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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section_desc fst">
<H4 class="tit_section" id="36115733">신돈의 등장 </H4>
<P class="desc_section fst">즉위한 이래로 내우외환을 잘 수습하고 주권회복과 국정쇄신에 온 힘을 기울인 공민왕은 말년에
이르러 신돈이란 승려를 만나면서 또 한 차례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공민왕의 개혁 정치는 신돈의 실각과 함께 그만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P>
<P class="desc_section">신돈은 영산 출신으로 그의 어머니는 계성현(영산) 옥천사의 여종이었다. 이러한 출신배경 탓에 신돈은
어려서부터 중이 되었는데 원래 이름은 신돈이 아니라 편조였다. 워낙 천한 출신이었던 신돈은 중들 틈에도 끼지 못하고 그저 산방으로 겉도는
신세였다. 그가 개경에 온 것이 언제인지, 또한 어떤 경위로 왕실과 접촉하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가 공민왕을 처음 만나게 된
시기는 1358년이었다. 이때 공민왕은 유학자 중심의 관료 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불교 세력을 통하여 제2의 개혁 정치를 펼치려던 중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공민왕의 계획에 적합한 인물이 바로 신돈이었다.</P>
<P class="desc_section">신돈의 등용에 대해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한다. 공민왕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어떤 사람이
칼을 들고 왕을 죽이려 했다. 그런데 때마침 한 스님이 달려와 왕을 구해주었다. 공민왕이 꿈을 꾸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원명이 신돈을
소개했다. 신돈의 모습이 꿈에서 본 스님의 모습을 쏙 빼어 닮았다. 왕은 신돈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P>
<P class="desc_section">“전하, 소승과 전하 사이는 전생에 깊은 인연이 있나 보옵니다.”</P>
<P class="desc_section">이때부터 공민왕은 편조(신돈) 스님을 자주 불렀다. 편조의 말을 들은 공민왕은 심기가 편해지고 마음이
즐거웠다. 편조는 매우 총명하고 영리했다.</P>
<P class="desc_section">“나는 모든 것이 다 싫소. 정치도 백성도 다 싫소. 차라리 훌훌 털어버리고 산천경계나 즐기며
그림이나 그리고 싶소.”</P>
<P class="desc_section">“하시고 싶은 대로 하소서. 임금이라고 해서 자신의 낙을 가지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산수 좋은
곳에서 그림을 그리시는 것도 좋을 것이옵니다.”</P>
<P class="desc_section">다른 신하들은 임금이 그런 말을 하면 심기를 바로 하라고 야단법석을 피웠다. 그런데 편조, 즉 신돈은
달랐다. 임금도 즐길 권리가 있다며 공민왕의 비위를 맞추었다.</P>
<P class="desc_section">공민왕의 총애를 한 몸에 입은 신돈은 청한거사라는 호와 사부의 직책을 받고 국정 전반에 걸쳐 자문을
받을 만큼 권세를 얻었다. 신돈의 등장은 그해 2월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가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났던 것과 관련이 있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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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thumb_section other_thumb">
<DIV class="figure_thumb" style="width: 659px;"><A class="link_figure" href="/multimedia/63_17900061_i1.jpg"
target="_blank"><IMG width="659" height="540" class="img_thumb" alt="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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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IV> <!-- //figure_thumb -->
<DIV class="info_thumb" style="width: 657px;"><STRONG>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STR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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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P class="desc_section">공민왕의 노국대장공주에 대한 추모는 그 유례가 드물 만큼 너무도 지나친 것이었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손수 공주의 진영을 그려놓고 밤이건 낮이건 간에 마주보고 앉아 애통해 했고 그 뒤 3년 동안이나 육식을 피할 정도였다.
부인을 잃고 상심해하던 공민왕에게 언변 좋은 신돈이 접근하기란 어느 때보다도 쉬웠던 것이다.</P>
<P class="desc_section">더욱이 공민왕은 전부터 국정의 혁신을 바라고 있었으나 재상들과 뜻이 맞지 않자 새로운 인물을 찾고
있던 터였다. 때마침 신승처럼 보이는 신돈이 나타나자 공민왕은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며 그에게 국정을 맡겼다.</P>
<P class="desc_section">신돈이 권력을 잡자 간신배들은 그에게 아부하기 시작했다. 신돈은 밀직 김란의 집에서 기숙하고 있었는데
출세욕이 남달랐던 김란이 신돈에게 처녀 두 명을 바쳐 아내로 삼게 했다. 그것을 안 최영이 김란을 크게 나무랐는데 이 말을 전해들은 신돈은
최영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렇지 않아도 구세력들을 축출하여 자신의 세력기반을 굳히려던 신돈은 곧장 이 일을 공민왕에게 참소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한 정계개편을 짰다.</P>
<P class="desc_section">신돈은 우선 최영을 계림윤으로 좌천시키고 자기 세력들을 요직에 앉혔다. 이후 신돈의 위세는 더욱
높아져 그의 마음에 든 무리는 요직에 배치되고 조금이라도 미움을 받은 사람은 쫓겨났다. 그런 가운데 공민왕은 신돈을 더욱 신임하여 진평후에
봉하고 무려 50글자에 해당하는 최고 관직에 임명하였다. 마침내 최고 관직까지 오른 신돈은 편조라는 이름을 버리고 ‘신돈’이란 이름으로
개명했다.</P>
<P class="desc_section">《고려사》 신돈전에는 공민왕이 신돈을 신임한 경위를 이렇게 전한다.</P>
<DIV class="wrap_quote">
<BLOCKQUOTE class="desc_quote">공민왕이 오랜 기간 왕위에 있으면서 재상들에 대해 만족을 느끼지 못하였다. 재상대족들은
친족의 뿌리가 얽혀 서로 엄폐하고 있고 초야신진은 명망을 얻어 귀하게 되면 자기 가문이 한미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대족과 혼사하여 처음의 뜻을
모두 버린다. 게다가 유생들은 과단성이 적고 기백이 없으며 문생이다 좌주다 동년이다 하면서 서로 당파가 되어 사정에 끌리니 이상 세 부류는 모두
쓸 수 없다고 공민왕은 생각하였다. 이에 세상을 떠나 초연한 인물을 얻어 그를 등용시킴으로써 이러한 폐해를 혁파할 것을 생각하던 차에 신돈을
보자 그가 적임자임을 알았다고 한다. </BLOCKQUOTE></DIV>
<P class="desc_section">그러나 신돈은 공민왕이 꿈에 본 그런 신승이 아니었다. 그는 공민왕에게 “참소를 믿지 않아야 세상을
복되게 할 것입니다.”라며 절대적인 신임을 강요하였고, 심지어는 “스승이 나를 구하고 내가 스승을 구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의 말을 듣고
의혹을 품지 않을 것이니 오늘의 이 맹세는 불천이 증명하리라.” 하는 서약서까지 쓰게 만들었다.</P>
<P class="desc_section">때마침 항간에는 ‘진사(辰巳)에 성인이 나온다.’라는 참설이 돌고 있었는데, 신돈은 자기가 개경에
다시 나타난 1364년이 갑진년이요, 이듬해인 1365년이 을사년이니 “참설에서 말하는 성인이란 것이 내가 아니면 또 누구겠는가.”라며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다.</P>
<P class="desc_section">이렇듯 입으로는 성인인 척하면서 한편으로는 더욱 더 세력 확장에만 급급하여 남을 중상모략하고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또 양가의 부녀자들을 갖은 구실로 유인하여 음행을 가하는 등 신돈의 횡포와 부정은 날로 심해가기만 했다. 신돈은
자기 집에서는 온갖 술과 고기를 맘대로 먹고 여자를 밝히다가도 공민왕을 대하면 갑자기 돌변하여 좋은 말만 하고 채소나 과일만 먹으며 술 대신
차를 마실 뿐이었다.</P>
<P class="desc_section">신돈의 전횡이 날로 심해지자 당대의 유학자 이원충(李遠衷)이 노골적으로 신돈을 비판했다.</P>
<P class="desc_section">“그의 주색이 도에 넘치고 있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간의 빈대가 남아나지 않는다더니 신돈이 그
짝이다.”</P>
<P class="desc_section">이 말을 들은 신돈은 이원충마저 내몰아 버렸다.</P>
<P class="desc_section">신돈의 극무도한 행패에 드디어 간관들이 일어나 그를 탄핵했다. 그 가운데 엄부흥과 이존오는 여러 차례
모여 신돈 제거의 밀담을 나누었다.</P>
<P class="desc_section">“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소이다.”</P>
<P class="desc_section">“그렇다고 함부로 다룰 수는 없어요. 상감의 신임이 철석같지 않소.”</P>
<P class="desc_section">“그자의 패행은 금수보다 못하오. 양기를 북돋운다고 백마를 잡아 그 신(腎)을 회쳐 먹는다
하오.”</P>
<P class="desc_section">“그뿐만이 아니외다. 지렁이도 산 채로 먹는다지를 않소.”</P>
<P class="desc_section">“놈에겐 이상한 버릇이 있소. 사냥은 싫어하고 개나 매를 보면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떤답니다.”</P>
<P class="desc_section">“그놈은 아마 늙은 여우가 환퇴한 놈이 아닐는지요.”</P>
<P class="desc_section">이존오는 죽을 각오로 공민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공민왕은 상소문을 불에 태워버리고 화를 냈다.</P>
<P class="desc_section">이후에도 신돈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사치와 향락에 젖어들며 권세를 누렸는데 급기야
노국대장공주의 정릉에 재실을 짓는다며 덕릉(충선왕릉)의 나무를 거의 다 베어도 누구 하나 반대하지 못하였다. 또한 옷차림이나 생활에서도 왕
못지않아 세인의 눈을 놀라게 했고, 그의 오만불손한 태도 또한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신돈은 공민왕과 마치 허물없는 친구처럼
행동하였으며 선왕이나 왕후의 능에 배알할 때 백관이 모두 왕을 따라 무릎을 꿇고 절을 해도 신돈만은 홀로 우뚝 서 있을
정도였다.</P></DIV><!-- //section_desc -->
<DIV class="section_desc ">
<H4 class="tit_section" id="36115765">성인인가, 요승인가 </H4>
<P class="desc_section fst">그런 가운데 신돈은 백성들에게는 성인으로 추앙받고 귀족들에게는 요승으로 각인되는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앞서 원종과 충렬왕 때에도 잠깐 설치된 일이 있으나 번번이 실적을 올리지 못하고 말았던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스스로 판사가 되어
토지 제도와 노비 제도를 혁신하려 한 것이다. 이때 신돈은 서울은 15일, 지방은 40일의 기한을 주고 그동안 권세가와 호족들이 불법으로
탈취했던 전민(田民)을 원주인에게 돌려주게 했다. 또한 양민이 되기를 호소하는 천민이나 노예는 모두 그 소원을 들어주었으므로 백성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에 권문세가는 신돈의 처사에 대해 격분했으나 노비의 신분에서 해방된 자들은 신돈을 ‘성인’이라고까지 찬양하였다.</P>
<P class="desc_section">신돈은 그의 부모와 같은 천인들로부터 인심을 얻었지만, 그의 행동은 날이 갈수록 점입가경이었다.
신돈은 부녀자의 송사가 있을 때 용모가 괜찮으면 겉으로 불쌍하게 여기는 척하고 간음한 다음 송사에 이기게 해 주었다. 이 때문에 심지어 신돈을
위하여 화장까지 하는 과부가 있었고 여알(女謁, 여자가 신돈을 찾아가는 것)이 크게 성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신돈의 위세가 높아가자 백관들은
아예 궁궐로 가지 않고 그의 집에 출근하여 국사를 논의할 정도였다.</P>
<P class="desc_section">신돈의 세력이 하늘을 찌르자 지도첨의 오인택 등은 신돈을 몰아낼 계획을 세웠고 원로 중신인 이제현도
“신돈의 골상은 옛날의 흉인과 유사하니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라고 왕에게 간청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인택은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어 죽임을
당했고 이제현은 간신히 죽음은 모면했으나 그의 문도들이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는 화를 당했다. 당시 신돈은 이제현의 문도들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과거시험 자체를 아예 폐지시켜 버렸는데 이 때문에 제사를 주관하는 관청에서는 소지나 축문 한 장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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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thumb_section other_thumb">
<DIV class="figure_thumb" style="width: 413px;"><A class="link_figure" href="/multimedia/63_17900061_i2.jpg"
target="_blank"><IMG width="413" height="800" class="img_thumb" alt="이제현" src="http://t1.daumcdn.net/thumb/R659x0/?fname=http%3A%2F%2Ft1.daumcdn.net%2Fencyclop%2Fm63%2Fq9hZuZadXnUet2tCVoLD8ME0WR5kRo0FSQYbxUXq%3Ft%3D147262472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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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IV> <!-- //figure_thumb -->
<DIV class="info_thumb" style="width: 411px;"><STRONG>이제현</STRONG>
</DIV><!-- //info_thumb --> </DIV> <!-- //thumb_section -->
</DIV>
<P class="desc_section">자신을 배척하려는 운동이 자꾸 일어나자 신돈은 불안감과 불쾌감에 사로잡혀 그들을 큰 장애물로 여기게
되었다. 때문에 신돈은 음양설을 내세워 공민왕에게 자주 천도를 권유하여 구귀족이 뿌리박힌 개경을 떠나려 했다. 이때 공민왕이 난색을 표하자
개경의 위치가 바다 가까이 있으므로 외적의 침입이 용이하기 때문에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듯 허물없는 사이였던 공민왕과 신돈에게도 마침내
사이가 멀어지는 날이 왔다.</P>
<P class="desc_section">공민왕은 사람을 잘 시기하는 성질이 있어 자기의 심복이라 할지라도 그 권세가 너무 강해지면 제거해
버리는 성향이 있었다. 신돈이 사심관 제도를 부활시켜 5도사심관이 되려는 야망을 키우자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던 공민왕의 생각도 달라지기
시작했다.</P>
<P class="desc_section">눈치 빠른 신돈은 임금이 자기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심복들과 논의했다.
기현·최사원·이춘부·김난 등이 머리를 맞대었다.</P>
<P class="desc_section">“임금이 나를 의심한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P>
<P class="desc_section">“한번 의심을 받으면 되돌리기 어렵습니다. 마침내 쫓겨나거나 죽고 말지요.”</P>
<P class="desc_section">“나를 죽인다?”</P>
<P class="desc_section">신돈은 심복들을 돌아보았다.</P>
<P class="desc_section">“그렇습니다. 종당에는 제거당합니다.”</P>
<P class="desc_section">“안될 말, 내가 먼저 선수를 쳐야지.”</P>
<P class="desc_section">“바로 그렇습니다.”</P>
<P class="desc_section">역모가 되어 버렸다.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한다는 명분이 찾아졌다. 그들은 역모를 은밀히 진행시켜
나갔다. 하지만 이 일은 곧 발각되었고 신돈은 체포되어 수원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참살당하고 말았다.</P>
<P class="desc_section">신돈은 죽기 직전까지도 자백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임금의 세서를 들먹였다.</P>
<P class="desc_section">“전에 대왕께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소승을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세서까지 써 주신 일을 벌써
잊으셨사옵니까? 오늘 소승을 닦달하시니 대왕의 맹세가 부끄럽지 않으신지요?”</P>
<P class="desc_section">공민왕은 쓴 웃음을 지었다.</P>
<P class="desc_section">“내 맹세보다도 네놈의 맹세부터 따져보자. 너는 부녀자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설법을 하여 부처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이지 결코 음행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너는 지금 두 명의 자식까지 낳지 않았느냐? 게다가 성 안에 갑옷 만드는
곳을 일곱 군데나 만들어 놨다니, 네 놈이 역모를 하려고 한 짓이 아니더냐? 이러고도 평생 고락을 함께 하자고 맹세한 임금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우길 터이냐!”</P>
<P class="desc_section">신돈이 죽은 뒤 대궐 뒤편 숲속에서 꼬리가 아홉 달린 늙은 여우가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전한다.</P>
<P class="desc_section">《고려사》는 신돈을 반역열전에 올리고 그의 인물됨을 이렇게 평했다.</P>
<P class="desc_section">“신돈은 사냥개를 무서워했으며 활 쏘고 사냥하는 것을 싫어했다. 또한 호색 음탕하여 매일 검정 닭과
흰 말을 잡아먹고 양기를 돋웠다. 당시 사람들이 이러한 신돈을 늙은 여우의 요정(妖精)이라고 했다.”</P>
<P class="desc_section">하지만 《고려사》가 조선 건국 세력에 의해 쓰인 역사서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신돈열전〉에 쓰인 갖은
신돈의 횡포는 어느 정도 각색되고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크다.</P></DIV>
[Daum백과] 신돈 – 이야기 고려왕조사, 정성희,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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