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전에는 중앙에 아미타불을 모시고좌협시로 관음보살, 우협시로 지장보살을 봉안했다.
정수사 삼성각이다. 돌계단 위에 조성되어 있는데
법당 안에 참배객이 있어 참배는 밖에서 하고 사진만 담았다.
법당 안에는 목조탱으로 산신, 독성, 칠성을 모셨다.
칠성은 보관을 쓰고 있고 용의 그림이 있어 용왕인줄 알었는데이
전각이 삼성각임으로 칠성으로 보아야 할 것같다.
수각
오백나한전
@함허대사부도
함허대사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승려로
그가 머물던 정수사 뒷산 중턱에 봉안한 부도이다.부도는 승탑을 말한다.
부도(승탑)의 구성은 기단 위에 탑신이 놓이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어 정상에 상륜을 장식하고
그 기본형은 팔각 원당형을 따르면서 사각의 단순한 변형을 가미하였다.
기단부는 상, 하대로 형성되었으며 각 면에는 아무런 조식도 없다.
부재는 화강암이며 전체 높이는 164cm이다.
함허대사부도(㴠虛大師浮屠)는 1986년 4월 1일 강화군의 향토유적 제19호로 지정되었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함허(涵虛·1376~1433) 화상은 조선전기의 승려로
법명은 기화(己和)이며,속명은 유수이(劉守伊), 호는 득통(得通) 또는 무준(無準)이며,
함허는 그가 머물던 당호가 함허당(涵虛堂)이므로 함허득통이라 칭한 것이다.
속성은 유(劉) 씨며 남원에서 출생했다.
아버지의 이름은 청(聽)이며 벼슬은 전객시사(典客侍事)를 지냈고,어머니는 방(方) 씨였다.
길상산 서쪽 참성단이 있는 마니산(469m) 동쪽신라 선덕왕 8년(639)에 창건된 정수사를
1426년 함허가 중건할 때 법당 서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남을 보고
‘정수사(精修寺)’를 ‘정수사(淨水寺)’라 고쳤다.
함허득통의 부도는 이 절 북쪽 등성이에 있다.
그리고 등성이 너머 계곡을 ‘함허동천’이라 부르며 바위에 글자가 석각 되어 있다.
이후 함허는 공덕산(孔德山 大乘寺), 운악산(雲岳山 縣燈寺) 등의 여러 산을 편력한 뒤
1431년(56세) 가을,영남의 희양산 봉암사(鳳岩寺)에 돌아가
허물어진 절을 수리하고 들어앉아 조용히 지내다가 세종 15년(1338) 4월 1일에,
湛然空寂本無一物(담연공적본무물)靈光爀爀洞徹十方(영광혁혁통철시방)
更無身心受彼生死(개무신심수피생사)去來往復也無罜碍(거래왕복야무가애)
맑고 부드러우며 비고 조용하여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영혼의 빛은 밝게 빛나
시방세계를 꿰뚫는다몸과 마음 저 생과 사 받을 일 다시없으니
가고 옴 되풀이해도 걸릴 것이 없어라 라는 임종게(臨終偈)을 마치고 입적하시니
세수는 58세요, 법랍은 38세였다.
1431년(세종 13) 겨울 노구를 이끌고 봉암사에 들어가 쇠락한 절을 수리하고
선풍을 진작시키려 하였으나뜻을 이루지 못하고 2년 후 4월 어느 봄날 입적하신 것이다.
다비 후 그의 덕화를 기리기 위해 사리를 모아 그가 오랫동안 주석했던
사찰 4곳에 부도를 세웠는데 정수사의 부도도 그중 하나다.
나머지 3곳은 황해도 평산 연봉사(烟峰寺), 가평 운악산 현등사,
문경 희양산 봉암사로 그의 부도(승탑)가 있다.
저서로는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현정론(顯正論)》, 《원각경소(圓覺經疏)》,
《금강경오가 설의(說誼)》, 《함허당어록(涵虛堂語錄)》,《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設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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