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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회개와 재앙
삼하 24:10-17
10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11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12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를 위하여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
13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아뢰어 이르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은 왕이 왕의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은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무엇을 대답하게 하소서 하는지라
14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5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
16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
17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삼하 24:10-17 / [하나님의 형벌] 그러나 다윗도 이렇게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한 다음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다윗은 명백한 이유를 알지도 못하고 괴로운 심정에서 기도를 드렸다. `여호와여, 제가 아주 큰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옳지 못한 일을 저질렀으나 이런 허물을 용서해 주소서! 제가 아주 생각 없이 행동하여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11) 다윗이 다음날 아침 일어났을 때 다윗의 참모로 일하던 예언자 갓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내렸다. 12) `너는 날이 밝는 대로 다윗에게 가서 내 말을 이렇게 전하여라. `내가 네게 내릴 세 가지 재앙을 제시하겠으니, 너는 그 중에서 한 가지를 골라라! 그러면 내가 그 재앙을 네게 내리겠다!' 13) 갓이 왕을 찾아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그 세 가지 재앙을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물으셨습니다. `내가 네 나라에 삼년 동안 흉년을 내리기 원하느냐? 네 목숨을 노리고 쫓아다니는 원수들을 피하여 삼 개월 동안 도망을 다니겠느냐? 네 나라에 삼일 동안 전염병이 퍼지게 하겠느냐?' 이제 임금님께서는 잘 생각해 보시고 제가 여호와께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를 알려 주십시오.' 14) 그 세 가지 재앙이 비록 기간은 점점 짧아져 가도 그 내용은 점점 더 강해졌기 때문에 결국 세 형벌의 비중은 똑같이 무서운 것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갓에게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말하였다. `내가 정말 선택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소!'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벌을 받아도 여호와의 벌을 받는 편이 낫다는 대답을 찾아냈다. `이왕에 피할 수 없는 벌을 받는다면 차라리 여호와의 손에 매를 맞겠소! 내가 어찌 사람의 손에 빠져서 원수들에게 쫓겨 다닐 수가 있겠소.?' 15) 여호와께서 즉시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염병을 일으키셨다. 바로 그날 아침부터 온 나라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여 여호와께서 정해 놓으신 제 3일의 그 시점에 이르러서는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사는 온 백성이 무려 7만 명이나 죽었다. 그때는 마침 추수하기에 분주한 때였다. 16) 온 나라에 전염병을 퍼뜨리고 다니던 멸망의 천사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 주민들도 쳐죽이려고 손을 뻗치자,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자기의 명령을 집행하던 천사에게 중지 명령을 내리셨다. `이제 그만 두어라! 이만하면 충분하다!' 그러자 여호와의 천사는 가나안 원주민에 속하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서 있었다. 17) 다윗은 전염병으로 온 백성을 쳐죽이는 천사를 보고 여호와께 이런 기도를 드렸다. `여호와여, 죄를 지었어도 저 혼자 지었으며 어리석고 불의한 일을 저질렀어도 저 한사람이 저질렀습니다. 이 백성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이 백성들이야말로 정말 아무런 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벌과 재앙은 저와 제 집안에만 내려 주십시오'
다윗은 자신의 범죄 함을 깨닫고 자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가 갓을 통해 재앙을 내리실 것을 선고하십니다.
다윗의 참회와 선택하는 징계(10-14) 사울과는 달리 다윗을 다윗 되게 한 가장 큰 요인은 다윗의 솔직하고도 겸허한 회개에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있어 인구조사의 약 10개월의 시간은 하나님과 단절된 암흑의 시간이었지만(롬 8:7-8), 요압의 보고를 받은 다윗은 그 마음이 스스로 자책하고 회개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갓을 통해 “7년간의 흉년”, “3개월간 적에게 쫓김”, “전국에 3일간 전염병”이라는 징계 가운데 하나를 다윗으로 하여금 선택하도록 하십니다. 이때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손 가운데 해결 받을 수 있는 “전국에 3일간 전염병”이라는 징계를 선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7년간의 흉년”은 흉작으로 사회를 피폐시키며, “3개월간 적에게 쫓김”은 대적의 손에 죽는 것이며, “전국에 3일간 전염병”은 “불치의 전염병'으로서 고대인들은 이를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결 받을 때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성도는 어느 때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하나님으로만 만족해야 합니다.
네 손을 거두라(15-17) 갓 선지자가 다윗 왕을 방문한 그날 아침부터 이스라엘의 전역을 가리키는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전염병의 징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1)에 진노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무서운 재앙이 맹렬하고도 급속히 이스라엘 전역을 덮게 되자, 죽은 자가 칠만 명이 되어 다윗과 이스라엘은 큰 병력의 손실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실행하는 천사(16)가 더 진행하려 하자 하나님께서는 이 재앙 내림을 뉘우쳐 그 진노의 손길을 멈추시고,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고 천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때 다윗은 자신이 범죄의 주범인 것을 고백하며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징계하되, 아무 죄 없는 백성들은 용서해 줄 것을 간구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회개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참된 회개란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고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까지 책임지려는 자세. 그리고 타인의 허물과 죄악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통회하는 자비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대상 21:16).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심령을 기뻐하십니다(눅 15:10).
적 용 :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의 회개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독일의 작곡가 베토벤은 사랑했던 여인이 떠나고, 난청이 찾아오면서 한때 절망에 빠졌습니다. 현실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서 수사를 찾아가 조언을 간청했고, 수사는 방으로 들어가 나무 상자를 들고 나와 말했습니다. “여기서 유리구슬 하나를 꺼내보게.” 베토벤이 꺼낸 구슬은 검은색이었습니다. 수사는 다시 상자에서 구슬을 하나 꺼내보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베토벤이 꺼낸 구슬은 검은 구슬이었습니다. 그러자 수사가 말했습니다. “이보게, 이 상자 안에는 열 개의 구슬이 들었는데 여덟 개는 검은색이고 나머지 두 개는 흰색이라네. 검은 구슬은 불행과 고통을, 흰 구슬은 행운과 희망을 의미하지. 어떤 사람은 흰 구슬을 먼저 뽑아서 행복과 성공을 빨리 붙잡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자네처럼 연속으로 검은 구슬을 뽑기도 한다네. 중요한 것은 아직 여덟 개의 구슬이 남아 있고, 그 속에 분명 흰 구슬이 있다는 거야.”
호크마 주석
=====24:10
다윗이...그 마음에 자책하고 - 다윗의 만족은 얼마 가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곧 양심의 가책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책하다'(* , 나카)란 말은 '때리다', '치다'란 의미로서, 곧 신앙 양심이 무디어진 마음을 쿵쿵 치는 상태를 가리킨다.
여호와께 아뢰되...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 자신의 행위를 깨닫고 여호와께 진심으로 회개하는 다윗의 겸손한 모습이다. 여기서 '큰 죄'라 함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군사력(힘)을 의지한 그의 자고하고 교만한 생각과 행동이었다.
여호와여...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 사울과는 달리 다윗을 다윗되게 한 가장 큰 요인은 다윗의 솔직하고도 겸허한 '회개'에 있었다. 즉 다윗도 간음, 살인, 교만 등 온갖 죄악을 저질렀으나, 그는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지체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회개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여기서도 다윗은 요압의 보고를 접한 직후에 무디어졌던 양심의 기능이 회복되어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참회의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자신의 죄를 발견하기까지는 약 10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8절). 그는 그 동안 이생의 자랑이라는 편협한 사고에 의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 길이 참으시는 사랑을 보이셨던 것이다(눅 15:17-24). 한편 다윗의 회개는 자신의 실수에 따르는 책임(형벌)을 회피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손길에 자신을 전폭적으로 맡김으로써 이후에 진행되는 모든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적 태도였다.
=====24:11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 이는 다윗이 습관적으로 평소와 같이 일찍 일어났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특별히 다윗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밤새도록 침대 안에서 뜬 눈으로 뒤척이다가 일어났거나(Keil), 또는 밤새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회개한 사실(Lange)을 말해 준다. 따라서 여호와의 선지자 갓(Gad)의 방문은 다윗의 회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자애로운 응답이었다(Smith).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 - 여기서 '선견자'(先見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제'(* )는 '이상을 보다'는 의미의 동사 '하자'(* )에서 파생된 말로서, 이는 하나님의 이상 또는 계시를 받은 자를 의미한다(단 2:26, 41, 43, 45;4:20;7:2). 삼상 9:9 주석 참조. 이러한 선지자 갓은 다윗의 망명 시절에 모압 땅을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갈 것을 다윗에게 권면하기도 하였다(삼상 22:5).
=====24:12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는 '내가 네 위에 세 가지를 두노니'이다. 즉 '보이노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탈 알'(* )은 '~위에 짐을 지우다', '위에 올려 놓다'는 뜻으로(애 3:8), 이는 다윗에게 임한 하나님의무거운 형벌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24:13
칠년 기근 - 병행 구절인 대상 21:12에서는 7년이 3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3년이 보다 정확한 기록인 것 같다(Smith, Fay). 왜냐하면 본 구절에서 갓 선지자를 통해 제시된 재앙들이 모두 3이란 숫자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70인경(LXX)도 이를 3년 기근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한편, 여기에 제시된 세가지 재앙은 하나님의 네 가지 중한 벌(罰)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 네 가지는 기근, 전쟁(칼), 온역, 그리고 사나운 짐승이다(겔 14:21). 이중 두 가지(칼과 기근)는 이미 다윗이 당한 바 있다.
=====24:14
내가 곤경에 있도다 - 여기서 '곤경'에 해당하는 '차라르'(* )는 사방에서 짓누르는 압박감을 뜻한다. 결국 하나님께서 선지자 갓을 통해 다윗에게 제시한 3가지 징벌은 하나 같이 다윗이 자랑하던 이스라엘의 명예와 힘을 꺽어놓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의 선택을 위임받았던 다윗은 결국 하나님의 품보다 더 나은 피난처가 없음을 깨닫고(시 46:1;90:1),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에 의해 시행되는 징벌인 '3일 동안의 온역'을 택하였다. 결국 그는 위임받은 선택권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렸던 것이다. 다윗의 이러한 태도는 (1) 의로우신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며(시 131편), (2)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궁극적으로는 은혜로 귀착된다는 사실을 안 올바른 신지식(新知識)에 따른 결정이었으며(민 6:24-26), (3) 모든 문제의 원천적 해결자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취할 수 있었던 행동이었다(마 11:28).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 '전쟁의 재앙'은 대적의 손에 죽는 것이며, '기근의 재앙'은 흉작을 유발하여 사회를 피폐시킨다. 반면, '온역'(* , 데베르)은 '불치의 전염병'으로서 고대인들은 이를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로 생각하였다(The Interpreter's Bible, Wycliffe Bible Commentary). 다윗은 이 중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로 생각된 온역의 재앙을 택하였다. 이러한 다윗의 선택은 기왕이면 하나님께 직접 매맞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취해진 것 같다. 즉, 다윗은 사악한 인간이나 피폐된 사회에 붙여지기 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형벌을 받는 것이 긍휼하신 여호와의 위로와 자비를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내다보았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재앙을 지혜롭게 받아들이는 다윗의 신앙과 지혜를 엿볼 수 있다.
=====24:15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 '그 아침'이란 갓 선지자가 다윗 왕을 방문한 그날 아침을 가리킨다. 그러나 '정하신 때'는 염병이 시작된 날로부터 3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16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재앙의 시간을 단축시키셨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히브리 원어상 이 말에는 관사가 붙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때는 하나님께서 본래 작정하셨던 바로 '그 때'(만 3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 '정하신 때'(* , 에트 모에드)란 하나님께서 재앙을 맞이하는 다윗의 신앙적 태도를 보시고 그 재앙의 기간을 단축한 그 마지막 때를 의미하는 것이다(Lange).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 이스라엘 전역을 통칭하여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다(20;삿 20:1;삼상 3:20).
죽은 자가 칠만 인이라 - 짧은 기간에 이토록 많은 자가 죽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진노의 무서운 실상을 생생히 보여 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범죄(1절)에 진노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무서운 온역(전염병) 재앙이 맹렬하고도 급속히 이스라엘 전역을 내리 덮은 것이다. 이로써 다윗과 이스라엘은 큰 병력의 손실을 보고 말았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의 힘을 의지하는 자의 그 힘을 현저히 약화시키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똑똑히 발견하게 된다.
=====24:16
천사 - 이 천사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실행하는 '멸하는 천사'(출 12:23)를 가리키는데, 온역 재앙시 이 천사는 다윗에게 가견적(可見的)으로 나타났다(17절). 대상 21:16에서도 다윗이 천지(天地) 사이에 서 있는 천사를 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천사가 가견적 모습으로 나타나 백성을 쳤다는 사실은 이 온역(溫疫) 재앙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심판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Keil, Smith).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 여기서 '뉘우치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함'(* )은 '뜻을 돌이키다'는 뜻으로서(창 6:6;출 32:14;삿 2:18;시 106:45), 이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뜻을 거두셨다는 의미의 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돌이키심은 일차적으로는 다윗의 진실한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다윗과 그 백성을 사랑하신 긍휼과 자비의 성품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하나님의 가변적(可變的) 속성을 반영하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 속성상 전지 전능하신 분으로서 불변성(不變性)을 지닌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유로우시며 초월적인 품격을 지니신 분으로서, 당신의 목적을 수행하실 때 인간과 더불어 섭리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대응 여부에 따라 그 섭리의 방식을 다양하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의인화(擬人化)시켜 신인 동형 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 Anthropomorphism)적으로 묘사할 때,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가변성 품성인양 비쳐질 뿐이다.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 여부스인(the Jebusite)은 예루살렘 성의 원주민이다(5:6-8). 그리고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은 모리아 산 곧 예루살렘 동북편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대하 3:1). 그런데 타작 마당은 추수한 곡물의 겨나 지푸라기 등을 바람에 날려 보내기 위해 일반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Smith). 결국 이곳은 얼마 후 솔로몬 성전의 터가 된다(대하 3:1). 한편 역대상에는 '아라우나'의 이름이 '오르난'으로 기록되어 있다(대상 21:15, 18, 20, 21, 22, 23). 여기서 '아라우나'는 여부스식 표기이며, '오르난'은 히브리식 표기이다(Keil, Ewald, Lange). 그런데 70인역(LXX)에는 일괄적으로 '오르나'(* )로 표기되어 있다.
=====24:17
나는 범죄하였고...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 다윗의 진정한 회개의 기도이다. 히브리어에서 인칭은 동사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보편적인 형태인데, 여기서 다윗은 인칭 대명사 '아노키'(* )를 두번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범죄의 주범임을 거듭 강조하였다. 즉 다윗은 여기서 오직 자기만이 형벌을 받아 마땅한 자라고 고백하면서, 일체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전가시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회개의 참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참된 회개란 (1)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차원을 넘어, 그 범죄로 말미암은 결과에 대해서까지 달게 책임지려는 마음 자세를 갖는 것이며, (2) 타인의 허물과 죄악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통회하는, 긍휼과 자비의 마음 자세를 갖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병행 구절인 대상 21:16을 보면, 다윗은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였다. 이는 다윗이 일국의 왕이라는 처지에 결코 연연치 않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최대한의 겸손과 회개의 모습을 보여드린 것이었다.
< 설 교 >
하나님의 징계
삼하 24:10-17
지난 시간에는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것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얼마 전에 통계청에서 인구조사를 한 적이 있지만 인구를 조사하는 것은 국가 운영 차원에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일을 두고 범죄한 것으로 말합니다. 세상의 시각에서 볼 때는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고 왕으로써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여겨지는 것이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범죄한 것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위치에 있는 신자로서 주지할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의 인구조사가 범죄로 규정되는 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자신이 다스리는 자신의 나라로 바라보는 것에 있습니다. 내 나라이기에 인구를 계수함으로써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범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고 하나님이 책임지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 범죄였던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다윗에게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하나님의 징계의 내용을 다윗더러 선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11-12절을 보면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하셨다 하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선지자 갓을 통하여 하신 말씀은 ‘세가지를 보이노니 그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그 세 가지란 첫째가 이스라엘 땅에 칠년 기근이 있는 것, 둘째는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는 것, 세 번째는 이스라엘 땅에 삼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13절)입니다. 여러분이 다윗이라면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세 가지의 징계를 보면 어느 것 하나도 가볍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 가지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러면 다윗은 선지자 갓의 말에 대해 어떻게 답합니까? 14절을 보면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는 답을 합니다.
다윗의 답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세 개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셨는데,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다윗은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아마 다윗은 징계를 선택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셋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단순히 범죄에 대한 벌이 아닙니다. 징계가 담고 있는 의미는 징계를 통해서 자신의 불의함을 깨닫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이 어떠한가를 알게 하는 데 있습니다. 즉 벌이 아니라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날마다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징계에 담긴 하나님의 이러한 마음을 알았기에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징계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징계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떤 징계가 조금이라도 내게 유리하고 가벼운 것일까?’에 관심을 둘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셋을 주고 계산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가벼운 징계를 고르지 않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볼 때 다윗은 징계를 두고 어느 것이 자신에게 조금 이라도 더 유리한 것인가라는 계산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떤 의미로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한다는 말을 할까요?
먼저 다윗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점을 생각해 보면 다윗이 말하는 여호와의 손에 빠진다는 것은 여호와의 긍휼에 빠지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징계가 어느 것으로 내려지든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에 빠지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에 빠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것과 상관없이 사람의 손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은 징계를 고통의 의미로 바라보기보다는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알고 긍휼에 빠지게 하시는 은총의 시간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라는 말을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기 쉬운 것은 ‘벌’의 개념입니다. 벌이라는 것은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징계에서 고통과 아픔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징계를 받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말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셋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면 ‘하나님 징계를 받지 않을 길은 없습니까? 회개하면 됩니까?’라는 식으로 반응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다윗은 세 번째인 온역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15절의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인이라”는 내용을 보면, 삼일동안의 온역으로 인해 백성이 칠만 명이 죽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징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손에 빠진다는 것은 곧 여호와의 긍휼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삼일 간 온역이 있는 이 징계가 다윗을 하나님의 긍휼로 끌어가는 징계였다는 의미가 됩니다. 어떻게 온역의 징계가 다윗을 여호와의 긍휼耖네 빠지게 하는 징계가 되겠습니까?
다윗의 범죄는 인구조사를 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수의 인구를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삼일의 온역으로 인해 칠 만이라는 많은 수의 백성이 죽습니다. 만약 온역이 삼십일이었다면, 일 년이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윗이 힘으로 여긴 수십만의 백성이 하나님에 의해 죽지 않겠습니까? 결국 온역의 징계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다윗이 계수한 수많은 백성들도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가 여호와께 달린 것이고, 여호와의 긍휼이 그들을 살리고 있는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이 드러납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의 수가 많고 힘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많은 수의 이스라엘(사람이 많다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아니고 심판을 넘어가게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온역의 징계를 통해서 수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가를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깨달음이 오늘 우리들의 속마음 깊이 담겨져야 할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보면서 원하는 것은 많은 교인입니다. 많은 교인을 교회의 힘으로 여기는 것이고, 교회가 크다는 것으로써 그 교회에 다니는 자신의 위상이 높여질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교회가 크다는 것으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교인 수가 많다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넘어가게 하는 힘도 조건도 되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많은 수라 할지라도 한 순간에 하나님이 흩어버릴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 교회로 모이는 신자가 관심을 두어야 할 문제는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7절을 보면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다윗은 칠만 명의 백성을 친 천사를 보고 자신이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모든 죄는 자신에게 있고 백성에게 있는 것이 아니니 자신과 자신의 아비 집을 치기를 원합니다. 결국 다윗은 백성의 죽음을 보면서 모든 죄가 자신에게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고, 자신은 여호와의 징계를 받음이 마땅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칠만 명의 백성은 죄도 없이 애매하게 죽은 것입니까?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이미 진노하셨음을 말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나 다윗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죄는 의지할 것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여기는 착각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와 내 집을 치소서’라는 고백을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고백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일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크게 되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교회 부흥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거짓된 말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이 그 속에 있는가를 보시고 천국으로 이끌어 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징계로 인해 결국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나와 내 집을 치소서라는 고백을 하게 됨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그러한 고백을 하는 자로 만들어 가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됨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 진 사람, 그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겠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끊임없이 징계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죄지었으니 벌 받아라’가 아니라 죄를 알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자기 존재성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보배로운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한 채 자신의 욕망에 빠져서 살아간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도 없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인가도 모른 채 자기 멋대로 하나님의 뜻을 만들어 내면서 자신이 잘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는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과 그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징계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수단이고 도구인 것입니다.
재산목록 1호
삼하 24장 9~17절 / 홍문수목사
우리가 다윗의 일생을 살펴보고 있는데, 오늘로 15번째 시간을 맞이합니다. 이제 다음 주일이면 다윗의 일생 시리즈가 끝나게 됩니다. 성경을 훑어보면 다윗만큼 그 생애 기록이 풍부한 인물이 별로 없습니다. 그 기록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정말 우리 인생에 큰 교훈이 됩니다. 그 모든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려면 아마 1년 52주일은 족히 걸릴 겁니다. 이번 다윗의 일생 시리즈는 그 중에서 정말 중요한 명장면만 뽑아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잘 정리해 두시고, 남은 부분들에 대해서도 계속 개인적으로 공부하면서 많은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시리즈를 끝내기 전에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사건 하나를 다루게 됩니다. ‘다윗의 인구 조사 사건’입니다. 다윗이 훌륭한 신앙인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연약한 인간임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계속 강조하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재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한 분만이 위대하고,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을 연구하는 목적이 바로 이겁니다. 물론 성경 인물을 통해 우리는 아무개가 이러 저러한 점에서 훌륭하다, 그러니까 그를 본받자 이렇게 교훈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인물에게, 그리고 오늘 나에게 어떤 분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발견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 다윗의 인구 조사 : 하나님을 무시한 불신앙
다윗은 비교적 착실한 신앙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부족하고 허물 많은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생애 기록을 보면 실수와 범죄 사실도 등장합니다. 그 중에 가장 큰 두 가지 범죄가 나옵니다. 무엇 무엇입니까? 앞서 사무엘下 11장에서 살펴본 대로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살해한 사건, 그리고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구 조사 사건입니다.
그런데 얼핏 보면 인구 조사한 게 무슨 죄냐?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렇고, 성경 다른 데를 봐도 인구 조사가 잘못이 아닌데 왜 그럴까?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예→출30:12, 민1:46, 26:51 참조) 그러나 우리가 이걸 알아야 합니다. 죄는 어떤 행동 이전에 마음과 생각의 동기, 목적, 의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자체로 보면 별 하자가 없는 것 같아도 그 마음 중심의 동기가 잘못되어 있으면 분명히 죄악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죠. 마음속에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고, 마음속에 미움을 품으면 이미 살인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다윗은 이미 마음속에 잘못된 동기를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출애굽 광야 시대에 인구 조사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지만, 본문에 나오는 인구 조사는 다윗의 독단적 행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다윗이 인구 조사를 했던 근본 동기가 무엇이었을까요? 1절 이하를 보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1절 보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 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만 보면 잘 이해가 안 될지 모릅니다. 얼핏 보면 하나님이 다윗에게시킨 것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병행 구절을 참조해 보면 이해가 됩니다. 대상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두 구절을 종합해 보면 이런 겁니다. 먼저 본문 1절의 감동시킨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슈트’인데 본래는 ‘충동질하다’ ‘선동하다’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마음이 충동되어서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그를 충동했다는 겁니까? 사단이 한 겁니다. 그런데 사단도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욥기 1장 참조. 사단이 욥을 시험할 때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했음) 그러니까 사단이 충동질할 때 하나님이 그대로 방치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적극적으로 막을 수도 있었지만 방치한 이유는 아마도 다윗과 백성들의 신앙이 변질되어 있어서 그런 기회에 바로잡는 기회로 삼으시려 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다윗의 동기는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요압 장군이 명령에 반발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3절. “ ...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 ” 요압은 평소에 신앙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에 보기에도 다윗이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라가 외적을 물리치고 강대해진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데, 다윗이 숫자 놀음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자신의 능력으로, 군사력으로 승리한 것처럼 말입니다. 군사의 수를 조사함으로써 자신을 과시하고 또 미래를 준비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잘못된 모습을 지적하니까 다윗은 오히려 화를 내며 강압적으로 재촉합니다. 4절. “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 장관들을 재촉한지라” 다윗은 완전히 사단의 시험에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충언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음에 욕심이 가득 차니까 아무도 못 말리는 겁니다.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약1:13~14 “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 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 ”
다윗은 모든 게 잘 되고 태평해지자 방심한 나머지 교만해지고 말았습니다. 신앙생활이야 그런대로 했겠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빠져버린 한심한 모습입니다. 지난번 밧세바 사건 때와 비슷합니다. 사람이 참 그렇습니다. 어려울 때는 오히려 긴장해서 잘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껏 어려울 때를 잘 넘기고 형통해질 때 방심하다 넘어지곤 합니다. 승리에 도취되어 자신만만해 있다가 실패하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자수성가(自手成家)라는 말입니다. 참 좋은 말이죠. 어렵던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신앙적으로는 맹점이 있습니다. 자기 손으로 성공해서 집안을 일으켰다는 말인데, 정말 그렇습니까? 물론 본인이 열심히 노력했다는 사실은 아주 귀합니다. 하지만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와주신 겁니다. 그 사실을 망각하면 안 되죠. 시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을 바꿔보았습니다. 신수성가(神手成家)!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이룬 겁니다. 종종 TV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해 줍니다. ‘인간 만세’라는 타이틀로.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 만세’입니다. 그 사람의 노력도 가상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만세이죠.
안타깝게도 다윗은 이 점에서 실수를 한 겁니다. 인구 조사, 정확히 말하면 군인 수를 조사함으로써 자기의 공로와 능력을 과시하고, 더 나아가 미래도 계속 번영할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불순한 동기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럴 만도 했습니다. 9절 보면,조사 통계가 나왔는데 대단합니다. 유다 지파 50만명, 나머지 이스라엘 80만 명 도합 130만명이니!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감사치 않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잠16:18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나폴레옹을 잘 아시죠. 그는 무적불패의 장군 출신입니다. 그런데 말년이 비참했습니다. 쫓겨나서 외딴 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칩니다. 왜 그랬습니까? 한 마디로 교만해서 그랬습니다. 1812년 러시아 정벌을 갈 때 전문가들이 다 말렸습니다. 그 해에는 추위가 심할 것이고 눈도 많이 올 것임을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천하무적이었던 자기 능력만 믿고 나아갔습니다. 그 결과 병사들이 눈에 파묻히고 동사한 결과 참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그런 예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리고 성을 정복한 이스라엘이 왜 아이 성에서 참패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승리한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인간적으로 해보려다가 당한 겁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됩니다.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다윗의 신앙이 이 정도라면 사울보다 나을 게 뭔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사울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자기 기념비를 세웁니다.(삼상15:12) 얼마나 교만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지시하신 말씀에도 불순종하고 자기 기념비를 세우다니! 그런데 다윗이 그 모양이 된 겁니다. 그래서 신앙은 자랑할 게 못됩니다. 겸손하게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 누구도 보장 못합니다. 세상에서 공주병, 왕자병이 큰 문제인데,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 영적인 공주병, 영적인 왕자병이 큰 문제입니다. 정말 조심해야 됩니다.
[2] 하나님의 징계와 다윗의 각성 : 재산목록 1호 하나님
다윗의 이런 모습을 하나님이 가만히 보고 계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갓 선지자를 통해 징계를 내리십니다. 13절.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삼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소서” 결국 3일 온역으로 징계를 받게 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습니까? 15절 보면, 백성 7만 명이 온역을 죽게 됩니다. 엄청난 비극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다윗의 인생도, 이스라엘 국가도 하나님이 통치하심을 주지시키십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십니다. 우주만물의 창조주시며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분만이 인류 역사와 국가의 흥망성쇠, 그리고 개인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다윗은 아마 이번 기회에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을 겁니다.
다윗은 자신의 왕권이, 군사력이 백성의 수가 자기를 지켜줄 재산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라는 게 명백하게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철저히 회개합니다. 10절 보니까, 심히 자책하고 죄를 통회자복합니다. 그리고 14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매를 달게 받겠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그 무엇이든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번 손을 대시면, 거둬가시면 당장이라도 헛된 일이 됩니다. 다윗이 오아권을 자랑하고 재산과 군사력을 자랑햇짐나 하나님이 손을 대시니까 당장 뿌리채 흔들리지 않습니까? 인간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명심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형통한 것은 대단한 게 아닙니다. 별 게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 확실하게 모시면 모든 것을 다 소유하는 겁니다. 오직 우리의 재산목록 1호는 하나님뿐입니다.
[3] 하나님을 재산목록 1호로 삼는 사람 : 하나님 앞에 겸손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만 재산목록 1호로 삼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다음의 세 가지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① 자기 부정의 신앙 :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늘 자신의 본 모습을 기억해야 됩니다. 나의 본 모습은 죄인입니다. 피조물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소유는 악세사리입니다. 떼었다 붙였다 하는겁니다. 겉으로 보이는 내 모습을 부정해야 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농사를 잘 해서 창고를 가득채웠습니다. 이제 편히 쉬며 먹고 마시자고 독백을 합니다. 그러나 그게 자기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뭐라고 말씀합니까? 눅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 ”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게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약4:13~14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잠깐 있는 듯 하다가 곧 사라지는 안개, 이게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이것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② 은혜 감사의 신앙 :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신의 본 모습을 모르면 교만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몰라봅니다. 자기 공로로, 능력으로 모든 게 된 줄 착각합니다. 우리 옛말에 이런 말이 있죠.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듭 당부한 말씀이 바로 그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말라! 이게 신앙의 기본입니다. 신8:17~18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살아온 지난 날을 가만히 회고해 보십시오. 얼마나 어려운 고비가 많았습니까? 또 시련이 많았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붙잡아주시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습니다. 질병으로 사경을 헤매던 나! 사업에 실패해서 절망 중에 있던 나!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해서 눈물만 흘리던 나! 그 숱한 어려움 속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면 곤란합니다. 혹시 어떤 분은 평탄한 인생을 살아오셨을지 모릅니다. 그런 분 중에 혹시 자신은 하나님의 특별한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까? 아니죠. 늘 평탄했다면 더 큰 은혜를 받은 겁니다. 오늘 우리가 건강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큰 은혜인 것입니다.
③ 절대 의뢰의 신앙 : 오직 하나님만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세상 것을 의지하면 반드시 실망할 때가 옵니다. 잠11:28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시146:3~4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그러믈 우리는 오직 하나님 한분만 의뢰해야 됩니다. 그럴 때 진정으로 복된 인생,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시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본래 다윗의 신앙이 그랬습니다. 형통해지자 잠시 교만해지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지만, 곧 회개하고 그 신앙을 회복했습니다. 시18:1~2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이런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친구는 아주 친한 친구인데, 그의 이름은 ‘재물’입니다. 둘째 친구는 보통 친한 친구인데, 그 친구의 이름은 ‘사람’입니다. 셋째 친구는 그럭저럭 지내는 친구인데,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정말 이 이야기대로 세상 사람들은 돈을 제일 좋아하고 사람들과 인맥을 형성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멀리 합니다. 소홀히 여깁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재물이 내 인생을 얼마나 책임져 주는가? 그리고 사람들이 얼마나 책임져 주는가? 재물은 죽음 직전까지 유익합니다. 사람은 장례식까지 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만 이 세상에서도, 죽음 너머 내세에서도 우리에게 완전한 도움이 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무엇으로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능력과 재주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생애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시겠습니까? 오직 하나! 하나님을 가장 큰 재산, 재산 목록 1호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지켜주신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의 일생을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부디 이 신앙 가지고 늘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윗 왕의 자책과 회개
장광영목사(금호교회) / 삼하 24:10~17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삼하 24:10)
우리 교회의 1부 예배 성가대원은 주일 오전 7시 20분까지 교회에 와서 연습을 한 후 오전 8시 예배시간에 찬양을 드립니다. 그런데 1부 예배시간에 성가대가 찬양하는 것을 비디오로 다시 보았는데 아주 재미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악보에 없는 노래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들으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젊은 성가대원 부부의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옷자락을 붙잡으면서 “엄마! 아빠!”하고 소리치는 소리와 어린 아이의 우는 소리였습니다. 아마 이런 가정은 아침식사도 못한 채 잠자는 아이들을 깨워서 교회로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과 자기가 편한 시간에 적당히 나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똑같이 인정하실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평소에도 열심히 새벽기도를 하지만 특별히 오늘부터 3주 동안 특별새벽기도를 시작합니다. 저에게는 이번 시월이 굉장히 흥분되는 달입니다. 왜냐하면 작년에 전 교인이 나를 감독되게 해달라고 사십일 동안 새벽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를 마치는 날, 투표한 결과 여러분이 승리했는데 그때가 시월 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년에 한 번 나오는 교인과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주일을 지키면서 신앙생활 하는 교인을 하나님께서 똑같이 인정한다면 하나님께서 불공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신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요한계시록 22장 12절의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오늘 이 시간에는 “다윗 왕의 자책과 회개”라는 제목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다윗은 참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본래 보잘 것이 없던 다윗이 이처럼 출세의 길을 가게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덕분이라고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집에서 아버지의 양을 키우던 다윗은 군대에 가서 고생하는 형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전선으로 면회를 갔습니다. 거기서 이스라엘 군대를 모독하는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을 본 다윗은 사울 왕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진언했습니다.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삼상 17:32)
일약 장군의 자격으로 전쟁터에 나가서 대승을 거둔 다윗이 사울 왕과 함께 돌아올 때 이들을 환영 나온 무리 중에서 여인들이 다음과 같이 찬사를 보냈습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
결국 온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제 2대 왕이 된 다윗은 이스라엘 나라를 주변나라에서 꼼짝달싹 못하는 강대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다윗이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 때,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해 주셨으며 온 백성이 아낌없이 그에게 찬사를 보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다윗 왕의 명령으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조사를 했는데 인구조사를 마친 후에 깜짝 놀랄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다윗의 잘못으로 인해서 삼일동안에 국민이 칠만 명이나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미국에서 일어난 테러로 세계무역회관과 국방부 건물에서 죽은 사람과 실종자가 전부 만 명도 안되었지만 전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러한 벌, 이러한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그냥 무심하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냥 무심하게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적과 대치하는 전쟁상태에 있을 때, 다윗은 전선에 있는 군인들을 위해서 기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아름다운 여자에게 눈길이 돌아갔습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충성을 다하는 부하인 우리아의 아내를 왕궁으로 데려와서 자기의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왕으로서는 해서 안될 일, 아니 사람으로서는 해서 안될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밧세바가 임신을 하자, 이 사실이 탄로날 것을 두려워 한 다윗은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를 전선에서 불러 우리아의 집에서 밤을 지내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자기 집으로 가지 않고 밖에서 다른 신하들과 함께 잠을 잤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어찌하여 네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느냐?”하고 묻자, 우리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삼하 11:11)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안 다윗은 자기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우리아를 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 배치하여 거기서 죽게 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죄를 다윗 외에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태연한 척 하고 있는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왕이시여, 당신이 통치하는 이 나라에서 이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하고 고발을 했습니다.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삼하 12:1~4)
이 말을 들은 다윗은 노발대발하면서 그런 못된 자를 당장 죽이라고 소리쳤습니다.
아마 나단 선지자는 자기의 행위를 조금도 뉘우치지 못하고 화를 내는 다윗이 조금 진정된 후에, 조심스럽게 말했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7)
그때 다윗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 들통이 났구나!”하고 생각하면서 나단 선지자의 목을 쳐서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말을 듣자마자,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알고,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면서 회개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이것은 다윗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왕의 체면이 있는데 비록 죄를 지었지만 어떻게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다윗의 눈물을 닦으시면서 그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세 가지 재앙 중에서 하나로 징벌하겠다. 그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하라. 네 땅에 칠년 동안 기근이 있게 하겠느냐? 아니면 너의 대적에게 쫓겨 석달을 그 앞에서 도망 다닐 것이냐? 아니면 온 땅에 삼일 동안 온역이 있어서 백성이 죽게 하겠느냐?”
아마 이 말을 들은 다윗은 대단히 곤욕스러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것 하나도 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어느 것을 택하겠습니까? 7년 동안 기근을 당하겠습니까? 혹은 3개월 동안 적에게 쫓겨다니겠습니까? 혹은 3일 동안 온역을 당하겠습니까?
아마 다윗은 숫자적으로 기간이 제일 짧은 것을 택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삼일 동안 온 나라에 온역이 임하는 벌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 시간부터 3일 동안 온역으로 죽은 국민이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칠만 명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하! 회개를 하더라도 책임져야 하는 일이 또 있구나!” 회개를 했다고 해서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벌을 받는다면 얼마나 큰 비극이겠습니까?
이처럼 우리 인간이 곤혹스럽게 생각하는 광경을 바라본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재앙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온역과 기근과 환란에서 해방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의 모든 재앙을 담당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우리가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고 사람들 간에 믿는 것을 신뢰라고 하며 물질관계에서 믿는 것을 신용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세 가지 믿음만 가지면 정직하게 되고 성결하게 되며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면 하나님께서 “내가 오늘 낳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시고 의인이라는 인을 쳐주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고 사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가 참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큰 아름다움은 인내하는 것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지 못하기 때문에 산통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중국 고사성어 가운데 사람이 백번만 참으면 근심이 저절로 없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길이 참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살필 줄 아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13장 5절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헬라 철학자가 “네 자신을 알라”하고 말한 것처럼 자기 자신을 몰라서 실패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솝우화 중에 개구리가 자기 자신을 모르고 황소처럼 되려고 배를 부풀리다가 배가 터져 죽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모른 채, 과욕을 부리다가, 실수하는 경우가 매우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잘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미국연합감리교회는 미국 교회 역사상 가장 큰 교단으로서 교인이 약 이천만명이었습니다. 그러나 25년이 지나가면서 교인이 자꾸 줄어서 작년의 통계에 의하면 850만 명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1150만 명이 줄어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세계무역회관이 무너지고 미국 국방부가 공격을 당한 후 현존하는 전직 대통령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백악관에서 빌리그레함 목사를 모시고 예배를 드렸으며 워싱턴에 있는 모든 목사와 교인들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서 모였는데 예배당이 터질 정도로 많은 사람이 왔다고 합니다.
지금 미국 교회 중에서 비어있는 교회가 별로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마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때문입니다.
바울 서신을 읽을 때마다 굉장한 감명을 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빌 1:1)하고 고백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았더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골1:1)고 바울은 증거 했습니다.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낮추고 무릎을 꿇으며 자기가 약한 것을 아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높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죄로 이스라엘의 백성은 죽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지 않고 기쁨과 영생을 얻는 구원의 역사가 오늘 이 시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한폐렴 전염병 ,코로나
박경배목사(송촌장로교회) / 삼하 24:10~17
온 세계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경직이 되어 있습니다.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 신문, 뉴스가 우환폐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도시기능이 마비되고 있습니다. 학교 등교를 연기하고 백화점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꽁꽁 얼어붙고 불신이 팽배해 지고 있습니다. 모든 행사와 여행이 취소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상황이 생겼을까요? 코로나 때문일까요? 코로나 때문이 아닙니다. 코로나는 별것 아닙니다. 치사율도 그리 높지 않습니다. 전파속도가 급속할 뿐입니다. 여러분 하루에 자살해서 죽는 사람이 42명이고요.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하루에 중국 280명, 한국15명이라고 합니다. 또한 몇 년 전에 독감으로 죽음 사람이 우리나아 2,375명, 미국은 8,200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코로나가 아닙니다. 발 빠른 초등 대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국 당국이 사건 초기에 신속하게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방역미비로 인하여 확산이 된 것입니다. 도리어 정부당국은 발표하기를 사람 간에는 전염성이 적고 환자 발생도 우한에서만 발생하고 있다며 우한 폐렴의 현실을 최대한 덮으려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우한폐렴을 최초로 경고했던 우한시의 의사 리원량은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환자들을 돌보다 지난달 10일부터 기침과 발열 등 증세를 보여 입원했고 지난 7일 새벽 사망했습니다. 리원량은 우한에서 번지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발생 초기에 그 존재를 세상에 알린 사람입니다. 사실을 은폐하고 축소하려던 중국 당국에 끌려가 처벌을 받았습니다. 중국의 칭화대 교수 쉬장륜은 초기 대응에 실패한 원인을 언론의 자유가 말살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갈팡질팡 우왕좌왕합니다. 국민의 안전이 우선이 아니라 관광수입과 중국 몽을 향한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근거 없는 낙관론과 자화자찬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국민 안전을 위해 중국 전역 방문자에 대한 입국 금지 조치를 단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생사화복, 인류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시고 머리카락까지도 세신바 되시는 하나님이 우한 폐렴을 모르실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흑사병은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전염병입니다. 1347년 처음 창궐한 흑사병으로 유럽에서만 총 7,500만~2억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은 2012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발생, 465명이 사망했습니다. 에볼라(ebola)는 2014년 서아프리카에서 발생, 1만1005명 사망했습니다. 신종인플루엔자(H1N1)‘신종플루’라 불리는 이 독감은 2009년3월 북미대륙에서 발생, 1만8500여 명이 사망했고, 국내에서도 25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사스는 2002년 중국 광둥성에서 발생, 호흡기 질환으로 774명 사망했습니다. AI(조류독감·H5N1) 1997년 홍콩에서 최초로 발생, 1,7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14년부터는 다른 형태의 조류독감으로 홍콩에서 300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910년에 페스트가 발생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습니다. 1950년에 6·25전쟁이 발생하자 발진티푸스 말라리아 두창 등이 전염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전염병. 애굽에 내렸던 열 가지 재앙 가운데 다섯 번째 재앙. 출9:1-3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고 억지로 잡아두면 여호와의 손이 들에 있는 네 가축 곧 말과 나귀와 낙타와 소와 양에게 더하리니 심한 돌림병이 있을 것이며” 출9:6 “이튿날에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시니 애굽의 모든 가축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한지라” 오늘날의 구제역과 같은 가축 전염병이 애굽 전국에 퍼졌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징벌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믿음이 없는 열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불신앙에 전염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민14:12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범 죄 한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시는 도구가 전염병이었습니다.
렘14:12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 렘29:17-18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에게 상하여 먹을 수 없는 몹쓸 무화과 같게 하겠고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들을 뒤따르게 하며 ” 눅21:11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오늘 본문 삼하24장에 보시면 이스라엘 왕 다윗이 자신의 왕국이 번성하자 자신의 능력을 과시 하기 위해서 충신 요압 장군을 시켜 인구 조사를 시켰습니다. 당시 인구조사는 전쟁터에서 싸울 능력이 있는 장정의 숫자를 세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고 인간적인 힘을 과시하는 불신앙적인 것이요. 교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충신인 요압이 인구조사를 말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강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이스라엘에 전염병이 생겨 3일 만에 7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토록 엄청난 재앙을 격은 다윗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 하였습니다.
삼하24:17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다윗은 자신의 잘못으로 많은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죄가 없고 자신이 죄를 범했으니 차라리 자신에게 재앙을 내려 달라고 회개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는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을 때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아무리 큰 죄를 범했을지라도 진실로 통회 자복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십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용서의 복음입니다.
사1:18-19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죄는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좋은 축복을 가로 막는 장애물입니다. 회개하면 저주와 재앙이 제거됩니다. 다윗은 회개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삼하24:25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많은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에 다윗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는 오늘날 예배를 말합니다.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에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예배를 드린 즉시 고통의 재앙이 그쳤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전염병은 거의 대부분 범 죄 한 백성들과 그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습니다. 내 자신과 가정과 나라를 돌아보면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에 빠지다
이성희목사 / 삼하 24:13-14, 행 11:19-21
지난 주간 두 번째 시도한 우주선 나로호 발사가 또 실패하였습니다. 1단계 엔진 폭발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우주강국으로 진입하는 것이 우주선이 궤도에 진입하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다음 발사는 2년 후에나 가능하다고 합니다. 삼세번이라고 하니 다음에는 꼭 성공할 것입니다. 사실은 성공할 때보다 실패할 때가 더 중요합니다. 일이 잘 될 때보다 안 될 때가 더 중요합니다. 인생에서 매를 맞을 때,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가 인생에서 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는 19명의 자녀를 낳아 모두 훌륭하게 양육하였습니다. 수산나의 교육원칙 가운데 보면 ‘잘못을 고백하면 무조건 용서하고 고백하지 않은 잘못은 반드시 벌한다’, ‘부모의 채찍을 두려워하게 하고, 부모의 훈계를 고맙게 여기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잘못을 용서하되 무조건 용서하지는 않았습니다. 벌을 받을 줄 알게 하는 것은 은혜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잘못 저지르고도 벌을 받지 않으면 저주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잘못을 저지르지만 꾸지람을 듣지 않고 벌을 받지 않고 자란 사람들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킵니다. 우리 교단의 헌법에는 ‘치리와 권징’이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치리란 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치리를 영어로는 훈련(discipline)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교회에서 벌을 주는 것은 훈련이지 벌을 주자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의 옛날 교적부에는 뒤쪽에 책벌부가 있습니다. 요즘 같으면 벌을 받을만한 이유가 전혀 아닌 것들로 벌을 받았습니다. 대낮에 술을 마시고 부녀자를 희롱하는 것이 출교의 이유이었습니다. 집사가 주일을 잘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책벌의 이유입니다. 자녀를 예수를 믿지 않는 가정에 결혼시켰다고 벌을 받았습니다. 한국교회는 치리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고 봅니다. 벌을 주자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에게 벌을 줄만한 권위를 가진 당회가 되어야 하고, 당회가 벌을 주면 벌을 받을 줄 아는 교인들이 있어야 좋은 교회입니다.
‘혼나며 자란 아이 머리가 나쁘다’라는 어느 의사를 보고를 보았습니다. 아이를 주 1회 이상 체벌하면 IQ가 8이상 감소되고, 성격위축, 뇌손상 등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사랑 없이 혼내는 것이나, 홧김에 체벌하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화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사랑으로 권면하고 징계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잠언 3:12에는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2:8에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징계가 얼마나 큰 복인가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꾸짖을 수 있고 야단 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프랑스의 영성가 프랑수아 바리용은 “하나님이 벌을 주신다면 그것은 벌을 주셔야만 하기 때문이요 그분의 정의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은 정당한 것이고 감사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업적 과시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를 강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실 때에 전쟁에서 숫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에도 숫자가 많아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기드온이 3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싸울 때도 숫자가 많아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은 인간의 손에 의존하고 있었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말년에 마음이 약해져서 군대에 나갈 사람들을 계수하고자 하는 유혹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회개하고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벌을 받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로 하였습니다.
첫째,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므로 그 손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서 24:14에는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잘못을 범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시는 것, 손보시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다윗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벌은 선택이었습니다. 벌을 받는 사람이 선택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벌 받을 사람에게 벌이 옵션이라니 얼마나 이상합니까? 벌을 선탣하게 하신 그 자체가 하나님의 긍휼이며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선택하게 하신 벌은 첫째는 7년 동안의 기근입니다. 둘째는 원수에게 쫓겨 석 달을 피해 다니는 것입니다. 셋째는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이 돌게 하는 것입니다. 벌을 선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손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에스겔 14:21에는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내가 나의 네 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합니다. 구약적 개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징계란 성경에서 말한 네 가지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중 두 가지 즉 칼과 기근이라는 중한 벌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축복과 함께 벌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벌은 축복입니다.
고통이란 ‘차라르’란 말입니다. 사방에서 짓누르는 압박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리신 세 가지 징벌은 다윗의 자랑을 꺾어 놓았습니다. 자신의 자랑과 힘이 얼마나 보잘 것이 없는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이런 하나님의 긍휼이 다윗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손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사랑, 자비, 용서, 관용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은 징계, 책망, 용서하지 않음도 포함합니다. 무조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때로는 용서하지 않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호세아 1:6에는 “내가 다시는 이스르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용서하지 않는 하나님은 용서받지 못하는 백성보다 더 마음이 아프십니다.
오랜 전승의 수도원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수도원에 앤드류라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바보스럽고 머리가 나쁜 수도사였습니다. 다른 수도사들은 원장이 좀 모자라는 앤드류를 사랑하는데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원장이 광장에 수도사들을 집합하게 하였습니다. “오늘 숙제를 내겠다. 새를 한 마리씩 잡아서 죽여라. 다만 아무도 그 새를 죽이는 것을 보면 안 된다.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 이곳에 다시 모여라” 저녁이 되자 다들 죽은 새를 손에 들고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앤드류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수도사들은 서로 수군거립니다. “바보 같은 앤드류, 뭘 하고 있어?” 늦은 저녁이 되자 앤드류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원장님이 앤드류에게 물었습니다. “숙제는 했느냐?” “원장님 죄송합니다. 숙제를 못했습니다. 새를 잡아서 계곡 위에서 죽이려고 하였지만 위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셨습니다. 다시 폭포 물에 빠트려 죽이려고 했지만 거기서도 하나님이 보고 계셨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하나님께서 보시지 않는 곳이 없어서 죽이지 못했습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잘못을 용서받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입니다.
저의 동생이 한국에 있을 때에 경부고속도로에서 운전하는 승용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동생은 늘 속으로 “하나님, 다른 건 몰라도 운전은 잘 하지요?”라고 말했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차를 전복시키시면서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동생은 어쩌다 한번 교통위반을 하면 반드시 경찰에게 걸린답니다. 그래서 자기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고 작은 잘못도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교통위반해도 경찰에게 안 걸려 운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운이 나쁜 것입니다. 잘못은 용서받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용서받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죄를 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니까 그렇습니다. 존경받는 성군으로 세우려고 그렇게 하십니다.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두 사람이 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고 배반하는 죄를 지었지만 베드로는 이 죄를 물으셨고 기억하게 하셔서 완전히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반면에 가룟유다는 회개하지 않고 자살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손으로 치시면 하나님께서 긍휼하심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못을 범해도 하나님께서 잠잠하시면 사랑하지 않으시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범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벌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사람의 손에 빠지지 말고 여호와의 손에 빠져야 합니다.
24:14하반절에는 “내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라는 말은 전쟁의 재앙 때문에 적의 손에 죽는 것보다, 기근의 재앙 때문에 흉작이 들어 사회가 어려워지는 것보다, 불치의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보다 하나님의 손에 빠져 하나님께 맞는 것이 좋겠다는 말입니다. 고대인들은 이를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로 생각했습니다.
다윗의 선택은 하나님께 매를 맞는 것이 사람에게 매를 맞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입니다. 세상에서 잘 되는 것보다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형벌 받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위로와 자비를 얻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10에는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사람의 기쁨을 구하고 사람에게 좋게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세상을 얻는 것보다 부정한 방법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 낫습니다.
알버트 보그만은 “명성이란 초콜릿 무스와 같습니다. 맛이 너무 좋아서 한 접시 가득 게걸스럽게 먹어치우지만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그건 한낱 바람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뿐이죠”라고 했습니다. 명성의 덧없음에 대한 실망보다 더 나쁜 것은 그것이 우리의 경건 생활을 파괴시킨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부자인 워렌 버핏은 “명성을 얻는 데는 20년이 걸린다. 그러나 그것을 망치는 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에 목숨을 걸고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의 명예나 물질이나 인기를 얻으려고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결국 멸망의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울왕은 자기 칼에 자기가 자살하였습니다. 악한 왕 아합은 자신의 병사와 옷을 바꿔 입고 전쟁터에 갔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아합의 왕비인 이세벨은 왕비 호위병들에 의해 창밖으로 내어던져져 죽었습니다. 헤롯은 벌레가 먹어 죽었습니다. 이런 세상의 벌보다 하나님께서 손보시는 게 훨씬 낫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손은 긍휼을 대신하는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죽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에 대하여 미리 손보시는 게 훨씬 좋습니다.
이스라엘 사사기에는 15명의 사사가 있었습니다. 웃니엘, 에훗, 삼갈, 바락과 드보라, 기드온, 아비멜렉,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 엘리, 사무엘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역사 500년 동안 하나님의 구원과 징벌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할 때마다 하나님은 여지없이 이방의 손을 빌려 손을 보십니다. 그리고 나라가 위태할 때 사사를 통하여 구원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이방을 통하여 그들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이나 사사를 통하여 구해주시는 것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하심, 사랑하심 때문입니다.
토스토에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코리니코프는 “마치 누군가 초자연적인 힘으로 내 손을 잡아 이끌어 저항할 수 없이 맹목적으로 끌려간 것 같다”고 고백합니다. 죄의 본성이란 악마 손입니다. 죄를 짓더라도 여호와 손에 빠져야 다시 삽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를 짓지만 하나님의 손에 빠져야 하나님께서 건지십니다.
베드로전서 2:20에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합니다. 세상의 명분 없는 매를 맞지 마세요. 여호와의 매를 맞으세요. 내 잘못으로 매를 맞거든 감사하세요. 매가 없으면 버림받은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은 긍휼하심인 것을 믿으세요.
가지치기를 하는 시기의 길이와 그 정도와 깊이는 다양하지만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필요 없는 부분을 잘라내십니다. 아프지만 잘 자라게 하시기 위해 잘라내십니다. 잘라내야 나무가 자라고 가지가 자라고 잎이 무성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결론
피에르 렌치니크는 ‘고아가 세계를 주도한다’(Orphans Lead the World)고 하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줄리어스 시저, 찰스 5세, 리슐리 추기경, 루이 14세, 조지 워싱턴, 나폴레옹, 빅토리아 여왕, 골다 메이어 총리, 히틀러, 레닌, 스탈린, 에바 페론, 피델 카스트로 등이 고아 또는 사생아였습니다. 인생의 문제와 압력과 열이 석탄을 다이아몬드로 변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의 손은 우리를 보석처럼 빛나게 하려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손과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버림받은 고아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다윗처럼 여호와의 징계의 손이 느껴질 때마다 감사하세요. 우리 모두가 여호와의 손에 빠집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긍휼의 은총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드리는 기도
삼하 24장 14절 / 윤봉원목사
1.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요?
2. 사단의 종이 된 다윗
삶의 큰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다윗은 인생의 후반을 맞이하게 된다.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가 함락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극복해 다시 한 번 번영(繁榮)의 시기를 맞이했다.
그러던 어느날 다윗은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나라를 바라보면서 인구 조사를 하고자 하였다. 다윗은 요압과 측근의 부하를 불러 말했다.
‘왕이 이에 그 곁에 있는 군대 장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그 도수를 내게 알게 하라’(삼하 24:2)
단은 북쪽 끝의 도시, 브엘세바는 남쪽 끝의 도시이다. 전 국민의 인구조사(人口調査)를 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것은 정부의 일상적인 업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당시 인구조사(人口調査)는 단순하게만 볼 것이 아니었다. 역대상 21:1에는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개역: 격동(激動) => “선동하다, 꾀다, 유인하다”)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무엘하에서도 군인(軍人)인 요압조차도 ‘요압이 왕께 고하되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삼하 24:3)라며 인구조사(人口調査)를 반대(反對)하였다.
다윗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전쟁에 출병할 수 있는 남자의 수(數)를 헤아려 자기만족에 빠지고 싶었던 것일까? 어쨌든 다윗은 자기의 명령에 반대한 요압을 설득하여 9개월 20일에 걸쳐 이스라엘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하지만, 보고를 듣고 난 후 자기 만족(滿足)에 빠져야 할 다윗은 무거운 양심(良心)의 가책(呵責)을 느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삼하 24:10)
3. 막다른 골목에 이른 다윗
다음 날 예언자 갓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다윗에게 찾아온다. 하나님의 심판은 잔혹할 정도로 혹독(酷毒)했다.
‘임금님의 나라에 일곱 해 동안 흉년이 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왕께서 왕의 목숨을 노리고 쫓아다니는 원수들을 피하여 석 달 동안 도망을 다니시는 것이 좋겠습니까? 또 아니면 임금님의 나라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퍼지는 것이 좋겠습니까?’(24:13)
이 질문을 받은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막다른 골목에 이른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고 매우 곤혹스러워하여 다음과 같이 갓에게 이야기했다.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삼하 24:14)
7년 동안 기근이 있으면 나라의 존속(存續)이 위태로워질 정도로 쇠퇴해져 버린다. 또 3개월 동안 적의 위협을 견뎌낼 정도로 다윗은 젊지 않으며, 가능하다 하더라도 나라는 그 위세를 잃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선택지는 3일동안의 역병이다. 그 당시 역병의 맹위(猛威), 그 무서움은 최첨단 의료기술 사회에 사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불구가 되겠는가? 가족을 잃겠는가? 교회를 잃겠는가?”의 문제와도 같다. 이처럼 슬프고 괴로우며 어쩔 도리가 없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예언자 갓은 이 괴로운 질문지를 다윗에게 내밀며 말했다.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무엇을 대답하게 하소서.’(24:13)
역대상 21:11에서는 질문지를 말하기 전에, 갓이 처음에 다윗에게 한 말은 “너는 선택하여라”(즉, 받아들여라)였다. 그것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갓은 하나님께서 내신 질문지가 선택할 수 없으며, 결정할 수도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윗에게 받아들이라고 말한 것이다.
약 20년 전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신학관련 책이 있다. 풀러(Fuller) 신학교 교수 루이스 스미즈가 쓴 “용서하고 잊으세요”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상처를 입는데, 이 책에는 그것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상대방을 용서하고 그 사건을 잊어버리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 책이 특히 기독교계에서 화제가 된 것은 “신을 용서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권자인 신을 감히 인간이 용서한다는 발상은 신학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이 표현을 의미 있게 만드는 다음의 내용을 간과할 수 없다.
“신을 용서한다”라는 장에는 스미즈 부부의 간증이 담겨 있었다. 스미즈 부부는 결혼하고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다고 한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며 불임클리닉을 다니고 여러 가지로 노력한 결과, 그들에게 마침내 아이가 생겼다. 그러나 태어난 아기는 몇 주 만에 원기를 잃고 시름시름 앓더니, 의사에게서 오늘밤이 고비라는 말을 들을 정도까지 악화됐다. 스미즈 부부는 목숨을 걸고 기도했다. 교인들도 부부를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를 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일까. 다음날 아침, 의사로부터 “이제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라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아이는 그만 목숨을 잃고 만다. 스미즈 교수는 이때 신에게 분노를 느꼈다고 했다.
“결국 하늘나라로 데려갈 것이라면 애당초 아기를 주시지 말지. 어차피 데려갈 거라면 오늘밤이 고비라고 하는 그날 밤에 데려가시지.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안심시켜놓고는, 곧바로 데려가시다니. 이는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것은 스미즈 교수가 받아들여야 하는 아픈 현실이었다. 그는 이 현실이 받아들이는 단계에서 “신을 용서했다.”고말한 것이다. 이것이 크리스천으로서 문제 있는 표현이라는 것은 그 자신도 의식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신을 용서하고 용서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아니라, 삶 속에서 신이 제시한 혹독한 현실을 극복하려면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자기 연민에 허우적거리며 현실에 대한 쓸데없는 불평과 슬픔에 묶여 있지 말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현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인생에 속았다는 감정을 떨쳐버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4. 다윗의 기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놓으며 기도한다.
‘차라리 우리가 주님의 손에 벌을 받겠습니다. 사람의 손에 벌을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24:14, 대조성경 새번역)
나는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다윗의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데 잘 어울리는 생의 궁극적인 기도라고 생각한다. 이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엄하심과 긍휼하심의 양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생애를 통해 이 두 가지, 즉 하나님의 죄에 대한 엄하심과 회개한 자에 대해 깊은 긍휼 하심을 배워왔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타협하지 않으심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예는 사울의 최후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적(敵)에게 쫓겨 칼 위에 엎어져 자해(自害)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또 다윗 자신의 경우만 봐도 밧세바와의 간음(姦淫)으로 얻은 아이가 이레 동안 금식기도 했으나 죽어버린 슬픔을 경험(經驗)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깊은 자비도 알고 있었다. 목장에서 지내던 어린 자신을 이스라엘 왕위에까지 오르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셨다. 또 골리앗과 맞섰을 때 한 번에 승리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때때로 그가 죄 가운데 빠졌을 때도 회개하는 다윗의 마음을 모른척하시거나 내버려두지 않으신 분 역시 하나님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을 잘 알고 있기에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한 심판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알았다. 그는 자신이 이 현실에서 달아날 수는 없으며 반드시 죄에 대한 대가(代價)를 치르리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심판이 아무리 괴로운 체험(體驗)이라 하더라도 달아나지 않고 허둥대지 않았다. 하나님께 원한을 품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동시에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알고 있었다. 또한, 항상 하나님의 자비(慈悲)는 하나님의 엄 격함보다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도했다. “하나님의 손에 벌을 받겠습니다.” 라고.
이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 아침부터 사흘 동안 온역을 온 이스라엘에 내려서 70000명을 죽이셨다. 그리고는 더는 천사가 사람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셨다. 이 역사를 보고 다윗을 다시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삼하 24:17)
그리고 다윗은 갓의 권고를 받아들여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번제화 화목제를 드렸다. 그랬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에 내리는 재앙을 중단하셨다.
그래서 다윗의 막다른 골목에서 드린 기도는 자기 백성들의 행복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17절). 아울러 그는 회개할 줄 아는 사람임을 회개의 기도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다. 결과적으로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사울과 사울의 집에서 떠났던 것과 같이 그에게서는 떠나지 않았다.
5.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께 회개와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하라!
우리는 다윗이 막다른 골목에서 드린 다윗의 기도를 통하여 그에게 베풀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의 모델이며, 하나님의 자비(慈悲)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모든 세대(世代)의 가능성과 실제성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만나는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께 회개와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하도록 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다시 은혜를 베푸시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주인공 되세요.
다윗의 회개와 하나님의 징계
삼하 24:10-17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교만에 빠져 인구 조사를 명령한 다윗의 회개와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기록입니다.
1. 먼저 10절에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처럼 마음에 자책이 든 것은 요압에게 인구 조사를 명령한 후 약 10여 개월이 지난 후였습니다(8절). 백성들의 인구 통계가 나오고 나서야 자기가 행한 인구 조사가 큰 범죄였고, 미련한 일이었음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깨우침은 이미 범죄를 저지른 후였기에 때늦은 감은 있지만, 그래도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윗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었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다 크고 작은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자기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변명하고 합리화 하려고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그렇게 죄를 이리저리 핑계만 하며 살아가다가 회개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에는 영원한 멸망에 빠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윗이 위대한 것은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죄를 짓지 않은데 있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인 회개에 있었습니다. 그는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해 늘 힘썼고,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는 변명하거나 지체하지 않고 즉시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다윗처럼 자기의 죄를 스스로 자각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본래 남의 허물은 잘 보이지만 자기의 허물은 잘못이 아닌 실수로 여겨버리거나 부득이했던 일로 돌려버리기 쉽습니다. 똑같이 바람을 피워도 ‘내가 하면 로맨스요 타인이 하면 불륜’으로 생각합니다. 더욱이 시일이 꽤 지난 것을 생각해 내고 그것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하기는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지난 일이라고 그냥 흘려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잘못을 깨닫도록 특별한 은혜를 허락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께서 그의 완악해진 마음을 녹이셨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가진 것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따르는 자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항상 함께하시며 힘이 되어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성령께서 다시 기억하도록 해주신 결과였습니다. 여러분, 성령께서는 아무리 오래된 허물과 죄라도 생각해 내게 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 일례로, 어거스틴의 ‘참회록’에는 그가 젖먹이 아기였을 때 어머니의 젖을 빨다가 젖꼭지를 세게 깨문 일까지도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처럼 어린 시절의 죄까지도 기억하고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께서 그에게 흠 없고 순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잘못이 생각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시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이라고 할지라도 무언가 잘못한 일을 기억하게 된다면 성령께서 깨닫게 하셔서 나를 바로잡아 주시는 것임을 알고 즉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죄를 깨닫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매우 특별한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것도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 죄를 회개하게 하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잘못한 일이 기억나거든 즉시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11-14절에, 다윗은 선지자 갓으로부터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를 위하여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라는 말을 듣습니다. 첫 번째는 ‘7년 동안의 기근이 있을 것’이었고, 두 번째는 다윗이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는 것’이었으며, 세 번째는 ‘사흘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주관하시며 하나님의 도움만을 통해 해결 받을 수 있는 재앙인 세 번째의 재앙을 선택했습니다. 오랜 기근이나 원수들에게 쫓기는 것보다 하나님께 직접 징계를 받는 것이 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임한 전염병 재앙은 혹독했습니다. 재앙이 임하자마자 무려 7만 명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마치 다윗이 최악의 징계를 선택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옳았습니다. 그 심판이 오래 지속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직접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하셨던 마음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명령하셨습니다(16절). 여기서 하나님께서 ‘뉘우치사’라는 말은 ‘슬퍼하사’라는 뜻으로 진노로 치시다가도 다시 긍휼을 베푸사 이전의 은혜를 다시 회복시켜 주셨음을 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범죄하면 징계를 내리시지만,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 즉시 자비를 베푸시는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자이신 동시에 자비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잘못을 범하면 공의의 채찍을 드셨다가도 회개하기만 하던 금방 마음을 돌이키시고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혹 잘못을 범하여 징계를 받게 될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징계 중에서도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회개함으로 회복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징계의 기간이 다 차기 전에라도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이러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살기를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이어지는 16절에, 징계를 집행하던 천사들에게 하나님께서 징계를 멈추도록 하셨는데 그 자리는 ‘아라우나’라는 여부스 사람이 소유한 큰 타작마당에서였습니다. 이때 다윗은 그곳에 선 천사를 보고 회개기도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게 됩니다. 17절 함께 읽습니다.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전염병 재앙이 내려지고, 채 3일이 되기도 전에 수많은 백성들이 죽는 것을 본 다윗은 마음이 괴로워 “모든 것은 나의 죄니 나와 나의 가문을 치소서”하고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기 위해 사탄이 다윗을 격동하는 것을 용납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징계는 다윗의 행위를 계기로 임한 것이기는 했지만, 사실은 백성들의 죄로 인한 것이었습니다(1절). 그런데도 다윗은 책임이 자기에게만 있다고 회개하고 참회하며 진노를 거두어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다윗에게서 진정한 지도자의 면모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자세는 우리 성도들이 본받을 만한 성품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문제와 아픔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문제들 앞에서 비관자나 방관자가 아니라, 다윗처럼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로서의 역할, 열쇠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내가 책임자입니다. 그러니 내가 책임을 지겠습니다”라고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 28:20). 우리는 모두 ‘가르쳐 지키게’ 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마 15:34-36).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이 책임져야 할 일을 회피하지 말고 당당하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여러분의 발길이 머무는 곳마다 불안과 슬픔과 아픔이 물러가고 평안이 선포되는 역사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를 통해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나누며 영적인 풍요를 누리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매우 특별한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이러하신, 징계 중에서도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주변의 수많은 문제와 아픔들 앞에서 비관자나 방관자가 아니라 다윗처럼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의의 일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삼하 24:10-17 / 우인택 목사
우리는 지난 5주 동안 다윗의 신앙에 대하여 살펴보았는데, 다윗은 정말 멋진 신앙인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솔직히 그저 존경의 눈길로 바라볼 뿐,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결단이 쉽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다윗의 실수를 바라보면서, 다윗이 그러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다윗 개인의 능력이나 위대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강하게 붙드셨기 때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께 강하게 붙들리면 얼마든지 다윗과 같은 삶을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1. 먼저 10절에 “다윗이 백성을 조사 한 후에 마음에 자책하고” 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가 이처럼 마음에 자책이 든 것은 8절에, 요압에게 인구조사를 명령한 후 약 10개월이 지난 때였습니다.
그는 인구조사를 마치고 난 후에야 그것이 하나님 앞에 큰 죄였고, 교만이었음을 깨우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깨우침은 때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자기의 잘못이 엄연히 눈에 보이는데도 그것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요즘 유행어 중에서 똑같은 잘못을 해도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본래, 남의 죄와 허물은 잘 보이지만, 자기의 허물은 잘못이 아닌 실수로 여겨버리거나 부득이했던 일로 돌려 버리는 게 인간의 본성임을 꼬집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죄를 해결하지 못해 결국에는 영원한 심판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뒤늦게라도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큰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더군다나, 시일이 꽤 지난 죄를 생각해 내고, 그것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하기는 더욱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누가 다윗에게 그의 잘못을 지적하지도 않았는데, 다윗은 어떻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요?
성령께서 그의 잘못을 기억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5주 동안이나 살펴보았듯이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의 삶을 살기를 날마다 힘썼기에 그러한 그의 삶을 아시는 성령께서 잠시 잠깐 육신의 안목에 눈이 멀어 실수했던 다윗을 불쌍히 여기시고 죄를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원리는 우리 믿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죄 문제를 예수님께 맡겨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사건은 성령께서 자신의 죄를 생각나게 하시는 것인데, 아주 오래된 죄와 허물까지도 다 생각해 내게 하십니다(롬 15:8).
그리고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이때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고백하고, 회개하고, “이제는 의로운 삶을 살겠습니다”하는 결단을 함으로써 믿음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들의 공통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일례를 들자면,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읽어보면, 그는 자신의 많은 죄를 회개하는데 그중에서 그가 아기였을 때, 어머니의 젖을 빨다가 그 젖꼭지를 세게 깨문 일까지도 회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그처럼 어린 시절의 죄까지도 기억하고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께서 잘못을 생각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모든 잘못된 삶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이킴으로 탕자 어거스틴에서 성 어거스틴으로 그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중에 혹시 무언가 잘못한 일이 기억나게 된다면 성령께서 깨닫게 하셔서 나를 바로잡아 주시는 것임을 알고 즉시 회개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매우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를 통해 여러분들도 다윗과 같이, 어거스틴과 같이 죄사함을 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는 복음의 일꾼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2. 두 번째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다윗의 죄목’ 입니다.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인구조사는 그 행위 자체만을 가지고는 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국민이 몇이나 되고 그들의 경제수준과 생활수준이 얼마나 되는지 등의 통계가 제대로 집계될 때 나라를 규모 있게 잘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다윗이 이러한 목적으로 인구를 조사한 것이라면 책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다윗이 지시한 인구조사는 그러한 목적으로 실행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이룬 업적이 얼마나 되는지 그것을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인구조사를 행정 관료들에게 맡기지 않고, 군사령관 요압에게 맡긴 것에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신앙인 다윗도 나라가 안정되고 부강한 위치에 올라서니까 하나님보다 사람의 힘을 의지하고, 숫자의 많음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자기중심의 교만이 위대한 믿음의 용사 다윗의 마음에도 찾아들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큰 복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왜, 우리에게 건강과 지혜와 성령의 권능을 넘치게 부어주셔서 우리가 맘껏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고 시험과 연단속에 빠뜨리시는 것입니까?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그러한 복은 오히려 타락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저주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다윗같이 오랜 시간 연단 받고, 오직 믿음으로 산 사람도 이렇게 불의의 길에 빠져드는데, 만일 우리에게 우리의 수고를 넘어선 축복이 임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건강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자에게 건강을 주시고,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자에게 돈을 주시고, 권력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자에게 권력을 주십니다.
이러한 자격이 될 때까지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혹, 지금 여러분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일평생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그분의 은혜를 힘입고 살아왔던 다윗이 부요해지고, 강해지고, 평안해지자, 믿음을 잃고 자기 교만에 휩싸인 이 사건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함에 있어서든지 내 생각을 먼저 앞세우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뒤로 미루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직 내가 은혜가운데 거하지 못하는 이유임을 깨닫고, 먼저 지금의 삶에 감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 나의 삶이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것임을 믿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대로 감사함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분명,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이어지는 11절 이하에서 다윗은 선지자 갓으로부터 “어떤 징계를 받을 것인지 셋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첫 번째는 7년 동안의 기근이었고, 두 번째는 다윗이 적에게 쫓겨 석 달을 도망하는 것이었으며, 세 번째는 삼일 간 이스라엘에 전염병이 도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14절에 “여호와의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고백하고 세 번째의 재앙을 선택합니다.
다윗은 적에게 쫓기는 것이나 기근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직접 징계받는 것이 낫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임한 전염병은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15절에, 전염병이 돌자 삼 일도 되기 전에 무려 7만 명의 백성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심판이 갑자기 도중에 멈추어졌습니다.
16절에,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진노하셨던 마음을 뉘우치사 징계를 집행하던 천사를 향해 그 손을 거두도록 하셨습니다.
‘뉘우치셨다’는 말은 ‘가슴이 아파 돌이키셨다’는 뜻입니다.
진노로 치시다가 다시 긍휼을 베푸사, 이전의 은혜를 다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 이유를 17절에서 다윗이 간절하게 회개하며 부르짖어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범죄하면 어쩔 수 없이 징계를 내리시지만, 그러나 징계중에라도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기만 하면 자비를 베푸시는 은혜로우신 분이심을 오늘 본문에서 분명하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오직 공의로만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자이신 동시에 자비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을 걸을 때 공의의 채찍을 드셨다가도 회개하기만 하면, 바로 그 마음을 돌이키시고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녀들이 잘못할 때 매를 들었다가도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면, 가슴 아파하며 징계를 중단하고 도리어 위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혹 죄를 지어 징계 가운데 있을지라도 절망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징계 중에서도 우리를 향한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며 회개함으로 회복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기만 하면 징계의 기간이 다 차기 전에라도 우리를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꼭 기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4. 17절에, 다윗은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약속된 삼 일이 되기도 전에 7만 명이나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24:1에 보시면 이 징계는 다윗의 행위를 계기로 임한 것이기는 했지만, 사실상 백성들의 죄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죽은 것은 표면적으로는 다윗의 죄였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다윗도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모든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진노를 거두어주실 것을 부르짖어 간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다윗을 통해 진정한 지도자상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지도자들을 보십시오.
누가 다윗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백성을 위하려 합니까?
오히려 자기의 허물을 백성에게 전가하고,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발뺌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예를 들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직접 뽑은 정치인 중에서도 너무나도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런 세상 지도자들과는 달리 우리 한 영혼 한 영혼을 자신의 목숨보다도 아끼고 사랑하여, 대신 죽어주기까지 한 참된 지도자가 계십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우리의 왕이시오,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세상 지도자들은 습관적으로 자기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도리어 우리가 받을 죗값을 대신 져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부요한 분이셨는데, 우리에게 오실 때는 가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 이유를 고린도후서 8:9에 우리의 부요함을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심지어 온갖 질고를 당하고, 채찍질을 당하며 갖은 고난을 겪기도 하셨는데, 이 역시 우리의 질병과 허물과 약한 것을 대신 지셔서 우리들이 참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라고 이사야서 53:5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다윗과 우리 예수님을 본받아 나 자신의 명예나 이기적인 행복만을 앞세우지 말고 교회와 이웃의 유익과 평안을 위해 스스로 낮아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그 행위를 잊지 않으시고 때가 되면 반드시 귀한 상급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벧전5:4).
한해의 절반을 보내고 있는 이때에 성도로서의 마땅한 삶을 사심으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품에 안겨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다윗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육신에게 져서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다시 믿음의 사람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저희들도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다스리며 살 수 있도록 함께 하여 주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삼하 24:10~17
summer9844 / 삼하 24:10~17
'죄 인식–징계 선택–중보–긍휼의 개입'이라는 4 단계로 전개되는 본문은 단순한 재앙 기록을 넘어 왕의 죄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과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드러낸다.
다윗의 만족은 얼마 가지 못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았기 때문이다. (10)'자책하다(나카)'란 말은 '때리다 치다'의 뜻으로 신앙 양심이 무디어진 마음을 쿵쿵 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회개의 시작은 자기 인식 즉 외부의 책망 전에 내면에서 울리는 양심이 먼저 작동한다. (11)선지자 갓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12)3 가지 징계의 선택권 즉 (13)7년 기근(대상21:12에는 3년), 3개월 도피, 3일 전염병을 제시하신다. 다윗의 대답에 주목한다. (14)인간의 손(전쟁)보다 차라리 하나님의 손(재앙)을 선택하겠다는데 이유는 하나님의 품보다 더 나은 피난처가 없음을 아는 그는 심판 중에도 하나님은 긍휼을 멈추지 않으시기 때문이란다. 그리하여 (15)3일 동안 전염병이 임하고 무려 전국에서 7만 명이 죽는다. 왕의 죄로 백성의 고통이 극에 달한 공동체적 책임 구조를 본다. 초자연적 전염병 재앙이 맹렬하게 급속히 이스라엘 전역을 내리 덮더니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야 하나님이 멈추신다. 왕의 결정적인 고백을 보자. (17)'죄를 범한 자는 전데 왜 이 양들에게 그러시나이까?'..이것이 본문의 절정이다. 다윗은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나를 치소서'라며 대속적 위치에 서려 한다. 이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 대속의 예표다.
참된 회개란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차원을 넘어 그 범죄로 말미암은 결과까지 책임지려는 것이며, 타인의 허물과 죄악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통회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상21:16에는 다윗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한다. 일국의 왕임에도 하나님께 최대한 겸손과 회개의 모습을 보였다.
나는 내 죄를 즉각 인식하고 합리화 이전에 자각하는 편인가? 또 하나님 징계의 고통을 피하려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뜻 안으로 즉각 들어가는가?
하나님, 죄를 짓고도 깨닫지 못하는 우둔함을 제거하고 다윗처럼 즉시 마음이 찔리는 은혜를 주소서. 내 삶의 선택이 나만이 아니라 공동체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항상 의식하게 하소서. 심판보다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어떤 위기에서도 주 안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다윗의 선택
삼하 24:10~15 / 정필도목사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시편 90:10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 가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기간이 대체로 칠팔십 년 됩니다만, 일평생 환난이나 질고 없이 평안하게만 살다가 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하게 살다갑니다.
특별히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은 다를 것 같지만, 성경을 보면 다윗도 일평생 얼마나 많은 환난과 풍파를 겪으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는 장인인 사울왕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피해 다니느라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왕이 된 후에는 계속해서 전쟁을 치러야 했으며,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쫓김을 당하고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3년 동안 기근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고, 온 나라가 온역(전염병)으로 사흘동안 7만 명이 죽는 큰 재앙을 겪기도 했습니다.
최근 중국을 비롯하여 몇몇 나라에서 사스(SARS)로 인해 큰 곤욕을 치렀습니다만, 실제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통치 당시 한 지역에서 사흘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동안 7만 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죽은 것을 보면, 참으로 무서운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 엄청난 재난이 오게 된 이유를 다윗이 인구조사를 지시한 죄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는 군사가 과연 몇 명이나 되는지 그 수를 조사했습니다.
사무엘하 24:9을 보면 『요압이 인구 도수를 왕께 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이었더라』고 집계한 것을 보면, 이스라엘이 130만의 큰 군대를 가진 나라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기록한 역대상 21장을 보면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하나님이 이 일을 괘씸히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라고 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다윗이 행한 이 일을 하나님께서 괘씸하게 여기신 것을 보여줍니다.
왜 인구를 조사한 것이 죄가 됩니까?
사실 인구를 조사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한 나라 안에 백성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세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행위가 죄가 된 이유는 근본적인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심으로 전쟁 때마다 승리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전쟁에서 이기면 진 나라의 모든 것이 다 이긴 자의 것이 되고 산 사람 또한 모두 승전국의 노예가 됩니다.
따라서 다윗이 통치하는 이스라엘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나라가 부강해졌고, 가장 넓은 국토를 가진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으로 된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단에게 속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마치 자신의 군대가 강력해서 승리한 것처럼 은근히 과시해 보려는 우쭐한 마음에서 인구조사를 한 것입니다. 이는 대단히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 교회도 부산에서 큰 교회 중에 속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잘못 생각하면, 우리 교회에 교인이 얼마나 많이 모인다는 자기 과시와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교인수가 많다고 해서 모두 다 좋은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교인수가 적어도 성도들이 은혜를 받아 바른 신앙생활을 하며 이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끼친다면 좋은 교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명심해야 하는 것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고 우리가 대신 받으려고 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된 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개척할 때 교회가 대단히 급히 성장하는 것을 보고, 제가 설교를 잘해서, 목회를 잘해서 교인들의 수가 느는 것으로 착각하고 잘못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정확하신지, 제가 그런 교만한 생각을 가지게 된 그 주간의 수요일 저녁예배 때, 마치 교인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몽땅 나오지 않았고 아이들만 몇 명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개척교회에서 갑자기 교인들이 나오지 않으면 목회자는 앞이 깜깜해집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예배당이 꽉 차도록 교인들이 나왔는데, 왜 갑자기 나오지 않습니까? 제가 무슨 죄를 범했습니까? 내 죄를 알게 해 주세요. 가르쳐 주옵소서.’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저는 집에 가기도 싫고 저의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계속 강단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새벽녘에 주님께서 “네가 해? 내가 하지.”하는 분명한 음성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수영로교회를 세운 것도 제가 세운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세우시고, 매주 성도들이 이렇게 많이 오는 것도 제가 잘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막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 용서해주세요. 몰랐습니다. 제가 잘해서 부흥되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주님이 우리 교회의 당회장이십니다. 저는 교육전도사와 같은 마음으로 충성하겠사오니 주님이 이 교회를 맡으시옵소서.’라고 참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요한일서 2:15~16을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남들보다 돈도 많이 벌고 성공도 하고 잘 나갈 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 보고 부러워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이생의 자랑’은 “내가 잘났다. 너보다 낫다. 내가 성공했다.”라고 하는 자신이 높아지고 자신이 영광을 받으려는 교만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생의 자랑’은 마귀로부터 온 것이며 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예수님을 자랑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높일까 생각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9:23을 보면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고 하셨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내게 명철함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된 것과 그 하나님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분임을 깨닫게 된 그것을 자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7:45~47을 보면, 다윗이 적군의 장수 골리앗과 싸울 때 하나님께 멋지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우렁차게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이 골리앗과의 대결에 앞서 하나님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이기고 지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선포함으로써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괴로운 일 슬픈 일이 내게 있다할지라도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만 돌릴 수 있다고 하면 축복으로 바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좋은 일이나 슬픈 일이나 어떤 일을 당하든지 간에, 항상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생각하며 살 때 누리게 되는 즐거움과 기쁨과 행복을 맛보며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사도행전 12:21~23을 보면, 어느 날 헤롯이 백성들에게 연설할 때에, 그곳에 모인 백성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고 큰소리로 외치자 그만 헤롯이 으쓱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즉시 주의 사자를 통해 헤롯을 치시니 충(蟲)이 먹어 죽었습니다. 헤롯은 마치 자신이 신이나 된 것처럼 행세하고 그 영광을 자신이 받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너 같은 인간은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즉시 벌레로 인해 죽게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명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들을 창조하시고 선택한 목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42:8에서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라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남에게 주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사람에게 돌리든지 또는 다른 것에 돌리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창세 전에 택하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주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어 예수 믿어 거듭나게 하셨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셔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목적을 에베소서 1~2장에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반복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살도록 하기 위해 특별히 저와 여러분을 구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고전 10:31).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이 인구조사를 시킨 죄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큰 재앙을 내리시면서 세 가지 중에 한가지를 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년 기근과 3달 동안 대적에게 쫓기는 재앙과 3일간의 온역을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이 세가지 중에 3일간의 온역을 택했습니다.
다윗이 3일간의 온역을 택한 이유는?
1.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믿었습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사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사울에게 시달리고 도망다니며 말로다 할 수 없는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잔인한 사람의 손에 빠지기보다는 자비하신 하나님의 징계를 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시편 103:8~11에서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을 보면, 저와 여러분이 과거에는 이 세상 풍속을 좇고 마귀를 따라 육체의 욕심대로 제멋대로 살았기 때문에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시고 은혜로 구원얻게 해주셨습니다. 이는 자비하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장차 올 모든 세대에게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2. 절대주권이 오직 하나님 손에 있음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생사화복과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고자 하시면 기근을 당해도 죽고, 대적에게 쫓기며, 설령 건강해도 불의의 사고로 죽을 것이고, 심지어 잠자리에서 자다가도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고자 하시면 어떤 일이 있어도 죽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죽을병이 들고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사실을 굳건히 믿고 하나님만 의지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믿음이 어린 사람들은 평안하고 만사가 잘 되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라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와도 낙심하기 쉽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징계하시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환난이나 재난이 오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섭섭해하며 교회를 떠나갑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어떤 환난이나 재앙이 와도 인내하며 감사함으로 이기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2장을 보면, 우리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의 징계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잘못된 길로 가도 하나님의 징계가 없으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십니다. 징계가 그 당시에는 슬퍼보이고 괴롭고 고통이 되지만,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룩하게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무디 목사에게 어떤 여자 교인이 찾아와 “제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저를 그대로 놔두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이 분명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디는 “부인! 부인은 지금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대뜸 “왜요? 내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출석했는데요”라고 반문했습니다. 무디는 다시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해도 아무 일이 없다고 좋아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똑바로 믿고 신앙생활도 바로 해야 합니다. 제멋대로 살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살면 하나님께서 절대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이 징계하십니다. 아마 이 자리에도 징계 중에 계신 분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큰 환난과 고통을 당할 때에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며, 심지어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환난과 고통과 죽음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왜 시험에 넘어지는가
조영식목사 / 삼하 24:10-17
들어가는 글
오늘은 5월 넷째주일이며, 교회력으로는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 임하였던 성령이 우리 가정과 교회에 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다윗의 통치 후반기에 태평성대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어려움이 없을 때에 오히려 깨어있지 못하여 생기는 영적인 권태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 권태기의 문제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멀어지게 됩니다. 그 결과로 다윗에게 신앙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영적 권태기에 찾아온 신앙의 위기를 다윗이 어떻게 극복하는지 깨닫고 우리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다윗은 어떻게 시험에 넘어졌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찾아온 영적 권태기의 증상은 분별 능력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 실례로 다윗은 자신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시험이 닥쳤을 때 분별하지 못하고 넘어졌습니다(1절). 그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통해 형통한 길로 인도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영적 권태기가 찾아왔을 때 주님께 묻는 기도를 망각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묻지 않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의 생각대로 재촉하였습니다(4절). 이처럼 격동시키는 시험에 빠지면 서두르며 재촉합니다. 재촉하는 영적 상태가 무엇이 문제입니까? 첫째로 하나님보다 자신이 앞서 나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여 죄를 범하게 됩니다. 둘째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조절하지 못함으로 재촉하는 일에 끌려가게 됩니다. 셋째로 과정을 무시하고 서둘러서 결과만 얻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세상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서둘러서 아무리 큰일을 이루어도 하나님은 영광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묻는 기도로 마음을 조절하고 주님께 인도를 받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다윗의 인구 조사가 무엇이 잘못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인구조사를 하였습니다(1절). 그의 인구조사는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잘못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어떤 잘못이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청지기 사명을 망각했습니다. 여기서 인구조사는 소유권 문제가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인구조사를 통해 자신의 소유가 얼마나 많은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백성을 자신에게 맡겼다는 청지기 사명을 망각했습니다. 교회에서도 성도들의 소유권은 목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들이 청지기 사명을 회복하여 모든 소유권이 주님께 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둘째는 자신의 교만을 나타냈습니다. 다윗 시대의 인구조사는 군사력이 얼마나 강한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9절). 그는 인구조사를 통해 자신의 군사력을 과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전쟁의 승리가 군사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망각했습니다. 결국 그는 군사력을 통해 자신을 스스로 높였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며 겸손한 자를 때가 되면 높이십니다(벧전5:5,6). 우리들이 하나님께 받은 능력이 클수록 스스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더욱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은 성도의 의무이고 높여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백성을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다윗이 처음에는 백성을 귀하게 여기며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백성이 왕의 힘을 과시하는 들러리가 되었습니다. 만물의 이치는 물이 있어야 배가 뜰 수 있습니다. 이것을 비유로 백성은 물이 되어서 왕을 배로 띄운다는 것입니다. 물의 백성이 평안할 때 배가 되는 왕도 순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의 백성에게 풍랑이 일어나면 배의 왕도 뒤집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이 되는 백성이 수단이 아니라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지도자가 참으로 그리운 시대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왕은 그럴지라도 우리들은 물이 되는 백성의 어떤 풍랑도 잠잠케 해줄 수 있는 예수님을 진정한 왕으로 모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진정한 회개는 무엇입니까?
다윗은 인구를 조사하면서 교만해져서 시험에 들었지만 회개하였습니다. 그가 교만한 시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어떻게 회개했습니까? 제일 먼저 하나님을 의식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라고 합니다(10절). 그가 자책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은 망각했던 하나님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를 통해 그가 묻는 기도를 다시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높이며 교만했던 자신을 미련한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이 모든 회개가 하나님을 의식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손길을 원했습니다. 그가 회개할 때 하나님은 갓 선지자를 보내서 세가지 징계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습니다(12,13절). 다윗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14절). 그는 사람에게 매를 맞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매를 맞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징계를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손길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징계를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손안에서 받으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성숙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자신이 책임지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고 합니다(17절). 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서 자신이 책임지려고 합니다. 다윗의 책임지려는 마음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목자의 심정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책임지려는 마음을 보고 징계를 종료하였습니다(16절). 아담부터 죄의 결과는 책임을 전가하며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통하여 죄를 극복하는 것은 남을 탓하지 않고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결혼을 약속한 커플이 있었습니다. 남자 친구가 여자 친구를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집에 들어오자 여자 친구의 눈을 안대로 눈을 가리고 방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녀는 프로포즈를 하기 위해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 줄 알고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녀는 기대도 되고 긴장도 되다 보니 배에 까스가 차올랐습니다. 그 때에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그녀는 서둘러서 남자친구에게 나가서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남자 친구가 전화를 받을 때 가스를 배출하고 한손으로 코를 막고 한손으로 휘저었습니다. 어느 정도 까스가 진정되자 남자 친구가 전화 통화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데 남자친구가 안대를 벗기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시부모 될 사람에 앞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시부모가 있을 것이라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사람은 의식하며 눈가림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함으로 말과 행동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의 시작은 하나님의 의식하지 못함으로 시작되고, 모든 회개는 하나님을 의식함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 첫째로 우리들이 재촉하는 것을 다스려서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고, 마음을 조절하며, 주님이 인도하는 과정을 통해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둘째로 우리들이 청지기 사명을 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소유를 인정하며, 교만하여 스스로 높이지 않게 하시며, 내 이익을 위해 주변 사람들이 수단이 되지 않게 하소서. 셋째로 우리들이 하나님을 의식함으로 회개하며, 하나님의 손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고 책임지는 삶을 살게 하소서.
회개와 긍휼
사무엘하 24:14-17 / 산정현교회
지난주에는 다윗의 인구조사의 죄를 살폈습니다. 나의 힘을 과시하고 하나님이 주신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자랑하고 싶은 다윗의 마음을 어리석음을 보았습니다.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보게 될 다윗의 회개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다윗을 위대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했던 이것을 살피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회개
사무엘하에 나타난 다윗의 큰 죄는 11장의 밧세바 사건과 24장의 인구조사 두 가지입니다. 이렇게 큰 죄를 지은 다윗이 성경에서 큰 인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은 그의 회개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과의 차이가 이것입니다. 사울은 회개하지 않는 자였기에 버림받았고 다윗은 회개할 줄 알았기에 존귀한 자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1)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10절을 그의 회개가 나옵니다. 먼저 그는 스스로 뉘우쳤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죽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11장의 밧세바 사건에서는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 찌를 때까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스스로 깨닫습니다. 영적으로 더 높은 자리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 감각이 죽지 않게 하십시오.
2)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자책한 다윗은 자신의 죄가 큰 것을 알았습니다. 큰 죄를 짓고도 작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는 작게 여기고 다른 사람의 죄는 작은 것도 크게 여기고 싶은 것이 죄인의 특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는 “그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남의 죄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죄가 큰 것을 알았습니다.
11장에서 밧세바로 인한 범죄 후에는 이런 “큰 죄”의 고백은 없었습니다(12:13).
작은 죄도 크게 아는 것이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3)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또 다른 고백은 자신의 행위가 심히 미련한 일이었다는 고백입니다.
죄를 짓는 당시에는 그것이 가장 지혜롭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얼마나 미련한 일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미련함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정말 미련한 자는 미련함을 모릅니다. 죄인은 자기의 죄를 모르고 미련한 자는 미련함을 모르는 법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지혜롭고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미련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4)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죄를 깨달은 다윗은 용서를 구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죄의 은혜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사죄의 은총에 대해 많은 고백을 했습니다.
32:1 “허물의 사하심을 받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
더 깊은 회개
우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윗이 더 깊은 회개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로 칠만 명이 죽자 다윗이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17절,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하였나이까? 청컨데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자기가 당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백성들이 당하는 진노는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나를 치시고 내 가족을 치라고 말씀드리는 다윗의 모습은 참 존경스럽습니다. 자신의 죄값도 남에게 떠넘기고 싶어 하는 것이 죄인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백성들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사울의 경우는 자기의 죄도 백성들에게 떠넘깁니다(삼상15:21). 그래서 그는 소망이 없는 자입니다.
다윗의 회개는 번제를 쌓는 것으로 완성됩니다(21-25절).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 제사를 위해 대가를 지불합니다. 그냥 가볍게 제사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정성을 다해 준비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사함을 구하였습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회개에 있습니다.
선지자 갓
이런 과정에 선지자의 중요한 역할이 나옵니다.
11절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18절 “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아뢰되”
선지자의 역할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나단선지자는 11장의 밧세바 범죄 후에 12장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갓은 24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의 선지자의 역할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말씀을 가지고 왕들을 깨우쳤습니다. 다윗은 이 선지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기에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이런 다윗의 회개가 효과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16절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천사가 계속 하나님의 징계를 진행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시면서 그치게 하십니다.
칠만명이 죽은 후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번제를 드리는 재앙은 완전히 끝났습니다(25절).
자기들의 죄로 죽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긍휼히 여기셔서 진노의 칼을 거두셨습니다. 이 긍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늘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긍휼과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시145:8,9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9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사무엘서는 이렇게 죄인인 다윗이 회개와 하나님의 긍휼로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면서 마감합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열왕기서에서 모든 왕들의 기준이 됩니다. “다윗처럼 사느냐 아니냐”로 모든 왕들을 평가합니다(왕상11:33).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 같은 연약한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므로 다시 세우시고 초대교회의 중요한 기둥 역할하게 하시는 것이 신약 역사서의 중요한 흐름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큽니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