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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어떻게 길에서 주님을 뵙게 되었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사도행전의 말씀 9,26-31>
그 무렵
26 사울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지만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가 제자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27 그러나 바르나바는 사울을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데려가서, 어떻게 그가 길에서 주님을 뵙게 되었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는지, 또 어떻게 그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28 그리하여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다.
29 그리고 그리스계 유다인들과 이야기도 하고 토론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다.
30 형제들은 그것을 알고 그를 카이사리아로 데리고 내려가 다시 타르수스로 보냈다.
31 이제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 제2독서
“믿고 사랑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요한 1서의 말씀 3,18-24>
18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20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21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22 그리고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23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4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 복음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지나친 기도 지향의 위험성 : 기도의 맛을 잃게 만들 수 있다>
오늘 복음도 성 목요일 만찬상에서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권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당신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무언가 이뤄내려는 시도는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행위입니다.
제가 주님께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너에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을 듣고, “이제 제가 무엇을 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네가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나에게 붙어있기만 하여라.”라는 대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감히 하느님께 무언가 해 드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스스로 무언가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시는 유일한 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주는 것뿐입니다.
성령의 열매란 ‘사랑, 기쁨, 평화’입니다.
만약 기도하고 나서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마음이 자라남을 느낀다면 기도를 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았던 것은 어떤 사람들은 성당에 오래 다닐수록 기도하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방에서도 할 수 있고 나름대로 기도의 방법이 있을 수는 있지만 ‘기도의 맛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기도의 맛은 기도 안에서 얻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아닌 다른 것을 바랄 때 잃게 됩니다.
마치 과자를 먹을 때 단맛을 원했는데, 짭짤한 맛이었을 때 깜짝 놀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짭짤한 것도 맛이 있습니다.
다만 자신이 원했던 맛과 다를 때 그 과자가 싫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기도가 짧아지는 가장 큰 이유는 기도를 자기의 욕구를 채우려는 도구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목적이듯, 기도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장 큰 문제는 ‘지향’입니다.
기도 지향은 자칫 기도의 목적을 퇴색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사 때나 기도 때 지향하는 것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그 기도가 들어지면 이제 행복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욕구는 블랙홀과 같아서 주님께서 그것을 들어주신다고 해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저도 살아오면서 그런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저에게 가장 많은 원망을 하는 사람들은 제가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저를 떠나갑니다.
많이 들어주면 그만큼 많이 요구하게 되고, 그 많은 요구를 더는 들어줄 수 없는 처지가 되면 쓸모없는 도구처럼 버려지게 됩니다.
이것이 어떠한 지향을 목적으로 기도하는 이들과 주님 사이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만둣가게 주인이 제때 따듯한 식사를 하지 못하는 환경미화원과 부랑자들에게 ‘사랑의 만두’를 공짜로 나누어주었습니다.
어느 정도 선행을 계속하다가 주인이 만두를 더는 공짜로 주지 못하겠다고 하자 그간 만두를 얻어먹던 사람들이 거칠게 항의를 하였습니다.
대놓고 욕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만두 말고 돈으로 달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이른바 착하고 순진한 서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악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청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청하는 것을 들어주면 이제 상대가 감사해야 할 사람이 아닌 호구로 여기게 됩니다.
처음엔 감사한 마음이 들 수 있어도 그 욕구는 블랙홀이기 때문에 더 큰 것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이전의 만족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청원 기도를 할 때 주의해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이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호구로 전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다가는 오히려 상대에게 더 안 좋은 일이 생겨나게 할 수 있습니다.
명나라에 ‘여문의’라는 공정하고 청렴한 재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에 내려가 살았는데, 어느 날 한 사람이 술에 잔뜩 취해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여 재상은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사람이 심각한 죄를 짓고 사형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여 재상은 괴로워하며 스스로를 탓했습니다.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것에 자비를 베푸는 바람에 그가 더 나쁜 상태로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느님께서도 한없이 요구하는 이에게 한없이 베푸실 수가 없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도의 참맛을 회복하면 나머지 것들은 다 들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묵주기도를 시작하기 전 엄청난 기도 지향을 읊는 사람을 보면 ‘기도의 맛을 느끼지 못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그 수많은 미사 지향을 보며 ‘이것을 들어주시지 않으면 미사가 행복할까?’라는 생각도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 6,33)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로마 14,17)
성령을 통하여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가 맺히면 나머지는 굳이 청하지 않아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미사 지향이나 기도 지향에 집중하다 보면 오히려 하느님 나라를 잃고 맙니다.
그러면 청원도 이뤄지지 않고 기도의 맛도 잃어 결국엔 기도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붙어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가리옷 유다의 경우는 잘못된 지향으로 예수님께 붙어 있었습니다.
의도가 깨끗하지 못하니 그 가지를 통해서는 좋은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말씀은 우리 안에서 세속과 육신과 마귀의 더러움을 씻어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 지향이 여전히 돈과 명예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 있다면 그것이 채워질 때까지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분명 우리가 청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청하십시오.
그리고 잊어버리십시오.
기도 때는 제발 지향을 잊어버리십시오.
오히려 기도 중에는 자신이 청하는 모든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청하십시오.
더는 그런 것은 생각나지 않게 되기를 청하십시오.
기도 중에는 그저 주님의 기도에서 청하라고 한 것만 생각하십시오.
주님의 기도 안에 우리가 하느님 자녀로서 청해야 할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들만 청한다면 주님은 당신 자녀를 다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시기 위해 우리가 신경 쓸 모든 것들을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로서 누릴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오는 기도의 맛 때문에 점점 더 오래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곧 하느님 나라만을 청하는 기도가 되기를 빕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내 안에 머물러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 안에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이 시간 주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어두울 땐 안 보이는 것들이 불을 켜면 나타납니다.
눈 감았을 땐 안 보이던 것들이 눈을 뜨면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 없을 땐 안 보이던 것들이 마음을 두면 나타납니다.
사실 없는 것도 마음 두면 나타나고, 있는 것도 마음을 없애니 사라집니다.
마음을 두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너무도 다릅니다.
마음 두는 것에는 시간도 거리도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지고 아무리 오래 되어도 마음을 두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사실 마음에 두면 눈을 감아도 보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나요?
아내, 남편, 아니면 자식, 부모, 형제, 이웃, 재물, 명예...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습니다.”
마음 둘 자리를 잘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필리 2,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고 하셨습니다.
‘머물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머문다는 것은 얼마나 자주 미사를 참례했고 얼마나 더 많은 묵주기도를 드렸는가로 분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선을 내 영혼 안에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함께야)
마음을 두어 그가 바라는 것, 기뻐하는 것을 행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2독서의 표현을 빌면,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요한 3,24).
그리고 마침내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실천하기 때문에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 15,7).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그분 안에 머물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내 된 사람은 남편에게 마음을 두고, 남편 된 사람은 아내에게 마음을 두어야 ‘이심전심’, 마음이 통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화목합니다.
그러나 동상이몽도 있으니 걱정입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서로에게 지킬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 부부로서 신의를 지키는 것, 스승에 대한 존경, 그리고 제자에 대한 사랑, 이웃에 배려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일상 안에서의 계명입니다.
이것을 지킬 때 주님으로부터 더 큰 복을 얻게 되고, 청하는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신 말씀은 달리 말하면,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이 청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모님을 ‘은총을 가득히 받은 복된 어머니’라고 칭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복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모님께서는 믿으셨기 때문에 복되십니다.
우리도 먼저 믿음으로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하고, 믿음으로 청해야 소망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그분 말씀을 가슴에 품고 그대로 행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간직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느 통계를 보니까 남자는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로 ‘친구 같은 아내’, ‘현모양처’형을 선호하고, 여자는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로 ‘가정적인 남편’, ‘카운셀러 남편’을 꼽았습니다.
그리고 남편 된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소리는 ‘당신을 믿어요!’이고, 아내 된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소리는 ‘당신 너무 힘들지?’랍니다.
다시 태어나도 현재의 배우자를 선택하겠느냐? 는 질문에 남성은 71.5%가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여성은 50.4%만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부부 불화가 생기는 원인으로는 남편과 아내 모두 서로의 일로 가정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답이 45%로 가장 많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탓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이루는 부부도 서로의 관심이 다릅니다.
이 다름 안에서 하나가 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가슴에 모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으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항상 예수님의 마음을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한 생애를 흔들림 없는 믿 음으로 예수님 곁에 서 계셨던 성모님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무에서 가지가 영양을 공급받는 것이지, 가지가 나무를 풍요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지만, 가지가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제자들 속에 주님께서 함께한 것은 제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함께 하는 것과 달랐습니다.
그야말로 주님께는 이득도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가지 하나를 잘라버린다면 여전히 그 포도나무에서 다른 가지가 돋아날 것입니다.
스승은 제자를 버리지 못하지만, 제자는 스승을 등지고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려진 가지는 뿌리에서 분리되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가지는 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 없이 가지는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 안에 머물지 않으면 결코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혹 무엇인가에 성공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내 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에 머물러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6,31-34)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고달픔만 더하고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주님의 뜻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내 뜻을 먼저 찾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무엇이든 청하여라.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말씀에는 관심이 있지만, 바로 그 앞부분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하는 말씀을 간과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이 먼저입니다.
오늘은 주님 안에 머물러 꼭 풍요로운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 안에서, 일터에서 주님 안에 머물러 기쁨을 누리시길 빕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 머물지 못한 일은 헛수고임을 일찍 깨우쳤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의 마음으로 행할 수 있는 은혜가 넘쳐나길 희망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해서 남주나?>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요한복음 15,4)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요한 1 3,24)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어는 주님 안에 머묾이고 그래서 부활 제5주일 주제도 주님 안에 머묾이겠습니다.
나그네와 순례자의 영성을 살아야 하고 그래서 매일 떠나야 하는 우리 프란치스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해야 하나, 머문다면 어디에 머물러야 하나 즉시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오늘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머물지 말고 떠나야 합니다.
같은 주님께서 또한 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떠나야 할 때는 떠나야 하고, 머물러야 할 때는 머물러야 하는 것인데 그래도 주님의 가장 강력한 명령은 당신을 따르라는 것이고, 주님을 따를 때 이 '떠남과 머묾'이 동시에 실현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따라서 가는 것이기에 당연히 머물지 않고 계속 가는 것이고, 혼자 제멋대로 가거나 주님을 떠나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가는 것이고, 늘 주님 곁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름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주님을 졸졸 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의 명령과 삶을 따르는 것인데, 물론 둘 다 사랑입니다.
먼저 졸졸 따르는 사랑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랑이요,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내가 충만해지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병아리가 닭을 쫓고, 아이가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고 따라가듯, 그 목적 자체가 주님 사랑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이요, 그 사랑 안에 머물고 그 사랑으로 내가 충만해지기 위한 것이기에 철저히 나를 위한 것이고 나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가 당신을 떠나지 말고 머물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없으면 당신이 허전하거나 아쉬어서서가 아니라 철저히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라시는 것이니 주님 안에 머무는 것을 마치 우리가 주님께 선심 쓰듯이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님의 명령과 삶을 따르는 것은 보다 성숙한 사랑으로서 받은 사랑을 나누기 위해 이웃을 찾아가는 사랑이요, 받기만 하던 사랑이 주는 사랑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아이였을 때 엄마의 치마폭을 떠나지 못하던 것이 사춘기를 지나면 차츰 친구와 더 많이 어울리고 사랑의 짝을 찾아가는 것처럼, 우리의 사랑도 성장하면 주님 사랑 안에 머물지만 않고,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실은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공부해서 남주지 않는 것처럼 사랑해서 남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하면 내 안에 있던 사랑이 빠져나가 그에게 다 가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오히려 더 사랑으로 내가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신비입니다.
돈은 주고 나면 내게 없고 그에게 있지만 사랑은 줘도줘도 내 안에서 넘치고 그를 채우는 것입니다.
내가 그를 채우면 하느님 사랑이 나를 채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라고 얘기하는 오늘 요한 1서의 뜻입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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