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자 : 2020년8월12일
일기 : 흐림
장소 : 덕수궁 및 정동
덕수궁은 처음 월산대군의 집터였던 것을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임시거처로 사용되어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에 경운궁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한 고종이 이곳에 머무르게 되면서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에서 덕수궁(德壽宮)이라 다시 바꾸었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부터
중화전을 비롯하여 정관헌, 돈덕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준명전, 흠문각,
함녕전, 석조전 등 많은 건물들을 지속적으로 세워졌다. 이곳은 고종의 재위 말년의 약 10년간
정치적 혼란의 주무대가 되었던 장소로, 궁내에 서양식 건물이 여럿 지어진 것이 주목된다.
1963년 1월 18일에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었다.
정관헌
정관헌(1900 이전), 전통목조건축 요소와 서양적인 요소가 절충된 특이한 건물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운 다음 바깥두리기둥은 처마를, 안두리기둥은 천장을 받치고 있는데,
지붕은 안두리기둥이 받치는 부분까지만 팔작지붕을 씌우고
바깥두리기둥이 받치고 있는 부분은 지붕을 덧달아내어 퇴를 만들었다.
안쪽의 독립기둥은 기둥 밑부터 기둥 머리까지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기둥 머리는 둔중한 느낌을 주는 로마네스크풍으로 만들었다.
베란다에 두른 나무기둥과 처마장식 및 동제 난간이 매우 정교하다.
전체적으로 전통적 요소와 서양적 요소가 절충된
특이한 건물로서 근대 서양식 건축의 도입을 보여주는 건물이 있다.
석조전
덕수궁 안에 있는 근대 서양식 건물. 영국인 J.M. 브라운의 발의에 의해 1900년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되었다.
기본설계는 영국인 G.R. 하딩이, 내부설계는 영국인 로벨이 했으며
공사감독은 한국인 심의석, 러시아인 사바틴, 일본인 오가와[小川陽吉], 영국인 M.H. 데이빗슨 등이 했다.
석조건물로 1층에는 거실, 2층에는 접견실 및 홀, 3층에는 황제 황후의 침실·담화실·거실·욕실 등이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장중한 도릭오더의 기둥을 세우고 정면과 양 측면에 튀어나온 현관을 만들었다.
건물 앞의 정원과 함께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 궁전의 건축을 모방해 지은 것이다.
1945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으로 사용되었으며
6·25전쟁 이후 1986년까지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중명전
덕수궁(德壽宮) 돌담길을 돌아 뒤쪽으로 가면 현재 정동극장이 있고,
그 골목으로 들어가면 '중명전(重明殿)'이 있다.
중명전은 원래 정동지역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에 속해 있다가,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이 확장되면서 궁궐로 편입되었다.
이때 당호를 ‘수옥헌’이라 짓고, 주로 황실 도서관(King's Library)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재건되어 지금과 같은 2층 벽돌 건물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의 설계는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I. Sabatin)이 하였다.
중명전은 대한제국의 중요한 현장이다.
특히,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대화재 이후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황제의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불법적으로 체결되었으며
그 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로 이준 등을 파견한 곳도 바로 중명전이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2006년 문화재청에 관리 전환하여, 2007년 2월 7일 사적 제124호로 덕수궁에 편입되었다.
2009년 12월 복원을 거쳐 2010년 8월부터 전시관(‘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 곳, 덕수궁 중명전’)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을사 늑약이 체결된 현장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로 이준
아관 파천 길
첫댓글 추천.
덕수궁과 인근 사적 고찰
정동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기에 더 의미있는 시간 경건히 함께 했습니다..
선예도의 아름다움과
디테일한 영상을 멋지게 담으신 영상을
감사히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