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4일 토요일 (홍)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1785년 베트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제가 된 뒤 그는 열정적으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베트남 교회의 박해 시기에 중추 역할을 하던 그는, 관헌들의 끈질긴 추적으로 체포되어 하노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55세였다.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안드레아 둥락 신부와 동료 순교자들을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입당송 갈라 6,14; 1코린 1,18 참조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으리라.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하느님의 힘이로다.
본기도 만물의 기원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느님, 성 안드레아와 동료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기까지 성자의 십자가를 충실히 따르게 하셨으니, 그들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가 형제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어 주님의 참된 자녀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말씀의 초대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임금은 이국땅에서 얻은 병으로 말미암아 숨을 거둔다. 전쟁의 패배로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수많은 유다인들을 박해하며 죽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다(제1독서). 사두가이들은 죽음 뒤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부활과 영생은 그들에게 어색한 가르침이었다. 그러기에 이상한 논리를 펼친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쉬운 설명으로 그들을 대하신다(복음).
제1독서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 때문에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죽어 가네.> ▥ 마카베오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6,1-13 그 무렵 1 안티오코스 임금은 내륙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페르시아에 있는 엘리마이스라는 성읍이 은과 금이 많기로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2 그 성읍의 신전은 무척 부유하였다. 거기에는 마케도니아 임금 필리포스의 아들로서 그리스의 첫 임금이 된 알렉산드로스가 남겨 놓은 금 방패와 가슴받이 갑옷과 무기도 있었다.
3 안티오코스는 그 성읍으로 가서 그곳을 점령하고 약탈하려 하였으나, 그 계획이 성읍 주민들에게 알려지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4 그들이 그와 맞서 싸우니 오히려 그가 달아나게 되었다. 그는 크게 실망하며 그곳을 떠나 바빌론으로 향하였다.
5 그런데 어떤 사람이 페르시아로 안티오코스를 찾아와서, 유다 땅으로 갔던 군대가 패배하였다고 보고하였다. 6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앞장서 나아갔던 리시아스가 유다인들 앞에서 패배하여 도망치고, 유다인들이 아군을 무찌르고 빼앗은 무기와 병사와 많은 전리품으로 더욱 강력해졌다는 것이다. 7 또 유다인들이 안티오코스가 예루살렘 제단 위에 세웠던 역겨운 것을 부수어 버리고, 성소 둘레에 전처럼 높은 성벽을 쌓았으며, 그의 성읍인 벳 추르에도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8 이 말을 들은 임금은 깜짝 놀라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던 대로 일이 되지 않아 실망한 나머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9 그는 계속되는 큰 실망 때문에 오랫동안 누워 있다가 마침내 죽음이 닥친 것을 느꼈다. 10 그래서 그는 자기 벗들을 모두 불러 놓고 말하였다.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 11 나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네. ‘도대체 내가 이 무슨 역경에 빠졌단 말인가? 내가 이 무슨 물살에 휘말렸단 말인가? 권력을 떨칠 때에는 나도 쓸모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었는데 …….’
12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그곳에 있는 금은 기물들을 다 빼앗았을뿐더러, 까닭 없이 유다 주민들을 없애 버리려고 군대를 보냈던 거야. 13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이국땅에서 죽어 가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2-3.4와 6.16과 19(◎ 15ㄷ 참조) ◎ 주님, 저는 주님의 구원으로 환호하오리다. ○ 주님, 제 마음 다하여 찬송하며, 주님의 기적들을 낱낱이 이야기하오리다. 지극히 높으신 분, 저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주님 이름에 찬미 노래 바치나이다. ◎ ○ 제 원수들이 뒤로 물러가고, 주님 앞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져 갔나이다. 주님께서는 민족들을 꾸짖으시고 악인을 멸하셨으며, 그들의 이름을 영영 지워 버리셨나이다. ◎ ○ 민족들은 자기들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지고, 자기들이 숨겨 놓은 그물에 제 발이 걸리도다. 그러나 가난한 이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가련한 이들의 희망은 영원토록 헛되지 않으리라. ◎
복음 환호송 2티모 1,10 참조 ◎ 알렐루야. ○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도다. ◎ 알렐루야.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7-40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베트남 순교 성인들의 수난을 공경하여 바치는 이 예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언제나 주님께 충실하게 하시며, 저희 자신을 주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영성체송 마태 5,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로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 하느님, 순교 성인들을 기억하여 하나의 빵을 함께 나누고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주님의 사랑 안에 한마음이 되게 하시며, 끝까지 견디어 영원한 상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오늘의 묵상 베트남에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1533년입니다. 중국으로 가던 유럽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는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이 임금으로 있었습니다. 1615년 예수회가 베트남에 정식으로 파견되면서 베트남의 선교는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베트남의 사도’로 불리는 예수회의 로드 신부는 20년을 베트남에 머물며 수만 명에게 세례를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박해는 산발적으로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프랑스는 박해를 끝낼 목적으로 베트남을 침공하였고, 1883년 마침내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음으로써 박해를 종식시켰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베트남의 수많은 순교자들 가운데 안드레아 둥락 신부를 비롯한 117위를 1988년 성인의 반열에 올렸습니다. 이 가운데 96위가 베트남 사람이었고, 21위가 다른 나라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성직자는 58명이었는데, 37명이 베트남 출신의 사제들이었습니다.
베트남 교회는 한국 교회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숱한 박해를 견디어 낸 것이 그렇고, 103위 순교 성인을 모시고 있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117위의 순교 성인을 모신 것도 그렇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둥락 안드레아 신부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세례명도 같고, 순교한 사연도 비슷합니다. 두 나라 순교자들에게 평화의 기도를 청합시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께 와서 일곱 형제와 한 명의 아내 이야기를 하며 그들의 부활에 대해 물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반박하고 부활이 없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파스칼의 도박’ 이야기가 생각난다. 파스칼은 생애가 끝나갈 무렵에 쓴 「팡세」에서 신을 믿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수학자답게 풀어나간다. A란 사람과 B란 사람이 있었다. A는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았다고 가정해 보자. 천국이 있다면 A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상급 또한 무한대로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죽어서 신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는 약간의 손해를 보게 된다. 한편 하느님이 없다고 믿은 B는 자기 욕망대로 살다 죽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그는 잘못 살아온 자신의 삶으로 인해 영원한 벌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자기 욕망대로 산 그만큼의 이익을 보게 된다. 도박꾼한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가능한 한 최고의 상금을 타면서도 손해는 가장 적게 보는 쪽에 거는 것이다. 공식에서 보듯 신의 존재를 놓고 도박할 경우 하느님 쪽에 걸어야 이긴다는 게 파스칼의 결론이다.
파스칼은 이런 말을 남겼다. “하느님이 있다는 쪽에 내기를 걸어라. 만일 이긴다면 무한한 행복을 얻을 수 있고 진다 해도 잃을 게 없지 않은가.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믿어라.”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미 예수께서 부활이요 생명임을 믿고 있으니 복 받은 사람이 틀림없다. 부활이 있다는 것에 내 믿음을 걸고 전 생애를 투자하자. 그러면 하루하루가 기쁘고 보람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정애경 수녀(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어제와 그제 이틀에 걸쳐서 우리 성당에서는 김장을 했습니다. 물론 본당의 행사 때 쓰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본당 구역 내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김장 김치를 나누기 위한 것이지요. 사실 배추 300포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것을 언제 다 김장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요즘 김장철이라 집집마다 김장을 해서 힘든데, 본당까지 와서 김장을 도울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저의 쓸데없는 걱정이었습니다. 40여분이 넘는 교우들이 오셔서 김장이 어제 오전으로 모두 끝났거든요.
날씨도 우리를 도와주더군요. 오전 내내 흐려서 무엇인가가 쏟아질 것 같더니만, 김장 끝내고 함께 점심을 하려고 하니까 비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만약 교우들이 적게 오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오후에는 비 맞으면서 힘들게 김장을 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오셔서 함께 했기에 좋은 날씨에 딱 맞춰서 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함께 한다는 것은 이렇게 좋습니다. 빨리 끝내는 것은 물론, 얼마나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지 모릅니다. 김장을 하는 내내 웃음이 멈추지 않았거든요. 서로 좋은 마음을 가지고서 함께 하는 것이기에, 작은 일 하나에도 크게 웃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함께 하는 것이 좋은데, 실제로 함께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아 보입니다. 4~50여명이 나오셔서 정말로 많이 나왔다고 이야기했지만, 본당 신자 수가 5,300명인 것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지요. 또한 본당의 많은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석하는 수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을 볼 때,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동의 핵심인 “사랑”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 되길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기에 함께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대한 불신과 미움 때문에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부활 논쟁을 말도 안 되는 비유를 들어서 하고 있는 것이지요.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함께 한다는 것이 공동체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을 위하는 것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제시한 ‘사랑의 길’과 정반대의 길로 힘들게 걸어갈 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세요.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여 말씀하시고 직접 당신의 몸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면, 분명히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정반대의 개념인 미움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면, 예수님과 떨어져서 홀로 힘들게 사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사용하지 않으면서 여분의 것으로 두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웃과 나누세요.
시장을 선점한 힘, 창의력(‘행복한 동행’ 중에서) 전 세계 전기면도기 시장의 47%를 차지하고 있는 필립스의 성공 비결은 ‘역발상의 창의력’이었다. 필립스만의 창의력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 준 것은 ‘면도기의 주 고객이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점이다.
면도는 남자의 점유물로 여겨진다. 그런데 술값은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면도기 살 돈은 아까워하는 게 남자들이다. 게다가 전기면도기는 습식면도기보다 비싸지 않은가. 이 부분을 고민하던 필립스는 마케팅 포인트를 뒤집었다. 다름 아닌 여자 고객의 심리를 겨냥한 것이다.
평소 짠순이처럼 굴던 여자들도 사랑하는 남자나 아버지의 선물을 살 때는 쉽게 지갑을 연다는 점을 타겟으로 삼았다. 그 결과 현재 필립스 면도기의 51%가 이른바 ‘선물용’으로 팔리고 있다.
LG전자가 러시아에 에어컨을 판 얘기도 재미있다. 모두들 러시아는 추운 나라이니 에어컨이 필요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LG전자는 이 같은 상식을 깨고 창의력의 승리를 일궈 냈다. 러시아 시장을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일단 LG전자는 시장 조사를 통해 1년에 45일 정도가 여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러시아 사람들이 추위에는 강해도 더위는 참지 못한다는 사실까지 간파했다.
그리고 즉각 판매 전략을 세우고 에어컨 수출에 나섰다. 그 결과, 러시아 에어컨 시장의 35% 이상을 LG전자가 차지하게 되었다.
<살아있음, 눈물겨운 환희>
장수(長壽)하는 것이 복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동 시대 사람들이 다 떠났는데도 불구하고 홀로 300살까지 살았다고 가정해보시죠.
나이가 300살 정도 되면 그 분은 사람이 아니라 유령일 것입니다. 숨만 붙어있다 뿐이지, 사람으로서의 형상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에너지가 완전히 다 빠져나간 미이라 같은 존재, 하루 온종일 누워있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식물인간일 것입니다.
동고동락했던 사람은 다 떠나고, 이제 손자의 손자, 그 손자의 또 손자들과 살아야만 하는 고독하기 그지없는 존재일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끼치는 민폐는 또 얼마나 큰 것이겠습니까?
눈만 뜨면 기자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도대체 저 인간은 언제 죽을 것인가, 잔뜩 기대하면서 해외토픽이나 기네스북에 실으려고 다들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쯤 되면 오래 산다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것입니다. 적당히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 그것은 자연의 순리이고, 서로를 위해서 좋은 일이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의미에서 아직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소규모 피정이 있어서 잠시 바닷가를 다녀왔습니다. 내려갈 때 일부러 바다를 낀 한적한 국도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한적한 국도를 타며 주변 경관을 살펴보니 이미 가을이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도로변에는 밤새 떨어진 낙엽들로 가득합니다. 잎사귀들을 떠나보낸 늦가을 나무들은 무척이나 외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무성했던 나뭇잎들을 떠나보낸 자리에 늦가을의 청명한 하늘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최근에 새로 생긴 큰 방조제 2개를 만나게 되는데, 그 크기가 어마어마합니다. 차를 갓길에 주차시켜놓고 방조제 위로 올라갔더니,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잔잔한 서해바다 위로 무수한 철새들이 군무를 추고 있었습니다. 파란 하늘아래 펼쳐지는 ‘특별 쇼’를 오랫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습니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마냥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절경 위에서 펼쳐지는 생명의 환희를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눈물겹도록 감사한 일이로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개똥밭을 굴러도 살아있는 것이 낫다. 죽은 정승보다 살아있는 강아지가 더 낫다는 말도 있습니다. 일단 살아있어야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단 목숨이 붙어있어야 회개할 수도 있고, 새 출발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살아있어야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습관처럼 눈을 뜨기에 당연한 일이려니 하고 생각하지만, 오늘 아침에만 해도 다시 눈뜨지 못하고 세상을 뜨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비록 고달프다 하더라도 살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눈물겨운 일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신비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눈부신 환희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아직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표시입니다. 이아침 우리가 다시 눈을 떴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다는 표시입니다.
오늘이란 선물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아직도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비를 거두지 않으셨다는 표현입니다.
우리 평생의 과제는 삶이 눈물겹게 소중한 것임을 아는 노력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아름다운 삶과 죽음"
“이스라엘아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주님만 바라고 살아가라.”(시편131,3).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하느님께 돌아가는 우리의 순례인생여정입니다. 이렇듯 분명한 출발지와 목적지인 하느님을 잊어 방황과 혼란이요 허무와 공허입니다. 생각 없이 살면 모르지만, 우리의 삶을 잘 들여다보면 하나하나의 삶이 좁은 문 인생임을 깨닫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이라는데,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좁은 문에 이어 온갖 시험에 온갖 고통의 좁은 문들이요, 취업, 결혼....., 그리고 마지막 좁은 문의 죽음입니다.
이 ‘좁은 문’의 삶의 여정에서 면제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좁은 문의 인생 여정이란 깨달음에서 솟아나는 이웃 동료들에 대한 무한한 연민의 마음입니다.
문제는 마지막 좁은 문의 죽음입니다. 언제 어디서 맞이할지 아무도 모르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최후의 시험이 죽음의 좁은 문입니다. 이래서 사막교부들은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고 충고하셨습니다. 흘러가는 세월, 다가오는 죽음 앞에 참으로 무력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하루의 삶을 마감하며 죽음과도 같은 잠을 앞두고 바치는 끝기도의 강복이 참 절실하게 마음에 닿습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잘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거룩한 죽음은 더 중요합니다. 시간과 죽음의 열쇠를 지고 계신 주님이시기에 거룩한 삶과 죽음을 위해 늘 기도해야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기고만장하던 에피파네스 임금, 후회와 더불어 허무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그곳에 있는 금은 기물들을 다 빼앗았을 뿐더러, 까닭 없이 유다 주민들을 없애 버리려고 군대를 보냈던 거야.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이국땅에서 죽어가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큰 실망을 안고 죽었고, 죽어가고 있으며, 또 죽어가겠는지요.
큰 절망의 어둠을 안고 죽어가는 죽음, 참 허무한 죽음입니다. 반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환한 희망을 안고, 마치 어느 시에서처럼 아름다운 세상 소풍 끝내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죽음이라면 얼마나 행복하겠는 지요.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바로 죽음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이라 천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들 눈에 죽음이지 하느님께는 모두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삶과 죽음을 넘어 하늘의 별들처럼 영원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얼마 전 묵상을 나눕니다. 밤새 반짝이던 별들, 태양 떠오르며 태양 빛 속에 사라져 보이지 않지만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듯이 우리의 죽음도 그런 것 아니겠나 하는 깨달음에서 쓴 ‘어둔 세상 환히 밝히는’ 이라는 글입니다.
밤새 영롱하게 반짝이며 어둔 세상 환히 밝히다가
“주님, 제 사명을 다했으니 이만 물러갑니다.” 고백한 후,
떠오르는 태양 빛 안으로 사라져 가는 아름다운 별들..
아마 아름다운 사람들의 삶과 죽음도 저러할 거다.
만추의 계절인 11월 위령성월, 모두를 떠나보내고 본질의 나목으로 남아 안식의 겨울을 기다리는 가을나무들, 아름다운 삶과 죽음에 대한 참 좋은 묵상감입니다. 날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모두 살아서 하느님 앞에서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복된 시간입니다. 아멘.(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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