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대상에 대한 표현.1 / 김영천 (시인)
대상의 표현이라는 주제에 대해 조태일님은
1) 표현은 정확하게 2) 표현은 구체적으로 3) 표현은 쉽고 순수하게 4) 표현은 개성적이고 독창적으로
이렇게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에 다른 설명이 없어도 여기까지 공부하신 여러분께서는 그냥 알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시문을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좀더 깊이 기억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한 항목씩 설명해보겠습니다.
1)표현은 정확하게
먼저 고려시대 쌍벽을 이루던 두 문장가 김부식과 정지상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실까요?
알기 쉽게 풀어놓은 시와 한자음을 달아놓습니다.
하루는 김부식이 정지상의 시가 좋아서 이 구절을 내게 달라고 했으나 정지상이 거절했습니다, 그 후 김부식이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 정지상은 김부식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시인 즉,
"절에서는 불경소리 그치고 琳宮梵語罷(림궁범어파) 하늘은 유리처럼 맑다" 天色淨琉璃(천색정유리)
하루는 김부식이 봄이 되어 그 봄을 맞는 시를 지었습니다.
"버들빛 천 줄기 푸르고 柳色千絲綠(류색천사록) 복숭아꽃 만 점 붉구나." 桃花萬點紅(도화만점홍)
참 멋있는 시이지요? 그런데 느닺없이 정지상의 귀신이 나와서 김 부식의 뺨을 때리면서 "버들의 천 줄기 누가 세어 보았으며, 복숭아꽃 만 점을 누가 헤아려보았느냐" 하면서
"줄줄이 버드나무 푸르고 柳色絲絲綠(류색사사록) 점점이 복숭아꽃 붉다." 桃花點點紅(도화점점홍) 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두 시가 다 내용이 같을 뿐만 아니라 단 한 글자씩만 바꾸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있느냐 하겠지만, 그만큼 시를 쓰는 글자에 중요성입니다. 시어를 쓸 때는 그만큼 표현의 정확성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적당히 그냥 생각나는 말로 써버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시어를 고를 때부터 지극 정성을 드리라는 말이겠지요.
좀 설명이 길지만 이 두 표현에 대한 조태일님의 해설을 옮깁니다.
"정지상이 김부식의 따귀를 때리며 고쳐 쓴 "줄줄이 버드나무 푸르고/점점이 복숭아꽃 붉다"는 구절은 내용 면에서 김부식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시는 의미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언어표현이 아니며, 어떤 사실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언어표현도 아니라 정서적 울림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기에 두 시의 의미는 서로 비슷하지만 가슴에 파고드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김부식이 표현한 '천 줄기'와 '만 점'은 상투적이고 기계적인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사물을 관찰하고 그 것을 언어로 가시화하는 시인의 태도가 안일하고 형식적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푸르른 버드나무와 붉은 복숭아꽃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두리뭉실 '천 줄기'와 '만 점'이라는 언어를 선택했지만 이 언어들에는 필연성, 즉 꼭 그 언어이어야만 하는 유일성이 없다.
즉 시인은 별로 고민하지 않고 적당하게 이 언어들을 씀으로써 시어의 생명인 정서적 울림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정지상이 쓴 '줄줄이'와 '점점이'는 가장 쉽고도 정확하게 버드나무와 복숭아꽃의 특징을 감각적으로 살려내고 있다. 여인의 긴 머리카락처럼 무성하게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한번 상상해 보라. '천 줄기'라는 언어보다 '줄줄이'라는 의태어가 훨씬 더 생동감 있게 우리들의 감각을 자극할 것이다.
또한 '줄줄이' '점점이'라는 의태어가 빚어내는 음악적인 효과까지 함께 곁들여져 버드나무의 무성한 푸르름과 복숭아꽃의 붉은 빛이 더욱 깊고 황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비교해 볼 때, 정지상이 선택한 언어들이 대상을 표현하고 그것들을 살려내는데 성공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은 그의 시어들이 빚어 낸 정확한 표현 때문인 것이다."
여러분께서 조태일의 말 그대로 생동감이 무성한 푸르름이나 붉은 꽃의 색깔이 더욱 깊고 황홀한 것까지 느껴지는가는 모르겠습니다. 또 꼭 그의 의견에 동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시어의 선택이 정확해야한다는 그의 의견만은 너무도 확실한 이야기이어서 길어도 옮겨보았습니다.
오늘은 진도가 많이 나가지 못했네요. 새 털 같이 많은 날이니 천천히 하시기로 하고 좋은 시들을 또 여러분을 위해서 몇 편 올립니다.
우선 서정주님의 <자화상>을 올리는데요. 좀 어려운 시인 것 같아도 시를 다루는 문학평론가라면 다 한 번씩은 다루었다 할 정도로 유명한 시이며 서정주가 23세 때 쓴 시인 것을 알면서 읽기 바랍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이며 나는 왔다.
이 시를 읽어보면 시어가 아닌 일상적 언어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심하여 시어로 사용하였기에 그 정확한 표현은 감동과 함께 시를 살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표현들을 빼고 다른 언어로 대치하면 바로 시의 감동이 사라져버리는 독창적 언어체계입니다. (팔할, 죄인, 천치, 혓바닥, 수캐 등은 이렇게 시 밖에서 볼 때는 일상에서나 흔히 쓰는 언어임을 그냥 알 수 있습니다.)
잘 아시는 시 김현승님의 <플라타나스>를 올립니다. 여러분들께 도움이 되시기 위해서 시의 부분을 싣지 않고 전문을 실으니 강의가 그 때문에 좀 길어지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나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은 모르나, 플라타나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을 올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나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나스, 나는 너와 함께 神이 아니다!
수고론 우리의 길이 다 하는 어느 날. 플라타나스,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참고로 위의 시에 나타나는 플라타나스의 모습은 그냥 단순한 나무의 차원이 아니고 사람의 모습으로 의인화 되었음을 인식하시고 읽으시면 더욱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와는 상관 없지만 시 한 편 더 읽겠습니다.
이제무님의 <무덤>입니다.
아들아 무덤은 왜 둥그런지 아느냐 무덤 둘레에 핀 꽃들 밤에 피는 무덤 위 달꽃이 오래된 약속인 양 둥그렇게 웃고 있는지 아느냐 넌 둥그런 웃음 방싯방싯 아가야 마을에서 직선으로 달려오는 길들도 이 곳에 이르러서는 한결 유순해지는 것을 보아라
둥그런 무덤 안에 한나절쯤 갇혀 생의 겸허한 페이지를 읽고 우리는 저 직선의 마을 길 삐뚤삐뚤 걸어가자꾸나 어디서 개 짖는 소리 날카롭게 달려오다가 논둑 냉이꽃 치마폭에 폭 빠지는 것 보며
*시인은 죽음과 슬픔 등 여러가지 어두운 무덤에서 어두운 시의 씨앗을 얻은 것이 아니라 무덤의 봉분, 밤에 떠오르는 보름달, 산을 오르는 꼬부랑 길 등 곡선의 부드러움. 포용, 원만함, 겸허한 마음 등을 깨닫고 직선의 마을 길과 대비시키며 그의 시를 완성시켜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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