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자리
대부분의 포유류 동물 세계에는 아버지라는 개념이 없다. 사자라든가 고릴라 등 일부 동물을 제외하면 아버지의 책임을 다하는 동물은 찾기 힘들다고 한다. 포유류 가운데 자기 자식을 돌보는 수컷은 5% 남짓에 불과하다. 그래서일까. 우리 사회에서도 아버지의 자리는 엄마의 그늘에 가리어지곤 한다. 어머니는 헌신적인 사랑과 고향을 상징하고 따뜻함과 평온함을 떠올리지만, 아버지는 가정에서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강인한 존재로 인식되곤 한다. 고전 시가인 ‘사모곡(思母曲)’에서도 ‘호미도 날이지만 낫같이 들 리가 없습니다’라고 호미로 비유되는 부정(父情)이 아무리 깊다고 한들 낫으로 비유되는 모정(母情)에는 미칠 수 없다고 한다.
아버지 부(父)의 어원은 손에 회초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전통적인 엄부자모(嚴父慈母)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전통적인 아버지의 형상은 따끔한 회초리를 들고 자식을 엄하게 훈육하는 사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무서운 존재다. 옛날의 아버지는 아내와 동등하고 자녀와 부드럽게 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가부장적 제도 아래 가족을 엄하게 통솔하고 관리하는 군주의 모습이었다. 그러한 권위의식과 이미지가 일부 그대로 전해져 아버지라는 존재는 돈 벌어오는 사람,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 엄격하고 일방적인 사람으로 새겨진다.
그래서 아버지의 자리는 외롭다. 배고픈 시절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난쟁이’로 살아 왔고 외환위기 시절엔 집안 경제를 책임진 가장으로 삶의 무게를 견뎌 왔다. 21세기의 많은 아버지는 때로는 기러기아빠가 되기도 하며 자녀들로부터, 손주들로부터 소외를 경험하며 살아간다.
가부장적 절대권위의 과거 이미지는 꼰대로 몰리고 소외와 외톨이로 밀려나는 구실이 될 뿐이다. 아버지는 겉으로는 굳세고 당당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저 연약하고 평범한 한 인간일 뿐이다.
김현승 시인은 ‘아버지의 마음’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바쁜 사람들도 / 굳센 사람들도 /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 어린것들을 위하여 / 난로에 불을 피우고 /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엄마의 어깨 뒤에서 자식을 바라보는 외로운 사람이다.
한때 회자하였던 가시고기의 삶은 아버지의 자리를 상기시킨다. 가시고기는 암컷이 알을 낳은 뒤 떠나 버리면 수컷이 혼자 남아 알이 잘 부화하도록 쉼 없이 지느러미로 산소를 불어넣는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알을 보호하던 수컷은 알이 부화할 때면 기력이 다해 자신의 몸을 태어난 새끼들에게 내어주고 죽어간다. 그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 아버지도 어머니와 똑같은 크기로 자식을 사랑할 것이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는 당신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고단함 속에서 외롭게 삶을 버텨 왔다.
어느덧 팔십 대 중반이신 나의 아버지도 곡절 많은 시대를 외롭게 살아오셨을 것이다. 가장으로서 평생 가난하고 고달프게 살아오셨으나 아버지로서는 당신의 책임을 다하셨고 자식들을 잘 키워내셨다. 가끔 고혈압과 당뇨, 식습관을 걱정하면 말끝마다 습관처럼 말씀하신다.
“난 괜찮으니 염려하지 말아.”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삼십 대 시절의 아버지는 닮고 싶지 않은 분이었지만 지금의 아버지는 연민과 안쓰러움만 남았다. 훗날 아버지가 보이지 않게 될 때는 어떤 아버지로 남게 될까.
그런 아버지께서 어버이날에 암 수술을 받으신다. 아버지의 자리를 변함없이 오래 지키실 수 있기를 기도드린다.
박수밀 고전학자. 교수
~ 늙은 남편
동물 사회에서 늙은 수컷은 비장하거나 비참하다.
평생 적으로부터 무리를 보호하던 숫사자는 사냥할 힘을 잃으면 젊은 수컷에게 자리를 내주고 쫓겨나 '마지막 여행'에서 혼자 쓸쓸히 죽어간다.
늙은 숫고양이도 죽을 때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침팬지도 늙은 수컷은 젊은 것들과 암컷에게 애물 단지처럼 왕따 당하며 산다.
어느 나라건 '늙은 남편'을 조롱하는 농담은 넘쳐난다.
일본에서는 "비 오는 가을날 구두에 붙은 낙엽" 신세로 비유된다.
"아무리 떼내려해도 달라붙는 귀찮은 존재" 라는 뜻이다.
실제 인구조사 결과도 씁쓸하다. 몇년 전 일본 에히메현에서 노인 3,100명을 조사했더니...
여성은 남편 있는 쪽이, 남편 없는 쪽보다 사망 위험이 두 배 높았고,
남성은 그 반대로 부인있는 쪽이 더 오래 살았다.
"늙은 남편이 아내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높기때문" 이라고 했다.
며칠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여성의 72%가 "늙은 남편이 부담스럽다"는 여론조사를 발표했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 그만큼 돌봐야 하는 기간도 늘어날 것이라는 여성 쪽 걱정이었다.
늘 듣던 말 같은데 남성이 점점 더 내몰리는 느낌이다.
내 주변의 실화 하나를 소개한다.
내 지인 A씨는 73세이고 부인 B씨는 67세입니다. 어느날 B씨가 모임에 갔다가 외출에서 돌아오자 바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더랍니다.
A씨는 인사말도 없이 들어가는 부인이 이상하여 B씨의 방으로 가서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며 다정하게 물어보아도 아무런 말이 없이 엎어져 누워만 있기에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구나." 하고 기다리다가 한 참 지난 후에 B가 하는말이
"다들 싱글인데 나만 싱글이 아니어서 싱글이 부러워서 그런다"고 말하며 울더 랍니다.
즉 다른 여자들은 혼자 몸이어서 다 들 밥걱정도 않하고 자유롭게 여행도 다니는데 자기만 남편이 있어서 부자유스럽고 불편해서 그런답니다.
이 말을 들은 A씨는 조용히 방을 나와 자기방에서 혼자 생각에 잠겼답니다.
퇴직 전까지 아이들 먹이고, 가르치고 장가보내고 하느라
한 평생을 뼈가 빠지도록 일해 오면서 취미 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살아왔는데...
이젠 아내로부터 실상 버림받게 되는 신세가 되었구나 하는 처량한 생각에 잠이 오지 않더랍니다.
술을 마시며 자신을 달래보아도 누구에게 배신 당한것 같은 감정이 북바쳐 올라 자살하고 싶은 심정이 들더랍니다.
다음날 아내 B씨를 앉혀 놓고 감정을 달래며 물으니, 형식적으로나마 "잘못 했어요..."라는 대답과는 달리 태도가 예전같지 않더랍니다.
이런 얘기를 술자리에서 괴롭게 털어놓는 A씨는 "어찌하면 좋으냐?"고 질문하는데 나 자신도 도저히 이 말에 정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부장 문화는 이제 여인들에 의해 사라졌습니다. 그 고분고분하고 순박하며 시어머니, 시누이들을 무서워하며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던 효부시대는 머나먼 전설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아... 늙은 수컷들이 갈 곳은 어디입니까?
그러나 평안한 보금자리가 있는 늙은 수컷들은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매우 현명한 늙은 암컷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를 신경써서 지키고 그들을 얼마나 잘 섬겨야 하는지를...
[옮겨온 글]
김동아 - 아버지 [가요무대/Music Stage] | KBS 220509 방송 Click! https://youtu.be/QBvzkpoZP1Q |
첫댓글 에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