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白露)는 24절기의 열다섯째 절기로 이때쯤이면 밤 기온이 내려가고, 풀잎에 이슬이 맺혀 가을 기운이 완연해지지요. 원래 이때는 맑은 날이 계속되고, 기온도 적당해서 오곡백과가 여무는 데 더없이 좋은 때입니다.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 날이 좋으면, 내리쬐는 하루 땡볕에 쌀을 12만 섬(1998년 기준)이나 더 거둬들일 수 있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옛 어른들은 편지 첫머리에 "포도순절(葡萄旬節)에 기체만강하시고" 하는 구절을 잘 썼는데, 백로에서 추석까지 시절을 포도순절이라 했지요. 그해 첫 포도를 따면 사당에 먼저 고한 다음 그 집 맏며느리가 한 송이를 통째로 먹어야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주렁주렁 달린 포도알은 다산(多産)의 상징이고, 조선 백자에 포도 무늬가 많은 것도 역시 같은 뜻입니다. 어떤 어른들은 처녀가 포도를 먹고 있으면 망측하다고 호통을 치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이 때문이지요. 부모에게 배은망덕한 행위를 했을 때 '포도지정(葡萄之情)'을 잊었다고 개탄을 합니다. 이 포도의 정이란 어릴 때 어머니가 포도를 한 알, 한 알 입에 넣어 껍데기와 씨를 가려낸 다음 입으로 먹여주던 것을 일컫습니다.
아직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때이지만 산모퉁이에는 가을 하늘이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견디는 늦더위는 풍성한 오곡백과를 만들기 위한 작은 도움임을 생각하고,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 하나라도 나눠주려는 마음을 가지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