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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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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이데아님이 시민군 김수영의 증언에 대해 계속 토론하기를 원하시는군요. 그런데, 시민군 김수영은 5월 20일 광주역에서의 계엄군 발포는 없었다는 사실의 현장 증인입니다. 이데아님이 이렇게 주장하셨습니다.
<이때는 이미 공수의 집단발포가 한창 일어나고 있는 중인데, 날아드는 총탄에 맞은채로 황급히 뒤를 따라오면서 총에 맞았다고 호소하는 중이지요.>
아래 시민군 김수영의 증언을 캡쳐해 드립니다.
<캡춰화면>
위에서 보시듯 시민군 김수영이 "광주역에서는 군인들이 쏘는 신호탄이 다다다다 소리와 빨간 불꽃을 내며 날아다녔다. 그런 상황이 밤새 계속되었고 나는 새벽 3시에야 귀가했다"고 증언하네요.
이 증언은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801.html 에 있는데, 제가 위에 캡쳐된 대로 인용해 드립니다.
<<광주역에서는 군인들이 쏘는 신호탄이 다다다다 소리와 빨간 불꽃을 내며 날아다녔다. 그런 상황이 밤새 계속되었고 나는 새벽 3시에야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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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계시는지요?
위 제가 서술한 이때란 21일 도청 앞 집단발포 시점을 말하는 것인데, 김수영님의 20일 밤 광주역과 도청에서 있었던 공포탄 집단발포 및 일부 실탄 발포 상황이 무슨 관계지요?
끝장토론 06에서도 부분적으로 언급하였습니다만, 일단 20일 밤의 상황은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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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5 외곽지역의 군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곳곳에서 발포
- 광주역 쪽에서 군인들이 수백 발 발포.
- 본사에 기사를 송고하고 있을 때 광주역 쪽에서 이날 처음으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수백 발의 총성이 계속 났다. 밖에 뛰쳐나가 보니 그것은 공포탄이 분명했다. 빨간 불덩이가 쉴 새 없이 서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불길한 징조였다.(월간조선, 1985. 7.)
* "공수들이 광주역을 등지고 KBS 방송국 앞까지 진을 치고 있었다. 시민들이 공수를 향해 돌을 던지면 최루탄을 난사해 흩어지게 만들었다. 시위대 중 일부가 동양고속버스 몇 대를 몰고 공수들을 향해 쏟살같이 달려가자 총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공수들이 발포를 한 것이다. 주로 예광탄이 공중으로 날아왔고 주변의 건물에 실탄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구술 : 김한중, 현사연 조사)
* "계엄군이 진을 치고 있던 광주역을 뚫기 위해 시민들과 함께 중앙고속버스터미널로 가서 버스를 탈취했다. 우리가 탄 버스가 KBS 방송국 앞에 갔을 때 계엄군이 버스의 유리창을 깨고 최루탄을 집어던졌다. 최루탄가스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었던 우리는 차를 돌려 외진 곳으로 왔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다시 광주역을 향해 진주하는데 수백 발의 총성이 났다. 총소리에 놀란 우리는 차를 돌려 MBC 방송국 앞으로 갔다. 방송국이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MBC 방송국 옆에 있던 전자제품 대리점에서 각종 물건을 거리로 끌어내놓았다. 미처 꺼내지 못한 제품들을 시민들이 도와 밖으로 꺼내고 있었다. 광주시민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구술 : 김광호, 현사연 조사)
* "광주역에서 데모하는 모양이니 나갔다오겠다며 밤 10시경에 집을 나간 남편이 밤새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이 집을 나간 후부터 광주역 부근에서 계속 총소리가 들렸으나 설마 무슨 일이 있겠나 싶어 새벽녘에 설풋 잠이 들었다. 전화벨 소리에 놀라 깨어보니 새벽 5시였다. 남편이 광주역에서 총에 맞아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 병원에 있다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가서 보니 남편의 가슴에 총구멍이 커다랗게 나 있었다. 같이 있었던 청년들이 남편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자 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남편은 3일 후에 죽었다." (구술 : 정귀군, 현사연 조사)
23:00 도청 앞 발포
- 금남로에서 50여 대의 차량이 파괴 또는 전소됨.
- 도청 앞은 치열한 심야 공방전 계속. 계엄군은 공포를 쏘아대고 공중으로는 위협사격을 하는 기관총의 예광탄 날음. 더 이상 버틸 수 없게된 계엄군은 M16 자동소총 발사. (1980년 민주화운동)
* "MBC 방송국 건물이 불타는 것을 보고 집으로 갔다. 옥상에 올라가보니 MBC 방송국만 불타는 것이 아니라 시내 곳곳에서 불기동이 솟아 있었다. 전남대 부속병원 옥상에서 도청 쪽으로 예광탄이 포물선을 그으면서 날아갔다.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수없이 날아갔다. 그날밤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구술 : 이지형, 현사연 조사)
- 금남로에서 데모 주력 시민들이 강제 진압(군인이 페퍼포그 쏘아)으로 흩어짐.
- 광주시청 앞에서 11시에 사격개시. 1백여 발, 유탄 50여 발은 공중으로 날아가고 나머지는 보이지 않음. (월간조선 1985. 7)
- 시민들 버스 2대, 트럭 5대로 곡괭이, 삽, 쇠파이프, 화염병을 싣고 도청으로 수송. (전교사 작전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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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장토론 06에서 이미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이날 공식 기록으로 13명의 사망자가 나왔으며, 이중 총상으로 사망한 분들만 5분입니다. 님이 20일 사망자는 전경 4분밖에 없었다고 주장하자 반론해드렸던 내용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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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21일 도청 앞 발포
21일 아침 8시경에 광주역에 가보니 군인들은 없었고 뒤집힌 채 부서지고 불탄 차만 8대 있었다. 분수대와 가로수에 부딪힌 차 등은 대부분 일반 트럭과 군인 지프차였다. 곳곳의 전화박스에, '부처님 오신 날 2시 집합'이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도청 앞에는 태극기로 덮인 시체가 리어카에 실려 나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군인이 개머리판으로 때려 죽인 사람'이라 했다. 시위차량을 타고 무등경기장 쪽 롯데제과 앞으로 갔는데, 롯데제과 앞에서 사람들이 문을 열어달라고 웅성웅성하고 있었다. 안에서 나온 사람이 무엇을 요구하느냐고 하여 안에 있는 식품을 다 달라고 30분 정도 실랑이를 벌이자 문을 열어주었다. 안에 있는 빵, 계란, 콜라를 지나가는 차마다 조금씩 분배했다. 계란을 실은 트럭이 있어 차째로 가져가 려 하자 롯데제과 직원이 만류해 계란만 나눠주었다.
금남로로 나가니 시민들이 김밥, 우유, 빵 등을 나눠 먹고 있었다. 나도 광주은행 본점 앞에서 김밥 2개, 우유 1개, 콜라 2개를 내 몫으로 받아 먹고 전일빌딩 앞으로 가다 삼촌을 만났다. 삼촌은 나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며 야단을 치셨다.
당시 공수부대가 도청 안에 있었는데, 시민들이 계속 밀고 들어와 나와 삼촌은 떼밀리다시피 해 도청 앞까지 가게 됐다. 갑자기 총소리가 났다.
"공포다."
누군가 외쳤다. 까닭을 모르는 뒷시위대열은 자꾸만 앞으로 밀려왔다. 삼촌과 나는 앞사람을 꼭 붙잡고 미문화원 쪽으로 빠지는데 뒤에 따라오던 청년 한 명이 소리쳤다. >>
위 증언에서 보시듯 힌츠페터는 5.18사기꾼들에게 속았음이 확인되는데요. 힌츠페터는 20일 밤 광주역에서 총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5.18사기꾼들에게 속았거나 가스탄 소리와 혼동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들은 소리는 시민군 김수영이 증언하는 대로 신호탄, 좀 더 정확히 말해 가스탄 발사소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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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이 시점에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었습니다만, 님 까페 회원분이 제가 웃음소리를 쓴 것에 대해 매우 불쾌해하시기에 삼가하겠습니다.
제가 왜 웃었는지는 아시겠지요? 설명은 저 위에 있으니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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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롯데제과 앞에서 사람들이 문을 열어달라고 웅성웅성하고 있었다. 안에서 나온 사람이 무엇을 요구하느냐고 하여 안에 있는 식품을 다 달라고 30분 정도 실랑이를 벌이자 문을 열어주었다. 안에 있는 빵, 계란, 콜라를 지나가는 차마다 조금씩 분배했다. 계란을 실은 트럭이 있어 차째로 가져가려 하자 롯데제과 직원이 만류해 계란만 나눠주었다.> 이 단락을 유의해 읽어 보셨나요? 오전 11시부터의 시위대 식사는 이렇케 강도짓하여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식품을 실은 차까지 통째로 가져가려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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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또 웃었습니다.
이젠 별걸 다 트집 잡으시는군요. 아! 물론 위의 행위가 잘한 짓이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이미 끝장토론 10에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시위대에게 밥을 지어주던 사실까지 제시했는데도...
힌츠페터님 영상 중 님이 과감하게 삭제해버린 장면들 중에는 시민들이 지나가는 시위대에게 먹을 것을 준비해서 나눠주는 장면들도 나온 답니다.
이건 여담이지만, 광주시민들이 불같이 화끈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정도 많고 인심도 후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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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그리고 이데아님이 반복하여 사용하는 집단발포라는 용어에 관하여, 만약 집단발포라는 것이 있었다면 어떻게 도청 앞에 있었던 시민군 김수영이 모를 리 있었겠습니까? 시민군/시위대 사이에 금방 소문이 퍼졌을 것입니다. 집단 발포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저격병이 있었다면 어째서 도청 앞 시민군이 목격하지 못했단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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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참... 님은 모든 해석을 님의 입맛에 맞는 단편적인 사실에만 의존하여 이끌어가시니...
제가 지금까지 제시해드린 수없이 많은 기록들에서도 도청 앞 집단발포 상황은 수 없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 상황을 설명하면서 아래와 같은 기록을 끝장토론 08에서 제시해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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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5
- 도청 앞 YMCA 앞에서 군이 난사하여 수십 명 사망.
- 동시에 '탕, 탕' 군중들을 향해 수없는 총탄이 퍼부어졌다. 처음에는 공포탄 인 듯했다. 우리 팀은 합의한 듯 책상 밑으로 엎드렸다. 시위대는 순식간에 골목과 빌딩으로 몸을 숨겼다. 총소리를 제외하고 시내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우리는 완전히 지사에 갇히게 됐다. 시간이 흘렀다. 사무실 캐비닛에 기대어 도청 쪽을 바라보았다. 일단의 군인들이 분수대 앞에 횡으로 앉아 금남로쪽을 향해 거총자세로 버티고 있었다. (월간조선, 1985. 7)
12:58
* "소방서 부근에 있는데 도청 쪽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나는 전남여고를 거쳐 노동청 앞으로 갔다. 도로를 꽉 메운 시민들이 '김대중을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한동안 구호를 외치자 총소리가 들렸다. 주위에 다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공포탄이다' 하고 소리쳤다. 골목으로 피했던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그 순간 수천 발의 총소리가 났다. 그때 교련복을 입은 학생 한 명이 배를 움켜잡고 고꾸라졌다. 그것을 본 나는 온몸에 소름이 끼쳐 바닥에 엎드린 채 골목을 향해 기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엉덩이에 총을 맞았다. 다음 순간 세 명의 시민이 공수가 쏜 총에 맞고 쓰러졌다." (구술 : 이대성, 현사연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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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끝장토론 08에서 제시해드렸을때 안읽어 보셨습니까? 저는 소중하고 아까운 시간을 기꺼이 들여, 님의 글도 주소 제시해주신 것까지 모두 꼼꼼히 읽어보고 나서야 반론글을 쓴답니다.
김수영님의 수기 중, [갑자기 총소리가 났다. "공포다." 누군가 외쳤다.]
월간조선 1985년 7월호 중 [동시에 '탕, 탕' 군중들을 향해 수없는 총탄이 퍼부어졌다. 처음에는 공포탄 인 듯했다.]
현대사연구소 조사 이대성님의 구술 중 [한동안 구호를 외치자 총소리가 들렸다. 주위에 다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공포탄이다' 하고 소리쳤다.]
일치 합니까? 일치 안합니까?
김수영님의 수기 중, [까닭을 모르는 뒷시위대열은 자꾸만 앞으로 밀려왔다. 삼촌과 나는 앞사람을 꼭 붙잡고 미문화원 쪽으로 빠지는데 뒤에 따라오던 청년 한 명이 소리쳤다. "아저씨 아저씨, 나 총 맞았어요."]
월간조선 1985년 7월호 중 [시위대는 순식간에 골목과 빌딩으로 몸을 숨겼다. 총소리를 제외하고 시내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우리는 완전히 지사에 갇히게 됐다. 시간이 흘렀다. 사무실 캐비닛에 기대어 도청 쪽을 바라보았다. 일단의 군인들이 분수대 앞에 횡으로 앉아 금남로쪽을 향해 거총자세로 버티고 있었다.]
현대사연구소 조사 이대성님의 구술 중 [골목으로 피했던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그 순간 수천 발의 총소리가 났다. 그때 교련복을 입은 학생 한 명이 배를 움켜잡고 고꾸라졌다. 그것을 본 나는 온몸에 소름이 끼쳐 바닥에 엎드린 채 골목을 향해 기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엉덩이에 총을 맞았다. 다음 순간 세 명의 시민이 공수가 쏜 총에 맞고 쓰러졌다."]
일치 합니까? 일치 안합니까?
한두번도 아니고 같은 설명을 계속 반복하는 것도 매우 피곤한 일이니 더이상의 재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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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이데아님이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계엄군 저격병의 저격이 시작되었다고하니"라고 하셨는데요. 요즘난독증이 있으신가요? 시민군 이용일은 가톨틱센터 옥상에서 총알이 날아왔다고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가톨틱센터는 시민군 점령 지역이었습니다. 가톨틱센터 옥상 저격병은 시민군 저격병이었어요. 계엄군은 이미 그 전날 7시 30분에 도청 앞 분수대가 최후 저지선이었습니다. 그 이상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게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가톨틱센터 옥상은 시민군 점령 지역이었다는 것은 여러 시민군 증언으로도 입증되므로 님 편에서 반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 님이 가톨틱센터 옥상에 있던 시민군을 저격병이라 부르시면 그는 시민군 저격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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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난독증이요?
참... 설마 님이 제시하셨던 글을 정작 님은 읽어보지도 않고 저에게 제시했다는 주장은 아니겠지요?
님이 제시하셨던 글을 저는 다 읽어보았답니다. 님이 [...옥상을 향해서 쏘았다.]에서부터 삭제해버린 글까지 모두 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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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갑자기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바로 내 옆사람이 총알에 맞아 쓰러졌다. 사람들은 충장로파출소와 현대예식장 쪽으로 나뉘어 모두 흩어졌다.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은 아예 밟혀버렸다. 잠시 후 사람들은 다시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또 어떤 사람이 장갑차를 타고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러닝셔츠만 입고 머리에는 흰 띠를 두르고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그는 장갑차의 뚜껑을 열고 상체를 위로 내놓고 서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총을 한 자루 던져주었는데 그는 필요없다며 받지 않았다. 그 장갑차는 얼마쯤 앞으로 나가는 듯싶었다. 그러나 도청 쪽에서 저격병이 쏜 총에 목을 맞고 쓰러졌다.
그외에도 몇 대의 차가 도청을 향해서 나가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 차 뒤에는 몇몇 사람들이 낮은 포복자세로 따라갔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총을 배급받은 사람들은 총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들었다. 한편 사람들은 낮게 떠다니는 헬기를 맞추겠다고 하늘을 향해서 공포를 쏘기도 했다. 나도 총을 받았다. 비록 그 이전에는 쏘아본 적도 없고 만져본 적도 없지만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이 가르쳐 준 대로 폼을 잡고 가톨릭센타 옥상을 향해서 쏘았다. 여기에는 군인들이 건물 중심부 쪽 약간 올라온 곳에 철모만 덮어놓고 왔다갔다 하면서 이곳의 동정을 저쪽에다 알려주는 듯싶었다. 하지만 내가 쏜 총은 그 반동 때문에 울려서 상체가 뒤로 젖혀졌고, 가톨릭센터 건물의 꼭대기를 빗맞고 나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총알 흔적이 남아 있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광주은행 새 건물의 옥상과 12층에서도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민들은 저놈들도 연락병일 것이니까 다 죽여버리고 저 건물을 태워버리자고 했다. 그러나 나이 든 어른들이 이번에 지은 새 건물인데 태우지 말자며 자제할 것을 당부하였다.
도로에는 차들이 불에 타고 있고 소방차 한 대는 나무를 들이받고 인도로 박혀 있었다. 밀고 밀리는 상황은 아수라장 같았다. 나는 겁이 덜컥 났다. 전쟁이 일어나면 꼭 이렇겠다 싶어서 무섭기도 했다. 그래서 총을 다시 갖다주고 다른 곳을 구경했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몰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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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저에게 난독증이 있냐고 따지시면서까지 오리발을 내미시다니... 그러면서, 가톨릭센터가 아직은 있지도 않은 시민군의 점령지역이었다는 둥, 저격병이 시민군이었다는 둥... 참... 할 말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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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그리고, 탈북군인들이 증언하는 자폭정신 구호 말인데요. 님이 이렇게 주장하셨습니다.
<또, 님은 그 개도 웃을 흑색선전 삐라에 [최후의 1인까지 투쟁하라!]라고 써있다는 것을 빌미로, 힌츠페터님 영상에서 나오는 [우리를 죽여라. 싸우다 모두 죽자.]라는 말이 오역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당시 수많은 시민들의 죽음에 분노한 시위대가, 어차피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죽임을 당하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는 단호한 결의에서 나온 말이지, 님의 상상속에서나 존재하는 북괴특수부대의 자살특공 구호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아래의 삐라가 살포되었던 5월 21일 오전 10시 30분경의 시점에서는 군경의 사망자 수가 시민군 사망자 수보다 몇 배 더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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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끝장토론 09에서는 10시라고 주장하시더니 이번에는 또 10시 30분입니까? 그래 10시건 10시 30분이건 그 시간은 또 어디서 가져오신 것이지요?
그 삐라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내용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이 앞전 끝장토론 10 뿐만 아니라 그전의 토론에서도 충분히 여러번 설명을 했습니다만...
그리고 오전 10시 30분경 시점에는 군경 사망자가 시민 사망자 보다 몇 배 많았다??
5.18 유족회 공식기록으로 18일부터 20일까지만 시민측이 총 17분(17일 전북대에서의 고 이세종님을 제외했을 경우) 사망하셨고, 군경 사망자는 20일 저녁 전경 4분이 사망하셨습니다.
시민측은 18일 타박상(곤봉에 의한 전신구타)으로 1분, 19일 타박상으로 2분, 자상(대검에 의한)으로 1분, 20일 타박상으로 6분, 자상으로 2분, 총상으로 5분이며, 군경은 버스에 치여 전경 4분이 사망하셨습니다.
시민측 희생자가 군경 측 희생자보다 벌써 4배가 더 되는군요.
또한 21일 이날에는 시민측 희생자가 총 60명이 나왔고, 군경 사망자가 총 2분이 나왔습니다.
시민측은 타박상 7명, 자상 1명 총 52명이고, 군경은 계엄군이 21일 철수작전 중 2분이 사망하셨습니다.
즉, 18일부터 21일까지만 시민측이 총77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군경측이 총 6분이 나왔습니다.
이때까지만도 시민측 사망자가 무려 13배에 이르는군요.
제가 역사학도님이 쏟아내는 즉흥적인 거짓말들에 분노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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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여기서 이데아님은 위 삐라는 오후 1시 이후에 제작되었을 것이라는 억지 주장까지 하셨는데요. 위 삐라가 살포되기 하루 전에 이미 아래의 삐라가 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광주사태 때 침투했던 북한군의 자폭정신을 연상시키는 구호, "아! 형제여! 싸우다 죽자!"가 이미 나타납니다.
지금 5.18단체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 하는 이 삐라 전문은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07.html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5월 20일에 무기를 탈취하였다는 주장에 관한 한 이 삐라의 내용은 사실입니다. 시민군이 5월 20일 이미 무기를 탈취하였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으로 확인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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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억지라고요?
이 앞의 끝장토론 10은 물론, 님이 그 삐라를 제시할때마다 매번 설명드렸다시피, 시위대가 실제로 무기를 입수한 파출소도 아니요 예비군무기고도 아닌, 계엄군의 총 본진인 상무대에서 무기를 탈취했다는 얼토당토 않은 주장만으로도, 그 삐라는 흑색선전임을 스스로가 명백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삐라에 그나마 조금이라도 신빙성이 있다면, 20일과 21일 양일 동안의 발포 상황을 서술하는 대목 뿐입니다.
20일자는 [놈들의 발포가 시작되었다.]라며 20일 밤을 설명하고 있고, 21일자는 [놈들은 무차별 발포를 시작하였다!]라며 21일 1시경부터의 도청 앞 집단발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만 나왔다면 그나마 신빙성이 있었지만, 도저히 무기탈취가 불가능하며 실제로도 탈취된 적이 없는 상무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했다는 주장만으로도, 그 삐라는 흑색선전물임이 여실히 드러나버립니다.
또한, 님은 시위대가 5월 20일 무기를 탈취하였다는 여러 기록이 있다고 주장하셨는데, 그런 기록이라곤 20일 밤 11시에서 12시 사이에 광주세무서에서 그랬다는 것과, 아울러 21일 오전 11시에서 12시 사이에 나주 금성파출소에서도 그랬다는 주장이, 바로 님이 제시한 5공 청문회 동영상에서 나왔으며, 또한 그 기록이 다름 아닌 5공 청문회를 앞두고 급조하여 제출된 자료라는 것도 나옵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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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복증인(당시 31사단 작전참모보좌관)=5월20일 23시부터 5월 21일 0시 사이에 광주 세무서 무기고가 피탈돼서 칼빈 17정이 탈취당한 사실이 있는데 거기에도 탄약을 탈취당한 근거는 없습니다.
다음 5월 21일 11시에서 12사이에 나주 금성파출소에서 대량의 무기와 탄약이 탈취 당했습니다. 이런것을 근거로 해서 볼때 광주시민인 총기를 휴대한것은 5월 20일 23시 이후, 탄약을 휴대한것은 21일 11시이후라고 판단을 합니다.
조홍규의원=나주금성파출소 관련 문서에 언제 작성된것이지요.
임정복증인=88년 7월 23일 입니다.
이해창의원=국방부에서 제출된자료를 보면 나주 금성파출소가 공격받은것은 21일 오후 3시 30분으로 돼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국방부가 다시 (8년후,청문회가 시작되기 직전에)내무부에다 조사를 의뢰해서 11시에 피탈됐다는 자료를 만들어서 이자리에서 공개 했습니다. 바로 이런 현상을 보면서 정부의 의도가 무엇인지 국민들이 충분히 판단할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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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88년 7월 23일에 5공 청문회를 앞두고 급조한 문건임이 당시에 곧바로 탄로났다는 말입니다.
그나마 광주세무서는 20일 자정을 넘어 총기탈취는 아니더라도 방화된 사실이라도 있지만, 나주 금성 파출소는 아애 21일 11시에서 12시 사이에 시위대의 공격을 받은 사실 마저도 없습니다.
나주 금성 파출소가 공격 받은 것은 21일 오후 3시 30분 즉, 도청 앞 집단발포로 부터 2시간 반이나 지난 시간이었지요.
한마디로 군부가 집단발포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꾸며낸 자료였다는 말입니다. 조작이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또한, 심지어 시위대 조기무장을 주장하는 김영택 기자마저도, [... 광주세무서 지하에서 총을 뺐겼다는 기록이, 나중에 나와서 저는 나중에 알았습니다마는... 뺐겼다고오...... 하는 사실이 나옵니다마는...]하면서 상당히 의아해 하면서 증언을 이어가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마저도 그 흑색선전물이 주장하는 상무대에서 무기를 탈취 당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즉, 그 삐라는 그저 흑색선전물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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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이데아님의 반론(끝장토론 10 이데아)의 결론을 여기 인용합니다:
<이상으로 위 증언자 일행이 1시경 도청 앞 집단발포가 시작되기 전후에 3~4명의 수상한 복면남자들로 부터 총기를 지급받았으나, 곧바로 미리 대기하고 있던 가톨릭센터 옥상의 저격병으로 부터 총격을 받았으며, 이외의 나머지 시위대는 도청 앞 집단발포 이후인 1시 30분경 부터 각지로 흩어져 무기를 구해와 본격적인 무장을 시작했으며>
여기서 님과 저는 21일 오후 1시 이전에 이미 시민군 총기 지급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저격병이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는 객관적인 사실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에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계엄군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가정이 불가능하니까요. 그들은 분명히 시민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시민군이 시민군을 향하여 발포하였음을 확인하여 줍니다. 탈북군인들의 사건 서술과 시민군들의 사건 서술의 일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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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무장시점이야 그 증언자의 수기를 곧이곧데로 믿었을때 그렇다는 것입니다만, 저격병은 위에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가 주장하는 것도 아닌, 님이 제시한 증언자 스스로의 원문에서 계엄군이었음을 증언하고 있고요.
복면부대의 정체가 수상하다는 것만큼은, 김영택 기자님이나 저나 님이나 이미 공감하고 있는 부분이고요. 다만, 김영택 기자님과 저는 그것을 신군부의 프락치로 의심하고 있으며, 님은 쌩뚱맞은 북괴특수부대로 의심하고 있지요. 탈북 군인들의 서술이야 님과 같은 분들이 미리 입을 맞췄을테니 뻔한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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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이어 이데아님은 시위대의 무기탈취조 출발 시점은 오후 1시 30분경부터라고 주장하셨는데요. 시민군 김행주는 이미 그전부터 무기가 도청광장으로 도착하고 있었음을 이렇게 명확하게 증언합니다.
<<몇몇 사람이 카빈 두세 정을 갖고 있었지만 총알이 없어 사용을 못하고 있었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목포, 화순, 나주 쪽으로 총을 가지러 갔으니 금방 온다고도 하고 또 뒤쪽에서, "총이 오고 있다. 화순에서 총이 왔다."는 말도 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차로 도청을 밀어버리자. 차를 타고 진군하자"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시위대열 안에서 장갑차 한 대가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이 증언은 http://altair.chonnam.ac.kr/~cnu518/zb41pl7/bbs/view.php?id=ja_03&page=5&sn1=&diu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18 에서 자세히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시민군 장갑차가 도청을 향해 돌격하기 이전에 무기탈취조가 출발해 있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확인이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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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그 증언록 원문을 보니 이렇게 되어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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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장갑차에 탄 청년의 처절한 죽음
5월 21일 아침에 MBC 방송국이 불에 탔다는 소문으로 동네가 술렁거렸다. 그날도 집에서는 못 나가게 했으나 혈기왕성한 나이에 가만히 집에 앉을 수가 없었다.
아침 10시쯤 집에서 나왔다. 도청 근방으로는 가볼 수가 없어서 유동 쪽 금남로로 나갔다. 거기서 시위대 차로 변한 트럭에 탑승하여 돌아다녔다.
점심 때가 지나 가톨릭센터 앞서에는 엄청난 시위군중이 도청을 향해 진군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도청은 막강한 요새처럼 보였지만 곧 탈환될 것 같았다. 사람들은 공수부대의 만행에 치를 떨고 있었고 그들을 광주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마음이 되어 있었다. 대열은 도청에서 공수들이 막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가톨릭센터타 앞부터 금남로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사람들은 시위대 차가 오면 길을 터주었다. 나는 시위대 차를 타고 왔다가 계엄군의 발포 때문에 차가 앞으로 못 나가자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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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위대 차를 타고 왔다가 계엄군의 발포 때문에 차가 앞으로 못 나가자 내렸다.] 즉, 이미 계엄군의 발포가 시작되었군요.
참고로 당시 도청 앞에 30만명 이상의 군중이 모였는데, 모두가 구호를 복창하는 그 시끄러운 속에서 앞대열에 있지 않으면 도청 바로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까지는 앞으로 전진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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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시민들 사이에는 별말이 다 떠돌았다.
"계엄군이 변장하고 시민군들 사이에 끼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다닌다. 현혹되지 말아라."
또 계엄군들의 무자비한 만행에 대해서도 많은 말이 돌았다. 어떤 얘기가 신빙성이 있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했지만 그런 말들이 시민들의 군인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이미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시체를 보고서도 대해 사람들이 시큰둥할 정도였다. 시민들은 유언비어에 현혹되어 그 자리에 그렇게 모인 것이 아니었다. 이미 자기 눈으로 모든 것을 확인한 뒤였다.
시민들은 죽어도 도청을 계엄군의 손에서 빼앗아야 한다는 각오와 결의에 차 있었다. 계속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훌라송을 불렀다. 나는 그때 전두환이 누군지는 몰랐지만, 그가 물러나면 이런 피비린내 나는 일이 끝날 것 같은 생각에 악을 쓰고 구호를 목청껏 외쳤다.
시위대열로는 계속 먹을 것을 든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지게에 먹을 것을 지고 오는 사람, 리어커에 싣고 오는 사람들까지 가지각색이었다. 사람들은 손에 꼭 각목을 들거나 돌을 들고 계엄군에게 대항하여 싸우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시위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광주시민 모두가 마음은 무장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 시민군에게는 총이 없었다. 몇몇 사람이 카빈 두세 정을 갖고 있었지만 총알이 없어 사용을 못하고 있었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목포, 화순, 나주 쪽으로 총을 가지러 갔으니 금방 온다고도 하고 또 뒤쪽에서, "총이 오고 있다. 화순에서 총이 왔다."는 말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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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시민군에게는 총이 없었다. 몇몇 사람이 카빈 두세 정을 갖고 있었지만 총알이 없어 사용을 못하고 있었다.]
어느 시점인지는 설명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계엄군의 발포가 시작된지 좀 됬고, 당시 시위대는 총이 없었지만, 우리가 수상히 여기는 카빈 총 가진 두세명은 있었다는 군요.
다른 역사적 증거들과 일치하게, 계엄군의 발포 시점이 1시경이고, 사람들이 화순, 나주 등으로 흩어지기 시작한 시점이 1시 30분 경이니 딱 맞아 떨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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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사람들이 "차로 도청을 밀어버리자. 차를 타고 진군하자"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시위대열 안에서 장갑차 한 대가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그때가 오후 2시경이었다. 그 장갑차는 위 뚜껑을 열고 그곳에 태극기를 든 사람이 노래를 부르며 타고 있었다. 이 장갑차가 도청 앞 광장을 한바퀴 돌고 왔는데 분수대 쯤에서 M16이 불을 뿜었다. 총을 맞고 그 차가 내 앞에 와서 섰다.
M16 총알은 그 사람의 귀밑을 맞혔다. 턱이 완전히 처지면서 두개로 나뉘어져 버렸다. 그 사람은 장갑차 위 구멍에서 팔을 뒤로 하고 처져 있었는데, 위턱부터는 완전히 뒤로 제쳐져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나는 순간 아찔해져서 뒤로 몇 걸음을 물렀다.
지금까지 트럭이나 리어커에 싣고 다니던 시체들은 피가 말라 있었고 시체가 굳어 있어 실감이 덜 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내 앞에서 사람이 죽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구토가 치밀어오르며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 뒤로 피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생겼다. 피를 흘리지 않고 죽은 사람은 행복한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피만 보아도 죽음이 생각나고 무서워졌다.
그때의 심정을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점심때가 지나 배가 고팠던 때였는데도 전혀 식욕을 느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김밥을 먹으라고 하도 권해 어쩔 수 없이 몇 입 우겨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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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 2시라는데요? 이거 어떻게 된 걸까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각지로 흩어지기 시작한 1시 30분경 이후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아마도 증언자가 당시 경황이 없어 장갑차의 돌진 시점과 사람들이 각지로 총을 가지러 흩어진 시점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지요?
역사적 증거들도 그 장갑차의 태극기 흔드는 청년이 저격되고 난 시점부터 각지로 흩어져 총기를 구해오게 됩니다.
자! 수고하셨습니다만, 님이 제시한 이 증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제 서서히 인내심에 한계가 오기 시작하는군요.
역사학도님! 어디까지 하실 셈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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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데아님~! 제가 댓글달 위치가 아니라는 것 잘 압니다..님이 토론하면서 웃는 표현을 두고 님께선 제가 매우 불쾌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많은 분들이 보는 공간에서 역사학도님과 1 :1 토론하고 계시는데 있어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것 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사이버 공간이다보니, 글 하나하나가 때론 자신의 의도와 달리 상대에겐 굴절되어 오해 소지가 염려되서 한 말이였습니다..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