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2.25일 단체사진을 찍기 위해 주촌리, 덕치리의 삼거리에서 모였다. 서울에서 온 산악회원들이 우리의 옆을 지나가는데 차림을 보니 역시 서울 깍쟁이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70대로 보이시는 분이 장비는 최신 장비 일색이다. 우리는 대전을 대표하는 바위산장팀.. 홧팅.. 전쟁에서도 장비보다는 정신력이 우선이란다. 대전의 저력을 보여주자.
삼거리에서 약 10분을 걸어가니 노치샘이 있다. 나는 물맛을 보았는데 젊은 해병보고 마셔보라고 하니 기겁한다. 하긴 나도 마시기엔 썩 개운치 않았다. 샘도 작고 깊이도 낮았으며 결정적으로 덮개도 부실하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바가지를 담갔을까.. 그리고 수질검사는 정기적으로 하는지. 하여튼 요즘 너무 알아서 탈이라고나 할까. 아마 한여름에 능선을 걷다가 식수가 없어서 타는 목마름에 시달리면 살모사 침도 마시지 않을까.
그런데 서울에서 오신 분들이 마을 뒤에 당산제를 지내는 곳에서 아침식사를 하는데 막걸리를 사려고 양조장을 찾는게 아닌가.. 아니 이 아침에 막걸리를 ..
나는 사실 소주를 못 마신다. 아니 약 2년동안 2병도 안마셨다. 반병은 회사 회식할 때 마셨고 한병 반은 1차 산행하고 바위산장에 놀러가서 대장님과 짚불 삼결살에 마셔봤다.
그러나 막걸리라면 전국 어디에 가도 꼭 마셔본다. 물맛이 좋으면 술맛이 좋고 술맛이 좋으면 인심이 좋고 인심이 좋으면 훌륭한 인물이 난다고 한다.
산의 정기는 물로 승화되어 나오고 사람의 정기는 피가 아니던가.. 나는 막걸리 예찬론자다.
그래서 막걸리 2병만 사려고 노치샘 위의 허름한 식당앞에서 두리번 거리는데 대장님께 딱 걸렸다. “어허, 이 아침에 막걸리 마시고 시작하시려고.. 나, ”아니오 사가지고 올라가서 마시려고요.“ 그런데 아뿔사, 주인아줌마 막걸리가 한병도 없단다. 아쉽지만 어쩔수 없지 뭐.
소나무, 아 조선인의 기상과 대한국인의 기개를 대변하는 소나무 가재마을 뒤에는 신령스런 소나무 4그루가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작은 소나무 한그루가 끼여 있어 5그루이며 바로 뒤에 조그만 소나무 2그루가 더 있어 총합이 7그루이다. 그런 좋은 소나무를 마을뒤에 가지고 있는 가재마을을 보니 새삼스레 마을의 전통과 역사가 느껴진다.
소나무를 뒤로 하고 수정봉을 향하는 능선은 약간 가파르다. 그러나 좌우 앞뒤로 소나무가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솔향에 취해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솔향에 휩싸여 삼림욕하는 기분으로 천천히 걷는데 갑자기 뒤에서 엄청난 소리가 들린다. 두두두두...
아니 이게 웬 소리.. 대낮에 뭔 일인가..
까꿍팀 후미팀이다. 선두에 가시는 분들이 너무 빨리 가셔서 빠른 걸음으로 가다 못해 뛰고 계신다. 안쓰럽다. 배낭 메고 산악구보 해본 사람은 안다. 그게 얼마다 힘든 일인지. 나도 포항에서 훈련 받을 때 완전무장하고 많이 뛰어 봤다. 특히 해병대 혼이 담겨있다는 천자봉을 향하여 올라가는데 계곡에 신라시대에 창건된‘오어사“라는 유서 깊은 절이 있다.
가을에 불공 들이러 오신 분들이 너무 많아서 훈련 받을때 절 앞으로 지나가지 못하고 절 앞 계곡에서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물을 헤치며 뛰는데 잘 못 뛰는 해병들은 밟혔다. 워카발로.. 강아지도 아닌데.. 계곡물 좀 꽤 마셨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수많은 민간인들 그중에서도 나이 드신 어머니들은 우리가 밟히는 것을 보고 아들 생각하시면서 울었다. 우리 아들도 군대갔는데 하시면서..
그런데 대단하시다. 그 힘든 산악구보를 백두대간에서 볼 줄이야 . 대단한 체력과 관절의 소유자이시다. 부럽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약 1시간을 오르니 수정봉이다. 소나무에 수정봉이라 코팅해 놓은 표식이 없었다면 대다수의 대간꾼들은 모르고 지나쳤을 것 같다. 능선을 따라 걷는데 기분이 너무 상쾌하다. 맞은편 바래봉과 세걸산 사면에 아직도 녹지 않은 눈 때문에 바람도 한겨울 눈바람이다. 삼림욕을 하면서 더우면 지리산 줄기의 겨울 바람으로 땀을 식히고 정말 호사다운 호사를 누리며 걷는다.
계속되는 소나무 군락을 따라 30분 정도를 걸으니 입망치다. 치 이름이 왜 입망치일까 아이들이 잘 가지고 노는 뿅망치도 아니고..입망치 오른쪽 사면에는 생강나무 군락과 행정제라는 저수지가 있다. 고도가 꽤 되는데 저수지가 있는 것을 보니 저수원으로 상당히 중요한 곳인가 보다. 입망치에서 한 40분을 갔나. 대간길이 약간 헷갈린다. 표식은 계속해서 있는데 임도와 길이 엇갈리면서 조심하면서 지나간다.
그때 땀으로 절은 우리팀의 두분.. 보기에도 안스러울 정도로 두꺼운 고어텍스 잠바와 윈드스토퍼 잠바를 입고 계신다. 알바.. 대간하면서 처음보는 알바다. 약 15분 알바 하셨다는데 거의 눈동자 풀리기 일보 직전이다. 우리와 보조를 맞추면서 천천히 가신다. 계속해서 내려가는 길인데 누군가 여원재 약간 못가서 대간길에 차를 세워 놓았다. 몇사람이 서서 웅성거린다. 알고 보니 차주인이 연락처도 없이 도로에 차를 방치했단다. 지나가야 하는데 미치겠다는 표정이다.
여원재에 도달하여 컵라면 생각이 났다. 젊은 해병이 마을에 가서 사오겠단다. 나, “그래 잘 다녀와라.” 기다리는데 얼마 후 실망한 표정의 젊은 해병 “이 동네에는 가게가 없다는데요.”. 어쩔수 없이 그냥 먹기로 하는데 오른쪽을 보니 양지바른 곳에 묘가 하나 있다. 점심 식사하기에는 최적지 이다.
점심을 먹는데 까꿍팀 선두대장님 묘 옆으로 지나가신다. 아니 분명히 우리보다 먼저 지나간 줄 아는데 뒤에서 오다니.. 나,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대장님 왈,”우리는 다른 산 보고 왔어요.“ 문득 알바를 의심해 했지만 내가 누군가. 신의로 뭉쳐진 사람 아닌가. 그냥 믿자.
날씨도 너무 좋고 장소도 훌륭해서 거듭 젊은 해병과 감탄하는데 여원재는 우리민족의 비극을 안고 있는 곳이다. 갑오동학농민전쟁때 김개남 동학접주가 1만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경상도를 바라며 운봉으로 진출하려다가 일목장군이라 불린 박문달이 5천여명으로 저지한 곳이다. 그리하여 동학군이 충청 일부와 호남에서만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반봉건, 반외세, 민족자주를 외치고 탐관오리를 처단하고 부패한 중앙정부를 전복하고자 했던 농민군들이 기존 수구세력과 일본제국주의 군대만 없었다면 새 세상을 열었을텐테.. 하는 생각이 든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생가가 있는 정읍 황토현에 가면 죽음을 각오하고 낫과 곡괭이를 들고 전선으로 가는 농민군들이 약간을 가볍게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그 조각상을 친일파가 만든 것이라 한다. 아차 백두대간 하면서 웬 친일파..
점심을 먹고 여원재에서 다시 대간길에 들어선다. 대간길은 그 모습를 잠시 숨기고 마을의 낮은 산과 밭뚝 사이로 지나간다. 장교리 마을앞을 지날때 밭 옆에 묘가 하나 있는데 누워 계신 그분 사람구경은 실컷 하셨다 못해 후손들에게 이장을 요구 하셨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다.
25분쯤 지나 다시 소나무 능선길인데 젊은 해병과 이야기를 하며 지나가는데 갑자기 앞에서 처음 뵙는 두분(서울에서 오신 다른 대간종주팀) 불쑥 나타나신다. “이길은 대간길이 아닌데요. 아니 우리가 그럼 알바를..” 뒤로 돌아 5분 정도를 가니 우리보다 점심을 늦게 하시던 김대장님, 까꿍팀 선두팀 벌써 우리를 앞질렀다. 내리막길로 가야 하는데 소나무가 너무 좋아 그냥 능선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조금 가니 다리가 약간은 불안정한 언니 한분 힘들게 오르고 계신다 나, 짖궂게 묻는다. “힘들어 보이시는데 중간에 어디 다녀 오셨어요.” 그분, “약 30분동안 알바 했어요.” 아까 나이드신 형님들 15분 알바하고도 이 서늘한 날씨에 속옷깨나 적셨는데 30분 알바 했으면.. 휴, 상상에 맡기자.
고남산은 846m 밖에 되지 않지만 오르는 길은 만만치 않다. 그리고 어제 강원도 발왕산을 다녀오신 이몸 아닌가. 거기서 등산로를 잘 못타서 얼마나 알바를 했던가. 같이 간 가이드도 나중에야 알바한줄 알았으니 참..
높이를 보니 “어휴 도저히 안되겠다. 간식먹고 올라가자.” 마침 의자 같은 모양의 소나무가 있어 젊은 해병과 앉아서 간식을 먹고 있으니 배낭은 차에다 두고 식수만 들고 산행하시는 분들이 지나가시는데 부럽다. 우리도 그냥 물만 들고 올걸.. 젊은 해병에게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고남산 오르는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젊은 해병의 표현을 빌리자면 낚시찌 같다고 했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서 그게 무슨 뜻 인줄도 몰랐다. 몇 번을 생각해 보니 고기가 물으면 낚시찌가 위아래, 좌우로 흔들리는데 그 표현이었다. 젊은 해병도 술을 마셔 몸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고 했다. 암벽을 타고 올라보니 좌로 남원시 산동면과 우로 운봉읍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경치를 보니 약간 피로도가 가시는 것 같다.
정상에 오르니 산불 감시초소는 9부 능선쯤에 있고 아저씨 혼자서 망원경을 목에 메고 계시면서 사주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공무원 이신데 교대로 산불감시를 하신단다. 나, “아저씨 같으신 분이 민족의 애국자이십니다.” 고 했더니 흐뭇한 표정이 역력하시다.
매요리가 어디냐고 물으니 멀리 보이는 빨간 지붕과 저수지 보이냐고 하신다. 거기가 매요리라고 하신다. 거기 가면 막걸리가 아주 좋으니 반드시 마시고 가라신다.
다시 힘을 내어 내리막길에 들어섰는데 땅이 녹아서 그런지 한국통신 중계탑을 돌아 내려가는 길은 엄청 질척거려 넘어지면 충청도 양반 체면 다 구겨지게 생겼다. 임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포정된 아스팔트길이다. 몇구비를 돌아 내려가 다시 솔나무 숲으로 들어간다.
오늘 소나무가 많다더니 많은게 아니고 솔나무 바다구나.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지도를 보고 30분 정도를 남기고 젊은해병과 커피를 한잔하는데 한분이서 한손에는 물병 한병 들고 다른 손에는 비닐봉지를 들고 계시는데 쓰레기를 주우시는 모습이다. 그 모습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커피한잔을 타드리고 같이 매요리 마을 회관까지 내려 왔다. 회관 앞 수도에서 세수하고 무릎에 냉수 찜질을 하니 지나온 길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그리고 회관 앞에서 막걸리 한잔 두잔 마시다 보니 세병 정도였던 것이 한병 밖에 안 남았다. 젊은 언니 한분 “원래 늦게 내려오면 막걸리 없는거야. 마시자, 다 마셔야 해,” 그래서 같이 다 마셔 버렸다. 아 가슴까지 시원하고 하루의 노독을 달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그때 막걸리가 없는 것을 보고 우리의 “산에가자님” 오늘 일등하신 기념으로 구멍가게 가서 지리산 운봉 생 막걸리를 몇 병 사오신다. 땡큐, 써, 8차팀의 분위기 맨, ‘산에가자님’
후미팀 내려오고 하산주 한잔씩 한 후 모두 모여서 천천히 걷는다. 교회를 돌때 ‘산에가자님’이 젊은 해병과 기념사진을 찍어 주셨다(해병대 출신의 의좋은 선후배, 끝까지 함께 해주시길..이란 좋은 말씀까지) 8차 종주대 회원 모두가 유치 목재소까지 갔다. 김대장님이 다음 산행의 들머리란다. 소나무 삼림욕, 겨울 바람에 풍욕으로 몸과 마음 모두가 맑아진 하루다.
첫댓글 훌륭한 산행후기 잘 보았습니다, 소설책 한권 읽는것보다 더 재미있네, 감사드립니다.
와우~~~굉장한데요? 또 밤을 샜겠구먼....잘읽고 갑니다..글을 읽으면서 그날 그산행...을 떠올릴수있었습니다.. 우리팀도 그날 알바했는디이..
하도 바빠서 이제 읽었네. 역쉬 끝내 주누만. 잘 보관했다가 백두대간 끝나고 책한권 내야쥐~ 꼬박꼬박 잘 써 야돼!
요즘 근력운동 하시느라 힘드실 텐데.. 대단 하십니닷. 오늘 흘린 땀 한방울이 곧 탈진을 막는 길입니다. 화이팅!!
잘 보앗습니다...
고생많으셨네요....