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고 표현합니다. 뭔가 깨달았을 때 하는 말입니다. 이해되지 않던 게 이해 됐을 때 하는 말입니다.
이해 없이 깨달음 없이 사는 건 위험합니다. 그래서 배우고 궁리합니다. 먼저 이해한 사람들에게 듣고, 앞서 깨달은 이에게 배우기 위해 학교에 다니고, 학원을 찾고, 도서관에 갑니다. 요샌 인터넷에도 먼저 이해하고 깨달은 이들의 가르침이 넘쳐납니다.
이해하고 깨닫는 통로가 무엇이든, 눈을 뜨는 경험은 소중합니다. 학교이든, 학원이든, 도서관이든, 인터넷이든 어디에서든 누구를 통해서든 배우고 궁리하는 노력은 귀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배우고 궁리해도 눈을 뜨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방향이 틀리면 눈을 뜨지 못합니다.
빛을 향해 눈을 뜰 수 없습니다. 빛을 향해 눈을 뜨면 오히려 암흑에 빠져버립니다. 태양을 정면으로 보면 오히려 눈이 멀어버리듯이요.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합니다. 빛을 향해 눈을 뜨면 오히려 흑암에 빠집니다. 빛을 향하는 게 아니라 빛이 비추는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빛이 비추는 곳으로 우리 시선을 둘 때 보입니다. 빛을 향해 시선을 두는 게 아니라, 빛이 보게 하는 것에 눈을 둬야 비로소 보입니다.
태양을 정면으로 쳐다보면 눈을 뜰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눈으로 하ᄂᆞ님을 보려하면 정작 하ᄂᆞ님을 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하늘을 쳐다보는 이들을 천사가 책망한 까닭입니다(행1:11). 하늘에 계신 하ᄂᆞ님을 쳐다본다면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ᄂᆞ님을 보려하는 건 어리석은 신앙입니다. 신앙은 하ᄂᆞ님을 보는 것이라기보다, 하ᄂᆞ님께서 보시는 것에 시선을 두는 것입니다. 하ᄂᆞ님이 보는 것에 시선을 둘 때 비로소 보입니다. 하ᄂᆞ님의 눈빛이 닿는 자리가 사람이 찾을 수 있는 가장 환한 자리입니다.
우상을 만드는 이들은 하ᄂᆞ님을 보려하다가 눈 먼 사람들입니다. 하ᄂᆞ님을 마주 보려할 때 하ᄂᆞ님은 우상으로 전락합니다. 하ᄂᆞ님을 볼 수 없어 볼만한 무언가를 세워놓은 게 우상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사람들을 만날 때 마주보지 않고 나란히 앉습니다. 사랑은 마주보는 것이라기보다 나란히 앉아 같은 방향을 보는 것입니다. 사랑은 나란히 걸으며 같은 방향을 향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하ᄂᆞ님은 옆에 계십니다. 내가 걸을 때 나란히 걸으십니다. 하ᄂᆞ님께서 가시는 곳으로 걷는 것, 하ᄂᆞ님께서 보시는 것을 보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ᄂᆞ님은 땅에서 가장 낮은 자리를 향하십니다. 땅에서 가장 어두운 데를 하ᄂᆞ님은 보십니다. 가장 낮고 가장 어두운 데를 찾아 우리 시선을 둘 때, 비로소 눈이 뜨입니다. 저 높은 곳에 있는 위대한 권력을 향하는 게 아니라, 이 낮은 곳에 처한 가난한 세상을 향할 때, 눈이 환해지고 깨어납니다.
화가 밀레는 가난한 농부를 그렸습니다. 그림을 구매하는 중산층들은 주로 풍경화를 구매했습니다. 당시 기차 여행이 가능해지면서, 여행 중 찾은 아름다운 풍경을 그림에 담아 집 안에도 들이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중산층 이상 부유한 이들이 그림을 구매할 수 있어서, 가난한 농부가 그려진 밀레 그림은 상품성이 없었습니다. 밀레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 초점을 맞추고 줌업합니다. 빛이 비추는 사람들을 그렸던 것입니다. 밀레 작품의 위대함은 기술이 아니라 시선입니다. 밀레만큼 기술 좋은 화가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가난한 농부를 향한 시선때문에 밀레 작품은 오늘날 걸작입니다.
예수의 시선이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닿았습니다.(요9:1) 사람들은 장애나 질병의 원인을 '죄'라고 판단하고,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게 당사자의 '죄'때문인지, 부모의 '죄'때문인지를 묻습니다. 죄가 원인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거야 모르는 일입니다. 죄가 원인되어 시각장애를 갖게 되었는지, 원인을 알 수 없는 다른 이유로 시각 장애를 갖게 되었는지, 판단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선 시각 장애의 원인을 추적하는 게 아니라, "하ᄂᆞ님의 일들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을 전환합니다.
누구에게나 가난, 사고, 장애, 질병, 실패 같은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만났을 때, 문제의 원인을 찾기보다 문제를 풀어내는 게 중요합니다. "하ᄂᆞ님의 일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문제의 원인을 짐작하고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죄'입니다. 얼른 보이지 않지만, 문제 속에 담긴 " 하ᄂᆞ님의 일들"을 볼 수 있는 시력을 갖고 싶습니다.
요한복음을 처음 읽던 사람들은 AD 90년 이후를 살고 있습니다. "90년 유대인의 세계 대회인 얌니아 회의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유대인들을 회당에서 추방하기로 결의"하고,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는 저주문은 18기도문 속에 삽입했다"고 합니다.(박수암,《요한복음》,대한기독교서회, 2002, 244쪽) 하ᄂᆞ님 옆에서, 하ᄂᆞ님의 시선이 닿는 곳에 눈을 두고 살다보면, 곤란한 일을 겪기도 합니다. 당시 '출교'를 당하면, 유대인 사회에서 상거래도 하지 못하는 불이익을 겪었다고 합니다. 예수를 만나 눈을 뜬 사람의 부모는 출교를 두려워합니다.(요9:23)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 까닭에 일상이 위태로워진 것입니다.
열광적인 종교인들이 강한 확신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내쫓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시인 기형도는 〈우리 동네 목사님〉이라는 시로 이런 세태를 슬퍼합니다. 〈우리 동네 목사님〉전문을 읽어보겠습니다.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뒷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정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목사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어버린 건, 아이 자신의 '죄'일까요, 아빠 목사의 '죄'일까요. 폐렴으로 죽은 것을 아이나 아빠의 '죄'라고 판단해 동네에서 쫒아내는 것이 죄입니다.
그럴듯한 종교인이고 싶어, 권위있는 목사이고 싶어, 하ᄂᆞ님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을 갖기도 합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모세가 하ᄂᆞ님과 대면하였다는데,(출33:11) 저 같은 동네 목사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가보다 합니다. 바울은 청동거울에 비친 하ᄂᆞ님을 뵐 수 있다고 합니다. 저 같은 동네 목사에겐 바울의 고백이 그럴듯합니다. 내 옆에 하ᄂᆞ님이 계시다면, 내가 거울을 볼 때, 내 얼굴 속에 가려진 하ᄂᆞ님 얼굴이나마 거울에 반사되어 어렴풋이 보일 수 있지 않을까요. 하ᄂᆞ님과 대면한 적 없고, 청동 거울에 흐릿하게 비친 하ᄂᆞ님을 보는 것인지, 아닌지, 분별하지 못하는 저 같은 동네 목사는 하ᄂᆞ님을 잘 알진 못합니다.
다만 하ᄂᆞ님께서 비추는 세상의 깊은 골짜기 같은 낮은 자리를 볼 때, 비로소 하ᄂᆞ님의 뜻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ᄂᆞ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며 비추시는 세상을 보는 이에게 하루가 열립니다(창1:3). 백년을 살아도, 하ᄂᆞ님 옆에서 하ᄂᆞ님께서 비추는 자리를 보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채 산 것입니다. 백수를 누렸어도, 하ᄂᆞ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며 창조하신 세상을 하루도 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 묻습니다. 하ᄂᆞ님께서 비추신 세상을 보며, 하ᄂᆞ님의 시선을 따라
하루를 살아보았는지.
23년7월2일 초고
26년3월15일 증보
첫댓글 하나님께 시선을 두기보다 하나님과 같은 방향을 보는, 그런 삶이 되기를, 그런 하루가 되기를 다짐하고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