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가 오려는지 일찍부터 날이 꾸무럭거립니다. 갑자기 왜 창가의 토토가 소환되었을까? 우두망찰 상념에 빠졌습니다. "쌀을 바꿨어요" "아끼바리 햅쌀인가요?" 솥뚜껑을 열어보니 옹기종기 모여있는 밥알들이 찬란합니다. "에예공! 밥 묵자!" 하루 종일 요추 통증에 시달린 가운데 <100일의 거짓말 3회>를 휴대폰으로 보았습니다. 사토를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아온 소란(김현주 1977)과 미국으로 떠나고 싶어 하는 가경(김유정 1999)은 서로의 목적을 위해 위험한 거래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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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이름으로 총독부 영어 통역쟁이가 된 가경은 그곳에서 사토의 아들 태웅(박진영 1994)을 다시 만나 썸 타는 기세가 어째 10월의 태풍 전야 같습니다. 김현주는 내 마음속 연기파((덕이-상도-토지) 배우입니다. '캔디'나 '알프스 소녀 하이디' 의 명량 소녀에서 고독한 중년의 독립군으로 변신한 그녀의 필모그라피가 격세지감과 동병상련의 파지처럼 손이 다 부들부들 떨립니다. 아! 옛날이여! 3회에서 '밀정' 선발 기준이 기세-영어-복수-임기응변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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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도를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어요. 작가(유보리, 36세) 가 에스더랑 동갑내기 입디다. 에스더가 할아버지 태어난 시대(1932)를 배경으로 쓰는 시대의 아픔과 사랑 이야기 <100일의 거짓말>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어떤 사랑에 대한 기록이고 남기지 못한 유서이자, 뒤늦게 도착한 연서이며 밤새 써 내려간 답신이다." 역사는 지나간 시간을 기록하지만 사랑은 그 시간을 어떻게 되살리는가? 거짓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시대에 진실한 사랑은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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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 세대가 겪은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다음 세대는 어떻게 자신의 이야기로 재구성할 수 있을까? 밥 한 그릇에도 역사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던 삶의 전부였을 것입니다. 오늘의 풍요가 어제의 희생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망각하는가.
2.
요추 통증을 달래며 시청한 <100일의 거짓말> 3회는 일제강점기라는 거대한 역사의 무대에서 서로 다른 욕망을 품은 인간들을 등장시킵니다. 복수에 삶을 저당 잡힌 소란과 미국행을 꿈꾸는 가경은 위험한 거래를 시작합니다. 한 사람은 과거의 상처에 붙들려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삶을 온전히 소유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닮았습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주어진 조건을 넘어 자신의 선택으로 존재를 만들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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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식민지라는 역사적 조건에서 선택은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가경의 거짓 이름은 단순한 위장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유예해야 하는 시대의 비극입니다. 거짓으로 자신을 감추어야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역설, 이것이 밀정 서사의 철학적 긴장입니다.여기에 사랑이 개입합니다. 사토의 아들 태웅과 다시 마주한 가경의 감정은 복수와 생존이라는 계산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계획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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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우의 관점에서 사랑은 두 사람이 하나로 합쳐지는 감정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사람의 관점에서 세계를 새롭게 경험하는 진리의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적과 동지라는 역사적 구분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은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사건이 될 수 있을까. 다만 사랑이 식민지 지배의 폭력까지 지워 주는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김현주의 연기를 바라보며 떠오르는 것은 단순한 향수가 아닙니다. 명랑한 소녀의 이미지가 고독한 중년의 독립운동가로 변모하는 동안 배우도 늙었고 관객도 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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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시간은 소멸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배역과 기억 속에 축적되었습니다. 베르그손의 지속처럼 과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으로 스며들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오래된 배우에게서 자신의 세월을 발견하는 이유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작가 유보리가 에스더와 같은 세대라는 사실입니다. 할아버지가 태어난 1932년을 배경으로 오늘의 젊은 작가가 사랑과 저항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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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쾨르에게 역사는 과거를 설명하려는 작업이고, 서사는 흩어진 사건들을 엮어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입니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시대의 고통도 이야기로 재구성되는 순간 다음 세대의 윤리적 질문이 됩니다. 그러나 기억의 계승에는 경계할 점도 있습니다. 식민지 시대를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로만 소비한다면 역사의 폭력은 아름다운 배경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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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개인의 사랑과 욕망을 민족이라는 거대한 명분 속에 완전히 흡수한다면 인간의 구체적인 얼굴이 사라집니다. 좋은 역사극은 이 두 극단 사이에서 개인의 운명과 역사의 책임을 함께 보여 주어야 합니다. 작가가 말한 남기지 못한 유서와 뒤늦게 도착한 연서는 결국 시간의 문제입니다. 누군가는 끝내 말하지 못했고, 누군가는 너무 늦게 들었으며, 누군가는 백 년이 지난 뒤에야 그 침묵을 이야기로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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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입니다.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다시 응답해야 할 미완의 요청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백일의 거짓말이 백 년의 진실을 불러내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거짓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삶을 오늘의 언어로 복원하는 일, 그들이 끝내 전하지 못한 말을 다음 세대가 이어 쓰는 일 말입니다. 창밖에는 비가 내릴 듯하고 솥 안에는 햅쌀밥이 익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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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거대한 사건으로 기록되지만 인간의 삶은 밥 한 그릇과 사랑 한마디로 지속됩니다. 누군가의 목숨을 건 선택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갑니다. 결국 사랑이란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아니라, 그 시간이 남긴 상처와 침묵을 외면하지 않고 다음 세대의 삶으로 이어 가는 책임이 아닐까. 이번 글에서 가장 발전시킬 만한 철학적 연결은 바디우의 '사건', 리쾨르의 '서사적 정체성', 벤야민의 '역사적 기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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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작가와 딸이 같은 세대라는 발견은 단순한 우연을 넘어, 가족의 시간과 민족의 시간이 만나는 지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드라마는 아직 3회까지의 이야기이므로, 가경과 태웅의 사랑이 역사적 적대와 어떤 관계를 맺을지는 열린 질문으로 남겨 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사랑은 역사의 폐허에서도 피어나는가?
2026.10.19.mo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