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과 소련군이 사투를 벌이던 그 무렵, 전선과는 거리가 먼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선 세상에서 몇 사람 밖에 모르는 작전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른바 우라누스(러시아 말로 천왕성)작전의 계획이었다. 전선 주변으로 세상 누구도 모르게 대규모 병력이 포진되고 있었고, 그 병사들은 막연하게 어느 전선으로 가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첩보 활동도 활발해 져서 소련의 간첩망으로 스위스에서 활동 중이었던 루씨의 일원인 루돌프 뢰쓸러의 경우 반나치 인사이자 훗날 히틀러 암살 사건의 주모자 중의 하나로 지목되는 독일 해외정보국 아프베어의 보스인 카나리스 제독과의 정보거래로 막대한 독일군의 정보를 얻어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소련군은 독일군의 모든 활동을 소상히 알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19일 오전 6시 30분, 천왕성 작전의 개시를 알리는 첫 포성이 울리고 스탈린그라드를 둘러싼 독일군 방어선에 대한 소련군의 대대적인 반격작전이 시작되었다. 소련군의 첫 목표는 방어선 외곽에 위치해 있던 루마니아군이었다. 막강한 소련군의 공격에 루마니아군은 순식간에 패퇴했다. 루마니아군이 허망하게 무너진 것은 그들에겐 대전차화기가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부패한 군 조직으로 인해 사기가 매우 떨어져 있었다. 한 예로 어떤 독일장교는 루마니아군에는 장교용, 하사관용, 사병용으로 나뉘어진 배식이 있으며 그 수준은 이름에 딱 맞는 수준이라고 증언했었다. 동부전선 공군 영웅 한스 울리히 루델의 당시 일기에 따르면 무기까지 버리고 도망가는 루마니아군에 기관총을 퍼붓고 싶다고 했었지만 마침 가진 탄환이 없어 실행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무튼 소련군을 막기 위해 남쪽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제 48기갑군단 예하 소속 13기갑사단은 70여 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었지만 엔진이 어는 것을 막기위해 짚더미를 덮었던 곳에 쥐들이 몰려들어 엔진의 배선을 갉아먹는 바람에 군단 내에서도 출동 가능한 전차가 겨우 12대 뿐이었다. 이 사태로 인해 히틀러는 48기갑군단장 하임 장군과 13기갑사단장 후리베 장군을 해임했다. 결국 이런 빈 공백을 메우기 위해 당시로선 현대적인 장비-자주포와 돌격포-를 소유한 제 29기계화사단이 출동했다. 전투 24시간 동안 29 기계화사단은 폐결핵으로 죽어가고 있던 스탈린의 혁명 영웅 빅토르 볼스키 중장의 제 4탱크군단과 맞서 싸워 268대의 소련 전차 및 후속 부대를 괴멸시켰다. 하지만 사단의 손실은 전무했다. 이것은 현대화된 군대가 아무리 많은 적을 상대로 싸워도 쉽게 지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루마니아군 병사들.
천왕성 작전이 개시된 당일 정오 스탈린은 모스크바 방송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거리에도 다시 축제의 휴일이 올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이튿날인 11월 20일, 히틀러는 쏟아지는 전황을 들으면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할더 육군 참모총장은 히틀러와 무슨 조치라도 취해야 한다고 히틀러와 언쟁을 벌이다 해임당했고, 나중엔 히틀러의 반대 세력이란 이유로 수용소에 투옥된다. 그의 후임으론 자이츨러 대장이 임명되었다. 11월 22일, 히틀러는 만슈타인 대장을 B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원수로 진급시켰다. 또한 스탈린그라드의 6군에 대해선 그 어떠한 이동에 대해서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명령을 내렸다.
만약 6군이 포위되게 된다면 공중가교, 즉 공중보급을 해야 한다. 이것은 당시로선 거의 불가능했다. 제 8비행군단장 피비그 중장과 리히토펜, 그리고 만슈타인 등 많은 장성들이 공중보급은 불가능하다고 했으나 오직 단 한 사람-모든 독일 병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나치 인사 중의 하나이자 탐욕스런 돼지라는 별명이 붙은- 공군 총사령관 괴링은 공군은 그것을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었다. 사실 6군에 말뚝 박으라는 명령이 없었어도 6군은 이동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안전지대인 돈강 너머까진 45km가 넘는다. 그런데 6군에겐 이 거리를 돌파할 만한 연료와 전차가 부족했다. 6군은 그 때 30여 대의 전차만이 운용 가능했고, 수 십대가 넘는 전차들은 수리 부품이 없어 수리가 불가능했었다. 또한 6군 내의 공식적인 부상자만도 1만 5천 명이 넘었기 때문에 이들을 버리지 않는 한 일반 병사들도 이동이 불가능 했다.
더욱이 전력이 매우 약해진 6군이 허허벌판으로 나가면 소련군은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엄청난 전력을 그곳에 쏟아부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6군은 나폴레옹의 베레지야 참극-후퇴하던 프랑스군이 베레지야에서 러시아군에게 대패한 전투. 이 전투로 프랑스군은 괴멸한다.-이 전투로 이 다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선 차라리 이렇게 했어야지 그 많은 병사들이 치욕적인 삶을 살지 않았을 거란 의견을 내놓기도 했었다.
아무튼 11월 24일, 포위된 6군에 대해 첫 공중 보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첫 날 실적은 겨우 65톤. 6군의 절대 최소량 300톤에도 못미치는 양이었다. 하루 300톤의 물자를 보내기 위해선 하루 250대의 수송기가 출격해야 하며, 예비기체는 1천 여대, 조종사도 약 2천 명이 동원되어야 했다. 이에 따라 독일 내에 19대 밖에 없는 4발 엔진 폭격기 중 17대가 스탈린그라드에 투입되었다. 또한 북아프리카, 노르웨이, 프랑스 등 독일 공군이 있는 곳에선 조금씩 비행기들을 차출했다. 공군으로선 어떻해든 보급량을 늘려야 했다.
이에 따라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주변에 1천여 개의 대공포를 밀집시켰으며 이 대공포는 16세에서 35세에 이르는 여성들이 직접 조작했다. 이 대공포화와 소련 전투기들의 공격으로 인해 독일 수송기들은 5백여 대의 수송기와 1천 명의 유능한 조종사를 잃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훗날의 결과이다.
한편,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경루 폭풍 작전, 즉 6군 탈출 및 반격 계획을 수립할 것을 건의한다. 히틀러는 반격 작전은 수락하지만 6군의 철수는 보류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만슈타인으로선 히틀러에게 양보 받을 수 있는 것은 다 받았다고 봐야 했다. 12월 9일 18시 30분, 6군 사령부는 만슈타인에 의해 새로 개편된 돈 집단군 사령부로 부터 내일부로 구출 작전이 시작된다는 전보를 받았다. 6군 장병들 사이에선 "만슈타인이 온다."라는 말이 퍼졌다.
↑독일군 철책선을 자르는 소련군. 사기성(?)이 강한 선전사진.
12월 10일, 아침 6시, 돈 집단군 예하 제 4기갑군이 출동한다. 기세등등하게 달려나가던 4기갑군은 반격 작전에 실패했다. 소련군은 만슈타인의 취약점인 이탈리아 8군을 공격하여 이탈리아군을 물리치고, 로스토프 방면을 압박해 들어간다. 만약 로스토프를 잃게 된다면 코카서스의 클라이스트 원수의 A집단군이 포위된다. 설사 4기갑군이 6군을 구원한다면 어떻게 될까? 설사 포위망을 뚫어도 4기갑군은 6군과 같이 지옥으로 가는 길동무 역할만 할 뿐일 것이다.
그리고 만슈타인은 여기서 일생일대 최선의 결정을 내리게 된다. 12월 24일, 독일 수뇌부는 6군을 포기한다. 그러나 공중 보급은 계속되었다. 어떻게든 최소한 건질 수 있는 것을 모두 건져야 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6군이 소련군의 후방을 붙잡아 둘 필요도 있었다. 결국 파울루스를 비롯한 6군의 모든 사람들은 지옥을 맛보게 된다. 성탄절 날, 파울루스는 6군이 가지고 있던 모든 말의 도축을 허락했다. 그 명령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든 병사들은 알고 있었다. 원래 6군은 5만 6천 마리의 군말르 소유하고 있었는데 7월 말, 기차편으로 오는 보급품의 편의를 위해 4만 마리의 말을 후방으로 옮겼다. 그러나 12월 그 무렵엔 '공식적'으론 7천 마리의 말만이 남아있었다.
↑볼가강 너머에 설치된 소련군 진지.
기온은 계속 내려 갔고, 6군의 병사들은 보급품으로 공중 보급된 나치당의 신문 20만 부를 서울역 노숙자들이 쓰듯이 써야만 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보온을 할 수 있고, 나치당에서도 그렇게 하려고 신문을 뿌린 것이다. 또한 신문과 함께 철조망이 보급되었다. 스탈린그라드를 '철의 도시'로 만들어 방어하라는 뜻이었다. 날이 갈수록 기온은 떨어지고, 6군 장병들은 온 몸에서 들끓는 이와 싸워야 했으며, 거의 모든 장병과 대다수의 초급 장교들이 동상에 걸렸다. 보급 물자도 절대적으로 부족해 기아에 허덕이는 병사가 많았고, 위급 상황이 아니면 탄환 사용은 금지였다. 일부 병사들 사이에선 일부러 총상을 입음으로써 부상자들이 타는 비행기에 타려고 했지만 대다수가 적발되어 비행기 대신 헌병대의 총알을 타게 되었다.
1943년 1월이 되자 볼가강이 완전히 결빙되어 소련군은 쇄빙선 동원이라든가 두꺼운 부분 위에 통나무를 올려 놓고 물자를 옮길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게 됨으로써 소련군은 물자 보급이 더욱 쉬워졌다. 반면, 그무렵의 포위망 밖의 독일군은 조금씩 소련군에 밀려 수송기나 전투기가 스탈린그라드 상공에서 채공하는 시간이 점점 짧아졌다. 그러니 결과적으론 보급량도 줄어서 그 무렵엔 하루 5천명이 연명할 수 있을 정도만이 보급되었다. 수송기들은 전투 후반으로 갈수록 채공시간이 길어져서 출격 횟수도 한 번으로 줄어들었고, 심할 경우엔 그 날 수송 출격은 없었다.
1월 7일, 소련은 파울루스에게 항복을 권고하는 최후 통첩을 했다. NKVD 대위인 다틀옌코를 비롯한 3명의 소련 장교가 갖다준 항복 문서에는 소련군 돈전선 사령관 로코소프스키와 포병사령관 보로노프, 스탈린그라드 전선 사령관 예레멘코의 서명이 들어있었다. 항복 문서는 항복 이후에 대한 처우가 담겨있었다. 내용은 독일군의 신변을 보호하고, 대우도 독일군에서 받던 때와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1월 9일, 모스크바 시간으로 오전 10시에 답변하라고 했다. 파울루스의 보고를 듣고 히틀러는 '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계속 진지를 고수해야 하며, 고수하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다른 전체의 독일군의 전선을 돕는것.'이라고 회답했다.
1월 9일, 10시, 소련은 시간을 내일 10일 10시로 다시 연기하는 보기 드문 관용을 베풀었다. 히틀러는 이에 대해 파울루스에게 '항복은 금지하며, 최후의 일탄까지 싸워라.'라고 했고, 파울루스는 여기에 살을 붙여 '명령은 명령이다.'라고 부하들에게 복창하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1월 10일, 최후 통첩 시간이 지난 10시 2분, 소련군의 6300여 대의 각종 화포 및 카추사 포가 불을 내뿜었다. 무려 두 시간에 걸친 일제 사격 후, 소련군은 6군에 대해 최후의 대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동시에 6군 병사들에 대한 소련군의 '삐라' 선전이 시작되었다. 이 선전은 통행증과 함께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소련군 기관총 맥심.(커피 말고...)
1월 16일, 훗날 흐루시쵸프 정군 때 국방성에 오르는 로디온 말리노프스키는 오늘 내에 피톰니크 비행장을 점령한다고 장담했고, 그의 말대로 그날 밤, 피톰니크 비행장이 점령되었다. 독일군의 두 개의 비행장 중 하나가 점령되자 모든 독일군은 굼락 비행장을 수비하기 위해 온 전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한편, 히틀러는 신형 전차를 이용해 소련군을 돌파하려 했지만, 만슈타인은 그 작전에 대해 반대하고 대신 유능한 장교들을 뽑아올 것을 건의했다. 그리고, 이 건의는 받아들여져 6군의 최후의 선택자들이 굼락비행장을 통해 포위망 밖으로 몸을 피하게 된다. 왜 장성들을 후방으로 빼내지 못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장성들이 빠져나가게 된다면 그의 부하들은 사기가 완전히 빠져 그대로 많은 병사들의 항복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에 따라 스트레커 같은 장성들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장교들의 탈출은 굼락이 함락되는 23일까지 계속된다. 21일, 파울루스는 6군 전 장병에게 최후의 편지를 쓰라고 명령했다. 전 장병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명령이었지만 모아진 우편물은 겨우 배낭 9개에 들어가는 분량 밖에 안되었다. 그나마 이 배낭들은 가족들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고, 게쉬타포의 손에 전부 압류되었다. 다음은 그 편지 중의 하나를 소개한다.
↑땅에 떨어진 메서슈미츠 전투기. 6군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인 사진 같다.
요하임 로젠펠트(Hauptmann Jochim Rosenfeld.)대위. 야전군사우편 02786(Feldpot Nr. 02786).의 1월 21일 자 편지: (그의 부인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최근 몇 주 동안 우리들에게 가해진 시련은 필설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저 여기에는 기도하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낮에나 밤에나 끊임없이 고통의 우리와 함께 있을 뿐이다.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서 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나는 이제 이 세상에 얼마 머무르지 못 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에게 기도한다. '내게 힘과 용기를 주십시요.'라고, 나는 절대로 항복하거나 포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포로가 되어도 결국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가 죽은 다음에는 아직도 젊은 28세의 청춘을 허비하지 말고 재혼 하시오.<이하 생략>
1월 22일, 굼락 비행장은 폐쇄되어 더이상 부상자의 수용이 멈추었다. 6군 내에서 송수신 되는 내용은 모두 같았다. '진지를 고수하라!(Stellung halten)', '한 발짝도 물러서지 말라!(Keinen Schritt Zurück)'라는 명령과 동시에 '가진 탄약을 모두 발사. 이 이상 보고 전무.(Verschossen, Kein Spricht mehr.)'라는 보고였다. 23일 21시, 굼락이 함락되면서 더이상 어떠한 수송기도 스탈린그라드에 착륙하지 못하게 된다.
1월 26일 8시 30분, 파울루스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히틀러에게 보냈다. '총통각하, 스탈린그라드에 있는 나의 부하들에게 최후의 한 발까지 싸우라고 더 이상 명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그들은 육체적으로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상태에 있지 않으며, 둘째, 이 마지막 탄환의 하나도 그들은 이미 더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고 드립니다.(Mein Führer! Ich dart melden dem Menschen von stalingrad, das kämptchen <Bis zur letzten Patrone> das kann ich nicht megr befehlen. Erstens, weil er nicht Physische dazu in der Lage ist. Zweitens, er nicht diesen letzten patrone mehr hat.)' 히틀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 '어디에 있든지독일군은 발을 들여 놓은 곳에서 계속 머물러있어야 한다.'라며 답신했다.
히틀러가 처음 정권을 잡은 1933년 1월 30일을 기념하기 위해 나치 각료들의 연설이 있었다. 처음 나온 목소리는 많은 독일인들이 싫어하는 괴링이었다.(이 조사를 'Grabrede'라고 한다.) "(전략) 독일 제 6군은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 지점에서 서구 세계를 구하기 위하여 불멸의 명예와 공적을 쌓고 산화할 것입니다. 다음의 우리들의 새로운 세대들은 당므과 같이 말할 겁입니다."라며 저 유명한 테모필레의 스파르타 군사가 했던 말을 인용했따. "나그네여! 독일에 가면 이 이야기를 전해주오. 우리들은 명령에 충실히 따랐고, 조국 독일과 서구 세계를 구출하고 이곳에 누워 있다고...(이하 생략)"
괴링의 연설이 끝난 뒤엔 독일 국가가 연주되었다. 히틀러 자신의 연설은 때마침 일어난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취소돼고, 대신 괴벨스가 오후 연설을 했다. 그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해 아주 인색할 정도로 다음과 같은 한 마디만 남겼다. "우리 병사들이 볼가강에서 보여 준 영웅적인 투쟁은 독일의 자유와 미래, 그리고 폭 넓은 의미에서 유럽 전체의 보존을 위해 우리 모두가 최선을 다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라고 했다. 그날, 파울루스는 다음과 같은 무전을 히틀러에게 보냈다.
<총통 각하께!
각하의 정권 수립 10주년을 맞아 제 6군은 총통 각하께 인사를 드립니다. 아직도 독일의 하켄크로이츠 기는 스탈린그라드에서 휘탈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투쟁은 살아있는 독일 국민과 다가오는 세대에게 절망 속에서도 결코 항복하지 않음으로써 귀감이 되며, 장차 독일에 승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총통만세!
파울루스 대장, 스탈린그라드, 1943년 1월 29일, 정오>
1월 30일 오전 9시에 소련군은 최후의 공격을 감행했다. 6천 문에 달하는 128mm 대포와 카츄사 포가 쉴새 없이 불을 내뿜었고, 그 포격으로 스탈린그라드 국영 백화점 주변에 은거하고 있던 독일 부상병 3천여 명이 순식간에 산화했다. 그리고 그날 늦은 밤, 파울루스는 육군 원수로 진급한다는 명령서를 받는다. 그리고 몇 시간 뒤인 1월 31일 오전, 파울루스는 소련군에 항복한다. 이튿날인 2월 1일, 독일의 모든 언론은 6군의 '항복'이 아닌 '전멸'을 보도했다. 전황보도가 끝나고 난 뒤엔 베토벤 교향곡 제 3번 2악장이 반복해서 여주되었다. 독일 정부는 3일간의 조기 계양과 음주 가무를 금지하고, 사치 등도 금지했다. 파울루스는 항복했지만 전투는 계속되었다. 2월 3일, 6군에 보급품 지원 하려는 마지막 수송기가 돈강과 볼가강 사이의 평원 상공에 나타났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처참하게 보이던 6군 장병들의 모습도, 그들을 포위하고 쉴새 없이 대공포화를 퍼붓던 소련군도. 아무 것도 없었다. 조종사는 다음과 같은 무전을 쳤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보이는 것은 온통 눈뿐입니다." 다음날인 2월 4일 18시 45분, 돈 집단군 사령부에 스탈린그라드로부터 마지막 교신이 온다. "볼셰비키 놈들이 벙커 앞에 와 있음. 우리는 무전기를 파기할 것임.'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그렇게 끝났다.
↑소련군의 선전사진으로 보이는 독일군 동사자 사진. 독일군은 제대로된 방한 장비는 커녕. 의료장비도 부족했기 때문에 서서히 얼어죽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독일군 20개 전투사단, 루마니아 2개 기병사단, 크로아티아 연대의 6천명, 히위(독일군에 편성된 투항 소련군이나 포로) 약 5천 명 등 총 33만 5천여 명 중 16만 5천 명이 전사, 5만 명이 비행기로 구출, 나머지 11만 9천 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들은 소련에서 강제 노동을 당했고, 1955년까지 독일로 돌아온 자들은 11만 9천 명중 단지 겨우 6천 명에 불과했다. 1946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당시 파울루스는 소련측 증인으로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 당시 기자들은 6군 장병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고 파울루스는 웃으며 "그들의 부모 형제들에게 그들은 러시아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말씀드려 주십쇼."라고 했다. 그 후, 전쟁 당시 독일 종군 기자 였던 하인트 슈뢰더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러나 그 때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덧붙일 것을 잊었다. '지하에 들어가 잘 있다!'라는 것을 말이다."(Aber er hat sich vergessen hinzuzufügen. Unter der Erde!)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약 9800여 명의 민간인이 폐허의 스탈린그라드에서 생존해 있었고, 그 중에 어린아이들이 994명이라고 했다. 부모를 만난 아이들은 겨우 9명. 나머지 어린 아이들은 국립 고아원에 보내졌고, 열 살 이상의 아이들은 노역에 동원되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얼마나 많은 소련군이 죽었는진 정확하지 않다. 다만 그 수가 수십 만을 뛰어 넘는다는 사실만이 추측으로 남고 있다. 포격 등으로 인해 건물에 깔려 죽은 사체가 너무 많아 전투 직후 시작되어 약 10년 가까이 벌어진 보수 공사 및 복구 작업의 공사장에서 끊임없이 유해가 발굴되었다. 1950년 대 초, 드골이 스탈린그라드를 방문 했을 때 아직도 건물의 폐허에서 유해가 나오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에서 처칠, 루스벨트, 그리고 스탈린의 연합국 정상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처칠은 영국국왕 조지 6세를 대리하여 소련 국민들에게 '스탈린그라드의 칼'을 선사했다. 칼날 한쪽 면엔 이런 글이 써져 있었다. "영국 국민을 대신하여 국왕 조지 6세의 이름으로 스탈린그라드의 강철 시민들에게 이 선물을 바친다." 이 증정식으로 삼국의 관계가 돈독해 지는가 싶었지만 만찬 중에 갑자기 스탈린이 전후 독일의 국방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독일 장교 5만 명을 처형해야 한다는 말을 했었다. 이 말에 처칠이 발끈했지만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농담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마침 루스벨트의 아들인 제임스 루스벨트가 연회장에 들어왔고, 이 말을 들은 그는(만취 상태였다.) 홀로 나서서 "만약 그렇다면 우리 미국은 그 일을 돕겠다."라고 했다. 이 말까지 듣고 처칠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영국 국민들은 그런 대량 학살을 결코 원치 않는다."라고 말하고는 연회장을 빠져 나갔다. 간신히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쫓아나가 처칠에게 농담이라며 처칠을 다독였기 떄문에 위험했던 삼국관계는 겨우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미 소리없는 전쟁-냉전-은 시작되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추이코프의 62군은 제 8근위군으로 재편성되어 베를린으로의 긴 여전을 떠났다. 파울루스는 동독으로 와서 히틀러의 개라는 비난을 받았고, 나름대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책을 쓰다 1957년에 사망해 바리바덴에 먼저 묻혀있던 그의 아내 옆에 나란히 매장되었다. 포로 생활이 끝난지 4년이 될 무렵이었다.
시간이 상처를 지워준다고 했지만 몇 십년이 지나가도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다음은 한 독일 할머니의 편지이다. '내 아들도 스탈린그라드에 가서 싸웠습니다. 내 아들은 전차 척탄병으로 어느 시가전에서 전사했습니다. 세월은 모든 상처를 낫게 한다고들 말하지만 이 스탈린그라드를 회상할 때마다 언제나 옛 상처가 새롭게 되살아 나며 고통을 줍니다.'<스탈린그라드 전투, 김종화 저>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끝났지만 아직 두 독재자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이제 독일군의 일방적인 공세는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폐허가 된 스탈린그라드를 내려다보는 소련군 병사.
↑소련군과 싸우는 독일군.
↑소련군의 대표적인 로켓포 '카츄사'.
↑독일군 포병들.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
↑스탈린그라드 시내로 진입하는 소련군.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그라드의 칼을 선사받는 스탈린.
참고 문헌
<여기 들어 오는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안토니 비버 저, 안종설 역, 서해문집
<스탈린그라드 전투> 김종화 저
참고사이트:
콜오브듀티 팬사이트(www.callofduty.co.kr)
서든스트라이크 팬사이트(www.suddenstrike2.co.kr)
periskop 사이트(http://panzer.pe.kr/)
사진출처(최종):
서든스트라이크 팬사이트(www.suddenstrike2.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