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전 마을 (산청 생초면) 방문기
지난 토요일 인동장씨 청장년회 회장님과 함께 가게된 마을 탐방으로 내가 다녀 온 곳이 산청군 생초면 갈전 마을이다.
회장님은 대구에서 출발 하고 나는 창원에서 출발 히여 오전 10시에 갈전 마을 회관 앞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대구에서 출발 하신분 나보다 먼저 도착했다며 생초 IC에서 만나잔다.
그렇게 10시가 조금 되기전 생초 IC에 도착하니 이마을 출향인 두분과 나와 약속된 회장님 해서 세분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마을로 들어 가는데 IC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을로 3분 정도의 거리다.
넓은 들 그리고 지리산에서 흘려 내려온 물이 큰 내를 이루어 그 강이 경호강 이었으니 경호강의 풍부한 수량에 더하여 최근에 이루어진 일이겠지만 편리한 교통 까지 더하니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천하의 명당이다.
지금과는 가치관이 다르 겠지만 원시 사회와 가까울 수록 인간의 사고가 동물 본능에 가까워지고 한때 유교가 국가 운영의 근간이 되었던 시절애도 그랬다.
인간이 마땅히 감당 해야할 도리의 제 1의 기준이 대를 잇고 자손의 번성 이라고 봐야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면 현재 갈전 마을의 모습은 딱 그 기대치에 부합하는 마을의 모습이다.
背山臨水에 前窄後廣의 지형으로 뒤로는 지리산을 주산으로 그 능선이 이어져 필봉과 왕산이 있고 크고 작은 산과 능선을 따라 그 끝자락에 갈전 마을이 자리를 잡았으며 마을 앞 넓은 들을 한바퀴 돌아 지나가는 경호강 물줄기는 左入右出을 이루었다.
또 들이 넓고 물이 풍부한 데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이 마을로 들어 오는 입구는 겹겹의 산으로 막혀 있으니 태풍의 피해 또한 자연스럽게 막아지니 농사는 풍요로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동네는 먹고 살 것이 풍족하니 외지로의 인구 유출이 적었을 것이고 살기좋고 풍요로운 땅은 자연스럽게 인구의 확장성을 담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自樂平生道(자락평생도)
한평생 도를 즐기며 살아가나니,
煙蘿石洞間(연라석동간)
이곳은 운무 자욱한 칡넝쿨 드리운 바위 골이라
野情多放曠(야정다방광)
초야에 묻혀 사는 몸, 얽매임도 걸림도 없어
長伴白雲閑(장반백운한)
흰구름 벗 삼아 늘 한가하여라.
有路不通世(유로불통세)
길이 있어도 세상 사람들과 왕래 없나니
無心孰可攀(무심숙가반)
바라는 마음 없거니 무엇에 연연하리오.
石牀孤夜坐(석상고야좌)
외로은 밤 돌 평상에 홀로 앉으니
圓月上寒山(원월상한산)
둥근 달이 한산 위로 솟아 오르네.
- 寒山詩 -
이 곳은 갈전촌 이란다.
지금이야 강둑이 쌓아지고 농지가 개간 되었으니 말이지 아마도 이 땅은 회룡포 처럼 물이 굽이쳐 풍수상 금성수를 형성 한 곳으로 처음 마을이 생겨 나고 개간이 되기 전에는 그랬을 것이다.
장마가 지면 상류의 지리산 넓은 골짝골짝의 물이 밀려 내려와 홍수가 지기도 하였을 것이고 또 가뭄이 심할 때는 물이 귀했으니 개간전 이곳 넓은 들은 아마도 갈전 (칡밭) 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 곳이다.
갈전 그 황무지에 터잔을 잡아 땅을 개간하고 물길을 돌리고 오늘의 황금 들녘을 만들어 낸 주역이 갈전촌에 대를 이어 300여년을 넘게 살아온 인동장씨 남산파 산음현감 공의 후손들 이라 한다.
이 마을도 역시 들녘엔 이미 모가 심어져 있고 마을 대부분이 모내기가 끝나가는 모양이다
함양 산청 이곳은 양파 주산지로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이나라 양파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마을은 인동장씨 집성촌으로 한때는 50여호의 단일 성씨 마을로 여헌 장현광 선생의 손자 되는 산음현감 장옥의 자손들이 터전을 잡아 대를 이어온지 3백년이 넘었다고 하는데 이 마을로 이거해 온 경위나 배경을 아는 사람은 없단다
다만 입향 배경을 연대와 시대적 사건을 배경으로 추측해 보건데 1670년 조선 현종때 국가적 재난인 한해, 수해, 냉해, 풍해, 질병 등의 5대 재해가 연이어 발생되었고 또 1690년 숙종때 대기근이 발생되었던 역사적 사건에 비추어 보면 살기가 어려우니 멸문을 막고 자손을 보호하기 위해 산음현감으로 있었던 연고를 기반으로 해서 자식중 한 분이 이곳으로 피난을 와서 정착을 했을 것이라는 추론들이 설득력이 있다
마을 초입 정자를 지나니 입구에 山陰齋라는 재실이 있는데 이 곳은 산음 현감 장옥을 추모하는 장소로 경내로 들어가니 건물 왼편에는 산음 현감 장옥의 선정비 복제비가 서 있었는데 이유를 알아보니 그렇다.
1970년대 초 새마을 운동 당시 정곡 마을에서 농로 개설을 하다가 큰 돌이하나 발견되어 파서 보니 산음현감 선정비 였는데 일제 강점기 이런 것이 주민들의 정체성 확립은 물론 저항 정신의 근원이 된다 하여 비석을 땅에 묻었다고 한다.
그래서 갈전 마을 후손들이 이 비석을 갈전 마을로 옮겨 오고자 했으나 정곡 마을에서 발견된 문화제 이니 줄수 없다고 해서 이 비석은 정곡 마을에 세우고 부득이 모형을 세웠단다.
우리는 산음재를 나와 잠시 마을을 둘러 보았다
이 동네의 특징은 마을길이 참 아름다운 곳으로 담장은 전부 하이얀 벽체에 검정의 토기와를 층층이 쌓아 만든 담징이고 여백의 건물 벽에는 벽화로 장식을 해 놓아 골목길이 참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렇게 골목길을 아름답게 가꾸게된 배경은 이 마을이 나라에서 추진하는 장수 마을로 지정되면서 정부 보조를 받아 이렇게 꾸몄다는데 참 정부 지원금이 헛되이 낭비되지 않고 마을을 위해 잘 쓰여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목적의 일을 보고 마을 어르신 몇 분과 인사를 나누고 마을 인근에 있는 지리황 식당을 찾아 점심을 나누었다.
지리황 식당은 전통 산채한정식을 전문으로 하는데 깔끔한 차림에 음식 맛이 참 담백하고 뒷맛이 깨운하다.
그래서 일까? 생각보다 손님이 많았으며 산청에서 꽤 이름난 맛집 이란다.
雪作衣裳玉作趾(설작의상옥작지)
눈으로 옷을 짓고 옥으로 발굽을 지어
蘆渚窺魚幾多時(노저규어기다시)
갈대 숲 물가에서 얼마나 물고기를 엿보았던가?
偶然飛過山陰縣(우연비과산음현)
우연히 날개를 펴고서 한 번 날아가다가
誤落羲之洗涓池(오락희지세연지)
잘못하여 왕 희지의 벼룻물에 떨어졌구나.
-- 水墨鷺圖/成 三問 -
이곳 식당의 위치는 가야국의 마지막 왕의 무덤이 있는 구형왕능 입구로 갈전 마을을 중심으로 인근에 산청 동의보감촌과 구형왕능이 있고 그 뒤에는 남명 조식 선생의 탄신을 이야기하는 풍수적 모티브인 필봉과 그리고 가야 구형왕을 품었던 왕의 산 왕산이 있어 굳이 지리산을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힐링과 건강을 위해 이 곳에서 하루 쯤 머물다 가도 참 좋은 곳 산&청 山高水長 산청 이다.
☆ 갈전 (산청군 홈)
지리적으로 둔철산 산주령이 뻗어내려 수많은 봉우리를 생성하였다. 마을 뒤에 최고봉인 북바위 산봉을 중심으로 세 능선이 깊은 산골짜기를 이루었다. 북쪽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흘러내린 수려한 계곡이 아름다운 자연절경을 만들었으며 널다랗게 펼쳐진 골짜기 한복판에 마치 병풍을 두르고 정좌한 듯 평온한 마을이다. 지금도 갈전촌 갈밭이라 부르는 것은 주위에 칡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구전이다.
본래 단성군 북동면의 지역으로서 갈밭 또는 갈절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북동을 병합하여 갈전리라 해서 산청군 신안면에 편입되었다.(갈전, 내북 2개 마을로 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