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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하고 싶다(장편소설)
추신: 10월 9일 해운대 동백섬 번개 참가 신청후 지난날의 옛추억의 글을 일부 공개합니다.
오래된 글이나 세상에 공포 되지 않고 나만이 간직하고 있던 글입니다.
보경 박재우
5공화국 전두환 집권에서 노동자와 학생시위가 연일 계속되었을 때다.
본명은 밝히지 않고 편의상 임은숙으로 한다.
경찰청에서 부산지방경찰청에 임은숙 검거 지시가 내려왔다.
임은숙은 광주 전남 대학교 농과대학 3학년에 재학중인 운동권 학생이다.
광주 전남 지역을 오가면서 시민운동을 하던 중 검거가 두려워 집으로 가지 못한 상태다.
피신을 위해 마산을 경유하여 부산에 잠입했다는 정보가 경찰청 정보망에 포착되었다.
나는 검거 지시를 받고 업무 수행을 하여야 했다.
내심은 내키지 않으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흉내는 내어야 했다.
정보과 당직실에 전화가 왔다.
임은숙은 "내일 부산 태종대 자살 바위에서 자수....,"심신이 지친듯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나는 "지금 어디세요?"
그 무렵에 통신 수단으로 휴대폰 삐삐 등이 없었다.
집 전화 이외는 길거리 공중전화이다.
"경찰관 아저씨? 고등학생 목소리입니다."
"아닙니다. 여기는 정보과입니다"
"전화를 잘 못한 것....."
라면서 전화가 스르르 끊긴다.
내 나이 26세 미혼이라 목소리가 조금 가늘고 앳되게 들려 학생으로 판단한 듯하다.
전화를 잘못 한 것으로 오인하고 끊은 느낌이다.
다시 전화가 올때까지 기다려야 했었다.
그러기 전 상사에게 보고하여 조치를 하여야 했었다.
당는시 지명 수배자가 많았으며 본인의 동태를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는 경우가 있었다.
허위 전화일 수도 있었기에 당직자가 현명하게 판단을 해야 한다.
모든 것을 보고하면 경찰 업무가 마비될 국정이었다.
전화를 받은 후 정보 분석을 해 보았다.
학생은 아주 지친 느낌이며 반성의 기미가 엿 보였으며 자수의 의사가 있는 것으로 추정이 되었다.
정보 보고로 첩보 전결 작성을 하려던 중이다.
시간이 지나도 전화가 오지 않는다.
새벽 당직실은 고요의 적막이 흐른다.
나는 의자에 앉아 졸면서 동트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따르릉 하면서 전화가 왔다.
다시금 그 학생에게서 온 전화일것이다 라는 예감으로 숨죽이며 수화기를 들었다.
"아저씨 엄마가 보고 싶어요, 배가 아파요."
예감대로 그 학생이었고 곧 쓰러질듯 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이제는 자수한다는 말도 없다.
"학생 지금 어디세요?"
"영도 다리 건너 자갈치 시장 입구...."
나는 서둘러 당직 교대 근무를 깨워 아침 먹으러 간다 하면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
날씨는 초겨울 날씨이나 쌀쌀한 바닷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다.
영도 다리 입구 끝으로 달려 가보았다.
때 국물이 줄줄 흐르는 청바지에 노란색 잠바는 누런 때가 더덕더덕하다.
키는 160 정도 머리와 얼굴은 넝마주이처럼 보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을 할 수 없었다.
나는 한순간 학생에게 동정이 갔다.
법 이전 인간으로 돌아 간 것이다.
사람이 우선이다 법은 그다음이다 라는 마음으로
인근 여관으로 방을 정하고 아침 식사를 시켜 주었다.
그리고 집으로 전화하여 누나에게 옷가지를 챙겨 오시라고 부탁을 하였다.
"아저씨 경찰서에는 왜? 데리고 가지 않습니까?
나는 추워요. 배도 고파요.
경찰서에서 밥이라도 먹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처벌을 받고 우리 엄마에게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가서 공부도 하고 싶습니다."
"목욕하고 아침 먹으면 경찰서로 데리고 갈게 기다리오."한 후
근무지에 들려 일요일 당직에게 업무를 인수인계 후 퇴근하였다.
근무 일지에는 학생 이야기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퇴근 후 여관으로 찾았을 때 누나가 목욕을 시키고 옷을 입혀 주고 있있다.
누나는 나에게 "어떻게 할 건가?" 질문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학생만 쳐다보았다.
누나는 "일단 집으로 모시고 가자."
나는 아무 말 없이 묵시적 승낙을 했다.
그리고 나는 자리를 피했다.
누나의 행위는 처벌 규정은 미약할 수도 있다.
나는 집까지 동행에 함께 할 수가 없었다.
공직자로서 조금의 양심은 지켜야 했었다.
나도 시집 간 누나 집에 잠과 밥을 공짜 신세를 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나는 사우나를 마치고 점심을 먹은 후 귀가하였다.
학생은 나의 방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누나는 과일과 차를 준비하여왔다.
누나는 "학생은 집이 어디세요?
그리고 나이는 몇 살 이세요?"
학생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꽃 같은 나이에 이념도 좋지만 몸 생각을 하면서 하세요.
우리 집에 마음 놓고 푹 쉬고 몸이 회복되면 뜻한 바 길을 가세요."
학생은 고개를 슬며시 들면서 " 네. 잘 알겠습니다." 하면서 말 고리를 흘린다.
"우리 동생하고 좋은 이야기를 나누세요." 하면서 자리를 피한다.
나는 학생이 안정될 때까지 말을 걸지 않고 함께 책을 읽고 있었다.
학생 상태는 여기가 어디인지 왜 본인이 여기에 있는지 어리둥절한 느낌으로 보인다.
그냥 지켜보면서 학생이 정신 들어 말문이 먼저 열리기를 기다려야 한다.
잘못 신경을 건드렸다가는 집을 나가 도주의 우려가 있다.
경찰청은 지명수배된 운동권 학생을 검거하면 일계급 특진한다고 발표된 상태이다.
그리고 지명수배자 학생이 자수하여 재범을 하지 않을 경우 처벌하지 않는다는 지침이 있다.
그러나, 지명수배된 학생들은 경찰청 정책을 신뢰하지 않는 상태이다.
나의 업무는 이상한 상태이다.
지명수배자와 함께 동거 하면서 범죄자를 은닉 시키고 있다.
직장에서 인지하면 직무유기 등등 구속 수감될 수도 있다.
한순의 연민의 정이 큰 오점을 남기고 있다.
나의 욕심으로는 검거 보고하여 처벌받도록 하면 일계급 특진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이 자수 형식으로 형 면제의 길을 받도록 하여야 했다.
그것도 학생의 협조가 있어야 한다.
학생은 나의 방에서 은닉 생활 3 일째이다.
2 일 동안 밥을 먹고 자고 반복을 하였다.
나는 지켜만 지켜만 보았다.
퇴근하여 집에 나의 방에 들어가 보았다.
나는 깜짝 놀랐다.
방에는 유치원에 다니는 영미 질녀와 함께 있었다.
나는 "안녕하세요?" 하면서 눈 인사를 하였다.
학생은 "저 지금 학생과 공부를 함께 하고 있어요." 하면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유치원에 다니는 영미는 나에게 "외삼촌 언니는 외숙모 이세요?" 하면서 궁금해 한다.
"그래 너 외숙모 될분이다.함께 잘 지내라" 하면서 긍정적인 답을 하였다.
누나는 학생 몸이 회복 기미가 보이자 오전 시간에는 함께 하면서 지루함을 달래 주고
딸 영미가 유치원에서 파하면 학생이 있는 방으로 보내었던 것이다.
학생은 영미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3 일째 학생은 나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인사를 하면서도 두려운 기색이 엿 보였다.
언젠가 경찰 당국으로 끌려갈 것이다 라 하면서 하루하루를 지루하게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인사 정도는 아직 이른 시기다.
3 일 동안 같은 방에 자면서 처음 나와 인사를 나눈 것이다.
인내를 가지고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학생이 삶의 생기가 본인 의사를 충분히 표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학생은 은닉 생활 5 일째이다.
누나와 영미는 학생과 가까워지며서 자매처럼 지내고 있다.
그러나, 학생은 내가 경찰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거리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지명수배전단지에 학생의 인상착의 차람 이었던 청바지와 노란색 잠바는 누나가 쓰레기통에 버린 상태이다.
학생은 집안에 있거나 외출 하려고 하여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다.
지금까지 누나의 옷에 의존하였으며 생필품도 필요하였다.
학생의 첫 외출이다.
누나와 학생은 백화점에서 속옷과 외출용 바지 잠바 그리고 운동복 운동화 등 생필품도 구매하였다.
거리에는 곳곳에서 경찰관이 검문검색을 하고 있었다.
집 앞에서 택시를 타고 백화점 앞까지 도착하면 검문검색에는 사각지대이었다.
다음날부터는 학생은 누나와 함께 아침 일찍 일어나 새로 구매한 운동복과 운동화를 신고
경남공업전문학교 교정을 경유하여 뒤산에 약수터 까지 등산을 하였다.
누나는 학생을 운동으로 체력을 회복 유지 시키기 위한 배려이다.
나는 그들 보다 더 일찍 일어나 경남공업전문학교 교정 뒤편 테니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누나와 학생은 약수를 담아와서 나에게 약수물을 마시게 하였다.
그리고 누나는 집으로 식사 준비를 하러 먼저 내려갔다.
학생은 내가 테니스 연습과 경기 모습을 관람하면서 은근히 나를 응원을 하는 것이다.
경기가 끝나면 나에게 약수와 수건을 건너면서 약간의 미소를 먹음고 쳐다본다.
그것이 바로 대화이었다.
취미 생활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스포츠는 친화력이 좋다고 생각한다.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 상호간은 몰론, 경기장 외에서 응원하는 이도 선수와 함께 호흡을 한다.
그런 후 집으로 내려가서 누나가 차려주는 아침을 함께 먹었다.
학생과 마주 앉아 겸상으로 아침 식사를 하였다.
토요일 오후 학생은 은닉 생활 일주일 지나는 날이다.
나는 특별한 용무가 없으면 집으로 서둘러 퇴근하여야 한다.
그 이유는 학생에게 관심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잘못 하다가는 나의 인생에 큰 오점을 남길 수도 있는 것이다.
퇴근 후 집에서 학생과 함께 점심을 먹던 중,
학생은 나에게 "오빠, 오늘 테니스장 운동 하시면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하면서
나의 운동복 운동화 그리고 테니스 라켓을 준비하면서 외출 채비를 한다.
학생은 이제는 누나와 나에게 마음 문을 연 것이다.
상대가 마음이 열기 전 본인의 마음을 먼저 열어야 한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그동안 짧은 시간이지만 누나와 나는 학생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 학생의 마음의 문을 열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제는 마음 편안하게 이야기 나눌 때이다.
나는 조용히 생각해보았다.
바쁜 시간에 학생과 테니스장에서 대화 장소가 적당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학생과 함께 해운대 겨울 바다에서 시원한 대화의 문을 열고 싶었다.
택시보다는 대중교통 31번 좌석 버스를 이용하였다.
버스 승차는 택시를 이용 하는 것 보다 수배자 검문검색에 사각지대일 수도 있었다.
좌석버스는 함께 나란히 앉을 수 있는 공간이다.
학생은 자연스럽게 나의 손을 잡는다.
나는 학생이 먼저 손을 잡아 주기를 은근히 기다렸다.
학생이 나의 손을 잡는 것이 대화의 시작이므로 다행이다.
북구 주례에서 버스를 타고 부산진구 가야를 지나 서면을 경유하며 해운대 극동호텔 입구 버스 종점에 도착하였다.
극동호텔 앞 겨울 바다가 시원스럽게 시아에 가까이 들어온다.
짙푸른 바다 위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는 우리의 꿈과 희망의 메시지처럼 귀전에 울린다.
초겨울 토요일 오후, 아베크 족이 여기저기에서 사랑 속삭이는 소리가 가물가물 들릴 듯 말듯하다.
우리도 질세라 손을 잡고 걷던 것을 학생은 자연스럽게 나의 팔에 장을 낀다.
모처럼 외출이라 추위를 타는 느낌으로 나의 옆구리를 밀치는 느낌이다.
나의 옆구리에 오묘한 기분과 학생을 어떻게 잘 처리하여야 하는 것이 주마등처럼 교차한다.
나는 업무에 시달리며 자유로운 데이트 한 번 못하였다.
모처럼 기회를 우선 함께 느끼고 즐기자는 생각이 앞선다.
극동호텔을 지나 조선비치 호텔 중간 지점에 해운대 경찰서 바다 출장소가 있다.
우리는 근무하는 경찰관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으로 걸었다.
학생은 출장소 입구에 경찰관을 발견하고 가슴과 다리를 나의 옆구리와 다리에 더욱 밀착하는 느낌이다.
물론 애정을 동반하면 깊어가는 것도 있겠지만,
경찰관을 발견하면서 나의 품속에 숨는 본능이 작용하였을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단정한 스포츠머리로 경찰관이 판단하기에 수감 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머리 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근무 경찰관 의경은 나에게 형식적 거수경례를 하면서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하면서 신분증 제시를 요구한다.
학생은 나 옆에 서서 입술이 파르르 흐트러진다.
나는 "수고 많습니다. 직원입니다."
그 한마디에 거수경례를 하면서 "좋은 데이트하십시오."라고 한다.
경찰 근무 형태가 허점 드러났다.
부산시경 경찰 내무에서 직원입니다 하면 경찰관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있었다.
최소한 신분증을 제시를 받아 확인하여야 되지 않을까 생각들었다.
그리면서 지명수배자 학생에게는 쳐다보지도 않으며 신분 요구도 않는 것이다.
우리는 유유히 검문 경찰관을 뒤로 따돌리면서 데이트를 계속하였다.
학생은 "오빠가 경찰서에 나를 인계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정어린 눈망울로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그런후 학생은 머리를 나의 가슴속 깊이 파 묵으면서 나의 허리를 꽉 껴안는다.
" 오빠 언제 나를 경찰서로 보낼 거예요?" 하면서 흐느낀다.
나는 "귀엽고 이쁜 은숙이 나와 함께 영원히 살고 싶다."
나는 학생 임은숙 이름을 처음 불렀다.
누나에게도 은숙을 칭하지 않을 것을 부탁한 상태이다.
은숙을 부르면 수배자 이름으로 심적 부담감이 서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은숙은 "오빠 안돼요, 그러면 오빠 직장도 다니지 못하고 구속이 됩니다."
은숙은 나를 은근히 걱정하며 본인 생각은 없다.
" "은숙이와 함께라면 유치장 철장 신세도 감수할 것이다."
"오빠는 그러시면 안 됩니다. 나는 나의 죄과를 받고 싶습니다."
"우리 미래는 다음으로 미루고 우리 함께 데이트하면서 즐기자."
"오빠 좋아요, 이제는 오빠 마음대로 하세요."
하면서 이산가족 상봉 현장을 방영하는 느낌이다.
아베크 족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뭔 일인가 하면서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는 남들 눈을 의식하여 자연스럽게 손잡고 흔들면서 조선비치호텔 정문을 지나 동백섬 둘레길을 거닐었다.
바다가 시야에 가장 넓게 보이며 오륙도가 눈에 확 들어오는 동백섬 들레길 중앙지점이다.
나는 80년대 히트하였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노래를 깊은 감정으로 은숙이를 위해 노래한다.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가고파 목이 메어 부르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헤매던 긴긴날의 꿈이었지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
부딪쳐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아섰지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내가 일절 노래 부르던 중 은숙이도 감정에 도취하여 함께 따라 합창하게 되었다.
이 절은 은숙이 혼자 부르게 하였다.
전라도 지방에서 태어나 대학을 다니면서 부산 해운대 동백섬 여행은 여의치 않던 시절이었다.
이 노래 가사를 음미하면 옛날 6.25 전쟁 때 북한에서 피난 후
이산가족이 되어 고향을 그리워 하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는 노래다.
노래 가사는 부르는 이의 개인의 영역일 수도 있다.
이절 노래 가사는 은숙이가 고향을 떠나 내 고향 부모 형제를 그리워 부르는 느낌에 나의 눈시울이 붉게 물 들었다.
마지막으로 "돌아왔다 부산항에"는 나와 함께 하고 있다며 그리운 부모 형제에게 파도 물결로 고향으로 소식을 전하는 느낌이다.
동백섬은 부산의 데이트족 80% 이상 찾아던 명소이며 전국에서 모두 여행하고 싶어 하던 장소이다.
우리나라는 관광 개발을 뒤로 미루고 산업을 치중하던 때 부산이면 해운대 동백섬이 상징이다.
요즈음 지방자치제 실시 후 각 지방마다 관광명소가 우후죽순처럼 개발되어
등 뒤로 밀린 예감은 있으나 동백섬의 유명세는 여전하다.
은숙은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래를 눈물을 흘리면서 땅에 펑퍼지고 앉아 수차례 반복하여 부른다.
나는 은숙의 뒤에서 물꾸러미 쳐다보면서 손수건 한 장을 흥건히 적신다.
꽃 같은 젊은 나이에 민주화를 위해 한 몸 던지면서 하소연하는 것을 하늘은 알 것이다.
너의 마음이 그러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하면서 인숙의 등을 안으면서 일으켰다.
은숙은 일어날 힘도 없는 상태이다.
은숙은 "오빠 나 추워요. 따듯하게 해 주세요." 하면서 겨우 일어났다.
은숙의 체온 유지를 위하여 조선비치 호텔 커피숍에 갔다.
통유리창 넘어 극동호텔 유람선 선착장과 미포는
철석이는 파도 사이로 갈매기떼 날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수채화이다.
커피숍 아래 바위틈 사이로 파도가 밀려와 하얀 연기를 자아낸다.
나는 "은숙아?" 은숙은 넋을 잃고 커피숍 창밖을 쳐다보다가 나에게 고개를 돌리면서 "네, 오빠!"
"우리 저 유람선 타러 가자?" 은숙은 입가에 미소를 띠우면서 고개를 끄덕끄덕인다.
커피를 마신 후 모래사장으로 내려와 은숙의 손을 잡고 유람선 선착장으로 향했다.
유람선 선착장의 운행은 해떨어지기 직전까지 운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유람선을 타려면 서둘러야 했다.
유람선 코스는 해운대 선착장에서 출발하여 오륙도를 돌아오는 코스가 있다.
또 하나는 오륙도를 경유하여 태종대에 종착하는 코스이다.
나는 태종대까지 편도 코스를 선택했다.
은숙을 태종대 관광을 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유람선에 승선을 하려면 원칙적으로 해운대 경찰서 미포 초소에 승인이 받아야 한다.
보편적으로 유람선 운영자에게 위임한 상태로 운영한다.
유람선 운영자가 승선자의 신분증을 확인 후 승선 시키는 것이다.
경찰은 지명수배자 검거 지시등등이 있을 때는 승선자 명단을 받아 조회를 하는 수도 있다.
해운대 경찰서 미포 초소장은 나와 경찰관 임용 동기이며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다.
해운대 여행을 하면 신세를 지고 지내는 사이다.
나는 초소장을 찾아가 인사를 나누고 은숙을 신붓감이라고 소개를 하였다.
'축하합니다, 지적 미인입니다."
은숙은 "감사합니다, 수고 하십니다."
초소장에게 결혼식 때 청첩장을 보내라는 전달을 받았다.
나는 초소장에게 태종대로 여행을 하고싶다 하였다.
나와 은숙은 초소장이 유람선 매표 직원에게 청탁하여 무임승차를 하게 되었다.
경찰은 업무상 다중이 모이는 장소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는 있다.
나는 당연히 여행이고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승선비를 지불하고 승선하고 싶지만 은숙의 신분이 노출되면 좋지 않은 결과로 두려움이 앞을 거린다.
해운대 선착장 유람선은 븅 ~ 하면서 뱃고동 소리를 울린다.
나와 은숙은 유람선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선착장이 뒤로 밀려 가는 느낌이다.
유람선은 조선비치호텔을 뒤로 하며 갈 길을 재촉하니 유람선 주위에서 날아다니던 갈매기 떼와 작별을 예고한다.
저 멀리서 오륙도가 희미하게 보인다.
음악은 조용필의 "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래가 해운대를 떠나는 서운한 마음을 달래며 귀전을 울린다.
유람선이 오륙도에 지날 무렵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노래가 흐르자 은숙의 눈가에는 이슬 같은 눈망울 하나하나 떨어진다.
은숙과 나의 인연이 참 오묘하다.
나는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직장 따라 부산에 내려와 경찰에 근무하고 있다.
은숙은 전남 출생으로 광주에서 대학 재학 중 운동권 학생으로 지명수배자로 부산에 피신 중이다.
은숙과 나는 해운대에서 유람선을 타고 꿈과 희망을 품고 태종대 바다 등대를 향하여 달리고 있다.
태종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우리는 저 넒은 태평양 바다로 향하여 영원히 돌아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태종대 등대를 바라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태종대 선착장은 또 하나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 마음 둘데 없어 선착장 부근 둥근 자갈이 있는 바닷가에 은숙과 함께 앉았다.
자갈은 바다의 밀물과 설물이 교차하면서 윤기가 반들반들하다.
은숙은 자주색 자갈 두 개를 양손에 죈다. "오빠, 우리 두 주먹 불게 쥐고 함차게 살아 보자."라고 외친다.
운동권 학생의 기질이 여실히 엿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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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프니까 청춘입니다..
아픔은 성숙입니다.
사랑도 성숙함은 좋습니다.
상대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참 오묘합니다.
이미 서두에 장편소설이라고 밝히셨지만,
수필 같은 소설입니다.
글을 정말 잘 쓰십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10.03 16:15
소설의 종류중에 생활소설은 수필형식을 조금 가미한다고 생각하여도 좋습니다.
소설 내용중에 동백섬 유람선 선착장과 해운대 백사장 배경이 있습니다.
우리가 모임하는 장소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습니다.
1980년 초 시대상을 정말 사실적으로 잘 묘사해서 과거로 잠시 돌아갈수 있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시발점이었던 그 당시 대학생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젊은 시절 서슬퍼런 군부독재에 맞서기엔 큰 용기가 필요했기에
아득한 옛날 40년 전의 상황들 이었습니다.
당시 시대상 보다는 해운대 동백섬을 중점을 두면서 올린것입니다.
이념 논리를 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보경 네~~~ 알겠습니다
동백섬 달맞이 고개길을 벚꽃 피는 4월쯤 드라이브하면
윈도우에 떨어지는 꽃비가 정말 아름다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내년 봄엔 그 길을 달려보고 싶네요.
@호프한잔 달맞이 고개에서 해운대 야경을 바라보면서
님의 닉네임 처럼
신선한 주점에서 '호프한잔'도 하고 싶습니다.
@보경 그 길을 가다보면 뷰 좋은 카페 많이 있습니다
제 기억에는 호프집을 보진 못했지만 (아마 운전 때문에 관심을 안뒸을수도)
꼭 카페가 아니더라도 뷰 좋은 식당에서 신선한 맥주 한잔도 좋을 듯 ~~~
@보경 저도 낑가주세요ㅎㅎ
@레테 우리 성지곡님과 동갑으로 친분이 있는것으로 사료 됩니다.
성지곡님과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서 일잔 기울릴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환영합니다.
성지곡님과 상의하여 오세요.^^
같은 마음입니다.
@보경 최고의 글입니다.
@최서연 낙서 같은 글에 잊지 않고 방문 하셨어 정중히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지난번 잠시 연재하다가 반응이 좋지 않아서 중단 된 상태이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계속 진행하는 방향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서연 작별인사 편에서 답글로 고사리 보내 줄려고 하였습니다.
집 주소 등등 알려 주시기 거북하시면
집부근 편의점.미용실 등등 알려 주시면 보내 드리겠습니다.
덕유산에서 자연으로 자란 것을 마음 할머니가 채취한 것입니다.
저는 매년 추석을 기하여 30 근 정도 사서 지인분에게 보내고 합니다.
일부 남아 있습니다.
@보경 감사합니다.
고사리는 괜찮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연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보경 감사합니다.
좋은 일도 하시고 덕분에
데이트도 즐기시고 추억으로
오래 기억에 남겠습니다~🤗
이번에 동백섬 가면 옛흔적의 자라를 둘러 보고 오겠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가면서
동백섬도 생에 마지막이 아닐가 하면서 다니면
진미를 발견 할수도 있습니다.
글이 참 정갈합니다,
마치 손 많이 타지않은 샘물을 마신듯 그러네요,
대학 들어가자마자 휴교령에 발목 잡혔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를 일년 일찍 들어가느라 75 였거든요,
부산.....몇년전 잠시 들렀을때는
제데로 둘러볼새 없었는데 시간 여유롭게 잡고
다시 함 가고 싶습니다...^^
낙서 같은 글에 과찬의 말씀입니다.
글과 언변은 많은 독서에 있다고 합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감옥 살이를 하면서 수많은 책들을 곁에 두었다고합니다.
작년 겨울에 목포 여행가서 김대중 노밸 평화상 기념관 방문하여 보았습니다.
평화도 영호남이 우선 이라고 생각하는 저입니다.
저의 영남권 지역이면서 고 김대중 대통령 이념을 존중 하였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공원을 지나 본관으로 가려고 하는데
공원에 잔디 위에 영남권 공원 이라는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20 평 남직 이었습니다.
@보경 존경합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사람들은 김대중 대통령
좋다고 말하면 대부분
호남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 부터 깨트려야 하는데요.
참 어려운 숙제입니다.
저는 서울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