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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테오가 받은 영> 최승정 베네딕토 신부
바오로 서간 중 3편의 서간, 즉 티모테오 전후서와 티토서는 18세기부터 “사목서간(Pastoral Epistles)”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불려 왔습니다. 대부분의 바오로 서간이 특정 공동체를 향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사목서간은 티모테오와 티토라는 인물에게 보내진 서간들입니다.
하지만 그 서간의 내용으로 볼 때에 3편의 사목서간은 개인에게 보내진 사사로운 편지라기보다는 바오로가 지역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티모테오와 티토에게 보내는 공적 권고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 서간들을 통해 바오로는 교회의 제도와 조직, 잘못된 가르침 등에 관한 사목신학적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자신의 안수를 통해 티모테오가 받은 영은 “비겁함의 영”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임을 말합니다. 여기서 바오로가 비겁함에 대해 말하는 것은 바오로가 감옥에 갇히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위해 옳은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사실과 그렇게 갇혀 있는 바오로와의 관계를 티모테오가 결코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음을 바오로는 재차 명시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충고합니다: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그대가 맡은 그 훌륭한 것을 지키십시오.”
바오로가 살았던 시대와 우리의 시대를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참으로 신앙하기에 편한 세월을 살고 있는 듯 보입니다. 박해의 공포나 감옥에 갈 두려움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주일이면 성당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의 시대나 우리의 시대나 교회와 세상의 대조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문명을 통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으리라 믿는 세상 안에서 교회는 하느님 앞에서의 경외와 겸손에 대해 가르쳐야 하고, 물질주의의 소비사회 안에서 가난과 절제에 대해 묵상해야 하며, 자신만을 생각하라는 세상의 이기주의 앞에서 나눔과 섬김의 가치에 대해 역설해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바오로의 시대와 우리의 세상 사이에서 참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감옥 같은 현실은 별반 큰 차이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단단한 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감옥처럼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세상 한가운데서 죄인처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오로는 역시 성령을 통한 “믿음과 사랑”으로 부끄럼 없이 살아가라고 충고할 것입니다.
오늘의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은 조금 다른 어조로 바오로가 말하는 신앙의 긍지에 대해 언급합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 같고, 모든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돌무화과나무에게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해도 복종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은 같은 말씀을 전하며 아예 나무들이 자라는 “산을 (통째로!) 옮기는 믿음”의 위대한 능력에 대해 언급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영 안에서 살아갈 때 세상은 분명히 변할 것이라고, 참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이룰 것인지에 대해 예수님께서 생생하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의 수고로운 삶을 통해 세상 안에서 작은 변화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을 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오늘의 복음의 말미에서 예수님은 역시 잊지 않고 가르쳐 주십니다: “저희는 저희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멘
가톨릭대학교 성서신학 교수
출처 : 서울주보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5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7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 8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 9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 10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의 믿음을 더해 주시고 그 믿음에 의지하여 걸어가도록 저희를 인도하소서.
독서
스스로 저를 보면서 ‘정말 하느님께서 살아 계신다고 믿는다면 내가 이럴 수 있을까 ?’ 라고 생각하는 때가 가끔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루카 17, 5) 라고 청한 제자들의 마음이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째서 그들은 스스로 믿음이 부족하다고 느꼈을까요 ? 루카복음에서 오늘 복음 앞에 나오는 말씀인, 형제가 하루에 일곱 번 잘못하더라도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주님의 요구를 받아들이기가 인간적으로 너무 어려워 그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제1독서에 나온 하바쿡 예언자의 경우처럼, 억압과 폭력이 난무하는 이 세상 모순을 바라보면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림을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경우는 드물지 않습니다. 우리가 걸려 넘어지는 바로 그런 순간에 사도들 또한 약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문제의 정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당신의 계명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쉬운 것으로 바꾸어 주시라고, 아니면 이 세상을 더 이해하기 쉽고 질서 있는 곳으로 만들어 주시라고 청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청하는 것은 다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라는 것입니다. 주님 뜻에 따라 살 수 있는 것도, 이 세상 안에서 절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오직 그 믿음에 의지할 때라는 것을 사도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그렇듯 그들도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실상 믿음이 없다면 도전 또한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과 아무 상관 없이 제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의 불의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믿음에 수반되는 갈등도 겪지 않겠지요. 걸려 넘어질 일도 없겠지요. 작은 믿음이나마 있기에 나 자신의, 그리고 이 세상의 현실과 믿음 사이에서 격차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스스로 믿음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는 것은 적어도 그 마음이 지향할 바를 인식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 이라는 주님의 응답은, 마치 믿음이 너무 작다고 책하시는 듯 보입니다. 말 한마디로 나무를 바다로 옮겨지게 할 수 없다면, 제자들이 아니면 제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겨자씨보다 더 작은 것인가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수긍합니다. 예, 주님. 제 믿음은 겨자씨보다도 더 작습니다. 이것이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임을 당신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1코린 13, 12) 볼 뿐이라는 것,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 (히브 11, 1) 이어서, 눈에 보이는 것에 흔들리는 저희의 믿음은 한없이 나약하기만 하다는 것, 다 아시지 않습니까. 인간을 진흙으로 빚어 만드신 분이 바로 당신이시기에, “우리의 됨됨이를 아시고 우리가 티끌이심을 기억” (시편 103, 14) 하시지 않으십니까. 주님,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이어서 예수님은,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우리가 다 했다 하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무엇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 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하여 우리에게 어떤 것을 명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게 하고 주님의 법은 참되어 어수룩한 이를 슬기롭게 하네. … 당신의 종도 이에 주의를 기울이니 이를 지키면 큰 상급을 받으리이다.” 라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시편 19, 8. 12) 여기서 ‘상급’ 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본래 꼭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킴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 유익’ 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충만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무엇을 받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리고 주님께 ‘분부를 받은 대로’ 사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이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게 하고, 또 세상의 눈에는 중요하게 생각되는 어떤 가치를 포기하게 합니다. 그것이 … 하느님을 위해서일까요 ? 하느님을 거슬러 살아가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 아닐까요 ? 이것이 너무 현세적인 사고방식처럼 보입니까 ?
성찰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믿음이 없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삶, 자신의 이익 외에는 추구할 것이 없는 삶이 얼마나 가련한 삶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기도
정녕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 당신을 아는 이들에게 당신의 자애를, 마음 바른 이들에게 당신의 의로움을 늘 베푸소서. (시편 36, 10 – 11)
안소근 수녀(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출처 : 야곱의 우물
군대에 계신 예수님
“이들은 훗날 주님의 교회를 이끌어 갈 희망이요, 조국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고 고백하는 우리의 든든한 파수꾼들입니다.”
하루 종일 침묵을 지킬 때가 많은 핸드폰이 울려 전화를 받아보니, 이런, 주보 원고 청탁 전화입니다. 군인주일을 맞이하여 교구 출신 군종신부에게 주보 원고를 부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지사인데…. 기왕이면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앞서다보니 제한된 지면 안에 무슨 내용을 써야할지 고민이 됩니다.
어느덧 군종신부 5년차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보좌신부로 지낸 시간보다 더 긴 시간입니다. 전역을 일 년도 채 남겨 두지 않은 요즘, “곧 떠날 것처럼 준비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머물러라.”는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소(蘇)주교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 글을 여러분들께서 읽고 계실 때면, 제대를 앞둔 저는 마지막으로 다른 교구 큰 본당에 가서 고해성사를 주고, 모든 주일 미사 를 봉헌하며 “청년 사목의 황금어장, 군종교구 좀 도와주세요.” “오늘 여러분들의 2차 헌금은 군 복음화를 위한 군종 교구 일년 예산으로 쓰여집니다” 라는 강론을 하고 있겠지요. 이것이 군종신부로 불리움을 받은 자가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큰 일입니다.
혹여나 미사를 주례하지 않으면 주례석에 앉아계신 본당 신부님을 뒤로하고 처음뵙는 교우들 앞에서 공군 조종복을 입고 강론 마무리로 또 ‘빨간 마후라’를 부르겠지요. 왕초보 실력이지만 기타를 어깨에 매고 노래를 부릅니다. 지금까지 그런대로 반응은 좋습니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병사들을 포함하여 군인가족 신자들은 일반 사회 신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심이 부족합니다. 병사들 역시 학창시절에는 냉담을 하다가 군대에 와서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한 친구들이거나 비신자들입니다. 그저 때가 되었으니 “뭐 없나”하고 기다리는 군중들과도 같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형제들과 함께 하시고,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제가 앞서 말씀드린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들은 훗날 주님의 교회를 이끌어 갈 일꾼들이요, 조국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루카17,10)이라고 고백하는 우리의 든든한 파수꾼들입니다. 이들에 대한 자그마한 관심과 사랑이 더 큰 사랑을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러한 작은 관심과 사랑들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다시 일어나게 할 것입니다.
이 메마른 부대에, 함께 사랑의 씨앗을 심지 않으시겠어요?
이기범 요셉 신부 공군 명성대 성당
출처 : 춘천주보
어느 군종 신부의 일기
부활이 끝나고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신호등에 서 있었는데 뒤에서 오는 차가 내 차를 받고 내 차가 다시 앞차를 받았습니다. 머리를 핸들에 부딪혔고 온몸에는 멍이 들었습니다. 병원에서는 6주 진단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크게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10년 전 사병으로 군 생활할 때였고 이번에는 군종신부로서 다시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10년 전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습니다.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지켜 주소서.”“김동진 상병과 교통사고가 났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경황이 없었다.”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저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습니다. 사고가 나고 첫 번째 한 일은 기도 하는 일이 아니라 힘겹게 휴대폰을 꺼내 헌병대에 연락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한일은 담배를 사서 뒤 차 아저씨와 함께 담배를 피운 것입니다. 나 보다는 가해자 아저씨가 더 놀란 듯해 그 아저씨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봤습니다. 왜 첫 번째로 한일이 헌병대에 전화한 일인가? 기도를 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부모님이나 동료 사제한테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할수도 있는데 헌병대라니...
처음에는 내가 군인이라 그렇게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사고가 나서 쓴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사고가 났을 때 머릿속에 첫 번째로 떠 오른 것, 그것은 헌병대에 빨리 전화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군인 신자들이 좋고 내가 무언가 그들에게 주고 싶다는 막연한 이유 때문에 다시 군대를 선택해 군종 사제가 됐는데, 나의 교통사고 때문에 혹 우리 65사단과 신자들이 곤란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헌병대에 먼저 전화를 걸게 되었다.”
사실 지금은 제가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받고 살아갑니다. 성주간 부활전례가 모두 끝나고 너무 좋은 경험이었다고 이야기해 주던 장병들, 감동받았다고 이야기 해주던 사목위원들이 있기 때문에 정말 내가 이곳에 존재해야 한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시켜 주는 것,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며 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존재 가치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지금도 많은 군종 사제들이 자신의 소임지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며 또 그들에게 존재의 가치를 확인시켜주며 오늘도 열심히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길기문 T. 아퀴나스
육군 천보 성당
출처 : 대전주보
허리숙인 무화과(無花果) - “꽃 없는 열매”
모든 식물들은 각각의 형태로 꽃과 열매를 만들어 내면서 창조의 질서를 이어간다. 그런데 유독 무화과(無花果)는 ‘꽃이 없는 열매’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니! 이름 그대로 무화과는 꽃이 없을까?
사실, 그렇지 않다. 이 나무의 이름을 ‘꽃이 없는 과실’로 지은 것은 다른 나무와 달리 겉에서 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교구청 앞마당에도 허리를 깊숙이 숙인 무화과가 있는데 나도 그 꽃을 본 적이 결코 없다. 그러나 분명히 무화과도 꽃을 피워낸다. 이 나무는 봄부터 여름 동안 잎겨드랑이에 주머니 모양의 열매가 발달하는데, 꽃은 그 안에 숨어 있다. 그러면 열매 안의 꽃으로 어떻게 벌, 나비가 날아올까? 실은, 예쁜 벌, 나비 대신 무화과 좀벌레를 유인하여 열매를 맺고 그렇게 창조의 의무를 이어간다.
성서에는 60회 이상 이 무화과가 등장하는데, 특히 처음 등장하는 나무로도 유명하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이 무화과 잎을 엮어서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렸다. 열왕기 상,하에서는 평화와 번영의 배경에 이 무화과가 등장한다. 또한 신명기에서는 축복의 땅에 무화과가 자란다. 하지만 마태오복음(21,19)에서는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그 무화과가 오늘 복음에서는 강한 믿음의 힘 앞에 바다로 옮겨질 위기에 처해있다.
예부터 잘 익은 무화과는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건강에 좋은 식품으로 인식되었으며 많이 먹어도 탈이 없다고 한다. 감처럼 말려서 먹을 수도 있으며 다른 나무들에 비해 심은 후 아주 빨리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잎도 약용으로 사용할 수 있고 흉년 따위로 기근이 심할 때 농작물 대신 먹을 수 있는 구황(救荒)식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장점만으로도 무화과는 실로 훌륭한 나무이다.
바로 그 무화과가 우리 교구청에 있는 듯, 없는 듯 누구에게도 시선을 받지 못한 채 그렇게 허리를 숙이고 있다. 그는 화려한 꽃도 없이, 향기도 없이, 거기에 벌과 나비 같은 친구도 없이 그저 이 가을 소박한 열매를 제공하며 말하는 듯하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높아져 가는 가을 하늘 아래 서서 나는 오늘 부끄러이 그 녀석의 겨드랑이를 들추어 볼 것이다. 그 잎에 감추어두었던 나의 부끄러움과 겸손치 못함을 따내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제 그의 앞을 지날 때면 좀 더 허리를 동이고 고개를 숙이리라! 바로 이 허리숙인 무화과처럼!!
정윤섭 요셉 신부 | 교구 새복음화사목부
출처 : 인천주보
‘그리스도 주의(主義)’
한 달 쯤 지난 일입니다. 신문에서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호킹 박사는 천재 물리학자라는 명성에 걸맞게(?) “과학은 신을 불필요하게 만든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이 세상’에서 신은 굳이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자신감과 호기가 가히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흐름이 과연 신문에 나올법한 저명인사들만의 것일까요?
실로 ‘나’의 시대입니다. ‘나’의 가치판단, ‘나’의 능력, ‘나’의 잣대가 더없이 중요합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자기 주도적으로 살며 자아를 실현해 나가는 삶을 사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선악의 기준이 바뀌는데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나’의 가치판단에 부합하고 ‘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나’의 잣대로 옳게 여겨지는 것을 선(善)으로, 그렇지 않은 것은 악(惡)으로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때문에 더 이상 희생이나 봉사 따위는 미덕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온갖 권력과 힘을 동원하여 ‘악한 선’을 위해 정의를 짓밟는 것이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이 세상 앞에 고개를 떨구게 됩니다. (하바쿡 예언자의 탄원과 주님 응답의 말씀을 우리는 듣습니다.) 이런 세상이 믿고 신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직 ‘나’입니다. ‘나’만 믿을 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시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이기에 더 뚜렷한 분별력과 가치관이 필요할 터이지만, 우리는 세상적인 일에까지 가지 않더라도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느님 앞에 ‘나’를 내세우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님께 의탁하며 청하고 매달리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내 기도를 안 들어주셨을 때를 위한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대상은 무엇일까요? 우리,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해 봅시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사도 바오로가 우리를 힘차게 독려합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독서, 2티모 1,8). 나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순명합시다. 순명하는 것이 ‘나’를 꺾는 부끄러운 일일까요? ‘이 시대 이 세상’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 주의(主義)’로 나아가야 합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는 우리의 고백에,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하시는 주님의 응답이 들려올지 모릅니다. ‘나’를 믿는 세상이 주는 위로가 이보다 더 달콤할까요?
상록수성당 보좌 김유곤(테오필로) 신부
받으시옵소서 (최민순 신부)
받으시옵소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아니더라도
여기 육신이 있습니다. 영혼이 있습니다.
본시 없던 나 손수 지어 있게 하시고
죽었던 나 몸소 살려주셨으니
받으시옵소서 님으로 말미암은 이 목숨 이 사랑
오직 당신 것이오니 도로 받으시옵소서
갈마드는 세월에 삶이 비록 고달팠고
어리석던 탐욕에 마음은 흐렸을망정
심어주신 사랑이야 금갈 줄이 있으리까
받으시옵소서 받으시옵소서
당신의 것을 도로 받으시옵소서
가멸고 거룩해야 바쳐질 수 있다면
영원히 둘 이라도 할 수 없는 몸
이 가난 이 더러움을 어찌 하오리까
님께 바칠 내 것이라곤 이 밖에 또 없사오니
받으시옵소서 받아주시옵소서
가난한 채 더러운 채 이대로 나를 바쳐 드리움은
오로지 님을 굳이 믿음이오라
전능하신 자비 안에 이 몸이 안겨질 때
주홍 같은 나의 죄 눈 같이 희어지리다
진흙 같은 이 마음이 수정궁처럼 빛나리이다.
떠나라!!! 2004년 9월 의정부교구가 출범하자마자 2달만에 주님께서 저를 제비로 뽑으시어 새로운 세상 군종교구로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광야(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에서 5년이 넘게 정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도 정화중입니다.
군종신부. 이미 오래전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새로운 이름. 다만 저는 그 이름을 받아들이고 감사드릴 뿐입니다. 그리고 목숨을 다 바쳐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살려 노력할 뿐입니다.
감히 저의 몸을 주님께 봉헌했다고 하는 말은 너무도 거창한 말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제가 주님께 드린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도 많은 사랑을 주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이제 저에겐 오직 주님께 돌려드릴 것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이 비천한 종을 쓰시겠다면 이 한 몸둥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온전히 그분께 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이니.
주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가라하신 그 길을 끝까지 쉼 없이 달려갈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 아멘.
군종 1군단 사령부 정재웅(마티아) 신부
출처 : 의정부주보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누구의 것입니까?”라는 질문의 정답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몸소 창조하셨기에 그분에게 속해져 있는데,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에 맞도록 잘 관리하도록 우리에게 위탁해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살아간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가진 것이란 비단 물질적인 재화뿐 아니라 우리가 가진 육체적·정신적인 모든 재능과 능력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우리가 행하고 열매를 맺는 그 모든 것도 바로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과연 하느님의 은총 없이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하여 하신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는 말씀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매우 계산적이며 냉혹한 주인으로 묘사되는 것이, 평소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하느님의 자비로운 모습과는 많이 동떨어져 있어, 우리를 많이 당황스럽게 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강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께서 주신 능력에 의해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마땅히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면 당연히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더구나 바로 이 겸손한 마음이 우리를 참된 믿음으로 이끌어준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실제로 이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고 주님께서는 다시금 우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루어놓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에서 비롯된 사실에 감사하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면 하느님께서는 틀림없이 우리에게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그리하여 비록 우리가 돌무화과나무를 바다에 심을 수 있는 능력은 가질 수 없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나라와 함께 이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아 누리며 살아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구경국 알로이시오 신부 / 복지법인 로사봉사회 이사장 겸 흰돌타운성당(준)
출처 : 부산주보
와서 보시오!!!
그렇게도 무더웠던 계절이 지나고 벌써 전방 철책 산악지역에서는 겨울을 느끼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참 세월이 빠르다고 느낍니다. 제가 군종사제가 된지도 벌써 20년이 다되었으니 말입니다. 입대할 때가 엇그제 같은데 …… ☺
어젯밤에 잘 주무셨는지요? 혹시 북한이 쳐들어 오면, 일본이 쳐들어 오면, 중국이 침략을 하면 어쩌나 하면서 걱정이 되어 잠을 설치시지는 않았는지요? 대부분 아무 걱정없이 편안히 주무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편히 잠잘 수 있었던 것은 전후방 땅, 하늘, 바다에서 우리 많은 젊은이들이 나라를 밤세워 지켜주고 있기 때문은 아닐런지요!!!
이런 군인들을 위해 저희 군종사제 96명(마산교구출신은 4명)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군대를 선교의 황금어장이라고들 합니다. 정말 그렇게 느끼십니까? 아니면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 말하고 생각하십니까?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발표한 2008년도 한국 천주교회 통계 중 20대 젊은이들이 세례 받은 숫자가 30,812명입니다. 신부님 숫자가 제일 많고 젊은이들이 제일 많은 서울교구가 1,625명 이어서 수원교구 401명, 대구교구 265명, 부산교구 202명, 안동교구 17명, 광주교구 106명 그리고 우리 마산교구가 85명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군종교구에서는 몇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을까요? 전체의 약 90%인 27,309명의 젊은이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었습니다. 여기서 감탄사와 박수가 한번 나와야 하는데. 마음으로나마 군종사제와 수도자와 평신도 선교사들에게 큰 박수 부탁합니다!!! 혹 큰 느낌 없이 무덤덤하신지요.
일반본당에서 본당신부님, 보좌신부님, 수녀님, 청소년 분과장 및 수많은 교리교사들께서 얼마나 많이 노력을 하고 또 투자도 하십니까? 그 노력에 비해서 학생들이나 젊은이들이 얼마나 성당엘 옵니까? 기존 신자 아이들도 잘 참여를 하지 않으니 비신자 젊은이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오히려 바깥 세상이 더 재미있으니 성당에 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투자에 비해 결과는 미약한 경우가 너무나 많지요. 보고 들을 기회마저 없는 경우가 많지요. 여기에 비해서 군대는요? 저희 군종신부들이 똑똑해서도 아니고 좋은 프로그램으로 젊은이들을 초청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맛있는 것으로 꼬시는(?) 것도 아니지만, 매년 25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젊은이들이 몰려 와서 듣고 보고 체험을 합니다. 하느님을 알릴 기회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지요.
군인들이 별종은 아니지요. 다 우리 자식들이요, 삼촌이며 조카이고, 손자 손녀들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있는 그들에게 많은 기도와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오늘 2차 헌금을 통해 군종교구를 많이 도와 주시면, 저희 군종교구도 선교의 황금어장으로 많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구성진 율리아노 군종 신부(무열대본당)
출처 : 마산주보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제43회 군인주일을 맞이하여 전후방 각지에서 국토방위에 여념이 없는 육해공군 장병들, 또 이들을 돌보는 군종 사제들과 그 동안 군사목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기도와 지원을 해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와 사랑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콜로 3,15)
올해는 36년이란 일제의 기나긴 압박에서 해방되고 5년 만에 또다시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이 땅에 일어난 지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3년여 동안 있었던 6.25 전쟁의 포성은 우리 국군 62만여 명과 유엔군 15만여 명의 숭고한 자기헌신에도, 삼천리 금수강산을 폐허로 만들고 천만 이산가족의 아픔을 만들어내고서야 비로소 멈췄지만, 이 평화는 완전한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1.21청와대 기습사건(68.1.21)을 비롯하여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침투사건(68.10.30), 판문점 도끼만행사건(76.8.18), 미얀마 아웅산묘소 폭파사건(83.10.9), KAL858기 폭파사건(87.11.29), 강릉 잠수함침투사건(96.9.18)과 남침용 땅굴(제1.2.3.4) 굴착(74.11~90.3), 제1연평해전(99.6.15), 제2연평해전(02.6.29), 천안함 사건(10.3.26) 등 정전협정(53.7.27) 이후 60여 년 동안 북한은 끊임없이 수많은 대남도발을 통해 이 땅의 평화를 위협해 왔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그러기에 우리의 아들딸들인 대한민국 국군 장병은 오늘도 전후방 각지에서 묵묵히 자기의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며,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는 말씀에 힘입어 이 땅에 완전한 평화를 이룩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또한 군종교구 내의 모든 사제들과 교구민들은 비록 군 사목을 위한 성직자들이 부족하고 재정적으로 열악한 상황에서도 모두가 하나 되어, ‘평화의 봉사자’인 장병들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참된 평화와 행복을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도약 60! 세계 평화로”
우리 군은 6.25 전쟁 60주년을 맞아 올 한해 “도약 60! 세계 평화로”라는 기치아래 시대와 세대를 넘어 우리 민족의 아픈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민족의 통일과 번영, 더 나아가 세계 평화의 선도를 위한 도약의 계기로 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6.25 전쟁 당시 21개국에서 지원을 받던 동양의 작고 가난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 11대 무역대국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며, 세계 7개국 8개 지역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UN PKO 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받은 은사에 따라,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로서 서로를 위하여 봉사하십시오.”(1베드 4,10)
6.25 전쟁으로 초토화된 대한민국의 발전은 초개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바친 수많은 국군 장병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우리 군종교구는 이러한 국군 장병들의 위국헌신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51년 4월 11명의 사제가 무보수 촉탁 문관 신분으로 6.25 전쟁터에서 군종활동을 시작한 이래, 2009년 교구설정 20주년을 보내고 이제는 2011년 군선교 60주년을 준비하고 있는 군종교구는 ‘군 복음화 25%’라는 목표 아래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군종교구’(2006년), ‘말씀으로 성장하는 해’(2007년), ‘전례와 교리를 배우고 실천하는 해’(2008년), ‘성사의 삶을 사는 해’(2009)를 살아왔습니다.
특히 2010년 올해는 ‘기도와 봉사의 삶을 사는 해’를 살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함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와 일치를 더욱 깊이 체험하며, 이를 통해 전후방 각지에서 흔들림 없이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는 봉사의 삶을 살아 “군생활로 조국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국민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가톨릭교리서 2311항 : 사목헌장 79항)이라는 우리의 사명에 맞갖도록 더욱 노력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1)
마흔 세 번째 맞이하는 군인주일에 여러분들이 주시는 기도와 관심, 그리고 재정적 지원은 장병들은 물론 이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군종 사제들에게 힘이 되고, 그들이 군에서 만들어갈 참 평화와 행복이 넘치는 하늘나라 건설에 큰 밑바탕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시편 23,1-6)
6.25 전쟁 60주년을 맞는 지금 이순간도 바다 위에서, 하늘에서, 해안과 GOP 철책에서 국토방위를 위해 젊음을 온전히 봉헌하고 있는 많은 장병들에게 주님의 평화와 축복을 간구합니다.
또한 다시 한번 형제자매님들의 기도와 격려와 아낌없는 지원을 부탁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언제나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10년 10월 3일
한국 천주교 군종교구, 교구장 유 수 일 주교
나는 짠돌이입니다
나는 짠돌이입니다. 조금이라도 간식 값을 아껴보고자 군생활에 지친 우리 병사들에게 협박했습니다. “비싼 초코파이 하나 먹을래, 조금 싼 초코파이 두 개 먹을래?” 결국 병사들은 두 개를 선택하고 전 비싼 초코파이 두 개 주던 것을 싼 것으로 주며 조금 아꼈다는 생각에 미소를 짓습니다.
나는 짠돌이입니다. 어렵게 아낀 초코파이 값에 이젠 좀 형편이 나아지겠지 했는데, 이상하게도 별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봤더니, 군종병이 창고에서 입이 궁금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먹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초코파이 하나 가지고 뭐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 해서, “창고 열쇠 가져와. 부대에서 간부가 직접 시건장치 확인하라고 해서…” 사실 10개도 먹지 않았는데….
나는 짠돌이입니다. 쓰레기를 종량제봉투에 담아 버리기 위해 일하는 군종병을 보았습니다. 커다란 봉투에 열심히 담고 있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그런 군종병에게 화를 냈습니다. “야~이 씨, 다 풀러! 발로 꽉꽉 밟으란 말야.” 결국 군종병은 쓰레기 봉투 10개를 일일이 다 풀러서 5개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나는 짠돌이입니다. 성당 통신비가 18,700원이 나왔습니다. 아껴서 쓰라고 용건만 간단히 하라고 또 화를 냈습니다. 그래도 줄지가 않았습니다. 왜 모르겠습니까? 바깥의 사람들과 하나의 연결고리를 끊고 싶지 않는 그 마음을…. 하지만 또 말했습니다. “1만 원까지는 성당 일 때문에 써야 하니까 봐주지만 1만 원 넘으면 넘는 부분은 네가 직접 돈을 내라.”
나는 짠돌이입니다. 부활절에 병사들에게 두 개씩의 부활달걀을 나눠주었습니다. 세 개씩 주자고 신자들이 말하는 걸 두 개면 충분하다며…. 그런데 결국 달걀이 남았습니다. 이미 병사들은 복귀한 뒤라 그냥 놔두면 버려야 하기에 군종병에게 간장을 사오라고 시킨 뒤, 조림을 만들었습니다. 쇠고기는 비싸니까 빼고…. 그 뒤 한 달 넘게 매 끼니 때마다 달걀 두 개씩 군종병 하고 먹었습니다. 질려하는 군종병에게 말했습니다. “달걀이 쫄깃하고 맛있다. 자고로 알은 많은 영양분을 담고 있으니까 많이 먹어둬~~”
나는 짠돌이입니다. 신병교육대에는 매주 타종교와누가 더 많이 데려오느냐 숫자 싸움을 합니다. 그런데 역시 간식에서 밀리니까 아이들이 오지 않는 겁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종교행사 시간에 먹을 것을 원하면 법당으로 가고, 여자를 보고 싶으면 개신교회로 가고, 정말 기도하고 싶은 사람은 성당으로 오라고. 신부님은 여러분에게 먹을 것도 여자도 아닌 진리를 알려주고 싶다고.” 사실 간식 살 돈도 없고, 미사 때 반주하고 노래 불러 줄 봉사자가 없어서인데도….
사제 서품 때 아낌없이 베푸는 사제가 되고 싶다고, 넓은 마음을 가진 사제가 되고 싶다고 하느님께 기도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훈련 중인 연대 위문을 가자는 군종목사와 싸웁니다. 왜 꼭 위문을 가야하냐고…. 왜 꼭 우리는 먹을 것만 주려고 하냐고…. 그게 병사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 거냐고…. 우린 신앙을 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이렇게 말하면서 머리 속에선 본당 통장의 30만원 잔고를 지켜냈다는 뿌듯함을 느낍니다.
나는 짠돌이입니다. 그리고 나는 군종 신부입니다.
박현웅 미카엘 신부 (군종사목)
출처 : 전주주보
복음서들은 유대인의 문화권에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 고유의 표현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예수님에게 청합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마르코복음서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 믿음을 가지시오.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던져져라 하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11, 23).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도 고유한 과장법이 있습니다. “좋아 죽겠다”, “바빠 죽겠다”, “백발 삼 천척” 같은 표현들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사용하는 우리 고유의 과장법입니다. 그것을 외국어로 옮기면 뜻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에 돌무화과나무를 바다에 심은 사람도 없고, 산을 바다에 던진 이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일은 하지 못하셨습니다. 돌무화과나무를 바다에 옮겨 심는다는 오늘 복음의 표현이나, 산을 바다에 던진다는 마르코복음서의 표현은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는 전달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놀라운 일을 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청한 것은 믿음을 더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어떤 신통력 같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초능력의 소유자가 되고 싶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 마귀가 그분을 유혹하였다고 말하면서 유혹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돌을 빵으로 바꾸는 초능력, 높은 데서 뛰어내려도 무사한 초능력, 부귀영화를 사람들에게 주는 초능력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면서 하느님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 따라 살아야 하고,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하고, 하느님만 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것은 기적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삶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존중하고 그 뜻을 따라 실천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의 놀라움은 하느님 나라의 진실을 깨달은 사람이 자기 위주로 살던 삶을 버리고, 하느님 위주로 살게 되는 놀라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위주로 삽니다. 재물과 지위를 탐하고, 여러 가지 노력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합니다. 그러던 사람이 자기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하느님의 일, 곧 베풀고, 사랑하며 용서하는 일을 실천하며 사는 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친 믿음은 이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를 모시고 사는 자녀는 부모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부모의 뜻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함께 계시는 부모를 무시하고, 자기 위주로 살면, 우리는 그것을 불효 혹은 패륜이라고 말합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도 자기 위주로 살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기 위주로 살면, 자녀들은 제대로 자라지도 못하고, 성숙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사랑은 인간이 자기 한 사람 위주로 살지 않고 헌신(獻身)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모두가 자기만을 위하고 살아서 아무 문제없는 세상에 이런 헌신은 놀라운 일로 보입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사랑, 부모를 위한 자녀의 사랑은 인간 모두가 하는 일이라, 우리 눈에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그 하느님이 인류와 함께 계신 사실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 현장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여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나라가 오시게” 하자고 가르쳤습니다. 신앙은 초능력을 얻어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 병든 이, 죄인, 여러 가지 이유로 소외당한 이들과 어울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런 사람들과도 함께 계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유대교는 가난한 이와 병든 이 그리고 모든 불행한 이는 하느님이 버린 죄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마귀 들렸다고 말하던 정신질환자나 간질환자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1).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은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시는 분이라 우리도 같은 실천을 하는 데에 있습니다. 자기 한 사람 잘 되고, 행복할 것을 비는 것이 종교라고 생각하던 그 시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신앙은 돌무화과나무를 바다에 심는 것만큼 엉뚱한 일이었습니다. 자기 한 사람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보라는 말씀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게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은 그런 불가능한 일이 사람들 안에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는 사랑과 봉사와 헌신의 역사입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 12, 24) 역사입니다. 초인적 능력을 탐하고, 자기 한 사람 잘 될 것만 찾던 사람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깨닫고, 그분의 은혜로우심을 자기 주변에 실천하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잠시 이 세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우리 자신만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힘까지 빌려서 나 한 사람 잘 되는 길을 찾으려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에 대해 깨달아서 그런 망상과 집착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던 인간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였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새롭게 태어나듯이 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자기중심의 삶을 버리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살도록 힘쓰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종이 주인에게 봉사하듯, 봉사한 후에,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며 물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영성에는 반대되는 말씀입니다. 유대교는 자기 할 바를 다 했으면, 당연히 상응한 보상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다가 땅에 떨어진 밀알과 같이 죽었습니다. 쓸모없는 종과 같이 세상에서 물러났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은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돋보이게 하는 데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사랑하고 섬기며, 그것을 위해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을 배웁니다. 우리가 배워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라 우리 스스로는 쓸모없는 종에 불과하다고 자각합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 집착하여 표류하던 생명이 하느님이라는 바다 안에 심어지는 놀라운 일입니다.
출처 : 서공석 신부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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