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도심
전망대
강 문 석
뉴욕여행을 떠올리다보면 세월이 좀 흘렀지만 꼭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다. 100층 주전망대에서 20달러를 내고 빌린 익스플로러 테블릿은 주변에 조망되는 건물과 시가지에 관한 정보를 원하는 언어로 알려주는 기기였다. 기기는 스마트폰 2개를 합친 정도 크기였고 표면엔 긁힌 자국들이 많았다. 전망대를 내려와 버스에 오르자 가이드는 왜 테블릿을 반납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테블릿 어디에도 ‘원월드 재산’이란 표시는 붙어있질 않았다. 난 돈 주고 샀는데 어디다 반납하느냐고 능청을 떨었다. 숙소에 돌아오자 아내는 다음날 귀국할 때 테블릿이 공항검색대에 걸릴까봐 걱정을 했다. 아내를 안심시키느라 이튿날 아침 호텔을 나서면서 테블릿을 가이드에게 건넸다.
귀국하여 뉴욕 여행기를 정리하면서 촬영해온 영상이 만족스럽지 못하여 가이드에게 맡기고 온 테블릿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좀 더 생생한 뉴욕을 본다면 글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고교 3학년 때 일가족이 미국으로 건너왔다는 40대 가이드는 꽤나 과묵한 편이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도 관광지를 둘러볼 때도 그는 입을 잘 열지 않았다. 그래서 뉴욕을 이해하는 데는 테블릿에 든 영상이 더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뉴욕여행에서 돌아온 네티즌들이 테블릿 이용기록을 남겨 확실하게 대여한 물품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테블릿을 목에 걸고 근무자들 앞을 통해서 나오는데도 왜 반납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 제품이 워낙 낡아서 새것으로 교체하느라 그랬을 같기도 하다.
뉴욕을 세계제일의 마천루로 부르는 이유가 있었다. 바닥이 단단한 암반이라 초고층 건물들이 숲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2001년 9월 11일 이곳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과 워싱턴 국방부건물 펜타곤에 벌어진 항공기 자살테러는 5천명 넘는 인명피해를 불러왔고 세계최강 미국이 본토공격을 당한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결국 9.11테러는 미국이란 나라의 국가안보정책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결과 미국의 역사는 9·11테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쌍둥이빌딩 자리에 깔끔하게 들어선 최신식 건물 원월드One World 트레이드센터는 총 104층 건물 중 100층부터 3개 층에 전망대를 넣어 2015년 5월 문을 열었다.
흔히들 뉴욕의 3대 전망대로 록펠러센터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그리고 원월드 트레이드센터를 꼽는다. 원월드 100층 전망대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보다 18피트 더 높다. 뉴욕 초고층빌딩 중 가장 높은 원월드 트레이드센터는 미국이 독립선언을 한 1776년 숫자를 따라 1776피트 그러니까 541미터 높이다. 초고속 승강기 스카이포드sky pod로 주전망대에 오르는 시간은 1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승강기가 출발하면서 내부벽면에 붙은 LED비디오에서는 1600년대부터 현재까지 400년 세월의 뉴욕 스카이라인 변천사를 타임랩스 형태로 보여준다. 오사마 빈 라덴이 주도한 테러로 쌍둥이빌딩이 무너지는 참혹한 장면과 새로 짓는 건축과정 영상도 포함됐다.
전망대관광은 예약하지 않고 바로 찾아가면 입구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불편이 따른다.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해야하는 이유다. 세계 곳곳에서 각양각색 사람들이 몰려와 획일적인 질서를 찾아보기도 어렵다. 주전망대에선 주로 바깥 풍광을 넣어 사진촬영을 하게 되는데 자리다툼도 심한 편이다. 욕심을 내어 촬영시간을 길게 끄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줄을 서서 진득하게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 서로 간에 짜증이 오가기도 한다. 또다시 올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더욱 집착하는데 젊은이들은 좀 느긋한 편이다. 벨기에에서 왔다는 저널리스트는 큼지막한 카메라로 촬영에 매달리는 표정이 진지해서 카메라에 담아 보여주었더니 반색을 한다.
인생황혼이 가까워 보이는데도 현역으로 활동한다는 그녀가 부러웠고 내가 찍은 사진을 보내기 위해 연락처를 받았다. 자신의 영상에 엄지를 세우면서 미소 짓는 걸 보니 그도 뉴욕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를 오래오래 기억할 것 같았다. 영악한 현대인들 중엔 해질 무렵 전망대에 올라 낮과 밤 풍경을 모두 찍으면 경제적이라고 말한다. 만약 돈을 아끼겠다고 그랬다간 둘 다 놓칠 확률이 훨씬 높다. 해맑은 하늘로 치솟은 초고층빌딩들과 불야성을 이룬 뉴욕의 밤도 그렇게 쉽게는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의 도시는 바다와 강을 끼고 있으면 대기 중의 먼지는 어느 정도 정화되는데도 우리 일행이 전망대에 오른 시각 뉴욕항과 허드슨 강 상공은 연한 잿빛을 띠고 있었다.
사진에 매달리는 사람이라도 원하는 피사체를 좋은 작품으로 갈무리할 만큼 좋은 날씨를 만날 확률은 매우 낮다. 백두산 천지나 중국 황산 같은 곳에서 며칠씩 좋은 날씨를 기다리며 하늘에 소원을 비는 이들이 그들이다. ‘3대가 덕을 쌓아야 하늘이 열린다’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을 것이다. 전망대를 미리 둘러본 어느 네티즌은 친절하게도 통유리로 되어있어 야경촬영은 어렵다는 글을 올렸다. 이때도 플래시를 끄고 다른 반사광이 카메라에 들어오지 않도록 렌즈를 유리면에 바짝 붙인다면 무난히 야경은 찍을 수 있는데 카메라가 흔들리지 않고 촬영시간을 늘여야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뉴욕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기억하는 방법을 생각다 사진을 구입하기로 했다.
원월드 트레이드센터 매점에서 서재에 액자로 걸어두면 좋을 크기로 뉴욕 센트럴파크와 뉴욕 중심가 빌딩숲을 골랐고 생각보다 비싸진 않았다. 사진 속 빌딩숲은 화려한 조명이 바다와 잘 어우러졌지만 어둡지는 않아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간혹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팁으로 하는 말이 미리 날씨를 체크해보고 가란다. 하지만 자유여행이라도 날씨를 맞추기란 어려운 노릇인데 패키지여행에선 그야말로 복불복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에도 여행에서 사진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았다. 지금은 인터넷카페나 블로그에도 사진은 필수로 붙는다. 사진 찍거나 찍히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 아닐 수 없다.
9.11테러로 무너진 2개 무역센터 자리 추모공원은 연못으로 만들어졌고 벽면에는 희생자 5514명 이름을 새긴 동판이 있다. 이쯤에서 테러 전 무역센터의 상황을 잠시 살펴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B동 107층에 있던 레스토랑 'The Windows on the World'는 허드슨 강과 이스트 강이 에워싸고 있는 맨해튼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명소였다. 허드슨 강 드라이브도로를 따라 남으로는 브룩클린 다리가 서있고 동으로는 트라이보로 브리지가 연결되어 있으며 뉴저지를 연결한 조지 워싱턴 브리지의 불빛은 밤마다 야경의 극치를 더했다.
레스토랑은 얼마나 높았던지 귀고막이 멍할 때까지 올라야 했고 사인보드에 107 숫자가 나타나면 승강기 문이 열리면서 레스토랑의 유럽풍 실내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뉴욕은 이곳 월드트레이드센터를 중심으로 경제 금융 예술 문화 패션이 집중되어 처음 찾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허드슨 강 너머 빌딩숲 한가운데 우뚝 선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과 함께 이곳 무역센터 쌍둥이빌딩이 오랜 세월 뉴욕을 상징했는데 그렇게 하루아침에 테러로 무역센터빌딩이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은빛 허드슨 강 물결이 크리스털처럼 맑고 투명한 가을하늘 아래 9월 11일 아침 출근길 깃 세운 와이셔츠에 번득이는 양복을 빼입은 수많은 인재들이 평화스럽던 윈도우 언더월드에서 조찬회의를 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테러주역 오사마 빈라덴은 결국 미 오바마 대통령의 작전명령으로 10년 동안 추적 끝에 사살되었다. 9.11테러는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건만 희생자 유가족들의 가슴에 가득한 슬픔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오열을 안으로 삭이며 고인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에 손을 뻗은 채 무릎을 꿇은 노인의 애도하는 슬픔이 이방인에게도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희생자들이 많다보니 그 이름을 모두 새기기 위해 추모공원 울타리가 커진 듯했다. 공원 한복판으로 흘러내리는 물빛은 검은 울타리에 투영되어 무채색을 띠고 있었다. 황망히 떠난 망자에게 바치는 꽃이라 그런지 빨간 장미 송이는 볼수록 처연했다. 붉은 장미 꽃말은 ‘나의 마음은 그대만이 아리’였지 않은가. 하지만 난 오늘 추모공원을 찾은 유족들을 만나면서 검은 장미가 일러주는 꽃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주와 죽음 이별 그리고 당신은 영원히 나만의 것’. 9.11테러는 세계무역센터 종사자 외에도 아메리칸항공 156명 유나이티드항공 109명 그리고 미 국방부 청사 125명의 목숨을 앗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