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탓일까.
박래여
참 맑다. 햇살이 퍼지는 마당의 토끼풀꽃도 숲에 반짝이는 푸른 잎도 싱그럽다. 삽짝 입구의 둔덕을 채운 찔레덤불은 화려한 꽃 이불을 덮었다. 청초하고 맑은 흰 꽃들 세상이지 숭덩숭덩 떨어져 누운 불두화 꽃송이는 애처롭다. 불두화도 동백꽃처럼 송이 째 뚝뚝 떨어진다. 바닥을 하얗게 덮은 꽃송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사람도 저렇게 활짝 피었다 속절없이 떨어질 때가 있다.
문득 수영장에만 가면 형님아우 하며 반기던 아주머니를 떠올린다. 날마다 만나던 할머니가 근 한 달 째 안 보인다. 궁금하다. 아프신 것일까. 손자들 봐주러 가신 것일까. 요양원 가신 것일까. 코로나가 겁나서 못 오시는 것일까. 가능하면 손자들 봐주러 가서 잘 지냈으면 좋겠고 아니면 코로나바이러스가 겁나 수영장을 포기하고 계시면 좋겠다. 살아있다면 언젠가 만날 수 있으니까.
꿈을 꿨다. 뱀 꿈은 잘 안 꾸는데 검은 뱀이 우글거리는 꿈이었다. 가운데 한 녀석이 입을 쫙 벌리고 송곳니를 드러냈다. 검은 꽃 가운데 흰 꽃이 핀 것 같았다. 우글거리던 뱀이 스르륵 물러가고 꿈을 깼다. 흉몽일까. 길몽일까. 입 조심하라는 뜻이리라. 어쩌면 어제 설문조사 한 것이 걸려서 그런 꿈을 꾼 것 같기도 하다. 좋다. 나쁘다. 구분 짓는 문제의 설문 조사자가 바라는 답은 긍정적인 좋다가 아닐까. 나는 나쁘다. 에 표시했다. 막상 답을 해놓고 돌아보니 내게 불이익이 초래될 것 같다. 복을 주겠다는데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거나 진배없다.
또 하나 걸리는 문제는 나는 전업 작가일까. 촌부일까. 농사꾼 아낙으로 삼십 수년을 살아왔다. 올부터 농부는 자급자족할 만큼 농사를 짓는다. 덕분에 나는 농사꾼 아낙에서 탈락되었다. 기저질환자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농사꾼 아낙에 사표를 낸 상태다. 삼시세끼 챙기고 집안 일로 소일하며 내가 좋아하는 글 쓰고 책 읽는 것으로 하루해를 보낸다. 나는 전업 주부인가. 전업 작가인가. 아무래도 헷갈린다. 농부에게 물었다.
“전업 작가라면 글을 쓰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당신은 생계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아니잖아. 이제 농사일에도 손 뗐으니 여성농업인이라도 할 수도 없겠네. 전업주부도 위태롭고.”
정답이다. 대들 말은 없지만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글을 쓰니까 작가 맞고. 당신 뒷바라지하니까 여성농업인 맞고, 삼시세끼 챙기고 집안일 하니까 전업주부도 맞잖아.”
작가로서 원고료를 받으면 자존감은 살지만 원고료는 푼돈이다. 물론 내 통장에 들어오는 원고료는 생활비로 나간다. 쥐꼬리 만큼이지만 유용하다. 희한하게 아이들 공부시킬 때는 원고료 수입이 꽤 됐고 아이들 뒷바라지에 요긴하게 썼다. 농부가 농사꾼 사표를 내겠다고 선언한 후에 가끔 원고료 있는 원고 청탁이 들어온다. 앞으로는 전업 작가로 살면서 생활고를 해결하라는 신의 지시 아닐까. 꿈보다 해몽이다.
“당신은 그냥 글이나 쓰는 게 낫다.”
“그럼 앞으로는 어떤 설문 조사에도 전업 작가라고 표기해야 하나?”
전업 작가라. 부끄럽다. 과연 내가 전업 작가로서 내 몫을 해 낼까.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타고 난 재능대로 평생 글 쓰고 책 읽기를 놓지 못하고 살아왔고 살아갈 것임에는 틀림없다. 다른 재능을 계발할 나이도 능력도 없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책 읽기와 글쓰기다. 노안으로 책 읽기도 힘들지만 눈이 글자에 맞추어주니 고맙다. 눈이 보이는 한 독서는 꾸준하겠지.
가끔 눈이 피로해서 감고 있을 때면 주제 사마라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떠올린다. 눈을 뜨고도 사물의 핵심을 볼 수 없는데 눈을 감고 사물의 핵심을 볼 수 있기까지 얼마나 나를 단련해야 할까. 그의 책을 섭렵할 때만 해도 정신은 젊었지 싶다. 그의 작품에 반하여 <눈뜬 자들의 도시>, <수도원 비망록>, <도풀갱어> 등, 닥치는 대로 찾아 읽을 때만 해도 잠자는 것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지금 나는 어떤가. 마음 다스리기 좋은 책을 재탕 삼 탕 하고 있다. 법정 스님의 책들, 아잔브라흐마의 책들, 다니엘 고툴립의 책, 에크하르트 툴레의 책, 데이비드 호킨스의 책 등, 내가 힘들 때 나를 다스려준 책들을 꺼내 아무페이지나 펴서 읽는다. 이상하게 소설집은 잘 잡히지 않는다. 나를 잠 못 들게 했던 소설책이 즐비한데도 소설보다 명상록에 마음 더 간다. 나이 탓일까.
참 맑다. 푸른 하늘, 서늘한 바람, 춤추는 나무들, 날벌레들의 날갯짓조차 눈이 부신 날이다. 빨랫줄에 앉은 딱새가 맑은 음색으로 운다.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도 겁내지 않는다. ‘이리와 봐.’ 창문을 열고 손을 내민다. 좁쌀 한 움큼으로 꼬여 볼까.
202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