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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장 쫓김 중의 인연
그때껏 현청에 나와 있던 지현(知縣)은 주동과 뇌횡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까닭을 물었다.
두 사람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집 안팎을 두 차례나 샅샅이 뒤졌으나 송강(宋江)은 없었습니다."
"또 그 아비 송 태공은 앓아누워 오늘 어떨지 내일 어떨지 모르는 판이고, 아우 송청(宋淸)은 지난달에 집을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합니다."
"다만 송 태공이 이 일에 증거 될 만한 문서를 내주기에 우선 그것만 가져왔습니다."
지현(知縣)도 굳이 송강의 가족을 괴롭힐 마음이 없던 터라 그런 두 사람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들이 가져온 문서를 보고 오히려 잘 됐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이 문서를 부윤에게 보내는 한편 널리 방을 붙여 송강을 잡게 하라."
그렇게 일을 얼버무려 버렸다.
현청에서 일 보는 사람들 중 평소 송강과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도 장문원을 찾아가 좋은 말로 달랬다.
장문원은 그들의 낯을 봐서라도 그 권유를 뿌리치기 어려운 데다, 계집도 이미 죽어 버린 터라 송강에 대한 앙심을 풀었다.
따지고 보면 그 또한 그 계집의 일이 있기 전에는 송강과 가깝던 사이였다.
장문원이 입을 다물자 주동(朱仝)은 다시 염씨 할멈을 구워삶았다.
적잖은 돈과 재물을 쥐여 주며 할멈이 주부(州府)에 고소장 내는 걸 말렸다.
염씨 할멈은 딸 잃은 한과 슬픔이 적지 않았지만 받은 재물이 상당한 데다 장문원까지 뒷짐을 지자 기세가 꺾였다.
이에 송강을 벌해 달라는 할멈의 고소장이 주(州)까지는 올라가지 않게 되었다.
주동(朱仝)은 다시 재물을 써서 주의 벼슬아치들을 달랬다.
송강에 관해 올라간 현청의 문서들을 적당히 구겨 박아 버리게 한 것이었다.
그런 다음 지현을 달래, 송강을 잡는 데 일천 관의 상금을 거는 것으로 겉만 요란하게 처리하게 했다.
또한 당우아(唐牛兒)의 일은 범인은 놓아 보내게 한 죄를 물어 등허리에 매 스무 대를 때린 뒤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를 보았다.
그 밖에 송강과 관련해 잡아들인 사람, 모아들인 증거도 흐지부지 놓아 보내고 흩어 버리게 하니 곧 모든 게 잠잠해졌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짚어 봐야 할 일은 송강의 집 안에 만들어져 있던 땅굴이다.
왜 그런 피신처가 필요했을까.
송(宋)나라 때는 정치가 썩어 높은 벼슬아치는 살기가 편했고, 낮은 벼슬아치는 매우 어려웠다.
높은 벼슬아치가 편했던 것은 간신이 권력을 잡고 아첨만으로 나라를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가까운 피붙이나 재물을 많이 내는 자만 아랫사람으로 썼기 때문이었다.
한편 낮은 자리에 있는 벼슬아치가 살기 어려웠던 것은 그런 못된 벼슬아치들이 위에 있어 생기는 것은 적고 일만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송강(宋江)이 하던 압사(押司)란 일은 맡은 지역에서 범죄가 발생하면 가벼워야 얼굴에 먹자를 넣고 귀양 가는 것이고, 무거우면 가산을 몰수당하고 목숨까지 잃는 것이었다.
따라서 송강(宋江)에게는 그 같은 피신처가 필요했다.
송 태공이 내놓은 문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한 사람이 죄를 쓰면 그 부모 처자까지 연루되어 괴로움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문서로 부모 자식의 절연을 밝히고 관청에 가서 인정을 받아 둠으로써 그 연루됨을 피할 수 있었다.
송강(宋江)도 그걸 위해 미리 그런 문서를 만들어 두고 거처까지 따로 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 두 가지 준비로 급한 고비를 넘긴 송강(宋江)은 주동과 뇌횡이 돌아가기 바쁘게 땅굴에서 나와 아버지와 아우를 모아 놓고 의논했다.
"이번에 주동(朱仝)이 보아주지 않았으면 관가에 잡혀갈 뻔했습니다."
"그 사람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그렇지만 이제 더는 여기 숨어 있을 수 없게 되어 이만 아우와 함께 멀리 달아날까 합니다."
"하늘이 불쌍히 여기시어 천하에 사면령이 내린다면 그때에나 다시 돌아와 아버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남몰래 주동에게 재물을 보내시어 그로 하여금 저를 위해 뇌물로 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또 염씨 할멈에게도 약간의 금은을 주어 할멈이 더는 고소장을 들고 이곳저곳을 찾아다니지 않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송강(宋江)은 송 태공에게 그렇게 의논 겸 당부를 했다.
송 태공도 아무런 대책이 없는지 아들의 말을 따랐다.
"뒷일일랑 조금도 걱정하지 마라."
"다만 너희 형제나 몸조심하고, 어딜 가든 자리 잡히는 대로 소식이나 전해 다오."
그렇게 떠남을 허락했다.
그 밤 송강(宋江) 형제는 먼 길 떠날 보따리를 꾸리고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사경이 되어 날이 희끄무레 밝아 왔다.
세수를 마친 형제는 이른 아침밥을 먹고 길을 떠났다.
송강(宋江)은 범양 전립에 흰 비단옷을 걸치고 삼으로 짠 짚신을 신었으며, 아우 송청(宋淸)은 그 하인같이 꾸미고 보따리를 등에 졌다.
형제가 나란히 송 태공 앞에 나가 하직인사를 올리자 송 태공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갈 길이 머니 부디 여기 일일랑 걱정 마라. 너희 형제 몸조심이나 하여라."
그렇게 분부하다 말끝을 맺지 못했다.
송 태공에게 큰절을 올린 형제는 집 안의 머슴들을 보아 놓고 당부했다.
"언제나 곁에 있으면서 아버님을 돌봐 드려라. 특히 음식 수발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머슴들도 여러 해 송강의 집에서 은덕을 입어 온 사람들이라 눈물을 글썽이며 그러마고 다짐했다.
이윽고 집안 처리를 모두 끝낸 송강(宋江)과 송청(宋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송가촌을 떠났다.
때는 가을도 깊어 날이 매우 찼다.
길을 걸으면서 송강(宋江)이 탄식처럼 말했다.
"나서기는 했다마는 이제 누구를 찾아간단 말이냐?"
송청(宋淸)이 조심스레 그 말을 받았다.
"제가 듣기로는 창주 횡해군에 시대관인(柴大官人)이란 분이 있다 합니다."
"그는 대주(大周) 황제의 적손(嫡孫)으로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를 찾아가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의(義)에 재물을 아끼지 않으며, 천하의 호걸들과 사귀기를 좋아하고, 죄지어 귀양 가는 이도 반겨 준다 합니다."
"이 시대의 맹상군(孟嘗君)이라고도 불린다니 우리 그리로 한번 가 보지요?"
"나도 그 생각은 했다마는 선뜻 마음이 정해지지 않는구나."
"그 사람과 글로는 자주 왕래가 있었지만 인연이 없어 아직 만나 본 적이 없으니...."
송강(宋江)이 그렇게 자신 없어 했으나, 그렇다고 달리 더 좋은 곳도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은 시진(柴進)을 한번 찾아보기로 하고 창주로 길을 잡았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수호지 - 이문열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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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연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