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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景福宮, 사적 제117호)은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왕조 제일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으로 태조 4년(1395)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처음으로 세운 궁궐이다.
궁궐의 이름은 정도전이『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경회루 남측의 궐내각사 권역에 집현전을 짓고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또한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궐의 서북쪽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륜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경복궁은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지고,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 궁궐의 대부분을 훼손함에 따라 점차 궁궐의 제 모습을 잃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궁궐 안에 남아있던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제수각·함화당·집경당·향원정·집옥재·협길당 등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전해 오던 도성(都城)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궐의 왼쪽(동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서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제도인데, 이러한 형식은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으로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법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경복궁 근정전(景福宮 勤政殿, 국보 제223호)은 조선시대 법궁인 경복궁의 중심 건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태조 4년(1395)에 지었으며, 정종과 세종을 비롯한 조선 전기의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하기도 하였다. ‘근정’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도전이 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 다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5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여진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며 그 형태가 화려한 모습을 띠고 있다. 건물의 기단인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기둥에 훌륭한 솜씨로 12지신상을 비롯한 동물상들을 조각해 놓았다.
건물 내부는 아래·위가 트인 통층으로 뒷편 가운데에 임금의 자리인 어좌가 있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도’병풍을 놓았고, 위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몄다.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길 좌우에는 문무백관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햇빛을 가릴 때 사용하였던 차일 고리가 앞마당에 남아 있다. 근정문 주변으로는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근정전은 조선 중기 이후 세련미를 잃어가던 수법을 가다듬어 완성시킨 왕궁의 위엄을 갖춘 웅장한 궁궐건축이다.
경복궁 수정전(景福宮 修政殿, 보물 제1760호)은 근정전 서측에 있는 건물로써, 북쪽으로는 경회루가 자리 잡고 있다. 수정전이 있는 권역은 세종 연간에는 학문을 연구하며, 왕에게 주요 정책을 자문하고 건의하던 기관으로 한글을 창제하는 등 문치의 본산이었던 집현전이 있던 궐내각사의 지역에 해당하며, 동쪽으로 사정전의 왕의 영역과 신하들의 영역이 만나는 접점인 이곳에 궐내의 관청인 각사들이 자리 잡고 있다.
수정전은 고종 때 중건되어 잠시 왕의 편전으로도 사용되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대한제국의 군국기무처를 여기에 두고, 이후 내각청사로 사용되었다. 4면에는 행각과 남쪽의 외행각이 일곽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일제 때 훼철되고 현재는 본건물인 수정전만 남아있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4년(1867)에 근정전, 사정전, 경회루 등과 함께 중건되었다. 중건 당시에는 4면의 행각과 남쪽으로 외행각이 있었으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내부 벽체와 창호가 훼철되었고, 그 일곽 또한 1915년 가을에 조선총독부를 세우고자 하는 일제의 전초작업으로 시정 5주년 기념 사업인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모두 헐리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정’이란 의미는 ‘정사를 잘 수행함’이란 의미로 현판글씨는 중건 당시 조석원이 썼으며, 조선 후기 문신으로 도승지에까지 이르렀으며, 글씨에 조예가 깊었다.
조선시대 후기의 문헌인 궁궐지에는 수정전과 이에 부속된 행각의 명칭, 규모, 양식, 주칸 등이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며, 정면 10칸, 측면 4칸의 비교적 긴 장대한 건물로 남향으로 앉혀진 1고주 7량가의 이익공양식 단층 팔작지붕이다.
수정전 정면에는 네 벌대의 넓은 월대가 조성되어 있다. 월대에는 정면에 계단을 3곳 설치하였고, 중앙의 계단은 소맷돌을 두어 좌우계단과 차별화시켰으며, 이것은 임금의 출입이 자주 있는 편전임을 의미한다. 다섯 벌대나 되는 높은 건물기단 위에는 4각 초석위에 각기둥을 세우고 띠살창 분합문과 빗살창교창을 사방 전면으로 둘러 설치하였다. 높은 기단의 좌우 측면에는 불을 넣는 아궁이를 설치하여 온돌방을 두었다. 평면은 정면10칸·측면4칸으로 앞면 퇴칸 주간을 넓게 하여 10칸의 도리방향을 모두 대청으로 터져있으며 좌우 및 후면의 퇴칸이 연결되어 내부 회랑 역할을 한다. 공포는 길게 뻗은 쇠서의 이익공 위에 소로를 높고 양봉한 보머리를 받으며 주심도리를 받아준다. 지붕의 용마루 및 내림마루엔 양성을 하고 취두·잡상을 배열했다.
건물의 짜임이 견고하고 창의력있는 구조다. 수정전은 외관, 가구부재 등 전반적으로 양호한 상태로 중건 당시의 모습이 잘 유지되어 있다. 수정전은 근정전 서편의 궐내각사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로 역사적, 건축적 가치가 높다.
경복궁 경회루(景福宮 慶會樓, 국보 제224호)는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워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앞면 7칸·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누각건물에서 많이 보이는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태종 때 처음 지어진 경회루는 성종 때 고쳐지으면서 누각의 돌기둥을 화려하게 용의 문양을 조각하였다고 전해지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고종대에 다시 지으면서 지금과 같이 간결하게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안쪽에는 둥근기둥을 세웠다. 1층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2층 바닥은 마루를 깔았는데, 마루의 높이를 3단으로 각각 달리하여 지위에 따라 맞는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경복궁 경회루는 우리 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 누각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경복궁 사정전(景福宮 思政殿, 보물 제1759호)은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이 있고, 그 뒤로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이 자리 잡고 있다. 사정전은 왕이 평상시 거처하며 정사를 보살피던 곳으로 근정전에서 뒤편으로 사정문을 지나면 정면에 위치하며, 사정전의 동측으로 만춘전과 서측으로 천추전이 있다.
사정전은 만춘전, 천추전과 더불어 편전으로서 정사를 보았던 곳으로 사정전에는 온돌이 없고 만춘전과 천추전에는 온돌이 있어 추운 겨울에는 만춘전과 천추전에서 정사를 보고 경연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정전의 정문은 근정전과 통하는 사정문인데 그 좌우에는 서쪽부터 천자문의 글자 순서를 따라 천자고~월자고까지 행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궁중의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하였다.
사정전은 경복궁 창건 당시인 태조 4년(1395)에 지어졌으며, 명종 8년(1553)에 불탄 뒤 재건했다. 그 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인해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과 궁문이 모두 소실 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고종 4년(1867)에 근정전, 경회루, 수정전 등과 함께 중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시정 5주년 기념으로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사정전은 박애관, 만춘전은 경비실, 천추전은 심사실 등으로 개조되어 사용되었으며, 그 후 6.25전쟁으로 만춘전이 파괴되었다가 1988년 다시 복원되었다. ‘사정’은 ‘선정을 생각하다‘라는 뜻으로 정도전이 작명하였으며,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이를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를 잃게 되는 것이므로 왕으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여 정치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사정전의 현판은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이조판서로 있던 조석우가 썼다.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어칸을 협칸보다 2배 가까운 길이로 넓게 잡았고, 측면에서도 중앙칸을 훨씬 크게 한 것이 특징이다. 기단은 장대석 3벌대 기단이고, 어칸에 소맷돌이 있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며, 초석은 원형초석이다. 가구는 2고주 7량가의 다포식이며, 단면이 굵은 창방 뺄목은 운궁처리로 하여 평방을 받고 있다. 평주에서도 퇴보의 뺄목을 안초공으로 연결하여 창방과 평방을 감싸게 되어서 화려한 감각을 주게 된다. 공포는 4면 모두 어칸에만 2개의 간포를 배설하고, 협칸, 퇴칸은 1개를 설치하였다. 쇠서는 앙서로 처리하였고, 내부의 포작은 모두 화려하게 운궁초각하였다. 천정은 우물천정에 단청문양이 화려하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에는 양성을 하고 취두·용두·잡상을 배열했다. 창호는 4면 모두 띠살창 4분합문으로 하고, 그 위에 교창을 설치하였다. 바닥은 우물마루에 내부칸막이 시설 없이 하나의 공간이지만 중앙에 어좌를 설치하기 위한 2개 고주를 세워 상부에 벽화가 있는 벽체가 구성되어 있다.
사정전은 왕이 평소에 거처하며 정무를 수행하는 편전으로 정전인 근정전과 함께 치조의 중요한 건물이다. 고종 4년(1867)에 중건한 당시의 외관이 잘 남아있고, 편전의 위엄을 지닌 공포짜임을 비롯한 구조양식 전반과 기능 충족을 위한 공간구성 등의 면모를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 건축적으로 보존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경복궁 강녕전(景福宮 康寧殿)은 경복궁의 내전(內殿)이며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으로 평소 독서와 휴식을 취하고 침전(寢殿)으로 사용되고 때로는 신하들과 은밀한 정무를 보기도 했다. 1395년(태조 4)에 창건하고, 정도전(鄭道傳)이 건물 이름을 강녕전(康寧殿)이라고 지었다.
강녕은 오복(五福)의 하나로, 임금으로서 해야 할 이상적인 정치이념을 궁궐 건축에 반영한 유가(儒家)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강녕전의 동쪽 침전을 연생전(延生殿)이라고 지었고 서쪽 침전을 경성전(慶成殿)이라고 지었다. 강녕전은 임금의 높은 신분을 상징하기에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정면 11칸, 측면 5칸의 웅장한 목조건축물이며 4단의 기단이 설치되고 가운데에는 월대를 설치하였다.
경복궁 창건 때에 제후 3침 제도에 의해서, 연침(延寢) 강녕전과 그 오른쪽에 연길전 그 왼쪽에 경성전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경복궁 교태전(景福宮 交泰殿)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명부를 다스리던 정치적인 공간이자 일상생활을 하는 중궁전 또는 중전이라 불린다. 1440년(세종 22)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교태(交泰)의 뜻은 ‘천지, 음양이 잘 어울려 태평을 이룬다’이다. 주역(周易)의 64괘 중 태(泰)괘에서 따온 것인데 괘의 형상은 위로는 곤(坤)이고 아래는 건(乾)이 합쳐진 모양이다. 지천태(地天泰), 즉 하늘과 땅의 기운이 조화롭게 화합하여 만물이 생성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교태전의 규모는 정면 9칸 측면 5칸이며 장대석 4벌대로 기단을 쌓아 장방형의 큰 규모의 전각으로 지붕에는 강녕전과 같이 용마루가 없다. 우측에는 원길헌(元吉軒)이 위치하고, 좌측에 함홍각(含弘閣), 동북쪽에 건순각(健順閣)이 부속 건물로 연결되어 있다.
양의문(兩儀門)은 양쪽의 붉은 벽돌로 된 굴뚝이 있는데 이것은 강녕전의 온돌과 연결된 굴뚝을 뒤로 빼서 강녕전과 교태전 사이에 굴뚝을 놓을 만한 공간이 마땅치 않은데다가 온돌과 굴뚝과의 거리를 멀리하면 화기를 오래 담아 난방 효과를 더 볼 수 있을 것이다.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져 있다.
양의문은 강녕전의 대문인 향오문(嚮五門)과 특히 다른 점은 향오문은 두 짝으로 둔중한 데 비해 양의문은 여섯 짝으로 가볍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교태전은 여인들의 처소였으므로 여인들이 힘 들이지 않고 여닫을 수 있도록 배려한 조상들의 마음 씀씀이를 읽을 수 있다.
교태전 뒤에는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여인들을 위해 경회루의 못을 파서 나온 흙으로 쌓아서 4계단 정원이라 화계 아미산(蛾嵋山)이라는 왕비의 후원이 있다.
경복궁 아미산 굴뚝(景福宮 峨嵋山 굴뚝, 보물 제811호)은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새로 만든 것이다.
아미산(峨嵋山)은 중국 사천성에 있는 불교와 도교의 성지다. 아미(蛾嵋)는 ‘아름다운 눈썹’이라는 뜻으로 왕비의 후원으로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계단마다 괴석, 방형석지, 연꽃모양 수조 등을 사철 꽃과 어울리게 설치하였고 ‘노을이 내려 앉은 연못’ 이라는 뜻의 낙하담(落霞潭), ‘달을 머금은 연못’이라는 뜻의 함월지(涵月池)가 있다.
아미산 굴뚝(峨嵋山 굴뚝)은 계단식 화단과 땅 밑으로 연기 길을 내어 후원으로 뽑아낸 꽃무늬가 들어간 붉은 색의 4개 굴뚝이 6각형 모양으로 서있다. 굴뚝 벽에는 덩굴무늬,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따위의 무늬를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각 무늬는 벽돌을 구워 배열하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를 상징하는 무늬, 화마와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이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위쪽 부분은 목조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는 작은 창을 설치하였다.
아미산 굴뚝은 굴뚝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 형태와 그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 장식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경복궁 동궁(景福宮 東宮)은 왕세자와 세자빈의 거처이다. 왕세자는 새로 떠오르는 해처럼 왕위를 이을 사람이기에 내전의 동쪽에 거처를 배치하고 동쪽에 있는 세자의 궁이라는 의미로 동궁전(東宮殿)이라고도 불렀으며 세자를 동궁마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회랑을 지나 우측에 위치한다.
경복궁 자선당(景福宮 資善堂)은 세종(世宗) 9년인 1427년 세자인 문종(文宗)의 거처로 건립되었으며 동궁의 서쪽에 위치한 내전으로 세자와 세자빈이 함께 거처하는 동궁(東宮)이다. 일제강점기에 나라 밖 여행을 다녀온 수난의 아픔을 간직한 전각이다. 자선(資善)은 '자비로운 성품을 기르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복궁 비현각(景福宮 丕顯閣)은 자선당과 나란히 우측(동편)에 위치한 외전으로 세자가 공부를 하며 업무를 보는 전각이다. 세종(世宗) 때 건립되었으며 당시 왕세자였던 문종(文宗)의 업무 공간으로 건립한 것이다. 인종(仁宗)도 세자 때 이곳에서 거처했다. 비현(丕顯)이란 '크게 밝힌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면6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이며 정면 3칸은 개방하였고 온돌을 깔았다.
경복궁(景福宮, 사적 제117호)의 소주방(燒廚房)은 조선시대 임금의 수라와 궁중의 잔치음식을 준비하던 궁중의 부엌으로 1395년(태조 4년)에 건복궁 창건 때 건립되었다.
소주방은 임금의 수라를 만들던 내소주방(內燒廚房), 궁중의 잔치, 고사 음식을 차리던 외소주방(外燒廚房), 임금의 간식인 다식, 죽, 과일, 떡 등을 차리던 생물방(生物房)의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조선 태조 4년(1395) 경복궁 창건 때 건립되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고종 4년(1867) 경복궁 중건 시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그러나 1915년 일제가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개최하는 과정에서 경복궁의 여러 전각들과 함께 헐려 없어졌다. 문화재청은 2004~2005년 실시된 건물터 발굴조사와 조선왕조실록,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궁궐지(宮闕志), 왕궁사(王宮史), 북궐도형(北闕圖形) 등 고문헌 고증을 거쳐 2011년 9월부터 2015년 1월까지 약 4년에 걸쳐 건물 17동을 복원했다.
경복궁 자경전(景福宮 慈慶殿. 보물 제809호)은 조선시대 법궁인 경복궁(景福宮) 안에 남아 있는 유일한 대비전으로 1867년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자미당 터에 고종(高宗)의 양어머니인 조대비(趙大妃, 神貞翼王后)를 위해 지은 대비전으로서 중건 이후 화재로 소실됨에 따라 고종 25년(1888)에 44칸의 규모로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헌종(24대)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씨는 고종(26대)의 즉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신정왕후의 거처를 궐 안에서 가장 화려하고 세심하게 만들어 은혜에 보답했다. ‘자경(慈慶)’이란 이름은 정조가 즉위하면서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궁에 자경당을 지은데서 비롯되었다. 그 의미는 왕이 어머니나 할머니 등 왕실의 안 어른께 경사가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자경전은 대비가 일상생활(日常生活)을 하는 침전(寢殿)으로 건물로, 총 44칸 규모이다.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서북쪽에 복안당(福安堂)이라는 침실(寢室)을 두고 중앙(中央)에는 중심 건물인 자경전을 두었다. 또, 동남쪽(東南向)에는 다락집인 청연루(淸燕樓)를 두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여기에 12칸의 협경당(協慶堂)이 붙어 있다.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굴뚝(景福宮 慈慶殿 十長生굴뚝. 보물 제810호)은 경복궁에 자경전을 1867년 다시 지으면서 자미당 터에 고종의 양어머니인 조대비(신정왕후)를 위해 지었으나, 불에 타버려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네모 형태로, 가운데는 동식물 무늬인 십장생을 새겨 넣었다. 십장생 무늬는 가장 한국적인 무늬로 알려졌는데, 이것은 조대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굴뚝은 벽돌을 쌓아 만들었고 그 위에 기와지붕을 얹었으며 지붕 위에는 연기를 빠지게 하는 시설을 해 놓았다.
담장의 한 면을 한 단 앞으로 돌출시켜 전벽돌로 굴뚝을 만들었으며 굴뚝 벽면 중앙에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십장생(十長生) 무늬와 당초문, 그리고 박쥐문을 정교하게 새겨 조형전(造形塼)으로 만들어 배치한 사이에는 회(灰)를 발라 화면을 구성하여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조형미를 자랑한다. 무늬의 주제는 해, 산, 물, 구름, 바위, 소나무, 거북, 사슴, 학, 불로초, 포도, 대나무, 국화, 새, 연꽃 등이며 둘레에는 학, 나비, 불가사리, 박쥐, 당초무늬, 등의 무늬전을 배치하였다. 해, 바위, 거북 등 십장생은 장수(長壽), 포도는 자손의 번성, 박쥐는 부귀(富貴), 나비, 불가사리 등은 악귀(惡鬼)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으로 상징되고 있다. 굴뚝 윗부분 역시 조형전으로 목조 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꼭대기에는 10개의 연가(煙家)를 올려놓아 연기가 빠지도록 하였다.
자경전 십장생 굴뚝은 굴뚝이면서 장식적인 기능을 충실히 하고 꽃담장으로서의 조형미도 살려 조선시대 궁궐에 있는 굴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경복궁 향원정(景福宮 香遠亭, 보물 제1761호)은 향원정은 경복궁 북쪽 후원에 있는 향원지 내의 가운데 섬 위에 건립된 육각형의 정자이다. 향원지의 ‘향원(香遠)’은 ‘향기가 멀리 간다’는 뜻으로 북송대 학자 주돈이(1017∼1073)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에서 따온 말로서 왕이나 왕족들이 휴식하고 소요하던 침전의 후원으로 여기에는 향원지(香遠池)와 녹산(鹿山)등 원림 (苑林)공간이 된다.
향원정은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지으면서 그 건청궁 앞에 연못을 파서 가운데 섬을 만들고 세운 2층 정자로, 고종 4년(1867)부터 고종 10년(1873)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향원정으로 가는 섬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취향교라는 다리가 있으며, 남쪽에는 함화당, 집경당이 위치해 있다.
정자의 평면은 정육각형으로 아래·위층이 똑같은 크기이며,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으로 된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일층과 이층을 관통하는 육모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이층 기둥 위에 짜여지는데, 기둥 윗몸을 창방(昌枋)으로 결구하고 기둥 위에 주두(柱枓:대접받침)를 놓고 끝이 둥글게 초각(草刻)된 헛첨차를 놓았다. 일출목(一出目)의 행공첨차를 받치고, 다시 소로를 두어 외목도리(外目道里)밑의 장혀를 받친 물익공이다. 일층 평면은 바닥 주위로 평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고, 이층 바닥 주위로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사방둘레의 모든 칸에는 완자살창틀을 달았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육모지붕으로, 중앙의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중심점에 절병통(節甁桶)을 얹어 치장하였다.
향원지가 있던 곳에는 본래 세조 2년(1456)에 취로정(翠露亭)이란 정자를 짓고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세조실록」에 보인다. 향원지는 4,605㎡의 넓이의 방형인데, 모서리를 둥글게 조성한 방형의 연지에 연꽃과 수초가 자라고, 잉어 등 물고기가 살고 있다. 향원지의 수원(水源)은 북쪽 언덕 밑에 솟아나는 '열상진원(洌上眞源)'이라는 샘물이다.
경복궁 건청궁(景福宮 乾淸宮, 사적 제117호)은 경복궁에 1873년(고종 10) 고종(高宗)이 경복궁 중건을 마무리하면서 국가 재정이 아닌 왕의 개인 재산인 내탕금(內帑金)을 들여 경복궁의 북쪽 동산정원 녹산(鹿山)과 향원정(香遠亭) 사이 궁궐의 가장 깊숙한 곳에 지었다. 그 해에 고종은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기거 하면서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섭정(攝政)을 종식하고 친정(親征)을 선언하였는데, 이 때문에 건청궁 건립은 고종이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독립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기도 한다. 고종은 1884년부터 이곳에서 기거하면서 정무를 처리하였다.
경복궁(景福宮) 전각(殿閣)들 중 ‘궁(宮)’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은 건청궁(乾淸宮)이 유일하다. 건청궁은 고종을 위한 궁궐 안의 궁이었던 셈이다. 건축양식은 궁궐의 침전양식과는 달리 양반가옥 살림집을 응용한 크게 사랑채 장안당(長安堂)·안채 곤녕합(坤寧閤)·부속건물 복수당(福綏堂)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규모는 양반가옥 상한선인 99칸의 2.5배 되는 250칸이다. 건청궁이 건립된 지 3년이 지난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생활공간을 옮겼으며, 1885년에 다시 건청궁으로 돌아와 아관파천 때까지 10년간 줄곳 이곳에서 지냈다. 한편 건청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발전기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이 가설된 곳이다. 장안당 서쪽에는 각감청(閣監廳)이 있고, 남쪽에는 연못과 그 안에 만들어진 섬과 향원정(香遠亭, 보물 제1761호)이 있다.
경복궁 집옥재(景福宮 集玉齋, 사적 제117호)는 조선 고종이 서재(書齋)로 사용하던 곳으로,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안에 있다. 신무문(神武門) 동쪽에 있으며, 왼쪽에 팔우정(八隅亭), 오른쪽에 협길당(協吉堂), 이 있다.
‘집옥(集玉)’은 ‘옥같이 귀한 보배를 모은다’는 뜻이다. 집옥재는 수많은 도서를 모아 놓은 서재의 기능을 하였으므로 ‘옥처럼 귀한 서책을 모아둔 집’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원래는 팔우정·협길당과 함께 창덕궁(昌德宮) 함녕전(咸寧殿)의 별당으로 지어졌으나, 1888년 고종이 거처를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함께 이전되었다.
집옥재(集玉齋)는 높은 기단 위에 세워진 정면 5간, 측면 3간의 단층 맞배집이며 다포(多包)집이다. 앞면의 퇴간은 향교(鄕校)나 대성전(大成殿) 등에서 볼 수 있는 기둥만으로 이루어진 개방된 형식이며 이 점은 고형(鼓形)인 초석(礎石) 세부에 여러 이형(異形) 장식물, 특히 박공마루 밑 지붕에 접근시켜 쌓은 전벽(塼壁) 등과 함께 중국 건물의 양식을 따른 이식(異式)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정면의 월대(月臺) 중앙에 놓인 계단에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서수상(瑞獸像)을 새겼다.
고종은 이곳에 선대 임금의 어진(御眞)을 봉안하고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이용하였다. 경복궁 내의 다른 전각들과는 달리 당시로서는 신식인 중국풍의 서양식으로 지은 것이 특징이며, 현판의 좌측에 서사자(書寫者)를 나타내는 ‘미원장(米元章)’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중국 북송(北宋) 때의 서예가 미불(米芾)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만들었다. 경복궁 태원전(景福宮 泰元殿, 사적 제117호)은 왕자 출신이 아니었던 고종(高宗)이 부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함께 왕권 승계의 정통성 시비에 대응해야 했다. 그 일환으로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태원전(泰元殿)에 역대 임금의 초상인 어진(御眞)을 모심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려 지은 건물이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두는 곳이었고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弑害)되자 시신을 이곳에 안치하였다.
태원전(泰元殿)은 내삼문인 경안문(景安門)을 통해 들어서면 복도를 통하여 들 수 있다. 복도각은 혼백이 지나는 길이기도 하다. 왕과 왕비가 죽으면 관을 모시는 빈전(殯殿)으로 문경전(文慶殿)은 위폐(僞幣)를 모시는 혼전(魂殿)으로 건립되었다. 교외에 마련된 산릉(山陵)에 시신(屍身)과 관(館)을 묻은 후에는 신주(神主)를 모셔 정해진 장례 기간을 치룬 후에 종묘(宗廟)로 신위(神位)를 모시게 된다. 태원전(泰元殿)에는 국상(國喪) 때 의례용(儀禮用) 건물인 영사재(永思齋)와 공묵재(恭默齋)가 있다. 태원전 일원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 이곳은 청와대가 가깝다는 이유에서 5·16쿠테타 이후 청와대 경호부대가 들어섰으며, 1979년 이른바 ‘경복궁 모의’를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2006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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