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는 그릇된 길에 빠졌으나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토서 말씀입니다. 3,1-7
사랑하는 그대여, 1 신자들에게 상기시켜,
통치자들과 집권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며
모든 선행을 할 준비를 갖추게 하십시오.
2 남을 중상하지 말고 온순하고 관대한 사람이 되어
모든 이를 아주 온유하게 대하게 하십시오.
3 사실 우리도 한때 어리석고 순종할 줄 몰랐고 그릇된 길에 빠졌으며,
갖가지 욕망과 쾌락의 노예가 되었고,
악과 질투 속에 살았으며, 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
4 그러나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5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6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7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19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또는, 기념일 독서(이사 61,1-3ㄹ)와 복음(마태 25,31-40)을 봉독할 수 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티토에게,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깨끗하게 해 주시고, 돌아와 감사드린 이방인에게,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하신다(복음).
☆☆☆☆☆☆☆☆☆☆☆☆☆☆☆☆☆☆☆☆☆☆☆☆☆☆☆☆☆☆☆☆☆☆☆☆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필요한 덕목을 권고한 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였음을 강조한다. 우리의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신다. 그들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이 다시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린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나병 환자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병에서 낫게 된 기적은 이렇게 짧게 표현됩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은 예수님께 자비를 청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만이 유일한 희망이었고, 유일하게 병에서 해방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람대로 병에서 치유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한 명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의 감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 그는 구원을 얻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 복음은 치유와 구원에 대하여 말합니다. 나을 수 없는 병에서 치유된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그것이 곧장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병 환자의 치유가 구원으로 이어지는 그 사이에는 ‘감사’라는 요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께 많은 것을 청하지만, 그 기도와 청원이 모두 실현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도와 청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자주 체험하고는 합니다. 우리는 꼭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청하는 것에는 익숙하고 감사하는 것에는 더딘 우리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청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고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고 더 나아가지 못한다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 기쁨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비와 감사는 하나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섭니다. 그들은 병을 고쳐 달라는 표현도 없이, 다만 예수님을 스승으로 공경하며,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탄원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나병에서 해방되어, 더 이상 죄인 취급을 받으며 외면당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을 먼저 보십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그들을 치유하시며,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고 이르십니다. 그들은 나병에서 치유되었음을 사제들에게 확인받고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 다시 살아가는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만일 내가 나병 환자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면 어떠하였을까요? 몸이 깨끗해진 것을 보고 너무 기뻐 가족들에게 달려가서 알리고, 나를 무시하던 사람들에게 이 기적 같은 일을 자랑하고 싶지 않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치유된 것만 생각했지 치유의 자비를 베풀어 주신 분을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그것도 유다인들이 경멸하는 이방인 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께 돌아와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발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치유에 대한 감사를 넘어 병마와 악을 물리치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는 몸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되는 기쁨을 체험한 것입니다.
믿음을 통한 구원은 내 의로움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느님의 자비만이 우리의 죄와 병을 씻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오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고 기억하는 일이 구원의 시작임을 명심합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주님께 다가와 자비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대로 그들의 몸을 깨끗하게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제에게 가서 정결해진 것을 확인받도록 하십니다. 육체적 치유와 함께 그들이 사회적 복권을 하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로써 새로운 삶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치유의 기적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복음은 치유의 기적이 끝난 곳에서 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열 명이 치유되어 자신의 삶터로 돌아갔습니다. 그중의 한 명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그분께 감사를 드리며 찬양하였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몸의 치유와 사회적 지위의 회복은 치유의 기적보다도 더 큰 실재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아직 명확히 표현하지 못하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었던, 그의 내면에서 자라나는 놀라운 실재가 무엇인지를 대신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그의 삶을 전혀 새롭게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작용하는 그의 믿음은 그의 삶을 온전히 구원할 것입니다. 어느 한 사제는 ‘살아간다’는 단순한 사실이, 모든 사람을 믿음의 상황에 놓는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그래서 종교적 교리의 고백이기 이전에 삶의 의미를 갈구하는 원초적 현상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의 계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선사하십니다. 어떤 이에게는 치유처럼 기쁨의 체험일 수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고난과 상실의 체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의 사건과 만남들 안에서 믿음의 계기들을 흘려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삶과 함께 자라난 믿음만이 우리가 예수님을 참으로 깊이 대면하도록 이끌 것이고, 그 믿음의 눈만이 삶의 궁극적 의미를 보게 할 것입니다.
☆☆☆☆☆☆☆☆☆☆☆☆☆☆☆☆☆☆☆☆☆☆☆☆☆☆☆☆☆☆☆☆☆☆☆☆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 당시 나병 환자들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격리된 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사제가 그의 몸이 깨끗해졌음을 선언해야 동네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는 사제에게 몸을 보이기도 전에 자신들의 몸이 깨끗해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린 사람은 오직 사마리아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왜 감사드리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감사하는 마음보다도 다른 마음이 앞섰을 것입니다. 건강해지기는 하였으나 동네에서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에 대한 걱정이 더 컸을 것입니다. 나병 환자였다는 선입견도 이겨 내야 하고, 무엇을 하며 생계를 이어야 할지, 걸인으로 살았던 습성을 어떻게 버려야 할지 등에 대한 걱정이 앞선 나머지 감사하는 것을 잊었을 것입니다.
극심한 신체장애를 안고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46세에 오토바이 사고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4년 뒤에는 비행기 사고로 말미암아 하반신까지 마비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행 속에서도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밤낮으로 매달렸고 또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얻었습니다. 그는 어느 연설에서 이렇게 밝혔다고 합니다. “이러한 불행이 닥쳐오기 전까지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만 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구천 가지로 줄어들었습니다. 나는 내가 잃어버린 천 가지에 대한 슬픔과 고통보다는 나에게 남아 있는 구천 가지를 선택하여 살아왔습니다.”
우리도 온갖 걱정거리에만 마음이 사로잡힌 채 감사해야 할 것들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가만히 돌아다봅시다.
☆☆☆☆☆☆☆☆☆☆☆☆☆☆☆☆☆☆☆☆☆☆☆☆☆☆☆☆☆☆☆☆☆☆☆☆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는데, 보기에도 끔찍한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소리 높여 청원을 드립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병을 천형(天刑)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나병은 인간이 걸릴 수 있는 질병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병이라는 뜻입니다. 최근에는 의학의 발달과 높아진 생활 수준 탓에 나병 환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게다가 신체가 직접 상처 부위와 맞닿지 않으면 전염되지 않는다는 임상 결과까지 나와서, 나병이 결코 ‘천형’이 아님이 확인되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몸을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당시에는 몹쓸 병에 걸린 사람이 나으면, 사제에게 가서 확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사제에게 가는 동안 병은 깨끗이 나았지만, 주님께 감사드리러 온 사람은 사마리아인 한 명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자신들의 이권만 챙긴 뒤 어디론가 가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면서 구원을 덤으로 주십니다.
믿음이 깊은 사람이 주님께 감사드릴 줄 알고, 더불어 주님께 구원의 은총을 받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한센인 열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했습니다. 혼혈인이라며 비웃고 이방인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돌아와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은 감사드리러 왔는데, 정통 유다인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책입니다. 감사를 잊어버리는 것이 한센병보다 나쁘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아홉’은 감사를 잊어버렸습니다.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은혜를 망각하며 산다는 암시입니다.
병이 나은 사람들은 왜 감사를 잊고 가 버렸을까요? 예수님께 갔더라면 또 다른 은총을 받았을 터인데, 왜 그랬을까요? 너무 기뻐서 그랬을 것입니다. 벅찬 감정에 취해 순간적으로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랬더라도 그들은 은혜를 망각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그렇게 됩니다. 청할 때의 ‘다급한 모습’을 감추려 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은총에는 감사가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더 큰 축복으로 인도됩니다. 감사는 은총을 붙잡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불만이 아홉이고 감사가 하나이더라도, ‘하나’를 기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바뀌게 됩니다. 기쁨이 아홉이고 불평은 하나인데도 불평만을 잡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지요? 언제라도 시각이 삶을 바꿉니다.
☆☆☆☆☆☆☆☆☆☆☆☆☆☆☆☆☆☆☆☆☆☆☆☆☆☆☆☆☆☆☆☆☆☆☆☆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이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천형의 시인이라 불리었던 한하운의 시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의 한 부분입니다. 일생을 나환자라는 멍에 속에 살다 간 그의 한이 유리 조각처럼 아프게 박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한과 설움은 오늘날의 현실만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이 병의 출발은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음보다 더한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려집니다.
레위기에서는, 그 병의 증상이 나타난 사람이 있으면 ‘7일간 격리 수용하라.’고 했습니다. 그 후 다시 검진을 받아 병이 진전되지 않았다면 ‘7일간 한 번 더 수용된 뒤’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13,4-5 참조).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기에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아픔을 아셨기에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감사를 드린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토록 애원한 그들이었건만 은혜를 망각한 것입니다. 너무 기뻐 잠시 모든 것을 잊어버렸을 겁니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지금이라도 받은 은혜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올해의 가장 큰 이슈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올 초부터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 전파는 우리의 삶 전체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목적으로 비대면 활동이 강조되었고, 건강에 대한 염려를 많이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이 코로나바이러스 전파로 인해서 우울증이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코로나 블루’라고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는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로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면서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을 뜻합니다. 어떤 정신의학과 의사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하면 안 되는 일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에 숨이 막히는 것입니다.”
감염병 예방을 위해서 하지 말라는 것들을 잘 보면, 원래가 안 하던 것들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하지 말라!!”는 말을 듣다 보니 숨이 막히고 힘들어지는 것이지요. 바로 이때 필요한 것이 긍정적인 상황을 찾는 것, 특히 감사의 이유를 찾는 것이라고 합니다. 감사의 이유를 찾게 되면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것들이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환자들을 고쳐 주실 때의 모습과는 다른 말씀으로 고쳐 주십니다. 즉,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하시지 않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하고 이르십니다.
나병이 치유된 자들에게 그렇게 할 것을 율법이 지시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그들이 사제에게 몸을 보이고 병이 나은 것을 감사하는 예물을 올리라고 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없애러 오신 분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분이지요. 그래서 그들이 당신의 힘으로 치유되었으니 그 증거를 사제들에게 가서 보이라며 율법에 따른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제 나병 환자 열 사람은 사제를 향해 갑니다. 그런데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진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이때 그들의 선택은 어떠했습니까? 아홉은 사제를 향해서 갔고, 단 한 명만 그것도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사제에게 가라는 주님의 명령에는 율법을 따르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드려야 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감사를 드려야 했을까요? 단순히 사제에게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자비를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올려야 했습니다.
이렇게 구원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또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명은 단순히 병의 치유만을 받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며 주님 앞에 나온 사람은 훨씬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누군가를 알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이고 진지하게 노력하면, 그 결과 우리는 상대의 본질에 어느정도까지 다가가 있을까(무라카미 하루키).
꿈
우리의 근현대사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해집니다. 개항기에는 신분 해방을, 일제강점기에는 조국 해방을, 현대에는 빈곤 해방을 위해 노력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노력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노력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다음 세대에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쫄쫄 굶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자녀들에게 교육했습니다.
이 꿈이 실제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 경제 12위의 위치까지 올라갈 정도로 부유함을 또 안정이라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지금 현재는 신분제도 없고, 또 어느 나라의 식민지도 아닙니다. 외국에서 돈을 빌려주지 않을 정도로 가난한 절대 빈곤에서도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특히 코로나로 전 세계가 힘들어할 때 보여 준 우리나라의 힘은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의 과제는 무엇일까요? 우리 선조들이 하셨듯이, 우리 역시 다음 세대를 위해 꿈을 꾸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사랑, 그 가장 구체적인 표현은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 측은지심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님의 축일이 다가올 때 마다, 마음씨 따뜻한 한 형제님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저희 수도자들에 대한 마음이 각별하셔서, 언제나 뭐 하나 더 못해주셔서 안타까워하시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한번은 형제님께서 저희 수도원을 방문하셨는데, 살아있는 성인(聖人) 같은 분이셨지만, 그에 못지 않게 장난끼가 많으셨던 노신부님을 만났습니다. 마침 날씨가 스산해지는 겨울 초입이었는데, 형제님 보시기에 운동을 마치고 들어오시는 반팔차림의 신부님 모습이 너무 마음에 걸리셨던가 봅니다.
형제님께서는 갑자기 당신이 입고 계시던, 당시 전국민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당시 그 자리에서 현찰과 맞바꿀 수도 있었던 점퍼를 벗어 신부님께 입혀 드렸습니다. 그 순간 얼굴이 환해지신 신부님의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형제님이 입고 계신 바지를 가리키면서 하시는 말씀 “이 바지도 아주 좋아보여요!”
그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형제님께서는 조금도 지체없이 바지를 갈아입으러 당신 차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당혹스런 나머지 형제님의 팔을 잡으면서, 바지만을 절대 안된다며 겨우 만류했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님께서도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한 추운 겨울 날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군인으로서 열심히 예비자 교리를 받고 있던 마르티노가 말을 타고 교외로 나갈 때였습니다.
한 가련한 거지가 나타나 마르티노에게 손을 벌렸습니다. 태생적으로 인정 많고 마음 따뜻한 그였기에, 즉시 지갑을 꺼내 지폐 몇장을 쥐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필 그날 따라 지갑은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잠깐 난감한 기색을 하던 마르티노는 지체없이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들었습니다. 물론 그 순간 거지는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이 군인이 갑자기 왜 이러시나?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나 마르티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뽑아든 칼로 자신이 걸치고 있던 외투를 반으로 잘랐습니다. “형제님! 지금 제가 가진 돈이 없어 정말 죄송합니다. 날씨도 추운데 이 외투로라도 찬 바람을 막으십시오.”
반쪽짜리 외투만 걸친채 숙소로 돌아가는 마르티노를 본 사람들은 다들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마르티노의 꿈에 반쪽짜리 외투를 입은 거지가 나타났는데, 그분은 곧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옆에 서 있는 천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입고 있는 이 외투는 아직 예비 신자인 마르티노가 내게 준것이란다.”
그 특별한 꿈은 마르티노 생애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에게 있어 세상 속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은 곧 예수님이셨습니다. 그의 자비심과 측은지심은 점점 커져갔고, 그로 인해 해방되고 새 삶을 시작한 노예나 종의 숫자는 이루 다 셀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간절히 바라던 세례를 받자마자 마르티노는 군대를 퇴역했습니다. 성 힐라리오 주교를 찾아가 사제품까지 받았습니다. 투르의 주교가 선종하자 역사상 전무후무한 특별한 일이 생겼습니다.
투르 교구 내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 일동이 한 목소리로 들고 일어나 마르티노를 투르 교구의 주교로 추대했습니다. 지극히 겸손했던 그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몸을 숨겼지만, 사람들은 끝까지 그를 찾아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많은 사목자 투르에게 장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당시로서는 초고령인 80세까지 살게하셨습니다. 최후의 모습 역시 장엄했습니다. 교구내 가장 외진 지역을 사목방문하던 중 중병에 걸려 선종했습니다.
제자들은 투르 주교의 병상 주변에 둘러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전국민적인 애도가 계속되었습니다. 그와 관련이 컸던 두 지역 포아티에와 투르는 성인의 유해를 서로 모셔가려고 쟁탈전까지 벌였습니다.
결국 마르티노가 주교로 사목했던 투르에서 장례미사가 거행되었고, 거의 모든 시민이 장례미사에 참석했으며, 2천여명이 넘는 수도자들이 장례행렬은 장관 중의 장관이었다고 전해집니다.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절실히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사목자가 교우들을 지극정성으로 사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사목자가 교우들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은 일방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사랑은 오고가야 바람직합니다. 또한 사랑은 멈춰서 있어서는 안됩니다. 역동적으로 움직여야 참 사랑입니다. 살아있는 사랑, 숨쉬는 사랑, 그 가장 구체적인 표현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 배려심, 측은지심입니다.
봉사하면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의 주제도 역시 ‘믿음’입니다. 믿음을 더해달라는 제자들의 청에 종이 주인이 시킨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라고 하신 비유에 이어지는 또 다른 말씀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분명 주님을 받아들였을 것이고 주님을 받아들였다면 주님의 부르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누군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면 새로운 소명이 생깁니다.
제가 대학생 때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5년 동안 읽으며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동시에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싶어 사제가 되고 싶은 꿈이 생겼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따르고 싶어집니다. 문제는 그 소명을 따르면서 벌어지는 상황입니다. 부르심을 따르면서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10명을 치유해 주십니다. 어쩌면 이것이 주님을 받아들이기 이전과 이후의 상태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주님을 받아들여 새로운 소명의 길로 나아가면 그 이전의 상태는 마치 나병이 걸렸을 때와 같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소명으로 받는 성령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소명도 주시지만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도 주십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고 치유해 줄 때가 아니라 당신께서 불러주시고 치유해 주신 것에 감사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불러주신 것에 감사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직 믿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유튜브 채널 ‘감동 실화 영상’에 ‘어린 강아지는 자신을 구조해준 남성을 만나자...’란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캐나다에 사는 와그너씨는 심한 피부병에 걸린 유기견을 근처 병원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는 와그너씨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아 목숨엔 지장이 없었지만 아무도 심한 피부병을 앓는 그 녀석을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모조’란 이름을 지어준 그 녀석이 어떻게 되었는지 와그너씨가 동물 병원에 전화했지만, 모조는 여전히 동물 병원에 있었습니다. 와그너씨가 모조를 키우기로 하고 병원에 다다르자 피부병으로 털이 하나도 없는 모조는 와그너씨에게 달려들어 마구 반가운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와그너씨로부터 키워진 모조는 이제 털도 자라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모조는 길거리에서 지내던 삶에서 와그너씨 집에서 살기 위한 규칙을 준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런 규칙을 강요한다고 와그너씨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분명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은 이와 같은 것을 느낍니다. 나병이 치유 받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봉사하면서도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유튜브 채널 ‘애니멀봐’에선 4년 동안 계속 자신의 집이 있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백구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래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간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시고 집은 재개발로 지정돼 허물어졌습니다. 그렇지만 백구는 아무도 보살펴주지 않는데도 4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것을 안 동네 아주머니가 2년 동안 백구에게 먹을 것을 놓아주었습니다. 백구에게 지금 가장 행복한 일은 자신을 보살펴주었던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기 이전의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무엇을 해야 좋은지 몰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삶의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그 의미를 일단 맛보았다면 다른 삶은 다시 나병이 걸리는 삶과 같습니다. 사람이 개 한 마리를 불러준 행복이 이 정도라면,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행복은 얼마나 더 클까요?
본당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억지로 시켜서 자신도 억지로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봉사하면서 받는 주님의 성령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을 받았다면 봉사하기 이전의 삶은 나병에 걸렸던 삶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봉사하며 감사하지 못한다면 아직 영적인 나병 상태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봉사한다면 감사하고 주님을 찬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성령의 보답은 그 봉사를 통해 겪는 모든 고통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을 더 완고한 파라오로부터 빼내는 작업은 엄청 힘에 부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모세에게 성령으로 상징되는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자신이 이전에는 절대 할 수 없었던 능력으로 감옥에 갇혀있는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모습을 볼 때, 도망치기 급급했던 40년 전의 자신의 모습은 나병이 걸렸던 것과 같이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봉사하기 이전의 삶이 그립다면 그건 절대 주님께서 불러주신 봉사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응답했다면 부르심을 받기 이전의 상태가 마치 나병의 상태와 같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제가 생각하지 않은 방법으로 제게 길을 보여 주신 적이 많습니다. 몸이 조금 피곤하고, 지쳤을 때입니다. 일주일 전에 잡힌 약속을 취소하기 어려웠습니다. 신부님들과 전임 사목위원들과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루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날씨가 안 좋아서 일정을 취소한다고 하였습니다. 당일 날 날씨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지친 몸과 마음을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2020년의 코로나19는 신문사의 운영에도 커다란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신문 홍보는 신문사의 재정에 큰 도움이 되는데 전혀 홍보를 나가지 못했습니다. 신문의 광고도 도움이 되지만 예년에 비해서 광고도 많이 줄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저 자신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함께 지내는 사제들과 돈독한 정을 나누는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의 미사를 도와 줄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19가 아니라면 마음이 있어도 할 수 없었습니다. ‘주사위는 사람이 던지지만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잠언의 말씀을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오늘 옷이 젖는 경우도 없습니다. 아직 내리지 않는 비 때문에 우산을 쓰는 경우도 없습니다. 근심과 걱정보다는 감사와 희망으로 사는 것이 좋습니다.
이민 초기에 한인 성당이 생길 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을 도와서 열심히 일하였다고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겨울 여행을 가는 문제로 의견이 나뉘었다고 합니다. 주말에 가면 가족들이 모두 함께 갈 수 있고, 미사를 봉헌할 수 있으니 주말에 가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주중에는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는 교우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주중에 갈 수 있는 사람만 가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갈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갈 수 있는 사람만 가자고 하였습니다. 주일에는 본당 미사를 비울 수 없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결정은 본당 신부님의 몫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자신의 의견과 다른 결정을 하였고, 그 뒤로 본당의 봉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늦은 나이였지만 다시 대학에 입학하여 교사가 되었고 학생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한인 공동체에 한국학교가 생겼고, 아이들은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배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열정이 결실을 맺어서 한국어가 제2외국어로 고등학교 교과에 채택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비록 신부님과 의견이 달라서 섭섭했지만 돌아보면 이민사회에서 교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라는 말이 제게는 깊은 감동으로 남았습니다.
‘부부는 함께 사는 것이 기적’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하지만 부부는 엄연히 ‘이심이체(二心異體)’입니다. 단정하고 깔끔해서 좋았고, 자유롭고 편해서 좋았지만 결혼하면 깔끔한 것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것은 질서를 깨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과 몸을 가진 사람이 부부가 되어 사는 것이 기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삶이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사는 것이 부부입니다. 삶의 기반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직업이 다른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을 때 문제가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나의 의로움 때문에 공동체가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에 공동체는 부족함에도 하느님께로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질문을 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십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습니다.”
이제 단순히 피부가 깨끗해 진 것을 넘어서 영혼이 구원받았음을 선포해 주십니다.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과 우리들의 뇌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눈은 사물을 바라보는 창문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마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렇게 기쁘고, 감사하고, 고맙게 보일 것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으로,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시기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이비귀환으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들의 몸도 있는 것입니다.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면서 멀찍이 서서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나병환자 열사람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병환자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고 나병환자들은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온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화를 하나 들려드리자면 어떤 부인이 자신의 어린 아이를 데리고 이웃집에 놀러갔는데 그 이웃집 부인이 자신의 아이에게 사과를 하나 주자 아이는 '고맙습니다.'는 인사도 없이 얼른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인은 자신의 아이를 얼른 불러 이야기 했습니다. “다른 분이 사과를 줄 때는 뭐라고 해야 되지?” 그러자 아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껍질 벗겨주세요”라고 말하더랍니다.
어쩌면 그 아이의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타인이 베풀어준 친절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침묵한 채 더 많은 친절을 베풀어주기만을 바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베풀어주지 않을 때는 원망하고 돌아섭니다. 마치 예화 속에서 사과 껍질을 벗겨주지 않으면 사과를 준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감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지난 시간 하느님으로부터 수많은 은총을 받았지만 그에 좀처럼 감사드리기 보다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그 요구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오히려 원망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구원은 바로 감사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은총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감사는 구원의 시작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아침에 눈을 뜨고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저녁이면 또 감사를 드린다. 하루의 일과 속에 만난 사람, 사랑을 나누던 사람을 기억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감사는 하루의 시작이며 또한 하루의 완성이다. 하루의 완성을 위해 감사를 담아 끝기도를 드린다.
‘낮 동안 우리를 활기 있게 하신 주여,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리니, 자는 동안도 지켜 주시어 편히 쉬게 하소서”
감사를 담아 청한 기도가 죽음의 밤이 지나면 또 다시 힘이 되어 죽음에서 깨어나게 하소서.
날마다 기적이다. 위험이 상존하고 있음에도 무사했음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내일 걱정은 주님께 맡기고 오늘을 충실하며 감사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축복이고 은혜이다. 이렇게 감사함으로 계속될 때 하느님과 나 사이의 생명의 관계는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 진다.
살면서 왜 좋은 일만 있겠는가?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고 그래서 우리는 절대자이신 하느님께 매여 달리고 애원하며 기도하지 않는가? 건강한 오늘이 있고 건강한 삶이 있었다면 꼭 감사가 있어야 한다. 감사는 구원과 깊은 관계가 있다. 병고가 없어졌다고 하자, 나음을 통해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를 드림이 구원에 이르는 방법이다. 감사로 말미암아 이어지는 하느님과 나, 너와 나 사이의 상호관계가 깊어지고 이로써 구원에 이른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 주셨다. 그런데 나음을 받은 나병환자 열명 중 한 명만 예수님께 찾아와 감사를 드렸다. 아홉은 낫기는 했지만 예수님과 나병환자 사이의 관계의 복원이 전혀 없이 끝났다. 이는 치명적이다. 생명의 관계가 없었기에 더 이상 풍요로울 수가 없이 되었다. 두 구분의 사람을 놓고 일어난 내용을 보면 감사가 있고 없고 사이에 생명의 질적 차이는 엄청나게 다르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언제나 감사로 시작하고 감사로 마치자. 감사로 관계가 끊임없이 이어가고 깊어지기에 생명은 풍요로워지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
열명 중 아홉은 유다인이고 한 명만 이방인이었다. 그 한 명의 이방인이 예수님께 찾아와 감사를 드렸다. 이로써 관계가 이어졌지만 유다인 아홉은 하느님께 대한 감사함을 잃어버렸다. 아직도 입은 은혜에 대해 입을 싹 닦고는 관계를 더 이상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구원은 요원하다 하겠다.
가난하고 겸손한 마르티노
술피치오 세베로의 편지에서 (Epist. 3,6. 9-10. 11. 14-17. 21: SCh 133,336-344)
마르티노는 죽음을 맞이할 날을 오래 전부터 미리 알아 형제들을 보고 자기 육신이 사그라질 때가 임박해 왔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어떤 중대한 일이 일어나 칸데스의 교구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 교구 성직자들 간에 발생한 불화 때문에 마르티노는 자기 생명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그 교구의 화목을 되찾게 된다면 그것이 자기 전 생애에 걸친 모든 수고의 월계관이 되리라는 그러한 희망으로 여행을 거절치 않았다.
그 도시의 성당에서 잠시 체류하면서 성직자들간의 화목을 이룬 후 자기 수도원에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육신의 기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하여 형제들을 불러 자기 임종의 시각이 다가왔음을 전해 주었다. 그때 형제들은 한결같이 안절부절 못하면서 비탄 속에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왜 우리를 떠나려 하십니까? 우리 이 고아들을 누구에게 맡기시렵니까? 잔인한 이리들이 당신의 양 떼를 칠 것입니다. 목자가 부상당하면 이리들의 공격에서 누가 우리를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께서 그리스도를 갈망하시고 계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늦게 가신다 해서 받으실 상급을 잃을 우려가 없고 그 상급이 줄어드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떠나지 마십시오.”
이때 마르티노는 그들의 눈물에 깊이 감동했다. 그는 늘 하느님과 일치되어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자비의 동정심이 흘러 나오고 있었으므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 애통하는 이들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아직 당신 백성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계속 일하는 것을 거절치 않겠습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참으로 놀라운 사람이여! 수고도 죽음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으니,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는 것을 거절하지도 않았으며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려 하지도 않았다. 눈과 손을 항상 하늘에로 드높인 채 그의 무적의 마음은 기도에 굳게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모여든 성직자들은 그의 불쌍한 몸을 돌려 편히 하시라고 청하였으나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두시오. 땅보다 하늘을 더 바라보고 싶습니다. 이제 여행을 떠나려는 순간에 이 내 영혼은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마치자 악마가 가까이 있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소리쳤다.
“피에 얼룩진 짐승아,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거야? 이 놈아, 네가 받을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아브라함의 품이 지금 나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이 마지막 말씀을 하고는 하느님께 자신의 영혼을 맡겨 드렸다. 기쁨 중에 아브라함의 품에로 영접되었다. 가난하고 겸손했던 마르티노는 부요한 이로서 천국에 들어갔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이유>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가야 할 데가
있다는 것은
아직은
가야 할 데에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가야 할 데에
있지 않다면
기꺼이
가야 할 데로
가야 하지요
가다 가다 마침내
가야 할 데에 이르면
가야 할 데는 사라지고
더 이상
갈 수 없지요
나병을 낫게 하신 힘은 무슨 힘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자비를 구하던 나환자 10명이 사제들에게 확인받으러 가던 중 나았죠.
그 중 외국이방인 한 명만 돌아와 하느님을 찬미하며 감사드렸습니다.
손도 안 대고 당시 불치병 나병을 낫게 하신 힘은 무슨 힘이라 봅니까.
예수님은 아마 하늘전원 연결해 많은 기적 행하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마치 촛불 등불 시대에 지금의 22volt led전구를 환하게 켜듯 말입니다.
개울가 빨래하던 시대에 전기세탁기 쓰듯 아니 그 이상이었을 겁니다.
발전소 전력으로 인생만족 말고 하늘나라 전력인 신앙까지 설치하시죠.
그러시면 세상을 하늘 뜻으로 잘 이끌 훌륭한 인물들로 변하실 겁니다.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32주간 수요일>(2020. 11. 11. 수)(루카 17,11-19),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2-19)”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열 명의 병자 모두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자기들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여기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병자들의 말은 병을 고쳐 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라는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아마도 “너희가 청하는 대로 해 주겠다.” 라고 약속하시는 말씀도 하셨을 것입니다.
병자들은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사제들에게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병을 고쳐 주신 다음에 그들을 보내시지 않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병을 고쳐 주셨을까?
그것은 “그들을 ‘당신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또 “몸의 치유로 그치지 않고 영혼의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라고 해석됩니다.
열 명 모두, 처음에는 예수님을 ‘병을 잘 고치는 의사’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랬다가 병이 나은 뒤에,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은 구세주’ 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고, 구세주를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구세주이신 분만이 주실 수 있는 영혼 구원을 얻기 위해서 되돌아왔습니다.
다른 아홉 명은 똑같은 기적을 체험했지만 ‘예수님은 구세주’ 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고, 그저 운이 좋아서 병을 잘 고치는 의사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생겼을까?
사마리아 사람은 몸의 치유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도 희망했지만, 다른 아홉 명은 몸의 치유만을 희망했을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시는 분이니까 다른 아홉 명의 생각과 믿음과 마음을 알고 계셨을 텐데, 그리고 그들이 그냥 가버릴 것도 아셨을 텐데, 그것을 아시면서도 왜 그들이 청하는 대로 병을 고쳐 주셨을까? 그러면 안 된다고 미리 가르쳐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우리가 예수님의 생각을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자유의지와 선택권을 존중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과가 그렇게 될 것을 아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믿음’과 ‘감사하는 마음’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또 ‘깨달음’도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단순히 ‘수명 연장’만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몸의 건강’만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건강한 몸으로 살면서 장수를 누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난다면 허무할 뿐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5)”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만수무강, 부귀영화,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허무하게 끝나는 것은 똑같습니다. (실제 현실을 보면, 만수무강,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자만심에 빠지고 교만해져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도 회개하는 사람이 있긴 할 텐데,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자신이 누리는 부귀영화를 버릴 것입니다.)
<혹시라도 “온 세상도 얻고, 만수무강과 부귀영화도 누리고, 저쪽 세상에 가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천지창조 이후로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누리고, 모든 것을 다 얻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어떻든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 대답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원천 봉쇄되었습니다(창세 3,24). 그랬다가 예수님께서 오셔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 뒤를 따라간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그 생활은 세속적인 만수무강, 부귀영화와는 너무 거리가 멉니다. “왜 꼭 그래야만 하는가?” 이 물음의 답은, “믿음의 순수성을 위한 단련이다.”입니다(1베드 1,7)>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 사마리아 사람만 되돌아오고 다른 아홉 명은 그냥 가버린 것이 서운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고, 그들이 몸의 치유로만 만족하고서 영혼의 구원은 희망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입니다. (은총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서 감사드릴 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감사드릴 줄 모르는 믿음은 많이 부족한 믿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에게 하신,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그의 치유를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흔들림 없이 가라.” 라고 격려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감사의 은총을 보여 주십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2-13)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을 발견하고는 외칩니다. "멀찍이." 전염 가능성 때문에 공동체에서 소외된 이들이라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합니다. 예수님과 그들 사이의 거리감이 가슴 한켠을 아리게 합니다. 아마 그들의 외침을 들으시는 예수님 마음도 그리 아프셨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루카 17,14)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환자들의 몸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치유를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가서 사제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이미 당신은 치유를 결심하셨기에 한시도 지체하지 않게 하신 것 같습니다. 또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삼가며 "멀찍이" 서 있는 그들의 마음도 존중하신 것이지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 17,16)
예수님 분부를 "믿고"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에서 치유가 일어납니다. 얼마나 신기하고 또 기뻤을까요? 아홉 명은 말씀하신 대로 사제를 찾아 달려간 것 같습니다. 어서 '정결한 상태'라는 선언을 듣고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겠지요.
그런데 한 외국인, 사마리아 사람이 가던 길을 돌이켜 예수님께 돌아옵니다. 감사드리고 싶어서였지요. 그에게는 공동체의 정결 선언이나 복귀 허가보다 예수님께 올리는 감사가 더 시급하고 중요했습니다.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예수님과 거리상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던 그가 바로 발 앞, 그분 가까이까지 다가옵니다. 그와 예수님 사이는 거리도 가까울 뿐더러 아무 장애물이 없습니다. 감사를 잊지 않은 그는 치유만이 아니라 "주님 가까이"라는 관계성까지 획득한 겁니다.
감사는 거리를 좁힙니다.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심리적, 영적 거리도 친밀하게 바꿉니다. 감사는 상대방이 나에게 베풀어 준 호의를 내가 안다는 뜻입니다. 그로 인해 내가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 보여주고, 축복의 마음을 가득 담아서 이 모든 게 당신 덕분이라고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치유받은 사마리아 사람은 육신의 회복과 더불어 주님 가까이를 차지했던 영적 경험까지 간직하게 된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원의 원리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티토 3,5)
우리가 받는 은혜와 도움은 우리 자신의 공이 아닙니다. 죄악으로 부패해 가면서 악취를 풍기는 영육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려는 주님 자비의 덕입니다. 이 기적은 때로는 멈추어서, 때로는 가는 길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께서 이르시는 대로, 때로는 멈추고 때로는 가던 길을 계속 가면서 그분의 뜻이 내 존재 안에서 이루어지길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드릴 것은 감사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자기 능력 밖의 일 투성이라는 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 곧 인생일 터이니, 주님 발 앞에서 점점 더 무력해지고 점점 더 작아져가면서 바칠 수 있는 건 감사뿐입니다. 겸손하고 솔직할수록 감사는 더 깊은 진정성을 띱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복음 환호송)
감사는 주님 가까이에서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드리는 친밀한 행위입니다. 세상을 다 가지신 주님이시건만, 보잘것없는 우리 감사에 그분은 감동하고 행복해하십니다. 감사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더 내밀해집니다. 이로써 우리가 받은 은총과 우리의 믿음이 확증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 "멀찍이서" 맴돌지 말고 가까이, 아주 가까이 다가가 그분께 마음을 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속삭이는 찬양과 흠숭과 영광, 사랑과 감사로 주님께서 흡족하고 기쁘실 겁니다.
감사와 믿음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해마다 서품을 앞둔 부제들은 비슷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서품을 요청하는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데, 내가 과연 그리스도의 도구로서 합당한 사람인지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고민 중에 당시 모셨던 주임신부님께서 저에게 한 가지 일화를 전해주셨습니다. 그 신부님과 동기들 역시 서품을 앞두고 저와 같은 고민에 빠졌답니다. 그리하여 서품 직전, 서약서를 학장 신부님께 제출해야 하는데 결국 정해진 시간까지 아무도 서류를 내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안 학장 신부님은 부제들을 모두 불러서는 이는 교만한 행동이라며 호되게 야단을 치셨습니다. 지금껏 잘 이끌어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희망과 용기를 가져야지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했다고 교만한 생각을 하니 이런 결과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질타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제가 되면 주님께 대한 간절함을 잊고, 감사하는 마음도 곧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 그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론 중요한 일을 앞두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지만 그 후에 주님께 드려야 할 감사는 잊어버리곤 합니다. 마치 나만의 힘으로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남는 건 ‘나’라는 빈껍데기 뿐입니다. 그 자리에 믿음은 더 이상 설 곳이 없어지고 주님은 마음 아파하실 겁니다.
치유가 아닌 사랑과 구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사랑도 아니고 구원도 아닌 치유. 이것이 오늘 복음을 읽으며 제가 느낀 것입니다.
달리 얘기하면 사랑은 받아도 구원은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병을 고쳐줬는데 병만 치유 받지 사랑은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치유가 사랑이고, 사랑이 구원인데 사랑도 구원도 발생하지 않고, 하느님도 발생치 않은 것이 오늘 아홉 나환자의 불행이고, 우리도 이 아홉과 같다면 같은 뜻에서 불행합니다.
우선 치유만 받고 사랑은 받지 못하는 경우를 보겠습니다.
치유만 받고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치유를 사랑이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치유가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치유가 사랑이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의 병을 치유해주는 것은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요 의무이지 사랑이 아니지요.
같은 식으로 어머니의 밥이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사랑으로, 지극 정성으로 밥을 지어 자식에게 먹이는데 자식은 그것을 부엌데기 엄마의 당연한 일,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사랑이 발생치 않습니다. 다음으로 사랑을 받아도 구원이 발생치 않고 하느님이 발생치 않는 경우를 보겠습니다.
이 경우는 믿음이 없고, 믿음의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릇 모든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만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고, 엄마의 사랑도 하느님의 사랑이고, 친구의 사랑도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엄마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것을 자주 실패합니다. 우리는 친구의 사랑에서 친구와 친구의 사랑만 봅니다. 연인끼리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풋사랑일 경우, 다시 말해서 사랑이 초보일 경우 다 그렇습니다. 서로를 볼뿐 같이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서로를 볼뿐 하느님 안에서 상대를 보지 못합니다.
가끔 우리 형제를 영적 동반하면서 이성문제를 안고 있는 형제를 만납니다. 그때 저는 그 자매와의 사랑을 그만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보다는 그 자매가 바로 하느님의 자녀이니 그 자매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사랑하라고 충고하고, 그럴 때 자매의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현현이고 현재가 될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형제가 저의 충고대로 할 경우 자매와의 사랑은 하느님과의 사랑에 오히려 도움이 되고 심지어 이웃과의 사랑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때까지의 사랑이 관념적이고 메마른 사랑이었음을 이 사랑이 깨닫게 하고,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촉촉한 사랑을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이웃사랑들을 보고, 하느님의 사랑들인 이웃사랑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낙엽이 지는 길을 걷다보면 널려 있는 낙엽들 사이로 성숙한 삶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봄날의 연두빛, 신록 우거진 초록빛, 가을 어느 날 진홍빛 단풍들이 되고 예전에도 그랬듯이 한 바람에 실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낙엽은 이런저런 색깔이 아닌 모든 것이 지난 빛바랜 색깔이 됩니다.
젊은 시절에는 옳고 그름의 진한 색깔을 칠하며 흑백논리에 얽히고설키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저렇게도 될 수 있다'라며 그 입장을 살피는 다원논리에 다가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서 지혜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네요.
“남을 중상하지 말고 온순하고 관대한 사람이 되어 모든 이를 아주 온유하게 대하게 하십시오.”(티토 3,2)
우리가 잘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의 결과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우리는 어떤 선행도 할 수 없다.’라는 교회의 가르침이 새롭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한 일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따라, 또한 성령을 통하여 새롭게 나아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시어 구원에 이르는 힘을 받고 용기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며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십니다.
그런데 한 마을을 들어가시자 나병 환자 열 명이 그분께 마주하며 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멀찍이서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17,14)라고 말씀 하십니다. 놀랍게도 그들이 가는 동안 몸이 치유가 되어 깨끗해 졌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예수님께로 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리는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17,17-18)
예수님께서 이어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7,19)
지금도 그렇지만 나병은 거의 불치의 병입니다. 병이 나았다 해도 피부의 모습은 다시 회복되지 않고 큰 상처의 흔적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멀리하려하고 그 병을 두려워합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지만 사실은 삶을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하게 만듭니다.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신앙도 깊고 또 행복하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남의 도움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서 곧잘 우리는 도움을 준 사람들을 잊고 살 때가 많지요. 그래서 어른들께서는 말씀하시곤 했지요.
‘사람은 받은 은혜를 갚을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이 하늘도 감동시킨다.’ 그리고 ‘남에게 받은 은혜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잊지 말며 남에게 베푼 것은 큰 것이라도 잊어라.’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지시한 것입니다.(레위 14,1-32)
그들이 사제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진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병이 나은 것을 알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이것을 보더라도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 보다 그 은혜도 잊은 채 사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도 격언에 ’이 세상에 행복한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이 더 많다.’말이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이지요.
그러나 불행한 사람은 받은 것은 잊어버리고 받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불평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감사할 줄 알고 행복한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고통스럽고 불만이 많은 사람이 과연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을까요?
물론 종말에 하느님께서 완성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아름다움, 선하심을 우리가 지금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느님 나라의 맛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사실에 하느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당신 말씀으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께 우리는 늘 감사해야지요.
제가 알고 있는 분은 말기 간암으로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가 오랫동안 신앙을 받아들인 것을 미루가다가 한 본당에 나가서 조용히 예비자 교리를 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세례를 통해서 새로 태어났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그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가 한 평생을 살아오면서 후회되는 일이 한 가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감사할 줄 모르며 매일 울분과 비판, 그리고 부정적인 사고와 서슴치 않는 비판적인 언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대부님에게 전화를 했더니 ‘매일 감사하라,’라는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에게 먼저 속죄하는 마음으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혼자 있을 때도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가족들, 특히 부인이 ‘저이가 생명이 얼마 안남어서 정신이 이상한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못하던 말, 감사하다는 말에 인색하던 지난 날을 생각하며 너무 늦었지만 진심으로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매일 변함 없이 어린 아이처럼 가족들에게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혼자 있을 때는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라고 떠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쉬지 않고 ‘감사합니다.’라는 말의 기적이 일어 난다는 것입니다.
그 한 마디가 그렇게 삶의 색깔을 변화시킬 줄 자기 자신이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용서하지 못하던 사람들을 생각합며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면 눈물이 난다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다가 온다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의 위력은 바로 마음 가득히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느껴 보지 못한 기쁨과 기쁨이 믿지 못할 정도로 마음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임종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어도 그렇게 비판적이고 저돌적인 그가 행복한 모습으로,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그가 늘 말하던 대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대로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데도 한 평생을 그 말에 인색했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이론적으로는 '감사하다'라는 말이 쉽고 단순한 것 같은데 막상 실 생활에서 실천하기란 열 명 중에한 명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듯, 어려운 사실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대로 우리도 돌아와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주님 앞에 무릎을 끓었던 한 나병환자의 모습을 우리도 새기며 매일의 생활에서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함승수 신부님
가난하지만 독실한 신앙을 지닌 두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평생 동안 매달 수입의 10분의 1을 성당에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매달 자신의 수입에서 10분의 1을 무조건 떼서 성당에 봉헌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진 것이 별로 없고 여러 모로 부족했던 사회생활 초기에는 수입의 10분의 1이라고 해봤자 아주 적은 액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둘 중 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그렇게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넉넉하게 지냈지요. 그 때까지는 두 사람 모두 수입의 10분의 1을 바치겠다던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공한 사람이 고민이 있다면서 친구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친구, 사실은 내가 젊은 시절에 자네와 함께 하느님 앞에서 맺었던 그 약속을 이제는 그만 취소하고 싶네. 내 수입이 백만원이었을 때에는 그 10분의 1인 10만원을 성당에 봉헌하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았는데, 이제는 한 달에 버는 돈이 몇 억씩 되다보니 그 10분의 1이라고 해도 액수가 꽤나 크네. 그렇게 큰 액수를 내다보니 경제적으로 부담스럽기도 하고, 또 함께 사는 가족들 눈치도 보이고, 무엇보다 자꾸만 마음 속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괴롭네. 우리가 그동안 하느님께 많은 돈을 봉헌해왔으니 이제는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만 봉헌해도 하느님께서 이해해주시지 않겠나?"
그러자 이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제 친구가 몇 억씩 버는 것이 이제 싫은가 봅니다. 그가 다시 한달에 10만원씩 봉헌하는 사람이 되도록 해 주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겸손하게 나누며 살아야 하느님으로부터 더 큰 축복을 받는 법입니다. 성공한 사업가가 된 그 사람이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어려웠던 시절부터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꾸준히 자신이 가진 것을 하느님께 봉헌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헌한 것이 교회를 통해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달되었다가 나중에 더 큰 은총이 되어 그에게 되돌아갔던 것이지요. 그가 만약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비관하며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면, 그래서 하느님께 드릴 몫을 내어드리지 않았다면 그 정도로 성공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총 열 사람의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병이 치유되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 아홉 명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버렸고, 예수님을 통해 치유의 기적을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물론 그냥 집으로 돌아간 아홉 사람의 입장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나병환자'라는 저주받은 신분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기 위해, 사랑하는 가족들의 품으로 어서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급하게 서둘렀겠지요. 하지만 그들의 성급함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드릴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그로 인해 더 큰 은총을 받을 기회마저 놓쳐버렸습니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의 나병환자만큼은 하느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사제에게 깨끗해진 몸을 보이고 공동체로 돌아가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지만 자신에게 그런 기적을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일은 때를 놓치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몸이 나병에서 나아 깨끗해졌음을 확인하자마자 가던 길을 멈추고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와 찬미의 인사를 바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구원의 은총까지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기적을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자신은 당연히 건강해야 하고, 자신에게는 당연히 좋은 일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당연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기며 좌절하고, 나중에는 하느님을 원망하며 그분에게서 멀어지고 맙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은 기적 안에서 자신을 향한 하느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기적을 체험한 후에는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 안에서도 하느님의 은총과 행복을 발견합니다. 그런 발견들이 점점 많아질수록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은 더 커지고, 그럴수록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나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리라는 믿음도 커집니다. 또한 그 믿음이 큰 사람은 어렵고 힘든 현재의 상황 속에서도 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께 돌아온 단 한 사람의 나병환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해서 내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일들이 다 기적입니다. 우리가 그 기적들을 놓치지 않고 찾아내어 하느님께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점점 더 커질 것이고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참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인가? <루카 17, 11-19> 11월 1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 10명의 나환자 가운데 한 사람만 주님 앞에 나와서 감사하니 “나머지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하시며 감사하는 사람과 감사하지 않은 사람을 구별해서 말씀하시며 감사하는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 하셨습니다.
참 믿음은 어디서 증명될까요?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살다가 어떤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면 “나는 결백하고, 잘 살고 있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며 “주님, 어디 계십니까?” 하고 한탄하고 원망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보통 열 중 하나 잘못되면 그 하나를 생각하면서 눈물 흘리며 믿음을 잃게 되지만, 지금 받고 있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코로나에 걸려 음압 병실에서 이틀 동안 산소 호흡기를 사용하고 병이 다 나아 퇴원하면서 산소 호흡기 사용료를 엄청 많이 청구하니 막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으니 청구한 사람이 “왜 그러느냐? 값이 너무나 많아서입니까?” 하니 “아니요, 제가 지금 80년을 살면서 공짜로 하느님이 주신 산소를 호흡하면서 감사하지 못한 것을 뉘우쳐 울었습니다. 낼 돈은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 우리는 얼마나 늘 하느님이 주시는 것을 감사하고 찬미를 드리며 살고 있는가? 반성이 됩니다. 공기뿐 아니라 태양의 힘, 땅에서 나오는 그 많은 먹거리에 참으로 감사하는지. 여기서 “그런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말하겠지만, 오늘 복음에 아홉 명의 사람도 바로 이런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병이 나은 것은 당연하다.’ 생각하고 그냥 집으로 갔을 것입니다.
주일 아침 기도에 늘 나오는 다니엘서 3장 57-88에 “피조물아, 주님을 찬미하라”를 봅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사는 모든 것들, 주님을 찬미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숨 쉬고, 살도록 하는 모든 것들 하나라도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얼마 전 휴가를 떠나 바다, 산, 들, 가을 풍경 보며 주님을 찬미했습니다. 감사와 찬미를 하면서 길을 가고, 눈에 들어오는 것을 감탄하며 찬미 노래했습니다.
어제 젊은 형제들과 이야기하는 중 본당 신부 나가고 싶다고 해서 제가 본당 나가려면 보좌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하니 “지금 우리 나이가 얼마인데” 해서 3년 보좌 생활하면서 본당 신부 때문에 힘들었던 이야기, 네 분의 본당 신부를 모시고 산 이야기를 하고 방에 돌아와 생각하니 그분들이 있어서 배우고, 익히고, 그분들의 덕으로 40년 동안 어려운 생활을 지나 여기 이렇게 살고 있음을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신부님에게는 공의회 정신을 배우고, 또 한 신부님에게는 사목 열정을 배우고, 한 신부에게는 “만사형통”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배우고, 마지막 신부에게는 늘 웃고 큰소리치며 걱정 근심을 털어버리는 것을 배웠으니 감사할 일이 아니었는가?
사방을 둘러보면 감사할 일만 있습니다.
신학을 배우며 왜 하느님은 하나이신지, 3 위를 갖고 계신지 어려운 믿음이라 생각했지만, 살면서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심을 찬미하고 감사합니다. 성호경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영광송을 할 때도 감사합니다. 참 믿음은 성호경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마지막 죽음에 이르러 성호경을 놓을 때 “아멘” 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빌며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마르티노 주교는 316년 무렵 헝가리 판노니아의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로마에서 공부한 그는 군인으로 근무하던 중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신비 체험을 하셨습니다. 곧 추위에 떨고 있는 거리의 한 걸인에게 자신의 외투 절반을 잘라 주었는데, 그날 밤 꿈속에 그 외투 차림의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곧바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그는 나중에 사제가 되었으며, 370년 무렵에는 프랑스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어 착한 목자의 모범을 보이며 복음 전파에 전념하였습니다. 프랑스 교회의 초석을 놓은 마르티노 주교는 프랑스 교회의 수호성인 가운데 한 분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2)라고 큰 소리로 간절하게 청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병이 나은 사람 중에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이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17-18절)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우리도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면, 당장 죽기라도 할 것만큼 급하고 간절하게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청을 한 번도 하나도 제외하지 않으시고 다 들어주십니다. 물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과 시기에 따라 다르게 들어 주시만. 그런데 정작 그 시기와 그 문제가 해결되면 그냥 그렇게 넘어갑니다. 어떤 때는 잠시 감사의 기도를 바치기도 하지만, 마치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는 듯이, 세월이 흘러서 해결되었다는 듯이 충분히 감사드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께서 해결해 주신 다음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또는 그 일로 인하여 정말 새로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쳐주시는 것만, 살게 해주시는 것만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적절한 나의 삶의 변화와 진정한 복음화로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님 나라를 이루어 나갑시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쩌면 내게 허락하신 주님의 구원이 진정 이루어지는 것은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자격도 되지 않았는데 무조건 쥐어주시는 주님이 아니라, 내가 주니의 은총을 감사로이 받아들이고 그에 적절한 변화된 삶을 살 때 온전한 구원이 이 땅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후 심판 -성덕의 잣대이자 심판의 잣대는 사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경건하고 모없이 슬기로와서/겸손으로 티없이 보낸생애여
주께받은 생명을 꽃피웠으니/그향기를 만세에 남기었도다
질병으로 심하게 앓는이들이/그질병들 아무리 심하다해도
이성인의 묘지를 찾아갈때에/놀랍게도 회복을 얻게되도다”-
어제 성 대 레오 교황 축일에 이어 오늘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축일의 윗 찬미가 두 연이 참 은혜롭습니다. 성인 축일을 맞이할 때 마다 기분이 좋습니다. 삶의 좌표이자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는 분들입니다. 아, 이렇게 살 수도 있겠구나 살 힘과 의욕을 주는 성인들입니다. 기념하고 기억할뿐 아니라 우리 모두 사랑을 실천함으로 주님을 닮은 성인이 되라고 격려하는 성인들입니다.
성 마르티노는 4세기 만60세로 세상을 떠난 분으로 성 베네딕도 이전에 이미 서방 수도원 제도를 개척한 탁월한 지도자로 순교자가 아니면서도 성인이 된 최초의 인물입니다. 하여 우리 분도 수도승들은 기념미사가 아닌 특별히 축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제가 성인 축일 때마다 우선 확인하는 것이 성인의 생몰연대를 통한 산 햇수입니다. 성인의 산햇수의 나이에 제 현재의 나이를 견주어 보며 각오를 새로이 하곤 합니다. 위령 성월 11월, 만추의 가을엔 ‘가을 인생’을 맞이한 이들은 더욱 자신의 삶을 추스르며 점검하기도 할 것입니다.
과연 내 인생 여정을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어느 계절 지점에 와 있겠는지요. 참 재미난 현상은 수도원 피정자들의 대부분이 연령대로 볼 때 가을 인생을 맞이한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어제 예수성심자매회 모임에도 14분의 자매들이 오후 미사에 참석했고 대부분 가을 인생에 속한 분들이었으며 미사후에는 ‘성호경’ 기도와 더불어 기념 촬영후 메시지와 더불어 성화聖畫처럼 아름다운 사진을 카톡으로 전송하니 참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사진처럼 웃으며 행복하게 사세요! 사랑하는 성녀 베로니카 자매님!”
14분 모두에게 셰례명만 바꿔 세례명 앞에 ‘성녀聖女’를 넣어 위와 같은 메시지를 보내니 너무 유쾌했습니다. 졸지에 14분이 자매가 성녀가 된 것입니다. 보내준 답신 내용도 일부 소개합니다.
-“오늘은 많은 분들이 오셔서 더 행복한 만남이었습니다. 행복전도사 신부님 늘 감사드립니다.”
“성호경 기도로 성녀의 칭호를 주심에 주님 앞에 어깨가 더욱 무겁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신부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사진을 찍으니 새롭고 신선합니다. 오래 간직하겠습니다.”
“신부님, 성녀 만들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오늘 주님 덕분에 지상에서 성녀되어 천국 체험하고 온 것 같습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의 궁극의 소원은 성인이, 성녀가 되는 것임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사실 세상에 온 목적도 내 본연의 모습, 주님을 닮은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유별난 성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랑 많은 ‘사랑의 성인’이요, 성덕의 잣대는 바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성인답게’, ‘성녀답게’ 사는 것은 우리의 존재이유이자 모두입니다. 정말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삶은 무의미하고 허무할 뿐입니다. 그러니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13장 다음 말씀도 기억할 것입니다.
“1.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2.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말씀으로 내 자신의 사랑을 살펴 보게 됩니다. 성덕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모든 성인이 예외 없이 사랑의 성인입니다. 다음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은 비단 예수님을 비롯한 예언자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종’으로 또 성인으로 불림 받아 파견된 우리 믿는 모두에 해당됩니다.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파견에 앞선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참으로 우리를 내적으로 치유하고 자유롭게 하셔서 세상에 당신 평화의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닌 구체적 동사입니다. 성덕의 잣대일뿐 아니라 이런 구체적 사랑의 실천은 최후심판의 잣대도 됩니다. 성 마르티노를 결정적으로 회심시킨 신비체험도 이런 구체적 사랑 실천의 은총이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거지는 마르티노에게 도움을 청했고 가진 것이라곤 몸에 걸친 망토와 검劍뿐이라, 성인은 검으로 망토를 반으로 잘라 거지에게 줬고 밤에 꿈에 자기 반쪽 망토를 입은 예수님께서 나타나 “아직 예비신자인 마르티노가 이 옷을 입혀 주었다”하신 말씀을 듣고 즉시 세례성사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예화에 근거한 오늘 복음입니다.
최후심판의 집행자는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 예수님은 모든 민족들의 사람들을 가른 후 양들은 자기 오른 쪽에, 염소들은 자기 왼쪽에 세운후, 오른쪽의 양들에게 장엄한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과연 나는 오른쪽의 양과 왼쪽의 염소중 어느쪽에 속할 까요?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를 차지 하여라. 너희는 1.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2.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3.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4.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5.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6.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추상적 영적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신체적 필요를 채워준 실천적 동사의 사랑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말만의 사랑을, 마음만의 사랑을, 감정만의 사랑을 몹시 부끄럽게 합니다. 과연 6개 항목의 구체적 사랑을 얼마나 실천하고 계시는 지요?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의아하여 묻는 의인들에게 주님은 명확하게 말씀하시니 바로 오늘 복음의 절정이자 결론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참 놀랍고 신선한 충격적 말씀입니다. 종파, 언어, 국적, 인종, 성별 모두를 초월하여 모든 가장 작은 이들을 ‘내 형제’라 칭하며, 이들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 해 준 것이라 하며 가장 작은 이들과 예수님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참으로 가장 작은 형제들은 물론 곤궁중에 있는 형제들 모두가 주님의 현존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가난한 작은 이들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자가 정말 건전하고 건강한 사랑의 신비주의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구체적 사랑의 실천이 없는 온갖 영적 수행들은 참으로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 모두 당신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어, 내 삶의 자리의 가장 작은 형제들에게 사랑의 일꾼으로 파견하십니다. 참으로 주님의 가장 작은 형제들을 구체적 사랑으로 도울 때 비로소 성체성사의 완성임을 깨닫습니다. 아멘.
마르티노의 외투
이기우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낫게 해 주셨는데, 몸이 깨끗해 진 그들 열 사람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치유를 기적이라 생각하고 감사를 드린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필 신앙의 정통계승자이자 주류로 자처했던 유다인이 아니라 혼혈과 우상숭배 풍습으로 지탄받아 비주류로 따돌림받았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병을 치유받은 나머지 유다인들이 감사를 드리지 않는 것에 대해 개탄하시면서 감사할 줄 알았던 이 한 사마리아인을 신앙의 본보기로 내세우셨습니다.
사실 신앙은 감사로 시작합니다.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태도가 신앙의 기본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거저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여건도 선물받았습니다.
부모와 같은 은인들의 존재도 그러하고, 나라와 같은 사회환경도 그러하며, 말과 글 같은 문화도 그러합니다. 더욱이 이 모든 여건을 하느님의 은혜로 깨달아 알 수 있게 해 주는 신앙의 환경 즉 교회도 선물받았습니다.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마르티노는 4세기 경에 헝가리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공부를 하고 군인으로 출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추위에 떨고 잇는 한 거지에게 자신의 외투 절반을 잘라서 덮고 잘 수 있는 이불로 삼으라고 주었는데, 그날 밤 꿈에 그 외투차림으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이 신비체험 후에 그는 하느님을 알게 되어 세례를 받고 나중에는 사제가 되었으며 프랑스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었는데, 착한 목자로서의 모범을 보여준 결과, 프랑스 가톨릭교회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서 귀족이나 입을 수 있었던 값비싼 외투의 절반을 그 추운 겨울밤에 거지에게 나누어준 행위는 자신이 받고 있는 은혜가 결코 당연한 권리가 아니며 거저 주어진 선물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티노가 겪었다고 전해지는 신비체험의 전설은 오늘 복음의 교훈과 상통한다고 봅니다. 사실 신앙은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먼저 사랑을 받았다는 체험을 인식하는 정신 자세입니다.
이는 우리네 삶에 덧붙여진 부록이 아니라 우리네 삶의 기본사실을 알려주는 전제입니다. 사람은, 하느님께서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우리네 삶을 가능하게 하고 이끌어주는 존재이심을 알아야 인간으로 성숙합니다.
이것이 그저 하느님을 복을 주는 대상으로만 알고 요구하고 기대하는 자세로부터 졸업해야 하는 이유이자 근거입니다. 이러한 자세를 기복적 신앙이라고 하는데, 이는 인간적 성숙을 지체시키는 장애요소이므로 신앙이 성숙하기를 바라는 평신도들은 유치원 수준의 기복신앙을 벗어나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성숙한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참 하느님을 알려주시고 실제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삶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제자인 티토에게도 권고하듯이, 자신의 인간관계를 다스려서 모든 선행을 할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알면 알수록 수월해집니다. 사실 모든 신앙인들이 보여주는 신앙생활의 모습은 그가 알고 있는 예수님께 대한 인식의 수준입니다.
기복신앙 수준에서 성당에 다니는 평신도들의 경우에는 신앙의 대상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자신이 청원하는 기도에 얼마나 더 큰 축복으로 응답받느냐만이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습니다.
기복신앙 수준에서 어렴풋이 벗어났다고 자부하는 평신도들의 경우에도 미사 때마다 선포되는 복음이 복음사가별로 네 가지 종류나 있다는 정도의 지식도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코, 마태오, 루카 그리고 요한 등 복음사가들이 각기 처한 상황에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나름대로 처절한 응답으로 쓰여진 기록임을 모르고 복음선포를 듣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다 보니 신앙생활의 목표가 예수님을 알고 그분처럼 사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착하게 살면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다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라는 정도로 알고 사는 평신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세상에 대해 아는 지식에 비해 예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이 형편없이 적고 초라한 처지에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가 어렵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힘을 주어 권고하듯이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평신도들이 성직자나 수도자에 못지않게 동등한 공동책임을 짊어지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성직자는 교계제도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신자이고, 또 수도자는 수도회 안에서 수도생활과 사도직 활동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는 신자인 것처럼, 평신도는 가정 안에서 세상에 나아가 사도직 활동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고 또 증거하는 신자라는 차이만 있을 뿐, 하느님 백성 안에서 또 하느님 앞에서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는 우열의 차별이 없습니다. 또 마땅히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차별이 생겨나고 있는 이유와 빌미는 바로 평신도들이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나 살기 위해서 투신하는 몫과 정도가 성직자와 수도자에 비해 모자란다는 현실에서 비롯합니다.
평신도들이 받고 있는 가정의 성화와 세상의 성화라는 그 소명이 성직자와 수도자에 비해서 절대 열등한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속적 집착의 상징이요 기복신앙적 흔적인 삶의 외투를 잘라버리십시오, 그리고 가진 것을 나누십시오. 마르티노처럼 말입니다.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은 감사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복음에서도 10명의 나병 환자 중 단 한 명의 이방인만 감사를 드리러 왔다고 했습니다. 또한 복음 환호송에서도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삶 안에서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을까요? 그것도 진심으로 말이지요.
사실 많은 분들을 뵙다 보면, 어떤 사람은 모든 것에 긍정적으로 행복하게 사는데, 어떤 사람은 거꾸로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불행하게 삽니다. 물론 외부적인 요인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많은 경우 스스로가 그 행복이나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신학교 때 이야기를 하나 할까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한 명은 아주 지독히도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른바 불행의 아이콘이었지요. 어떤 일을 마주치든 언제나 투덜거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주변 사람도 좀 힘들어하고,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운이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입버릇처럼 자기는 운이 없다고 말하며, 정말로 운도 없었습니다. 선택과목을 고를 때에는 모두 그 친구가 가는 반은 피하려 했습니다. 너무 힘들기 때문이지요. 숙제가 상대적으로 많다거나, 수업이 어려운 경우이거나. 하지만 옆에서 오랜시간 함께 지내며 보니, 한 가지 느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불행을 스스로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모두가 좋다고 하는 환경, 조건에서도 언제나 투덜거렸습니다.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며 그 불행을 만들었습니다. 지켜보는 사람 입장으로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에 반해 다른 또 한 명의 반대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매우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지녔고, 언제나 웃으면서 쾌활하게 살았습니다. 주변에 좋은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사람이었지요. 게다가 운도 좋았습니다. 럭키 가이였습니다. 스스로 긍정적 에너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주변에 줄 줄도 알았으며, 스스로 자신은 긍정적이고 운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선택과목을 고를 때에는 모두 그 친구가 가는 반으로 가려 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운이 따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다보니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였고,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그 사람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랜시간 지내며 보니 느끼는 것이 있었는데, 스스로 행복을 찾고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감사가 있었습니다. 언제나 감사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어디를 가든, 어떤 곳을 가든, 어떠한 환경을 만나든, 감사하다고 하며,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러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해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찾고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은 바로 오늘 말씀드리는 감사가 아닐까 합니다. 어렵게 생각마시고, 주변에 있는 형제자매, 가족부터 시작하면 좋겠어요. 하루에 마음을 담아 20번만 감사하다는 말을 할 줄 안다면 내가 행복해질 것입니다. 모든 말과 행동은 결국 돌아서 나에게 오기 때문이지요.
오늘 하루도 주님과 함께, 감사하며 기쁜 하루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 1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얼마만큼
우리 믿음을
내면화 시키고
있는지를
성찰하는
때이다.
믿음의 본질을
가리고 있는
껍데기를 벗을
시간이다.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에서
믿음은 시작된다.
치유도 믿음도
내면화의 여정을
걸어간다.
내면화의 여정은
기억하고 감사하는
우리들 삶이다.
비참했고
고통스러웠던
그때를
기억한다.
믿음이 가고자
하는 길은
치유이며
구원이다.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치유의 여정이다.
치유의 여정이
믿음의
여정이다.
믿음안에
따뜻한 치유가
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주시는
믿음의
하느님이시다.
깨끗해지는
믿음이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우리자신이다.
올바른
믿음의 삶은
추하지 않고
아름답다.
믿음이
구원이다.
믿음은
치유라는
내면화의
여정을 필요로
한다.
만약 부모가 자신의 자녀들이 아닌 다른 제3자에게 유산을 물려준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아마 부모의 이런 결정에 대해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어떻게 부모로써 자식을 외면할 수 있느냐면서 큰 소리로 부당함을 강조하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부모가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부자 노인이 병든 자기 몸을 수년간 정성스럽게 간병해 준 여성에게 재산의 상당 부분을 상속하는 유언장을 작성했습니다. 이 사실을 우연히 자녀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깜짝 놀랐고, 이런 결정을 한 아버지에게 서운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면서 혹시 긴 병에 정신이 흐려졌거나 마음이 약해서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닐까 싶었지요. 하지만 상속을 하겠다는 이 부자 노인의 마음은 확고했습니다. 자신이 가장 어렵고 힘들었을 때 함께 했던 이 간병인이 혈육인 자식들보다도 더 소중하고 고마웠다는 것이었지요. 먹고 살기 힘들다면서 자녀들은 나 몰라라 하며 부모를 거의 찾아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혈육이라는 가까운 관계 역시 아무런 왕래가 없고 철저하게 외면하며 산다면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남이라 할지라도 서로 간에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진다면 혈육보다도 더 감사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다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만큼 사회가 각박해졌다는 말도 되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사랑해야 할 대상이 많아졌다는 이야기도 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뜻에 맞춰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사실 나병이라는 병은 끔찍해서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과 공동체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대신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 위로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 앞에 나타난 예수님은 마지막 희망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가족까지도 외면하는 상황,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모두가 외면하고 거부하는 상황에서도 철저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린 사람은 딱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큰 은총을 받았음에도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이 환자였음을 숨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환자였던 자신을 외면했던 공동체에 또 외면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작 자신을 받아주고 고쳐주셨던 주님을 외면하는 것이지요.
우리 역시 하느님께 많은 은총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감사의 기도와 또 이에 따른 행동을 하고 있었을까요?
힘든 일 자체가 스트레스가 아니라, 그 일에 대한 나의 생각이 나를 힘들게도 만들고 즐겁게도 만든다(에픽테토스).
108 이승훈 베드로 묘(반주골)
우리나라 최초 영세자 이승훈은 1756년 태어나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서학 연구에 매진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마재 정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혼인하여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당대의 석학 이벽과도 교분을 맺은 이승훈은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던 중에 이벽의 권유로 1783년 말 동지사를 따라 북경으로 가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 북경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됩니다.
영세 후 이벽, 정약전 형제,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1785년에는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 집회를 가지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천주교회를 설립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명례방 집회가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되는 ‘을사 추조적발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을 지어 첫 번째 배교를 합니다. 여기에는 조상 제사 문제와 부모의 적극적인 반대 등이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1786년 다시 교회로 돌아왔고,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 때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 등과 함께 체포된 후 4월 8일 참수되었습니다.
이승훈 베드로부터 시작된 신앙은 그의 후손들에게도 이어져 아들 이신규(마티아)를 비롯해 4대에 걸쳐 5명의 순교자를 냈습니다.
매월 셋째 주목요일 오후 3시 만수1동성당에서 미사 후 묘역 도보 순례를 하고 있으며, 주소는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 산 132-1입니다. 성지 사무실 전화는 032-765-6916입니다.
가장 환대받고 특급 서비스를 받아야 할 VIP 손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네 인간들의 생각이나 계획, 결심이나 다짐은 참으로 변화무쌍합니다. 주어진 상황이나 처지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기에, 결코 믿을만 한 것이 못됩니다. 기분에 따라, 여건에 따라 크게 요동치고 뒤바뀝니다.
저같은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수도회 입회 때나 첫서원 때, 서품 때의 마음가짐은 정말이지 대단했습니다. 그 어떤 것이든 못할 게 없을 태세였습니다. 수도회를 위해, 청소년들을 위해 이 한 몸, 이 한 목숨 다 바치겠다고 혈서까지 쓸 정도였습니다.
그 계획, 그 결심들을 쭉 밀고 나갔더라면, 아마도 지금쯤 살아있는 성인(聖人)이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과 몇 십년만에 그 대단했던 각오들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제 한 목숨, 제 한 영혼 부지하는 것만도 벅차, 허덕이고 있습니다.
은혜롭게도 예수님을 만나 치유의 은총을 입은 열명의 나병 환자들의 모습도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듯 합니다. 치유받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태도는 정말이지 열렬했고 간절했습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의 목소리에 담긴 절박함을 한번 보십시오. 율법의 규정에 따라 그들은 민간인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멀찍이 떨어져 있었던 그들은, 혹시라도 자신들의 목소리가 예수님 귀에 닿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젖먹던 힘까지 다해 크게 외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 복음 17장 13절)
주님의 자비를 부르짖는 나병 환자들의 마음가짐도 대단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지긋지긋한 나병만 치유해주신다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봉헌하겠습니다. 주님의 둘도 없는 제자가 되어, 세상 끝날 때 까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치유의 은총을 입자마자, 그들은 불과 몇 시간 전의 결심과 다짐들을 까마득히 잊어 버렸습니다. 언제 그랬냐는듯이 룰루랄라하며, 각자의 길을 갔습니다. 오직 단 한명의 치유받은 사람만이 돌아와 주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습니다.
배은망덕한 아홉명의 행실 앞에 ‘얼척’이 없으셨으며, 살짝 ‘빈정’이 상하셨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복음 17장 17~18절)
오늘 우리는 과연 어느 쪽에 서 있습니까? 주님께서 무상으로 베푸신 무수하고 무한한 은혜 앞에 늘 감사와 찬양을 드린 한 명 쪽입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폭포수같은 사랑과 은총들은 까마득히 잊어먹고, 제 갈길을 가고 있는 아홉 명 쪽입니까?
저희 살레시오회 복자(福者) 아르헨티나 출신 아르테미데 자티(Artemide Zatti) 수사님(1880~1951)의 생애는 참으로 특별합니다. 그는 스무살 되던해 폐결핵을 앓고 있던 한 젊은 사제를 간호하다가 자신도 감염되어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놓여진 다리에서 왔다갔다 하던 그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께 한 가지 청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모님, 부디 제 병을 낳게 도와주십시오. 만일 치유의 은총이 제게 주어진다면, 제 남은 생애를 가장 가련한 환우들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기도 덕분이었던지 자티 수사님은 기적적으로 치유가 됩니다. 치유되자 마자 언제 그랬냐는듯이 각자 갈길을 갔던 아홉 명과는 달리, 자티 수사님은 남은 생애를 오로지 환우들을 위해 100퍼센트 봉헌했습니다.
환우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환우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병원에서의 고된 일과가 끝나면, 그 유명한 고물 자전거를 타고 거동하기가 힘들어 병원으로 오지 못하는 환우들을 방문했습니다. 빽없고 돈없는 환우가 입원할 때 마다 자티 수사님은 의사 선생님들과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크게 외쳤습니다.
“여기 가장 환대받고 특급 서비스를 받아야 할 VIP 손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떤 부부에게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내가 다른 사람에게 비밀스럽게 속삭이는 이야기를 남편이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이야기인즉 두 아들 중 한 아이가 남편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아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후 몇 년이 흘렀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어 중병에 걸렸고 자기가 곧 죽을 것을 짐작하고 유서를 썼습니다.
“내 핏줄을 타고난 아들에게 전 재산을 준다.”
그가 죽자 그 유서는 재판관에게 넘어갔습니다. 재판관은 두 아들 중 누가 진짜 아들인지 가려내야 했습니다. 재판관은 두 아들을 아버지의 무덤 앞으로 불러 몽둥이를 하나씩 주며 말했습니다.
“자, 무덤을 힘껏 쳐라. 힘껏 친 사람에게 전 유산을 넘겨주겠다.”
그러자 한 아들이 울면서 말했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재판관은 차마 몽둥이로 내리치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아들에게 모든 재산을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처럼 부모를 공경하면 자녀이고 그렇지 못하면 아직 온전한 자녀가 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많은 재산을 물려주어서? 공부를 가르쳐주어서? 아닐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는 ‘나를 지금의 나로 살게 해 주어서’입니다. 만약 부모가 나를 낳아놓고 기르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운이 좋아서 짐승들에게 키워졌다 하더라도 나는 짐승밖에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모는 나를 살게 해 준 것 하나로 공경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부모를 원망하고 부모의 마음을 일부러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해 준 것이 뭐가 있냐는 것입니다. 일단 숨을 쉬고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또 두 발로 설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부모 덕분입니다. 그냥 인간으로 이 사회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부모덕입니다. 부모는 그 존재만으로 우리 각자에게 큰 은혜를 주었습니다.
저는 재난영화를 좋아합니다. 별 스토리도 없이 그저 터널에 갇혔다가 고생고생 끝에 살아나거나, 큰 지진이나 화재 속에 갇혀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다는 내용입니다. 보고 있을 때는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결말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입니다.
‘일상’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일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공기도 필요하고 적당한 온도도 필요하고 중병도 없어야합니다. 일상은 그냥 일상이 아닙니다. 그것 자체가 은총입니다.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재난입니다. 그것을 잃어보아야 내 눈과 손가락과 이 공기가 얼마나 귀중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일상을 살게 해 준 공기와 같은 분들이 부모님입니다. 그런 부모님에게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은 일상을 살도록 나에게 제공되는 것들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믿는 교만함과 같습니다.
그런데 인간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 준 분들이 부모님인 것에 반해, 이런 ‘일상’을 넘어서 만물의 창조주의 자녀로 살게 해 준 분이 하느님입니다. 부모가 사랑으로 우리를 성장시켰다면 하느님도 사랑으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관계 맺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람을 미워해야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요? 심지어 용서하고 싶어도 되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의 힘으로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유명한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 1737~1794)은 ‘로마제국의 멸망사’라는 책을 썼습니다. 수많은 학자와 학생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많은 학자들은 강력하고 완벽했던 로마제국이 어떻게 해서 멸망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 원인을 다각적으로 조사하고 연구하여 발표했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의 멸망원인이 젊은 사람들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로마제국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도 한 원인이고, 외적의 침입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젊은이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젊은이들은 대(大)로마제국이라는 자부심과 부와 힘에 도취되어 지나온 역사와 로마제국을 이끌어온 어른들의 지혜와 판단력을 거부했습니다. 다시 말해 노인들, 어른들의 경력과 지식을 거부하고 멸시했습니다.
실질적인 예로 그 당시 로마의 젊은이들은 로마의 원로원, 즉 로마를 이끌어가는 국회의원들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60세 이상의 노인들은 다리 밑으로 떠밀어 버려라’ 하는 구호를 외치고 다녔다고 합니다. 에드워즈 기번은 이렇게 로마의 젊은이들이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고 부모의 말도 듣지 않고 원로원도 무시한 채 시행착오를 겪다가 결국은 멸망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 환자들은 바로 우리 자신들을 의미합니다. 나병환자는 일상을 살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지 못한 이들입니다. 이들이 치유를 받았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나병이 치유된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수 없다면 그것이 진정 치유된 것일까요? 부모에게 태어나 자라서 부모에게 감사할 수 없다면 아직은 참 인간으로 새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란 계명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와 하느님을 공경해야 하는 이유가 같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면 하느님도 공경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할 때 비로소 부모의 자녀로 자란 것처럼, 일상에 감사하여 하느님께 찬미드릴 수 있을 때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을 감사하며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해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할 때 비로소 오늘 유일하게 주님을 찬미했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로부터 들은 이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강의를 들으면서 잔 바니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평생 장애인들과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고 있는 잔 바니에입니다. 잔 바니에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주었던 분은 아버지였다고 합니다. 안정된 일자리와 성공이 보이는 길이 있지만 장 바니에는 장애인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의견을 아버지에게 말했고, 아버지는 아무런 조건 없이 ‘난 너를 신뢰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로 잔 바니에는 구원의 방주를 뜻하는 라르쉬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라르쉬 공동체는 35개국 134곳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구원의 방주가 되고 있습니다. 20세기의 영성가인 헨리 나웬 신부님은 잔 바니에를 만났고, 라르쉬 공동체에서 봉사하였습니다. 잔 바니에의 영성과 사상은 헨리 나웬 신부님의 삶을 바꾸었고, 헨리 나웬 신부님이 라르쉬 공동체에서의 체험은 책으로 많은 이들의 영적인 갈증을 풀어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능력과 재능을 보시고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열 때, 오늘 나병이 치유된 이방인이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드린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찾을 때 치유는 구원으로 꽃이 필 것입니다.
연수원에서 지내면서 사제의 인사이동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각 교구에서 통합으로 실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라도에서 자란 신부님께서 경상도로 가서 사목을 하시고, 제주도에서 서품 받으신 분이 서울에 와서 사목을 하시고, 서울 신부님은 안동으로 가셔서 사목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작은 땅에서 사제들이 서로 연대해서 사목을 할 수 있다면 지역 갈등을 해소하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도시의 분주함 속에서 지친 사제들은 시골의 자연 속에서 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지내던 신부님께서도 도시의 다양성과 분주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의지만 있다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소유에서 존재로 인식의 전환을 이룰 수 있다면 새로운 길이 보일 것도 같습니다. 해외 선교를 지망하는 것도 좋지만 이 땅에서 먼저 나눔과 소통을 경험하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나병이 치유된 사람은 10명이었지만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람은 1사람이었습니다. 교회는, 사제는,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된 우리는 어디에 속할까요?
예전에 결혼한 지 10년이 넘은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그 친정어머니께서 그 자매를 제게 데리고 왔습니다.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저는 그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고,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잊고 지냈는데, 어느 날 그 자매와 남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이를 갖게 되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작은 선물을 가져왔고, 저는 축하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잊고 지냈는데 이번에는 쌍둥이를 출산했다고 하면서 신랑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다 잊고 지냈는데 그분들은 저의 기도가 고마웠었고, 아이를 출산한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물곤 그분들이 제게 감사를 드린 것이 제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의 힘으로 그렇게 되신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제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 것은 앞으로도 그분들의 가정에 더 큰 은총으로 다가 올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를 하였습니다.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감사하면 감사할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기뻐하면 기뻐할 일들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 감사와 찬미는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과 우리들의 뇌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눈은 사물을 바라보는 창문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마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렇게 기쁘고, 감사하고, 고맙게 보일 것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으로,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시기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이비귀환으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들의 몸도 있는 것입니다.
감사의 감각을 기릅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예전에 폴 브랜드라는 의사의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평생 나환자들을 위해서 일한 분인데, ‘감사의 감각’이 예사롭지 않은 분입니다.
그분을 방문했던 영성작가 필립 얀시는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얀시는 ‘하느님은 왜 결점 투성이인 세상을 만드셨을까..’ 하고 의문과 불만을 갖고 있었는데, 그에 대해 폴 브랜드는 이런 말을 합니다.
먼저 질병을 일으키는 박테리아(세균)가 있다는 것에 대해 폴 브랜드는 이런 말을 합니다.
“질병을 일으키는 박테리아는 꼭 필요한 유기체가 사소한 돌연변이체로 변형된 것뿐입니다. 2만 4천여 종의 박테리아 가운데 수백 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익하거나 최소한 해롭지 않습니다. 박테리아의 도움이 없다면, 식물들은 산소를 생산해 낼 수 없고 동물들은 음식을 소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박테리아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선천적 장애아가 태어나는 것에 대해 폴 브랜드는 이런 말을 합니다.
“정작 놀라운 것은 선천적인 장애가 생긴다는 사실이 아니라, 수백만의 다른 아이들이 멀쩡하게 태어난다는 점입니다.
10억 단위의 변수를 지닌 인간 게놈이 유전 물질을 전달하는데 단 한 건의 오류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또 나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느낀 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고통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나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줄 수 있는 것 가운데, 그보다 더 훌륭한 선물은 없을 겁니다. 한센병 환자들이 인정하듯이 고통은 신체에 닥쳐온 위협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고통이 없다면, 심장 발작이나 뇌졸중, 맹장염, 위궤양 따위의 질병들이 아무 예고 없이 닥쳐오게 될 것입니다. 환자들이 호소하는 질병의 증후들이 실제로는 신체적인 치유 작업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짜증스럽고 넌더리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물집, 티눈, 종기, 열, 재채기, 기침, 구토, 그리고 통증들은 실제적으로 건강한 몸으로 돌아가려는 반사작용인 것입니다. 흔히들 적으로 생각하는 이러한 현상들에서, 도리어 감사의 이유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폴 브랜드처럼 하느님이 만드신 창조물들을 잘 들여다보면 감탄할 수밖에 없고, 감사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내 삶의 자리에 있는 것들을 유심히 주의 깊게 들여다봅시다.
감사하고 감탄할 일이 많이 있을 겁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윈스턴 처칠이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연설을 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다가 그만 넘어졌다.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은 순간 긴장했다.
그러자 처칠이 웃으며 말했다.
“국민 여러분을 웃길 수 있다면 한 번 더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감사드리는 삶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7,11-19: 한센병 환자 열 사람의 치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10명의 한센병 환자들을 만나신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14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영적으로 깨끗해지도록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제들에게 보내신다. 아울러 치유도 해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깨끗해졌기 때문이다. 율법은 그들이 사제에게 몸을 보이고 병이 나은 것을 감사하는 예물을 올리라고 명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다른 한센병 환자에게 그러셨듯이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하시지 않고 사제들에게 보이라고 하신 이유이다. 성 라자로 마을의 피정의 집을 “아론의 집”이라고 명명했다. 아론은 사제이다. 구약에서 사제가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한센병이 걸린 사람이 치유되었을 때, 보고 치유되었음을 선언한 다음 정상생활을 할 수 있었듯이, 아론의 집의 의미도 같다. 아론의 집에 들어 와서 모든 치유를 받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인 사제들은 늘 그분의 영광을 시기하였다. 한센병 환자들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사실을 증거하였다. 주님께서 그들이 치유되기를 바라시자 자신들이 불행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먼저 고쳐주지 않으시고 사제들에게 보내셨다. 그들은 나병의 증세와 그것이 치유되었음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17절)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고쳐주신 한센인들을 꾸중하신다. 그들은 자기를 고쳐 주신 분에 대해서보다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가 있었다. 결국 한 사람은 나머지 아홉보다 훨씬 많은 은총을 받았다. 병이 나은 것 말고도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유대인 한센인들 아홉은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으로 이스라엘이 마음이 굳어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임을 보여주신다. 외국인인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이 아닌 타민족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반면 유대인은 그토록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몰랐다는 것을 알려준다.
감사드리는 이들과 찬양하는 이들은 같은 마음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은총을 내리신 분을 찬미한다. 바오로 사도가 모든 사람에게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20) 하고 권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사야도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섬에서마다 그분에 대한 찬양을 알려라.”(이사 42,12)고 한다.
여기서 과연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이런 반성을 해 보아야 한다. 나는 과연 신앙인으로써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살고 있는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인지를!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똑같이 사랑 받는 귀중한 존재임을 알고 서로 사랑하며 항상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 어떤 마을에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만나셨고, 그들은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만이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을 고친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아마도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열 사람의 나병 환자 중에 아홉은 그들은 자신들이 치유된 것만을 기뻐했을 뿐 자신들이 치유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신 분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께 돌아와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육체의 병의 치유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되는 영광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매 순간이 하느님의 자비로 이루어지지만 우리는 좀처럼 그에 대해서 감사드리지 못하곤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믿음 안에서 생명의 삶이 있고, 감사 안에서 참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믿는 이의 행복>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11. 14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루카 17,11-19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시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병 환자 열 사람 …
그들은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뼛속 깊은 나병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리하여 자신들을 고통에서 구해줄
주님을 만났을 때
무엇을 청해야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주님과 마주했을 때
간절한 마음으로 온 몸 던져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예수님께 되돌아온 한 사람 …
그 사람은 정녕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엄청난 사건을
온 몸으로 체험했으니까요.
그의 깨달음은 그의 발걸음을 돌려
다시 예수님께로 향하게 했으니까요.
실 날 같은 희망으로 채워진
주님과의 첫 만남은
감사와 찬미 가득한
믿음의 두 번째 만남으로
곱게 곱게 이어졌으니까요.
있는 그대로 나를 아는 것
주님과 마주하기 위한 첫걸음이기에
나를 아는 만큼 행복합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어주신 것들을 깨닫는 것
주님께 온전히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니
깨닫는 그만큼 더욱 행복합니다.
믿음과 만남, 구원의 여정 -찬양과 감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희망과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절망이 대죄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게 하는 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바로 주님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하느님께 두어라.”(시편131,3)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23,1)
시편성구와 오늘 화답송 후렴 모두가 착한 목자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임을 보여줍니다. 이런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 바로 우리 믿음의 여정이자 구원의 여정입니다. 한 두 번 만남이 아니라 평생 매일 만나야 하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만나면서 무지로부터의 해방도 이뤄집니다.
오늘 나병환자 열 사람은 고립단절의 지옥같은 삶중에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을 간절히 찾았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누구나에게 차별없는 사랑으로 활짝 열려 있는 분입니다. 주님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터져 나온 나병환자들의 기도입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가 바칠 마지막 기도는 이 자비송 하나뿐입니다. 이에 근거한 동방수도승들이 즐겨 바치는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입니다. 바로 이런 나병환자들같은 간절한 자비송 기도로 미사를 시작한 우리들입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믿음은 순종입니다. 믿음의 순종, 사랑의 순종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의 신망애 삼덕이 나병환자들 마음 깊이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은 깨끗해 졌다 합니다. 주님을 만날 때 치유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치유는 육신의 치유와 더불어 영혼의 치유까지 이뤄져야 합니다. 믿음이 찬양과 감사로 표현될 때 비로소 영육의 온전한 치유입니다. 바로 열 사람중 온전히 치유 받은 자는 열 사람중 사마리아 사람 하나뿐이었음을 봅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찬양과 감사가 한 쌍을 이루고 있습니다. 믿음의 여정은 찬양과 감사의 여정입니다.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가 무지와 허무의 병에 대한 유일한 처방입니다. 제 행복기도문중 한 연이 생각납니다.
“끊임없는/찬양과 감사의 삶중에/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이어 주님은 찬양과 감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사마리아 한 사람에 놀라워 하며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의 실망한 기색이 눈에 선합니다. 아홉중 온전한 영육의 치유는 찬양과 감사로 예수님을 만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 사마리아 사람 하나 뿐이었습니다. 과연 나는 어느 쪽에 속하겠는지요? 예수님을 통해 만나는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 말씀을 통해 새삼 우리 믿는 이들 삶의 궁극 목표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수도원 입구 바위판에 새겨진 분도회의 모토 “하느님은 모든 일에 영광받으소서.” 말씀도 이를 일깨웁니다.
끊임없는 찬양과 감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때 주님을 만나 온전한 치유요 무지로 부터의 해방이요 주님께 대한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더욱 깊어집니다. 하여 매일 평생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때 참 행복의 구원도 선사됩니다.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열 사람의 나병환자가 상징하는 바,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무지라는 영적나병보다 치명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을 찾아 만났고 사마리아 사람 하나 만이 찬양과 감사로 무지의 나병으로부터도 완전히 치유 받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 티토서도 무지의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나 구원받은 사실을 증언합니다.
“사실 우리도 한때 어리석고 순종할 줄 몰랐고 그릇된 길에 빠졌으며, 갖가지 욕망과 쾌락의 노예가 되었고, 악과 질투속에 살았으며, 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
그대로 무지의 인간들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보다 더 지독한 무지의 영적 나병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하느님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성령께 활짝 마음을 여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지의 영적나병의 치유와 더불어 우리가 희망하는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찬양과 감사로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모두에게 치유의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9). 아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 17, 11-19(연중 32주 수)
오늘 <복음>에서도 나병을 치유 받은 열 사람 중에서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 18)
만약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아홉 중에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고 있다면, 대체 무엇 때문일까?
이 질문은 가장 어려운 영적인 선택 하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묘하게도,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믿지 않기가 일수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는 마음속에서 그 실상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감사하지도 기뻐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자비를 입었음에도 여전히 무엇인가를 채우고자 안달하거나, 불평하고 원망하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마치 아버지께서 베푸는 잔치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 서 있는 큰 아들과 같습니다. 그래서 나병을 치유 받았으면서도, 하느님을 찬양하지도 감사를 드리지도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와 감사드린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 19)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를 불러온 것입니다. 그러니, 나병의 치유가 구원인 것이 아니라, 그 치유가 하느님의 사랑임을 믿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은 감사를 불러옵니다. 그러기에, 지금 감사하며 기쁘게 살고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결국, 그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지, 아닌지는 ‘그가 감사와 가쁨의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닌지’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에 대해 감사할 수 있을까요?”
아침 식사 때 먹은 꿀 한 숟가락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꿀 한 숟가락, 이를 위해 하느님은 몇 천 마리의 벌을 몇 천 시간 동안 날아다니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몇 천 가지 꽃들을 피게 하셨고, 태양을 비추셨습니다. 비가 오면 벌들이 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지구를 약간 기울어지게 만드셨음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해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해마다 발육과 성숙을 체험하고, 죽음과 소멸도 체험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같은 계절만 있었을 것입니다.
또 밥상의 반찬을 두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음식들이 바로 나를 위해 목숨 바치고 있음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목숨이 나를 위해 몸 바쳤는지! 닭은 나를 위해 몇 마리 쯤 목숨을 바쳤을까요? 또 몇 마리의 소가, 몇 마리의 멸치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쳤을까요?
이처럼, 감사하는 일은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의식하면서, 모든 삶을 지속시켜주고 있는 많은 기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의 신비를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눈! 신비를 바라보는 눈!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며 활동하시는 그분을 볼 줄 아는 눈이야말로, 바로 감사의 눈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페 5, 20). 아멘.
감사와 찬미< 루카,17/11-19.>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는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세상 안에 이루어지는 일을 놓고 감사하지 못하는 일이 없으며 더 나아가 찬미의 삶을 살아야 하느님과 완전한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감사와 찬미는 하나의 종합 체 같으나 그 본질은 다릅니다.
감사는 좋아서 하는 행위라면 찬미는 좋으나 나쁘나 행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자기 자신에 머물러 있어 자기 이익을 얻으려 하지만 찬미는 온전히 자신을 떠나서 하느님 안에 머물러 사는 것입니다. 감사는 의무감이 생기지만 찬미는 의무감이 없으며 감사는 기쁨이 근본이 아니지만 찬미는 기쁨이 근본입니다. 감사는 개인적 차원이지만 친미는 공동체적 차원입니다. 감사는 명량이 수반 되지만 찬미는 자유스러운 행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삶은 감사와 찬미의 삶이 어울러 하나가 될 때 하늘과 땅의 일치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감사의 삶은 언제나 어떤 결실을 얻고 자시에게 유익한 일을 우선으로 합니다. 아무것도 손에 쥐어지지 않으면 감사의 정이 일어나지 않으며 결실을 얻고도 아무런 표시가 없으면 베푸는 사람에게 신의와 사랑의 정이 없는 것이 됩니다.
오늘 10명의 나환자 중 외교인 한 사람만 주님에게 치유에 대한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아마 나머지 사람은 당연히 이루어지는 일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였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주어진 기적을 감사하여야 하였습니다. 우리는 감나무에서 감이 달리고 사가 나무에서 사과가 열리지는 것을 당여지사로 여기고 감나무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감은 내년에 해 거름을 합니다. 감을 따먹고 감나무를 가꾸지 않으면 땅에 영양분을 소실되어 다음해는 감이 장 열리지 않은 다고합니다. 그래서 거름을 더 넣어주고 한마디 “감사합니다.“ 라고 말을 할 때 좋은 결실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보모님에게 효도 하는 사람은 부모님의 은덕을 되돌려 드리고 감사하는 삶입니다. 당연히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야 되다. 그러니 감사 할 필요가 없다 하면
불효자식이 되듯이 하느님의 그 많은 업적을 감사하지 않고 찬미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하느님과 참 사랑을 하지 못하고 하느님을 잊고 사는 사람입니다.
아침에 빛을 지니고 다가오는 태양, 하늘과 땅 사이에 숨을 쉴 수 있도록 넉넉한 공기 아침 밥상에 올인 음식을 감사하지 않고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고 감사와 찬미의 삶을 살지 않으면 “ 일어 가거라. 내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 하시듯 믿음의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앉으나 서나 주님 생각 밤이나 낮이나 주님께 간사와 찬미의 삶을 살아 가야합니다. 오늘 우리는 공기를 마시며 아침 식사를 하며 움직일 수 있는 지금 이 시간 감사와 찬미의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라오 신부님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카17,12-13)
---
이 구절을 읽는 동시에 오버랩 되는 또 다른 구절이 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루카18,13)
‘멀찍이 서서’라는 표현에 눈이 멈추었기 때문이다.
‘멀찍이 서서’라는 말이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나병환자 열 명과 성전에서 기도하는 세리는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 아픔이란 자신들은 죄인이라는 의식이었다.
나병을 죄의 결과로 이해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가족으로부터조차 스스로 떠나 살아야만 했던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던 이들이었다.
세리라는 직업은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매국노라는 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즉, 그들은 사람들과 고립되고 고독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병은 천형(天刑)으로서, 세리는 동족을 배신한 죄로서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할 수 있는 죄가 아니었다.
이런 사람들이 거룩함 앞에 서야 할 때, 두려움과 죄송함으로 거리를 유지하려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보인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선택하신다.
자기가 짓고 있는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착각에 빠져 하느님 앞에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이들의 기도가 아니라, 더 이상 기댈 것조차 찾을 수 없는 이들의 기도를 받아들이셨다.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안다면, 우리 모두는 ‘멀찍이 서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어렵게 청을 드리던 그들의 태도와 같은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으리라.
자신의 죄를 아는 것처럼 큰 은총은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시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죄를 자신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때 우선적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그리고 깨끗하게 인정하고 뉘우치면서 용서를 구하자.
그러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시리라 믿는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루카 17, 17)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루카 17, 11~19)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레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는데, 나병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 와서, "예수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 13) 하고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직접 고쳐 주지는 않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루카 17, 14)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말을 듣고 사제에게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중에 한 사람은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는데, 그는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 오지 않았던 말이냐?" (루카 17, 17) 이렇게 한탄하시면서, 돌아와 감사를 드린 그 사람에게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 19)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 말씀에서 보듯이, 예수님께 간청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병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이 사제에게 도달도 하기 전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들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이미 치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들어 행동하는 그 자체만 하더라도 우리는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치유를 받았거나 은혜를 받았다면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공교롭게도 유대인들 나병환자 아홉 명은 그냥 갔습니다. 어디론가 은혜를 입고도 가버렸지만, 은혜를 입은 사마리아인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사가 없는 사람에게는 참 섭섭함 마음을 가지고, 감사를 드리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 19)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축하해주십니다.
우리도 삶 안에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고, 그것을 마음으로만 간직하지 말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입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은혜를 준 그분을 찾아 가서, 직접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는 정성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 인간 사회 안에서도 중요합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은혜를 입은 적이 있습니까?
• 나는 주님의 은혜를 입었을 때 감사를 어떻게 드렸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일어나 가거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건강’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아무 탈없고 튼튼함, 또는 그런 상태를 뜻한다.
오늘 복음(루카17,11-19)에 등장하는 ‘나병환자’는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대명사이다. 구원을 가장 바라고 사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인데도 철저히 구원에서 제외된 절망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건강한 누구와도 마주할 수 없는 비참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모두들 자기들을 외면하는데 유독 예수님만 자기들을 향해 마주오신다. 면대면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그분은 모든이의 스승으로 일찍이 소문으로 알고 있는 터였다. 10명의 나병환자들이 스승을 알아보고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7,13)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루카17,14)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17,15-16)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7-19)
고침과 파견이 묵상거리이다. 나병환자 10명이 고침을 받아 깨끗해졌다. 9명은 고침만 받고 그냥 사라졌다. 선택된 사람들로 은혜를 입고도 배운망덕한 삶을 살아갈 뿐이다. 이 사람들의 생은 무미건조하며 보이는 건강만을 챙겨들고 목적인 구원을 놓쳐 파견을 받지못한 비참함을 사는 사람들일 뿐이다.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유다인들,바리사이, 율법학자가 9명을 지칭한다.
고침을 받은 1명은 진정한 스승 앞에 업드려 믿음으로 마주한다. 급기야 구세주로부터 사람답게 살아갈 사명까지 받고 파견된다. 이것이 구원에 이른 건강인의 모습이다.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육체가 된다.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시사하는바가 매우 크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인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나병환자의 호소에 예수님께서는 낫게 해주셨고, 자신이 나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가던 발걸음을 돌려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께 돌아와 땅에 엎드려 감사 ~~..
그런데~ 한명뿐이라!
병만 낫게 해주시면 ~ 살려만 주시면 ~..
하지만 그 절실함이 이루어지고 나면,
감사는 온데 간데 없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내가 잘해서 지금이 있다고 여긴다면,
감사하러 오지 않은 아홉중의 한 사람이며 주님의 도움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는 감사를 지닌 사람은 어떻게든 그 감사를 드리게 되어있습니다.
감사는 표가 나고 실체로 드러납니다.
나눔, 봉헌은 감사에서 나옵니다!
청원기도와 짝을 이루는 말은 감사기도입니다. 감사하는 이의 믿음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루카 복음 17장 11-19절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축복의 확인
류지인 신부님(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운동을 하다가 발목을 다친 일이 있습니다.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지만 꽤 오랜 시간을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깁스를 풀던 날 내디뎠던 첫발은 제대로 치료가 된 것인지 의문이 들 만큼 통증이 심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확인절차를 거친 의사 선생님은 장시간 걷지 않아서 나타난 적응의 문제일 뿐, 곧 운동을 해도 괜찮다는 ‘완치’ 판정을 내리셨습니다. 불편함은 한동안 이어졌지만 불안한 마음은 사라졌습니다. 권위자의 확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에서 나병에 걸려 변두리를 방황하던 열 사람은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고 병의 치유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완전한 치유 선언은 한 명에게만 돌아갔습니다. ‘청원-치유-감사-축복의 확인’ 순서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은 매우 당연한 신앙의 고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세상 안에서 우리는 청원의 실현 여부에만 초점을 맞추어 하느님의 뜻을 판가름할 때가 많습니다. 몸이 나은 것을 확인하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러 돌아온 한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축복의 이유를 확인시켜주십니다. “얘야, 네 몸이 나은 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나를 신뢰한 네 믿음 때문이란다.”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믿음의 현주소가
감사의 현주소입니다.
신앙인에게
하느님을 향한
감사가 없다면
마치 생명이 없는
존재와 같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주님과 일치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넘치는 은총에도
무례한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있는
까닭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우리들이
있어야 할 곳은 오직
주님의 품뿐입니다.
주님을 향하는
실천이 진정한
치유입니다.
실천은 감사로
이어집니다.
감사가 없는
우리 삶을 다시
반성하게 됩니다.
생명은 감사를
바탕으로 주님과
일치를 이루게됩니다.
떨어지는 단풍은
우리의 출발점이
하느님이심을 다시
가르쳐줍니다.
신앙의 출발점인
감사와 찬미로
다시 돌아갑시다.
감사와 찬미가
진정한 치유이며
정화입니다.
언젠가 교육을 받고 있는데, 강사가 ‘삶의 수레바퀴’라는 그림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삶의 수레바퀴는 자기 자신의 사회적 위치, 개인의 삶(가족), 경제력, 행복지수 등의 만족도를 표시해서 그 점을 이었을 때 어떤 모습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항목 중에 ‘경제력’이라는 부분에서 저는 최고점인 ‘10점’을 표시했습니다. 10점을 표시한 저를 본 옆에 앉으신 분께서 “경제력이 충분하신가 봐요.”라고 말씀하시며 웃으십니다. 그분을 보니 5점에 표시를 하시더군요.
비록 억대의 부자도 아니고, 통장에 그리 많은 돈이 예금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기에 최고점인 10점을 표시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저처럼 10점을 표시한 분이 함께 교육을 받는 사람 중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 즉 지금 여기서 더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책에서 “내가 가진 것보다 더 원하면 가난뱅이고 덜 원하면 부자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솔직히 20년 전의 생활과 지금의 생활을 비교해보십시오. 사회와 과학의 발달로 인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단지 상대적 빈곤을 느낄 뿐이지, 분명히 더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도 ‘더 더 더’를 외치면서 계속해서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상황에서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성취감을 느끼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나옵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더 더’를 외치며 더 많은 성취를 얻으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도파민이 나오려다가 나오지 못합니다. 대신 마음속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만큼 얻지 못한다는 불평불만이 커질 뿐입니다.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의 이유를 물질적이며 세속적인 ‘더 더 더’에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는 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주님께서 주시는 소중한 가치들을 찾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병 환자 열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깨끗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찬미하고 감사함으로써 믿음으로 응답했던 사람은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감사를 표현하지 않았던 아홉 사람은 감사하지 않았다고 다시 나병이 재발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쫀쫀하신 분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감사했던 사마리아 한 사람만이 주님으로부터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영혼의 치유까지 덤으로 얻습니다.
육체의 치유를 얻었지만, 감사하지 못한 이유는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약을 주신 것도 아니고, 또 만져주신 것도 아니었지요. 그저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만 말씀하셨기 때문에, 때가 되어 자연스럽게 치유된 것으로 생각했나 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 몸의 변화가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했기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왔던 것입니다.
오감을 통해서만 증명할 수 있는 것만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따뜻한 손길이 언제나 함께 한다는 사실에 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이라는 선물도 덤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구력이었다. 오래 버티고 서 있으면 앉을 자리가 생긴다(애니 프루).
명의(인터넷에서 퍼온 글)
옛날 당나라에 송청이라는 한의사가 살았는데 송청은 많은 환자를 치료해 큰 명성과 부를 얻었다.
하루는 가난한 의원들이 송청을 찾아와 물었다.
“이토록 많은 환자가 찾아오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글쎄요... 굳이 나에게 비결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구불약(九不藥) 덕분이죠!”
“구불약이요?”
“예, 아홉 개의 ‘不’을 치료해 주는 신비로운 약이지요.”
송청은 차례로 그 의미를 설명했다.
- 상대방이 나를 의심하지 않게 해주고(不信)
- 불안한 마음을 없애 주며(不安)
- 나에게 앙심을 품지 않게 해주고(不怏)
- 내 마음이 곧다는 사실을 알려 주며(不具)
- 내가 약값을 속이지 않음을 믿게 해주고(不治)
- 나와 상대방의 거리감을 없애 주며(不義)
- 내가 성의가 없다고 느끼지 않게 해주고(不忠)
- 내가 공손하지 않다는 불쾌감을 없애주며(不敬)
- 내 언행이 원칙에 어긋난다고 느끼지 않도록 해 주지요(不規).
설명을 끝내자 의원이 송청 앞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과연 명약이군요. 그토록 신통 망통한 약이라면 엄청 비싸겠군요?”
“이건 약재로 지을 수 있는 약이 아닙니다.”
의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송청은 한바탕 껄껄 웃고 나서 대답했다.
“잘 들어보세요. 만인을 부자로 만들어 주는 구불약, 그것은 바로 웃음이랍니다.”
힘껏 웃을 수 있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을 만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5,16-18)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차고 넘칠 때는 물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탓을 다른 사람이나 하느님께 돌리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서운함이 앞섭니다. 그 처지가 어떠하든 감사하면 또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는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또 은혜를 입고도 전혀 아닌 양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아니, 더 받아야 하는 데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에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병환자는 부정 탄 사람들로 낙인 찍혀 멀리 동네 밖에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17,13).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주님께서 하라는 대로 했더니 병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 졌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도 유다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육신뿐 아니라 영혼까지 건강해진 것입니다. 그는 육신의 건강을 되찾았고 성화되기까지 했습니다. 은총자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베푸시는 분에게까지 이른 것입니다.
아마도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린 것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보다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은혜를 입은 것에 감사하기 보다는 자기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먼저 사제를 찾아가 병이 나았다는 것을 확인 받는 일에 급급하게 행동한 모습입니다. 당시상황은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을 사제가 확인해 주어야 외부와 차단된 상태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구원의 혜택은 이방인, 죄인에게도 열려 있고, 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과 그 사람 자신의 믿음과 협력이 중요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자녀들 가운데 들지 않는 이방인이었고 자기가 하느님께 어떤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를 간구했고 결국 얻었으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몸의 치유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은 더없이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그야말로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여 큰 은총을 입었음에도 하느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것에 머물렀습니다. 몸의 치유를 통하여 은혜주시는 분을 만났어야 하는데 은총의 열매에 매어있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그러한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 능력의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몸이 깨끗해진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이 깨끗해진 몸으로 하느님께 돌아온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몸은 아무리 깨끗해도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 썩는 것이 몸입니다. 사람의 몸의 가치는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데 있습니다”(이현주). 받은 은혜를 돌판에 새길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28,7). 사랑합니다.
구원의 시험(試驗)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은 시험이자 선물입니다. 단번의 시험이나 구원이 아니라, 최종시험의 죽음의 날까지는 매일매일이 시험의 날이자 구원의 날입니다. 수능고사야 날자라도 정해져 있지만 위령성월에 주로 묵상하는 죽음의 날은 아무도 모르기에 하루하루가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 다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음의 시험은 벼락치기 공부가 불가능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어제의 구원의 시험 결과에 연연할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매일 구원의 시험을 통해 구원의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오늘 지금 여기서의 시험 결과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구원의 시험 점수 높아도 오늘의 점수가 나쁘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자각이 우리를 분발하여 깨어 일어나 오늘 여기를 살게 합니다. 다시 '일상의 늪'에 빠져드는 나를 추슬러 다시 나와의 영적전쟁에 임하게 합니다.
모두에게 열린 구원의 문이요, 노력하면 누구나 구원의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바오로의 입을 빌려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바로 세례를 통해 구원 받은 우리의 내적현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잘 나서 구원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유일한 기도는 주님께 자비를 청하는 것뿐입니다. 이래야 매일매일 구원체험을 통해서 세례은총을 깊이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성령을 풍부하게 부어 주셨고, 또 매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부어 주십니다. 하여 모두가 구원의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닙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 기도가 복음을 요약합니다. 이 기도가 우리를 내적으로 가난하고 겸손하게 합니다. 이 기도만 제대로 하면 구원의 1차 시험 관문은 너끈히 통과합니다. 그러나 1차 시험이 끝이 아니며. 2차 시험에 합격해야 온전한 구원입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은총과 더불어 내 노력 또한 필수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10명 모두가 1차 시험에 합격하여 나병의 치유는 받았지만, 2차 최종 합격자는 1명으로 합격률 10%입니다. 바로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하나뿐입니다. 자비를 청하는 기도에 이어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삶이 뒤따라야 영육의 온전한 치유의 구원입니다. 하여 평생, 매일 끊임없이 찬양과 감사의 미사와 성무일도를 바치는 수도자들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은 사마리아 사람에게 구원의 최종 2차 합격을 통보하십니다. 새삼 찬양과 감사로 표현되는 믿음이며, 찬양과 감사의 삶과 기도를 통해 깊어지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이 또한 성령의 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치유의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저절로 나오는 우리의 고백이 다음 화답송 시편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23,1).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머니와 함께 ‘선산’엘 다녀왔습니다. 선산에는 지난 70년 동안 고향을 지키고 계신 형님이 계십니다. 고향에서 농사를 하시면서, 조상들께서 잠들어 계신 곳을 지키고 계십니다. 어쩌다 선산을 찾아가면 형님께서는 저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시고, 형수님께서는 정성껏 음식을 마련해 주십니다. 큰 바위 얼굴처럼 언제나 고향을 지키고 계시는 형님께 늘 죄스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저는 52년 전에 선산 아래 고향 집에서 태어났고, 어려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 뒤로 6번 정도 고향 집을 찾아갔습니다. 중학생 때 부모님과 함께 갔었고, 고등학생 때는 혼자서 갔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는 교우촌인 고향 선산에 가서 첫 미사를 하였습니다. 그 뒤로 부모님을 모시고 2번 갔었고,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 어머님과 함께 어제 다녀왔습니다. 무엇이 바쁜지, 어머님께서 늘 가고 싶어 하시는 선산엘 몇 년에 한번 꼴로 가곤 합니다. 앞으로는 1년에 한번은 어머님을 모시고 다녀 오려합니다.
오늘 길에 ‘천호성지’엘 들렸습니다. 성지를 관리하시는 신부님께서 고향 친척이시기 때문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일가라는 이유로 잠자리를 마련해 주셨고, 성지 안내도 직접 해 주셨습니다. 신부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문뜩 생각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맺은 혈연으로 이렇게 좋은 환대를 받았으니, 언젠가 하느님의 품으로 가면 신앙인이었다는 이유로, 사제직을 수행했다는 이유를 참 많은 환대를 받을 것 같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반갑게 맞이하시는 큰 집 형님처럼, 일가라는 이유로 따뜻하게 성지 안내를 해 주셨던 신부님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나 이제 돌아갈래!’ 언젠가 보았던 영화에서 주인공이 했던 대사입니다. 세상의 명예, 권력, 재물에서 벗어나 겸손, 감사, 사랑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넉넉하게 품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이 치유된 환자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이 다시 주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주님께 돌아온 나병이 치유된 사람은 이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깊어가는 가을입니다. 곧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이 올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는 꼭 해야 할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용서를 청할 일이 있다면 그렇게 해 보십시오. 저처럼 고향엘 가려 했다면 한번 가보십시오. 나눌 것이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나누어 보십시오.
성지에 계신 신부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느 교우분이 성지 순례를 왔습니다. 그 교우분은 여행을 하면서 많은 성물을 모았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는 그 성물을 봉헌 해 주시면 성지 안에 성물 박물관을 만들어 보겠다고 하였습니다. 교우분은 평생 마련했던 성물을 기꺼이 봉헌해 주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시장님과 상의를 하였고, 시의 도움으로 아름다운 성물 박물관을 건축할 수 있었습니다. 강생, 환희, 수난, 부활, 미사의 테마로 구성된 성물 박물관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이것은 바로 나눔에서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차별 없이 품고 받아들이는 사랑의 치유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구원의 순례’를 하시면서 사마리아와 갈릴래아의 경계 지역을 지나가셨다(17,11). 예수께서는 단지 사마리아인의 냉대를 피하시려고 그 길을 택하신 것일까? 예수께서 신변을 걱정하여 안전한 길을 원하셨다면 갈릴래아를 통과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두 지역의 경계를 지나가셨다. 이런 길
선택은 선택된 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갈릴래아의 유대인들과 이방인으로 취급받아
적대감을 가졌던 사마리아인들 모두를 받아들이시어 치유하시려는 몸짓이었으리라!
이 길목에서 예수님께 다가온 나병 환자들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었음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사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에서 다른 민족들에게로 뻗어가는 교두보였다. 이렇게 그분이 향하는 예루살렘 상경 길은 죽음을 통해 모두를 사랑으로 품어 살리기 위한 ‘사랑의 발걸음’이었고, ‘생명의 말씀’을 목숨을 다해 온 세상에 퍼뜨리고자 하는 심오한 구원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나의 일상의 발걸음과 몸짓은 어떤가? 나를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생각이 같은 사람과 다른 사람, 잘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와 힘 있는 이들,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모두를, 이념이 아닌 더 크고 더 근원적 인 하느님의 사랑으로 품고 있는가?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께 간절한 바람으로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님을 부르며 자비를 청했다(17,12-13). 인간의 구별증, 이분법적 사고의 상징인, ‘다가갈 수 없는 그 거리’를 없애버린 것은 바로 그들의 ‘사랑을 향한 외침’이었다. 자비를 청하는 그들의 외침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한데 모여 쏟아내는 ‘사랑의 갈증’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름으로써 믿음의 토대 위에서 ‘사랑의 갈증’을 선포하였고, 그 목마름은 자비를 불러일으켜 치유 받았다.
나에게 이런 목마름이 있는가? 혹 헛것으로 갈증을 채우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17,14)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사제를 찾아 가게 한 것은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고 치유 받은 이들이 율법(레위 14,2; 16,29)을 준수했음을 드러내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믿음을 갖고 감사의 마음을 품을 ‘창조의 시간’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사제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17,14) 이렇게 하느님께서 하시는 치유는 인간이 정해 놓은 시간과 공간이 아니라, 치유 받으려는 이의 지향과 순수한 사랑의 갈망과 믿음에 달려 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과 사랑과 감사를 품도록 매일 시간의 선물을 주고 계심을 명심하자!
놀랍게도 치유 받은 열 사람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 한 명만이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17,15-16) 치유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사람은 참으로 배은망덕한 이들이다. 우리 모두 감사의 태도야말로 사람됨의 기본이요 하느님이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삶의 경배임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병이 낫자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온’ 사마리아인에게 눈길을 돌리면, 예수님의 치유로 유다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민족적, 종교적인 적대감과 증오심이 더불어 치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생면부지의 가난한 사람, 배척받고 고통 받고 소외받는 사람,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돕고, 타종교인들, 다른 생각과 이념을 지닌 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모든 관계 속에서 조건 없이 자신을 내놓도록 하자! 이것이 바로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경계를 지나시며 사마리아인을 치유하신 예수님의 치유의 비결이요,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는 죽음을 거쳐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는 ‘생명의 순례’가 아니겠는가!
유일하게 나를 받아주신 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금도 삶 자체가 고달프고 힘겨운 나병환자들인데, 변변한 치료제도 없던 예수님 시대 당시는 얼마나 더 괴로웠겠습니까? 당시 그들이 겪었던 가장 큰 고통은 아무래도 ‘추방으로 인한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나병으로 판정되면 일단 세상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었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들은 마을에 들어오는 것까지는 허용되었지만 성벽 안으로는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특히 유다인이면 정기적으로 순례를 해야 할 거룩한 도읍 예루살렘 성은 절대 출입금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병환자들은 건강한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도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습니다.
입장 바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그들이 괴로웠겠는지? 자기 잘못으로 걸린 병도 아닌데, 무조건 인간 사회로부터 추방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만남조차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마치도 벌레 씹은 듯합니다.
병세는 하루하루 점점 깊어만 갑니다. 이런 비참한 현실을 도저히 수용할 수도 없고 견딜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가오면 멀찍이 도망가기 바쁩니다. 점점 외로운 섬처럼 고립되어 가고 자기 안에 갇히게 됩니다. 스스로 너무 무가치해보이기에 스스로를 거부해서 자존감은 완전 바닥입니다.
이렇게 당시 나병환자들은 목숨이 붙어있었지만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나병환자들의 고초를 눈여겨보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들에게 크신 자비를 베푸시어 죽음과도 같은 나병을 말끔히 치유시키십니다.
공동체는 나를 따돌렸고 세상 사람들은 다들 멀찌감치 피해 도망갔는데, 다들 더럽다고 돌을 던지며 무시했는데, 유일하게 한 사람 예수님께서 두 팔을 크게 벌리시고 나를 받아주십니다. 내 참혹한 상처를 어루만져주시고, 내 허물어진 마음을 달래주십니다. 예수님의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치유의 에너지로 인해 나병환자의 폐쇄적이고 부정적인 죽음의 기운이 물러가게 됩니다.
그런데 나병의 치유 이후 한 가지 중요한 과정이 더 남아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단 한명의 이방인만 제외하고 9명의 유다인들은 그 과정을 생략함으로 인해 참된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중요한 과정은 바로 감사였습니다. 불행하게도 9명의 유다인들은 그 큰 은혜를 입고도 아무런 감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유다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 죄인, 이교도 등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습니다.그러나 구원의 문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몇 가지 의지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즉 메시아 하느님이라는 확고한 믿음, 그분이 보내시는 구원에로의 초대에 대한 자발적인 응답, 그리고 깊은 감사의 마음입니다.
신부님들은 무자식 상팔자래요.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때로는 위로가 되기도 하더군요. 저는 어떤 할머니의 약값을 지원했었는데 알고 보니 아들이 의사라네요. 감사할 줄 모르는 자식들에게 당하는 부모님들의 슬픔사연 종종 듣습니다.
부모님이 고생하며 키운 자녀들이 유산까지 탐낼 때 부모는 어찌 합니까. 신부님은 무자식 상팔자라며 행복한 줄 알고 한 턱 내라니 그래야지요. 자식들이 부모님께 부모님들도 자식들에게 고마운 마음 늘 지녀야 하는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루카 17,15~16)”
< 온유함의 비결 >
-전삼용 요셉 신부님-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글 중에 ‘집 지은 사람의 잘못일까?’라는 것이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어렸을 때, 그의 집에는 매우 좋은 도자기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그 도자기들을 아끼며 소중히 여겼습니다. 톨스토이의 여동생은 그 도자기들 중에서도 가장 예쁜 것을 달라고 오랫동안 아버지에게 졸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것을 선뜻 딸에게 내어줄 리가 없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톨스토이의 여동생은 또다시 아버지에게 그 도자기를 달라고 강력히 졸라대기 시작했습니다. 눈물까지 주루 주룩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쯤 되자 아버지는 딸을 향해, “그래,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것이니 그것을 가지렴.” 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동생은 그 도자기를 손에 꼭 움켜쥐었습니다. 오빠에게 보여주고 자랑도 하며 또 약을 올려주려고 오빠 방으로 뛰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오빠 방을 향해서 뛰던 여동생은 그만 문턱에 걸려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손에 들고 있던 그 도자기는 바닥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났습니다. 여동생은 깨져 조각난 도자기를 바라보면서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집을 지은 사람이 누구예요? 누가 우리 집을 이렇게 지어서 저를 넘어지게 했단 말이에요?”
제 잘못, 제 실수는 탓하지 않고, 그렇게 좋은 집을 지은 건축자를 탓하고 원망하는 이 여동생을 기억하며 후일 톨스토이는 ‘집 지은 사람의 잘못일까?’라는 글을 썼던 것입니다.
바오로는 오늘 독서인 티토에게 쓴 편지에서 신자들을 상기시켜 통치자들에게 순종하고 남을 중상하지 않는 ‘온유한 사람들’이 되도록 교육하라고 합니다. 온유하지 않은 사람은 화를 잘 내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바오로는 온유해지기 위해 두 가지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도 한때 어리석고 순종할 줄 몰랐고 그릇된 길에 빠졌으며, 갖가지 욕망과 쾌락의 노예가 되었고, 악과 질투 속에 살았으며, 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
즉, 우리 자신이 모두 죄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죄를 서로의 탓이라고 미룬 것처럼 우리가 사람을 판단할 때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나는 선한 사람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하신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합당해서 구원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로 구원될 수 있었음을 잊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아니었으면 단 한 명도 구원될 수 없었고 나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다 같이 지옥에 가야 할 처지인데 누가 누구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그리스철학의 대가 탈레스에게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자신을 아는 일”이라고 답했습니다.
또 “가장 쉬운 일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더니 “남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온유함의 비결은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즉, 우리 모두는 지옥에 갈 처지여서 누구도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구원이 오로지 그리스도의 희생 덕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내 공로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닌데 무엇을 잘 했다고 남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온유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고 구원도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머리로만 하는
치유가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치유가 진짜
치유입니다.
고유한 우리자신을
필요로 하시는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치유의 첫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핵심적인 관계는
그 무엇보다도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근본적인 치유는
하느님 중심으로
돌아서는 우리의
믿음뿐입니다.
자아에 사로잡혀 있는
나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주님의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건강해져야 할 믿음은
주님과 함께 하기에
결코 삶을 가리는
법이 없습니다.
믿음은 흔들리는
우리의 살에
중심을 잡아주며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습니다.
치유는 새로워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주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치유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치유와 믿음은
결국 하나의
몸일 뿐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마지막 희망은
언제나 믿음뿐입니다.
우리의 시간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을 향하는
모든 길이 치유입니다.
믿음같은 생명
생명같은 믿음이
주님을 향하는
걸음걸음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의 믿음을 타고
내려오는 감사의 오늘입니다.
모든 삶의 여정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치유이신 주님께로 돌아가는
믿음의 하루 되십시오.
아픔은 주님께로
되돌아갈 것을 다시 알려줍니다.
아픔을 치유해주시는
구원 자체이신 주님께로
일어나 가십시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지난주에 저를 꼭 만나고 싶다는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으신 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당히 부끄러워하는 목소리였습니다. 그리고 어제 낮에 이 자매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습니다.
상담을 원하는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성소후원회에 기부를 하고 싶다면서 저를 찾아오신 것이었지요. 하지만 액수가 너무 적다면서 부끄러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돈이 생긴 경유를 같이 오신 친구 분이 설명을 해주십니다.
이분께서 얼마 전에 교통사고를 당하셨다고 합니다. 다행히 하느님 도우심으로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보험금을 받게 된 것이지요. 갑자기 생긴 이 돈을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다가 사제를 양성하는 성소후원회에 기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가져오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자매님께서는 남편도 없고 자녀들도 하나 없는 생활보호대상자인 독고노인이십니다. 하지만 자신이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하느님 덕분이라면서 늘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몸을 다쳐서 생긴 돈을 오히려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가져 오신 자매님의 마음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감사했습니다. 돈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지요. 바로 이런 마음이 세상을 더욱 더 살기 좋게 만드는 마음이고,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간절하게 원하는 마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떤 신부님께서 미사 강론 때, 만 원짜리 세 장을 꺼내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한 장은 하느님께 봉헌하고, 또 한 장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고, 마지막 한 장만이 나만을 위해서 써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런 목적으로 하느님께서 재물을 주셨는데, 우리들은 이 세 장 모두를 나만을 위해서 쓰려고 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과 더욱 더 멀어진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저 역시 그랬던 것이 아닐까 라는 반성을 해봅니다. 나만을 위한 행동과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었던 지요. 그래서 감사하지 못했고, 그래서 하느님께 깊이 머리 숙여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다시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딱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큰 은총을 받았음에도 감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를 드린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만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께 많은 은총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감사의 기도와 또 이에 따른 행동을 하고 있었을까요? 늘 부족하다고, 아직도 형편없다면서 불평불만의 연속이 아니었습니까? 바로 그때 앞서 말씀드린 그 자매님을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를 더 좋아하실까요?
몸은 도구다. 마음은 그 도구를 움직이는 기능, 증거, 보상이다(조지 산타야나).
세계적인 여행 가이드북에서 소개된 한국 문화
세계적인 여행 가이드북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번 읽어 보시지요.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유교적인 국가다. 연장자에 대한 복종은 필수적이다. 연장자보다 먼저 숟가락을 들지 말라. 연장자와 논쟁을 벌이지도 말라. 선을 넘어선다면 무거운 처벌(신체적 처벌을 포함한)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복종이 공짜는 아니다. 손위 누나는 어린 동생들의 학비를 돕고 상사는 항상 점심 값을 낸다.
한국인의 또 다른 특징은 끈기. 한국전의 잿더미에서 일어선 앞 세대, 휴일 없이 일하는 건설 인부, 컴퓨터 게임 중독자들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가지다. 이 나라의 끈기 있는 황소 정신 말이다. 일단 한국인들이 무언가에 자물쇠를 채워 놓으면, 부수고 나가기란 힘들다. 생활은 경쟁적이며 모든 것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 인생은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것이다.
한국인의 또 다른 특징은 관대함이다. 계산서를 서로 집어 들고 싸우는 것은 흔한 광경이다. 만약 어떤 한국인이 당신을 극진히 보살피기 시작하면, 당신이 계산하기란 정말 힘들어진다.”
어떻습니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부끄러운 것도 있고……. 아무튼 이 글을 보고서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정말로 좋은 것은 계속 유지하고, 나쁜 것은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발전하고 나아가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수 있도록…….
몇 년 전 자동차를 새로 구입했을 때의 일입니다. 제 마음에 쏙 드는 차였고 그래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애지중지했고 매일 차를 깨끗이 닦으면서 저의 애정을 차에게 표시했지요. 그런데 차를 구입한 지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때, 청주에 내려갈 일이 있었지요. 전날 눈이 많이 오기는 했지만 그렇게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차는 일반 승용차가 아닌 4륜구동 SUV 차였거든요.
하지만 저의 예상과는 달리 눈길에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눈길에 차가 미끄러지면서 제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결국 어떤 집의 담벼락에 제 차가 쳐 박히고 말았습니다. 잠시 뒤, 차 밖으로 나왔는데 차의 상태가 영 아니었습니다. 엔진 부분까지 완전히 박살 나 있었지요. 차 뽑은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착잡했습니다. 새 차가 이렇게 완전히 박살 난 것뿐만 아니라, 또한 제 차에 의해서 파손된 이 집의 담벼락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런 일이 생길까 라는 원망도 하게 되었습니다.
차가 담벼락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차만 바라보고 있는 제게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이고, 차 박살난 것 보니까 운전사가 크게 다쳤겠어요. 운전사는 벌써 병원 갔어요?”
그 순간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길까 하면서 원망하고 있었지만, 누구나 인정할만한 큰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멀쩡하다는 사실에 먼저 감사해야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감사하기보다는 원망하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다 은총입니다. 괴롭고 힘든 고통과 시련의 순간 역시 잘 생각해보면 감사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쁜 일이 있을 때에는 끊임없이 남의 탓 그리고 주님 탓을 외치면서도, 좋은 일이 있을 때에는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못했고, 주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선물 역시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치며 은총을 청하는 나병환자들에게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고, 당시 나병은 치유 후 율법적 절차를 거쳐야 하는 법적 치유 인정이 필요했기에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순간 병이 나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표시한 사람은 딱 한 사람,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감사를 표시한 이 사람만이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말씀,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을 듣게 되지요.
어쩌면 사제에게 먼저 자신의 몸을 보이고 치유되었음을 인정받는 것이 더 우선일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은 주님께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좋든 나쁘든 어떤 새로운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감사의 표시입니다. 감사의 표시를 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도 덤으로 받습니다.
감사는 가장 세련된 형식의 예의다(J.마르탱).
무엇이 성공인가?(랄프 왈도 에머슨)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뼘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감사
-정희완 신부님-
“사라지는 것만이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한다/… // 세상은 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지만/ 끝내 그 어디에도 다다를 순 없었다/ 가는 곳까지만 길이었을 뿐”
(유하, ‘7월의 강’).
11월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그래서 조금은 황량한 11월의 풍경은 언제나 지난 시간을 다시 되돌아보게 합니다. 11월은 우리들의 죽음에 대한 희미한 예감, 세월이 지나간 흔적에 대한 슬픈 기억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쓸쓸한 애상을 불러일으키는 달입니다. 11월의 느낌은 참 애잔한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우리의 생은 언제나 우리를 위한 많은 이들의 사랑과 정성 속에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지난 생은 어머니의 희생과 기도 속에서, 나를 사랑해 준 많은 이들의 정성 속에서 일구어져 왔음을 고백합니다.
지난 내 사제의 삶 역시 결국 신자들의 헌신과 기도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참 이기적인 세상에서, 참 이기적 본성을 지닌 우리 인간이 제 힘으로 제 노력으로 사는 것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돌아보면 우리의 삶은 하느님과 부모와 이웃들의 도움 속에 언제나 서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이 지상의 땅에서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감사의 노래뿐입니다. 11월은 지나온 삶의 시간들에 대해 감사하는, 또 그 삶의 순간마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유시찬 신부님과 함께하는 수요묵상
열 사람이 깨끗해졌는데 이방인 한 사람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있는 대목에 초점을 맞춰 묵상을 해도 좋겠지만, 전체적 흐름으로는 관상을 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과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만나는 장면에 초점을 맞춰 주변의 분위기를 좀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동네 분위기를 살펴본다고 할까요, 나병 환자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태도 그리고 나병 환자들 자신들의 몸짓과 표정을 좀 살펴봤으면 합니다.
이어서 예수님과 나병 환자들이 만나는 장면을 좀 세밀하게 봤으면 합니다. 성경에는 그저 말마디만 주고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멀찌감치 떨어져 서로 그렇게 말만 주고받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가까이 불러 뭔가 다른 대화들이 오고가고 있는지 등을 봤으면 합니다. 자주 하는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이때도 선입견에 사로잡힌 기도를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동네사람들은 일방적으로 배타성 내지 적개감만 드러내고 있다든지 예수님은 오로지 사랑 가득한 시선으로만 그들을 바라보며 대하신다든지 하는 식의 기도 말입니다. 내용의 맞고 그름을 떠나 기도에 신선한 감동이 빠져버리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병이 나은 나병 환자들 각자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십시오. 똑같은 사건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단순히 모두 병이 나았다고 천편일률적으로만 정리하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각자의 처한 상황과 걸어온 역사가 다르고 그런 배경 속에서 일어난 병 나음의 체험들이 각자에게 다른 울림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중 한 명 특수한 예로 사마리아인의 반응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중심으로 살펴보되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병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며칠 전 모임에서 오래간만에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을 보자 가라앉아있던 기억이 다시 올라왔습니다.
다 해소된 줄 알았는데 기억과 더불어 조금 남아있던 부정적인 감정도 같이 올라왔습니다.
그분은 어찌 보면 저로 인해 인생이 바뀐 분입니다.
그대로 살았으면 어쩌면 폐인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분이 제 입장에서 볼 때는 배은망덕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저를 반대한다면 저도 이해하지만 정의와 명분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분명 감정을 가지고 저를 비판하고 음해하였습니다.
이럴 경우 저는 대체로 그것을 큰 문제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가 부족하여 그리 하기도 했겠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의 죄와 허물과 악을 통해서도 뭔가를 말씀하시는 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쫒길 때에 사울의 친족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고 이에 대해 다윗 진영의 아비새가 가서 죽이겠다고 하니 다윗은 그를 만류하며 하느님께서 시켜서 그리하는 것이니 그대로 두라 한 것을 떠올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가라앉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나한테 감사해야 할 너인데 오히려 내 등에 칼을 꽂았지!’하는 생각이 살짝 지난 간 것입니다.
즉시 그런 저를 질책하고 아무 감정 없는 것처럼 그를 대했지만 크게 반성이 되었습니다.
그런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감사를 받으려고 했던 저의 교만과 자기중심성에 대한 반성입니다.
내가 은총과 복을 베푼 것처럼 내가 감사를 받으려고 하다니!
이런 면에서 오늘의 주님은 참으로 올바르십니다.
아니 주님은 참으로 겸손하시고 가난하시며 주님의 올바르심은 바로 이 겸손한 가난에서 나온 것입니다.
외국인 나환자만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자 아홉 유대인 나환자가 돌아오지 않은 것에 대해 한탄을 하시지만 당신께 감사드리지 않음을 한탄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영광 드리지 않음을 한탄하십니다.
당신이 감사를 받지 않고 아버지께서 영광 받게 하심,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완전한 겸손이시고 가난이십니다.
분명 당신이 연민의 정을 품으시고, 당신이 치유해주셨지만 그 연민의 정과 치유의 은총이 당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임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인정하십니다.
온갖 선은 하느님의 사랑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받아 지니면 하느님의 선도 우리가 나누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도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대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기도하는 하루가 됩시다.
반성과 감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실 우리도 한때 어리석고 순종할 줄 몰랐고 그릇된 길에 빠졌으며, 갖가지 욕망과 쾌락의 노예가 되었고, 악과 질투 속에 살았으며, 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티토서.3,3-5)
남자들은 군대 얘기를 많이 합니다.
군대에서 고생 많이 했다는 얘기.
군대에서 있었던 무용담.
군대에서 있었던 특별한 일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군대에서 이러저러한 경험을 많이 했는데 자기는 그것을 겪어낸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재미삼아 또는 적당히 옛날 일을 자랑삼는 것은 삶의 양념이 되겠지만 지나치게 옛날 일을 자랑삼는 것은 허풍일 뿐 아니라 현재의 초라함을 가리려는 가여운 과거 안주(安住)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성실히 그리고 제대로 산 성숙한 사람이라면 지난날의 자기 잘못을 늘 성찰하고 개선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과거를 어떻게 성찰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오늘 바오로 사도처럼 한 때 우리가 얼마나 세속적으로 살았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도 한때 어리석고 순종할 줄 몰랐고 그릇된 길에 빠졌으며, 갖가지 욕망과 쾌락의 노예가 되었고, 악과 질투 속에 살았으며, 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
과거에 대한 올바른 성찰은 내가 전에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성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얼마나 그릇되고 헛된 것들에 빠져 살았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아는 사람이 현재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고 앞으로도 어리석지 않은 삶을 살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얼마나 잘 못 살았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악과 질투 속에 살았으며, 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과거를 돌아보며 신앙인인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내가 이렇게 어리석고 잘못을 하였는데도 하느님께서 나를 일깨우시고 인도하셨고 구원하셨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난날의 나의 모든 허물과 죄는 성령을 통하여 깨끗이 씻어주시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게 하셨다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네 눈물이 곧 내 눈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모습가운데 가장 제 마음에 와 닿는 모습은 아무래도 자비하신 모습입니다. 복음서 곳곳은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연민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고통 속에 신음하는 백성들 머리 위로 당신 자비의 팔을 펼치셨습니다.
매일 미사 시작 예식 때 마다 우리는 하느님 자비를 청합니다. ‘하느님 자비’라는 말, 생각만 해도 큰 위로가 됩니다. 자비(慈悲)란 너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네 고통을 내 고통으로 삼겠다는 말입니다. 네 눈물이 곧 내 눈물이란 뜻입니다. 네가 잠 못 이루며 힘들어 할 때 나도 네 옆에서 깨어있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바로 그러하십니다. 하느님을 단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자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멀리서가 아니라 내 가까이서, 내 위에서가 아니라 바로 내 곁에서, 나와 그분이 따로가 아니라 하나가 되어, 한 마음이 되어 아픔과 고통을 함께 겪는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 등장하는 나병환자들은 하느님께서 자비의 하느님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의 아픔이 당신의 아픔, 우리의 상처가 당신의 상처, 우리의 울부짖음이 당신의 울부짖음이었던 예수님께서 그들의 외침을 절대로 외면하실 수 없었습니다.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들이 겪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과 슬픔을 보십니다. 마음 가득히 차오르는 연민의 정에 어찌할 바를 모르십니다. 당신도 모르게 그들에게 자비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토마스 머튼은 자비를 ‘서로가 서로의 일부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 사이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명철한 의식’으로 정의를 내렸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매 순간 살아있고, 매 순간 숨 쉬고 있는 우리입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 역시 또 다른 존재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자비의 실천으로 또 다른 하느님의 얼굴을 그들에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비야말로 가장 ‘하느님스러운’ 것입니다. 자비는 가장 충만한 신적 속성입니다. 자비가 자랄 때 우리 내면에서 신성(神性)도 자라납니다. 자비를 왜곡하거나 죽이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왜곡하거나 죽이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보물 창고
- 김수만 신부님-
하루 일과를 마치고 끝기도를 바칠 때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았나?’ 하고 되돌아봅니다. 어떤 일은 ‘참 잘했구나.’ 하고 미소를 짓고, 어떤 일은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늘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생각보다는 제 생각이 더 커질 때가 많습니다. 필요할 때만 하느님을 찾는 것은 아닌지 반성합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 천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천사의 안내로 하늘 창고를 구경했습니다. 그러고는 한 창고를 보게 되었는데, 안이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물었습니다. “왜 창고가 비어 있는 거죠?” 천사가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곳은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줄 보화가 가득했던 창고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느라 보화가 가득한 창고가 텅 비워지게 된 것입니다.”
천사와 그 사람은 또 다른 하늘 창고를 구경했습니다. 그 창고는 아까 본 창고와는 반대로 안에 보화가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이곳은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줄 보화가 있는 창고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너무 적어 아직도 이렇게 보화가 쌓여 있습니다.” 그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루를 살아가면서 감사할 일이 많음에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돌아온 이는 오직 한 사람, 천대받던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왜 이방인 한 사람만 찾아왔을까요? 축복의 선물을 받았으면 마땅히 감사드리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요? 그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버릴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빛을 잃어갑니다.
우리 삶, 그리고 우리 삶의 자리, 오늘 하루, 온통 감사할 것투성이입니다. 어느 것 하나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얼마나 감사드리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감사는 고사하고 내 뜻,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느님께 불평·불만만 늘어놓은 것은 아닌지요. 제1독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들어라. 그리고 깨달아라.” 지금 이 순간 하느님께 두 손 모아 감사기도를 해보십시오.
감사하며 살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은 나병 환자 열 사람의 치유사화입니다.
하나는 치유된 뒤 감사를 드리러 예수님께 왔고 아홉은 오지 않았습니다.
감사드리러 오지 않은 아홉에 대해서 저는 너무 나무라고 싶지 않습니다.
나무라는 마음 대신 애처로운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그 아홉도 감사의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긴 생애동안 병의 고통을 당한 사람으로서 감사의 마음이 없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감사드리러 오지 않았을 뿐일 것입니다.
마음이 있어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니 애처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이 있기는 해도 이 아홉의 경우는 표하지 않을 정도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면 표현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들은 그 정도는 아니기에 감사를 표하러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난 주 한우리 징검다리들과 강원도로 Workshop을 갔습니다.
그간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여행하는 그런 성격도 띠었기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경치 좋은 길로 갔습니다.
그런데 가면서 저를 비롯한 남자들은 한 번 감탄을 하고 마는데 자매님들은 아름다운 경치가 나올 때마다 매번 감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들은 감탄이 열 번 중 한 번만 넘치는데 자매님들은 감탄이 매번 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매번 감탄하시냐?”고 농 삼아 말씀드렸지만 누가 더 행복한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열 번을 봐도 열 번을 다 감탄하는 사람과 열 번을 봤지만 한 번만 감탄을 하는 사람.
열 번에 한 번만 감탄이 넘치는 사람보다는 매 번 감탄이 넘치는 사람이 더 충만하게 사는 사람이니 그가 당연히 더 행복한 사람이겠지요.
感자가 들어가는 모든 말은 기울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 넘쳐서 나오는 것입니다.
感動,
感興,
感歎,
感情, 그리고
感謝.
이런 것들은 절대로 기울여 나오는 것들이 아닙니다.
기울여 나오면 비어지기 때문에 그 뒤 공허감이 남지만 넘쳐서 나오면 자신도 채우고 남도 채우는 것이 됩니다.
나도 만족, 너도 만족이고 나도 충만, 너도 충만입니다.
그런데 感謝는 感자가 들어가는 그 많은 말들 중에서도 특별합니다.
감사는 은총, 은혜에 대한 감사이기에 감사가 넘쳐 나오는 순간 은총으로 충만해집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 마리아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음은 하느님 손해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그 큰 은총으로도 다 차지 않는 자기 손해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감사를 드립시다.
횟수로는 매 번, 양으로는 넘치게 감사를 드립시다.
감사(Eucaristia)와 구원
-전삼용 요셉 신부님-
송명희라는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소뇌를 다쳐 뇌성마비 장애를 얻었습니다. 몸의 성장발육이 느리고 연약하여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습니다.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신 분들이 그렇듯이 얼굴과 몸이 비틀어져 거울을 보기도 싫었습니다. 몸이 그래서 초등학교도 가지 못해서 아는 것도 없었습니다.
수차례 반복되는 이사와 찢어지게 가난한 자신을 보면서 그녀는 늘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 때 하느님은 ‘말하는 대로 써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왼손에 토막연필을 쥐고 받아 적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느님이~”
그녀는 너무 어처구니없는 말씀에 울며 소리쳤습니다.
“아니요! 못 쓰겠어요! 공평해 보이지가 않아요! 내겐 아무 것도 없어요!”
하느님은 ‘시키는 대로 공평하신 하느님이라 써라!’ 하셨고, 그녀와의 반복되는 공방전 속에 결국 하느님이 승리하셨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이렇게 ‘나’라는 시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가사로 한국 복음성가 작사대상을 수상하고 그녀의 책도 기독교 저서 최우수 서적으로 선정되었으며 지금은 장애인 학교 건립을 추진 중이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십니다. 그 열 명 중에 유일한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병을 치유해 주신 것이 곧 그 사람들의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돌아와 감사와 찬미를 드렸을 때에야 비로소 그 사람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예부터 나병은 죄의 상징이었고 나병을 치유해주시는 것은 세례로 상징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다는 보증이 아니라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릴 때 비로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송명희 씨는 비록 개신교 신자지만 우리에게도 큰 감동과 교훈을 줍니다. 그녀를 바뀌게 한 것은 믿음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것이 그녀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를 변화시킨 것은 ‘하느님의 공평함’을 어렵게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찬미 하면서부터 였습니다.
가끔 미사시간에 신자들의 얼굴을 보면 억지로 나와 있는 듯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분들을 의외로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미사는 파견한다는 뜻이 있고 동시에 ‘감사(Eucaristia)’의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감사의 찬양을 드리지 않으면 미사가 아니고 다른 이들이게 주님을 전하려는 사랑이 없다면 미사는 그 사람에겐 헛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미사는 오늘의 치유 받고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는 모습과 같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미하기 위해 제대 앞에 모이는 이는 비로소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사하기가 얼마나 인색하고 어렵습니까?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았다고 느낄 불행한 순간에도 감사가 나온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성인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태양의 찬가를 지어 자연과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한 시는 그 분이 눈이 멀어 보이지 않을 때였다고 합니다. 눈이 멀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 분을 찬미하였기에 성인이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이런 문구를 보았습니다.
“‘우리’라는 선물을 주신 그대, 사랑합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 배우는 것은 말이 아닙니다. 바로 관계입니다. 말을 못 해도 엄마가 함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찬미도 바로 이래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구원해주시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 하나만으로 능히 찬미가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라는 선물을 주신 하느님과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우리 모습을 봅니다. 그분이, 그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도록 합시다.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회색 빛 나날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돌아보니 제 "신앙생활"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을 향해 걸어가는 여행길이었습니다.
산행을 하다보면 평탄하고 호젓한 오솔길을 걸을 때가 있는가 하면 가파른 오르막이나 아슬아슬한 절벽 사이를 기어갈 때도 있지요.
지난 제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때로 희망과 설렘으로만 가득 찼던 맑은 날이 있었는가 하면, 답답함과 좌절과 쓰라림뿐이었던 회색빛깔의 나날들도 많았습니다. 아버지와 이웃들 앞에 떳떳하고 의기양양하게 살아가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쥐구멍으로 들어가고만 싶었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절실하고 감미로운 하느님 체험으로 가슴 뛰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과연 하느님이 계시기는 하는가? 이게 도대체 뭔가?"하며 막막해하던 시절도 많았습니다.
제 신앙여정 안에서 참으로 피하고 싶었던 불행했던 순간들을 떠올려봅니다. 물론 그 순간은 현실적으로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이었습니다. 제 삶 전체가 뒤흔들렸던 위기의 순간들이었지요. 어떤 체험들은 너무도 고통스러웠기에 떠올리기조차 싫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조금씩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좌절의 순간이야말로 은총의 순간이었습니다. 좌절의 순간이야말로 제 삶 안에 큰 쉼표를 찍게된 보물과도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불행했다고 여겨지던 그 순간이 비록 육체적으로 괴로웠지만 제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바라다 볼 수 있었던 제 인생의 가장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병고의 십자가를 지고 가던 순간이야말로 진한 하느님의 은총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희망과 구원의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한평생 나병으로 시달리던 사람들을 말끔히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언제나 인간의 병고를 모른척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 함께 아파하며 함께 고통 당하시며 함께 눈물 흘리시는 연민의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고통 당할 때, 거듭되는 실패 속에 헤맬 때도 우리가 결코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한가지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우리를 외면한다할지라도 예수님 그분만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나간다 할지라도 그분만은 끝까지 우리를 떠나가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결코 고통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통 안에 계심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노화마저 거부하지 않습니다. 봄이 오면 고목의 등걸에서 연녹색 푸른 싹이 돋아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죽음마저도 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마저 물리치셨음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달려갈 것인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나병 환자들은 예루살렘의 사제들에게 치유 사실을 인정받아야만 정상적인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사제들에게 자신의 깨끗한 몸을 보여 줄 날만을 고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으로 살 수 없었던 나병 환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을 억눌렀던 온갖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는 것이었으며 복음(기쁜 소식) 자체였습니다.
나병 환자들이 더 이상 예수님 앞에 머무를 이유는 사라졌습니다. 모든 멍에를 벗어던지고 온전한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사제에게로 달려갑니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
나병 환자들은 자신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사제에게 달려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달려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곧 나병의 치유라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사제들에게 치유 사실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었는지, 그들은 자신이 온전히 나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사제들에게 달려만 갔습니다. 단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똑같이 나병을 앓았고 치유의 은사를 받았지만, 한 사람은 예수님께로, 다른 아홉 사람은 사제에게로 향했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서로의 길이 갈립니다. 한 사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굴레를 벗겨 준 해방자에게로 달려감으로써 가장 가까이에서 참 해방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당장의 현실적 이익을 향해 달려감으로써 해방자에게 멀어집니다.
한 순간의 일입니다. 한 순간의 선택입니다. 어디로 달려갈 것인가? 지금까지 온 몸으로 겪어야 했던 굴레를 벗어버렸다는 해방의 기쁨에 그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이 해방의 기쁨을 온 몸으로 체험했기에 더 완전한 해방, 총체적인 해방을 향하여 나아갈 것인가?
머리로서는 명확하게 대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으로 결단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더욱 충만한 내일을 향해 얻기 위해서 버려야 하는 당장의 편안함과 이익이 너무나도 아쉽기 때문입니다.
"너는 과연 어디로 달려갈 것이냐?"
"너는 과연 지금 어디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느냐?"
오늘 주님께서 던지는 화두입니다.
로또를 좋아하는 어떤 형제님이 계셨지요.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매주 토요일 저녁에 복권을 손에 쥐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인생은 한방이야.”를 읊조리면서 당첨번호를 확인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복권을 사서 당첨번호를 확인하는 것을 이 형제님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권을 사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것 역시 일반 사람들의 취미 활동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지요. 또 만약에 당첨이 되면 그야말로 ‘인생역전’을 이룰 수가 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들이 울상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글쎄 시험을 빵점 맞아서 선생님으로부터 혼났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은 아들의 시험지를 받아들었지요. 그리고 그는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험문제는 이러했습니다.
“자신의 꿈을 적어보시오.”
이에 대한 아들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인생은 한방이다.”
나의 잘못된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와 나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것 같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분명히 나의 행동은 나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할 지가 분명해 집니다.
먼저 하느님께 받은 모든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 역시도 사랑의 향기를 세상에 풍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이들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가 있으며, 다시금 사랑의 향기를 세상에 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감사하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려하고 그래서 늘 사랑이 부족하다고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10명의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다시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람은 단 한 사람. 그것도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 한 명 뿐이었습니다. 9명의 유대인은 자신의 치유가 마치 받을 빚을 받은 것처럼 당연하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치유받은 이방인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임에 감사하며 주님 앞에 엎드렸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육체의 치유만이 아닌, 영혼의 구원까지 얻게 됩니다.
10명의 나병환자 중에서 누가 다른 이의 모범이 될까요? 바로 단 한 명의 치유받은 이방인이 우리의 모범이 되고, 우리 역시 이러한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살 때 영혼의 구원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다른 이들에게 이러한 모범을 보이며 살고 있을까요?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도록 합시다.
지혜는 닳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리 나누어도 줄어들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나누면 나눌수록 늘어난다(데모필).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좋은 생각’ 중에서)
평생을 일그러진 얼굴로 숨어 사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심한 화상으로 자식들을 돌볼 수 없어 고아원에 맡겨 놓고 시골의 외딴집에서 홀로 살았다. 한편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자식들은 아버지를 원망하며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식들은 아버지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흉한 겉모습에 충격을 받고 아버지를 외면해 버렸다.
어느덧 자식들은 성장하여 가정을 이루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외롭게 살다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와 왕래를 끊고 살던 자식들은 아버지의 죽음에 큰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장례식에 마을 노인 한 분이 문상을 왔는데, 아버지가 화장은 싫다며 뒷산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일러 주었다. 하지만 자식들은 산에 묻으면 때마다 돌봐야 하는 것이 번거롭고 귀찮을 것 같다며 화장을 했다.
장례를 마치고 아버지 유품을 태우던 자식들은 일기장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아버지가 흉한 얼굴을 가지게 된 사연이 적혀 있었다. 어릴 적 자식들의 불장난으로 집에 불이 났고 자신들을 구하다 화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 사고로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죽은 아내와 자식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일기장에 편지를 썼다.
“여보, 당신을 구하지 못한 날 용서하구려.”
“아들과 딸아,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못했지만 마지막 부탁이 있다. 내가 죽으면 부디 화장은 하지 말아다오. 평생을 밤마다 불에 타는 악몽에 시달리며 살았단다.”
뒤늦게 자식들은 통곡했지만 아버지는 이미 화장되어 연기로 사라진 뒤였다.
비오는 날(김수열)
얼 마 전에 수능이 끝났지요. 사실 수능이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앞으로 남아 있는 나의 생을 생각한다면 하나의 과정이고 순간일 뿐입니다. 따라서 수능을 잘 보지 못했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또 잘 봤다고 교만에 빠질 것도 아닌 것이지요. 아무튼 모두들 힘내시고요.... 그 안에 담겨 있는 주님의 뜻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어제 책을 보다가 하나의 시를 발견했습니다. 너무나 재미있어서 그대로 옮겨 봅니다.
수학 시험 볼 땐데요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아, 짱나
배 둘레만 알면 됐지
도형의 둘레랑 나랑
뭔 상관?
창밖엔 운수 좋은 날처럼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데
틀렸다, 틀렸다 하면서
사선으로 내리는 거예요
아, 졸라
그런데요, 운동장 물웅덩이 보니까
맞았다, 맞았다 하면서
동그라미를 그리는 게 아니겠어요?
틀린 게 하나도 없어요.
다 동그라미예요
선생님,
내 답안지가요
물웅덩이였음 졸라 좋겠어요
아, 진짜
E.T.라도 감사해요
- 임영인 신부님-
한센병을 겪은 것처럼 코가 없고, 한쪽 눈과 눈썹도 없고, 입술이 뒤틀린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E.T.할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채규철 선생님입니다. ‘E.T.할아버지’라는 말은 ‘이미 타버린 할아버지’라는 뜻이랍니다.
그는 대학을 마치고 덴마크에 유학가 선진 농업기술을 배워 돌아온 뒤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던 가슴 뜨거운 청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언덕에서 차가 굴러 폭발하면서 전신 3도 화상을 당해 얼굴이 도깨비처럼 변했습니다. 한창 나이인 서른한 살 때였습니다. 2년 뒤에는 아내마저 쇠약해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삶은 절망의 연속이었습니다. 식당이나 다방에서 거지 취급을 당하고 버스 승차를 거부당하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원망스러워서 자살하려고 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나를 살리신 주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주님 뜻에 순종하며 살자.’
그 후 채규철 선생님의 삶은 변했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피고름이 나던 머리에서 새 머리카락이 돋아나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일그러진 얼굴을 머리카락이 조금이라도 가려 줄 수 있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귀가 없어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한쪽 눈을 잃었지만 남은 한쪽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했고, 입술이 없어졌어도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는 청십자 운동을 하고, 간질 환자들을 위해 활동 했으며, 86년에는 아이들을 위해 두밀리 자연학교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강연을 했는데 그때마다 감사의 전도사가 되어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마음씨 좋은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돈이 많았지만, 정이 많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노력을 했지요. 그런 그가 어느날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목수를 불러 집을 좀 지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우리 부부가 3개월쯤 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최상의 건축재료와 초일류 목수를 총동원해 멋진 집을 지어주세요. 건축비를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고 주인이 여행을 떠나니, 목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요. 그리고 그는 싸구려 건축자재와 형편없는 인부를 동원해서 날림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건물을 다 지었어요 구멍이 나고 금이 간 곳이 생겼지요. 이런 부분은 페인트칠로 감쪽같이 속였습니다. 드디어 부탁을 했던 부자가 돌아왔고, 목수는 부자에게 열쇠를 주며 이렇게 뻔뻔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집을 지었어요."
그러자 부자가 목수에게 그 열쇠를 다시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집은 내가 당신 가족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바로 그 순간 목수는 땅을 치며 후회를 했지요. 그는 자기에게 돌아올 집인지도 모르고, 단순히 순간의 이익을 위해서 엉터리로 건물을 지었으니 말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지요. 즉, 당장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기교를 부리는 사람들은 결국 낭패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당장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서 은혜도 모르고 엉뚱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시다가 10명의 나병환자를 만나십니다. 그들 중에 아홉은 유대인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나병이란 불치의 병으로 뭇사람과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소외를 당했겠지요. 따라서 그들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서 예수님께 외치지요.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의 불행을 가련히 여기시어 나병을 낫게 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들은 모두 깨끗해졌던 것이지요. 그런데 치유받은 아홉 명의 유대인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지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한 사람만이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만이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왜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은혜도 모르는 짓을 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율법에는 나환자를 접촉하면 부정해진다는 계명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환자였던 자신들과 접촉한 예수님은 이미 부정해진 것이지요. 그런데 부정해진 예수님을 만나면 그들 자신이 또 다시 부정해 질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병이 나기 전의 유대인들의 완고한 마음으로 다시 되돌아간 것이지요.
이 모습이 혹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이끄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지만, 우리 자신의 편리와 이해타산으로 인해 다시금 멀어지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의 은혜를 받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온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아홉 명의 유대인처럼 단순히 병의 치료만 될 뿐,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하겠지요. 앞서 그 가난한 목수처럼 나에게 돌아올 것도 그냥 차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끊임없이 치유를 받아야 할 죄인들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과 이웃에게 죄인임을 고백하고, 굳은 믿음으로 주님의 자비를 간청해야만 합니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생각과 말과 행위의 십일조
-이인옥-
오늘 한 말 중에 고맙다는 표현은 얼마나 되나? 한 달 동안 한 일 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일은 얼마나 될까? 올 한 해 사람들에게 받은 호의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나? 이제까지 알고 지내던 사람들 중 은인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일생 일어난 일들 중에 감사드릴 사건은 무엇인가?
하루 종일 한 말 중에 십분의 일만 감사의 표현을 하고 살았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한 달 내내 한 일 중에 십분의 일만 감사의 마음으로 했어도 지금보다 훨씬 즐겁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일 년 동안 만났던 분들의 고마움을 십분의 일만 되새겨 잊지 않았어도 지금보다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들 중에 은인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면 그만큼 마음이 겸손하다는 증거다. 정말로 은인이 많아서라기보다 그만큼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살아오는 동안 감사드릴 일이 너무도 많아 손꼽을 수 없다면 그만큼 마음이 깨끗하다는 말이다. 정말로 감사할 일이 많아서라기보다 그만큼 욕심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우리는 생각의, 말의, 행동의, 시간의 십분의 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다.
치유된 나병환자 열 명 중에 감사한 사람은 겨우 십분의 일, 단 한 명이다. 그런데 육신의 치유에 감사할 줄 알았던 그 한 명에게는 영혼의 구원까지 덤으로 주어졌다. 작은 감사가 더 큰 감사를 불러온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행복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동안 행복해진다고. 감사할 일이 많아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써 더 많이 감사할 일이 생긴다고. 그러니 행복하고 싶다면, 구원받고 싶다면 ‘적어도’ 우리 일생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야 하지 않을까? 나머지 아홉은 그만두고라도.
참된 치유
-서현승 신부님-
미국의 한 언론사가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당첨 이후의 삶을 조사해봤더니, 당첨된 사람들은 당첨금을 받은 이후에 거의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마약에 빠지고 도박에 빠져서 가정이 파탄 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더랍니다. 그런데 복권에 당첨되었던 사람들 중에는 반대로 아주 행복하고 건실하게 사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네요. 그들에게는 비슷한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복권 당첨금의 상당 부분을 사회단체에 기부하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직접 도와주는 삶을 사는 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치유받은 열 사람의 나병환자 중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리고 구원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은 똑같이 치유를 받고나서도 왜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소식을 듣지 못했을까요? 결국, 육체적인 나병의 치유가 그들 삶의 목표였기 때문이죠.
복권에 당첨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상시 간절히 바랐던 것이 돈 자체였고 갑자기 행운의 돈이 생기자 그 돈을 가지고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병환자 아홉 사람도 육체의 치유를 통해 그들 삶을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었던 나병환자만 병을 치유해준 하느님을 찬양하며,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주신 분께 감사드리고자 찾아와서 예수님과 인격적 만남을 갖게 됩니다. 그는 믿음을 통해 이제는 몸만이 아니라 나병환자로서 살았던 삶까지 치유를 받습니다. 참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감사의 정을 드리는 정도가, 영혼이 건강한 정도입니다”
-홍성만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어떤 마을에 들르십니다.
마침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멀찍이 서서, 소리 높여 외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이르십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집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그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으로 구원된 사람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 한 사람뿐입니다.
다른 아홉은 몸은 깨끗해졌지만 구원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영혼의 나병이 치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감사할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영혼의 나환자들입니다. 그들은 부족한 작은 것에 집착한 나머지 불평과 불만이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그런 나머지 주어진 큰 은혜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혹시 나도 부족한 작은 것 때문에, 크신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감사의 정을 드리는 정도가, 영혼이 건강한 정도입니다.
감사의 정을 잊지 않는 매일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평범한 일상에서의 감사
-이강건 신부님-
오늘 복음은 열 사람으로 표현되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감사할 줄 아는 한 사람을 등장시켜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열 사람으로 표현되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감사를 드린 사람은 한 사람이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즉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우리가 일상을 얼마나 무감각하게 보내는지를 또한 알려준다.
마태오복음 5장 43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고 전해준다. 즉 세상사람들에게 똑같은 배려와 똑같은 사랑을 하시는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며 그러나 이에 감사하는 사람은 극소수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리도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일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나병이라는 큰 병을 앓고 있다. 그들이 치유되었다면 몸의 변화를 매우 크게 체험했을 것이다. 문드러지던 몸이 낫는다는 것은 매우 큰 변화이다. 그뿐 아니라 나병환자들의 비참한 삶에서 정상인의 삶으로의 변화 또한 매우 큰 변화이다.
나병환자들은 숨어서 생활해야 했고, 정상인의 삶의 터로 내려와 거리를 다닐 때에는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외쳐야 했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외쳤던 그들의 신세는 주님을 만나면서 더 이상 부정한 사람이 아니게 된다. 이런 매우 큰 변화를 체험했으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면 얼마나 그들의 삶이 무감각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묵상할 수 있는 내용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 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오늘 복음에서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을 부각시키듯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도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을 부각시키신다.
오늘 복음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의 뜻을 읽을 수 있다. 이방인을 부각시킴으로 신앙인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계시는 것이다. 이웃을 이웃으로 받아들였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고 감사할 줄 알았던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 신앙을 가졌다
는 신앙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주시는 것이다. 감사의 생활에서도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이 더 뛰어났고, 이웃을 받아들이는 이웃 사랑에서도 그들이 더 모범적이었다. 이런 내용을 알려주면서 신앙인인 우리들에게 더 분발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이다.
이제 신앙적 감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아주 큰 변화에도 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범한 일상 안에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열 명의 문둥병자
-김웅태 신부님-
오늘 복음[루가 17:11-19]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줄 알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교훈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레아 사이를 지나시다가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 열 명의 나병환자들 중에는 이상하게도 사마리아 사람이 하나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천시해서 그들을 상종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만나서 이야기하지 않고 피하는 것이 마치 그들에게 공노가 되는 것처럼 멀리하는 처지였는데 열 명의 나병환자 중에 사마리아인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공통적인 불행에 처하게 되면, 서로가 "사람이다" 인간이라는 사실만을 중요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문둥병이라는 비극 속에서 서로가 고통받는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었을 뿐, 유대인이라든가, 사마리아인이라는 구별을 잊어버리고 함께 같은 처지를 마음 아파하면서,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서로도 하느님 앞에 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의식하고 있을 때, 타인을 멸시하거나 할 수 없고 서로를 용서하고 함께 손을 잡고 살 수 있으며, 진정한 기도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사람이 어떤 은혜를 누구에게 받은 다음에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즉, 복음서 가운데 이 장면에서처럼 인간의 배은을 신랄하게 묘사한 곳이 없다고 할 정도이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알고 못견디게 부르짖었다.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사제들에게 자기 몸을 보이러 가는 도중에 낫게 해 주셨다. 그런데 자신들이 평생의 절망이요, 살아있지만 죽은 목숨과 같은 그 무서운 문둥병에서 해방시켜주신 은혜를 모두 받았으나, 은혜 받은 것을 알았을 때, 예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유대인들이 아니고, 죄인이라고 멸시 받아왔던 사마리아인이었다고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 은혜 받은 적이 없는가? 받았다면 얼마나 진정 감사하는 마음이 얼마만큼 있는가? 누구는 그럴 것이다. 내가 하느님 덕본 것이 무엇이 있기에 그분에게 그토록 감사할 것이 있는가? 나는 내 노력으로, 내 힘으로 여유있게 살아가는데, 그분의 도움도, 그분께 감사할 것도 없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그러한 자신이 자신 만만한 존재인가? 자신의 살아있는 목숨부터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처지에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감사가 먼저입니다.
-장재봉 신부님-
하느님의 자비가 풍요로우심은 생각할수록 놀랍기만 합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 하느님께서는 약자를 ‘편애’하신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탈출 22,22)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니까요. 오늘 치유를 받은 열 사람의 나병환자 가운데 아홉 명은 아마도 사제에게로 갔을 것입니다.
그것은 틀린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일러주셨으니까요. 열에 아홉은 다수결 원칙에 따르면 우위입니다. 열 가운데 아홉이 원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곧 옳은 것이고 정의라고 믿는 것이 세상의 잣대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에 하나에 불과하지만 먼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잣대가 세상의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외롭고 때로는 고독합니다. 하지만 소수일지라도 그것이 변치 않으시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는 일이라면 강합니다. 절대 꺾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믿음의 힘입니다. 오늘 홀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셨는지요? 그리고 무엇을 감사하셨는지요? 그분께 엎드려 감사할 것이 지금, 이렇게 온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우리들이 허공만 쳐다보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곤란하지요.
수험생을 위한 기도
-임종심-
우리 성당 근처에 입시학원으로 유명한 종로학원이 있어서인지 주일날 청년미사에 수험생들이 많이 온다. 본당 신부님과 종로학원에서 가르치는 두 분 신자 선생님의 도움으로 4년째 수험생을 보살피고 있다. 고해성사도 보고, 냉담하는 수험생들이 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봄에는 삼겹살 파티도 한다.
매년 수능 전날 미사에서 수험생들에게 일일이 안수해 주고 십자가나 기적의 패를 목에 걸어준다. 미사 후에는 구역에서 정성껏 준비한 저녁식사를 수험생들과 함께 나누며 1년 내내 수능이라는 굴레에서 마음 졸이고 힘들어한 그들을 격려한다. 시험이 끝나면 모두 뿔뿔이 떠나겠지만 결코 이 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내일 수능을 치를 수험생들의 마음이 무척 초조하고 불안할 것이다. 지금 수험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쪼록 침착하게 시험 잘 치르고 그동안 노력한 모든 수고가 좋은 결실을 맺기를 바라며 수험생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
‘지혜라는 큰 복을 주신 주님! 모든 수험생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수능을 준비하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장차 미래의 큰 일꾼이 될 수험생들이 수능이라는 뚜렷한 목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조금 더 시야를 넓혀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여여(如如)한 마음으로 큰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여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감사하는 삶
-강영구 신부님-
그들 중 한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루가 17,15-18)
사랑하는 예수님,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까지 나음을 받고 새 삶을 시작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뿐입니다.
그는 감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나머지 아홉은 육신의 상처는 치유 받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병들어있습니다.
감사는 행복과 기쁨을 만들어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하면 행복합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에 감사하고, 잠을 깨우는 새소리에 감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까이 있음에 감사하고, 곱게 물든 나무 잎과 아름다운 국화 때문에 감사하고, 계절의 변화에 감사하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 우리 삶은 행복하고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불평과 불만은 불행과 고통을 만들어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괴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고 불평하고, 밝아오는 새날을 어떻게 살까 염려하고 걱정하며 투덜대고, 가까이 있는 가족과 이웃을 귀찮아하고, 떨어져 수북이 쌓이는 낙엽 때문에 투덜대고, 국화가 너무 아름답다고 불평하고,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고 투덜대면 사는 것이 괴롭고 불행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데살5,16-18)
인생은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두 번의 기회는 없습니다. 유일회적인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늘 행복합니다.
예수님, 우리를 행복의 나라로 초대해주신 당신께 감사드립니다.(一明)
감사에 더디고 파티에 익숙한 우리들
-박상대 신부님-
예수께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치신 오늘 복음의 기적사화는 루가복음만의 고유한 사료이다. 루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9,51-19,28)를 엮어가면서, 예수께서 상경 길에 있다는 사실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9,51.53; 13,22.33; 17,11; 18,31; 19,11.28) 뿐만 아니라 베레아 지방을 통해 가시면서 오늘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지방을 언급한 이유는 나병환자 열사람 중에 이방인으로 취급받던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이 상당히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지나간 복음들에서 드러났다. 애당초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예루살렘 상경계획을 잡았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를 제자들이 꼽게 여겨 하늘의 불을 내려 태워버리자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초연히 우회로를 택하셨다.(9,52-56)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10,29-37)에서도 예수님의 호의적 속내가 드러난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 열 사람의 치유사화에서도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이 돋보인다.
구약성서에서는 사제들이 나병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악성 피부병들을 부정함으로 규정하고 그 환자들을 격리시켜 살게 하였다. 그들이 완치되었을 경우, 자신의 피부를 사제에게 보여 정함으로 인정받아야 했다.(레위 13장) 사제가 정함을 선포하면 병이 나은 자는 사제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의 장막에서 복잡한 ‘정화예식’을 치러야 했다.(레위 14,2-14) 하루도 아니고 8일씩 걸리는 이 예식이 얼마나 복잡하고, 사실 골치 아픈 것인지는 레위기의 이 대목을 꼭 읽어보아야 한다. 이 대목을 읽고나면 나병환자 10명 중에서 유대인이었던 9명의 배은망덕한 행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악성 피부병자들이 마을 중심과 격리된 어귀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마을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쉽게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치유의 자비를 청했다. 사실 예수께는 어떤 병이든 치유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병자들이 사제들로부터 치유를 인정받고 공식적인 정화예식을 치름으로써 가족들과 함께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사제에게 가는 도중에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10명중에서 9명은 유대인이었다. 그들이 나병환자로 격리되어 지내는 동안 살아서는 결코 그들 가족과 동족에게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낫게 된다면 율법이 규정하는 ‘정화예식’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그 예식을 치러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수백 번을 뇌까렸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치유된 것을 확인하는 순간, 더 힘차게 사제들에게 달려갔을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바로 이방인으로 간주되는 사마리아 사람은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예수께로 돌아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제대로 치유를 받은 사람이 된 것이다.
과연 깨끗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법(法)이 사람을 깨끗하다고 선포한다 해서 깨끗하게 되는 것인가? 깨끗하고 흠 없이 산다는 것은 사람의 인정을 받기보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삶이다. 정화예식은 천천히 치러도 늦지 않다. 그러나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발걸음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분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자신의 길을 가야 하시는 것이다. 오늘 9명의 유대인들 속에서 찬양과 감사에는 더디고, 축하파티에는 잽싸고 익숙한 우리들 자신을 본다. 감사와 찬양에는 정한 날 없이 미루고, 파티와 회식과 약속에는 열 손가락이 모자라는 우리들이 아닌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두 배의 기쁨으로 삶을 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카17,12-13)
---
이 구절을 읽는 동시에 오버랩 되는 또 다른 구절이 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루카18,13)
‘멀찍이 서서’라는 표현에 눈이 멈추었기 때문이다.
‘멀찍이 서서’라는 말이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나병환자 열 명과 성전에서 기도하는 세리는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 아픔이란 자신들은 죄인이라는 의식이었다.
나병을 죄의 결과로 이해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가족으로부터조차 스스로 떠나 살아야만 했던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던 이들이었다.
세리라는 직업은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매국노라는 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즉, 그들은 사람들과 고립되고 고독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병은 천형(天刑)으로서, 세리는 동족을 배신한 죄로서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할 수 있는 죄가 아니었다.
이런 사람들이 거룩함 앞에 서야 할 때, 두려움과 죄송함으로 거리를 유지하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보인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선택하신다.
자기가 짓고 있는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착각에 빠져 하느님 앞에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이들의 기도가 아니라, 더 이상 기댈 것조차 찾을 수 없는 이들의 기도를 받아들이셨다.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안다면, 우리 모두는 ‘멀찍이 서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어렵게 청을 드리던 그들의 태도와 같은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으리라.
자신의 죄를 아는 것처럼 큰 은총은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시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죄를 자신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때
우선적으로 하느님께 감사 드려야 한다.
그리고 깨끗하게 인정하고 뉘우치면서 용서를 구하자.
그러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시리라 믿는다.
도둑은 감사하지 않는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방정환 선생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그가 밤이 늦도록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창문이 열리더니 복면을 한 강도가 불쑥 들어와 시퍼런 칼을 들이밀며 말했습니다.
“꼼짝 말고 손들어!”
그러자 방 선생이 말했습니다.
“아니, 꼼짝 않고 어떻게 손을 든단 말이요?”
강도가 주춤하며 말을 바꾸었습니다.
“그럼, 손들고 꼼짝 말어. 그리고 더 이상 잔소리 말고 돈이나 내놔. 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릴 거야.”
방 선생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일어나 책상 서랍을 열고 원을 내놓았습니다. 옛날 돈 원이면 큰돈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이것이 전부이니 가지고 가시오.”
주인이 태연하게 돈을 주자 도둑이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얼른 도망가려고 돌아서는데 이번에는 방 선생이 소리를 쳤습니다.
“여보시오. 돈을 주었으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할 것 아니오?”
깜짝 놀란 이 강도가 가슴을 쓰다듬으며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래 고맙다. 이 ○○야!”
얼마 후 날이 밝았습니다. 누가 문을 두드려서 나가 보니까 강도와 순경이 찾아왔습니다. 순경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간밤에 많이 놀라셨지요? 이 사람이 선생님 댁에서 강도질을 했다고 하기에 확인을 하러 왔습니다. 맞지요?”
이 때 방 선생이 차분히 말했습니다.
“아, 이 사람 말이오? 어젯밤에 우리 집에 왔었죠. 그런데 돈이 필요하다고 하기에 사정이 딱해 보여서 내가 원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고 갔는데요.”
순경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 사람이 분명히 선생님 댁에서 돈을 훔쳤다고 자백을 했는데요?”
하며 눈치를 살폈습니다. 그래도 방 선생은 태연히 말했습니다.
“아니, 이 사람, 그렇게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내가 돈을 주니까 인사까지 하지 않았소? 돈을 훔쳐 가는 도둑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법이 어디 있소?”
순경은 할 수 없이 강도를 풀어 주었습니다. 순경이 돌아가자 강도는 방 선생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선생님, 용서해 주십시오. 세상에 선생님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방 선생은 강도의 등을 두드리면서
“일어나시오. 사람이 어렵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오?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마시오”하고 타일렀습니다.
그러자 강도가 방 선생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선생님, 저에게 소원이 있습니다. 선생님 곁에서 평생 선생님을 섬기며 살게 해주십시오.”
그 후 강도는 죽을 때까지 방정환 선생 곁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살았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명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들은 조금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청하는 것을 보아도 그렇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제에게 자신들을 보이러 가는 것에서도 그들의 믿음은 보통믿음이 아닙니다. 나병이 걸린 상태에서 사제에게 보이러 간다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돌아 맞아 죽을 위험성을 감수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큰 믿음으로도 이들은 아직 예수님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오직 사마리아사람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기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맞는데, 그 믿음이 구체적인 감사의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저 빈 공간에 울리는 공허한 메아리밖에는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몸까지 구원받고 싶으면 몸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방정환 선생에게 도둑질을 하러 온 강도도 아주 작은 고마움이야 왜 없었겠습니까? 그 많은 돈을 아무 주저 없이 꺼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고맙다.’라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도망갔다면 나중에 방정환 선생이 그를 도와줄 방법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고맙다고 한 마디라도 했기 때문에 경찰을 설득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맙다고 말하지 않으면 훔치는 강도이지만, 고맙다고 말하면 그것은 주는 것을 감사히 받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께 고마움의 표현을 하지 못한다면 여전히 그분께서 주시는 구원에 대해 오늘 복음의 명의 사람들처럼 먹고 튀는 강도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 고마움이 말로만이 아니라 ‘십일조’와 같은 구체적인 것, ‘봉사’와 같은 것으로 표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예수님은 못된 소작인의 비유말씀을 하시면서 당신이 돌아가시게 되는 이유가 바로 ‘도조’를 바치기를 원치 않는, 즉 감사할 줄 모르는 도둑들에 의해서임을 밝히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포도밭을 맡기고 떠난 주인의 외아들까지도 그 도조를 바치기 싫어 죽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강도가 되지 않는 방법은 돈이든 시간이든 재능이든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그 십분의 일을 봉헌하면서 드러내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세상 모든 땅이나 거기에서 나오는 십분의 일은 하느님의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쓰고 있고, 예수님도 십일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문제는 아주 단순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봉헌할 줄 안다면 그 감사를 보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한상봉과 함께하는 수요묵상
요한 바오로 2세 교종 이후 25년 만에 프란치스코 교종이 한국을 다녀가셨다. 그런데 가톨릭 신자만이 아니라 누구나 할 것 없이 교종이 보여주신 겸손하고 소탈한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꽃동네에서 자신에게 무릎을 꿇는 수도자들 모습에 당황해 하고, 주교를 ‘형제’라 부르고 평신도들을 ‘친구’라 부르신 분이다. 아기들을 들어올리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손을 잡아주고,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다독거리며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까지 노란 리본을 가슴에서 떼지 않으신 분. ‘형제의 고통 앞에서 중립은 없다.’고 단호하게 우리 시대의 가난한 이들을 돌보시는 모습 때문이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이들도 교종에게서 ‘아버지’를 보았다. 내 마음을 받아줄 만한 어른을 만났다. 상처받은 이들의 치유자. ‘끝없는 슬픔은 끝없는 사랑으로만 치유받을 수 있다.’고 하신 교종의 마음에 공감한 것은 결단코 가톨릭 신자만이 아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갈릴래아와 사마리아가 이어진 고장을 지나가시다가 나병 환자 열 사람을 치유해 주셨을 때,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단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스라엘 사람이었지만 ‘이방인’처럼 천대받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그분께 돌아왔다.
내가 평소 좌우명처럼 새기는 글귀가 있다.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취되고 지식으로 인도되는 삶이다.” 버트런드 러셀이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러셀은 이런 말도 했다. “내가 바라는 세계는 집단적 적대감에서 해방된 세계, 만인의 행복은 투쟁이 아니라 협력에서 나올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세계다.” 이런 이야기가 무신론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은총이다. 자기 생애를 걸고 지식과 사랑에 투신하는 사람들 앞에서 ‘비신자’ 운운하는 것은 부끄러울 뿐이다. 독일 신학자 카를 라너는 이런 사람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지만, 이들은 이런 말조차 거절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참 하느님’이셨듯이, 우리가 ‘참 사람’이 되는 것뿐이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시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명의 병자를 모두 고쳐 주셨는데,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명뿐이었고, 다른 아홉 명은 그냥 가버렸습니다.
그 아홉 명이 그냥 가버린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1) 그들이 원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거나, 아니면 더 이상 아쉬운 것이 없어서 그냥 가버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카 12,16-21)'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사람이 농사를 짓는 동안에 하느님께 기도를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둔 다음에 전혀 감사할 줄 모르는 모습으로 자기 혼자 먹고 마시고 즐길 생각만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많은 소출을 거두어서 부자가 된 것은 자기가 잘나서 그런 것이고 하느님의 은총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농사를 짓는 동안에 힘들었던 일들을 잊어버린 모습이고, 하느님의 주권을 생각하지 못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은 자기들의 병이 나았다는 것만 생각하면서, 병을 앓는 동안에 겪었던 고통을 잊어버리고, 자기들이 예수님께 간청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그저 좋아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도 아주 어리석은 모습이 될 뿐입니다.
2) 그게 아니면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병을 고쳐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제들에게 가라." 라고 하셨고,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병이 나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몸에 직접 손을 대고 고쳐 주신 것은 아닌데, 그래도 그들의 병이 나은 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만일에 그들이 자기들의 병이 저절로 나은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이 이야기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마르 4,26-28)."
병자들이 예수님께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한 일은 땅에 씨를 뿌린 것과 같습니다.
그 병자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은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씨에서 '저절로' 열매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해 주신 일이라고 믿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은 자기들이 예수님께 간청했던 일과 상관없이 자기들의 병이 저절로, 또는 우연히 나은 것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랬다면 하느님께 감사드릴 이유도 없고,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되돌아 올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느님의 은총을 '우연히 얻은 행운'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했든지 안 했든지 간에 은총은 은총입니다.
만일에 자기가 청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거나, '나는 청한 적 없다.' 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우연한 행운으로만 생각한다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게 될 것이고, 그러면 더 큰 은총을 못 받게 될 것입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17)"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아홉 명이 감사드리러 오지 않은 것에 대해서 서운하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받을 수 있는 더 큰 은총을 받지 않고 그냥 가버린 것이 안타까워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받을 수 있었던 더 큰 은총은 '구원'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예수님께서는 열 명 모두의 병을 고쳐 주셨고, 그 일을 취소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냥 가버린 아홉 명도 계속 건강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줄도 모르고 예수님께 감사드릴 줄도 모르는 그 모습 그대로 살았다면, 구원 받지 못한 채로 인생이 끝났을 것입니다.
나중에라도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다시 하느님과 예수님을 찾았다면 구원을 받게 되었을 것이고...
되돌아온 한 사람은 확실히 몸도 치유되었고, 영혼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홉 명의 이야기는 마무리되지 않고 계속 진행 중인 이야기입니다.
그 아홉 명이 바로 우리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뭔가 아쉬울 때에는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청하다가, 그 순간이 지나면 간절함이 사라지고 감사드리는 것도 잊어버리는 모습...
시험 전에는 합격을 기원하는 기도를 간절하게 바치다가 합격한 다음에는 감사기도를 바칠 줄 모르는 모습을 수능시험 때마다 흔히 봅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저에게 기도를 부탁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납니다. 저의 기도가 다른 사람과 달리 특별한 효험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제 두 손을 꼭 잡고서 “신부님, 기도 좀 꼭 해주세요.”라면서 간절히 부탁하십니다. 그분들은 바로 수험생과 수험생 부모들이지요. 아마 오늘과 내일은 이곳 성지뿐만 아니라, 많은 본당에서도 기도하시는 분들로 가득 메우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오늘과 내일 뿐, 내일 모레부터는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시는 분들을 만나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수능이 끝나고 나면 저한테 기도 부탁하시는 분들도, 성지와 본당에서 기도하시는 분들도 없다는 것입니다. 맞다. 합격자 발표가 날 때쯤 되면 또 다시 기도하시는 분들이 늘기도 하네요.
하긴 저의 모습도 이러했을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닥치면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그 일이 해결되면 언제 간절한 기도를 했냐는 듯이 주님을 외면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요. 그런데 그 모습이 보기 좋을까요? 혹시 이런 말이 떠올려지지 않나요?
“화장실 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 다르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치유 받은 아홉 명의 나병환자를 통해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청하면서 치유를 요청했고 실제로 병의 치유를 받았으나,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다시 주님을 찾은 사람은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 한 명 밖에 없었지요. 그렇다면 치유 받은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왜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지 않고 배은망덕한 모습을 보였을까요?
아마도 이제 깨끗해진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접촉하면 부정해진다는 율법을 기억하면서, 다시 사마리아 지방을 간다는 것을 또한 자신들로 인해서 부정해진 예수님을 다시 만나는 것을 꺼렸을 것입니다. 나병으로 인해 부정해짐이 얼마나 큰 아픔을 준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바로 이러한 유대인의 완고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은혜도 모르는 행동을 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역시 이렇게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은총과 사랑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다시 주님을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지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을 찾은 그 한 명의 이방인은 이제 또 다른 선물을 얻었습니다. 아마도 주님을 찾지 않은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다른 병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전과 마찬가지로 고통으로 괴로워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방인은 완전한 치유를 얻습니다. 그는 나병만이 아니라 그 어떤 병에서도 당당히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얻었기 때문이지요.
감사하는 마음은 바로 믿음이라는 또 다른 선물을 받게 합니다. 그 선물은 우리들 마음의 어려움과 힘듦을 완벽하게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감사하지 못할까요? 참으로 어리석은 나였음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감사의 기도를 잊지 맙시다.
나눔('좋은 글' 중에서)
휘셔라는 건축 설계사가 2차대전시에 자기가 겪은 체험을 다음과같이 말했다.
그는 수백만의 유대인들과 함께 죽음의 집단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점점 기력을 잃고 죽어가고 있던 한 사람이 자기가 먹고 있는 딱딱한 빵 조각과 휘셔가 마실 수프와 바꾸어 먹자고 항상 애걸했던 일이 있다고 했다. 딱딱하게 굳은 빵 조각보다는 차가워도 수프가 먹기에도 좋고 배도 부르게 하기 때문에 휘셔도 수프를 원했으나, 죽음을 향해가고 있는 그 사람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자기의 수프를 그에게 주고, 자기는 늘 그의 작은 빵 조각을 받아먹었다고 했다.
드디어 미군이 진주에 들어와서, 휘셔는 집단 수용소에서 해방이 되어 미군의 병원에서 건강진단을 받게 되었다. 진단 중에 휘셔는 자기가 수프와 빵 조각을 바꾸어 먹은 이야기를 의사에게 했다. 그러자 의사가 정색을 하고 그에게 말을 했다.
"당신은 그 사랑을 베푼 일 때문에 살아난 것입니다. 당신이 오늘날 이렇게 살아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당신이 수프를 먹지 않고, 그 빵 조각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사 결과 그 수프에는 영양분이라고는 거의 포함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그 빵 조각을 먹었기에 지금까지 살 수 있는 영양을 공급받았던 것입니다."
양보를 하거나 나누어주면 조그마한 나눔이 결국 더 큰 것을 얻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요 며칠 무척 바빴습니다. 주말에도 계속 행사가 있어서 일주일 중에 단 한 하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지요. 그러다보니 계속해서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하루 푹 쉬고 싶다.’라는 생각만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를 비웠고 그날이 바로 어제였습니다. 어디로 갈 것인지도 찾아놓았고, 새벽 묵상 글을 쓰고서 곧바로 떠날 생각이었지요.
떠나기 직전, 평소의 습관대로 다음날 복음(오늘 복음) 말씀을 미리 읽었습니다. 그래야 새벽에 묵상할 때 편하거든요.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9명의 감사하지 못하는 나병환자의 모습을 바로 제 자신한테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식사를 하지 못하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식사 한 것이 곧바로 내 몸에 드러날까요? 오늘은 밥 두 그릇 먹었고, 고기를 얼마 먹었다는 식으로 내 몸에 쓰여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양이 내 안에 들어오는지는 몰라도, 그 모든 것들이 내 몸을 유지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영적 양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사를 통해, 기도와 묵상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영적 양식을 모시게 됩니다. 내가 매일 미사 참석했다고, 영적 성장이 얼마만큼 되었다고 표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영적 양식을 모시지 않으면, 마치 식사하지 않으면 내 몸을 유지 할 수 없는 것처럼, 내 영혼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생각해보니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쉬지 못한다고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었지만, 사실 주님께서는 단 1분 1초도 쉬지 않으시면서 우리 각자 각자를 지켜주고 계심을 잊고 있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 사실을 기억하다보니 감히 ‘쉬고 싶다’면서 하루 땡땡이를 치지 못하겠더군요.
단순히 내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믿겠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대신 내 눈을 뛰어넘는 주님의 사랑이 계시기에 지금 내가 영적으로 또 육적으로 살 수 있음을 느끼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감사의 표시를 잘 하지 않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감사하지 못한 9명의 나병환자처럼 말이지요.
그들은 자기를 고쳐 주신 분에 대해서보다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가 있었지요. 이렇게 자기에게 갇혀 있다 보니 마음이 굳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그 기쁨이 있게 된 이유에 감사하기보다는 나병이 나았다는 기쁨 자체에만 매여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곧바로 감사를 표현했던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은 어떠했습니까?
그 한 사람이 나머지 아홉보다 훨씬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나병이 나은 것 말고도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으니까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내가 만족할 기쁨 자체에만 매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그 기쁨이 있게 된 이유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늘 간직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 구원의 선물도 함께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