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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遼東)의 동(東)쪽이 “조선(朝鮮)”일 수 있을까?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말하는 조선사(朝鮮史) 해설(解說)』은, 이제 그【조상(祖上)과 민족(民族)을 배신(背信)】상처(傷處)로 인해 회복(回復)불능(不能)상태(狀態)가 되어버려, 아예 공교육(公敎育)에서조차 “뒷방” 신세(身世)가 되어버렸다.
정사(正史)라고 하는 “기록(記錄)”외에도 많은 “조선(朝鮮)사대부(士大夫)”들이 틈틈이 집필(執筆)한 많은 분량(分量)의 “개인(個人) 기록(記錄)들”이 우리 앞에 있다. 물론(勿論) 그것 역시도 『일제(日帝)와 그 하수인(下手人)들의 손때가 묻어나는 것이나, 그럼에도 곳곳에 살아있는 조선(朝鮮)의 지형지리(地形地理), 방위(方位), 기후(氣候), 토산물(土産物), 특이지형(特異地形)등등이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수많은 조상(祖上)님들이 틈틈이 집필(執筆)한 그 훌륭한 유산(遺産)을, “교정(矯正)한다거나 재 발행한다.”는 미명(美名)하에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한 『비굴(卑屈)하고, 치사(癡事)한 자(者)』들은 이미 고인(故人)이 되었다.
『조선(朝鮮)이 반도(半島)에 도성(都城)이 있었는가? 조선(朝鮮)의 영토(領土)는 반도(半島) 땅이었는가?』하는 문제는 21세기 입장(立場)에서 생각하면, 『비경제적(非經濟的)이며,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인 질문(質問)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대부분(大部分)일 것이며, 『중국(中國)의 속국(屬國)과도 같았던 조선(朝鮮)이 어떻게 반도(半島) 밖(外)의 대륙(大陸) 땅을 영토(領土)로 하였겠는가?』하며, 오히려 반문(反問)하면서, 『그대들은 역사(歷史)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지방(地方)여행(旅行)을 가보면, 향토사학(鄕土史學)에서, 자치단체(自治團體)에서 만들어 놓은, 많은 유적(遺跡)과 그것들을 복원(復元)해 놓은 것들을 볼 수 있는데, 정말이지 『가관(可觀)이다!』 이렇게 까지 하면서 “반도사학(半島史學)”을 고착(固着)화하려는 명분(名分)을 이해(理解)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아래의 “글”을 보면서 “반도조선(半島朝鮮)”을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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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곡 집(谿谷集) 제15권 / 행장(行狀) : 고자헌대부이조판서겸세자좌빈객지춘추관사 ‘증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 한흥부원군’이공행장(故資憲大夫吏曹判書兼世子左賓客知春秋館事贈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韓興府院君李公行狀) : 공의 휘(諱)는 산보(山 甫)요, 자(字)는 중 거(仲 擧)요, 호는 명곡(鳴 谷)으로서, 고려(高麗) 시중(侍 中)으로 ‘한산 백(韓 山 伯)’에 봉(封)해진 목은 선생(牧隱先生) 휘 ‘색(穡)’의 7 세손이다. 부친 휘, 지 무(之 茂)는 영의정을 증직 받았는데, 능성 구씨(綾 城 具 氏)에게 장가들어 보령(保 寧) 시골집에서 공을 낳았다. : 『公諱山甫.字仲擧.號鳴谷.高麗侍中韓山伯牧隱先生諱穡之七世孫也.考諱之茂.贈領議政.娶綾城具氏.生公于保寧田舍』임진년에 왜구가 깊이 쳐들어오자 공이 보령(保 寧)의 시골 별장에 있다가 서울로 왔는데, 며칠 뒤에 서용(敍用)하는 명이 떨어져, 다음 날 아침에 대궐에 나아가 보니, 대가(大駕)가 벌써 서(西)쪽으로 떠난 뒤였다. :『壬辰倭寇深入.公自保寧鄕莊赴都.居數日.敍命下.公晨詣闕.則大駕已西幸矣』<텍스트원전과 번역본은 고전번역원의 것을 인용함>
➊ 『계곡 집(谿谷集)』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선조 20년(1587) 12월 25일 부친의 임소(任所)인 평안도 선천 부(宣 川 府) 관아에서 출생(出生), 1623년 3월 인조(仁祖)반정에 참가, 1638년 3월 17일 5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고 전해지는 인물(人物)로, 시강원 설서, 승정원 주서, 예문관 검열, 예문관 대교, 이조 좌랑, 이조 정랑, 신풍 군(新 豐 君)이 되었으며,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 대사헌, 이조 판서 겸 홍문관ㆍ예문관의 대제학을 역임, 형조 판서, 공조 판서, 사후(死後) 1655년(효종 6) 5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문 충(文 忠)’이란 시호가 내렸다.】의 시문집(詩文集)으로, 봉건왕조(封建王朝) 체제(體制)하의 온갖 벼슬이란 벼슬은 한 번 씩 역임(歷任)한 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➋ 본인(本人)이 강조(强調)하고픈 말은, 이러한 “분”이 기록한 “문집(文集)”속에서 말하는, “조선(朝鮮)의 지형지리(地形地理)와 방위(方位)등은 매우 중요(重要)한 것이며, 당시(當時) 조선(朝鮮)의 영토(領土)를 찾는데, 긴요(緊要)한 단서(端緖)를 제공(提供)한다.”는 점이다.
➌ 『則 大 駕 已 西 幸 矣 ; 대가(大駕)가 벌써 서(西)쪽으로 떠난 뒤였다. 』라는 “말”은 조선(朝鮮)영토(領土)의 지형지리(地形地理)적 측면(側面)을 알 수 있는 핵심(核心)단서(端緖)라 할 수 있다.
➍ 지세(地勢)로 보더라도, “평양【平壤 : 서경(西京)】과 의주【義州 : 용만(龍灣)】” 는 북(北)쪽에 있다고 하였으며, “임진강(臨津江)도 도성(都城)의 북쪽이요, 평양【平壤 : 서경(西京)】도 북쪽이며, 의주【義州 : 용만(龍灣)】도 북(北)쪽일 수밖에 없는 반도(半島)의 지세(地勢)”이며, 이는 『지구(地球)의 자전축(自轉軸)이 변하지 않는 한 철칙(鐵則)일 것이며, 지구(地球)의 땅덩이가 재(再)창조(創造)되지 않는 한 바뀔 수 없는 일이다.』
➎ 이러한 방위(方位)에 대해, 선대(先代)의 대신(大臣)이나, 학자(學者)들은 모두 “서(西)쪽”이라고 표현(表現)하고, “西”라는 글자로 “서쪽”을 표기(標記)해 놓았다는 사실(事實)이다. 『도성(都城)인 “한성(漢城)”에서 “평양(平壤)과 의주(義州)”는 정북(正北)에서 약간 서(西)쪽으로 기울어진 형세(形勢)이나, 결코 서(西)쪽일 수 없는 방향(方向)이다.』
➏ 특히 『도성(都城)을 떠나 서행【西幸 : 서쪽으로 어가(御駕)가 떠났다】했다』는 말은 도성(都城)에서 “서(西)쪽” 방향(方向)으로 길을 잡고, 떠났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평양(平壤)이니, 의주(義州)니 하는 것들은 상관(相關)없는 이야기다.
※ 이러한 당시(當時)의 지세(地勢)를 생각하면서, 아래의 글을 또 보자. <텍스트원전과 번역본은 고전번역원의 것을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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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곡 집(谿谷集) 제22권 / 자문(咨文) 8수(首) / 군문에 보낸 자문 정묘[軍門移咨 丁卯 ]
《爲飛報虜情事.本年正月十七日.平安道觀察使尹暄狀啓 : 오랑캐의 정세를 급히 보고하는 일로 자문을 보냅니다. 금년 1월 17일에 평안도 관찰사 윤 훤(尹 暄)이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奴賊數萬騎.乘夜猝犯義州.城中不覺兵至.措手不及.城遂陷沒.節制使李莞以下文武將官及兵民男婦.悉被廝殺.先鋒已到定州.續據前後馳啓。: “노적(奴 賊)의 수만 기병(騎兵)이, 야음(夜陰)을 틈타 갑자기 의주(義州)를 침범하였는데, 성 안에서는 부지불식중에 군사가 들이닥치자, 미처 손을 쓸 사이가 없어, 마침내 성이 함몰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절제사(節 制 使) 이완(李莞) 이하 문무(文武) 장관(將官) 및 병 민(兵 民) 남부(男 婦)들이, 모두 시살(厮 殺)되었는데, 적의 선봉은 이미 정주(定州)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후로 잇따라 치계(馳 啓)가 올라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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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노적【奴賊 : 건주(建州)에 있던 여진(女眞)의 ‘누루하치’ 무리들을 말한다.】의 수만(數萬) 기마(騎馬)가 밤의 어둠을 틈타, 의주(義州)를 기습(奇襲)하는 바람에, 의주(義州) 성(城)이 함락(陷落)되고, 관리(官吏)들과 군사(軍士)들이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는 내용(內容)이다.
➋ 건주(建州)는 오늘날의 심양(瀋陽)이며, 이곳은 반도사학(半島史學)에서 말하는 요하(遼河)의 동(東)쪽에 있으며, 이곳을 요동(遼東)지방이라고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수만(數萬)의 기병대(騎兵隊)로 의주(義州) 곧 용만(龍灣)을 치려한다면, 우선 『천하(天下)의 3 대수(大水)중의 하나인 압록강(鴨綠江)을 도강(渡江)해야 하는 필수적(必須的)인 작전(作戰)이 필요(必要)하다.』
압록강(鴨綠江)을 이름 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내려준 해자(垓字)와 같은 천연(天然)의 요새(要塞)』라고 불렀으며, 이 강(江)을 기준(基準)하여 말하기를, 『북쪽은 이(夷)요, 남쪽은 화(華)』라고 하였다.
당시(當時) 한참 흥성(興盛)중이던 “노적(奴賊)의 무리”가 날개 날린 우주인(宇宙人)은 아니었을 터, 『천하(天下)의 3 대수(大水)중의 하나였던 압록강(鴨綠江)을, 야음을 틈타 수만(數萬)의 기병대(騎兵隊)가 하루 밤 사이에, 도강(渡江)을 했다? 강변(江邊)에 있었던 의주(義州)성(城)과 그 압록강(鴨綠江)변에 백 척(百尺) 높이 세워져 있어, 도도히 흘러오는 강물을 바라보며, 술 한 잔과 시(詩) 한수를 했다는 통군정(統軍亭)은, 오직 술과 기생(妓生)들을 위한 것인가? 더하여 의주(義州) 성(城)은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이곳 높은 곳에는 “동해제일관(東 海 第 一 關)”이란 현판(懸板)이 날리고 있었다.』하는 말은 또 무엇인가?
【 서해바다(渤海)와 맞닿은 “의주(義州)”에 넓고 넓은 동쪽의 가장 큰 관(關)이라는 “동해제일관(東 海 第 一 關)”이란 이름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➌ 홍세태【洪世泰) 1653년(효종 4) 1725년(영조 1)】의 말에 의하면, 《統軍亭勢壓龍灣.俯視全遼朔漠間.靑草不生皆磧地.黑雲常結是胡山.長江一帶華夷界 : 통군정(統軍亭)의 기세(氣勢)는 용만(龍灣)을 압도(壓倒)한다. 구부려 자세히 살펴보면“遼(요)”지방은 삭막【朔漠 : 북쪽의 사막(沙漠)지대】사이에 있어 푸른 풀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모두 사막(磧)의 땅이다. 검은 구름이 항상 떠 있는 오랑캐 산(山)이 있고, 길게 흐르는 강(江)물의 일대(一帶)는 화(華)와 이(夷)를 구분(區分)하는 지경(地境)이다. 》라고 말하고 있으며, 덧붙여 말하기를 《鴨 水 滔 滔 日 夜 東 : 압수(압록강)는 물이 넘쳐, 넘쳐 밤낮없이(낮과 밤) 동(東)으로 간다.》 고 하였다.
➍ 수만(數萬)의 기병대(騎兵隊)가 무인지경(無人之境)의 평야(平野)지대(地帶)를 말 달리고, 그곳에 있던 강(江) 하나를 “도강(渡江)”한다고 해도, 최소한(最小限) 수일(數日)이나 수십(數十)일이 소요(所要)될 것이다. 더구나 강(江)의 남쪽에는 요새(要塞)화된 성(城)과 군대(軍隊)가 있기 때문에 “도강(渡江)”하는 순간(瞬間), 전멸(全滅)할 수 있는 최악(最惡)의 선택(選擇)이 된다. 의주(義州) 곧 용만(龍灣)에는 당시 『오만(五萬)의 백성(百姓)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➎ 반도사학(半島史學)은 이러한 사실(事實)을 어떻게 믿고 따르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행태를 보인다. 변경(邊境)지방(地方)의 군대(軍隊)가 수자리를 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적(敵)의 침입(侵入)을 감시(監視)하기 위한 것이다. 수만(數萬)의 기병(騎兵)이 “천하(天下) 3 대수(大水)”를 건너고 있는 것을 몰랐다는 말은, 곧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존재(存在)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
➏ 또 하나는 “여진(女眞)은 북(北)쪽 지방에 있었으며, 조선(朝鮮)은 그 남(南)쪽 지방에 있었다.”는 이야기며, 당시(當時)『여진(女眞)은 오랑캐(夷)요, 조선(朝鮮)은 중화(華)였다.』는 설명(說明)이며, 그것(華夷)을 나누는 경계(境界)는 압록강(鴨綠江)이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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賊兵連陷郭山凌漢山城及安州等城.節度使南以興,防禦使金浚等.將吏數十員,兵民數萬口.屠戮無遺.平壤,黃州不戰自潰.賊兵已到中和.游兵出入黃,鳳之間.賊又以一枝兵.向雲從島.要搶毛鎭.道路阻絶.哨探難通.勝敗聲息.無從聞知等因.得此. : “적병이 잇따라 곽 산(郭 山)의 능한 산성(凌 漢 山城) 및 안주(安州) 등지의 성곽을 함락시켰으므로, 절도사(節 度 使) 남이흥(南以興)과 방어사(防 禦 使) 김준(金浚) 등 장리(將 吏) 수십 원(員)과 병 민(兵 民) 수만 구(口)가 하나도 남지 않고 도륙(屠戮)되었습니다. 평양(平壤)과 황주(黃 州)도 싸워 보지 못한 채 저절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적병이 이미 중화(中和)에 도착하였으며, 유병(游 兵)들이 황주와 봉산(鳳山) 사이를 드나들고 있습니다. 또 적이 일개 부대의 병력을 운 종도(雲 從 島)로 보냈는데, 이는 모진(毛 鎭 모문룡(毛文龍)의 군영)을 공격할 의도에서 입니다. 그런데 길이 막혀 정탐 병의 보고가 올라오지 못해 승패에 대한 소식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當職竊照伊賊自未叛天朝.其朶頤于敝邦久矣.旣得遼土.勢益熾大.兼以毛鎭寄在敝疆.日夕耽耽.欲肆呑噬. : 당직(當職)이 나름대로 살펴보건대, 이 적(賊)은 천조(天朝)를 배반하기 이전부터 폐방(敝 邦)에 대해서 군침을 흘려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일단 요동(遼東) 지방을 손아귀에 넣어 세력이 더욱 막강해진 데다가, 모진(毛 鎭)이 또 폐방의 강역 안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밤이고 낮이고 호시탐탐(虎視耽耽) 노리면서 집어삼킬 욕심을 품어 왔습니다. 顧念奴酋在時.其志專在西犯.不暇他及.故得拖過數年.頃聞老酋旣死.黑干繼襲.邊吏刺探賊情.聞其立計作事.與哈赤有異.必欲先來東搶.: 한편 돌이켜 생각건대, 노추(奴 酋)가 살아 있을 때에는 오로지 서쪽을 침범할 뜻을 갖고서 다른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기 때문에, 폐방이 몇 년 동안이나마 침범을 당하지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듣건대, 노추(奴 酋)가 이미 죽고 “흑 간(黑 干)”이 그 뒤를 이었다는데, 변방의 관리가 적의 정세를 정탐하여 보고한 바에 의하면 ‘그가 계획을 세워 일을 추진하는 것이 “합 적”(哈 赤 누르하치, 즉 노추를 말함)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먼저 동(東)쪽을 치러 올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습니다.
➊ 『旣 得 遼 土. 勢 益 熾 大 : 요동(遼東) 지방을 손아귀에 넣어 세력이 더욱 막강해진 데다가 【이윽고 요동(遼東) 땅을 얻고 나서, 세력이 크게 성해지고】』라는 말에서, 본래(本來) “여진(女眞)”은 요동요서(遼東遼西) 땅에 없었으나, “요동(遼東)”지방을 얻고 나서 그 세력이 크게 성해졌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여진(女眞)”은 어디에 있었는가?
요하(遼河)는 심양(瀋陽)의 서쪽 근교(近郊)에 있으며, 이 요하(遼河)를 기준(基準)하여, 요동요서(遼東遼西)를 나누었다는 말에 따르면, 『“여진(女眞)”은 “요하(遼河)의 서쪽에도, 동쪽에도 없었다는 것이며, 남쪽은 바다이니 그곳에서 살았을 리 없으니, 결국 북(北)쪽에서 왔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여진(女眞)”은 『조선(朝鮮)의 백두산(白頭山) 동남(東南)쪽에서 흥성(興盛)했다.』는 청(淸) 자신(自身)들이 말하는 역사(歷史)는 거짓이란 말인가? 결국(結局) 백두산(白頭山) 동남(東南)쪽에서 서진(西進)하여 심양(瀋陽)인 건주(建州)에 자리 잡았다는 말은 곧 『요동 땅』이란 이야긴데, 무슨 놈의 『요동 땅을 얻어서 흥성했다』는 말이 되는 것일까? 넓은 의미로 보나, 좁은 의미로 보나 요하(遼河)의 동(東)쪽은 “요동(遼東)”이 아닌가! 그래서 “조선(朝鮮)은 요(遼)의 동쪽에 있다.”는 말로 대신 한 것이 아닌가!!!!!!!!!!!!!!!!!!!!!!!
➋ 『必 欲 先 來 東 搶 : 먼저 동(東)쪽을 치러 올 것이 분명하다.』는 말은, 할 말을 잃고 만드는 “희극(戱劇)이며, 조선사(朝鮮史)로 보면 비극(悲劇)이다.”
“여진(女眞)”은 이미 백두산(白頭山)에서 흥성(興盛)해지니, 서진(西進)하여 건주(建州 : 심양)에 자라잡고 있었다. 심양(瀋陽 : 건주)의 동쪽지방인 현 길림성(吉林省)지방은 이미 “여진(女이 眞)”들의 소굴(巢窟)이 되었는데, 자신(自身)들의 땅과 백성(百姓)들을 치겠다! 이는 “반도사학(半島史學)에서만 존재(存在)하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학설(學說)이다.”
또 건주(建州)의 동쪽지방은, 말 그대로 백두산(白頭山 : 장백산)과 청진, 나진방향(方向)이며, 그곳의 북쪽지방인 두만강(頭滿江)이북은, 조선(朝鮮)의 땅이 아니기 때문에 반도(半島)안에 있었던 “조선(朝鮮)”의 입장(立場)에서는 방비(防備)만 잘 하고 있으면 그만이다. 반도사학(半島史學)의 주장대로라면, 노추(奴酋) 또는 노적(奴賊)이 “스스로 자신(自身)들이 사는 땅과 백성(百姓)들을 죽이던 살리던 조선(朝鮮)으로써는 긴박(緊迫)한 상황(狀況)이 될 수 없으며, 그저 변경(邊境)의 수비(守備)만을 잘 하고 있으면 그만이란 이야기다.”
➌ 그러나 이와는 반대(反對)로, 조정(朝廷)에서는 필사(必死)의 애원(哀願)을 하고 있다는 점은, 심양(瀋陽) 곧 건주(建州)의 동쪽지방인 현 길림성(吉林省)지방에 “조선(朝鮮)”이 있었다는 이야기로 밖에 볼 수 없다. 이것은 반도사학(半島史學)의 입장(立場)일 때 말이다.
이러한 설명(說明)은, 『지형지리(地形地理)적인 측면이나, 방향(方向), 고전(古典)의 기록(記錄)등으로 볼 때, 반도(半島)와 그 북쪽지방에서 일어날 수 없는 사건(事件)이란 점이다.』무엇하나 제대로 부합(附合)되는 것이 없다. 『땅이 있으면, 그곳에는 땅의 생김새인 지세(地勢)라는 것이 있고, 그곳에는 또 동서남북(東西南北)이라는 땅의 방향(方向)이 있게 마련이다.』
『지형지리(地形地理)와 방향(方向)이 부합(附合)되지 않는다.』는 말은, 반도(半島) 땅은,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있었던 땅이 아니었다.”는 직접적(直接的)인 요소(要素)이다.
이래서 반도사학(半島史學)은 이제 회복(回復)불능(不能)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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且聞天朝爲羈縻之計.撫議已成.若爾則渠旣息西犯之意.兼絶議後之慮.其肆毒於敝邦必矣.日夜憂恐.以待警報. : 그리고 듣건대, 천조(天朝)에서 기미 책을 세워 적을 무마할 의논을 확정 지웠다고 하는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서쪽을 침범할 의사가 이미 없어진 데다 후방이 공격당할 염려도 없어진 만큼 폐방에 대해서 독기(毒氣)를 부릴 것이 뻔했기 때문에,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 경보(警報)에 대비해 왔습니다. 第以敝邦民窮兵弱.食乏財盡.雖綢繆有素.而陰雨難防.大賊猝至.無以抵當.長驅直上.已逼內地.豕突之勢.莫能遏止. : 하지만 폐방은 백성이 곤궁하고 군대가 미약한 데다 식량도 부족하고 재정도 바닥이 났기 때문에, 평소에 애면글면 주선해 왔다고는 해도 비상사태를 예방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막강한 적병이 졸지에 들이닥침에 어떻게 감당해 낼 수가 없었던 탓으로, 그들이 승승장구(乘勝長驅)하며 곧바로 올라와 내지(內地)를 핍박해 오게 하였는데, 그 저돌적인 기세를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막아 낼 수가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乃於本月二十六日.當職以廟社主及京城女士.遷于江華.以避賊鋒.君臣播越.寄命孤島.危亡之禍.迫在朝夕. : 그리하여 그만 이달 26일에 당직(當職)이 종묘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경성의 사녀(士女)들과 함께 강화(江華)로 옮겨 와, 적병의 예봉(銳鋒)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임금과 신하가 모두 파월(播越)하여 외로운 섬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위망(危亡)의 화(禍)가 아침저녁 사이로 박두해 왔다고 하겠습니다.
往在壬辰倭賊之難.幸賴天朝拯救之恩.得以收復舊物.目今全遼失陷.旱路已絶.雖欲控訴大邦.何可得也.西望長慟.不知所爲. : 지난 임진년 왜적의 난리 때에는 다행히도 천조에서 구원해 주신 은덕(恩德)에 힘입어 옛 문물을 다시 회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요동 전역(全域)이 함몰되어 육로(陸路)가 이미 끊어지고 말았으니, 비록 대국에 호소하려고 한들 어떻게 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서쪽 하늘을 쳐다보며 통곡만 할 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竊念此賊旣動大兵東來.雖屢戰乘勝.然其攻打城池.折損亦多.深入人國.兵連禍結.想其巢穴必以虛弱. : 당직이 나름대로 생각건대, 이 적이 일단 병력을 대거 동원하여 동쪽을 침범해 왔으니, 그들이 비록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이겼다고는 하나 성지(城池)를 공격하여 무너뜨릴 때 손상을 당한 것이 또한 많을 것이요, 또 남의 나라 안으로 깊이 쳐들어와 병화(兵禍)를 잇따라 일으키고 있는 만큼 그들의 소굴은 분명히 텅 비어 세력이 약해졌으리라고 여겨집니다.
若蒙皇朝乘此機便.發十萬大兵.直擣遼瀋.舟師由旅順海路.以取金復等州.則伊賊千里奔歸.氣竭力窮.其破之必矣. : 그러니 만약 황조(皇朝)에서 이 기회를 이용하여 10만 대군을 징발한 뒤 곧장 요 심(遼瀋)을 두들겨 부수게 하고, 이와 함께 주사(舟師)를 출동시켜 여순(旅 順)의 바닷길을 통해 금주(金州)와 복주(復 州) 등의 지역을 취하게 한다면, 이 적이 천리 길을 정신없이 되돌아오느라 기운이 빠지고 힘이 다할 것이니, 그들을 분명히 격파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夫然則皇朝獲全勝之利.毛鎭紓窘逼之患.敝邦亦得收拾燼餘.保聚疆域.計莫便焉.幸莫大焉. : 대저 그렇게만 된다면, 황조의 입장에서는 전승(全勝)을 거두는 이로움을 얻게 되고, 모진(毛 鎭)의 입장에서는 군색하게 되는 걱정을 덜 수 있게 될 것이며, 폐방의 입장에서도 역시 병란(兵亂)의 뒤끝을 수습하여 강역을 보전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니, 이보다 편한 계책이 없고 이보다 큰 다행이 없게 될 것입니다.
敝邦微弱已甚.獨以區區忠義.自盡事大之誠.結怨強虜.遭此橫虐.雖至顚沛.自顧無媿.徒以積受皇朝厚恩.未能報效爲恨耳. : 폐방이 그지없이 미약하기만 한 형세에서 유독 구구(區區)한 충의(忠義)를 고집하며 스스로 사대(事大)하는 정성을 극진히 행해 오다가 막강한 오랑캐에게 원망을 산 나머지 이렇듯 무지막지한 병화(兵禍)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할지라도 스스로 돌이켜볼 때에 부끄러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만, 단지 그동안 계속 받아온 황조의 두터운 은혜를 생각할 때 제대로 보답해 드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疆事方殷.不得發使具奏.姑差某官某等.前去告急.唯冀劃卽轉奏施行.須至咨者. : 나라의 일이 바야흐로 위급한 때라서 사신을 파견하여 주보(奏本)을 갖춰 올리지는 못하고, 우선 모관(某官) 모등(某 等)을 차견(差遣)하여 위급함을 알리게 하였으니, 즉시 전주(轉 奏 이 자문을 토대로 군문에서 중국 조정에 다시 아뢰는 것)하여 시행토록 해 주셨으면 합니다. <인용/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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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을 보면,
정말이지 비굴(卑屈)함의 극치을 보는 것 같다. 외적(外敵)의 침입(侵入)을 받으면 가장 먼저 시급(時急)하게 해야 할 일은, 전시(戰時)동원 체제(動員體制)를 갖추고, 병사(兵士)들에게 그동안 비축(備蓄)해 놓은 군량(軍糧)과 기계(器械)를 나누어 주고, 요로(要路)요소(要所)에 병사(兵士)들을 배치(配置)하여, 적병(敵兵)들이 남하(南下)하는 것을 저지(沮止)하여, 후방(後方)의 지원(支援)군이 도착할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해(理解)할 수 없는 것은, 조선사(朝鮮史)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처절(悽絶)하리만큼 비굴(卑屈)하고, 나라답지 않은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모습이다. 나라 안에서 “반역(叛逆)이나 도적(盜賊), 내란(內亂)”등이 발생(發生)하면,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정예(精銳)병들이 갑자기 뛰어나와, 신속(迅速)하게, 용감무쌍(勇敢無雙)하게 진압(鎭壓)하고, 주모자(主謀者)들을 하루아침에 요절(腰絶)을 내버리며,
백제(百濟) 성왕(聖王)과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과의 싸움 때는, 신라(新羅)군에 의해 백제(百濟)의 성왕(聖王)은 처참(悽慘)하게 살해(殺害)되었으며, 좌평(佐平) 네 사람도 죽었고, 보병(步兵)과 기병(騎兵)등 2만9천6백 명의 수급(首級)이 잘렸으며, 이들이 탔던 단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고 목이 잘렸다. 그리하여 며칠 동안 “피의 냇물”이 흘러 “피바다”를 이뤘다고 전해지고 있다.【三國史記/新羅本紀/眞興王 15년 / 秋七月,修築明活城.百濟王明襛與加良,來攻管山城,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逆戰失利.新州軍主金武力,以州兵赴之,及交戰,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急擊殺百濟王.於是,諸軍乘勝,大克之,斬佐平四人,士卒二萬九千六百人,匹馬無反者.】이렇게 무지막지(無知莫知)한 자들이 어떻게 저렇게 비굴(卑屈)해질 수 있는지 이해(理解)할 수 없다는 뜻이다.
특히 반도(半島)에 있었다는 “신라(新羅)”는 이 지구(地球)상에서 이보다 더한 비굴(卑屈)한 예는 존재(存在)하지 않을 것 같은 “비굴(卑屈)함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반도사학(半島史學)을 추종(追從)하는 일부(一部) 무리들은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신라(新羅) 정통(正統)”이라고 검증(檢證)되지 않은, “사기극(詐欺劇)”을 연출(演出)하고 있는데, 이런 자들은 “반도(半島) 신라(新羅)의 비굴(卑屈)함을 알기나 하고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➊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진평왕(眞平王) / 三十年,王患高句麗屢侵封埸,欲請隋兵以征高句麗,命圓光修乞師表,光曰:求自存而滅他,非沙門之行也,貧道在大王之土地,食大王之水草,敢不惟命是從!乃述以聞. : 30년, 왕은 고구려가 자주 국토를 침범하는 것을 걱정하여 수나라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다. 왕은 원광으로 하여금 수나라의 군사를 요구하는 글을 쓰게 하였다. 원광은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멸하는 것은 불교도의 행실이 아니지만, 제가 대왕의 땅에서 살고 대왕의 땅에서 나는 물과 곡식을 먹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령을 좇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곧 글을 지어 올렸다.
➋ 선덕여왕(善德女王) / 十一年.秋七月,百濟王義慈大擧兵,攻取國西四十餘城.八月又與高句麗謀欲取党項城,以絶歸唐之路.王遣使告急於太宗. : 가을 7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8월에 다시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党項)성을 빼앗아 당 나라로 가는 길을 막고자 하였다. 왕이 사신을 당 나라로 보내 태종에게 급한 사정을 통보하였다.
➌선덕여왕(善德女王) / 十二年,秋九月,遣使大唐上言:高句麗.百濟侵凌臣國,累遭攻襲數十城.兩國連兵,期之必取,將以今玆九月大擧,下國杜社稷必不獲全,謹遣陪臣歸命大國,願乞偏師,以存救援. : 가을 9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말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폐국을 침공하여 수십 개의 성이 누차 공격을 당했습니다. 이제 이들 두 나라 군사가 연합하여 우리나라를 필히 빼앗고자, 이번 9월에 군사를 크게 일으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의 사직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삼가 저의 신하를 보내 대국에 우리의 운명을 맡기오니, 일부의 군대라도 빌려 주어 구원해주기를 원합니다.” “我實哀爾爲二國所侵,所以頻遣使人和爾三國.高句麗.百濟旋踵翻悔,意在呑滅,而分爾土宇.爾國設何奇謀以免顚越?” : “너희가 두 나라의 침략을 받는 것이 진실로 애통하다. 그렇기에 자주 사신을 보내 너희 세 나라가 화친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는, 사신이 발길을 돌리자마자 약속을 어기고 있다. 이는 너희 나라를 빼앗고 너희 나라를 나누어 갖자는 데에 뜻이 있는 것이다. 너희 나라에는 사직을 보전할 수 있는 무슨 특별한 대책이라도 있는가?” 使人曰:吾王事窮計盡,唯告急大國,冀以全之. : 사신이 말했다. “우리 임금께서는, 상황은 급하고 대책이 없으므로 급한 사정을 대국에 말하여 나라의 보전을 바라는 것입니다.”
帝曰:我少發邊兵,摠契丹.靺鞨直入遼東,爾國自解,可緩爾一年之圍.此後知無繼兵,還肆侵侮,四國俱擾,於爾未安,此爲一策.我又能給爾數千朱袍.丹幟,二國兵至,建而陳之,彼見者以爲我□,必皆奔走,此爲二策.百濟國恃海之嶮,不修機械,男女紛雜,互相燕聚.我以數十百船,載以甲卒,銜枚泛海,直襲其地.爾國以婦人爲主,爲隣國輕侮,失主延寇,靡歲休寧.我遣一宗支,與爲爾國主.而自不可獨王,當遣兵營護,待爾國安,任爾自守,此爲三策.爾宜思之,將從何事?” : 황제가 말했다. “내가 변방의 군사를 조금 내고, 거란․말갈과 함께 곧장 요동을 치면, 너희 나라에 대한 포위가 자연히 풀릴 것이다. 이렇게 되면 1년 동안은 포위 상태를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후에 군사를 계속하여 보내지 않을 것을 그들이 알면, 도리어 함부로 침략을 할 것이다. 이리되면 네 나라가 모두 소란해지고 너희 나라도 편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첫째 계책이다. 내가 또한 너희 나라에 우리나라가 사용하는 붉은 옷과 붉은 기 수천 벌을 주고, 고구려 백제의 두 나라 군사가 올 때 이것을 벌려 세워 놓아라. 그리하면 저들은 이를 우리나라 군대로 여기고 반드시 모두 도주할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계책이다. 백제는 바다의 험한 요새를 믿고 병기를 수리하지 않은 채 남녀가 난잡하게 뒤섞여 놀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수십 수백 척의 배에 무장한 군사를 싣고 소리 없이 바다를 건너 바로 그 나라를 습격할 것이다. 너희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았다. 그렇기에 이웃 나라로부터 경멸을 당하고 있으며, 주인을 잃은 채 도적이 들끓고 있으니 편안한 시절이 없다. 내가 나의 친척 한 명을 보내 너희 나라의 임금을 삼겠다. 그러나 그가 혼자 임금 노릇을 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당연히 군사를 파견하여 보호하다가 너희 나라가 안정되면, 너희 나라에 맡겨 스스로 나라를 지키도록 할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 계책이다. 장차 어느 계책을 따르겠는지 그대는 잘 생각하여 보아라.” 使人但唯而無對.帝嘆其庸鄙,非乞師告急之才也. : 사신은 다만 “예”할 뿐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황제는 그의 사람됨이 용렬하여, 군사를 요청하고 급한 상황을 호소할 만한 인재가 못됨을 개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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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일련(一連)의 역사(歷史)이야기는,
『대륙조선(大陸朝鮮)을 파훼(破毁)하고, 반도조선(半島朝鮮)으로 만들어 놓은 자(者)들과 반도(半島)땅을 강대국(强大國)으로부터 할양(割讓)받은 일제(日帝)에 의해 고의적(故意的)으로 만들어 놓은 이야기로 밖에 볼 수 없다.』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창조(創造)된 역사이야기의 마력(魔力)은 21세기 작금(昨今)에도 그 위력(威力)은 여지(餘地)없이 반도(半島) 땅을 온통 뒤덮고 있다. 남북(南北)으로 분단(分斷), 그리고 전쟁(戰爭)과 하루도 끊일 날 없이 벌어지는 냉전(冷戰)과 전쟁(戰爭)공포(恐怖)!
국민(國民)들과의 소통(疏通)부재(不在), 지역 간의 바보스러운 갈등(葛藤)과 지울 수 없는 상처(傷處), 그리고 어리석기 한이 없는 좌우(左右)의 싸움..........이것들은 모두가 그들이 우리에게 남겨주고 간 것이다. 이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반도(半島)!!!!!!!!!!!!!!!!!!!!!언제까지 이러고만 있을 건가?
2013년 04월 07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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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도성(都城)을 떠나 서행(西幸), 즉 서쪽으로 어가(御駕)가 떠났다. 이기록은 사실일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조선의 도읍지 한양에서 평양까지는 횡축선상으로 되어있다는 기록도 있으니까요. 고려때나 또는 그 이전의 왕조 또한 거의 같은방향으로 되어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있는 한반도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위설정입니다. 기록자가 바보가 아닌 이상 동과서를 구분 못하겠습니까? 좁은 땅덩어리에 역사를 꾸겨 넣을려니 과거 횡으로 있었던 중요지명을 지형에 맞게 남과북으로 맞추었겠죠. 그러나 좀더 상상력을 발휘해보면 재미있는점이 발견됩니다. 현재 남과 북 수직개념을 서쪽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바라보면
서울에서 개성,평양,의주까지는 횡축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바로 압록강이 나오죠. 중국고지도를 참고해보면 "트루판"이 있는데 그곳에서 "쿠차"까지는 횡으로 연결됩니다. 또 기록에서 보면 북경이 있는곳은 각산이 동에서 서로 병풍처럼 둘러쳐있어서 천하의 진산이면서 황궁을 외적으로부터 막아주고 있다 합니다. 바로 그런곳이 "트루판"에서 "쿠차"까지 위에 위 길게 이어졌는 산이 정말 있습니다. 대륙에서 동서남북 다 찾아봐도 이런곳이 없습니다. 사견입니다만 트루판이 바로 한양이라고 판단되고요, 또한 사진자료에서 트루판 즉 북경을 보면 많은 천축기구들이 있는데 이것이 조선의것이 아니면 청나라것이겠습니까?
트루판이 북경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당나라 때 이곳은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북경은 그곳으로부터 더 서쪽으로 서진해야 될 것 같습니다. 또 한양이 현 신강성지방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지형지리와 기후때문입니다. 청나라가 강성해졌을 때, 조선의 영토는 신강성 일부를 뺏기고, 청해 주위까지 퇴각했다고 보아집니다. 이는 사대부들이 기록한 곳에서 발견이 됩니다. 신강지방에 대한 "여러 원전과 근세기 기록물들을 계속 보면서 탐구"하고 있으나, 그곳의 기후와 특이지형이 문제가 됩니다. 이곳의 지세는 하루아침에 형성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