관들 각각에게 인구 조사 시행을 재촉하였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 (엘 요압 웨알 사레이 헤하일)은 직역하면, '요압에 대하여(against), 그리고 군대 장관들에 대하여(against)'이다. 그리고 '재촉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자크'(* )는 '강퍅하다', '완악하다'란 의미리 말로서(출 8:19;9:35), 이는 다윗이 신하들의 만류를 끝까지 뿌리치고 자기의 고집을 극구 주장하였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24:5
갓 골짜기 가운데 성읍 아로엘 - '아로엘'(Aroer)은 요단 동편에 있던 한 성읍으로서(신 2:36;수 12:2), 원래는 르우벤 지파에 속했으나 그곳에 성(城)을 쌓은 자들은 갓 자손이었다(민 32:34). 이곳은 사해(死海)에서 동쪽으로 약 22km 떨어진 곳이며, 아르논 강북쪽 해안에 위치해 있었다(Biblical Commentary). 한편 이곳은 국경 지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요압은 여기서부터 인구 조사를 착수했던 것이다.
야셀 - 본래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성읍이었으나, 후에 갓 족속의 정착지가 되었다(민 32:35;수 13:25). 또한 이곳은 아모리 지경과의 경계지가 되었고, 갓 지파가 레위 지파에게 준 네 성읍 중 하나였다(수 21:39).
장막을 치고 - 인구 조사는 큰 사업이었기 때문에 많은 무리들이 동원되었다. 따라서 요압은 이들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장막을 아로엘과 야셀 사이의 초원 지대에 건설하고, 이 장막을 인구 조사의 본부로 이용했던 것이다(Keil, Lange).
=====24:6
길르앗 - '길르앗'(Gilead)은 인구 조사 본부가 설치되었던 아로엘과 야셀이 속해있는 지방으로서(신 3:10), 얍복 강 양편의 산악 지방을 일걷는다(창 31:21-48).
이곳에는 갓과 르우벤과 므낫세 반 지파가 살았다. 닷딤홋시 - 이곳의 위치는 불분명하나 갈릴리 바다 동편인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이들이 그곳에서 이스라엘 북단 '다냐안'으로 갔기 때문이다. 즉, 이곳은 길르앗에서 다냐안으로 가는 중간 지점인데, 이렇게 볼 때 닷딤홋시(TahtimHodshi) 땅은 갈릴리 바다 동편일 수 밖에 없다(Keil).
다냐안 - 이는 정확히 말해서 '단야안'(* )이며, 곧 이스라엘 북단에 있는 '단'을 가리킨다(수 19:47;삿 18:29). 이곳은 다메섹 남서쪽에 위치했으며 당시 다윗 왕조의 북쪽 경계지였다. 한편, '야안'은 베니게의 신(神)의 이름으로, 이교적인 풍습에 의해 이 우상의 이름이 지명에 붙여진 듯하다(Bunsen).
시돈 - '시돈'(Sidon)은 사실상 다윗 왕국의 영토는 아니었으나, 다윗 왕국의 속국으로서 당시 군역(軍役)에 가담하고 있었다(Pulpit Commentary, The Interpreter's Bible). 한편 시돈성(城)은 베니게의 부요한 성읍이었으며, 단의 북서쪽 지중해 해안에 위치하였다(창 10:15;수 11:8;19:28).
=====24:7
두로 견고한 성 - '두로'(Tyre) 역시 시돈과 마찬가지로 당시 다윗의 종속국이었다. 이곳은 시돈에서 남쪽으로 약 40km 지점이다(수 19:29) 따라서 이스라엘 최북단까지 올라간 요압 일행은 시돈을 기점으로 하여 남쪽으로 선회했던 것이다.
히위 사람과 가나안 사람의 모든 성읍 - '히위 사람'(the Hivite)이나 '가나안 사람'(the Canaanit)은 모두 이스라엘 내에 거주하던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비록 히위 사람들은 기브온 근처까지 내려와 살기도 하였지만(수 11:19), 이들 이방인들은 주로 이스라엘의 북방 지역, 즉 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지파의 땅에 공동 거주하였다. 따라서 이곳은 후에 '열방의 둘레'라는 뜻의 '갈릴리'로 불려지게 되었다(Pulpit Commentary, Lange). 한편 이들 이방인들 역시도 군역(軍役)을 감당해야 했으므로, 인구 조사에서 제외될 수 없었다.
브엘세바 - '브엘세바'(Beersheba)는 유다 네게브 지방의 한 성읍이었고, 남쪽 유다의 행정 중심지였다(대하 19:4). 그리고 이곳은 이스라엘 영토의 최남단(最南端)에 위치했다. 그러므로 성경 저자들은 이스라엘의 판도를 서술할 때 흔히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 기술하였다(삿 20:1;삼상 3:20;삼하 3:10).
=====24:8
아홈 달 스무 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 이 기간 동안에 펼친 요압의 인구 조사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즉 병행 구절인 대상 21:6에 보면, 요압이 '왕의 명령을 밉게 여겨' 레위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조사하지 않은 사실이 밝혀져 있다. 그리고 대상 27:24에 의하면, 인구 조사를 채 끝내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한 사실이 밝혀져 있다. 때문에 여기에 기록된 인구 조사 기간은 매우 긴 기간으로서, 요압은 다윗의 명령을 못 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최선을 다하지 않고 소홀하게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Keil, Fay).
=====24:9
이스라엘...팔십만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이었더라 - 이 기록은 병행 구절인 대상 21:5의 기록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역대기에서는 이스라엘의 병력이 110만이요 유다의 병력은 47만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1) 혹자는 역대기의 기록이 이방인의 숫자를 포함시킨 것이기 때문에 더 많아졌다고 주장한다(Schmid) (2) 그리고 또 혹자는 역대기의 수효에는 베냐민 지파와 레위 지파의 수효까지 합산되었기 때문에 더 많아졌다고 주장한다(D. Kimchi). (3) 그러나 우리는 '그 수효를 다윗 왕의 역대 지략에 기록하지 아니하였더라'(대상 27:24)는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이 같은 차이는 그 수치가 구전(口傳)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알 수 있다(Keil, Lange, Smith, The Interpreter's Bible). 따라서 어느 기록이 더 신빙성 있는 것인지 우리는 결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대략 이 두 기록의 중간쯤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아무튼 이스라엘의 병력이 130만이든 아니면 157만이든, 이 숫자는 출애굽 당시의 군사력(603,550명;민 2:32)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숫자였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보고를 받고 자기의 국력을 확인하고는 크게 만족해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다윗은 어리석게도 이 모든 번영과 강성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또한 많은 대군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힘이 되어 주시기 않는다면 패배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칼을 빼는 담대한 자 - 모세 율법에 따르면(민 1:3;26:2), 이스라엘 백성 중 싸움에 출전할 수 있는 자는 만 20세 이상의 성인 남자였다. 그런데 요압의 인구 조사 결과 이처럼 이스라엘 중에 전투 능력이 있는 장정들은 도합 130만 명이었다(대상 21:5의 기록에는 157만명). 이런 수치에 근거하여 통례상 군복무 가능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 가량이라고 본다면, 당시 다윗 통치하의 이스라엘 전체 인구는 500~600만 명 가량으로 추산될 수 있다(Keil, Fay).
< 설 교 >
다윗 왕의 인구조사
사무엘하 24:2-10
인간에게 있어서 욕망은 마치 끝없이 물을 뿜어내는 분수와도 같은 것입니다. 중지됨도 없고 사그라짐도 없이 인간이 숨을 쉬며 육체로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발산되는 것입니다. 인간에 의해 통제되지도 않고 조절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욕망이 인간을 사로잡아 끌고 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욕망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만족이라는 것을 모르게 합니다. 채워짐이 없이 항상 부족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욕망에 사로잡혀 신을 찾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신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위해 신을 찾는 것, 그것이 곧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처럼 욕망으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욕망 자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 십계명에서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탐심이 있는 인간, 즉 욕망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거부하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욕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담 이후로 어느 누구도 욕망 없는 존재는 없습니다. 결론은 하나님은 세상 모든 인간을 거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도무지 이러한 현실에 대해 관심이 없기에 자기 욕망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이 자신의 정성을 보신다느니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자기만의 종교 생활에 심취해 있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관심이 있어서 하나님을 찾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관심이 있어서 십자가를 언급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관심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욕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세상의 모든 인간을 거부하신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의 존재에 불과한 우리는 예수님이 없이는,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멸망의 자식으로 끝날 인생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에게 좋은 것을 얻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종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신자는 인간의 욕망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욕망으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인간의 의로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회개하며 그리스도께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바로 이런 자입니다. 자신의 죄를 알고 독생자 예수님만이 생명 되심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그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컬으시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2절의 “왕이 이에 그 곁에 있는 군대 장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그 도수를 내게 알게 하라”는 내용을 보면 다윗이 요압에게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할 것을 명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1절의 내용이 조금 이상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치시려고 하시는데 그 일을 위해 다윗을 감동시켜서 인구를 조사하라고 하셨다는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를 조사하는 범죄를 하게 했다는 의미로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을 치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를 조사하게 했다는, 즉 하나님이 다윗에게 죄를 범하게 했다는 내용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대상 21:1절을 보면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즉 다윗이 이스라엘을 계수한 것은 사단이 다윗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본문에서 하나님이 다윗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으로 말한 것은, 서로 상반된 내용이 아니라 사단이 다윗을 격동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지 않고 허용하셨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결국 다윗이 범죄 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신 것인데 그냥 두고 보셨으면서도 죄를 물어서 진노하시는 것은 또 무엇 때문입니까?
25절을 보면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고 재앙을 내리심으로써 재앙이 무엇으로 그치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번제와 화목제로 인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으시고 재앙이 그치는 것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경험하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마음을 번제와 화목제로 끌어가고자 하신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를 번제와 화목제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끌어가기 위해 우리의 범죄를 그냥 두고 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죄 속에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다윗의 인구조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것을 두고 과연 범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실 인구조사 자체를 두고 죄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민 1:1-2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계수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하나님이 인구를 계수하라는 명령을 하지도 않았는데 계수한 것이 죄일까요? 그렇다고 해도 역시 인구조사 자체를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의 죄는 인구를 조사한 목적에서 찾아야 함이 분명합니다.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목적이 무엇일까요? 3절을 보면 요압이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이것을 보면 다윗이 인구를 조사하고자 한 것은 많은 수의 군사를 계수함으로써 자신이 힘있는 왕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으로 만족을 얻고자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많은 수를 힘으로 여기는 사고방식과 연결된 인구조사였던 것입니다.
세상은 숫자에 민감합니다. 우리도 많은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엇을 기도해도 항상 많게 해달라는 것이 빠지지 않습니다. 교회를 찾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는 것을 원하고, 재정도 많아지는 것을 원하고, 예배당도 큰 것을 원하고, 이렇게 작은 것보다는 많은 것이 좋다는 사고방식에서 교인의 수를 헤아리고 돈을 헤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이 백성은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신다’는 말을 합니다. 백성이 많아지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인구를 조사하여 수를 확인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수가 많든 적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신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용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시면 승리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용사의 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용사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이 패배하게 하신다면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지 용사의 많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해마다 년 초가 되면 교회는 공동의회를 합니다. 그리고 지난해의 결산과 올해의 예산을 정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기에 목사들이 만나면 서로에게 올해 예산이 얼마인가를 묻습니다.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의 크기를 비교하고 많은 돈으로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만족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인구조사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역대상 21장에서 사단이 다윗을 격동하였다고 한 것처럼 사단은 숫자의 많고 적음으로 인간을 격동합니다. 많은 수로 인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게 하고, 적은 수로 인해서는 자신을 약하다고 여기고 실망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단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힘을 가지고 인간을 격동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만이 힘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힘을 구하라는 방식으로 격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격동에 의해서 ‘하나님 힘을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범죄라는 것도 모른 채 말입니다.
다윗의 범죄는 우리로 하여금 숫자를 바라보지 말도록 경고하는 것입니다. 수의 많고 적음으로 하나님의 복을 가름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일일 뿐임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잘되는 것을 많아지는 것으로 평가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잘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 빠져 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20절을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 천 사람이 모였으나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은 것과, 두 사람이 모였으나 예수님이 함께 한 것 중 어느 것이 더 낫습니까? 아마 어느 한쪽을 두고 이것이 낫다는 말을 선뜻 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둘 다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이 모이는 것과 예수님이 함께 한 것 말입니다.
그러면 천 사람의 모임에 예수님이 함께 한 것과 두 사람의 모임이 함께 하신 것에 차이가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성경은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동일하다면 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모임이냐?’에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의 범죄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항상 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우리 속에서 욕망이 우리를 격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욕망이 격동하기에 무엇에 대해서도 만족함이 없고 감사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10절을 보면 “다윗이 인구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인구수를 조사한 것이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미련함을 고하면서 죄를 사해 달라고 간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죄는 다윗 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미련한 것인가를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범죄하면서도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고 마음에 자책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어떻게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을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입니다. 그런데 욕망에 격동당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미련함을 보지 못하고 죄를 보지 못하면서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인구조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있는 욕망의 실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를 구출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깊이 빠져드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해서도 고개를 돌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다윗을 나무라는 요압의 말을 듣지 않는 인간의 완악함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 왕의 인구조사
이종민목사 / 삼하 24:1-25
오늘 말씀은 사무엘하 마지막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하게 하시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다윗에게 인구조사를 시키신 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감동시켜 인구조사를 하게 하셨다고 합니까?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들을 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이해가 되십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을 부추키셔서 인구조사 할 마음을 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이런 마음을 주셔서 인구조사를 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진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죄악인지, 아니면 다윗 왕의 죄악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진노하실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진노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이 사건의 전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2절을 보면 다윗 왕이 곁에 있는 군대 장관 요압에게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3절에 보면 요압이 다윗 왕에게 인구 조사를 하지 말 것을 간청합니다. “요압이 왕께 고하되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하며 말렸습니다(3).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4-9절을 보면 다윗 왕은 요압과 군 사령관들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9개월 20일 동안 인구를 조사하여 보고합니다. 그들이 조사하여 보고한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습니다(9). 이 숫자는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숫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보고를 받자마자 이것이 죄인 줄 알고 자신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10절을 보면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인구 조사를 마친 후에 다윗의 마음에 곧바로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자책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이미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힘을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이러한 힘을 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이 말린 것은 이런 것이 죄임을 알게 하는 장치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이런 바른 말을 경청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인구조사를 역대기에서는 사단이 충동하였다고 합니다. 역대상 21:1절을 보면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사단의 충동을 받아들인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서 이들의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그런 죄로 인하여 재앙이 내리는 것이 무엇인지, 그런 죄를 속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오늘 본 장의 전체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30:11-1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 곧 이십세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고 했습니다. 처음 인구조사는 출애굽 때 입니다. 출애굽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여 인구조사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20세 이상 인구를 조사하여 대속을 위한 속전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 속전은 회막 봉사를 위하여 사용되는데 그 속전으로 생명을 대속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모세에게 20세 이상 인구를 조사하여 속전을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까? 인간은 존재만으로도 죄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존재만으로도 죄이기 때문에 생명의 속전을 바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수를 헤아려 자기의 힘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인구조사를 명하시면서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빈부의 차별이 없이 동일한 속전을 내게 한 것은 어떤 인간도 그 존재 자체로 의로운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곧 모두가 속죄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1:1-4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제 이년 이월 일일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이스라엘 중 이십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군대대로 계수하되. 매 지파의 각기 종족의 두령 한 사람씩 너희와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민수기는 말 그대로 인구를 조사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출애굽 한 수를 조사하니 603,500명이었습니다. 이들이 광야 40년을 지난 후에 이 계수에 들어간 자 중에 남은 자는 단 2명뿐이었습니다. 그리고 20세 이하의 자손들이 자라서 601,730명이 됩니다(민 26:51). 처음 인구 계수에 들어간 자 중에 약속의 땅에 들어간 자가 갈렙과 여호수아 단 2명뿐입니다. 모세 조차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인간의 수나 힘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온유한 자 곧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 의뢰하는 자가 들어갑니다. 그런데 다윗과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그대로 두자 다윗은 인구조사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힘을 과시하고 의지하고자 함이었기 때문에 온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늘 인구를 조사합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숫자를 셉니다. 한국 교회에서 성공한 목사의 척도가 무엇입니까? 교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곧 교인수가 성공의 척도입니다. 참된 교회의 표지가 무엇입니까?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가 바르게 시행되며, 권징이 정당하게 시행되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사람이 얼마나 모이는가 그 수로 목회 성공을 판단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존재만으로도 저주를 받아 마땅하기에 속전을 바쳐야 하는 인생들이 숫자의 힘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2:22절을 보면 인생의 호흡은 그 코에 있기에 수에 칠 가치조차 없다고 합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 2:22). 그런데도 사람들은 사람의 수를 힘으로 여기고 그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전쟁에 사람의 수나 말과 병거가 아무 소용이 없음을 이스라엘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다윗 왕도 인구조사를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14:6절을 보면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상 17:47절을 보면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했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신앙 고백이 이러합니다. 이런 고백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고 그대로 내버려두시면 인간들은 사람의 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됩니다. 오늘 본문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31:1-3절을 보면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늘 이러한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힘을 빼도록 조치하십니다. 그렇게 힘이 빠져서 오직 주님만 의지하게 되는 자를 온유한 자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다윗은 인구조사를 마치고 보고를 받자마자 자신의 죄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인구조사를 한 것이 여호와께 큰 죄를 범한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이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다는 고백을 할 때에 갓 선지자를 통하여 세 가지 재앙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합니다. 11-13절을 보면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왕의 땅에 칠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삼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7년 기근과 3개월 대적에게 쫓기는 것, 그리고 3일 전염병입니다. 다윗이 여호와는 자비 하시니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3일 전염병을 택합니다. 14-15절을 보면 다윗이 삼일 온역을 택하였습니다. 그로인해서 무려 7만 명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16절에 보면 이 때 여호와께서 천사의 손을 멈추게 하십니다. 그 멈춘 자리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입니다. 17절을 보면 다윗이 천사를 보고 여호와께 아뢰기를 자신이 범죄 하였고 악을 행하였는데 이 양 무리가 무엇을 행하였느냐고 하면서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진정으로 회개한 모습입니다. 자신이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다윗이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했을 때 갓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18-25절을 보면 “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소서 하매. 다윗이 여호와의 명하신바 갓의 말대로 올라가니라. 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 신복들이 자기를 향하여 옴을 보고 나가서 왕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가로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다윗이 가로되 네게서 타작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로라.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고하되 원컨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하는 제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고하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고 했습니다. 갓 선지자는 다윗에게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고 합니다. 이에 다윗은 순종하여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으로 올라갑니다. 아라우나가 왕이 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맞이합니다. 다윗은 아라우나에게 타작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이 모든 것을 다 드릴테니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이에 다윗은 값을 지불하고 그 타작마당과 소를 사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며, 이스라엘에게 내린 재앙이 그쳤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한 우리는 늘 힘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힘을 추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이것이야 말로 재앙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을 통하여 인구조사를 하게 하시고 그런 충동을 받은 다윗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오늘날 우리들이나 간에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다윗의 인구조사 사건입니다.
역대하 3:1절에 보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집니다. 이 산이 모리아 산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곳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전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번제와 화목제물이 되심을 보여주시는 계시의 사건입니다. 로마서 3:23-26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요한일서 4:9-11절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재앙을 대신 받으신 화목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은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나누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영원한 우리의 왕으로 모시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다윗의 인구조사
곽창대목사 / 삼하 24:1-25
사무엘서의 마지막 장입니다. 여기서 사무엘서의 저자는 다윗의 범죄와 회개와 회복을 부각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경각심을 고취합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죄인데 그 죄를 회개하도록 하나님께서 엄중하게 징계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진지하게 회개하면서 징계를 달게 받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부제를 “하나님의 징계와 회복”이라고 정했습니다.
1절: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셨습니다. 이전에도 진노하셨지만 또 진노하셨다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다시 진노하셨을까요? 이스라엘이 무엇을 했기에 하나님께서 다시 진노하셨는지 본문에서는 알 수 없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이스라엘이 파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정당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1절을 다시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치시기(징계하시기) 전에 다윗을 격동시키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려고 작정하셨으면 선지자를 보내셔서 징계의 이유를 말씀하시고 징계하시면 되는데, 왜 다윗을 거쳐 징계하시려고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징계를 막을 기회를 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다윗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반역한 것은 다윗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것도 다윗이 감당해야 할 주요과제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다윗을 격동시키셔서 인구조사를 하게 하셨다고 하는데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병행구절인 역대상 21:1에서는 “사탄이 일어나 다윗을 충동하였다”고 합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욥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늘의 어전회의에 사탄이 참석했습니다. 온 땅을 시찰하고 온 사탄에게 하나님께서 욥의 행실이 어떠한지 물어보셨습니다. 사탄은 욥의 행실이 착하고 의로웠다고 하면서 욥이 그런 사람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엄청난 복을 주셨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욥이 재난을 당하면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욕할 것이라고 공세를 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의 생명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무엇이든지 욥에게 재앙을 내려 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온갖 재난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파선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실제로 욥은 사탄의 유혹에서 승리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사탄이 다윗을 충동(유혹)하도록 허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욥과는 달리 다윗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그 당시 다윗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었다고 보입니다. 그걸 알고도 하나님께서 다윗이 사탄의 유혹을 받도록 허용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갈 것을 하나님께서 아셨으면서도 꼭 그렇게 하셔야만 했을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설교의 결론 부분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2절: 다윗은 군대의 총사령관인 요압에게 전국적으로 인구조사를 하여 보고하라고 명령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인구조사를 한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광야생활을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파별로 인구조사를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민 1장).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모압 땅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다시 인구조사를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민 26장). 그러므로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것이 문제였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추진하려고 한 인구조사의 이유와 목적에 무언가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왜 인구조사를 하려고 했을까요? 인구조사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이어지는 문맥을 통하여 어느 정도 추론이 가능합니다.
3절: 요압이 반론을 제기합니다. “왕이여, 지금 인구조사를 해야 할 명분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도 그걸 기뻐하실까요?”라는 뜻입니다.
4절: 요압의 항의에도 다윗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신속하게 인구조사를 하라고 지시합니다.
5-9절: 인구조사 기간이 9개월 20일이나 걸렸습니다. 전국에서 칼을 빼는 용사들의 수가 13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보고를 통해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주요목적이 군사력의 점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강한 나라가 되었는지 확인하려고 한 것입니다.
10절: 인구조사의 결과를 보고받고는 다윗의 마음에 자책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은 일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했습니다.
11-13절: 하나님께서 선지자 갓을 다윗에게 보내어 세 가지의 징계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다윗에게 말씀하셨습니다. 7년간의 기근과 대적들의 침공을 받아 석 달간 도망 다닐 것과 사흘간의 전염병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기근과 전쟁과 전염병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했을 때 받게 될 하나님의 저주요 징계입니다(신 28:15-25).
14절: 다윗은 그 세 가지 가운데 무엇을 택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들에게 긍휼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그 선택을 넘깁니다.
15절: 하나님께서 온 이스라엘에 전염병이 돌게 하셨습니다. 그로써 7만 명이나 죽었습니다.
16절: 하나님의 징계를 집행하는 천사가 이제 예루살렘에 전염병을 내리려고 손을 들었는데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셔서 징계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천사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서있었습니다.
17절: 다윗이 그 천사를 보고는 하나님께 다시 회개하면서 자신이 잘못했으니 백성들을 향한 진노를 거두시고 대신에 자신과 자신의 집에 진노하시기를 간청했습니다.
18-25절: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순종하여 다윗이 그 마당을 값을 치르고 사서 거기에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재앙을 그쳤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오늘날 신약시대의 교회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 백성 공동체가 이스라엘이었다면 신약시대의 하나님 백성 공동체는 교회입니다. 그러하기에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신약시대의 하나님 백성 공동체인 교회에서 지도자들의 처신과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징계하시기 전에 먼저 교회의 지도자들을 시험하실 때가 있습니다. 지도자들이 그 시험에서 이기면 하나님께서 징계를 거두신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도자가 정신을 차려 올바르게 처신함으로써 성도와 교회를 바른 길로 이끈다면 하나님께서 구태여 성도와 교회를 징계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도자들이 시험에 넘어지면 하나님의 징계는 발효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공의가 섭니다. 물론 징계 중에 지도자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성도와 교회를 회복하십니다. 성도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이 징계가 아니라 회복이며 저주가 아니라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애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렘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지만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에게 시험을 허락하시며 시험에서 넘어졌을 때 징계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시험과 징계에 관하여 올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더 풍성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가운데 야고보서와 히브리서가 교회와 성도가 받는 시험과 하나님의 징계에 관하여 올바른 시각을 갖도록 도움을 줍니다.
시험에 관하여
(약 1:13-18)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1)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않으십니다(13절). 하나님은 악을 도모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악에게 넘어가는 무력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13절).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시험하시는 하나님이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악한 의도로 우리를 유혹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시험하시거나 시험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만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모든 시험을 간섭하시고 통제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시험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그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시켜서는 안 됩니다(13절 전반절). 우리가 시험에 빠져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 탓도 환경 탓도 주변 사람의 사람 탓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내 탓입니다. 내 속에 있는 정욕에 이끌려 미혹되고 시험에 넘어간 것입니다(14-15절). 그러므로 시험에 넘어졌을 때에는 변명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 솔직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길이요 회복의 길입니다.
3)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모든 좋은 것을 풍성히 베푸시는 참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17-18절). 17절에서 “빛들의 아버지”란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자녀들인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베풀어주십니다. 베풀어주시되 변함없이 풍성하게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범죄 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백성들까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지만 다윗과 그의 백성들이 얻은 유익은 컸습니다.
징계를 통하여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한 것을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백성들이 큰 재앙으로 고통하게 된 것은 모두 제 탓입니다.”라고 참회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할 인생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지자 갓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윗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구입하고 거기에 제단을 쌓아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죄 용서를 받은 다윗과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한 것입니다.
* 번제: 몸과 마음 전부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이 담긴 제사입니다.
* 화목제: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을 감사하는 제사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내렸던 재앙을 거두시고 회복의 은혜를 주셨습니다(25절). 병행구절인 역대상에서는 더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대상 21:26-28) 『[26]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27] 여호와께서 천사를 명령하시매 그가 칼을 칼집에 꽂았더라 [28] 이 때에 다윗이 여호와께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응답하심을 보고 거기서 제사를 드렸으니』
(대상 22:1) 『다윗이 이르되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 하였더라』
역대상 22장을 계속 읽어보면, 다윗은 그 타작마당에 하나님의 성전이 건축되기를 바라며 성전건축을 위한 재료들을 정성을 다하여 준비합니다.
그 타작마당은 이전에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모리아 산인데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거기에 성전을 세웠습니다.
(대하 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다윗이 사탄의 시험에 넘어감으로써 자신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지만 회개하는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회복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은혜의 증표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쌓은 번제단에 불이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그곳이 성소가 되었으며 앞으로 건축될 예루살렘 성전의 지대가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성소와 예루살렘 성전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들인 자기 백성들을 만나시는 구별된 장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만나시기 위하여 세우신 제도가 성전제사였는데 번제, 소제,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입니다. 이 5대 제사는 회개하는 죄인들이 용서를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이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다짐하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5대 제사는 온전한 제사가 드려질 때까지 그림자 역할을 했습니다. 때가 되어 참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단번에 자기 몸을 드려 온전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참 성전의 모퉁이돌이 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모임인 교회가 그 모퉁이돌(기초석) 위에 참 성전으로 지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데 그 은혜를 누리는 장소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귀히 여겨서 교회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윗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범죄 했지만 회개함으로써 사죄와 회복의 은총을 누렸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한시라도 살 수 없는 죄인임을 자각해야합니다. 동시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며 살라!
* 하나님께 범죄 했으면 속히 회개부터 하라!
* 지도자들부터 회개하라! 백성들에게 책임을 미루지 말고 “내 탓이오!”라고 회개하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라!
* 은혜 받았으면 은혜 받은 자답게 살라! 하나님께 예배하며 살라!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삶을 살라!
하나님의 징계에 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가 하나님의 자녀에게 꼭 필요한 은혜라고 설명합니다.
(히 12:4-11)『[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범한 죄에 대하여 징계하십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최종적인 심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정결하고 온전한 자녀들이 되도록 지금 여기서 훈련하시는데 그 훈련 가운데 하나가 징계입니다. 그러므로 징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내리시는 은총 중의 은총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두실 때가 많은데 그들에게는 마지막에 엄중한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 징계의 이유(6-8절):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 징계의 목적(10-11절): 자녀들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려고, 믿음의 연단을 위하여,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하려고
* 징계 받을 때의 태도(4, 5, 9절): 낙심하지 말라, 감사하라, 회개하라, 간구하라,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참으로 사랑하는 다윗에게 무거운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을 가차 없이 징계하신 하나님을 보면서 크게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시험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시험을 견디고 극복해야 합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서 승리하게 하신다는 약속이 담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할 때 우리는 넉넉히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혹 여러분이 시험에 빠져들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미 시험에 빠져 죄를 범했습니까? 그 죄가 점점 더 자라고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지금 여러분에게 회복의 기회가 있습니다. 다윗처럼 하나님께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회복하십니다. 이유는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회개하고 돌아설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응분의 징계를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징계는 당신의 자녀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징계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은 회복되어 결국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됩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설교 앞부분에서 “다윗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갈 것을 하나님께서 아셨으면서도 꼭 그렇게 하셔야만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그 질문에 네 가지정도로 답할 수 있습니다.
1) 지도자의 책임이 막중함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도자가 올바르게 처신할 때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징계를 통하여 뼈저리게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요 목사인 존 오웬은 말했습니다.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우리를 죽인다.” 죄는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주범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를 우리도 미워해야 합니다. 성도와 교회는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합니다. 거룩한 성도 거룩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3) 시험에 넘어가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회개만이 살 길임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도록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성도와 교회는 회개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참회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날마다 간구해야 합니다.
4) 성도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은 징계가 아니라 회복입니다. 믿음의 연단과 성숙에서 누리는 평안입니다. 그래서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복의 은혜를 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사탄은 시험에 넘어가 죄를 범한 우리에게 “너는 끝장이다!”라고 엄포를 놓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다시 시작하자!”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윗처럼 회개함으로써 다시 생명의 길로 나아가십시오! 회개를 미루는 것은 정말 어리석습니다. 지금 회개하십시오! 더 이상 죄에 짓눌려 살지 마십시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 승리하십시오! 영적 전투에서 매순간 주님의 크신 은총과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승리의 개가를 올리십시오! 여러분의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당당하게 자랑하는 자들이 되십시오! 이것이 오늘의 본문말씀의 핵심입니다. 한 주간도 이 말씀을 붙잡고 살아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찬송가 337장
요약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죄입니다. 그 죄를 회개하도록 하나님께서 엄중하게 징계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진지하게 회개하면서 징계를 달게 받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십니다(1절). 이스라엘이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바로 징계하지 않으시고 먼저 다윗을 격동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징계를 막을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백성들의 지도자이자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 다윗의 주요과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대상 21장 1절에서는 사탄이 일어나 다윗을 충동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욥기의 배경과 마찬가지로 사탄이 다윗을 충동하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셨다고 보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욥과는 달리 다윗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유혹에 넘어간 다윗은 전국적으로 인구조사를 강행합니다(2~4절). 군사력을 점검하여 이스라엘이 얼마나 강한 나라가 되었는지 확인하려고 한 것입니다(5~9절). 결과를 보고 받은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은 일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합니다(10절).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전염병을 돌게 하셔서 7만 명이 죽임을 당합니다(11~15절). 이에 다윗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서있는 천사를 보고는 하나님께 다시 회개하면서 백성들을 향한 진노를 거두시고 대신에 자신과 자신의 집에 진노하시기를 간청합니다(16~17절). 그러자 선지자 갓이 타작마당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고 합니다. 다윗이 그 말에 순종하여 거기에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리며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재앙을 그치십니다(18~25절).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교회를 징계하시기 전에 먼저 교회의 지도자들을 시험하실 때가 있습니다. 지도자가 정신을 차려 올바르게 처신함으로써 교회를 바른 길로 이끌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십니다. 하지만 지도자들이 시험에 넘어지면 하나님의 징계는 발효될 것입니다. 물론 징계 중에 지도자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성도와 교회를 회복하십니다. 성도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이 징계가 아니라 회복이며 저주가 아니라 평안이기 때문입니다(렘 29:11; 애 3:33).
여기서 하나님의 시험과 징계에 관하여 올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않으십니다(약 1:13). 그리고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약 1:13). 물론 시험을 허락하시기도 하지만 반드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만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가 시험에 빠져 죄를 범하는 이유는 내 속에 있는 정욕에 이끌려 미혹되고 시험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약 1:14~15). 이렇게 시험에 넘어졌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모든 좋은 것을 풍성히 베푸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약 1:17~18).
다윗도 사탄의 시험에 넘어감으로써 자신과 백성들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지만 회개하는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회복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은혜의 증표가 타작마당에 쌓은 번제단에 불이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그곳이 성소가 되었으며 앞으로 건축될 예루살렘 성전의 지대가 되었습니다(대하 3:1).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만나시기 위하여 성전제사 제도를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제사는 온전한 제사가 드려질 때까지 그림자 역할을 했습니다. 때가 되어 참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단번에 자기 몸을 드려 온전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데, 그 은혜를 누리는 장소가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범죄한 것들에 대하여 회개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시험에 빠져들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미 시험에 빠져 죄를 범했습니까? 회개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물론 회개하고 돌아설 때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징계는 당신의 자녀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 가운데 하나입니다(히 12:4~11). 그 징계로 말미암아 우리는 회복되어 결국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됩니다. 교회에서는 누구보다 지도자의 책임이 막중합니다. 성도와 교회는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참회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날마다 간구해야 합니다. 성도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은 징계가 아니라 회복입니다. 믿음의 연단과 성숙에서 누리는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속히 회개하십시오. 회개를 미루는 것은 정말 어리석습니다. 더 이상 죄에 짓눌려 살지 마십시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 승리하십시오. 영적 전투에서 매순간 주님의 크신 은총과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승리의 개가를 올리십시오. 여러분의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당당하게 자랑하는 자들이 되십시오. 한 주간도 이 말씀을 붙잡고 살아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정말 무서운 죄
삼하 24장 1~14절 / 이동주목사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 중 1절 말씀은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백성의 수를 세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잘못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숫자를 세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두 번이나 인구를 세게 하셨음을 우리는 압니다. 게다가 그 당시 주변국들을 보면 인구 조사를 하지 않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싸울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를 확인하고, 세금을 걷을 때도 사람의 숫자를 세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목자가 자기의 양이 몇 마리인지 아는 것은 당연한 것이 예수님께서도 자기에게 속한 모든 자의 이름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수를 센 것이 7만명을 죽일만큼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가혹하게 심판하셨을까요?
이 해답은 오늘 본문 구석구석에 숨어들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없지만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에 어떤 심각한 문제가 생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에 보면 다윗의 신하인 요압조차도 왕의 마음 속에 무엇인가 변질된 것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실 텐데 왕은 왜 이런 일을 하시려 합니까?"라고 요압은 묻습니다. 그가 보기에 다윗의 행동이 비정상적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10절에 보면 다윗 스스로도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표현되어있지 않지만 다윗의 마음 속에 무엇인가가 들어가서 그것이 영향을 미쳐 숫자를 센 것이고, 다윗 스스로도 이 숫자를 센 것이 하나님 앞에 아주 큰 죄라고, 심히 미련한 짓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다윗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어서 인구 조사를 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사람 숫자 센 것을 무엇 때문에 이토록 화를 내셔서 백성들까지도 가만 두시지 않은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오랫동안 왕위에 앉아 있었지만 겸손한 자이었습니다. 평생에 걸쳐 다윗처럼 겸손하고 모든 일에 하나님께 묻고 행한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틈에 이 교만이 들어왔습니다. 왕위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인구를 세고 있는 이 순간은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라 자기의 왕국이 되어 인구를 세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은 숫자의 많고 적음에 의해 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318명의 용사를 가지고 이방 연합군을 물리쳐 자기의 조카 롯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쫓아오는 애굽의 군대를 홍해를 열어 그 안에 집어넣으셨읍니다. 견고한 여리고성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읍니다. 기드온의 300명 용사 이야기는 더욱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사사기 7장 2절에 보면 [너를 쫓은 백성이 너무 많은 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300명이 적군과 싸운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음을 고백케 하십니다. 사람의 숫자에 상관 없이 이스라엘은 하나님만 의지하면 언제나 이겼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반드시 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다윗이 숫자를 센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그러한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어떠한 침략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만 의지하면 이길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다윗의 평생의 간증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성의 수를 헤아리는 지금 스스로 만족하며 이 정도면 성공이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교만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오늘 아침 두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교만은 성도가 평생에 걸쳐 가장 조심해야 될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사무엘 상하는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오늘 다윗의 인구 조사에 대한 내용은 다윗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사무엘하 24장에 나옵니다. 훌륭한 사람 다윗도 인생의 마지막 부분에 교만이라는 것을 떨쳐버릴 수 없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만은 우리 인생의 최후까지 언제든지 우리가 틈만 보이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며 나를 만족하는 그 순간에 우리의 심령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그런 무서운 죄악입니다. 수없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시를 지으며 노래했던 이 다윗 조차도 이것을 막지 못했던 것을 보며 오늘 우리는 교만 가운데 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한 번의 교만으로 우리 인생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한 번으로 끝장 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지만 지도자가 바로 서있을 때 그 백성들을 살리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지도자와 백성들이 함께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죄 없다고 생각되는 7만에 우리의 관심이 갈지 모르지만, 다윗이 자기의 왕국을 세울 때 하나님께서는 이 왕국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130만이 넘는 군대를 가졌지만 이것은 그저 숫자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를 통해 인류 전체를 다 심판하시고도 한 가족을 통해 오늘날 이 세계를 만드셨습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멸망시키고 하나를 통해 나라를 세우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오늘 이 7만의 숫자는 많은 숫자가 아닙니다. 다윗 한 사람이 교만했는데 그 영향이 막대함을 보아야 합니다. 교만은 나만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교회 전체를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교만하면 나의 가족, 나의 다락방, 나의 교구, 나의 교회, 내가 속한 직장과 내가 속한 사회까지도 결단날 수 있는 것이 교만입니다. 모세도 한 번의 교만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기 원합니다. 지난 가을부터 각종 훈련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시키는 대로 잘 하는데 이맘 때가 되면 슬슬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꼭 이래야만 하는가, 꼭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는가?' 그러나 이런 식으로라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훈련에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믿고 그것을 꾸준히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모태 신앙으로 큰 간증 없이 살아온 분들은 대게 겸손합니다. 한 게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누가 물어보면 "아, 무끄럽지만 모태신앙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 모범생인 모태신앙인은 교만하기 쉽습니다. 더 교만하기 쉬운 사람은 늦게 믿었지만 속도가 빠른 사람입니다. 한참 열심히 하다 보니 모태신앙인 사람들이 자기 뒤에 있는 것을 보고 '아, 이렇게 신앙 생활해서 되겠는가' 라고 판단하기 시작하여 그때부터 사단이 들어오게 되고 한 순간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그것으로 끝장입니다. 이것이 다윗을 통해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님은 늦깍이 신앙인이셨습니다. 한 평생 낚시를 좋아하며 하나님께 멀리, 그러나 아내를 통해 교회 주변에 계셨던 분입니다. 스스로는 교회에 안나오시는 분이셨는데 하나님께서 저희 막내 동생을 치셨고, 동생 살려주면 교회 나오겠다고 한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셔서 그때부터 술과 담배와 취미생활을 다 끊고 새벽 예배까지 참석하시며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늦게 출발하셨지만 신실하게 하셔서 날마다 성경 읽고 묵상하고 새벽기도 하며 겸손하고자 애쓰셨습니다.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저는 거의 검사 수준으로 교회가 이러면 되냐고 따졌고, 그때마다 저의 아버님은 그것을 두둔하시며 기도해야 한다고 하셔서 대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교회를 경험하고, 말씀을 경험하며 이것이 교회구나 하고 깨닫게 되면서 저는 교회를 흩으는 자, 교회를 넘어뜨리는 자였고 저의 아버님은 교회를 세우는 자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장로가 되신 아버님께서 교회에서 대표 기도를 맡게 되면 교회 한 바퀴를 돌며 자연을 바라보며 기도의 제목을 적어 기도를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알았지만, 그러한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겸손은 내가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갖고 있느냐에 상관 없이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사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제가 직장을 그만 두고 입학 날짜가 맞지 않아 야간 신학대학원을 다녀야 했을 때 '내가 어쩌다가 이곳에 있는가' 불평했지만 제 눈이 바뀔수 있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직장 다니며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어 공부도 많이 못했지만, 그분들은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배운 것이 많고 적음으로 부르시거나, 가진 것이 많고 적음으로 부르시거나, 내가 무엇인가를 해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뒤에 학교를 옮기면서 제가 그때 경험했던 그 공동체의 순수함은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을 통해 우리가 다시 한 번 다짐해야 하는 것은 나는 교만하지 아니한가, 나는 지금 나의 숫자를 세고 있고 남을 판단하고 나의 열심에 스스로 감탄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점검하고, 만약 그렇다면 교만하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한 번의 교만으로 우리 인생이 끝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 자신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무릎 꿇기 바랍니다.
무엇을 의지하는가
삼하 24장 1~17절 / 서윤발목사
Ⅰ. 서 론
오늘날 거의 모든 나라가 다 몇 년에 한 번씩은 인구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0년에 한번씩 정기적인 조사를 하고 5년에 한 번씩은 간이조사를 합니다. 이렇게 인구조사를 한 것은 나중에 사회, 경제적인 여러 분야에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인구조사라는 것은 오늘날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원전 수세기 전부터 바벨론이나 이집트, 중국과 같은 곳에서는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 당시 인구조사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금을 걷기 위한 것이고 또 한 가지는 군사력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아주 더 오래 전부터 인구를 조사한 내용이 나타납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사례가 오늘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기원전 1000년 경에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이라는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으면서 인구조사를 한 일인데 다윗은 이스라엘을 약 40년 정도 다스렸습니다.
다윗은 약 40년 정도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왕으로 있은 지 이미 오래 되고 나이가 들어서 왕위를 물려주어야 할 즈음에 와서는 잠시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Ⅱ. 본 론
1. 다윗이 인구를 조사하게 하다.
다윗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이스라엘이 어느 정도 대단한 나라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 날 이 나라의 인구, 그러나 다른 사람은 제외하고 일단 칼을 들고 싸울 수 있는 장정들, 군사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으로 있던 요압을 불러서 명령했습니다. 2절을 보니까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그 도(읍의)수를 내게 알게 하라" 했습니다.
※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 단은 이스라엘의 제일 북쪽에 있는 마을이고, 브엘세바는 이스라엘의 제일 남쪽에 있는 마을입니다. 그러니까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 하면 이 말은 이스라엘 전국토를 일컫는 말입니다.
2. 요압의 충언
요압이 이런 다윗의 명령을 듣고 난 뒤에 고민이 되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자기 나라의 군사력을 점검하기 위해서 인구를 조사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이 나라는 다른 나라와는 사정이 다릅니다.
이스라엘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여러 전쟁을 치르면서 오늘날까지 발전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전쟁은 승패는 이스라엘의 국방력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젊었을 때 골리앗 장수와 싸웠을 때를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거인 골리앗과 싸웠을 때 골리앗을 보고 뭐라고 하였습니까?
삼상17:47을 보면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그랬습니다.
힘에 있어서는 비교가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육신의 힘을 의지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해서 싸우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절대적인 심정이 있느냐 그것이 승패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이 가는 곳마다 승리하고 그래서 지금 이 순간까지 나라가 강건해지고 부흥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윗이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압은 다윗의 명령을 듣고 나서는 그런 조언을 합니다. 3절을 보면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지금 있는 병력보다 백 배나 강한 병력이 될 수 있는데 왜 굳이 세상의 다른 왕들처럼 그렇게 군사력을 점검하면서 자신의 힘을 계산하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압이 이렇게 좋은 조언을 해 주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구조사를 하고자 하는 결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렇게 자꾸만 재촉하니까 할 수 없이 요압과 장관들이 나가서 9개월 10일 동안에 걸친 인구조사를 하였다 했습니다.
다윗과 부하장수들의 모습이 이제는 거꾸로 뒤바뀐 셈입니다.
다윗이 젊었을 때에는 정말로 하나님만 의지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나라를 이끌고 부하들을 이끌어 왔는데 막상 왕이 되고 나라도 견고하게 섰고, 어디 내놔도 뒤처지지 않고,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을 그런 규모를 가지고 나니까, 엉뚱한 생각이 든 것입니다.
내 나라가 얼마나 되는지, 얼마나 힘이 있는지 살펴보자는 겁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이 만한 힘은 가지고 있다. 그런 자랑을 하고 싶었다는 겁니다.
바른 신앙의 자세가 이니지요.
여러분, 그런데 다윗의 이런 태도 변화는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심리상태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한 없이 연약해지고 힘들어질 때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다 보면 정말로 삶 속에 어떤 역사가 나타나고 문제의 해결함도 받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삶이 어느 정도 견고하게 서 졌다 싶으면 점 점 우리 마음속에 엉뚱한 생각들이 밀려오는 겁니다.
세상을 살려면 하나님 은혜만 가지고는 안되지.
세상을 지혜롭게 살려면 이것도 있어야 되고, 저것도 있어야 되고...계산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그만 주객이 전도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갈구하지 않고 세상의 다른 것들을 챙기기에 바쁘고 그만 거기에만 빠져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가진 것과 이룬 것을 자랑하는 교만에 빠지는 겁니다.
세상의 것들을 챙기고 세상에서 가진 것을 자랑할 때 거기에 만족이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의 것들을 아무리 챙기고 세상에서 얻은 것들을 아무리 과시해도 거기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충족되지 않습니다. 기쁨이 사라집니다. 감사도 없어집니다. 그러다가 세상의 일들도 다시 꼬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그 때서야 하나님, 좀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어리석게 살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젊었을 때의 다윗처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면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되 끝까지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신앙의 자세.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십니다.
특별히 여러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삶의 길들을 열어주실 때 더욱 더 그렇게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고전9:27을 보면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했습니다.
고전15:31에서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습니다.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날마다 죽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 바울더러 자신을 쳐 복종시키라고 했습니까?
누가 바울더러 날마다 죽으라고 했습니까?
자기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왜? 늘 하나님의 도우심을 따라 살기 위해서입니다.
EX) 나는 흑인입니다.
마이클 조던이 처음 NBA에 들어갔을 때, 그는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수많은 관중들로 꽉찬 경기장의 열기와 환호에 질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다. 사람들은 모두 매직 존슨같은 사람만 응원했다. 또한 선수들은 자신의 성공을 자랑이라도 하듯 화려한 외제차와 번쩍번쩍 빛나는 보석을 두르고 값비싼 모피코트를 걸치고 다녔다. 그 속에서 조던은 한없이 위축되었다. 그는 성공보다 사람들이 자기를 얕볼까봐 겁이 났다.그런 공포심으로 말미암아 조던은 마치 철모르는 하급생이 상급생을 따라하듯 다른 선수들과 똑같이 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으레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다. 러시아산 너구리 털코트를 샀고, 목걸이와 팔찌도 걸쳤다. 그러나 아무리 치장을 해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신감과 여유만은 흉내 낼 수 없었다. 그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이 과연 자신이 바라던 성공인가? 이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조던은 이런 우스운 짓을 그만두기로 작정하고 공들여 기른 머리도 밀어버렸다. 그리고 오로지 자기자신의 노력만을 믿기로 했다. '나는 흑인이다. 그러나 부끄럽지 않다.' 그 대신 조던은 더욱 더 열심히 운동을 했다. 코트에서 땀을 흘리며 뛸 때에 그는 비로소 해방감과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경기가 있는 날이나 없는 날이나 제일 먼저 경기장에 도착한 조던은 혼자서 꾸준히 연습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부터인가 자신이 NBA의 살아 있는 신화라 불리고 있었다. 한때 그가 과감하게 농구장을 떠나 야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밑바닥에는 자기 자신을 철저히 믿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농구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마이클 조던은 참피온 반지를 끼지 않는다. 참피온 반지를 끼게 되면 그 순간부터 무엇 때문에 이겨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도 이렇게 지혜로운 사람들이 있다.
하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EX)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때는' 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구원받은 자임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한때는 죄인이었음을 속삭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선택했노라.
교만한 마음으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실수하는 자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하노라.
강한 자 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힘주시기를 기도하노라고.
성공했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했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내가 진 빚을 다 갚을 수가 없노라고.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혼란스러움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겸손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구하노라고.
온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이 많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믿노라.
삶의 고통이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내 몫의 고통을 지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찾노라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 할 때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권위가 내게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오직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을 뿐이다
-캐롤 위머-
내가 강하다, 내가 이만큼 이루었다. 자랑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늘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인구조사의 결과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다윗이 인구조사를 다 끝내고 나서 그 결과를 보니까 엄청났습니다. 인구조사 결과 칼을 들고 전쟁을 할 수 있는 담대한 사람이 이스라엘 11개 지파에서 80만 명이었고, 유다지파에서 50만 명, 합계 130만 명이라는 엄청난 결과가 나왔습니다. 대단한 군사력입니다. 그러면 이런 대단한 군사력가지고 기뻐했는가? 아닙니다.
다윗이 세상에서 가진 자기 자신의 힘을 계수해 보고 나서 느낀 것은 10절을 보니까 "그 마음에 자책하고" 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고백했습니다.
이제껏 이렇게 나라가 강건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힘을 계수하며 자신을 과시하며 의지하려고 하는 이런 모습이 뭡니까? 허망하다는 겁니다.
사울과 다름이 없고, 애굽의 왕들과 다름이 없고, 이방의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앞에서 무례하게 행한 것이지요.
그래서 다윗 자신도 자신이 미련하게 행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5. 하나님의 책망
그리고 이렇게 다윗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나서야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갓을 통하여 말씀을 주셨습니다. 징계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갓이 다윗을 찾아와서 말씀을 전하기를 이제 왕이 범죄 하였으니 하나님께서 내리실 세 가지 징계 중에 하나를 스스로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 칠년 동안 이스라엘에 기근이 드는 것을 택하겠느냐?
2) 석달 동안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도망하게 되는 것을 택하겠느냐?
3) 온 땅에 삼일동안 온역을 내리는 것을 택하겠느냐? 선택하라는 겁니다.
다윗은 세 번째 것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삼일 동안 이스라엘 온 땅에 온역을 일으켜서 결국 7만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어버렸다고 했습니다. 7만명. 엄청난 재앙입니다.
전쟁을 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1) 다윗이 자랑 삼던 그 군사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도 철저하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사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이 징계를 통하여 그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시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절대적인 신앙,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분명한 신앙.
그것을 버리지 말라는 겁니다.
7. 다윗의 회개와 하나님의 긍휼
그래서 이런 징계를 받으면서 다윗은 또 다시 회개합니다. 그리고 긍휼을 구합니다.
다윗이 회개하면서 기도하기를 17절을 보면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그랬습니다. 내가 범죄 했으니 나에게만 징계하십시오.
그러자 하나님께서도 다윗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이 온역이 발할 때 16절을 보면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도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하시니" 하셨습니다. 삼 일 만에 이스라엘은 멸망할 뻔했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의 회개를 보시고 은혜를 베푸셨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의 왕으로 믿음의 길을 떠났을 때 그 왕만이 아니라 백성이 함께 고통을 받게 된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한 가정의 가장으로 엉뚱한 길을 갈 때 그 가족도 함께 고통을 이고 가는 겁니다.
Ⅲ. 결 론
요즘은 자기 피알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 똑똑한 것은 아닙니다.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서 우리 부족한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다가 삶이 나아지면 하나님을 떠나가는 그런 삶이 되풀이되어서는 아무런 진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절대적인 믿음을 간직하고 변함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의 길을 밟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시고 변함 없는 믿음의 길을 가셔서 진정으로 성공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인구조사
삼하 24:1-9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다윗이 교만에 빠져서 인구조사를 지시하는 부분입니다. 사무엘하의 마지막 부분에 이러한 다윗의 범죄를 기록한 것은 다윗도 범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가 성군이 된 것은 그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인한 것이었음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먼저, 1절에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는 역대상 21장에는 이 일의 발단을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충동 וַיָּ֨סֶת’은 오늘 본문의 ‘격동 וַיָּ֨סֶת’과 같은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계하시기 위해 사탄이 다윗을 격동하는 것을 묵인하셔서 다윗이 죄를 범하게 하여 이스라엘에 환난을 주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환난이 임하게 된 근본 원인은 다윗의 인구조사 잘못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탄의 꾐에 넘어가 범죄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특히, 사탄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범위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격동시키셨다는 오늘 본문의 표현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강조’한 ‘히브리식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탄이 활동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얼마간의 활동 기간과 범위를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중점적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범한 죄가 무엇인지 보다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게 된 원인이 지도자인 다윗의 잘못 이전에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범죄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지도자가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겨 지도자를 욕하고 책망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한 나라의 위기는 성경의 기록대로 지도자의 잘못 이전에 백성들의 죄악이 크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때로는 무능한 지도자가 나라를 망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깨어 있다면 그러한 지도자가 설 자리는 없게 됩니다.
여러분, 악한 시대에는 악인들이 힘을 얻고, 선한 시대에는 선한 사람들이 힘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평범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부패하고 환난에 빠지는 것은 국민들이 죄에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거의 모든 환난도 지도자의 잘못보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가 만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만일 이 나라와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 혹은 교회가 여러 가지 문제를 만나 어려움에 빠진 경우, 지도자를 탓하기에 앞서 먼저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지 않은지 살펴 보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나 자신부터 바르게 서야 가정과 교회, 사회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 가톨릭이 구호로 외쳤던 것처럼 “내 탓이요” 정신으로 믿음의 선한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3절에, 다윗이 군사령관 요압을 불러 그에게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라고 명령합니다. 이에 요압은 다윗이 명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하고 간청을 합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려 한 것은 자기 힘이 얼마나 강한지 확인해 보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깨달은 요압은 다윗이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용기를 내어 충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압의 충고를 무시하고 인구조사를 강행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가 됨으로써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정당한 충고를 거부하는 일이 얼마나 큰 위험을 부르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칭찬받기는 좋아해도 책망이나 충고를 받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많은 수양을 하여 신앙이 깊은 사람도 누군가로부터 잘못을 지적받는 것을 수용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인 다윗도 자기 부하인 요압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마 당시의 다윗은 자기를 충고하는 요압을 향해 속으로 “너나 잘해라, 네 신앙은 뭐가 뛰어나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느냐?” 하며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압은 처세술이 뛰어나고 군대를 지휘하는 능력은 출중했지만,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는 신실하지 못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다윗을 큰 슬픔과 곤경에 빠뜨리고 악한 계교로 무고한 사람을 죽인 적도 여러번 있었습니다(3:12-39, 18:9-15, 20:4-13).
그러나 다윗은 비록 허물 많은 요압의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옳은 말을 할 때는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징계를 받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든지, 비록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비록 악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충고한다면 그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사람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 말이 옳을 경우에는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요압 외에는 잘못된 다윗의 지시에 대하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하며 지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대제사장도, 다른 많은 신하들도 그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이때 요압이 아니라 대제사장이나 선지자, 그리고 다른 신하들이 다윗을 말렸으면 그는 그들의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이사야 5:20에서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 모두, 선악을 온전히 분별하여 그 잘잘못을 바로 지적할 줄 아는 지혜롭고 당당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 이어지는 4-9절에, 요압은 다윗의 명령을 받아 인구조사를 했습니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 전쟁에 출전할 수 있는 자는 이스라엘 열한 지파에서 80만 명, 유다 지파에서 50만 명으로 합이 130만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구조사는 무려 ‘아홉 달 스무 날’에 걸쳐 진행된 대규모의 조사 작업이었기에 소요된 경비와 인력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조사는 결과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잘못된 통계에 불과했습니다. 역대상 21:6에 의하면, 다윗의 인구조사에 불만을 품은 요압이 베냐민과 레위 지파 백성들의 숫자를 일부러 계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구조사의 통계는 엉터리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일을 통해 이스라엘이 얻은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다윗의 인구조사는 아무 소득도 없는 헛된 일, 불행을 초래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내 생각대로 행하면 그 일이 잘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환경이 따라주지 않고 주위 사람들도 나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특히, 사탄이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바로 누가복음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는 아버지 품을 멀리 떠나 자기 힘으로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신의 몫을 챙겨서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맞이한 결과는 세상 사람들의 꾐에 빠져서 모든 재물을 탕진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과 모든 재물을 허비하고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은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탕자의 비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는 아무리 노력한들 그 일은 헛될 뿐임을 교훈합니다. 물론, 노력하다 보면 세상에서 큰 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결과라면, 잠시 성공을 누릴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선택이 될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살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때 가장 큰 행복감을 느끼고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탐심에 빠져 하나님의 품을 떠난 다윗의 아픈 실수를 가슴 깊이 새기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한 나라의 위기는 지도자의 잘못 이전에 국민들의 죄악이 크기 때문인 경우가 많고, 악한 시대에는 악인들이 힘을 얻고, 선한 시대에는 선한 사람들이 힘을 얻는 것을 알아, 무엇보다도 처한 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타인의 충고를 가볍게 여기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항상 돌아보되,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는 결코 성도의 삶을 살 수 없음을 알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에 더욱 힘쓰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범죄와 회개
삼하 24:1-9 / by skd1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크고 작은 결정을 내립니다. 때로는 그 결정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다윗 왕의 인구조사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실수했을 때 어떻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지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 "숫자에 마음을 빼앗긴 다윗"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다윗을 감동시켜 그들을 치시며 이르시되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삼하 24:1)
다윗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골리앗을 물리치고,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도 인간이었기에 실수와 죄를 범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다윗의 마음에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행정적 결정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국가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자신의 백성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은 것이 뭐가 문제일까요?
그러나 성경은 이 결정이 하나님의 진노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다윗의 인구조사는 단순한 행정 조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교만과 자신의 힘을 의지하려는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군사력을 파악하고 자신의 왕국이 얼마나 강한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것들, 숫자로 측정할 수 있는 것들에 의지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은행 잔고, 소셜 미디어의 팔로워 수, 사회적 지위 등이 우리의 안전과 가치를 결정한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보실까요?
🚩 "마음의 경고등이 켜질 때"
"요압이 왕께 아뢰되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나" (삼하 24:3) 종교 및 신앙
다윗의 명령을 받은 요압은 즉시 이것이 좋지 않은 결정임을 감지했습니다. 그는 다윗의 충실한 군대 장관이었지만, 이번 명령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요압은 담대하게 왕에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왕이시여,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백성을 축복하셨고, 앞으로도 더 많은 축복을 주실 텐데, 왜 이런 일을 하시려고 하십니까?"
요압의 질문은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다윗의 마음속에 숨겨진 동기를 드러내는 질문이었습니다. 왕으로서 다윗은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왕국이 번영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이와 같은 '요압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때로는 성경 말씀을 통해, 때로는 믿음의 동역자를 통해, 때로는 성령의 조용한 속삭임을 통해 경고가 옵니다. 이러한 경고에 귀 기울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땠을까요?
❌ "고집을 부리는 인간의 모습"
"그러나 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 지휘관들을 재촉한지라 요압과 군대 지휘관들이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려고 왕 앞에서 물러나서" (삼하 24:4)
요압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의 결정을 고수했습니다. 그는 왕이었기에 아무도 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요압과 그의 부하들은 마지못해 다윗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그들은 약 9개월 동안 이스라엘의 모든 지역을 다니며 인구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에는 칼을 뺄 수 있는 용사가 80만 명, 유다에는 50만 명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다윗이 받은 이 정보는 그의 교만을 만족시켰을까요? 아니면 더 큰 고뇌의 시작이었을까요?
우리도 때때로 다윗처럼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나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과 계획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나중에야 그 결정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 "마음이 찢어지는 다윗"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삼하 24:10)
인구조사가 완료되고 결과가 다윗에게 보고되었을 때, 갑자기 다윗의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성경은 그의 마음이 "자책"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순간이 바로 다윗의 회심의 시작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이 고백은 다윗의 겸손과 회개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부르신 이유 중 하나입니다. 다윗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 실수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법을 알았습니다.
🙏 "회개의 길로 돌아서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세 가지 벌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셨습니다: 7년간의 기근, 3개월간 원수들에게 쫓김, 또는 3일간의 전염병. 다윗은 "사람의 손보다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 낫다"며 3일간의 전염병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에 전염병이 돌아 7만 명이 죽었습니다. 다윗은 백성들의 죽음을 보며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내가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나이다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이 말은 다윗이 자신의 죄로 인해 무고한 백성들이 고통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깊이 느꼈고, 자신이 처벌받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진실된 회개를 보시고 마침내 재앙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
다윗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교만의 위험성: 다윗은 자신의 힘과 군사력을 의지하려는 교만에 빠졌습니다. 우리도 하나님보다 세상적인 것들을 의지할 때 위험에 처합니다.
2. 경고에 귀 기울이기: 요압의 충고를 무시한 다윗처럼,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의 경고나 주변의 조언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이러한 경고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진정한 회개의 모습: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4. 지도자의 책임: 다윗은 자신의 결정이 백성들에게 미친 영향에 책임을 졌습니다. 우리의 결정도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5.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은 다윗의 회개를 받아들이시고 결국 재앙을 멈추셨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할 때,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오늘의 적용점"
이 성경 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어떨까요?
1. 나는 하나님보다 내 힘, 재능, 재산, 지위 등을 더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2. 하나님이나 주변 사람들을 통해 주시는 경고와 조언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3. 실수했을 때 다윗처럼 겸손히 인정하고 회개하는가, 아니면 변명하고 정당화하는가?
4. 나의 결정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려하는가?
5.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진정으로 믿고 경험하고 있는가?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불렸지만, 그도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위대한 이유는 실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실수 후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때문입니다. 그는 겸손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실수 이후의 우리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항상 우리를 받아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 하루, 다윗의 이야기를 묵상하며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필요하다면 다윗처럼 겸손히 하나님께 돌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시편 51:1)
눈앞의 군사력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삼하 24:1–9 / smile
① 오늘의 대표 성경말씀
“왕이 이에 그 곁에 있는 군사령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백성의 수를 내게 보고하라 하니” (사무엘하 24장 2절)
② 오늘의 성경말씀 본문요약
사무엘하 24장 1 – 9절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시자 다윗은 요압에게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라고 명령합니다. 요압은 여호와께서 백성을 백 배나 더하게 하실 수 있는데 왕이 어찌하여 인구 조사를 기뻐하느냐며 만류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명령을 거두지 않았고, 요압과 군대 지휘관들은 전국을 다니며 백성을 조사합니다.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돌아온 요압은 이스라엘의 칼을 빼는 자가 팔십만 명,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라고 보고합니다.
1–4절: 다윗이 인구 조사를 명령하고 요압은 이를 만류하지만, 왕의 명령이 강행됩니다.
5–8절: 요압과 군대 지휘관들이 이스라엘 전역을 다니며 아홉 달 스무 날 동안 인구를 조사합니다.
9절: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다윗에게 보고됩니다.
③ 오늘의 말씀 본문 해설
하나님의 진노 아래 내려진 명령(1–2절)
본문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로 시작합니다. 다윗은 요압에게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다니며 백성의 수를 조사하라고 명령합니다. 인구를 파악하는 행위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다윗이 무엇을 의지하고, 어떤 마음으로 그 수를 알고자 했느냐는 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보다 자신이 지휘할 수 있는 군사력과 국가의 규모를 확인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적용 질문: 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합니까, 아니면 눈에 보이는 숫자와 조건부터 확인합니까?
충성된 신하의 만류를 거절한 다윗(3–4절)
요압은 하나님께서 백성을 백 배나 더하게 하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힘은 많은 군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번성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압과 군대 지휘관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명령을 밀어붙입니다. 권력자의 잘못된 확신은 주변 사람들의 정당한 충고까지 무시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적용 질문: 나는 가족이나 동료가 진심으로 전하는 충고를 불편하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홉 달 스무 날의 조사와 숫자의 보고(5–9절)
요압과 군대 지휘관들은 이스라엘 전역을 다니며 인구를 조사합니다. 이 일에는 아홉 달 스무 날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팔십만 명과 유다 오십만 명이라는 수가 보고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큰 숫자도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참된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내가 가진 힘을 확인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고,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적용 질문: 내가 지금 안전과 성공의 근거로 삼고 있는 숫자와 조건은 무엇입니까?
④ 오늘의 말씀 시대적 · 지리적 · 성경적인 배경
시대적 배경: 다윗 통치 말기로 모든 외적과의 전쟁이 마무리되고 왕국이 안정과 번영을 누리던 시기입니다. 외부의 위협이 사라지자 오히려 내면의 영적 방심과 군사적 교만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지리적 배경: 요단 동편의 아로엘과 길르앗, 북쪽 경계인 단과 이방과의 접경지인 두로 요새, 그리고 남쪽 끝인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의 전 영토를 아우르며 조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성경적 배경: 본문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다윗의 인구 조사 명령을 연결합니다. 요압의 반대는 이 조사가 단순한 행정 업무가 아니라 하나님보다 백성의 수와 군사력을 의지하려는 위험한 결정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출애굽기 30장에서는 인구 조사를 할 때 하나님의 생명의 속전을 바쳐 재앙을 면하게 하였으나, 다윗은 영토와 군사력을 과시하는 인간적인 목적을 위해 율법의 정신을 벗어난 인구 조사를 강행했습니다.
⑤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과 깨우침
성도의 가장 큰 위기는 고난과 결핍의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이 안정되고 풍요로워졌을 때 찾아옵니다. 다윗은 승리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고 눈에 보이는 군사력의 크기를 확인하려 했습니다. 주변의 영적 권고와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의 고집을 앞세울 때 죄의 길로 걸어가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방패이심을 기억하고, 세상의 힘과 숫자를 자랑하기보다 겸손히 주님의 은혜만을 붙드는 순종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⑥ 오늘의 묵상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평안하고 넉넉할 때 주님의 은혜를 잊고 제 힘과 소유를 의지하려 했던 교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눈에 보이는 수치와 세상의 능력으로 안도감을 삼지 않게 하시고, 오직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만을 저의 유일한 피난처로 삼게 하시옵소서. 주변 사람들의 지혜로운 권면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겸손한 마음을 주시고, 오늘 하루도 제 뜻과 고집을 내려놓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순종하게 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⑦ 더 깊은 묵상을 위한 성경 지식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사무엘하 24장 2절)
이스라엘 영토의 최북단 경계인 '단'부터 최남단 경계인 '브엘세바'를 아우르는 관용적 표현으로, 이스라엘 전국 전체를 의미합니다. 다윗 왕국의 통치 영역 전체에서 군사력을 징집하기 위한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칼을 빼는 담력 있는 자 (사무엘하 24장 9절)
단순한 주민 조사가 아니라 20세 이상의 징집 대상 군인의 수를 뜻합니다. 다윗의 인구 조사가 세금 징수나 복지가 아닌, 군사력 규모를 파악하고 과시하려는 정치·군사적 목적이었음을 명확히 드러냅니다. 요압이 보고한 숫자는 단순한 총인구라기보다 다윗이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의 규모를 보여 줍니다.
⑧ 오늘 본문의 핵심 문장
하나님은 눈앞의 군사력과 숫자를 의지하려는 인간의 교만을 꺾으시고,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는 겸손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삼하 24:1~9
삼하 24:1-9 / summer9844
본문은 다윗의 인구조사 사건의 시작이다. 표면적으로는 행정 행위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하나님 주권과 인간 의지의 긴장 속에서 드러나는 영적 교만의 문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코자 다윗의 의식 속에 있던 악한 의도를 허용하셨을 뿐이다.
(1)'다시(요세프)'란 말로 보아 죄가 이미 이스라엘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 죄에 대한 징계의 과정 속에서 다윗의 행동을 허용하신다. 병행구인 대상21:1에는 사탄이 다윗을 격동시켰다고 기록되는데 이는 모순이 아니라 구조다. 다윗은 요압에게 군사 수를 조사하라고 명한다. 숫자 파악이 아닌 그 숫자에 의지하려는 마음이 문제다. 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음(삼상14:6)을 모르지 않을 다윗인데도, 그에게 하나님 대신 군사력에 대한 신뢰와 왕권 유지에 대한 자기 확증의 욕망이 보인다. 여기서 (3)정세에 대단히 민감한 요압이 반대했단 점이 주목된다. (4)그와 장관들이 말렸지만 이미 마음을 결정한 다윗은 '재촉(하자크)'하여 강행한다. 그리하여 (5~7)이스라엘 전국을 순회 (8)9개월 20일 동안 조사가 진행된다. 군대 장관 요압이 수도를 오래 떠나 있었는데도 대내외적으로 태평 성대했으니 교만의 죄는 늘 이럴 때 발생한다. 이 인구 조사는 완전한 것도 아니어서 대상21:6에는 요압이 '왕의 명령을 밉게 여겨' 레위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조사하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다윗의 명령을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상27:24에 의하면, 인구 조사를 채 끝내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했다. 아무튼 (9)보고된 결과는 이스라엘 80만, 유다 50만...이는 출애굽 당시의 603,550명(민2:32)에 비하면 엄청난 숫자였다. 군사력을 파악하여 강대국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고자 한 다윗은 이 보고를 받고 만족해 했을 것이다. 숫자는 확보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미 손상되었다.
신앙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신뢰라면, 죄는 보이는 것을 통해 안전을 확보하려는 시도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셨다. 충분하다'이고, '하나님이 하셨지만 내가 확인해야 안심된다'는 '타락'이다. 하나님은 요압의 반대를 통해 중간에 경고를 주셨으나 왕은 그것을 무시했다. 이제 다윗은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나는 무엇을 숫자로 확인하려 하는가? 통장 잔고, 건강 지수, 지인들 전화번호, 사람들의 평가? 기도 전에 계산으로 결론 내리는 습관을 버리자. 마음에 오는 '이건 아닌데..'란 신호에 민감하자.
성령 하나님, 주시는 경고의 음성에 예민하도록 저를 주장하시길 원합니다. 작은 불편함 속에서도 멈출 수 있는 영적 민감함과 되돌릴 용기도 허락하소서. 주님이 저의 유일한 근거가 되게 하시고, 확인이 아니라 신뢰로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한 시도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본문은 다윗이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구 조사를 실시한 데 대한 것이다. 즉 다윗이 이처럼 인구 조사를 실시한 것은 유사시 군사력으로 전환 될 수 있는 백성이 수를 헤아려 보는 가운데 군사력을 확인해 보려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는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적과 약한 군사들만으로도 능히 주변 열강들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는 다윗이 한 순간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망각한 채 교만해진 결과였다.
본문은 우리에게 인간이란 결국 불완전하여 언제든 죄악 중에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교훈해 줌으로써, 우리가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한다.
다윗의 인구조사
삼하 24:1-9 / 꼬맹(안디옥교회)
모든 것(대화, 선택, 결정, 홀로, 함께)에서
1) 나의 동기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있는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사랑, Jesus Others You, 도움이 되는가?
2) 나의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있는가?
3) 나의 목적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있는가?
1. 인구조사가 죄가 되는 이유
1) 하나님의 진노
막을 수 없는, 심판 받을 충동 - 기도에 감동, 주변 조언도 무시, 말씀도 무시
기도에 감동이 없다면 하지 말아라, 주변 조언을 귀담아 들어라
하나님은 악의 조성자가 아니시다. 죄인을 가만히 두면 죄악 중에 멸망한다.
2) 사단의 충동을 내버려두심, 방치
대상 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사단은 하나님의 진노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께 순복하라
3) 다윗의 범죄 -교만과 거역
이스라엘 전군을 계수하는 다윗의 동기 - 교만: 내 힘으로 해냈다!
인구조사의 규례를 지키지 않은 다윗 - 거역
출30:12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찌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마음으로 고백하라
2. 진노의 이유 - 이스라엘의 오래 묵은 죄
1) 패륜아 압살롬의 반역에 동참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다윗을 거절, 백성들 마음대로 왕을 바꾸려고 공평을 버리고 내 편 들면 추종( 삼하 15:3-6, 13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패륜적 죄악에 동조, 아히도벨과 아마사의 비참한 최후를 보고도 회개
2) 베냐민 세바의 반역에 동참
다윗 귀한 때 주도권 다툼(깊어진 지역감정), 이번에는 다윗 왕조(다윗언약) 자체를 부정, 반역진압에 비협조(삼하20:5), 세바의 비참한 최후를 보고도 회개
하나님의 나타난 뜻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라
3) 전쟁 메마다 비겁하게 도망
37인 용사들은 활약했지만, 나머지 백성들은 도망치기 바빴다(삼하23:9, 11). 삼하23:10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서 저의 뒤를 따라가며 노락할 뿐이었더라
어렵고 불리할 때는 회피 도망 함께
유리할 때는 나타나서 약탈 권리주장 - 회개
삼마와 같이 자기 일을 지키라, 사수하라
4) 계속되는 산당제사
왕상3:2 그 때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아직 건축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 - 종교혼합
3. 인구조사가 주는 교훈
1) 죄에는 댓가가 따른다.
세월이 지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죄는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자백과 배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2) 은혜가 없으면 기름부음 받은 왕이라도 범죄한다.
재앙을 멈춘 것 역시 제사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14-16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3) 한 사람의 거역(순종)은 많은 사람의 죄(의)가 된다.
범죄한 이스라엘이 말씀대로 심판 받는 데에 다윗의 거역이 사용된다.
범죄한 우리들이 말씀대로 구원받는 데에 그리스도의 순종이 사용된다. 롬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4) 바로 이것이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칼을 든 여호와의 사자가 선 곳, 선지자 갓이 가르쳐 준 곳, 아라우나 타작마당
아리우나 타작마당=다윗이 하나님 앞에 번죄와 화목제를 드린 곳이자 훗날 솔로몬의 성전 터
대상22:1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
성전은 여호와께서 자비와 용서를 배푸는곳, 죄악이 철저히 제거되고 백성의 회개가 상달되는 곳
결론.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빼하시나이까?
죄 많은 요압의 입을 빌어
거듭나지 못한 심령 - 악인의 죄,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기빠한다. 거듭난 심령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한다. 주야로 묵상한다.
격동된 다윗
삼하 24:1~9 / 박현성 목사(한일교회)
더 중요한 것은 저녁에 나누도록 하고요. 우리가 이 본문에서 아침에 묵상해 봐야 될 부분이 이겁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오늘 본문이 되게 신학적이에요. 그래서 이게 좀 약간 섬세하게 다뤄야 되는 부분들이 있거든요.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성경의 대주제는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 주제에 있어서 주인공이 누구냐라고 하면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구원받는 인간이에요.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을 알게 되는데 동시에 성경을 읽으면 인간을 알게 돼요.
그런데 사람을 알아야 왜 하나님이 우리 구원의 방식에 대해서 특정한 바로 그 방법 성경이 말하길 다른 방식은 없다. 다른 구원의 이름도 없다. 오직 하나의 이 방법밖에는 없다라고 하신 이유가 뭔지 그거는 인간을 알아야만 구원의 방식이 이해가 되는 거예요. 일단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반드시 알고 반드시 믿어야 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게 종교 개혁자들이 말한 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종교 개혁자들이 인간의 상태를 말할 때 전적 타락이라고 얘기한 이유는 그거는 본인들이 어떤 관찰의 결과가 아니고요. 성경의 진술 이렇게 표현을 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종교 개혁자들이 사람의 타락을 설명할 때 영어로 total이라는 단어를 써요. 그러면 이 단어의 의미가 뭐냐? 예전에 네덜란드라는 나라가 축구를 할 때 토탈사커라는 전술을 썼거든요. 이게 뭐냐면 공격할 때 전원 공격 수비할 때는 전원 수비 전원. 전부 다 이 뜻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 종교 개혁자들이 사람의 타락을 전적 타락이라고 할 때 이걸 표현하는 단어로 채택한 게 뭐냐면 토탈이라는 단어를 써요. 이게 뭐냐면 타락한 사람 안에 선한 게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게 타락했다는 거예요. 모든 게. 다 타락했다라는 거죠.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성경의 근거가 뭐냐?
굉장히 많지만 대표적으로 로마서 7장 18절을 보시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진술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이 없다라고 해요. 그런데 여기에서 없다라는 말을 두 번 써요. 그런데 이 없다라는 말을 두 번 쓸 때 뭐랑 연결하냐면 선과 없음을 같이 연결해요. 그러니까 선이 없어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진수라는 것은 뭐냐면 선이 인간 안에 없다라는 걸 명확히 얘기하는 거예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절대로 믿음의 대상이 아닌 거예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어서는 안 되는 존재예요. 왜? 사람 안에 선한 게 없어요. 절대로 없어요. 그런데 이 입장은 사도 바울의 독창적인 선언이 아니고요. 신약과 구약의 기록이 계속 사건을 통해 진술하던 것을 사도 바울이 명확하게 선언을 한 것뿐이에요. 사람 안에는 선한 게 없어요. 저는 그냥 알아요. 뭘 아냐면 고학력자건 부유한 집에서 자라건 가난한 집에서 자라건 저학력자건 남자건 여자건 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악합니다. 사람은 교양으로 자기를 포장할 수 있어요. 뭐 약간의 인내심으로 자기 안에 있는 욕구를 누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뭐냐? 선한 게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착한 것도 또한 악한 거예요.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행을 하는 게 자기 힘으로는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어떤 처벌과 교육 없이 그냥 뒀을 때 아무것도 없이 그냥 뒀을 때 자연 상태의 인간은 어떻게 될까라고 하면 너무 명확하죠. 어디 멀리 갈 곳도 없고요. 그냥 무정부 상태의 나라의 인간들을 보세요. 통제받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게 되는데 북한 정권이라도 이렇게 악한 정권이라도 정권이 있는 게 나아요. 사람을 무정부 상태로 두면 통제가 없는 인간은 그 속에 있는 모든 욕망이 다 튀어나와요. 그러니까 인간의 잔인함이라는 건요. 짐승의 잔인함하고는 아예 아예 근본이 달라요. 차원이 달라요. 그러니까 이 짐승의 잔인함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고 욕구가 해결되면 쓸데없는 살육을 안 하거든요.
그러니까 만물이 살육을 즐기는 일은 없어요. 필요해서 하는 거죠. 그런데 인간은 안 그래요. 사람은 필요해서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고요. 그러니까 살인사건이 필요해서 살인을 하는 경우는 없어요. 거의 다 문명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인간이 살인을 한다. 뭐냐면 결핍을 채우기 위함이거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함이거나 즐기기 위함이에요. 그러니까 당하는 사람은 착해서 당하는 게 아니라 그냥 힘이 없어서 당하는 거야. 누구도 착한 사람은 없어. 인간은 다 아니야. 그런데 이런 인간이 어떻게 선을 행할 수 있냐라고 할 때 성경은 딱 2가지 유망을 말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보존하기 위해서 사람 안에 아주 약간의 보편적인 은혜를 주셨어요. 그게 양심. 양심은 신앙 아닙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이 땅을 지옥 만들지 않기 위해서 주신 보편 은총이에요.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하나님께서 최소한의 양심을 주셨는데 이게 뭐냐면 선과 악을 아는 지식과 그러니까 안다고 행하는 건 아니지만, 선이 뭐고 악이 뭔지를 아는 지식과 악을 행할 때 징계가 있을 줄 모른다. 지옥이라는 게 존재할 줄 모른다는 걸 포착하는 이 두려움. 이게 앙심이에요. 그래서 이 땅이 지옥이 되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은총을 모든 사람 안에 베풀어 주신 거예요. 그게 양심이에요. 양심은 신앙은 아니에요. 그런데 이 양심도 타락했기 때문에 이걸로는 천국에 못 가요. 이걸로는 사람의 악을 막을 수는 없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은 택자에게만 주시는 특별한 은총을 주셨는데 바로 그게 거듭남이에요.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자 왜 제가 성품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계속 얘기하냐면 양심은 양심이 너무 강해도 자살해요. 아십니까? 양심이 너무 강해도 자살해요. 그러니까 양심은 한계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믿음이 강하면 그것만 사람을 구하는 거야. 자살해서 사람을 막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총이 뭐냐면 거듭남인데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택해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면 새로운 마음을 주세요.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 적극적으로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주신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마음은 변화되지만 우리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모든 택자 안에는 거듭나는 순간 일어나는 일이 뭐냐면 육적인 욕구와 영적인 욕구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전쟁이 일어나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 내 안에서 생명의 법과 사망의 법이 싸우는 이 전쟁이 없는 사람은 아예 택자가 아니에요. 아예 택자가 아니에요. 택자는 뭐냐? 선하게 사는 사람이 택자가 아니라 원래 우리는 악한데 선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나의 악한 마음과 전쟁을 벌이는 그 상태에 있죠. 이 상태에 있는 사람이 구원받은 택자예요. 그런데 이 싸움이 없다는 아예 구원을 안 받은 거예요. 아예. 그런데 제가 여기서 드리고 싶은 얘기는 이거예요.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까지 쭉 얘기했을 때 그 이유를 우리는 뭐라고 말해야 되냐. 그것은 사람 안에는 그렇게 할 힘이 없어.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요? 우리가 어떻게 선을 행해요? 어떻게 우리가 이타적으로 살아요?
이유는 뭐냐 하면 그건 내 안에 있는 힘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일을 하시는 결론이라는 그러니까 우리가 아그랑 할 때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탄식하십니다. 진짜 죄를 짓잖아요. 아무도 몰라요. 택자가 몰래 죄를 지어요.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말씀 시간에 내가 숨어서 지었던 죄를 아니 혹은 10년, 20년 전에 죄를 짓고 나도 잊고 살았던 그 죄를 설교 시간에 줄줄 얘기가 나와 보고 싶지 않은 나의 죄를 성령님이 적극적으로 나와 싸우시는 거예요. 진짜 신자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고 그 안에서 탄식을 하시는데 귀를 막아도 소용이 없어요. 이거는 내면에서 올라오는 탄식이기 때문에 너무너무 괴로워요. 너무너무 괴로워요. 그래서 결국에는 이 죄를 자백하게 만들고 이 죄를 끊게 만들죠.
말씀이 들리는 들리게 역사하시고 마음에 감동을 주시는 하나님의 열심히 일하시는 결론이 우리의 선한 삶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그렇게 살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살도록 하시는 거예요. 적극적으로 일하시는 거예요. 그게 없으면 우리는 불신자의 자리로 뚝 떨어지는 거야. 그런데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손을 떼신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보면 뭔가를 적극적으로 해서 이루는 것도 있지만 적극적으로 뭘 안 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있다. 바로 그게 오늘 말씀의 내용인데 제가 저녁에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오늘 말씀을 여러분이 잘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진노하실 만한 죄를 지었고 그것에 대해서 징계하실 필요가 있었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방법이 뭐냐?
1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징계를 받을 수 있도록 다윗을 격동하셨다라고 해요. 그런데 이 본문을 한글로 읽으면 하나님이 뭐를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윗의 마음을 죄 짓도록 충동하셨다. 이렇게 읽히잖아요. 그런데 같은 내용이 기록된 역대상 21장 1절을 보면 같은 내용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사탄이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이렇게 돼요. 그러니까 다윗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인구조사의 충동이 일어났고 인구조사를 해서 넘어졌어요. 그런데 역대상이 그 원인을 뭐라고 말하냐? 사탄이 다윗을 충동했다는 사탄이 다윗을 쥐고 흔들었다라는 거예요.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마구마구 조종했다라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봐야 될 게 뭐냐?
성경은 분명히 진술하는 바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님이 함께 하시면 어떤 사망에 음침한 이 골짜기의 어떤 위험도 다윗을 손대지 못했어요. 그리고 악신이 사울을 괴롭게 할 수 있었지만 다윗에게 손을 댈 수는 없었거든요. 이유는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다윗을 지키는 한 악한 것들이 손댈 수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늘 사탄이 다윗을 충동하는데 다윗이 막을 방법이 없어요. 오늘 사탄이 다윗을 마구 침범해 가지고 그의 마음을 막 흔들어버립니다. 그러자 다윗이 오늘 그냥 속수무책으로 당해요. 사탄이 원하는 대로 계속 움직여요. 그러면 이런 일은 왜 일어나냐?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적극적으로 일하실 때는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게 가능해져요.
그러니까 다윗과 우리가 그동안 선한 삶을 지키고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뭐냐면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역사하신 그 역사심의 결론이 하나님의 열심의 결론이었다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아주 잠깐이라도 손을 떼시는 순간, 그러니까 일을 안 하시는 순간. 우리 안에 선한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즉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게 불가능해지고, 사탄이 우리를 격동할 때 막을 방법이 없어요. 우리 안에는 사탄을 이길 힘이 없어요. 성령 하나님이 사탄을 이기는 것이지. 내가 이기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이 사탄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는 다윗이 이긴 게 아니에요. 그 안에 역사하신 하나님이 이기신 거예요. 그런데 왜 오늘 다윗이 사탄에게 격동을 당해요? 왜 사탄이 쥐고 흔드는데 그대로 흔들려요. 이유가 뭐냐면 하나님이 오늘 아무것도 안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대로 넘어지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이 때로 우리를 이렇게 유기하시는 이유가 뭐냐? 오늘도 우리가 선하게 사는 이유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야. 이걸 가르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때로 정기적으로 우리 인생에서 아무것도 안 하세요. 그러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사무엘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그를 격동하셨다라고 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을 격동하게 하신 이유가 뭐냐? 그냥 다윗을 붙잡던 손을 놔버리신 거예요. 그럼 즉시 사탄이 다윗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이루어 가실 때 적극적으로 뭘 하셔서 이루시기도 하지만 보통 우리의 겸손을 이루시고 은혜의 존재를 가르치실 때는 부작위, 다시 말해 적극적으로 뭘 안 하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요.
아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은혜를 붙지 않은 결론은 이렇게 되는 것이구나. 그거는 하나님의 은혜를 안 부어야 은혜를 깨달아요. 그전에는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이제는 우리가 아셔야 되는 게 있어요. 우리 인생은 오늘 다윗이 명확히 말해주는 게 있어요. 우리의 인생이라는 건요. 하나님께 은혜를 받느냐 못 받느냐 나를 보존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내 위에 머무느냐 머무지 않느냐 나와 하나님 관계가 좋으냐 나쁘냐 끊어졌냐 이어졌냐 여기에 달린 거예요. 전적으로 여기에 달렸어요. 전적으로 인간의 노력이 숭고하죠. 그런데 그 노력 자체를 할 수 있는 원인이 어디에 있냐? 하나님의 지속적인 일하심에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이 원리를 알면 사람은 예배에 목숨을 걸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어떤 사람 그런 사람이 있어요? 신앙 좋아요. 목사님들도 그래요.
너무 신앙 좋은 분들. 그런데 어느 날 말도 안 되는 죄를 지고 뚝 떨어져요. 그렇게 믿음 좋았던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들이 그렇게 믿음이 좋았는데 어느 날 싸늘해져가지고, 주님이 없다는 그냥 마치 불신자 같은 자리에 뚝 떨어지고야 마는 거예요. 그럼 왜 그러냐? 하나님이 역사를 안 하셔요. 그냥 놓으신 거예요. 그 사람이 변했다. 아니요. 인간은 원래 예배가 안 된다니까요. 인간은 원래 믿는 게 안 되는 거예요. 인간은 원래가 강박해요. 그동안 신앙생활 잘했던 이유가 뭐냐면 주가 붙드셨기 때문에 주가 붙드셨기 때문에 그가 그동안 겸손할 수 있었고, 질서에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뭐냐면 주가 붙드신 결론이에요.
그런데 주님이 그 손을 놓는 순간 그는 선한 것을 아무것도 오히려 교회를 무너뜨리는 범인이 되는 거죠. 이 원리를 알면 사람은요. 예배에 목숨 걸어 살려달라는 말을 주님께 정기적으로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걸 모르는 거야. 이 원리를. 이 원리를 모르니까 정말 예배를 교만하게 드려요. 예배를 대충 드려요. 예배를 일주일에 한 번 드리면, 되는 줄 알아. 여러분 예배가 뭔지 아는 사람, 인생의 원리가 뭔지 아는 사람은 예배를 일주일에 한 번 드린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예배는 가장 중요한 예배일 뿐이고요. 예배는 날마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식사가 날마다 끊어지고 산소의 공급이 날마다 공급되지 않으면 은혜가 그거보다 더 심해요. 은혜가 끊어지는 순간 하나님의 보존하심이 무너져 내리는 거예요. 우리는 아무것도 못해. 그럼 어떻게 예배를 날마다 안 드려? 어떻게 말씀을 날마다 안 봐요? 난 그게 이해가 안 돼요. 그러니까 제가 이거 안 하고 살아본 날들 동안 제가 뭘 겪었는지를 제가 너무 겪었기 때문에 이거는 너무 명확해요. 날마다 QT를 안 하고 날마다 예배를 안 드립니다. 그냥 신앙생활이 안 되고 있다고 보면 돼요. 선데이 크리천은 크리천이 아니라고 보시면 돼요. 그냥 주일 하루만 잠깐 정신 차렸다가 일주일 내내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사는 거예요. 그거는 불가능합니다. 그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하루 식사를 안 하고 전쟁터에 나가서 이길 수 있냐? 못 이깁니다.
천하장사도 못 이깁니다. 어쨌든 날마다 든든히 먹어야 전쟁터에 나가서 이기는 거거든요. 날마다 말씀을 공급을 안 받는다. 날마다 줄을 경배함으로 줄을 만나지를 못한다. 그리고 내가 사탄을 이긴다. 그런 건 제가 알고 있는 없습니다. 예배가 식어진 인생, 예배가 무너진 인생, 날마다를 더 열심히 하는 거예요. 그런데 결론은 뭐냐? 밥이 맞도록 수고했으나, 얻은 것이 없다. 그러니 첫째도 둘째도 예배 회복입니다. 다른 건 없습니다. 오직 주로부터만 나의 생존에 모든 것이 임하기 때문에 이유는 없어요. 그냥 예배의 회복 말고 없어요. 회복되고자 하면 예배가 회복돼요.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회복돼야 돼. 그러니 삶을 회복시키고자 할 때 오직 예배의 회복만이 답인 줄을 아시고 절박하게 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간에 제가 기도하고, 축원하므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예배합니다. 예배한다라는 것은 단순히 나의 사랑을 표현한다. 내가 얼마나 좋은 신앙인인지를 증명한다. 이런 차원이 예배한다라는 것은 생존입니다. 예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리지 아니하고 하늘 문이 열려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쏟아부어 주시는 은혜의 단비가 내리지 아니하고 나는 단 1초도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불능 나를 사로잡으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이 잠시라도 나를 떠나는 순간 즉시 사탄이 나를 찾아와 나를 쥐고 흔들어 나를 격동합니다. 그리고 나는 넘어집니다. 주님 예배가 회복되길 원합니다. 날마다의 주를 향한 예배, 날마다 주의 말씀을 사모하는 이 마음, 날마다 주님의 은혜의 단비를 맡는 이 풍년이 우리 안에 회복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님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나의 예배가 얼마나 생존에 절박한 절대 조건인지를 깨달아 주님과의 날마다의 예배 날마다의 말씀의 묵상이 회복되게 하여 주시고 나의 모든 상한 심력을 회복시켜 주시어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하사 다시 주님 앞에 새롭게 서는 우리 모두의 인생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위로하시고 교통하여 주시는 그 역사하심이 나의 인생이 오직 주께서 주시는 예배의 은혜에 달려있는 것을 알아 절박한 심정으로 주를 예배하여 은혜를 받아 오늘 하루를 살 힘을 얻기를 원하는 사랑하는 모든 주의 종들의 머리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 무궁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
오늘 여러분이 지금 읽으신 본문은 드디어 사무엘하 말씀의 마지막 장입니다. 그러면 그는 마지막까지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가? 오늘의 본문은 다윗의 인생 사건 중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유명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또 회개를 했어요. 왜냐?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나름 꼼꼼하게 묵상한다라고 하는데 제가 그렇죠. 부족하죠.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가 그동안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쳤다. 그래서 이 본문을 좀 약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측면이 있었다. 이거를 좀 발견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좀 약간 새로운 깨달음과 충격을 받게 됐는데 그러면 이 본문에서 우리가 반드시 봐야 되는 중요한 진리가 뭐냐. 제가 이 이야기를 먼저 좀 드릴게요.
우리가 구속사에서 반드시 캐내야 되는 이 구속사적인 관점이 뭐냐? 그러니까 나를 구원받게 하는 관점이 뭐냐라고 할 때 자 구속사는 뭐냐 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사건 속에서도 내 죄 보는 게 구속사야. 그러면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하죠. 목사님 그거 너무 억지 아닙니까? 어떻게 모든 사건에서 다 내 죄를 봅니까? 그건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이러실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이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아세요? 여러분? 사탄은요. 속이는 영이에요. 입만 열면 계속해서 우리를 속여요.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뭐냐면 내가 또 나를 속여요. 그래서 우리는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보다 사탄이 우리를 속일 때 그 말에 속아 넘어가 주고 싶은 날들이 너무 많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사탄이 우리를 속이는 게 뭐냐? 인본주의의 관점에서 외치는 주제 중에 하나가 있어요.
지금 여기 우리 중에 이런 관점을 가지고 일평생을 살다 죽는 사람 너무 많아요. 그게 뭐냐? 나는 이 사건만큼은 내가 죄가 없는데 다른 사람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에 빠질 때가 있어요. 그래서 인본주의적인 관점에 젖게 되면 피해의식과 원망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죠. 나는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 내가 부모를 잘못 만나서 오늘 이렇게 됐고 배우자를 잘못 만나는 바람에 이렇게 됐고 누구 때문에 죄 없는 내가 피해를 보게 됐다라는 거예요. 이게 인본적인 관점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때 이 사람이 죄가 없는데 억울한 피해를 입게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이 구속사 안에서 완벽하게 모든 걸 섭리하신 하나님이 그런 걸 허락하시냐 흡사 이거는 하나님의 실수 아닌가라는 행동을 하나님이 하실 때가 있냐? 그거는 불가능한 거예요. 이 구속사가 그걸 깨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세상에서는요. 다른 사람 때문에 죄 없는 내가 애매한 징계를 당하는 일은 결단코 일어나는 일이 없어요. 모든 일은 내 죄가 원인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건 회개지 상황에 대한 설명과 위로가 아니라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그 당시에 잘 보세요. 초기에 다윗이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골리앗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서 욕을 할 때 그때 다윗이 했던 말이 뭐예요?
어떻게 니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그렇게 모독할 수가 있는 거야? 그러면서 의문에 차 가지고 골리앗 앞으로 달려가요. 여러분 이 다윗의 모습 너무 의롭잖아요. 그 당시에 다윗은요. 죄라고 할 만한 게 안 보였어요. 그런데 다윗이 신실하게 살던 그날에 갑자기 사울이 다윗을 핍박하면서 극단적인 고난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자 처음에 다윗이 하는 생각이 뭐겠습니까? 왕이 귀신 들리니까. 내가 왕 하나를 잘못 만나니까 죄가 없어도 고난을 당하는구나 이렇게 억울할 수가 있나 이렇게 생각을 했다라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다윗의 전체 스토리를 알잖아요. 하나님이 다윗에게 그 신실했던 시절에 왜 이런 고난을 허락하셨어요? 정말 다윗이 죄도 없이 애매한 고난을 당한 거예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무엘하 말씀은 이런 점에서 너무너무 의미가 있는 거예요. 나중에 밝혀지는 게 뭐냐? 다윗은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사울은 악신 들려서 악을 행했잖아요. 다윗은 멀쩡할 때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여요. 악신 들려서 그런 게 아니에요. 멀쩡할 때 그렇게 했다라는 거죠. 그런데 다윗은 구원을 받아야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울을 통해서 다윗 안에 있는 악을 미리 경고하신 거예요. 선제적으로. 죄가 없는데 억울하게 고난당해 당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미 다윗 안에는 사울보다 더 악한 악이 존재하고 있었어요. 다윗만 몰랐던 거예요. 하나님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절대로 속지 않아요.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아요. 그래서 내가 당할 미래에 대한 선제적인 조치를 하신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다윗이 젊은 날 미리 겪었던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있었고, 죄에 넘어져도 그나마 빨리 회개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사울과 다윗의 차이가 뭐냐? 사울은 젊은 날 당했던 고난이 없어요. 왜냐?
하나님이 그를 유기하셨거든요. 그런데 다윗은 미리미리 당해놓은 고난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줄을 젊은 날 배우니까 죄를 짓는 즉시 돌아오는 거예요. 그러니 이 구속사의 관점이 정말 어려운 게 뭐냐면 회개는요. 잘 보세요. 내 죄를 확인한 다음에 하는 게 회개가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가 모든 만사에 내가 지은 죄의 결론으로 고난이 올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있어요. 나 지금 멀쩡히 살고 있는데, 나 지금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하고 있는데, 고난이 오는 거예요. 왜냐? 이거죠. 왜냐? 그 대표적인 성경이 욥기예요. 욥기의 시작이 어떻게 됩니까? 그가 당대 의인이었다. 이렇게 기록을 해요. 그러면서 그는 혹시 자녀들이 지은 죄만 회개하는 게 아니라 혹시 내가 모르는 가운데 지었을 죄가 있을까봐 그것까지 회개를 했다고요.
그러던 어느 날 잘 살던 어느 날 갑자기 고난이 와요. 왜요? 왜냐고요? 억울한 고난이에요? 애매한 고난이요?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어요. 반드시 그 고난을 당해야만 하는 내 안에 악이 존재한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구속사의 관점은 이게 어려운데 다윗이 사울에게 핍박을 받을 때 했어야 되는 가장 올바른 반응이 뭐냐? 하나님이 100% 옳으시다는 고백을 했어야 됐고 사울에게 핍박을 받을 때 원망이 아니라 회개를 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회개는 죄를 보고 하는 게 아니에요. 믿음으로 하는 거예요. 나에게 이 고난을 주시고 징계를 주시는 하나님은 옳다. 내가 모르는 내 죄를 하나님이 알고 있다는 것에서 100% 그 믿음에서 우리의 올바른 회개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이 인간이니까. 지금 내가 죄가 안 보이는데 믿음으로 회개한다.
그게 어려웠던 건 사실이에요. 하나님이 그것까지 감안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가 일생을 살면서 시간이 다 지난 다음에 그때 깨닫는 게 뭡니까? 역시 하나님은 옳았다는 거예요. 역시 하나님은 옳았던 거예요. 다윗이 사울에게 받았던 핍박은 자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선제적인 조치였다라는 거죠. 하나님이 그 징계를 해줬기 때문에 그가 죄에 넘어진 날 돌아올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에서는요. 다른 사람 때문에 죄 없는 내가 당하는 억울한 고난 같은 건 존재를 아예 안 해요. 그런 개념은 이제 사라져야 돼요.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바로 그 사건을 통해서 각자의 적절한 타이밍에 그 죄를 다루시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제일 중요한 건 각자가 자기 죄를 회개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자녀가 사고를 쳐요. 부모에게 말도 안 되는 고통을 줘요. 그러면 거기에서 부모님들은 자기가 문제의 부모인 것을 보고 회개를 해야 돼요.
자녀가 나 때문에 수고하는 거 맞아요. 그런데 이게 구속사에서 가장 많은 빈도수로 말하는 건 맞아요. 그런데 구속사에서 중요한 건 이거예요. 그러면 자녀는 부모를 위해서 수고하는 죄 없는 피해자예요? 성경이 그렇게 말을 안 한다라는 거예요. 내가 오늘 사울 같은 부모를 만난 이유는 뭐예요? 정말 재수가 없어서 나는 그냥 아무 죄가 없는데 태어나 보니까 난 선택한 적도 없는데 이렇게 이상한 부모를 만나 가지고 내가 고난을 당하는 거예요. 그게 인본적인 관점인 거예요. 하나님 나라는 커요. 하나님 나라는 깊어요. 하나님은 미리미리 일하시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젊은 날부터 다루셔야 되는 자녀들의 죄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각자가 내 죄를 보는 게 구속사기 때문에 부모는 부모 죄를 고백하고 자녀는 자녀 죄를 고백하는 거예요.
이 깊이 이 깊이 여기로 들어가는 건 바로 그 신앙의 정점에서 나오는 게 뭐냐? 감사가 아니에요. 회개요. 회개가 먼저고 그다음에 감사인 거예요. 여러분 이 세상에 나는 죄 없는데 남의 죄 때문에 고난당하는 유일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이런 측면에서 오늘 말씀은 구속사의 굉장히 중요한 측면을 말해주는 거예요. 제가 예전에 여러분은 교회 오래 다니신 분들도 이 본문 아시죠? 그러나 여러분이 이 본문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하셨어요? 그러니까 저는 제가 너무 오랫동안 이 본문에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살았는데 제가 이전에 이 본문을 놓고 했던 생각이 뭐냐? 다윗이 또 교만해져서 자기 힘을 과시하려고 인구 조사를 했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다윗의 회개를 받아내시려고 이스라엘에 전염병을 보내사 7만 명의 백성이 희생됐다는 거예요. 제가 이런 본문을 읽을 때마다 시험 들었었어요. 오케이? 하나님이 다윗의 회개를 받아내시려고 하는 거는 오케이. 이해가 돼요.
그런데 왜 죄 없는 백성은 죽어야 돼요? 하나님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죄 없는. 그러니까 다윗에게 회개를 받기 위해서 다윗 하나 구원하려고. 그럼 7만 명의 백성은 수단이에요? 아니 하나님 이런 게 어디 있어요? 이게 너무너무 시험이 되는 거예요. 물론 다윗 입장에서 보면 나 때문에 백성이 수고한다라고 고백하는 게 맞죠. 다윗은 그 고백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본문을 잘 보시면요. 이 본문은 다윗한 사람 때문에 백성 7만 명이 수고했다. 이게 포인트가 아니에요. 오히려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뭐냐면 온백성의 회개를 위해서 지도자 다윗이 수고했다. 이게 포인트예요. 왜냐? 여러분이 오늘 말씀 1절을 한번 잘 보세요. 여러분이 오늘 본문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다윗의 마음을 격동하사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조사를 하게 했다. 이렇게 하세요.
그런데 하나님이 왜 다윗의 마음을 격동해요? 1절이 그 원인을 명확하게 밝히는데 이렇게 기록하죠. 여호와께서 다시 누구를 향해서 진노했어요? 이 말씀을 보시면 다윗한테 진노하셨어요? 아니요. 내가 이걸로 친 거예요.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에게 인구 조사를 시키셨다 이렇게 기록돼 있어요. 그러니까 이 사건에서 하나님이 징계를 하실 때 원인이 되는 것은 다윗의 죄가 아니라 다시 하나님을 진노하게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여호와를 다시 진노하게 했던 이스라엘의 죄라는 게 뭔가 그걸 하려면 우리가 지금 두 가지 정보를 알아야 되는데 일단 도대체 이 사건은 언제 있었던 일인가?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학자들의 일치하는 견해는 뭐냐면 이 사건이 압살롬의 반란 사건 뒤에 있었던 사건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는 게 이 사건의 목적이거든요. 뭐에 대해서 징계하시냐? 이게 압살롬의 반란 사건과 연관이 있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두 번째로, 알아야 될 것은 지금 다윗은 무엇을 위해서 인구조사를 하는가? 이걸 알면 하나님 다윗의 죄를 보고 있으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스라엘의 죄를 알 수가 있다라는 거예요. 이걸 위해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되는 사실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실 때 이 나라의 건국 목적이 되게 중요해요. 하나님이 왜 굳이 노예들을 불러다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셨냐? 그거는 세계에서 니네가 가장 큰 나라더라. 잘 먹고 잘 살아라. 이게 이스라엘 건국의 목적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그런 나라가 돼 본 적이 없어요. 전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 전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나라, 잘 먹고 잘 사는 나라 이런 나라가 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게 하나님이 이 나라를 세운 목적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이 나라를 세운 하나님의 목적은 뭐였는가? 창세기 12장 1절에서 3절을 보면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그 후손에 대한 언약을 주십니다. 뭐라고 하시냐?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는 복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 을 것이니라라고 하세요. 이 민족은 복이 돼야 되고 이 민족은 복을 나누어 주기 위해 존재하는 민족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뭐냐? 하나님의 백성은 복을 나누어 주는 백성이지 복을 뺏는 족속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 순간 그걸 시도하는 순간 이스라엘은 망해요.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어긋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리에게 칼을 줄 때 그 칼의 목적은 복을 나누어주는 하나님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지. 질서를 무너뜨리는 도구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칼 주실 때 사람 살리라고 수술하는 칼은 주셨어도 사람 죽이라고 강도의 칼은 주신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내 백성의 군대를 움직일 때는 심판의 목적으로 움직인 적은 있는데, 약탈의 용도로 움직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예를 들어서 아말렉을 칠 때 하나님이 아말렉의 죄를 미워하사 치시긴 하셨지만, 분명히 말씀하신 게 뭐냐? 너는 그들을 약탈하지 말라는 절대 약탈하지 말라.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아말레에게 악과 죄를 너는 심판하라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칼을 주셨어요. 그런데 보세요. 다윗이 요압에게 인구조사를 하니까 3절을 보면 요압이 이걸 말려요. 왜냐?
다윗은 지금 그러니까 성경에서 인구조사를 할 때 굉장히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가 뭐냐 하면 세금을 얼마를 걷어야 되니까. 예상되는 세수가 얼마냐 이거를 예측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인구조사를 한 적은 있어요. 그러면 이제 모든 백성의 숫자를 세야 되잖아요. 그런데 다윗은 모든 백성의 숫자가 궁금한 적이 없어요. 오늘 숫자를 살 때 다윗이 세기 원했던 특정 그룹의 숫자가 있어요. 그러면 다윗이 숫자를 알고 싶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 누구였냐? 5절에서 8절을 보시면 요압이 9달 스무 날을 투자를 해서 마침내 다윗이 요구했던 인구조사를 마칩니다. 그런데 구조를 보면 누구의 숫자를 세냐?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스 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80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50만 명이었다라고 해요. 이거 잘 보세요.
성경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심판의 전쟁을 앞두고 싸울 만한 사람의 숫자를 기록한 적은 있어요. 하나님이 이거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이 경우가 아니고 칼 쓰는 사람의 숫자를 센 경우는 이 경우가 유일해요. 그러면 다윗은 왜 하나님의 명령이 없는데도 전쟁을 앞둔 것도 아닌데도 칼 빼는 사람의 숫자를 왜 세냐? 이거에요. 어느 날 다윗에게 느껴지게 다윗도 알았어요. 지금 내 손에 있는 칼이 꽤나 다른 나라에서 가지고 있는 칼보다 더 강한 칼을 내가 가졌다라는 걸 느끼고 있는 거예요. 다윗도 바보가 아닌 이상 자기 나라 국력을 알고 있었겠죠. 그런데 요 칼이 있잖아요.
이게 사람 살리라고 주신 칼이긴 한데 요 칼 가지고 만약에 들이대가지고 남의 거 뺏으면 얼마든지 뺏을 수 있거든요. 이게 종이 한 장 차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칼을 주시는데 이 칼 가지고 살릴까 죽일까는 그냥 방향만 결정하면 돼요. 그러면 그냥 바뀌는 거죠. 그런데 이제 다윗이 어느 날 손에 칼을 가지고 있는데, 이게 쓸만해요. 이거 들이대면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거 내가 뺏을 수 있는 거죠. 이게 하나님이 강력하게 금하시는 건데 문제는 뭐냐면 다윗 안에서 이거 해보고 싶은 욕구가 끓어오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목사 같은 경우에도 저는 대단한 게 목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만 어쨌든 리더십이잖아요. 권한이 있잖아요. 저한테 이게 무조건 질서 안에서 써야 돼.
권위라는 것은 뭐냐면 권위라는 것은 목사의 권위는 사람 살리는 거 외에 쓰면 안 돼요. 어떤 경우에도 목사가 이유 없이 자기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힘을 발산하면 그다음부터 하나님이 그 권위를 지지를 안 해요. 그런데 이게 문제는 뭐냐 하면 이런 거예요. 우리 교회도 이제 계약 관계를 맺고 있는 업체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그 업체의 사장님들이 오면은 제일 먼저 담임 목사를 찾아요. 왜냐하면, 그 사람이 내 계약에 대해서 권한을 가지고 있는 거 알고 있거든요. 그럼 그분들이 어떻게 하냐면 나는 인생에서 담임 목사가 되기 이전에는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데 그분들이 그렇게 깍듯해요. 정말 그렇게 깍듯해요. 그러면서 목사님 이번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는데 이유가 없이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욕구가 뭐냐 하면 딱 한 번만 갑질해봤으면 좋겠는 거야. 이게 무슨 기분일까? 딱 한 번만 있잖아요. 그냥 죄송한데 저희가 바꿀 이유도 없어. 그런데 업체를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라고 할 때 내 말 한마디에 앞에 있는 사람이 불안해하는 그 모습 있잖아요. 내가 요거 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한테 좀 이 사람이 굽신거리는 거 한번 볼 수 있는데, 그거 있잖아요. 너무 경험해보고 싶을 때가 있어. 아무것도 아닌데 그게 너무 경험하고 싶을 때가 있어. 이게 있잖아요. 약간 어떨 때 피가 말려요. 이 끓어오르는 욕구가 제어가 안 되는. 그런데 어느 날 다윗 안에 칼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게 꽤 강한 칼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거 한 번 죽기 전에 한번 칼춤 한번 춰보고 싶은 거예요. 이게 하나님이 강력하게 금하시는 건데 다윗 안에서 이게 지금 끓어오르고 있는 거예요. 끓어오르고 이거 누르는 건 하나님 은혜가 아니면 안 돼. 절대 안 돼. 그런데 이게 뭐냐. 칼로 하나님의 질서를 엎어버리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다윗이 끝내는 내 힘을 확인하고자 인구 조사를 했죠.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게 뭐냐. 이 일의 결론으로 하나님이 다윗을 친 게 아니라 백성 7만 명을 염병으로 쳤다라는 거예요. 단 3일 만에. 그러면 이 말 뜻이 뭐냐? 칼을 휘둘려서 질서를 뒤엎고 싶은 이 욕구는 다윗 개인의 욕구가 아니라 이 백성 전체의 욕구였다라는 걸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죄가 드러난 사건이 있었냐? 있죠. 바로 그게 압살롬의 반역 사건이었어요.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다윗이 왕으로 있었을 때 다윗이 왕이 아니었을 때 그 나라 백성들이 불렀던 노래가 있었어요.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철없는 여자들의 노래가 아니에요. 민심이었어요. 왜냐? 골리앗을 만나던 날 사울은 그날 위축이 돼서 아무것도 못 해봤어요. 그런데 다윗은 담대했거든요. 그러니까 사올은 그때부터 이미 지는 해였고 다윗은 뜨는 해였어요. 그러니까 당시에 사올과 다윗의 칼 중에서 누구의 칼이 더 강하고 길었고 날카로웠냐라고 하면 그 당시에는 다윗의 칼이 이미 사울의 칼보다 더 좋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에게 이상하죠. 다윗이 더 좋은 칼을 가지고 있어요. 사울이 못한 칼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더 못한 칼을 가진 사람이 왕이에요. 그러면 다윗에게 이 칼을 주신 이유가 뭐냐? 하나님이 세우신 사울을 그 칼 가지고 섬기고 도우라고 그 칼을 준 것이지. 사울의 것을 빼앗으라고 주신 칼이 아니에요.
자, 우리 기준은 칼의 길이가 아니에요. 잘 들으세요.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내가 가진 칼이 얼마나 가고 내가 가진 칼이 얼마나 날카롭냐가 기준 아닙니다. 그거는 세속인들의 기준입니다. 우리 기준은 하나님이 누구를 질서로 세우시느냐? 이 하나님의 주권인 거예요. 그러니까 더 강한 칼을 가졌으니 약한 칼 가진 사람 위에 서야 된다. 내가 쳐도 된다라고 생각하신 것이 인본주의고 교만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이 나보다 작고 약한 칼을 가진 사람을 내 위에 세우셨으면 그 질서에 순종하는 게 하나님의 법이고 내 칼은 그 사람을 섬기는 데 쓰는 칼인 거예요. 그런데 다윗은 젊은 날에 그 질서를 철저히 지켰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사울을 폐하지 않는 한 자기 눈앞에 사울이 무방비 상태로 있어도 내가 칼 한번 휘두르면 사울 그날 죽어요. 목이 날아가요. 안휘둘러요.
때로 칼은요. 뺄 때보다 칼집에 꽂혀 있을 때 하나님이 더 강력하게 쓰실 때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나라인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이 있잖아요. 칼이 질서를 세우는 기준이 아니었어요. 그러므로, 다윗이 칼로 왕의 자리를 뺏는 일은 결단코 일어난 적이 없어요. 그런데 다윗이 늙어서 힘이 빠졌던 어느 날 이스라엘과 유다에 압살롬이라는 젊은이가 나타났습니다. 이 젊은이의 외모라는 칼은 다윗의 외모보다 월등히 아름다웠어요. 훨씬 날카롭고 강했어요. 그러자 압살롬의 옆에 전략의 천재라는 아히도벨이 붙었고 뜨는 군인인 아마샤가 붙었어요. 그러니까 딱 봐도 다윗의 칼보다 압살롬의 칼이 훨씬 더 컸어요. 누가 봐도 만약에 힘으로만 다윗하고 압살롬이 붙었으면 그날 압살롬이 이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피하시지 않는 한 이 칼은 다윗을 섬기는 칼이지 휘두르는 칼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이 칼을 확인하는 순간 유다 지파와 다른 지파할 것 없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이 뭐냐? 압살롬이 더 큰 칼을 가졌으니 압살롬이 위에 가야지 누가 그랬냐고요? 언제? 하나님의 백성 중에 칼이 기준인 적이 언제가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뜬금없이 이스라엘 백성대를 하는 게 뭐냐? 압살롬이 가진 칼이 더 크고 훌륭하니 압살롬이 왕이 돼야지. 그러면서 질서를 뒤에 엎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이걸 적용하면 이런 게 있어요. 우리들은 숙명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어릴 때야 자녀들보다 부모님의 칼이 훨씬 더 크고 강하죠. 그러나 시간은 자녀들의 편입니다. 자녀들이 더 많이 배워요. 자녀들이 더 잘나요? 부모보다 자녀들이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돈을 버는 자녀들이 있겠죠.
그런데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부모보다 더 크고 강한 칼을 주신 이유는 뭐냐? 그 칼을 들 수 있도록 키워준 부모를 존중하고 잘 섬기라고 그 칼을 주신 겁니다. 칼은 질서의 기준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세우신 위치가 질서입니다. 그런데 내 칼이 부모의 칼보다 더 크고 좋으니 그날부터 부모를 무시하는 자녀들이 있어요. 자기가 부모를 가르쳐도 된다고 생각하는 자녀들이 있어요. 이게 뭐냐면 칼이 질서라고 생각하는 인본주의고 교만이에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도 그러고 직장에서도 그러고 어딜 가나 칼이 기준인 거예요. 내가 일 더 잘하고 내가 학벌들도 좋은데 나보다 학벌도 안 좋고 일도 더 못한 것 같은 직장 상사가 내 위에 있어요. 그러면 질서를 엎어버려요. 그러니까 이걸 못 견뎌요. 부당해.
아니 내가 훨씬 더 좋은 칼 가지고 있는데, 내가 월급을 더 많이 받아야지. 왜 나보다 못난 인간이 내 위에 있어? 나는 못 참겠어. 칼이 기준이에요. 그래서 질서에 순종이 안 돼. 내가 나이도 더 많아요. 내가 학벌도 좋은데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학벌도 없는 사람이 목사고 전도사다. 일고의 존중이 없어요. 질서를 엎어버리는 거야. 니가 뭔데? 니가 목사야. 나는 존중이 되는 목사만 상대해. 그러면 아예 그냥 일고의 존중이 없는 거예요. 그게 내 질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칼이라는 건데 그게 인본주의고 교만이에요. 그런데 중요한 건 백성들 안에 이 교만과 인본주의가 있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게 뭐냐? 압살롬의 반역이에요. 하나님이 그거 이거 안 넘어가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백성의 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대표로 수고하게 하신 사람이 누구냐? 그게 바로 다윗이었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완벽한 균형은 성경적인 게 균형인데 많은 경우에 하나님은 윗질서의 죄를 물으시고 대표의 죄를 더 엄하게 물으시는 게 사실이에요. 그런데 밑질서와 자녀는 피해자고 희생자입니까? 누가 그럽니까?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성경을 보면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의 죄 때문에 죄 없는 다른 사람까지 피해 보게 하는 일이 있냐 그런 일은 없어요.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이 딱 정하신 법칙 있죠. 그게 뭐냐?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는데 자녀의 이가 시리는 일은 없어요. 왜 사람이 이가 시리냐? 니가 신포도를 먹었기 때문이에요. 그 외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시는 일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7만 명이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7만 명이 염병으로 죽어요. 3일 만에. 왜요? 다윗 하나를 회개시키는데 죄 없는 백성들이 희생당하는 거예요? 누가 그럽니까? 성경은 그런 일이 없어요. 오늘 말씀이 분명히 말하는 게 뭐냐? 하나님이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셨다라는 거예요. 왜냐? 이 백성이 어느 날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 손에 들고 있는 칼이 질서가 된 거예요. 좋은 칼 가진 놈이 왕이지 크고 강한 칼 가진 놈이 왕이지. 나는 나보다 약한 칼을 가진 인간을 내 윗질서로 인정이 안 돼. 그러면서 질서를 엎어버린 거야. 하나님이 그거를 안 참아 보시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다윗이 간음과 살인의 죄를 지었을 때 다윗만 다루셨지.
그 죄를 회개하게 하려고 백성이 전염병으로 죽는 일은 없었어요. 그런데 오늘 다윗의 인구조사로 인해서 백성이 7만 명이 징계를 받았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백성 안에 퍼진 죄를 드러내십니다. 다윗 때문에 죄 없는 백성이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 부모 잘못 만나서 죄 없는 자녀가 당하는 고난 이런 거예요. 목사는 목사 죄를 보는 게 맞는데 목사 때문에 죄가 없는 성도가 당하는 고난 같은 건 없다라는 거예요. 모든 고난은 내가 봐야 되는 내 죄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100% 옳으시고 공의로우시고 실수가 없기 때문에 나에게 어떤 고난이 왔으면 내가 봐야 되는 내 죄가 있는 거예요.
그거는 어김이 없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세상에서 실수로 죄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이 있냐? 없습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욥이 계속 물어봤죠 왜요? 하나님 아무리 뒤를 돌아봐도 아무리 뒤를 돌아봐도 나는 날마다 죄를 회개했는데 하나님 왜요? 왜요? 왜요? 이게 초반에 욥의 질문이에요. 그런데 제가 욥기를 묵상할 때 되게 재밌는 게 하나 있었어요. 그게 뭐냐면 자, 욥이 당대 의인이었다고 해요. 맞죠?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요. 의인인데 욥이 고난당하는 날 여러분도 한번 욥기 한번 다시 읽어보세요. 욥이 고난당했는데 위로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여러분 그거 아니잖아요. 보통 의인이면 그가 살아온 의로운 삶이 있잖아요.
그 사람이 고난당하면 위로하는 사람이 있다고요. 그런데 이상한 게 뭐냐?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욥이 고난당할 때 욥을 위로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안 나타납니다. 정죄하는 사람만 나타나요. 왜 그러냐? 욥이 그렇게 살았거든요. 욥이 자기가 의인이니까. 다른 사람들이 고난당하잖아요. 찾아가요. 문 두드려요. 그리고 하는 게 뭐냐? "죄 지었지? 나봐. 사람이 의롭게 살면 고난당할 수가 없는 거야. 그런데 오늘 니가 고난당하는 거 보니까 죄 있네. 나와. 나와. 무릎 꿇어. 실토해. 뭐 잘못했어?" 그러니까 지난날에 욥이 한 짓이 뭐냐 하면 자기 안에 있는 의로움이라는 칼로 사람들을 난도질했는데 힘들 때 더 힘들게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어느 날 자기 삶의 결론으로 오는 게 뭐냐? 그가 고난당하는 날 위로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힘든데 더 힘들게 만드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자기 삶의 결론이에요. 다른 사람이 잘못해서 내가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 있냐? 그런 거는 없어요. 여러분 배우자를 잘못 만나서 죄 없는 내가 고난당한다는 피해의식이 혹시 있으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결혼이라는 결합은 무조건 너와 내가 종류가 같으니까 결합되는 거예요. 결합은 다른 종류끼리 결합이 안 돼요. 여러분 꿀벌하고 파리하고 결합이 돼요? 안 된다니까요. 결합이라는 현상 자체가 말해주는 게 뭐냐면 너랑 나랑 종류가 같다라는 거예요. 다른 종류가 결합되는 일은 없어요. 그래서 배우자를 통해 나에게 오는 고난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서 봐야 되는 내 죄가 있는 거예요. 왜요? 부부는 끼리끼리 만나요.
절대로 다른 종류끼리 만나는 법이 없는 거예요. 법이 하나님이 내 배우자를 들어서 내 죄를 보시는 거예요. 보게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자녀들의 경우에 제가 그래도 제가 8년을 젊은이들 양육을 했거든요. 제가 무섭게 보는 게 뭔지 아세요? 나쁜 부모를 만나서 죄 없는 내가 고된 당했다고요. 이게 어거지로 하는 말이 아니고요. 제가 젊은 지체들, 청년들과 많은 목장을 했거든요. 그런데 소름 끼치게 보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자녀들이 부모 욕을 그렇게 해요. 그런데 부모 욕을 하는 부모의 죄가 자녀들 안에 더 악하게 있어요. 그러면 이렇게 말하겠죠. 나는 원하지 않는데 부모를 잘못 만나서 그 죄가 나에게 전가된 거 아닙니까? 억울합니다. 이럴 수 있죠. 그런데 우리 안에는 그 죄를 거부할 자유 의지가 있다라는 거 아세요?
그리고 실제로 부모님의 죄를 거부하면서 더 나은 성화로 나아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많은 자녀들을 보면 지가 좋아서 죄를 지으면서 부모를 방패로 삼아요. 부모님이 나한테 이걸 물려줬다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부모의 재료를 답습하는데 심지어 부모보다 더 정교하고 즐기고 지독하게 발전을 시켜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그 부모를 만나게 하시고 그 고난을 주신 이유가 뭐냐? 내가 지을 죄를 선제적으로 다루신 거예요. 만약에 내가 오늘 부모님과 전혀 다른 가정생활하고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그거는 그 부모님의 수고인 줄 아시면 돼요. 그 부부를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죄를 미리 다루신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그 죄가 얼마나 두려운 줄 알아서 나는 그 죄를 피할 수 있었던 거지 나와 부모가 다른 게 아니라는 거예요. 절대로 그렇지 않죠.
그러니까 우리가 맨날 말하는 게 그거 아니에요. 아담과 하와가 그 죄를 안 지었으면 내가 오늘 이렇게 힘들게 살진 않을 텐데 만약에 내가 에덴동산에 있었으면 나는 절대로 선악과 안 먹습니다. 누가 그래요? 아니라니까요.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에덴동산 놔뒀으면 그 사람은 선악과 두 개 먹어. 여러분 오늘 말씀이 말하는 게 뭡니까? 고난은 누구 때문에? 죄 없는 나한테 오는 일은 없어요. 절대 없어요. 하나님은 언제나 정확하게 내 죄를 다루죠. 안 보이죠? 그럴 수 있어요. 맞아요. 저도 그랬어요. 안 보일 수 있어요. 그러나 성경이 그것 때문에 써진 거예요. 하나님이 미리 다루시는 경우가 있어요. 미리 다루시는 경우.
나를 위해 고난을 주시는 거예요. 왜냐? 하나님이 속지 않으시고 100% 옳으사 내가 모르는 나를 알거든요. 그거는 오늘 내가 당하는 고난은 주님 저는 죄가 없는데 애매한 고난을 당하고 있어요. 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있어야만 하는 일이에요. 있어야만 하는 일이에요. 그 모든 것들이 합하여서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 배우자를 잘못 만나서 죄 없는 내가 이 고통을 당한다. 부모를 잘못 만나서 죄 없는 내가 이런 고난을 당했다. 이 피해의식은 여러분 속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에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보셔야만 하고 회개하셔야만 하고 주님 앞에 해결하셔야만 하는 그 죄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모든 여러분의 의심을 내어버리고 이 모든 고난과 징계 앞에서 주님이 옳습니다로 나아가 보세요. 분명히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옳으심이 있다라는 그러나 끝까지 이 피해의식을 가지고 억울하다 억울하다 그러면 이 고난이 끝이 날 방법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 다윗은 다윗의 죄를 회개하면 돼요. 백성은 백성의 죄를 회개하는 거예요. 원망. 하나님 믿는 사람의 인생에 원망은 속고 있는 거예요. 속으니까 원망하는 거야. 아니에요. 여러분 눈을 여세요. 하나님의 100% 옳으심을 보세요. 다윗의 인생에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고 하나님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어.
각자가 회개하므로 거룩한 손을 들고 주님께 나가 주님의 옳으심을 고백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말이 안 되는 은혜를 보시고 모든 전염병은 물러가고 새로운 회복의 날은 오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 안에 어떤 피해의식이 있습니까? 어떤 억울함이 있습니까? 하나님 감당하겠습니다. 알지 못하는 때에라도 회개하겠습니다. 하나님 나의 인생에 회복을 주시고 하나님 나의 인생 가운데 은혜를 부어달라고. 그렇게 모든 피해의식과 억울함을 깨치고 나아가 주님과 다시 만나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찬양팀 나와주실까요?
제가 어제 그 목사님 후배 한 분을 만났어요. 저녁에 이제 어쩌다 연결이 돼 가지고 저녁에 이제 만나서 되게 길게 얘기를 나눴거든요. 길게 얘기를 나눴는데 참 목사님을 보는데 이상한 점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면 부르심이 있어요.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해요. 그런데 이상한 게 뭐냐면 열매가 없어요. 이럴 수가 없는데 이럴 수는 없는데 왜 열매가 없을까? 얘기를 쭉 해봤죠. 얘기를 쭉 해봤는데 제가 너무 안타까운 게 뭐냐면 이제 그냥 거의 그래요. 저를 만나면 죄를 말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난 누구를 만나도 내 죄를 먼저 까거든요. 왜냐하면, 저는 우리가 죄를 고백 안 할 거면 저는 안 만나요.
나는 담소하는 게 너무 시간이 아까워요. 아니 말하나 마나 다 죄인인데 죄고백 안 할 거면 나는 만나야 될 이유가 없거든요. 저는 나도 시간이 한정돼 있어서 그래서 일단 그 목사님 만나자마자 일단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내 죄를 막 얘기를 했어. 그리고 제가 이제 목사님한테 그 얘기를 했죠. 죄인이시죠? 죄인 맞잖아. 오늘 목사님이 나를 여기까지 만나러 올 때는 얼마나 마음에 큰 고통이 있고 고난이 있을 것 같은데, 편하게 말씀하시라고. 우리 같은 죄인끼리 다 얘기하시라 이 목사님이 줄줄줄 얘기하기 시작하고 너무 괴로웠던 거예요. 죄 때문에.
그런데 제가 죽겠는게 뭐냐 하면 자 그러면 이제 자 회개하면 되잖아요. 회개하는 자는 무조건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로 들어와요. 그런데 회개하는 법을 모르는 거야. 나는 이게 이게 현 주소인데 이랬다는 거예요. 사모님하고 이 죄를 나눴을 거 아니에요. 목사님 그래.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다 부족하지. 하나님이 언젠가는 해결하실 거야. 이게 끝이었대. 회개를 어떻게 하는지 주님이 원하시는 회개가 뭔지를 어떻게 해야 우리 인생에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지를 말을 안 해주는 거야. 그날 또 목장을 했어요. 또.
그래서 목사님이 앞으로 하셔야 되는 회개는 뭐냐 하면 이러면서 목을 매달아야 되고 어떤 수치를 당하셔야 되고 뭘 적용하셔야 되고 막 얘기를 지금 아마 집에서 사모님하고 엄청 고민하고 있을 거예요. 여러분 제가 이 회개를 왜 이렇게 외치냐 하면 회개가 이루어진 사람은 예수가 나의 힘이 돼요. 얼굴에 근심 걱정이 없는 기쁨과 소망을 부어주신다라는 거죠. 그런데 이 시대에 청년들이 약을 먹어요. 자살을 해요. 교회를 다니는 청년들도 말 못할 비밀들 하나님께 아무런 축복도 구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로 죄책감 가운데 교회를 다녀요. 왜?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가 안 이루어져.
다 속아가지고, 피해 의식 원망 어 누구 때문에 죄 없는 나는 이렇게 됐어요. 하나님 위로해 주세요.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예요. 천만의 말씀 속지 마세요. 우린 100% 죄인이고 내 죄를 회개해야 우린 천국가요. 여러분 오늘 우리 다 같이 찬양할 때 오늘 하나님이 우리 삶에 복주시기 원하고 다윗의 인생처럼 하나님이 내 편 되어 주시면 그 전염병이 싹 물러가요. 주는 우리의 힘이 되기를 원하시고 내 기쁨 되길 원하시고 참 소망 되기를 원하세요. 그러자면 회개의 영이 임해야 돼. 내 인생 가운데 속아서 가지고 있는 모든 피해의식과 억울함이 다 물러가야 되는 거예요.
질서를 뒤엎은 죄에 아내가 남편의 질서를 엎어버리고 남편이 아내의 질서를 엎어버리고 자녀들이 부모의 질서를 엎어버리고 직장에서 밑에 사람이 윗질서의 질서를 엎어버린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멸시하고 질서를 엎어버린 우리 모든 죄를 회개해야 돼. 그럼 즉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달려와서 우리의 힘되시고 능력이 되어주시는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가 같이 한번 우리 찬양합시다. 불 꺼주시고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나의 기쁨 내 참소망 그 이름의 생명이 내 삶의 이유라. 우리 같이 고백하면서 하나의 회개로 나가오니 주님 나의 삶에 소망이 될라고 이 시간을 그런 마음으로 찬양합니다. 예수는 내 힘이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history0713(구례제자교회) / 삼하24:1-9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음을 알고 그 은혜를 기억하며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자신과 함께 하였던 용사들을 소개함으로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힘만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함께함으로 되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되어진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하는 동역자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함께 하는 동역자와 믿음으로 끝까지 충성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켜서 인구조사를 하게 하는 죄를 범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볼 것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모든 것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다윗을 시험하셨고 다윗은 그 시험에 어리석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요압을 불러 인구조사를 실시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명령은 요압이 볼 때에도 잘못된 일임을 알았습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삼하24:3) 하며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요압의 간언을 무시하고 요압과 군대 사령관들을 재촉하였습니다. 결국 다윗의 명령대로 인구조사를 하였고 요압이 그 결과를 보고하였는데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사람이 팔십만 명이었고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습니다.
시험은 내가 생각하지 못한 때에 옵니다. 그 때가 나의 생활이 안정되고 평안해졌을 때가 대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10:12) 그런데 죄를 지을 때에는 이상하게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결국 나중에 보면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26:41)
다윗의 인구조사
삼하24:1-9 / 엘림전원교회
본 인구 조사는 다윗의 엄명과 독촉에 따라 행해졌습니다.(4절 참조) 무려 9개월 스무날 걸렸으며 인구조사의 동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역대상 27:1절에 보면 사탄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計數)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1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켜서 인구조사를 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 상실한 마음대로 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신다는 기록처럼(롬1:28절) 하나님께서 시험한 주체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기서 1:12절에 보면 하나님은 욥의 믿음이 승리할 것을 아셨기에 사탄의 시험을 허용하기도 하셨습니다.
1. 인구조사의 문제점
하나님께서 인구조사 자체를 죄악시 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세도 두 번씩이나 백성을 계수했지만 범죄로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목자가 자기 양떼의 수를 알아서 안 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기에게 속한 모든 자의 이름을 아셨습니다. 문제는 이 계수 자체가 불법적이었고 또 선용하려는 동기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1) 잘못된 동기
다윗은 더욱 부국 강병한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세금을 징수하고 징병자료를 파악하고자 인구 조사를 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세금을 징수했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입니다. 백성의 계수시마다 반 세겔을 성소 예배를 위해 생명의 속전으로 바쳐야 했습니다.(출30:12절)
1) 하나님께로부터 인구 조사의 명령을 받지 않았고 필요성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잘못하면 백성을 불필요하게 괴롭히는 일일 수 있습니다.
2) 교만한 마음이 잘못된 동기였습니다.
백성의 수가 증가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증가 시킨 것으로 뽐내려 했던 것입니다.
3) 다윗은 전쟁에서 하나님보다도 사람의 수를 의지하겠다는 동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다윗답지 않게 육체의 팔을 더 신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살피시며 심령의 생각과 의도를 식별하십니다.
(2) 잘못한 인구조사
1) 인구조사 대상은 20세 이상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신장이나 체력 면에서 무기를 들 정도만 되면 인구수에 계수 했습니다.(삼하24:9절 참조)
2) 요압 장군의 충고를 무시했습니다.(3절)
요압은 다윗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배나 백성의 수를 더하게 하실 것인데 꼭 왕의 눈으로 확인해야 하겠느냐고 인구조사의 부당성을 주장했습니다. 동기가 순수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언약을 모독하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티끌처럼 많아지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교만한 마음이 들어가 요압의 충고를 듣기는커녕 자기의 명령대로 수행할 것을 재촉했습니다.(4절) 이상의 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신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복된 통치를 감사하기보다 이스라엘 민족의 평화와 풍족히 그를 방심하게 만들고 교만하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노하셨던 것입니다.
2. 요압의 이의 제기(3-4절)
요압은 왕의 자만심을 돌이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전에도 요압은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는 다윗 왕에게 무례하고 퉁명스럽게 따진 적이 있었습니다. (삼하19:5-7절)
그러나 이번에는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키며 젊잖게 말했지만 실은 다윗의 교만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빨리 명령대로 할 것을 재촉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헛된 자부심에서 행동하지만 우리 자신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다윗에게는 충실히 충고해 줄 요압이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3. 명령을 수행한 요압(4-9절)
요압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고 왕을 섬기는 일에 시간과 수고를 낭비 하는 것으로 오해 받을까 두려워 명령을 바로 수행했습니다. 요압은 다소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군대 장관들의 도움을 얻어 요단 저편 동쪽부터(5절) 북쪽의 단으로 향하고(6절) 거기서 다시 동편 두로로, 거지서 남쪽으로 브엘세바로 향했습니다. 9개월 이상에 걸쳐 철저히 조사한 인구수는 청장년 80만이요 유다 사람이 50만이었습니다.(9절) 그 수가 다윗의 자만심을 충족시켰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서는 애굽에서의 인구 증가 추세에 미치지 못했고 400년 전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에 입주하던 당시 인구의 두 배를 상회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좁은 지역에서 이처럼 중대한 무리가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나안이 매우 비옥한 땅이었음은 증명됩니다.
사무엘하 24:1-9
찬송가 623장 주님의 시간에 / 박성호목사
‘진노하사’(1)
‘격동시키사(1)’
혹시 삶의 자리에서 이런 표현을 들어보셨거나 사용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무엘서의 마지막 장인 오늘 본문은 이처럼 격한 표현으로 시작됩니다.
인구 조사 명령(1-3)
(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1절을 상반절과 하반절로 구분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절 상반절입니다.
(1 상반절)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하셨습니다. ‘진노하사’로 번역된 원어(원형 חרה, 하라)는 ‘불이 붙다’, ‘타오르다’라는 뜻입니다. 원어 성경에는 이 용어가 신체의 일부인 코를 가리키는 원어(אפ, 아프)와 함께 사용되어, 코에서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며 크게 노를 발하는 모습으로 생동감 있게 묘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상은 이스라엘로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그러나 그 원인,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본문의 앞뒤를 샅샅이 살펴보아도 확인되지가 않습니다.
제한된 지면으로 인해 모든 내용을 다 담아 낼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꼽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특정 내용을 기록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내용이 하나같이 중요하다고 한다면 이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를 남겨두고 전체 내용을 생략하기도 합니다. 본 절은 후자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단회적 특정 사건이 원인이 아닌, 특정 사건의 연속(반복)이 그 이유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단서가 되는 것이 본절에 기록된 ‘다시’라는 용어입니다.
(1 상반절)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기자는 ‘다시’라는 용어를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해 줍니다. 동시에 이전의 사건을 통해 그 이유를 확인해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모바일이나 인터넷 성경의 검색창에 진노를 키워드로 넣어보면 200여 개가 넘는 구절이 확인됩니다. 그중에 몇개의 구절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출 32:9-1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세가 시내 산 위에 있을 때, 산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그 앞에 재단 쌓아 제사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이들을 가리켜 부패하였다고(출 32:7),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며, 그들에게 진노하셨음을 밝히셨습니다.
(레 20:6)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음란하게 따르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민 25: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수 23:16) 만일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하리라 하니라
과거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던 사건을 되돌아보면 그 원인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통지하던 당시 이스라엘도 과거 이스라엘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임을 본문을 통해 가늠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저희 삶의 자리는 어떻습니까?
교묘하게 모양을 바꾼 불신앙, 세속의 우상을 쫓고 있으면서도 전혀 알라차리지도 못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알게 모르게 이와 같은 모습이 저희 안에 있지는 않은지 꼭 한번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곧장 그 결과(재앙, 심판 등)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1절 하반절부터 9절까지는 그 사이의 과정을 소개합니다. 1절 하반절입니다.
(1 하반절)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을 격동시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격동시키사’를 새번역(성경)에서는 ‘부추기셨다’로, 개역한글에서는 ‘감동시키사’로, 공동번역에서는 ‘품게 하셨다’로 기록되었습니다. 본문의 표현대로 격동된 다윗이 곧장 명한 것은 인구 조사였습니다.
인구 조사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전시 상황에서는 징집이고, 평시 상황에서는 조세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에게 인구 조사는 언제나 달가울 일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다윗이 인구 조사를 명한 목적은 무엇이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당시는 이스라엘은 타민족과 전쟁 중이 아니었습니다. 징집에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조세에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 되는데, 이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주변국들을 정복하고 그들로부터 충분한 조공을 받아 누리며 충분히 부한 상태였습니다.
(삼하 8:6) 다윗이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그렇다면 다윗은 어떤 목적으로 인구 조사를 명한 것이었는지 더욱 궁금해집니다. 본문에는 다윗의 속마음이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구 조사의 결과를 보고 받는 장면인 본문 마지막 절을 통해 저희는 그의 속마음을 살포시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9)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언뜻 보면 특별할 게 없어 보이지만, 여기에는 주목할 만한 표현이 담겨있습니다. 바로 ‘칼을 빼는 담대한 자’로 보고되는 부분입니다. 물론 이 표현이 여기에서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구 조사에 있어 ‘장정’(출 12:37)이라는 표현이 두루 사용되었음을 고려해 본다면, 여기에 사용된 ‘칼을 빼는 담대한 자’라는 표현은 조금 특별해 보입니다.
해마다 뉴스를 통해 인접국의 열병식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마침 지난 9월 26일(화) 건군 제75주년 국군의 날(10/1)을 기념해 우리나라에서도 10년 만에 숭례문 일대에서 열병식이 다시 열렸었다고 합니다. 막강한 화력을 지닌 최신식의 무기들과 질서정연한 군인들의 행진이 주를 이루는 이 행사의 목적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다음은 백과사전에 기록된 열병식의 목적입니다.
‘오늘날의 열병식은 전쟁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국내외에 자국의 군사력 및 군대를 과시하고 홍보하는 용도에 쓰인다.’
다윗이 인구 조사를 명한 것은, 요압을 통해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의 수를 파악해 전달받은 목적은 어쩌면 왕으로 자신을 과시하었던 그의 교만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주저 없이 명을 내리는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기록되었습니다.
(2) 이에 왕이 그 곁에 있는 군사령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이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백성의 수를 내게 보고하라 하니
다윗은 곧장 최측근이었던 군대 장관 요압에게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인구 조사를 명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는 이스라엘 전역을 일컫는 관용어구입니다.
당시 인구 조사는 여성과 노인, 어린이를 제외한 성인 남자만을 그 대상으로 했습니다. 모세 역시 과거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남자만을 그 대상으로 인구를 조사했습니다(민 1:3).
그의 명을 받은 요압의 대답은 짧지 않았습니다.
(3) 요압이 왕께 아뢰되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오래전부터 다윗의 마음을 꿰뚫고 있던 요압은 이 일이 적절치 않음을 조심스레 간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도구가 되어버린, 격동된 다윗의 귀에는 그의 말이 똑똑히 들릴 리가 없었습니다. 다윗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인구 조사 실시(5-9)
(4-5) 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 사령관들을 재촉한지라 요압과 사령관들이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려고 왕 앞에서 물러나 요단을 건너 갓 골짜기 가운데 성읍 아로엘 오른쪽 곧 야셀 맞은쪽에 이르러 장막을 치고
요압과 군 지휘관들을 인구 조사를 재촉하는 왕의 명령에 따라, 왕궁에서 나와 요단을 건너 갓 골짜기 한가운데 있는 성 남쪽의 아로엘 부근에 장막을 쳤습니다. 이렇게 요단 동편에서부터 인구 조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6-7) 길르앗에 이르고 닷딤홋시 땅에 이르고 또 다냐안에 이르러서는 시돈으로 돌아 두로 견고한 성에 이르고 히위 사람과 가나안 사람의 모든 성읍에 이르고 유다 남쪽으로 나와 브엘세바에 이르니라
요단 동편에서부터 시작된 인구 조사는 북쪽으로 돌아, 왼쪽으로 지중해를 경계로 두고 남쪽으로 이어졌습니다. 반 시계 반향으로 진행된 인구 조사는 이스라엘 최남단 브엘세바에 이르러 끝이 났습니다.
(8-9) 그들 무리가 국내를 두루 돌아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요압은 장장 9개월 20일 동안에 걸쳐 진행된, 이스라엘 전역의 인구 조사 결과를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이스라엘 팔십만, 유다 오십만, 총 일백삼십만 명이었습니다. 이는 가나안 정복 당시 총 육십만 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두 배 이상 늘어난 수치였습니다.
놀랍게도 이를 전달받은 왕 다윗의 반응은 9개월 20일 전과는 달랐습니다. 그의 달라진 모습이 궁금하지만, 오늘 본문은 여기입니다. 그의 달라진 모습은 내일 새벽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9개월 20일.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다윗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대체 무엇이 이전과 다른 모습이 되게 했을지 무척 궁금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확실하게 확인되는 부분은 다윗에게 9개월 20일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저희 모두는 하나님의 선한 통로요 도구로 쓰임 받고 싶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진노에 통로요 도구로 쓰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다윗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나 삶의 자리에서 때때로 격동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즉각적으로 반응(대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몹시 흥분된 감정과 느낌, 충동을 조절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를 소홀히 여기지만, 시간을 갖는 것은 그 자체로 그 어떤 것보다도 적절한 처방이 됩니다.
만약 다윗이 9개월 20일 전 인구 조사를 명하기 전에, 9개월 20일이라는 시간을 가졌더라면, 사무엘서의 마지막 장은 이렇게 시작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워진 자리에서 진노의 도구가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세계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인들 너무 빠르다는 것입니다. 때론 이것이 장점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단점이 되어 돌아올 때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한국 크리스천들 역시 너무 빠릅니다. 기도도 빠릅니다. 기도하며 마음의 평안 얻기를 소망하며 드리는 주님의기도를도 얼마나 빠른지 모릅니다. 마치 패스트푸드를 먹는 것처럼 조급히 주문을 외우듯 해치웁니다. 그리고 난 후에 결코 임할 수 없는 평안을 찾아 두리번거립니다.
하나님께서 또 한 주를 허락하셨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피할 수 없는 어둠과 추위를 피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삶을 멈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둠이 깊어 칠흑 같을 때, 혹독한 추위가 임할 때, 그때야말로 광명한 새벽별이 떠오를 때와 가까운 때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 진노의 통로로서 9개월 20일 중의 한날이 아닌, 은혜의 통로로서 9개월 20일 중의 한날로 가꾸어 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격동이 아닌 평안한 하루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의 왕 다윗, 이스라엘을 향한 진노의 도구가 되어짐을 살피며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봅니다. 하루하루 평안했는지, 격동된 상태로 살고 있지는 않았는지를 돌아 봅니다.
충분한 시간이 그 자체로 귀한 처방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며, 삶의 자리에서 조급하지 않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가 결코 다윗의 9개월 20일과 같은 한날이 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답답하게만 느껴지고, 더없이 외롭게만 느껴지는 오늘이야 말로 광명한 새벽별이 떠오를 때가 더 가까워지고 있는 한날임을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지 헤아려보시겠습니까?
2. 격동되어 주저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던 순간을 돌아보시겠습니까?
3.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각과 감정, 느낌이 이전과 달라진 적이 있다면 당시를 떠올려 보시겠습니까?
4. 오늘 삶의 자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에 가까운지, 진노의 통로에 가까운지 직면해 보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