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간 밤에 태풍 급 큰 비가 내렸거나 말거나 신이 내게 허락하신 소중한 하루가 시작 되었다고 생각하니 귀하고 감사합니다. 길동 분식과 명품 김밥집의 유혹을 넘어 단골 수제집비 집에 안착했어요. "맛있게 드세요!" 오늘따라 주방 할머니가 직접 서빙해주는 수제비를 먹는데 해석이 할머니부터 애호박까지 50년 전 추억이 훅 치고 들더니 염병, 왜 눈물이 핑돌까요?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의 분석론"은 전존재(원시 현존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떼놓고 볼 수 없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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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데 63살의 나는 13살의 소년기-20살의 청년기-30살-40살의 성장기-50살의 광야시절을 거처 2026.10월을 살고 있으니 다소 못 마땅한 과거는 비판, 해체해야 하지만 동시에 과거에서 배울 건 배워야한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결론적으로 "63세의 나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생성하는 존재다. 쾅! 쾅! " 13세의 소년은 63세의 노인이 될 줄 몰랐습니다. 20세 청년은 자신이 걸어갈 길을 알지 못했고, 30대와 40대의 도전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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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의 광야는 지나갔지만 그 흔적은 지금도 삶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63세의 나는 누구인가? 하이데거라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가능성을 미래의 결단으로 이어 가는 존재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니체라면 그 운명을 원망하는 데 머물지 말고 자기극복의 재료로 삼으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가다머라면 과거의 나를 성급하게 심판하지 말고 대화하라고 권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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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라면 그동안 나를 지배해 온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승리와 패배의 이분법을 의심하라고 할 것입니다. 리쾨르라면 그 모든 사건을 다시 이야기하되, 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주체로 남으라고 할 것입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현사실성은 마음대로 창조하거나 지워 버리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처한 조건입니다. 창조적인 것은 그 조건 자체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 조건 속에서 아직 열리지 않은 가능성을 실현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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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역사와 현사실성에 귀속되어 있지만, 그 유산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선택적으로 계승함으로써 새로운 존재 가능성을 열어 가는 역사적 존재다." 과거를 해체하는 것만으로 미래가 창조되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삶은 해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결단과 실천을 통해 형성됩니다. 63세의 나는 13세의 나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13세의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배우고, 20세의 내가 이루지 못했던 것을 다른 방식으로 시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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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50세의 내가 겪었던 고통을 더 넓은 이해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과거는 나를 구성하지만 나를 완결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하이데거의 역사성에서 출발하여 니체의 자기극복, 가다머의 해석학, 데리다의 해체, 리쾨르의 서사적 정체성을 거쳐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철학적 결론입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물려받았고, 이제 그 유산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2.
간밤에 태풍급 큰비가 내렸거나 말거나, 신이 내게 허락하신 소중한 하루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니 그저 귀하고 감사합니다. 길동분식과 명품김밥집의 유혹을 물리치고 단골 수제비집에 안착했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오늘따라 주방 할머니가 직접 내어주신 수제비 한 그릇에 마음이 무너집니다. 할머니의 손길에서 애호박 한 조각까지, 50년 전의 기억이 훅 치고 들어옵니다. 염병, 수제비를 먹다가 왜 눈물이 핑 도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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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손이라면 과거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프루스트의 마들렌 과자처럼 수제비 한 그릇이 잠들어 있던 기억을 깨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론으로 접근하면 문제는 더욱 깊어집니다. 과거는 단순히 기억 속에 보관된 사건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존재론적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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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에게 현존재(Dasein)는 세계와 분리된 독립적 주체가 아닙니다. 인간은 태어날 시대와 부모, 환경을 선택하지 못한 채 이미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이것이 피투성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주어진 조건에 갇혀 있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기투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현존재는 피투성과 기투가 분리되지 않는 시간적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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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세의 나는 13세의 소년과 무관한 존재가 아닙니다. 20세의 청년기와 30\~40대의 성장기, 50대의 광야를 거쳐 2026년 10월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13세의 소년은 자신이 63세가 될 줄 몰랐고, 20세의 청년은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지 알지 못했습니다. 30\~40대의 도전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으며, 50대의 광야는 지나갔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현재의 삶 속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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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63세의 나는 누구인가? 하이데거라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가능성을 현재의 결단을 통해 새롭게 떠맡는 존재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반복(Wiederholung)입니다. 반복은 지나간 삶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잠재되어 있던 가능성을 현재의 조건 속에서 새롭게 선택하는 일입니다. 니체라면 그 운명을 원망하는 데 머물지 말고 자기극복의 재료로 삼으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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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머라면 과거의 자신을 성급하게 심판하지 말고 그 시대의 지평과 대화하라고 권할 것입니다. 데리다라면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라는 이분법 속에 감추어진 가치의 위계를 해체하라고 할 것입니다. 리쾨르라면 그 모든 사건을 다시 이야기하되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주체로 남으라고 할 것입니다. 이들의 철학은 서로 다르지만 과거를 무조건 폐기하거나 그대로 보존하는 태도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에서 연결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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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자기극복은 과거의 가치에 대한 비판이고, 가다머의 지평융합은 전통과 현재의 대화이며, 데리다의 해체는 물려받은 사유의 모순을 드러내는 작업입니다. 리쾨르의 서사적 정체성은 그렇게 해석된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으면서도 책임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과정입니다.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철학적 경계가 있습니다. 현사실성은 마음대로 창조하거나 지워 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이미 처해 있는 구체적인 존재 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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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인 것은 그 조건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 조건 속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발견하고 선택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역사와 현사실성에 귀속되어 있지만, 그 유산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선택적으로 계승함으로써 새로운 존재 가능성을 열어 가는 역사적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과거를 해체하는 것만으로 미래가 창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해석은 실천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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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삶은 과거를 다르게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결국 오늘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 구체화됩니다. 63세의 나는 13세의 나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13세의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배우고, 20세의 내가 이루지 못했던 것을 다른 방식으로 시도하며, 50대의 내가 겪었던 고통을 더 넓은 이해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잘못은 비판하되 과거를 살아낸 자기 존재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이해가 언제나 자기 정당화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도 경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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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삶을 아름다운 성장의 서사로만 재구성한다면 과거의 실패와 타인에게 끼친 상처는 쉽게 지워집니다. 진정한 자기 해석은 과거를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까지 책임 있게 인수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작업이어야 합니다. 50년 전의 소년이 먹던 수제비와 오늘 63세의 내가 먹는 수제비는 같지 않습니다. 할머니도 다르고, 세월도 다르고, 그 수제비를 먹는 나 역시 달라졌습니다. 그런데도 한 숟가락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은 과거가 현재와 단절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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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비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내 존재의 역사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소년의 시간이 오늘의 나에게 말을 걸어온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소년의 삶을 현재의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63세의 나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생성하는 존재다. 쾅! 쾅!" 다만 하이데거의 언어로 더욱 엄밀하게 표현한다면, 인간은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끊임없이 문제가 되는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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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앞질러 살아가지만, 그 가능성은 언제나 유한합니다. 그러므로 과거는 나를 구성하지만 나를 완결하지는 않습니다. 과거를 해체한다는 것은 지나온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과거를 보존한다는 것은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않지만, 과거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그 유산에 응답할 자유까지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2026.10.20.tue.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